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찜통 같은 날씨에 인사동의 시원한 전시장에서 작품에 푹 파묻히는 건 어떨까?
새로이 개관한 ‘이노아트스페이스‘에서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이 열리고,
‘마루갤러리’에서는 이도씨의 ‘서사를 만드는 정물’전이, ‘통인화랑’에서는 김정선씨의 ‘다시 지금 여기에’전이 열린다.


 


그리고 지난 6월 개관한 '베를린미술관‘에서는 융합서예술가 양상철씨의 전시를 비롯하여

24명의 작가들이 함께하는 ’8월의 만남‘전이 기다린다.

여러 개의 전시장에서 보여주는 작품의 다양성은 물론이고, 곳곳에 마련된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몇 몇 아는 전시가 이 정도인데, 인사동 곳곳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가 얼마나 많겠는가?

다양한 작가들의 예술 혼에 흠뻑 빠지다보면, 스스로를 충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9일 오후 무렵, 무작정 인사동에 나갔다. 그리운 사람도 많고, 보고 싶은 작품도 많아서다.

제일 먼저 금보성씨의 전시가 열리는 이노아트스페이스부터 들렸다.



그런데, 입구에 줄지어 선 축하 화분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보내 주는 화분을 어쩌겠냐마는, 이젠 쓸데없는 낭비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전시장을 답답하게도 하지만, 쓰레기가 될 화분에 작품이 파 묻혀 버린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화분 외에는 담을 수 없단 말인가?



전시장에서 심철민 관장과 초대전을 여는 금보성씨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존의 보아왔던 한글 작품과는 좀 달랐다.


 


최근에는 아리랑을 주제로 민족의 정서에 다가간 작업을 해 왔으나

이번에는 한글의 역사성과 생명성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한글에 담긴 정신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 역사성은 암각화의 상형문자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한글 자모를 바탕으로 철판이나 동판을 부식시켜 만든 부조였다.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철판의 나이테 속에는 푸른 나뭇잎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철이 한글의 역사를 상징한다면 작은 나뭇잎은 생명의 탄생을 의미했다.


 

금보성씨는 금년에만 아홉 번의 개인전을 열었던, 잠시도 쉬지 않는 열혈작가다,

같은 시간에도 자하미술관에서 열리는 나랏말싸미’ 단체전을 비롯하여

외국이나 지방에서 각기 다른 전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작업에 대한 열정과 창의력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는 개인 작업에만 열정을 쏟는 것이 아니라, 작가지원에도 온 힘을 아끼지 않는다.  

마치 미술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오는 819일까지 열리니, 꼭 한 번 들려보기 바란다.


 

두 번째 들린 전시는 마루갤러리’1관에서 열리는 이도씨의 서사를 만드는 정물전 이다.



작가가 그린 소재들은 사실대로 재현하기보다 화면을 이루는 계기와 연유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수확과 연결되는 시간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그 시간은 사람의 강인한 정신을 담아 내었다.

 


작가가 보여주는 도상이 추상적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이미 사유되어 정서적 이해로 얽힌 하나의 덩어리였다.

바로 정서적 운동감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유이고 느낌이다.

단호하면서도 생략된 선들이 만들어내는 완강한 힘이 핵심이다.


 


미술평론가 강선학씨는 완만한 선, 직선이 최소화된 배분의 화면은 구성과 해체라는 자신의 어법을 보여주고,

머뭇거림 없는 단호한 선들과 색상들, 흔적은 최소의 색, 도식화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표정과 관계,

의외로 서사가 이루어지는 정물적 시선으로 인물을 구축하는 독특한 조형성 태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선이 보이는 형태의 단호한 결정, 그러나 그 단호함 밑으로 보이는 중첩된 선들의 민감한 배치, 선의 다의성이 주는 잠세적인 운동감,

대지를 밟고 선 강인함의 현재화야말로 작품을 이해하는 기항지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전시 팜프렛에 적힌 작가 프로필을 보고 약간의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수미술대전' 초대작가상 수상이라 적혀 있었는데, 그 상이 그토록 자랑스러웠던가? 

