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뉴스

[방민호 칼럼]

(서울 인사동 찻집 '흐린세상 건너기'. 사진=방민호 위원)

 

'뉘조' 쯤에서 발길을 돌려 새로 이사간 '여자만'집을 바라보며, 이제 나는 골목의 남은 한쪽편을 마저 살펴보기로 한다.

'흐린세상 건너기'는 이 골목 동네의 깊은 연조로 보면 연륜이 가장 짧은 축에 들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자만'도 그러기는 마찬가지, '흐린세상'보다 더 늦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흐린세상 건너기'에서는 커피나 술을 마실 수 있는데, 막걸리 대신에 약주에 가까운 술을 내놓는다. 뭣보다 주인 분이 직접 선곡해서 들려주는 음악이 좋고, 그쪽에서는 이 골목에서 그중 나은 곳이라 할 것이다. 가게 이름도 좋고, 출입문에 서양문학인인지 배우인지 흑백 사진을 붙여놓은 분위기 덕분에 한동안 자주 들러 이야기를 나눴다.

'여자만'과 '흐린세상' 사이 막다른 짧은 골목에는 '산유화'라고, 가보지 못한 음식점이 있고. 다음은 작은 전시회도 여는 전통 찻집 '삼화령'이다. '삼화령'은 미륵삼존불이 출토된 경주 남산의 한 지명이란다. 자기, 도기 그릇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이 찻집을 나는 고작 두어 번쯤 들어가 보았을 뿐이다.

 

그다음은 한정식집 '옥정'. 나는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는데, 고등학교 9년 후배 이창호 친구가 이 집 단골이라는 말을 들었다. 문인들 사이에서는 이 집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삶의 영역이 다른 사람들이 애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옥정'을 끼고 좁은 골목 안이라고 보면 제법 골목다운 골목 하나가 가지를 쳤다. 이 골목은 다른 골목들로 이어지는 길목이라 그런지 갑자기 익선동에서나 볼 법한 고깃집과 신식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853'과 '코튼서울'. 둘다 오래전부터 익숙한 풍경과는 다르지만 이렇게 다른 것이 섞여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카페 '소담'. 사진=방민호 위원)

 

오늘 춘원연구학회 실무자 모임이 12시 30분부터 '선천'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다. 나는 이 모임에 책임이 있어서 한 시간은 족히 일찍 인사동에 나왔다. 원래는 인사동 큰 골목의 종로 쪽 끄트머리 '스타벅스'에서 뭐라도 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양식에 한식 뼈대를 접합한 이 '코튼서울'이 떠올랐다. 일종의 '조양절충식'이다.

 

앉아서 짧은 시간 동안 책을 읽어볼까 한다. 요즘 들고 다니는 책은 중국 작가 샤오홍의 단편집 "생사의 마당"과 라오서의 장편소설 "낙타 샹즈". 요즘 중국소설 읽을 일이 있다. '뜨아'를 시켜놓고 앉았으려니,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잠시 후 흰옷 입은 젊은 사람 하나가 반대편 끝에 들어와 앉고, 또 조금 더 있으려니 그보다 나이가 약간은 많아 보이는 사람이 그 젊은 사람한테 온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워낙 나밖에 다른 손님이 없어 대화 내용이 명료하게 전달된다.

 

옛날 같으면 '알바생' 쓸 자리가 지금은 어엿한 정식 직업임을 실감한다. 고용인도 진지하게 묻고, 또 업장의 특성과 업무내용을 설명한다. 일을 찾아 온 사람도 자신의 조건과 할 수 있는 일을 침착하게 밝힌다. 상세한 협의 이후 연봉에 관한 이야기도 오가고, 두 사람은 추후에 채용 여부를 정확히 알려주기로 하고 일어선다. 평화로운 카페건만 이면에 이런 긴장이 놓여 있었다니. 살아간다는 것은 정녕 쉽지 않은 과업이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옥정 다음은 카페 소담. 건물 2층에 있고, 화가들과 문인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곳이다. 내가 농반 진반으로 '난타'(蘭陀)라고 호를 붙여준 시인 박현수가 이 집 주인과 아주 각별하다. 무슨 '염문'이 난 것은 아니고, 어떤 '사연' 으로 두고두고 빚을 갚는 중이리고나 해야할까. 한번의 일도 잊지 않는 이 친구의 염결함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같은 건물 아랫층에는 더 이름난 찻집 '귀천'이다. 천상병 시인이 쓰신 시 '귀천'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투명한 가벼움에 반비례하여 귀하고도 무겁게만 느껴진다.

