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출판기념전은 많은 분의 성원에 힘 입어 잘 마쳤습니다.

 

장항선 장터 길에 함께해 주신 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정영신은 반평생을 장돌뱅이로 떠돌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코로나로 사람 접촉을 꺼리던 2년 전부터 혼자 열차를 타고

장항선 주변에 있는 충청도장을 떠돌았다.

 

무거운 카메라에 짓눌려 힘들게 장바닥을 휘젓고 다닌

그녀의 장터 순례길은 고향의 어머니 찾아가듯 즐거운 일이었다.

무슨 사명감 인양, 아무리 쪼들려도 장터 떠나는 늦추지 않았는데,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장바닥을 떠돌며 사람 만나 정 나누는 것은 좋으나,

무거운 물건까지 사 들고 올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파김치가 되어 오던 그 지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결국 그 일을 마무리하여 책까지 펴낸 것이다.

돈 한 푼 없어도, 저지르고 부딪히니 되긴 되더라.

 

사라져가는 오일장과 삭막해지는 인심을 안타까워 하지만,

이 세상 어느 하나 사라지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에겐 고향 같고 어머니 품속 같은 장터와 장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다.

장터보다 장터 사람에 대한 애착이 더 깊다.

 

어쩌면 어머니의 마음 같은 따뜻한 인간애를 찾아 장터를 헤맨 것인지 모른다.

그가 펴낸 ‘어머니의 땅’에 실린 사진과 초창기 장터 사진의 연대나 접근 방식이 같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래에 옮긴 이광수교수의 사진 비평도 궤를 같이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어떤 원형을 그리워하는 그리고 그것을 안타깝게 기록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근대주의의 휴머니즘의 세계에 뿌리내린 사진 세계다. 사라져버린 것을 애써 찾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변화한 모습, 그로 인해 사라져버린, 다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을 기록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려

것도 아니다. 변화에 방점이 있는 것보다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어머니의 심성을 찾는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원형을 찾으려 돌아다니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 보인다.

원형은 있다, 가야 할 곳도 있다, 그곳은 꿈과 신화 속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눈앞에 있다.

우리 마음의 고향, 뿌리 내리는 삶, 그 뿌리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이것이 정영신의 사진 철학이다.”

 

개막식과 전시 이튿날까지 다녀가신 분은 지난 25일 소개한 적이 있으나,

그 뒤부터 끝날 때까지의 사진은 힘들어 그대로 모아 두었다.

전시가 끝나고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기억이 가물거려 미치겠더라.

다행히 사진에 찍힌 정보가 있어 퍼즐 맞추듯 풀어냈다.

 

소식 또한 금방 나온 조간 신문이라 기 보다 늦은 주간지 정도로 알면 된다.

다녀가신 분이야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하겠지만,

아니어도 반가운 분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술 마시며 노는 것도 힘들었다.

평소 부러워했던 술 상무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셔 지쳐 있는 노숙인의 힘든 처지도 알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만 마셔도 쓰러진다.

 

연락부절로 화장실에 쫓겨 다니는데다, 속까지 뒤집혀 죽을 맛이었다.

걸어 다니는 송장에 가깝지만, 사람만 보면 반갑고 즐거웠다.

마치 저승에서 문상객 맞는 심정이라, 더 절절했다.

 

내가 만나지 못한 분만해도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박흥순, 양시영, 유준, 임동은, 박인식, 임홍택, 김홍성, 

김영진, 신길훈, 장종운, 백금옥, 이혜숙, 조시노, 음주애, 이완순, 최리나, 김효순, 이진홍, 한현주, 김애경,

김형배, 장석원, 곽숙경, 신혜선, 한선영, 홍경순, 김유나, 설인선, 이정숙, 김성은, 이용민, 김명점, 김혜영,

이영욱, 양한모, 한용길, 정태섭, 김지연, 김승준, 김혜원, 문 슬, 이기정, 전인경, 신영섭, 장소연, 임정희,

임연웅, 주강현, 이형순, 박범이, 채영임, 유형근, 박상희, 윤장섭, 김정락, 이수헌, 이홍순, 오리진, 김민형,

온세미, 송진욱, 유운선, 진 민, 김미숙, 박찬원, 김병구, 최상기, 송남양, 변성진, 권오창, 박재웅, 김형로,

장순향, 김영곤, 김용순, 고미정, 김백순, 김추윤, 이근정, 이우섭씨 등 헤아릴 수가 없다.

 

다들 뵙지 못해 죄송스럽다.

 

26일 오후에는 전태수씨가 오셨다는 전화를 받고 하던 일을 접어버렸다.

