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에는 쪽방 사는 빈민들이 힘들지만 날씨가 추워지면 노숙인이 버텨내기 힘들다.

 

 노숙인종합지원센터보호시설을 비롯하여 서울역 인근에 응급 잠자리 65개를 준비하는 등

서울시의 대처로 예년에 비해 추위에 노출된 노숙인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해 시설 입소를 거부하는 노숙인은 어쩔 수 없다.

 

며칠 전에는 눈발이 간간이 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서울역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노숙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집중적으로 모여 있던 지하도는 단속이 심해 그런지 비둘기 한 마리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양지바른 다시서기건물 벽에 서너 명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외국인 한 사람이 침낭을 몇 개 가져와 나누어 주었다.

 

다시 동자동으로 건너와 새꿈공원에 갔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공원에도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공원입구에 처음 보는 노숙인이 찬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좀 있으니, 지나가던 선교사가 이대로 자면 얼어 죽는다며 깨웠다.

춘천에서 왔다는데, 넘어졌는지 얼굴에 피멍이 들어있었고 술도 좀 마신 것 같았다.

덮고 있는 외투를 들치니 내복을 입지 않아 양팔이 그대로 노출된 체, 찬 바닥에 누워있었다.

선교사가 가까운 여인숙에 방 하나 얻어 주겠다며 끌었지만 한사코 사양했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방에 왜 갇히고 싶겠는가?

눈치 챘는지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선교사는 가버렸다.

알콜 중독자의 구걸 속성을 아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가끔 베푸는 경우가 있다.

주면 안 된다지만, 당장 돈이 절실한데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구걸할 수 없으니 그 짓을 하는 것이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피차 마음 편한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몇 푼 되지 않지만, 꼬깃 꼬깃 접어 손에 끼어주니 움켜잡았다.

부디 부디 찬 바닥에서 일으나 무탈하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간밤은 얼마나 추웠는지 방안에 한기가 돌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잤더니, 아침에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몇 년 전에도 그런 증상이 생겨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또 도진 것 같았다.

방바닥에 오래 앉아 생긴 병이라 겁이 덜컥 났다.

그 당시 고맙게도 안애경씨가 쪽 침대를 책상 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준적도 있었다.

방이 코 구멍 만해 책상 앞에 앉으면 요지부동이지만, 그래도 한결 나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방문 앞에 없던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안 그래도 배가고파 라면 끓여 먹으려고 일어났는데,

고맙게도 누가 소리도 없이 이렇게 살짝 갖다 놓았을까?

아마 산타 할아버지가 코로나 격리에 걸려 늦게 오신 것 같았다.

밥에 온기가 남은 걸 보니, 가신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허리는 펴지 못하지만, 산타 덕분에 거룩한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나 허리 아프다고 누워 있을 수만 없었다.

움직여야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4층에서 완전 똥 싼 폼으로 내려왔는데,

공원에는 날씨가 추워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공터에 노숙하던 병학이는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울역광장의 선별검사소에 코로나 검사 받으러 갔다.

며칠 전에 가보니, 확진자가 생겼는지 검사 받은 사람도

시일이 지나면 다시 받아야 다시서기 쉼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나 자신도 불안했다. 며칠 전 노숙자들과 인터뷰한다고

마스크 내린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씻고 벗고 하나 뿐인 손녀 오겠다는 전화도 받지 않겠는가?

 

서울역광장 선별검사소에는 날씨가 추워 그런지 검사받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에는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간단히 해결했다.

면봉으로 코구멍을 쑤셔대면 기분은 더럽지만, 어쩌겠나?

나도 살아야하지만, 민폐 끼쳐서야 되겠는가?

 

다시서기 쉼터에 들어 가보니 노숙자보다 도우미가 더 많았다.

한 쪽 구석에는 네 사람이 누워 자고, 의자에는 한 사람이 축 쳐져 자고 있었다.

