김용태 전 민예총 이사장 회고록

1970~80년대 작가·예술기자로
6월항쟁 도화선 ‘반고문’전 등
독재 저항하는 예술활동 펼쳐
암투병에 후배들 책 내고 전시회
“형 덕분에 민중미술 뿌리내려”

 

 

 


“산포도 익어 가는/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 떠날 때 소매 잡고/ 뒤따라서던/ 흙묻은 그 가슴에/ 순정을 남긴/ 산포도 첫사랑을/ 내 못잊겠네.”
이론 싸움으로 분위기가 싸해지면 그는 18번노래 <산포도 처녀>를 불렀다. 자리는 금세 무마되고 흥이 달아올랐다. 술이 바닥나면 뒤늦게 합류하는 후배한테 전화를 걸어 “야, 소주 100병만 갖고 온나”고 소리쳤다. 백기완 선생조차도 그를 ‘용태 형’이라고 부르고, 여의도 정치인 가운데 그로부터 차비로 만원권 한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간첩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는 민중미술계의 일꾼이자 문화계의 마당발이었다. 


 <산포도 사랑, 용태 형>(현실문화 펴냄)
 
민미협, 그림마당 민, 민예총 결성과 운영에 신명을 다 바친 김용태(68) 전 민예총 이사장을 위한 회고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현실문화 펴냄)이 나왔다. 강연균, 김윤수, 김정헌, 민정기, 박진화, 백기완, 성완경, 신경림, 염무웅, 유홍준, 임옥상 등 민중미술 계통의 내로라는 인사 45명이 인간 김용태와 그가 헤쳐온 지난한 시절에 얽힌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보름을 원고마감 시한으로 했는데, 한사람도 늦지 않고 칼 같이 글품을 보탰다고 한다. 1980~90년대 민중미술 그림쟁이 43명은 가나아트센터에서 여는 <함께 가는 길>(26일~30일) 전시회에 작품 한점씩 추렴했다. 모두 ‘용태 형’한테 빚을 진 사람들이다.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되어 살아있는 이를 위한 회고집을 내고 민중미술 그림쟁이들의 전시회를 여는 것은 ‘용태 형’이 몸져 누워있기 때문이다. 병상에 누운 그를 위한 울력이자 뿔뿔이 흩어진 옛 전사들의 다짐이다. 3년 전 위암 절제수술을 받았지만 지난해 여름 간암으로 전이돼 1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진단을 받은 그는 얼마 전부터 병원 치료를 마다고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유신의 끝자락 1979년에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고 1985년 민미협을 만들고 1986년 그림마당 민을 만들고 1987년 국본에 동참하고 그해 연말 대통령 선거판에서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의 비서실장을 맡고, 1988년 민예총을 만들어 독재가 횡행하던 시대와 타협없는 싸움의 머리에 섰다. 1987년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었을 때 그림마당 민에서 ‘반 고문’전을 열어 6월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이도 그였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미술인들이 반대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그가 간여하였다.
그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작가로서뿐 아닐가 예술 관련 잡지사 기자 또는 편집주간으로 활동하였다. <서울아트가이드>와 유사한 정보지인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진학> <디자인> <미술과생활> 등이 그의 주무대였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은 . 동두천 기지촌에서 기지촌 여성들과 미군병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들을 모아 대형 DMZ 글자를 만든 것이다. 미8군 영내에서 전시되면서 고위 미군장성이 노발대발하였다는 그 작품이다. 수상한 세월은 민중미술작가 김용태를 문화운동가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17일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열린 회고집 간담회에 정작 그 ‘용태 형’은 건강 탓에 참석할 수 없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용태 형은 친화력이 뛰어나 모든 사람들과 격의없이 지낼 수 있었어요. 그런 탓에 민중미술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지요. 입으로만 운동을 하거나 먹물냄새를 피는 사람한테는 ‘마, 챠라’ 하면서 여지없이 술 주전자를 날렸어요”라고 말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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