'정수미술대전'은 박근혜가 만든 '정수문화재단'에서 주는 상이 아니던가?

상이란 것 자체가 작가를 병들게도 하지만, 상에 따라서는 작가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난, 작가주의 보다 인간주의자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인간답지 않으면 발톱에 때 만치도 여기지않는다.

여류작가 이도씨의 작품은 13일까지 열린다.


 

그리고 마루갤러리신관에서는 김동욱, 김영진, 김용식, 김주희, 김지은, 빅터조, 오재언, 왕에스더,

이우현, 이정연, 장영훈, 정현태, 제소정, 채정완, 최은서, 한민수, 허진의. 호 진 씨등 젊은 작가 18명이 함께 한

젊음 그리고 오늘전이 12일까지 열리고 있다.



마루갤러리’2관에서는 세계 유일의 오가닉 그림을 그리는 황복은씨의 별이 쏟아지는 푸른 정원이 열린다,

염색기법에 의한 다양한 천들과 도자들이 어우러져 전시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베를린미술관개관초대전으로 열리고 있는 제주의 양상철씨 전시도 눈길을 끌었다.

서예와 회화를 융합하여 작업하는 양상철씨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장르를 해체하는 작가다. 

제주의 대표적인 작가로 나무, , . 도자 등을 이용하여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그는 과거의 서예 가치를 미래의 가치로 끌어 올린 가장 현대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제주밀감껍질을 말려서 가루 낸 것을 석고와 풀, 아크릴로 반죽하여 바르고,

끈적이는 면 위에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붓질로 글 쓰듯이 그려 낸 작품이다.

꿈틀대는 그림의 형상들은 암각화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닮은 것도 여럿 있다



 

 필락해집'이란 작품은 '급한 붓질에 끌려 게들이 모여든다'는 뜻이다.

굵게 내려 그은 붓질이 폭포가 되었는데, 가히 붓질의 힘이 폭포를 능가하였다.

이 그림은 어릴 적 폭포 아래서 게를 잡던, 오래된 기억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강민기, 권치규, 김기애, 김병규, 김재호, 김지영, 나인성, 남희조, 도태근, 박건재, 박찬걸, 성도형,

송미진, 송현구, 양진옥, 이성옥, 이인숙, 이창희, 이해성, 임세현, 임호영, 장수빈, 주영호, 최승애씨 등

24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8월의 만남전도 열리는데, 두 전시 모두 13일까지 열린다.


 

오는 825일까지 통인화랑에서 열리는 김정선씨의 다시 지금 여기에전도 볼만하다.


 

김정선씨는 오래된 사진 이미지를 이용하여 유화를 그려 온 작가다.

한 동안의 관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긴 세월 동안 사진에 의한 그 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몇 장은 가지고 있을 법한 어렴풋한 형상의 사진 이미지들은 보는 이들에게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그의 주변 친구나 가족으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화면을 메우지만,

그 것들이 누구이며 무엇이고, 어디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의 작품 속 인물이나 풍경들은 존재론적인 세계에서 규정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의미를 위해 임무를 부여 받은 것도 아니다.

작품의 소재가 되는 인물과 풍경은 그저 그렇게 자리에 있는, 즉 실존하는 어떤 것들이다.


 

기억을 살려내는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보잘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과

그것이 우연히 망막에 맺혀 만들어내는 색채를 그만의 기억으로 그려낸다.

그 작품이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 느끼고 기억하게 하는 순간의 진실이다.


 

사라져가는 자신 안의 어떤 것들을 필사적으로 구출하고 살려내기 위한 인공호흡이며 몸짓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 모든 것들을 살려내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한가? 누구를 위해, 아니 무엇을 위해 불태우고 있는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스스로를 충전하러 나가자.



 사진, / 조문호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세 가지의 목소리를 내는 특별한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이흥덕의 불안의 에티카’(1)는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조신호의 “DMZ로 부터”(1)는 생태환경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민종은 나의 노래’(2), 자연은 자연으로 두라는

각기 자신만의 어법으로 쟁점화 시켰다.