 

(서울 인사동 찻집 '귀천'. 사진=방민호 위원)

 

 

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무욕'의 삶과 생의 완전한 긍정이 잘 나타난, 명작 중의 명작이라 해야겠다. 천 시인은 삶의 과정을 "아름다운" "소풍"이라 했는데,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어느 누가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극히 드물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삶,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도 먼저 싸우는 삶 속에서 '아름다움'은 이 골목 안의 몇 개 폐가(廢家)와 같은 곳으로 숨어버리기 쉬울 것이다.

 

자신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행복')라고 한 천상병 시인의, 그 완전한 긍정을 되새기며 '한옥찻집'과 한정식집 '가회'까지 이르면 바로 '선천'의 맞은편이 된다. '한옥찻집'에 들어가 나는 요즈음 쓰기 시작한 무슨 여행기에 대해 생각한다.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참, '귀천' 지나 한옥찻집과 '가회' 사이에 막다른 작은 골목이 있고, 거기에 지금은 '인사동 그집'이 있다. 글을 쓰는 도중에 깜박 잊었다. 이 집 자리가 원래의 '이모집'이었다.

 

'가회' 다음에는 '선천'의 주차장이고, 그다음은 아무튼 '시가연'(詩歌演)이다. 왜 "아무튼"이냐고 물으신다면 잘 몰라서라고, 궁색한답변밖에 드리지 못하겠다. 카페이면서 갤러리와 소극장을 겸한 곳이다. 생맥주나 마시러 한밤에 들러본 게 전부여서 미안하다는 느낌이다. 이제부터 무슨 행사라도 여기서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다.

 

이렇게 해서, 나의 인사동14길 골목안 걷기는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30년 가까운 세월이다. 이 골목에서 30년도 안되었다면 '오래'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하리라. 그러나 국수를 말아먹듯 후루룩 흘러버린 세월이었다.

 

며칠 전 '선천' 주차장에서 대리운전 해주실 분을 기다리는데, 너무 일찍 인적 끊긴 이 골목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 뭐라도, 사람이라도 30년쯤이라면 쓸쓸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 시인, 소설가.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1994년 『창작과 비평』 제 1회 신인 평론상수상하면서 비평 활동 시작.문학 평론집으로『이광수 문학의 심층적 독해』,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감각과 언어의 크레바스』, 『행인의 독법』, 『문명의 감각』등이 있다.2001년 『현대시』로 등단,시집으로 『숨은 벽』, 『내 고통은 바닷속 한방울의 공기도 되지 못했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가 있다.2012년 『문학의 오늘』에 「짜장면이 맞다」를 발표,소설창작을 시작해장편소설『대전스토리, 겨울』, 『연인 심청』이 있으며 창작집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이 있다. 산문집으로 『경성에서 신의주까지』, 『서울문학기행』, 『명주』 등이있다.

 

출처 : 문학뉴스(http://www.munhaknews.com)

인생 말년에 동네 사람들 초상 사진 찍느라 걱정이 많다.

설득에 설득을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촬영하지만, 대개 반기지 않는데 있다.

인물의 정신이나 개성보다 오로지 멋지게 나오는 걸 원한다.

 

“개 같은 개성 보다 멋지게 찍어달라~“란 말도 여러 번 들었다.

하기야! 어느 누가 마지막 남을 사진, 멋지게 남기고 싶지 않겠는가?

그래서 외출 때처럼 모자를 쓰거나 수염을 깎아  찍기도 하고,

그 사람 개성과 정신이 드러난 내 꼴리는 사진도 찍는다.