그래도 먹고 살라고 컵라면 몇 개 담긴 봉지를 발로 감싸고 자더라.

간밤의 매서운 추위에 어찌 잠들 수 있었겠는가?

 

요즘은 티브이도 안 틀어주고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온기만 준다.

모이게 할 수 없으니, 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서기 건물 벽에 누군가 웅크려 자고 있었다.

온몸을 똘똘 말아 사람인지 짐인지 헷갈렸는데, 햇살도 그를 비켜가고 있었다.

단잠의 포근함도 결코 오래 주지 않았다.

 

한쪽 벽에 웅크려 선 노숙자에게 말 걸었다.

담뱃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 줄테니, 당신 살아온 이바구 좀 해줄라요?”

얼씨구나 달라붙었다. 

이 동네서 인터뷰라는 말을 하면 손 내 젖는 사람이 많다.

말 못할 사연에 숨어 다니거나 아니면 내가 기레기나 사기꾼으로 보이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노숙하는 김씨는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자랐단다.

꿈이나 희망은 물론 좆도 씹도 모르고, 짐승도 그렇게 비참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강원도 골짜기 고아원인지 수용소인지 헷갈리는 곳에서

아무것도 배우지도 못하고 매만 맞고 자랐단다.

 

열아홉 살에 도망쳐 나와 30여년을 떠돈 삶은 이빨 빠진 들개의 삶이었다.

배도 탄 덕에 주소지는 부산으로 되어 있어나

가는 곳이 그의 집이고 주소고 빌어먹는 자리였다.

세상에서 더럽다고 피하는 일들만 골라 한 것 같았다.

한 때는 목포 염전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적도 있단다.

 

요즘은 어려운 기 뭐요?’ 라고 물었더니, 자기 입은 옷을 가르켰다.

얼마 전 자선단체에서 노숙인들에게 두툼한 외투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포장을 멋지게 해 놓아 거지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멀쩡한 놈에게 누가 적선하고 싶겠는가?

옷 속에 감추어 둔 암행어사 패말 같은 걸 보여주는데, 잘 아는 팻말이었다.

마스크에 가려 몰랐는데, 그 고아가 감투가 된 팻말에 알아보았다.

강명자표 인터뷰 사례비인 신사임당 한 장을 주었더니, 몸 깊이 감추기 바빴다.

 

그런데, 돌아오다 귀가 막힌 걸 보았다.

서울역 광장 돌아가는 코너에다 앉아 쉬라고 돌 턱을 만들어 놓았는데,

앉지 말라고 그 위에 강력본드 같은 것으로  돌맹이를 짖 이겨 놓았다.

그곳에 노숙인들이 앉아 있으면 그 옆 가게들이 장사 되겠는가?

저렇게 악착같이 돈 벌려고 못된 짓도 마다않는 세상에

그렇게 막 살고도 살아남은 게 용타싶다.

 

지하도를 내려가다 컵라면 하나만 사달라는 이씨를 만났다.

밥 사먹을 돈을 주겠다며 근황부터 물어 보았다.

바닥에 깔고 잘라니까 누가 박스를 가져가 막막하단다.

거리를 떠돈 지는 삼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셋방 살 때도 별 다를 바 없었단다.

불장난에 잘 못 꼬여 인생 망친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그가 인생 막장을 걷게 된 천형의 죄는 바로 게으름이었다.

환갑이 가깝도록 여자 한번 품어보지 못했다는 말도

결국 게을러서 용쓰기 싫었던 것 같았다.

 

인생 막장의 김용환, 이정희 두 전사의 이름을 여기 새긴다.

 

사진, / 조문호

 

 




길 잃은 자 몰려드는 곳이 서울역이다.
오 갈 데 없는 방랑자의 종착역이다.






가진 것이 없으니 욕심이 없고,
희망이 없으니 일하지 않는다.
더러는 빈자의 자부심을 위안 삼는다.