 


작가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비판적 현실이 암울하고 참담할 뿐이다.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 정신은 병들었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마치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남이야 죽던 말든, 자연이야 망가지던 말든,

오로지 개인주의적 탐욕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

그 비정의 현실을 말하는 기획전이라 뜻하는 바가 크다.



 


이흥덕이 사회를 보는 불안한 시각은 꽤 오래 되었다.

40년 가까이 욕망이 이글거리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사회풍경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불안한 현실을 그려내는 심리 도해로서의 지옥도고, 온몸으로 부대낀 보고서다.

    


 



해골 무덤에서 탱고를 추는 남녀 군상들, 구제역에 매몰되는 가축들,

전쟁놀이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

구덩이에 처박혀 떨고 있는 사람들, 십자가에 눌린 무력한 예수,

모든 작품들이 지옥이 따로 없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준다.



 


작가의 불안한 증상은 개에 쫒기는 사람으로 동시대적 폭력과 야만을 보여준

80년대부터 시작되었단다.

풍자적으로, 때로는 에로티시즘적인 수사학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상을 형상화해냈다.



 


흑백 목탄이나 초록의 유화 모노크룸,

또는 강렬한 색을 사용하여 마치 요지경이나 만화경 속에 들어 있는

무대처럼 몽환적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원시의 울산 암각화처럼...




 

근대미술의 시조격인 고야의 동판화집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 뜬다"라는 작품이 있다.(중략) 이흥덕의 그림도 거기에 맞닿아 있다. 요괴를 부정하는 근대도 지나고, 그 유산으로 '찬란한 문명(?)'을 성취한 현대도 100년 이상이나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요괴가 눈 뜨고 횡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흥덕은 그런 동시대를 때로는 겹 눈질로 때로는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의 불안을 임상보고하고 타자와의 미적·정서적 연대를 시도한다. 이는 보편적인 이웃과 더불어 인간욕망과 욕망이 야기한 폭력과 그로인한 '불안'을 바로 보고, 거기에 맞서려는 작가 이흥덕의 저항적 '에티카(Ethica)'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고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썼다.




 

두 번째 작가인 조신호씨는 대학생 신분으로

한강미술관푸른깃발전에 참여한 적도 있단다.

일찍부터 시대정신에 눈 떠 현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미를 추구하는 그림에서 벗어나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다 18년 전, 살기가 어려워 파주로 들어가 DMZ를 접하며

생태환경에 빠지는 일대 전환을 맞는다.

고통 받는 동물들을 치료해 주며 스스로 위안 받았다고 한다.

지구의 환경오염이 인간이나 동물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자각한 후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는 DMZ를 다닐 때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초월적인 힘은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다.

인간을 끝없이 불안한 존재로 인식하며,

그런 문제의식을 그림으로 토해내기 시작 했다.



 


살기를 뻔뜩이며 날개 짓하는 독수리무리, 해골에 박혀있는 나무,

앙상한 나목을 마지막 보루처럼 지키는 조류, 하나같이 섬뜩한 장면이다.

마치 작가의 분노가 고스란히 화폭에 옮겨진 것 같다.

강렬한 색과 터치로 그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미술평론가 곽대원씨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작품을 보면 영국의 화가 프렌시스 베이컨(1909-1992)을 연상케 한다. 베이컨은 고기와 형상과의 관계를 통해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작가다. 베이컨 그림에 나타난 인간과 동물은 아름다움보다는 처절함이다. 조신호의 작품에서 종종 비슷한 그림을 발견한다. 동물을 인간의 정형이라고 믿는 베이컨이나 조신호가 혹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고 있다.

    


 



세 번째 작가 이민종이 나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내 놓은

일련의 작품을 보면 우선 나른한 느낌이 든다. 자극거리가 없다.

땅에서 시작되는 삶이란 원래 지루하고 따분하다.

성적인 말로 조루와 반대되는 지루의 상태로

언제 사정해 버릴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을 지닌 채 오래도록 지속된다.

본래 자극을 주는 것이란 쉽게 눈길은 가지만 금방 싫증을 느낀다.



 


마치 드론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풍경은

재현적인 사실주의라기보다 조형화한 산수화 같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아주 높고 치밀한 불완전함이 있다.