 

며칠 전에는 충무로에 가서 초상사진을 몇 장 뽑았다.

전시할 때까지 빚쟁이처럼 쫓기기도 싫지만, 자기 사진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서다.

그러나, 다들 받아 보는 표정이 신통찮았다.

말은 안 하지만, ”사진을 이 따위로 찍냐?“는 것 같았다.

내키지 않으면 다시 찍어 주겠다고 말은 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 다음 날은 정동지가 교보문고에 책 살 일이 있어 기사로 따라나섰는데,

마침 장흥의 마동욱씨가 인사동에 있으면 얼굴이나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책 보따리를 챙겨 약속한 귀천으로 달려 갔더니, 아는 분 결혼식에 왔단.

 

동네 구장 같은 마동욱씨의 넉넉한 모습은 여전했다.

모처럼 시원텁텁한 '귀천'의 모과차 한 잔 맛보며, 마동욱씨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드론으로 인근 지역의 땅을 찍고 있다는데, 한편으론 답답한 생각도 들었다.

 

살고 있는 장흥은 물론 강진, 영암, 고흥 등 인근 지역 곳곳을 촬영하여 사진집도 여러 권 냈는데,

그 사진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더구나 촬영하면 찍힌 장소의 지번까지 나온다니, 사진으로 찍은 지적도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동자동에서 초상 사진 찍으며 열 받는 일들을 하소연 했더니,

자기도 마을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을 많이 찍어 봐, 그 사정을 훤히 안단다.

요즘은 주름까지 안 나오게 깨끗하게 수정해 줘야 좋아하지, 그냥 주어서는 안 건다는 것이다.

아무리 말끔한 사진이 좋다지만, 사람이 사람 같지 않고 인형같은 사진을 만든다면,

사진에 쪽팔리는 일이 아니던가?

 

그것은 인간 개인의 자존감을 떠나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짓이다.

사진찍기에 앞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자존감을 심어주는 게 더 시급할 것 같았다.

사람이 사람 대접 받으려면, 초상 사진부터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귀천에서 일어 나려니, 기다렸다는 듯이 차 빼 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요즘은 걷기가 힘들어 휠체어처럼 차를 끌고 나오지만, 매번 골목에 세워 민폐를 끼친다.

 

인사동 거리를 달려가다, 복잡한 거리에서 반가운 분도 만났다.

인사동을 자기머리처럼 반질반질하게 만들겠다는 김발렌티노 였다.

 

그가 인사동 청소부로 등장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는데,

이젠 인사동의 또 하나 명물 아닌 명사가 된 것이다.

 

정동지와 마동욱씨가 골목안 풍경전시가 열리는 인덱스갤러리에 올라간 틈에

차를 주차장에 집어 집어넣고, 모처럼 인사동 길을 걸어 보았다.

 

주말의 인사동 거리를 남인사마당에서 안국역 빙향으로 걸었는데,

남인사마당에서 인사동 사거리까지는 아직 문 닫은 업소가 많았다.

 

나들이객도 남인사마당 쪽보다 북인사마당 쪽이 훨씬 더 붐볐는데,

인사동 사거리를 기점으로 나들이객의 쏠림 현상이 심했다.

 

옷가게와 잡화상이 진을 친 거리에는 봄나들이 객들이 부산하게 오갔는데,

봄은 왔으나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차림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나 역시 봄바람은 불어도 마음과 몸은 돌덩이처럼 무겁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듯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사진, / 조문호

 

 

전통문화의 거리로 알려진 인사동도 많이 변했다.

 

화랑을 주축으로 골동품점, 표구점, 필방 등이 모여 있었고,

인사동 골목 골목에 똬리 튼 술집에는 예술가들의 낭만과 풍류가 넘치던 곳이었다.

 

며칠 전 인사동 거리에서 한참 방황했다.

인사동에 숨겨둔 애인도 없는데, 왜 틈만 나면 인사동을 기웃거리는지 모르겠다.

 

그날은 인사동 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이라도 남았는지 찾아보려 작심한 것이다.