술시가 이르지만, ‘유목민’으로 옮겨 술 잔을 들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사진 했다는 오래된 이야기도 들었다.

 

27일엔 양재문, 남태영, 김녕만, 나종희, 이주영, 곽대원씨를 비롯하여

남기은씨 내외 분께서도 다녀 가셨다.

다음 달에 시집갈 조카 조은겸이는 남편과 시어머니 될 분까지 모셔 왔다.

 

뒤이어 김여옥 시인이 등장하자 인사동 건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승철 시인이 장경호, 양상용, 한상진, 최석태씨 등 화가를 대동하여 ‘시골해장국’으로 갔다.

 

김여옥시인이 인사동에서 ‘시인’이란 술집 차렸을 때는 인기 마담이었다,

숱한 세월이 흘러도 미색은 여전했다.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 준 것 만도 고마운데, 그 날 술값까지 그녀가 쏘았다.

 

그 다음 날은 김발렌티노를 비롯하여 정주영씨와 딸 김소연, 이성표 부부가 다녀갔다.

긴 세월 언론계에 몸 바친 윤상길씨는 ‘미술여행’ 편집위원들과 다녀가셨고,

사진가 이윤기, 임성호, 권양수, 김연지, 신영섭씨도 오셨다.

 

느지막에 손님 오셨다는 연락 받아 나가다, 길에서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다.

만난 지가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그 연세에 아직도 기타를 메고 다녔다.

대폿집에 모셔가 선생의 십팔 번 ‘부용산’이라도 한 곡 듣고 싶었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은 모처럼 손님 만나 술 마실 일이 없었는데,

운현선 기자가 다녀가며 와인 한 병을 선물로 두고 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전어 몇 마리 사서 정동지와 오붓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매일 같이 술 마시다 하루 쯤 쉴 만도 한데, 술을 두고 그냥 잘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술자리보다

마음 통하는 사람과 오붓한 술자리가 더 좋다.

 

술 마시며, 정동지의 다음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장보다 장꾼을 찾아 다니려면, 늦었지만 운전을 배우라고 했다.

내가 죽고 나면 시골 구석구석을 어떻게 찾아다닐 것인가?

 

걱정은 되지만, 억척같은 또순이라 충분히 해낼 것으로 믿는다.

31일은 손님 오셨다는 전화에 늦게 사 전시장에 갔다,

오랜만에 쓸쓸한 미소의 화백, 신학철선생을 만난 것이다.

 

장경호씨와 더불어 ‘부산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종률씨와 이선태씨도 있었다.

뒤따라 최석태씨까지 합류하여 오랜만에 동지애를 불태웠다.

 

헤어져 돌아가는 중에 ‘이모집’으로 오라는 전화가 다시 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는데, 가보니 좀 전에 헤어졌던 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준영, 정희성, 박철, 박불똥, 조경연씨 등 일개 소대가 모여 있었다.

이미 취한 상태라 무슨 주접을 떨었는지, 뒷일은 기억나지 않는 게 낫다.

 

9월1일은 부산의 이광수교주와 아산 ‘봄에실’ 농장 식구들이 온다 기에

일찍부터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가 차 문을 두드렸다.

농장 식구들이 주차하고 나오다 고물차를 알아본 것이다.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농장 식구들이 총출동했는데,

문단속은 잘했는지, 동물들 먹이는 어떻게 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들 전시장으로 갔는데, 모처럼 서울 나들이한 평이가 제일 신났다.

 

좀 있으니, 이광수교수가 나타났고 뒤따라 사진가 김문호씨도 왔다.

다들 술이 인사라 ‘부산식당’에서 낮술부터 마신 것이다.

인사동 점쟁이 신단수씨도 농장 식구를 데리고 그곳으로 식사하러 왔다.

 

그날은 충무로에서 양승우씨 전시가 열리는 날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광수 교수는 ‘갤러리브레송’에 가려고, 옆자리 밥값까지 내 버렸다.

늦을 세라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갤러리 문이 잠겨 있었다.

이교수가 김남진 관장에게 전화를 하니, 뒤풀이 집으로 오란다.

 

어이가 없었다. 나 같은 늙은이라면 모르겠으나, 부산에서 온 손님이 있지 않은가?

김문호씨 와는 다음에 볼 수도 있지만, 가야 할 이교수는 어쩌라고?

 

이건 갤러리를 운영하는 관장으로서 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지키게 해야지...

더구나 오랫동안 무보수로 이교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나?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뒤풀이 장소를 찾아갔는데,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이윤기, 이세연, 서준영, 나인석씨 등 일곱 명이 통닭집에 모여 있었다.