무기교의 기교이며, 무기교를 위장한 기교다.

바로 이것이 이민종 풍경화의 매력이다.



 


색을 중첩하는 채색방식이야 서양화지만, 동양화의 관점이다.

미세한 붓 자국으로 눈이 쌓이듯 잔잔하게 찍어 그렸는데,

작가는 사물의 물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물감의 흔적으로 화면 층을 깊게 하며,

붓 자국이 쌓이는 시간을 기다려 공간감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형상화해가는 방법이 아니라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있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은 지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은 가능성의 세계이고 봄은 생동하는 계절이기에 선택되었으나, 계절 속 자연은 침묵으로 생명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동양사상의 핵심은 현실 속에서 주변과 자기마음을 조용하고 화평하게 하는 데 있다. 화가 이민종의 정신은 이러한 자연에서 발견한 감성적인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것이다.”고 주성열교수가 적었다.



 


지난 30일 전시를 보러 금보성아트센터를 가야했으나,

그날따라 서울대학병원장례식장에서 열리는 김윤수선생 추모식 시간과 겹친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한 곳은 포기해야 할 텐데, 기어이 욕심을 부려 더 힘들게 만들었다.




   

먼저 전시장부터 들렸으나 이미 개막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보성 관장과 미술평론가 김종근씨 등 작가들이 차례대로 나와 이야기들을 했다.

객석에는 류연복, 정복수, 이재민, 나종희, 김진하, 김재홍, 김구씨 등

반가운 분들의 모습도 여럿 보였다.



    

 

개막식이 끝나야 전시를 볼 수 있을 텐데, 행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류연복씨가 추모식에 갈 것이냐며 재촉해 온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다시 볼 생각으로 나왔는데.

가보니 추모식도 이미 끝날 직전에 있었다.

반가운 분들이야 만났지만...



 


지난 2일은 아침부터 궁상맞게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정영신씨에게 연락해, 전 날 못 본 금보성아트센터전시를 다시 찾은 것이다.

작가 이흥덕씨는 자리에 없었지만, 조신호, 이민종씨가 있었고,

금보성 관장과 사진가 양재문씨도 와 있었다.



    


전시도 찬찬히 돌아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관장실에 들려 커피까지 얻어 마셨다.



 


마침 서재에 전주의 류휴열씨 도록이 꽂혀 있었다,

! 이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30년 전에 그의 주선으로 전주에서 전농동588번지전시를 연적도 있다.

어떻게 서로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이토록 무심하게 잊을 수 있었단 말인가?

다음에 전주 가면 꼭 한번 만나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금보성 관장께서 내년에 나와 정영신씨에게 전시를 하란다.

난, 형편도 되지 않지만, 전시 같은 건 별 관심이 없으나,

정영신씨의 장터사진은 한 번 추진해 봐야겠다.

죽기 전에는 동지로서의 계약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꺼번에 세 작가의 작업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전시를 놓치지 마라.

오는 17일까지 금보성아트센터’(02-396-8744) 전관에서 열린다.

 

사진, / 조문호












 


불안의 에티카

이흥덕展 / LEEHEUNGDUK / 李興德 / painting
2018_1201 ▶︎ 2018_1217



이흥덕_오름_캔버스에 목탄_218×291cm_201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328a | 이흥덕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1201_토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금보성아트센터

KIM BO SUNG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6길 20(평창동 111번지) 전관