 

기존 가게들이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며 잡화상이나 옷가게들이 대신했는데,

이제 내세울 만한 예스러움이나 인사동만의 풍류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특한 것은 아직 많은 화랑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월 따라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는 궁중 화가들의 작업실인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과 율곡선생도 인사동에 살았고,

400년 된 회화나무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 대감의 옛 저택인 민가다헌’,

박영효 대감댁이었던 경인미술관한옥도 인사동 유적으로 남았지만,

인사동의 추억으로 꼽을 대상은 아니었다.

 

1924통인가게가 생기면서 고미술 관련 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고가구나 고미술품 등 골동이 인사동으로 쏟아지며,

1960년대까지 고서점, 고미술상, 필방, 표구점 거리가 되었다.

'구하산방'과 수도약국도 그때 생겨난 것이란다.

 

지금은 민가다헌’, ‘경인미술관’, ‘통문관’, ‘통인가게’, 수도약국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뀌었다.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인사동과의 인연은

실비대학으로 불린 실비집이나 '시인통신', 고갈비 양푼집 등 이름도 없는 대폿집이 주 무대였고,

찻집으로는 천상병 선생이 계시던 귀천이나 수희제’, ‘초당등이었다.

 

그리고 옛 순라꾼 터에 있던 초창기 예총회관건물이나

건국빌딩에 둥지 튼 민예총사무실에 대한 추억도 많다.

 

'민예총'창립총회에 갔다가 우연히 고향의 은사 조성국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민예총' 공동의장으로 추대되어 자리하심에 깜짝 놀란 것이다.

 

그 외에도 그림마당 민이나 꽃나라흑백현상소', ‘민사협사무실 등

들락거린 곳이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골목골목 숨어있던 술집들도 대부분 사라지거나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아직 살아남은 식당은 부산식당이나 사동집이 고작이다.

 

그런 특정한 장소의 현장 보존성을 찾는다면

한때 카메라워크’ 작업실로 활용했던 옥탑방 철계단이 유일했다.

 

문 닫은 지 오래된 술집 문에 쌓인 우편물이나

옛 잔재물들이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뿐

인사동다운 것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마 경인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이두엽씨가 가장 인사동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사동과의 첫 만남도 사람으로 이루어졌지만,

인사동을 못 잊어 하는 '인사동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인사동이 그리운 것이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인사동은 유효하다.

 

사진, / 조문호

 

 

▲ 인사동 쌈지길 앞을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거리인 인사동의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은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700m 거리에 예술가들의 자취·혼 가득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두 사람은 시인이고/두 사람은 화가다/한 사람은 조각가고/한 사람은 무용가/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시인은 기타를 치고/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1929~) 시인의 시집 ‘인사동’(우리글·2006년)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다. 2000년 겨울부터 2005년 겨울까지 쓴 65편의 시에 인사동의 민낯을 담았다. 인사동 곳곳에는 예술혼이 잠겨 있다. 예술가의 자취가 묻어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이 서울미래유산이 돼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인사동에서 운영한 카페 ‘귀천’은 서울미래유산이다. “귀천에 목 여사는 없고/걸레스님만 걸려 있다/천 시인은 목 여사와 나란히 앉은 사진틀에서/생진아, 너 아직 스무 살이제이 한다/내가 쉰한 살 때 하던 소리다/지금은/내가 먼저 하늘에 왔데이 하고 웃는다/천 시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먼저 하늘에 왔다고 자랑한다” 목씨 사후 조카 목영선씨가 2호점을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서점 통문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생진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통문관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출입문은 대개 닫혀 있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기웃거려 보지만 천장까지 쌓은 책 때문에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통문관 주인 이종운씨는 이겸노씨의 손자다. ‘월인석보’, ‘청구영언’ 같은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수많은 자료 중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등 170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여든여덟 살이 되셨을 때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 구하산방
▲ 통인화랑

●조선의 근대가 태동한 문화·정치 일번지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구하산방은 ‘첩첩산중 신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191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 먹, 붓, 물감 등 2000종이 넘는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필방에는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수희 대표는 “우리 집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본래 일본 상인이 개업한 가게였으나 우당 홍기대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3대인 홍수희 대표는 2대 홍문희씨의 동생이다.