이교수의 호쾌한 구라에 마음을 다독였으나, 영 불편했다.

뒤늦게 ‘봄에실’ 농장 식구들과 함께 정동지도 도착했다.

이교수가 떠날 기차 시간까지 깨소금 안주로 독주를 마셨다.

 

9월3일은 전시장에 갔더니, 김명지, 서정란, 이은정, 전태수씨가 와 계셨다.

이은정, 전태수 내외분을 모시고 일찍부터 ‘유목민’에 술상 차렸다.

 

안주도 나오기 전에 여동생 조진옥과 매제 김종성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전시장에 갔더니, 여동생 외에도 이대훈, 노인자 내외 분을 비롯하여

 최명철, 박종면씨 등 많은 분이 계셨다.

 

삶의 풍경을 그리는 동생에게 장터 풍경은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매제는 동생이 공모전에서 상 받은 걸 자랑하지만, 상은 작업에 독이라며 일축했다.

 

여동생과 매제를 보낸 후, 이대훈씨 내외분을 ‘유목민’으로 모셔왔다.

전태수 내외 분과 합석하게 되었는데, 최명철, 신단수씨 일행은 입구에 자리 잡았다.

 

 술 잔 들기도 전에 또 다시 연극연출가 기국서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인덱스갤러리’를 못 찾아 수도약국 앞에서 헤맨단다.

 

예전에 인사동을 들락거린 분이라면 옛 ‘수희제‘ 3층이라면 금방 찾을 텐데,

’수희제‘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달려가야 했다.

 

기국서씨를 만나 전시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생각지도 못한 박진호씨가 나타났다.

 

야! 이게 얼마 만인가?

정동지 더러 이혼 설득할 때, 들러리 서 준지가 7년이 넘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동안 그대로였다.

 

약속이 있어 가야 한다는 박진호씨를 보내고, 기국서씨를 ’유목민‘으로 안내했다.

9월5일부터 9일까지 ’강북문화예술회관‘ 진달래 홀에서 열릴 ’관객모독‘ 공연 준비로 바쁘 단다.

바쁜 와중에도 들려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손님이 나뉘어 있으니,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찾아 주신 분께는 송구스럽지만,

운전하려면 차에서 눈 좀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전시 마지막 날은 ’유목민‘ 전활철씨가 술자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날이 생일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장어를 구워 몇 사람 초대했단다.

 생일이 페북에 뜨지 않도록 어렵사리 만들었고,

’봄에실‘농장에서 평이가 그토록 기다린다는 생일상도 한사코 거절했는데...

 

난, 내가 태어난 생일 자체가 싫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세상에 태어난 게 싫다.

지독히도 생일을 챙겼던 정동지마저 이젠 한풀 꺾였는데...

 

어쩔 수 없이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씨 외에도 방기식, 유 준씨 등 여러 명 와 있었다.

그날이 ’유목민‘ 휴일이라 오붓한 술자리가 되었는데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관장과 한지공예를 한다는 처음 보는 미녀도 있었다.

아무튼 불편한 생일상이지만, 배려해 주어 고맙다.

그 이튿날은 전시를 철수하기 위해 정오 무렵 나갔다.

철수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노인자씨도 와 계셨다.

서둘러 액자를 포장하여 차로 옮겼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부쩍 자동차 방전이 잦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벌어진다.

긴급출동은 왜 그리 오지 않는지, 가게 주인의 성화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어렵사리 시동을 걸어 인사동을 빠져나왔으나, 차가 밀려 꼼짝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광교사거리에서 벌인 노조법 개정 촉구 결의대회에 발목 잡힌 것이다.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데,

에어컨이 꺼지고 램프가 깜박이더니,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렸다.

 

아무래도 발전기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견인차를 불렀다.

그렇지만 차가 밀려 꼼짝 하지 않는 판에 견인차는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종로 한복판에 고장 난 차를 세워 두었으니, 운전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뜨거운 길바닥으로 내몰린 정동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하철 타고 먼저 가라며 보내긴 했으나, 꼬리 문 차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는 일을

한 시간은 족히 하고서야 견인차가 나타났다.

 

견인차에 끌려 역촌역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발전기가 수명을 다해 교체해야 한다는데, 발전기 교체 비용이 50만원이란다.

 

190만원짜리 고물차 수리비가 50만원이라면 폐차가 답이다.

그러나 잔뜩 실은 짐은 어떻게 할 것이며, 차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내 처지가 난감했다.

 

폐차할 고물차에 신품 발전기가 말이 되냐며 중고를 구해 달라고 하니,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이라 정품만 써야 한 단다.

그렇다면 견인차를 불러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중고를 알아본 후 교체해 주었다.