Tel. +82.(0)2.396.8744

blog.naver.com/kbs5699



불안의 진술, 그 저항의 에티카 ● 감각. 인식하기 이전 보고·냄새 맡고·피부로 느끼고·듣는 무의식적 행위. 쾌·불쾌·상쾌함·두려움 등을 느끼면서 세계를 직관적으로 입수하는 본능. 그때 사람의 몸과 신경은 경직이나 이완 등으로 본인도 모르게 자동 반응한다. 그리곤 왜 자신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를 생각하고 분석한다. 즉 감(感) 이후에 지(知)로, 그 감을 확인한다는 것. 불안은 그런 분석과 판단의 결과가 불명료 할 때, 혹은 명료하되 거기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을 때 지속되는 고통스런 심리현상이다. ● 예술가는 대체적으로 예민하다. 주변과 환경, 그리고 자신의 의식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흥덕 그림은 삶의 현장에서의 그의 체험에 대한 날 것의 감각과, 그 감각을 분석한 결과와의 일치/어긋남으로부터 기인하는 불안을 기록한 다큐이자, 그 불안의 기저를 탐험하는 심리도해다. 기민한 감수성으로 입수한 자신의 현실과 사회적 제 문제들에 부대끼면서 작성한 보고서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작업의 동기도·소재도·서술도 불안에 관한 것이며, 또 그런 불안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현실을 연역하고, 그 불안을 타파하려는 실존적·사회문화적 의지의 행위이기도 한 그런 것이다. 즉 바깥으로부터 입수(감각)되어 자신에게 내재된 불안(심리)의 자연주의적 관찰 및 서술의 진료기록(분석)과, 궁극적으로는 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대응하는 행위로서의 자기해방을 지향하는 그림그리기(표현)가 합쳐진 그의 존재론적 태도이자 실천으로서의 작업이란 뜻이다. ● 이흥덕의 불안은 오래되었다. 1980년대 초반 개에게 쫒기는 사람의 불안을 통해서 군사독재시대의 폭력과 야만을 형상화한 지 35년이 되었다. 물론 그가 그림으로 자신의 내부를 공개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의 내면에 또 어떤 원형적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는 그가 외부로 발설하고 물화시킨 그의 작업만을 기준으로 삼자. 그 기준점은 1985년 그의 첫 개인전을 통해서 보였던 불안에 관한 일기와 같은, 개에게 쫒기는 사람이나 옆 눈으로 눈치 보는 사람 등의 소시민성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불편했고, 불안했고, 그런 자신을 기록/표현함으로 그 불안에 대응 내지는 저항해 왔다. 그의 내밀한 심리작용과, 그런 심리작용의 원인이 되는 외부세계와의 물리적 정신적 폭력의 길항관계를 진술하는 '형상성1)'으로 말이다. 그것은 그의 외부에 대한 감각적 대면과, 그 대면현상에 대한 통찰과, 그로인해서 그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성찰이 버무려진 결과로 생성된 관계론적 이미지다. ● 이흥덕 그림의 서술적 형상들은 지시적 기호가 아니다. 화면에 묻어있는 그의 작업궤적과 흔적은 '불안'의 알레고리이자, '폭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호가 아닌 상징이므로 그것은 모호하다. 다만 그 상징에도 일종의 단서들이 여기저기 붙어서 그의 상징에 다다를 수 있는 해석의 코드를 제공해 준다. 은유·비유·환유·풍유에 의한 이 풍자적 레토릭들은 한결 그의 그림의 서사들을 풍부하게 이야기 한다. 상황설정·색채·형태 등의 회화적 양식과 자유로운 붓질의 구사에 덧붙여진 비정형의 표현적 형식언어들과 함께 가일층 중층적으로 작용하면서, 그의 불안과 억압을 증명하는 분위기로 확장된다. "뻔"하지 않은 모던함, 이흥덕 특유의 언술과 회화적 어법이 결합된 프로세스가 제공하는 미적 쾌감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 불안과, 그 불안에의 저항으로서의 언표행위인 회화적 형식의 실험과 변주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온 지 35년이 지난 근작들에서, 이흥덕은 충분할 만큼의 형상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전시의 주축이 되는 흑백목탄 그림과 초록의 유화 모노크롬 회화 대작들은 '그리기방식'과 '말하기방식' 모두에서 그 미적 성과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럴때 그의 작업동기이자 출발점이 된 불안은, 그 불안에의 저항을 야기하는 태도로 연결되고, 그 태도는 사회적 실천이라는 작업행위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는 그가 그답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자 그 토대인 자신에 대해 엄격하게 적용하는 일종의 작가적 '윤리'라 하겠다.