육신은 무너졌고, 정신은 황폐하다.
천국의 복음보다 컵라면 한 그릇을 믿으며,
막걸리로 시름 달랜다.






이젠, 지하도에 자리 깔면 끌려 나온다.
야생의 삶이 서서히 길들어 간다.






온 종일 ‘다시서기’에서 티브이보다,
밥 때 되면 줄 서서 밥 타먹고,
밤 되면 합숙소에서 잔다.


“바르게 살자” 새마을 구호처럼...






굴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도 있다.
끝까지 바람찬 광장에서 버틴다.
파지박스를 벽 삼아 두더지처럼 잔다.






왜 추운데서 개고생 하는가?
“길들기 싫은 노숙자의 자존심이다.”


세상을 원망하며 죽음을 재촉한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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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초 부터 잃어버린 카메라 찾으러 서울역 주변을 맴돌았으나, 허탕 쳤다.
카메라 가져간 노숙인 이종민씨는 물론이고, 같이 술 마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숙대입구나 영등포 등 다른 지역으로 옮긴 모양인데,
일단 카메라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지난 3일에는 서울역 광장에서 술 마시는 노숙인은 아무도 없었고,
지하도에서 마시는 몇 명 밖에 만날 수 없었는데, 다 어디 갔을까?

추운 날씨인데다, 저녁식사 후라 따뜻한 곳에서 잠시 쉬는 듯 했다.






서울역2번 출구 옆에 있는 '다시서기 상담센터'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60여명의 노숙인들이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공부를 하거나 핸드폰을 충전하기도 했지만, 이종민은 없었다. 






우체국 앞 지하보도의 응급대피소 앞에는 오후7시의 입실시간을 기다리는
노숙인들이 이십여 명 서성이고 있었고,
지하보도 입구에는 노숙인들의 짐 보따리가 여기 저기 쌓여 있었다.
응급대피 숙소에는 일인용 전기장판 하나로 잘 수 있는 구역을 정해 놓아
많은 짐은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철만 문을 여는 이 응급대피소는 112명이 잠잘 수 있는 숙소가 마련되어 있고,
숙대입구역 1번 출구에 있는 '다시서기 보호센터'는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지만,
그 곳에 가지 않고 거리를 방황하는 홈리스는 대개가 알콜 중독자들이다.
그곳은 술을 마실 수도 없지만, 많이 취해도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같이 추운 날씨에 술 취해 거리에서 자다보면 동사하기 십상인지라,
그들을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게 할 대책마련이 절실했다.
그 대책이란 것이 병원에 강제 수용하는 방법이겠으나,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그마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하루 종일 술에 취해 있는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죽음을 방임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다.
노숙인 뿐만 아니라 쪽방 사는 빈민들도 알콜 중독자가 점차 늘어나는 것은
삶에 대한 희망도, 삶에 대한 낙도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술을 끊는 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도가 지나친 알콜 중독자를 병원에 강제 수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빠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사진, 글 / 조문호



'다시서기 상담센터'에서 잠시 몸을 녹이는 노숙인














한 해를 보내는 지난 31일은 왠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몇 날을 송년회 핑계대고 퍼 마셨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종각 타종행사 같은 곳에 갈 수는 없잖아.

마침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연락이 왔다.
낙원상가 밑의 ‘다리 밑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관우선생 단골집이지만, 좁아도 술집 분위기가 꽤 괜찮다.
마치 어린 시절 짚동 사이에 들어가 놀던 틈바구니 생각도 나지만,
집 이름이 너무 야하지 않은가?