 

28만원으로 내려간 중고발전기를 구해 어렵사리 고쳤는데,

마침 중고 발전기 값 만큼의 현금이 주머니에 있었다.

엊저녁 활철씨가 생일축하금으로 준 20만원과

그날 노인자씨가 점심 식사 하라며 준 10만원이었다.

 

같이 식사하러 왔다가 차가 말썽을 부려 밥도 못 먹고 헤어졌지만,

어쩌면 수리비 액수까지 딱 맞추어 주고 가셨다. 언제나 절실한 것 만큼만 주는 돈과의 인연이다.

돈이란 빨리 돌아야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잠시도 머물 틈을 주지 않는다.

 

두 분 덕분에 자동차를 고쳐 사진액자를 안전하게 옮겼는데,

정동지는 오후 다섯 시까지 ‘금보성아트센터’로 가야 한 단다.

 

이번 전시에 금보성씨가 책을 40권 사 주었고, 창원의 조성제씨도 20권을 사 주었다.

덕분에 배당 받은 200권 목표량을 초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책을 그날 전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답례로 정영신의 ‘한국의장터’와 나의 ‘청량리588’ 사진집 두 권을 드렸는데,

오래전 588번 버스 타고 그곳을 지나다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국의 장터’ 사진집은 여러 가지 도울 수 있는 프로젝트가 많겠 단다.

그 자리에서 여기저기 전화 걸어 타진 해 주기도 했다.

금보성씨는 자신의 작업량도 엄청나지만,

힘들게 작업하는 주변 작가를 돕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는다.

 

마침 자기가 돕는 다른 작가들과 미팅이 있다며,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금보성씨 내외 분 따라 연희동 ‘고미정’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에 개인 그림전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과 사진가 이명호씨가 있었다.

 

‘고미정’ 음식들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었다.

덕분에 금보성씨로 부터 예술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듣는 좋은 시간이었다.

 

전시와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후련하다.

그동안 죽는 것도 전시 끝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며 버텼으나,

많은 분에게 신세만 져 어깨가 무겁다.

그 신세 갚는 길은 열심히 사는 것 밖에 없다.

 

정영신의 장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개막식 날 사진과 그 이튿날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93794923

 

 

 

한글의 조형미를 그림으로 형상화해 온 금보성 작가의 ‘한글문자’전이

지난 17일부터 인사 마루아트센터 5관에서 열리고 있다.

 

금보성은 문자와 회화의 결합으로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화가로,

30여 년 동안 74번의 개인전을 가진바 있다.

 

글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한글은 한국인의 생각이며 정신이다.

그는 글자 하나하나를 풀어 또 다른 세상을 일구는 것을 화업으로 삼은 작가다.

이번 전시에 30년 전 처음 시도한 한글 작업의 초상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한글 초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금보성의 한글 문자 작업이 기하학적 추상처럼 보이지만, 그와 의미가 다르다.

한글 문자화는 수학적인 환원이 아니라 역동적인 우주철학의 구현이다.

그리고 수학적인 차가운 기하학이 아니라, 신명난 놀이의 뜨거운 기하학이다.

 

그동안 필자가 본 작업만도 때로는 윷놀이가 된 것도 있고, 춤이 된 한글도 있었다.

의자 형태로 가족의 사랑을 나타내는가 하면, 테이프를 붙여 형상화하는 등 수를 헤아릴 수없다.

이번 전시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였던 종이 찢기 방법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문자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며 놀이 속에 감춰진 한글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한글 문자에 ’신 훈민정음 해독‘이라는 부재가 붙어있었다.

어린이처럼 한글 문법을 새로 배운다는, 또 다른 접근인 셈이다.

어린이들의 색종이 찢기를 캔버스에 그대로 옮겼는데. 실제 찢은 것처럼 입체감을 극대화했다.

 

우리 민족은 윷놀이나 탈춤, 강강술래 등 여러 형태의 ’놀이’를 즐겼다.

놀이는 ’신명‘을 바탕으로 고유의 해학을 창조한다.

김홍도의 풍자와 해학이 서양미술에서 찾아볼 수 없듯이, 결이 다른 미학 정신을 창출해 낸다.

 

금보성씨는 “한글은 내성적 자아에서 외향적 자아로 변환이 가능한 문자이기에 단어와 문장으로서 표현될 때

서양적 구조로 바뀐다. 상생의 소리 파장은 물질의 변화까지 에너지로 변환한다”고 말했다.