이흥덕_심판_캔버스에 목탄_91×122cm_2017


이흥덕_매몰_캔버스에 목탄_91×122cm_2018


꿈은 꿈이다. 현실과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다. 그런 꿈은 대개 잊혀 진다. 기억에서 자동으로 소멸하는 그야말로 '꿈'이니까. 그러나 꿈이 꿈만이 아닌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맺음이 될 때가 있다.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이되 분명하게 감지되고 인지되고 각인되는 팩트, 이른바 '꿈같은 현실'일때가 그때다. 이럴 때 그 모호한 이미지는 요동치며 현실성을 증폭하고, 현실에 더 강하게 개입하고, 그 혼란과 두려움은 일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런 영향의 가장 큰 예가 바로 당대의 삶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치·자본·권력의 현실적 기표들이 온통 욕망과 뒤섞이는 유기적 생물체로, 이념과 이성을 뒤집는 카오스로, 마침내는 요지경(瑤池鏡)이나 만화경(萬華鏡)속의 몽환적 드라마로 우리들의 실재 삶에 침투한다. 범죄드라마나 컬트무비처럼 네가티브하게 현시화(現視化)되는 것이다. 드라마와 일상의 레이어가 합성된 팩트는 그야말로 흉몽을 복제한 듯 그로데스크한 이미지로 우리들의 정서를 공략한다. ● 고대 '신화'와 중세적 '이데아'와 근대적 자연과학의 '법칙'이 소멸하고, '수치(數値)'의 장악이 권력이 된 디지털 세상. 계좌에 찍힌 십진법과, 이진법 알고리즘의 픽셀로 변주된 디지털 화폐의 숫자가, 소위 '인문과 상식'을 조롱하는 물적 토대이자 실재 권력이다. 디지털 '수치'와 '법칙'이 '신화적 권력'이 된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강력한 이 알고리즘 숫자들의 질주는, 오프라인에서 우리의 인식과 감성의 숨통을 더 조인다. 제어하기 어려운 자기증식성으로. 물론 이는 인간 스스로가 자초했다. 욕망 A를 취하면 욕망B가 부족하고, B를 획득하면 C가 부족하고, C를 채우면 다시 A가 부족한 결핍의 순환과 반복. 그 밑 빠진 결핍의 욕망 채우기에서 가진 자들의 권력이 그 부족함을 채울 때마다, 이율배반적으로 빼앗긴 자들의 핍진한 시신은 여기저기 우수수 쌓인다. ● 이흥덕 근작의 들판은 바로 그런 시신들이 쌓이고 묻히고 마침내는 썩어가는 현장이다. 피와 살과 뼈, 그리고 숱한 질병들이 창궐하는 폭력과 불안의 디스토피아이자 이흥덕이 쓴 일기의 실제 무대다. 그 무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광경들은 마치 꿈속에서의 그것처럼 몽환적이되, 역설적으로 너무나 지독하게 리얼하다. 밤의 카페(1980년대)에서 나와 서식처인 신도시(1990년대)를 향해 지하철(2000년대)을 탔으나, 마침내 다다른 들판(근작)엔, 사대강을 준설하며 쌓아놓은 모래더미처럼 첩첩이 쌓인 인골의 피라미드와, 구제역으로 살처분되는 돼지들이 매몰되고 있는 구덩이와, 그로 인해서 오염된 채 기껏 정도로 마실 작은 연못과, 메마른 잡초와 앙상한 나무 등걸만이 황량하다. 다가올 A.I도 모른 채 돼지 사체를 호시탐탐 노리는 까마귀 떼, 그 들판의 우아한(?) 식탁에 올릴 잘린 상어나 고래 호랑이 사체, 그것을 몰래 뜯어 먹는 표범과 하이에나 떼, 물고기 두상에 소 몸통이 달린 기괴한 동물들, 예수의 등을 주무르는 사탄과 춤추는 살로메, 멀리 자그마하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무력한 예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화폭에 담고 있는 화가 자신. 그 땅에 고이거나 스며드는 액체는 바로 그런 껄쭉한 피와 지방과 욕망들의 부패현상이고, 그 땅은 혼돈이 팽배한 아비규환의 지옥에 다름 아니다. ● 그곳은 또한 질량과 부피와 위치와 정체조차 종잡을 수가 없이, 소유·권력·명예·섹스·여가에 이르기까지, 무한대의 크기와 속도로 그 탐욕을 독점하려는 욕망들의 약자에의 무한착취가 횡행하는 땅이기도 하다. 서류에 사인을 부추기는 사기꾼 해골과 속는 소시민, 돈키호테처럼 홀로 목마를 타고 돌진하는 짚단 인형의 저돌성, 요염한 원피스와 선글래스의 묘령의 여인, 준마를 타고서 천하무적 번개아톰의 가이드로 우아함을 뽐내는 여성 승마선수(와 그 뒤를 따르는 눈 먼 자들의 행렬), 인공수영장의 벌거벗은 남녀, 그리고 해골무덤 주위에서의 탱고를 추는 신사 숙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목발을 짚거나 바닥을 기어서 어디론가 향하는 맹인과 사지 절단된 부랑인들, 지옥의 나찰에 의해 튀겨지는 사람고기, 그리고 맛있는 식사를 위해 기다리는 여러분이 그 들판에 함께 있다. 그런 요지경 들판의 배경으로 멀리 인골 피라미드, 바다, 세월호, 군사진지, 철조망, 미사일 발사, 핵폭발, 어찌 요지경 속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 도저한 불안의 서술과 표현은 이흥덕의 몸에 붙어있는 생래적인 정서의 기표일수도, 후천적인 경험에의 반응으로써의 기술(記述)이자 기의일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흥덕이 제공한 그 많은 사건과 형상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그의 감각과 함께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흥덕_황혼_캔버스에 목탄_91×122cm_2018