인사동에 나가보니 낙원상가 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몇 사람이나 넘어졌다.
연탄재라도 좀 뿌려야 했으나 요즘은 연탄재도 흔치 않다.
그런데, ‘다리밑 집’에 문이 잠겨 있었다.
연락했더니, ‘낙원아구찜’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관우선생을 비롯하여 송재엽씨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미녀가 두분이나 있었다.
관우선생이 도예가와 큐레이터라고 소개했는데, 큐레이터라는 여인의 얼굴을 보니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사슴 눈처럼 큰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애잔함이 가득한데,
약간 도툼한 입술은 모든 기를 다 빨아들일 것 같은 강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눈치 챈 송재엽씨가 얼른 자리를 바꾸었다.
이런 저런 씨잘데 없는 이야기 나누며, 소주로 한 해의 여독을 씻었다.

이차로 다른 곳에 간다지만, 난 서울역으로 가야 했다.
한 해를 보내는 즈음이라 노숙하는 친구들과 한 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사동 최고의 부자나 인생의 벼랑에 선 사람이나 술마시고 노는 건 별 다를 바 없다.
쪽방 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기초생활수급자라 사는데 별 걱정은 없지만,
노숙자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인간이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욕심 부릴 게 없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대로 나누어 먹는 그들이 진정 비운 자라는 생각도 한다.

패트 소주 두병과 육포하나를 사들고 서울역으로 같다.
개찰구를 나오니 지하도 한 쪽 구석에 낯 익은 자들이 보였다.
이종민, 김종학, 김상훈씨등 여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낄낄거리고 놀았다.
총무를 맡고 있다는 김종학은 ‘종학이를 아느냐?’며 계속 천원만 달랬다.
서울역에서 종학, 종철, 종민, ‘쓰리 종’을 모르면 간첩이라며 유세했다.

마침 세밑이라 그런지 온정을 나누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외국인 가족이 각기 봉투를 들고 왔는데, 그 안에는 빵 하나 우유 하나, 양말 한 컬레, 핫펙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난 고맙다며 사진까지 찍었으나, 다들 시큰둥했다.
술이 취해 했던 소리를 되풀이하거나 가끔은 금지된 노랫가락이 튀어 나오기도 했는데,
지나가는 역무원들이 제지시키며 나가라고 종용했다.
몸에 상처를 입은 동자동 최씨는 ‘다시서기’직원들이 휠체어로 실어갔다.

이종민이가 카메라를 달래서 주었더니, 이런 저런 모습을 찍어댔다.
마침 경찰의 강제 해산에 직면해 어지러운 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다들 선물이 담긴 봉지는 챙기지도 않은 채 그냥 두고 갔다.
그런데, 정리를 하고 나니, 종민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가져간 카메라는 5년 전에 삼십만원에 구입한 NIKON Coolpix P310으로 지금은 단종 된 카메라다.
술자리에서 마구 사용한 고물이라 돈은 되지 않지만, 오늘 찍은 사진파일이 걱정되었다.
그 심장이 멎을 것 같았던 미인도 미인이지만, 같이 마신 친구들의 초상사진도 많았다.

다른 역으로 옮긴다면 모르겠으나, 서울역에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다.
한편으로 배신감도 일었으나, 아무래도 물욕은 아닌 것 같았다.
나에겐 소중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쓰레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분명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더 가까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라는 듯...
그들 무리에 합류하고 싶으나, 추위가 두려워 탐색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빼앗긴 무장해제 상태가 되니 지갑에 돈 떨어지듯.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기관총 급인 라이카를 챙기러 동자동 방으로 올라갔다.
이 카메라는 고향후배인 사진가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인데, 

좋기는 하지만 술자리나 현장에서 막 쓰기는 불편하다.
찍히는 사람들도 피해의식부터 느끼니, 큰 행사나 많은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카메라를 챙겨 서울역지하도로 내려갔으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새로 나타난 어느 노숙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 깔고 누워 있었다.


하는 수 없어, 해 바뀌는 시점에 함께 축배 들기로 약속한 녹번동 정영신씨를 찾아갔다.
오늘 일기장에 올릴 사진을 모두 잃어버렸다며, 내 얼굴 한 장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내 밀었다.
신년 인사를 겸한, 강한 의지가 담긴 그런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새해에는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되기를 기원합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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