 

”한글의 내면에는 동양적 내적 기운과 서양적 외적 기운이 모여있으며, 이것이 바로 몸과 정신이다. 소리와 문자로 드러내는 한글은 감정이 전달되는 전류나 에너지로 바뀐다”며 그 뜻은 ㄱ 공의 공평/ ㄴ 나눔/ ㄷ 돕다/ ㅁ 마음/ ㅂ 빛.비움/ ㅅ 소유와 순종/ ㅇ 하늘.우주/ ㅈ 자유/ ㅊ 처음/ ㅋ 크다/ ㅌ 탄생/ ㅍ 평화/ ㅎ 하나. 크다 로 해석하였으며, 모음으로는 ㅡ : 땅(의ㅡ)대지.평등/ ㅣ : 인간(이ㅣ)서다 라고 해석했다.

 

한글에 대해 “자음과 모음이 하나가 되어 문자가 되어질 땐 새로운 기운과 파장이 형성된다.

 

최진석 평론가는 이번 작업에 대해 “금보성 작업은 두 개의 프로젝트에 호응한다. 첫번째는 한글의 중심에 존재하는 힘과 에너지를 드러내는 것이고, 두번째는 바로 어떻게 이 힘과 에너지가 한국인의 영혼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구성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며 “작가의 어떤 그림들은 강렬한 색의 기하학적인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풍부한 색채의 작은 사각형들로 이루어진 다른 회화작품들은 엄격히 기하학적인 모습이다. 추상적이면서도 동시에 견고한 형태를 표현해내기 위해 선과 글자는 서로서로 섞여든다. 여기서 우리는 금보성의 한글 문자 작업을 통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현대 미술의 원형을 지켜보는 예술적 흐름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한다.

 

전시가 29일까지라. 서둘러 관람할 것을 권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에서 시작된 개인전이 이번으로 70회를 맞은 금보성씨의 ‘한글민화 의자’전이

지난 1월26일부터 오는 2월 7일까지 인사동 ‘콩세유갤러리’에서 열린다.

 

금보성씨는 한글을 현대회화에 접목하여 다양한 작업을 해 왔다.

실험적 구상과 비구상, 설치와 조형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구분 없이 한글의 형상성을 줄기차게 추구해왔다.

 

이번에 내놓은 작품 역시 조선시대의 대표적 팝아트인

민화의 정신을 끌어들여 한글과 연계시킨 작업이다.

 

그는 일찍부터 시를 쓰다 글자에 색이 입혀진 모습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어 한글회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중견작가로 성장한 지금까지 왕성한 창작 욕구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인사동 ‘동원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고 한다.

그동안 관훈갤러리. 학고재. 리서울갤러리. 이노아트스페이스.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콩세유갤러리 등 곳곳에서 수 많은 전시를 열었는데,

올해 열게 된 70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37년이 걸렸단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설날에 선 보인 한글민화전은 효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민화는 그림을 통해 내면의 욕망을 이루려는 주술적 의미가 강하다.

재물과 부귀 그리고 자손 번영이 그 속내라면, 어쩌면 부적의 기능일수도 있겠다.

 

단순하게 민화적 이미지만 차용한 것이 아닌 시대적 정신을 이어받았는데,

그림을 통해 내면의 욕망을 이루려는 샤머니즘에 뿌리 두고 있다.

신분 상승이나 재물과 부귀 그리고 자손 번영이라는 주술적의미를 담았다.

 

흔한 의자를 통해 자기만의 효에 관한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다들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조그만 위안이라도 주고 싶은 것 같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의자라는 한자는 ‘기대할 의倚’와 ‘아들 자子’로

부모가 나이 들어 기댈 수 있는 곳이 자녀,  가족이라는 말이다.

의자의 다리가 자녀를 의미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일수도 있단다.

 

부디 기댈 곳 없는 민중에게도 좋은 위안의 전시가 되길 바란다.

 

전시 소식을 뒤늦게 알았지만, 하필이면 전시가 끝나는 날 리뷰를 올리게 되었다.

오늘(7일)까지만 열리니, 금보성의 ‘한글민화 의자’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이번 전시에 직 간접적으로 도움주신 분들 작업실을 방문했다.

사진이나 책을 택배로 보낼 수도 있으나, 인사드릴 겸 찾아 나선 것이다.

사전 연락도 없이 ‘금보성아트센터’ 금보성관장 부터 찾아갔다.

마침 2층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하던 일손을 멈추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차 한 잔 하는 자리에서 내년부터 처음처럼 다시 시작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글작업만이 아니라 갤러리 운영 등 모든 면에 반영한다는 것이다.

 

금보성씨는 하루에 세 시간 정도만 자고, 모든 시간을 작업에만 몰두한단다.