이흥덕_지옥철_캔버스에 유채_218×291cm_2018


폭력적 배타주의와 배금주의가 횡행하는 분단국의 서사들이 상징적 형식으로 컨버팅된 형상성. 환유와 풍유를 통한 이런 이야기체의 회화적 갈무리는, 온전히 이흥덕의 일상적 직접체험과 미디어에 의한 간접체험들 모두를 두루 엮어낼 수 있는 그의 그리기 공력 덕분이다. 이흥덕의 그림엔 직접 말하기가 없다. 대부분이 비유다. 그러면서도 그의 주제를 모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고전적 서사문학의 풍부함과 모던한 형상으로 치환한 조형적 감수성이 가능케 한 그런 시각적 서술과 표현 능력으로. ● 이 지옥도 형식의 차용은 인류의 등장 이래 지금까지 같은 구조와 패턴으로 존재해온 선악의 문제를 근원적인 텍스트로 삼으며 고찰한 것이다. 지옥도가 불경의 삽화로 그려진 오래전부터, 또는 단테의 '신곡'이나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회화 이후 지금까지도 건축물과 의복과 소도구만 바뀌었을 뿐, 인간세계는 여전히 그와 같은 불안의 세트장에 머물러 있다. 그런 '지옥서사'의 원형적 구조에 현재를 대입하면 리얼리티는 감소하지 않고 주제는 갈무리 된다. 바로 욕망이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기제로 작동하며 이 폭력성의 유지와 서술을 간단하게 만들어주니까(이런 원형적 서사구조에서 이젠 이흥덕이 벗어날 필요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하기로 하자). 아무튼 그런 욕망과 폭력이 횡행하는 우리시대를 이흥덕은 빠르고 긴박하게 자신의 그림에 옮긴다. 요지경의 현장을 보고·느끼고·관찰하고·기록하고·보고한다는 게 맞겠다. 마주한 사건과 현상 하나하나 그의 망막에서 뇌로 연결되는 감수성의 촉수에 걸린 순간부터 숨 가쁘게 회화적 장치로 전환되었다. 굳이 관찰을 전제로 한 응시를 하지 않더라도, 끈적거리는 그의 감성의 더듬이와 거미줄이 제 현실들을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체포하고 소환하는 것이다. 숱한 사건과 정보와 경험들이 복마전처럼 얽혀서 도대체 어떤 명료한 주제와 인식의 단서조차 제공하지 않을 듯한 복잡함을 간단하게 재구성하면서 말이다. 그 연기(演技)가 아닌 날 것의 몸을 통한 비유와 표현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신체 잘린 육체들의 고통처럼 생생하고 리얼하게 우리들의 눈 앞에서 현전한다.