서울미래유산 수도약국은 광복 직후인 1946년 8월 15일 임명용씨가 개업했다. 약국에서 심부름하다 약종상 면허를 취득했으니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약업계 1세대다. 세간에 “수도약국에는 없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국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약사는 셋째 아들 임준석씨다.

종로구 인사동 194 하나로빌딩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말없이 서 있다. 1896년 한양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이 세웠다. 101년 전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 주차장 자리인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서울이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흘러간 옛 중심점이다.

이 밖에 인사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보신각 지하철 수준점,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극장,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유진식당, 빈대떡전문 열차집 등이 있다. 인사동은 서울의 근대가 태동한 곳이다. 서울의 첫 대학로였고, 서울의 첫 정치 일번지였으며, 서울의 예술과 음식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서울의 미래유산 집결지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 수도약국
▲ 카페 귀천
▲ 통문관

●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 고미술품 팔아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풍스런 거리이자 미술품과 골동품의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거리여서 외국인 친구나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교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골동품과 도자기, 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이면서도 ‘중국산 짝퉁’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인사동길은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진다. 삼청동~관훈동~인사동~청계천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생긴 신작로다.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하는 700여m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라고 하면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 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인사동 인접 지역을 통칭한다.

 

▲ '이문설농탕
▲ 낙원떡집
▲ 낙원악기상가

안국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들어오는 두 갈래 통로로 이뤄진 인사동의 몸통 인사동길은 모두 11개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통해 이웃 동네와 연결돼 있다.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됐다.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이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판 시기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고객이 바뀌었다. 19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화랑이 들어섰다. 필방이 속속 진을 쳤다.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동서남북에 서 있어도/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서는 공평동으로/남은 종로2가에서/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이생진 시인은 시집 ‘인사동’에 인사동의 역사와 상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서울신문 / 스크랩] 글 :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 사진 : 김학영 연구위원

지난 6일에는 인사동 거리에서 제법 긴 시간을 맴돌았다.

봐야 할 전시도 두 곳인데다 길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도 두 사람인데,

서로 만나기로 한 시간조차 달랐다.

 

인사동 사진은 거리를 지나치며 찍어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지만,

이번에는 한 시간 넘게 거리를 방황했더니 다리가 아팠다.

기다리는 동안 전시라도 둘러 보았으면 좋으련만

정영신씨와 같이 보기로 해 먼저 볼 수도 없었다.

 

거리는 구정을 앞둔 주말이라 평소에 비해 많은 사람이 오갔다.

더러 선물보따리를 들고 가는 모습에서 명절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반가운 풍경은 행인들이 거리에 내놓은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아무리 작가의 영혼이 빠진 그림이지만, 가격이 너무 쌌다.

이 삼만원 대가 주류고 비싼 게 오 만원이었다.

 

어떻게 만들어져 나왔는지 모르나 물감을 이겨 그린 그림도 있어,

인건비는 차지하고 재료비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 멀리 ‘나무아트’에서 김진하관장이 나오고 있었다.

박건씨의 ‘나는 산다’전에 가자기에 사람 만나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정오 무렵 만나기로 약속한 사진가 최인기씨가 드디어 나타났다.

조그만 양반이 도르르 굴러오듯 바쁘게 걸어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빙그레 웃는 동안에 마음까지 포근해 졌다.

 

그를 만나기로 한 건, 며칠 전 경남 함안장에서 연락 받았다.

‘눈빛출판사’에서 노량진구수산시장 상인들의 투쟁을 기록한 사진집을 만드는데,

서문 좀 쓰 달라는 원고청탁이었다.

 

그는 사진가이기에 앞서 노동운동가다.

가끔 현장에서 만나 지켜본 바로는 성실하고 겸손한데다 투쟁력 또한 치열했다.