수면 시간이 부족해 차만 타면 잠에 빠져들 정도로 바쁘게 살지만,

곳곳의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작가들 격려하는데도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새해부터 금보성에 어떤 대변신이 일어날지 기대되었다.

 

그 다음 날은 과천에 있는 ‘진인진출판사’ 김태진대표를 만나러 갔다.

그 역시 사람이 방문한 것도 모른 채 일에 파 묻혀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가까운 식당부터 찾아갔다.

한 달 전에 따라가 본 적 있는 ‘풍경’이란 밥집인데, 유기농채소만 고집하는데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사무실에 다시 올라와 커피 한 잔하며, 내년에 출판할 인사동 사진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는 정기적으로 인사동을 찾아다니며 생각을 모울 작정이라고 했다.

나 역시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책이 되도록 출판사 의향을 따를 것이며,

출판사에서 편집방향을 정하게 되면 재촬영하더라도 그쪽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책을 만들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쓰레기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들어 김태진씨 모친이 편찮아 마음고생이 심하단다.

그 날 '진인진출판사'에서 발행한 도시문화연구서 ‘서울 산책’과

‘경복궁옆 송현동 살리기’ 책 두 권도 선물 받았다.

 

새해에는 ‘금보성아트센터’와 ‘진인진출판사’에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6일에는 인사동 거리에서 제법 긴 시간을 맴돌았다.

봐야 할 전시도 두 곳인데다 길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도 두 사람인데,

서로 만나기로 한 시간조차 달랐다.

 

인사동 사진은 거리를 지나치며 찍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지만,

이번에는 한 시간 넘게 거리를 방황했더니 다리가 아팠다.

기다리는 동안 전시라도 둘러 보았으면 좋으련만

정영신씨와 같이 보기로 해 먼저 볼 수도 없었다.

 

거리는 구정을 앞둔 주말이라 평소에 비해 많은 사람이 오갔다.

더러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는 모습에서 명절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반가운 풍경은 행인들이 거리에 내놓은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아무리 작가의 영혼이 빠진 그림이지만, 가격이 너무 쌌다.

이 삼만원 대가 주류고 비싼 게 오 만원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져 나왔는지 모르나 물감을 이겨 그린 그림도 있어,

인건비는 차지하고 재료비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나무아트’에서 김진하관장이 나오고 있었다.

박건씨의 ‘나는 산다’전에 가자기에 사람 만나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정오 무렵 만나기로 약속한 사진가 최인기씨가 드디어 나타났다.

조그만 양반이 도르르 굴러오듯 바쁘게 걸어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빙그레 웃는 동안에 마음까지 포근해 졌다.

 

그를 만나기로 한 건, 며칠 전 경남 함안장에서 연락 받았다.

‘눈빛출판사’에서 노량진구수산시장 상인들의 투쟁을 기록한 사진집을 만드는데,

서문 좀 쓰 달라는 원고청탁이었다.

 

그는 사진가이기에 앞서 노동운동가다.

가끔 현장에서 만나 지켜본 바로는 성실하고 겸손한데다 투쟁력 또한 치열했다.

좋아하는 후배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 바쁜 시간이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명절선물이라며 보리굴비까지 들고 왔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받은 선물도 다른 분 줄 정도로 선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굴비는 정영신씨가 좋아하는 생선이라 점수 따기 딱 좋았다.

 

마침 정오 무렵이라 ‘툇마루’에 밥 먹으러 갔다.

술 마시러 간 것이 아닌데도, 쥔장의 도토리묵 서비스까지 받았다.

맛있게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고, ‘귀천’ 목영선씨의 모과차도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사진 자료 담긴 유에스비를 건네받고 헤어졌다.

 

그도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 나 또한 정영신씨를 만날 시간이 되어서다.

지하철 역 방향으로 마중가니, 총총걸음으로 정동지가 나타났다,

바쁜 분 만나려니, 이 몸까지 바쁠 수밖에 없었다.

 

마루의 ‘아지트갤러리’로 갔더니, 눈에 익은 작품들이 줄줄이 걸렸더라.

전시 개막 직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화가 최경태씨 그림에 마음이 아팠는데,

작가 박 건씨와 김진하씨가 나타났다.

 

박건씨의 공산품 아트를 비롯하여 김주호, 김환영, 류연복, 박불똥, 박영숙,

성병희, 안창홍, 이윤엽, 이현정, 이하, 정영신, 정보경, 정복수, 정정엽, 하일지 씨 등

내 노라 하는 분들의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었다.

 

박건씨의 혜안으로 모운 작품이라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 하나 기분 좋은 건 작가의 권위를 지키려는 거품은 모두 빼버렸다,

작품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이치에 대한 도전장에 다름 아니었다.