이흥덕_DMZ_캔버스에 유채_218×291cm_2018

이흥덕_박쥐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8


근대미술의 시조격인 고야의 동판화집 『카프리치오스』 43번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 뜬다"라는 작품이 있다. 중세의 온갖 비(불)합리적이며 혼돈된 세계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야의 심리와 사유가 주제화된 연작중 하나다. 잠과 꿈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구분한 근대는 어떻게든 이 "요괴가 눈 뜬" 비이성적인 중세적 부조리를 단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고 이성적이다. 이흥덕의 그림도 거기에 맞닿아 있다. 요괴를 부정하는 근대도 지나고, 그 유산으로 '찬란한 문명(?)'을 성취한 현대도 100년 이상이나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요괴가 눈 뜨고 횡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흥덕은 그런 동시대를 때로는 겹눈질로 또 때로는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의 불안을 임상보고하며 타자와의 미적·정서적 연대를 시도한다. 이는 보편적인 이웃과 더불어 인간욕망과 욕망이 야기한 폭력과 그로인한 '불안'을 바로 보고, 거기에 맞서려는 작가 이흥덕의 저항적 '에티카(Ethica)'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 김진하


* 각주1) 형상성(形象性) : 화면에 구체적 형상이 등장하는 작품에 대한 성격을 규정하는 용어. 추상화(抽象畵)와는 조형적 입장과 결과가 분명히 다른 개념이기에 그 차이의 구별은 분명하다. 그러면 대상이 화면을 구성하는 조건에 있어서 공통적인 형상회화와 구상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 구상화는 소재나 대상을 중심으로 작가의 조형적·표현적 입장을 덧붙이는 단순한 경우다. 당연히 소재와 테크닉이 중요하다. 대상에 대한 서정을 어떻게 묘사(재현)하거나 표현할 것인가가 조형의 주 포인트다. 따라서 대상의 성격과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작가 나름의 감정과 표현방식만 두드러진다. 작가가 그 대상을 통하여 그 너머 또 다른 세계에 접근하는지에 대한 사유가 당연히 없다. 지금의 구상회화가 현대성이나 동시대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다. ● 이에 비하면 형상회화는 작가의 주제의식에 의해서 소재들이 선택되어진다. 세계관이나 이념적 지향성, 조형적 필요성이 선택한 대상을 자유롭게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들은 작가의 판단이나 표현충동으로 마음대로 주물러지고, 변형되고, 조리되어서 화면 안에서 상징적 단위요소로 쓰여 진다. 즉 작가가 의도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대상들은 선택되어서 사용될 뿐이다. 소재나 대상들 보다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가, 라는 대상 너머를 향한 주제의식이 중요하다. 작가의 사유와 내면이 소재들의 성격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혹은, 주체인 작가와 객체인 대상 어느 한 쪽에 비중을 두지 않고, 작가와 대상 사이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어떤 '현상'이 중요할 수도 있다. 따라서 '형상성'은 작가의 세계관이나 감성, 조형에 대한 입장 등을 버무려서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으로 작가자신과 조형이념을 드러내는 작업 '태도'에 관한 것이라 하겠다. (김진하, 「견고한 생성의 터-이상국의 회화」중에서, 2012)



Vol.20181202g | 이흥덕展 / LEEHEUNGDUK / 李興德 / painting


'금보성아트센터'개관 초대전으로 원로서양화가 정기호씨와 한글회화작가 금보성씨의 2인전 개막식이 지난 25일 오후6시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1,2층 전시실에서 있었다. 정기호선생께서 몸이 불편하여 참석하지 못했으나 부인 조경석씨를 비롯하여 서양화가  금보성, 박양진, 김하은, 사진가 정영신씨 등 많은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11월 15일까지 이어진다.

                                 

 

 -정기호씨 작품-

 

 

 

 

 

-금보성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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