 

다음에 들려야 할 전시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이었다.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연지 35년 만에 150호 대작 22점을 내 걸었는데,

웅장한 스케일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마치 자음을 윷놀이 하듯 화면에 던져놓았는데, 문자와 디자인이 결합한 독창적 언어였다.

작가로부터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인사동에서의 일정은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동자동에서 일해야 하고, 그 다음 날은 경북 상주장에 가야했다.

무슨 놈의 일이 한꺼번에 몰려 똥오줌 못 가릴 지경이다.

 

서울역 홈리스 원고는 탈고한지 오래지만, 노숙인 코로나 확진자가 100여명이나

나온 데다 동자동 쪽방 촌 공공 개발 소식에 추가 할 원고가 생겨서다,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아산시를 시작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전시를 기획했다며,

필요한 사진 자료를 수집해 보냈는데, 정말 난감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한 사진도 있었는데,

필름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사용했던 사진도 수정 이미지를 못 찾아 재 수정하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얼마나 마우스를 잡고 낑낑거렸으면 아직까지 어깨가 결린다.

오죽하면 오래된 필름 정리해 스캔 받아 두라는 정동지의 성화를 뭉갠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고려장 할 나이에 이처럼 일이 많은 것도 복이라면 복이고, 욕이라면 욕이다.

 

그토록 바삐 쫓겨 다녔으니 최인기씨 원고 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2월 중순까지 요구한 글이라 추석연휴에 쓰려고 밀쳐두었으나,

원고료 부담에다 자료 담긴 유에스비 조차 열어보지 못해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믐 날 제사음식 준비 하는 중에 최인기씨로 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어렵게 전화한 듯, 정중하게 원고 청탁을 거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앓던 이 빠진 것 시원해 받은 원고료를 즉각 돌려보냈는데,

거절한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더 좋은 필자를 구했거나, 다른 이유라면 모르겠으나,

20여일 전 '인사동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말하고 싶다'전 포스팅에

“언제까지 미투로 생사람 잡을거냐?“는 글을 본 모양이다.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미투였다.

 

고질적인 성희롱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미투 운동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악용하거나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진짜 미투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폐단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부산의 이광수교수가 여러 차례 페북에서 지적한 바 있는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가들이 페미니즘에 집착하는 폐단이 떠올랐다.

그 문제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걸 여태 보지 않았던가?

 

개안적 견해에 불과한 미투의 문제점 제기에 안면까지 몰수할 정도라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주의로 흐르는 세태가 안타까운 실정에, 페미니즘 문제까지 부채질 한다.

 

메주알고주알 까발리다 보니 말이 엄청 길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사동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오로지 한글 문자만을 소재로 작업을 이어 온 금보성씨가 또 다시 인사동에 큰 그림판을 벌였다.

 

그동안 62회의 개인전을 가진바 있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은

지난 2월 3일부터 16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1층 그랜드관에서 열리고 있다.

 

금보성씨는 문자를 회화에 끌어들여 절제된 색과 구도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화가다.

한글 자음과 모음을 풀어 색면과 결합시킨 추상회화를 꾸준히 발표해 왔는데,

작가는 '현대판 문자도' 라고도 소개한다.

 

그의 작업들은 단순한 미적 표현에 그치기보다

설치나 글쓰기의 문학적 의미가 결합된 미술 형태의 소통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금보성의 한글 회화는 때로 문자와 디자인 방식이 결합한

훌륭한 조형적 가치를 지닌 독창적 언어로 평가된다.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한지 35년 만에 또 다시 150호 대작 22점을 내 걸었는데,

웅장한 스케일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이번 전시작의 특징은 기하학적인 자음이 이루어 낸 도형 속에 마스킹테이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작업방법을 알리기에 앞서 테이프가 문자로 변신해 가는 추상도 같았다.

 

자음을 윷놀이하듯 화폭에 던져놓았는데, 마치 문자의 리듬감이 화면 위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것 같았다.

금보성씨의 작업은 2차원의 평면에 그치지 않고,

조형과 설치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한글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그의 치열한 노력과 실험정신은

문자의 예술적 조형미를 찿아 낸 것이다.

디자인이 결합된 자음의 날렵함에서 경쾌한 에너지까지 느낄 수 있었다.

 

금보성 작가는 지난 연말 아트코리아 회화부분 작가로 선정된바있다.

그동안 한글 회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해외 전시도 꾸준히 추진해 왔다.

그리고 한글 회화에 담겨 있는 한민족의 정신을 표출하기 위해

아리랑에 착안한 윷놀이 형식의 자유로운 구성을 취하기도 했다.

 

그는 놀라우리 만큼 부지런한 작가다.

그동안 쉼 없는 작업으로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금보성아트센터’ 관장으로 유망한 작가를 발굴하거나 소개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금보성씨는 한글이 문자로서만 활용될 것이 아니라 산업으로 확대되어 미래 산업의 자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한글은 조상들이 물려준 미래자원이다, 우리민족은 문화DNA 혈통을 타고 났다. 시를 쓰던 내게 한글은 매우 익숙한 소재였다. 그러나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한글의 소멸을 막을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자음과 모음의 형태에서 고유한 추상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한글을 디자인적 서체, 예술적 서체, 손 글씨 등으로 변화시키는 시도는 있어 왔지만, 회화 자체의 소재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글 자체의 조형미를 그림으로 표현해 한글의 문화유산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초대전을 계기로 국내 순회전도 기획하고 있다.

경북 예천의 ‘신풍미술관’은 3월에 예정돼 있다.

 

"한글회화를 시작한 지 35년이라는 시간이 제게는 코로나와 한파 처럼 녹록지 않은 시간”이라며

“3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작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거 같다”며 겸손해 했다.

 

미술평론가 김종근씨는 “금보성 작가는 문자를 회화로 옮겨 놓는 아주 독특한 표현 양식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크고 작은 기억 이나 니은처럼 자음의 형태를 색채와 잘 조형화시켜 만들어 내는 그런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회화에서 남관이나 이응노 처럼 한글을 회화로 조형화시켜내는 그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문자를 가지고 그림으로 옮겨 놓는 사냥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금보성 작가의 특징이자 독창성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전시는 오는 16일까지 이어진다. 설날 연휴에도 열리니 인사동에 전시구경 가자.

(인사아트프라자 1층 그랜드관 / 전화02-736-6347)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1일 늦은 오후, 정영신씨와 함께 박찬호씨 ‘신당’전시 보러 ‘금보성아트센터’에 갔다.

무당들의 기가 전시장을 가득메운 전시장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듣던 중, 금보성 관장을 만났다.

차 마시러 올라 간 2층에는 유동명씨의 ‘사유의 이면’전이 열리고 있었다.

 모처럼 차 한 잔 마시며, 금관장 이야기를 듣는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유동명씨는 잘 모르는 작가였으나, 작업이 독특했다.

화폭에 닥종이를 반복적으로 한 땀 한 땀 덧대어가며 화면을 이루어 놓았는데,

짙은 회색 결이 물 빠진 바닷가 갯벌을 연상시켰다.

다양한 색조의 닥종이에 의한 콜라주 기법으로 단색조의 우아한 표면을 만들어 놓았더라.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매일 만나는 군산 바닷가의 잔상을 화폭에 담았다고 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갯벌의 느낌이 신비롭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그림 그리는 일이 아니라 작품수집가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집념에 의한 노력은 어느 화가 못지않은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미련하리만큼 반복적으로 해 온 끈질긴 노력이 이루어 낸 성과였다.

 

금보성관장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발굴하여 알리는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금보성관장도 쉬지 않는 열성화가이기에 많은 작품을 탄생시켜왔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다작의 작가를 특히 좋아해 도와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2월1일부터는 태백의 광부 사진가 전재훈 초대전을 연다고 했다.

나야 전재훈씨를 잘 알지만, 태백 탄광에 박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는데,

전시 보러 온 작가를 만나 그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 가며 찍는 사진과 지하 4,000미터 막장에서 일하며 찍은 사진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땀이 범벅되는 일을 하지 않고 어찌 광부의 고통을 알겠는냐며 동했다고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는 작가의식에 탄복해 손을 건넸다고 한다,

태백에서야 여러 차례 광부 전시를 하고 사진집도 펴낸 바 있지만,

서울에서는 한 번도 전시를 갖지 않았기에 알리고 싶었단다.

 

‘금보성아트센터’는 4월 보궐선거 투표장으로 사용된 후 철거한다고 했다.

다시 건축하여 재 개관하려면 일 년 넘게 기다려야 한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저녁시간이 되어버렸다.

갈비탕이나 한 그릇 먹자는 말에 따라 나섰는데,

근사한 식당에서 자기는 육식을 안 하면서 갈비를 시켜 거지 몸보신 시켜주네.

 

좋은 전시 보고, 좋은 소식 듣고, 칙사 대접까지 받았으니,

이 어찌 도랑치고 게 잡은 일이 아니겠는가?

오래 전에 전시 한 번 하라는 도움제안도 들어주지 못했는데, 너무 송구스러웠다.

부디 새해에는 좋은 일 많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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