좋아하는 후배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 바쁜 시간이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명절선물이라며 보리굴비까지 들고 왔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받은 선물도 다른 분 줄 정도로 선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굴비는 정영신씨가 좋아하는 생선이라 점수 따기 딱 좋았다.

 

마침 정오 무렵이라 ‘툇마루’에 밥 먹으러 갔다.

술 마시러 간 것이 아닌데도, 쥔장의 도토리묵 서비스까지 받았다.

맛있게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고, ‘귀천’ 목영선씨의 모과차도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사진 자료 담긴 유에스비를 건네받고 헤어졌다.

 

그도 다른 약속이 있었지만, 나 또한 정영신씨를 만날 시간이 되어서다.

지하철 역 방향으로 마중가니, 총총걸음으로 정동지가 나타났다,

바쁜 분 만나려니, 이 몸까지 바쁠 수밖에 없었다.

 

마루의 ‘아지트갤러리’로 갔더니, 눈에 익은 작품들이 줄줄이 걸렸더라.

전시 개막 직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화가 최경태씨 그림에 마음이 아팠는데,

작가 박 건씨와 김진하씨가 나타났다.

 

박건씨의 공산품 아트를 비롯하여 김주호, 김환영, 류연복, 박불똥, 박영숙,

성병희, 안창홍, 이윤엽, 이현정, 이하, 정영신, 정보경, 정복수, 정정엽, 하일지 씨 등

내 노라 하는 분들의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었다.

 

박건씨의 혜안으로 모운 작품이라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또 하나 기분 좋은 건 작가의 권위를 지키려는 거품은 모두 빼버렸다,

작품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이치에 대한 도전장에 다름 아니었다.

 

다음에 들려야 할 전시는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리는 금보성씨의 ‘한글’전이었다.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연지 35년 만에 150호 대작 22점을 내 걸었는데,

웅장한 스케일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마치 자음을 윷놀이 하듯 화면에 던져놓았는데, 문자와 디자인이 결합한 독창적 언어였다.

작가로부터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인사동에서의 일정은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동자동에서 일해야 하고, 그 다음 날은 경북 상주장에 가야했다.

무슨 놈의 일이 한꺼번에 몰려 똥오줌 못 가릴 지경이다.

 

서울역 홈리스 원고는 탈고한지 오래지만, 노숙인 코로나 확진자가 100여명이나

나온 데다 동자동 쪽방 촌 공공 개발 소식에 추가 할 원고가 생겨서다,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아산시를 시작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전시를 기획했다며,

필요한 사진 자료를 수집해 보냈는데, 정말 난감했다.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한 사진도 있었는데,

필름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사용했던 사진도 수정 이미지를 못 찾아 재 수정하느라 곤욕을 치루었다.

얼마나 마우스를 잡고 낑낑거렸으면 아직까지 어깨가 결린다.

오죽하면 오래된 필름 정리해 스캔 받아 두라는 정동지의 성화를 뭉갠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고려장 할 나이에 이처럼 일이 많은 것도 복이라면 복이고, 욕이라면 욕이다.

 

그토록 바삐 쫓겨 다녔으니 최인기씨 원고 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2월 중순까지 요구한 글이라 추석연휴에 쓰려고 밀쳐두었으나,

원고료 부담에다 자료 담긴 유에스비 조차 열어보지 못해 마음이 더 무거웠다.

 

그믐 날 제사음식 준비 하는 중에 최인기씨로 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어렵게 전화한 듯, 정중하게 원고 청탁을 거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앓던 이 빠진 것 시원해 받은 원고료를 즉각 돌려보냈는데,

거절한 이유가 마음에 걸렸다.

 

더 좋은 필자를 구했거나, 다른 이유라면 모르겠으나,

20여일 전 '인사동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말하고 싶다'전 포스팅에

“언제까지 미투로 생사람 잡을거냐?“는 글을 본 모양이다.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미투였다.

 

고질적인 성희롱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미투 운동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악용하거나 사적인 감정으로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가짜 미투가

기승을 부려 진짜 미투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폐단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부산의 이광수교수가 여러 차례 페북에서 지적한 바 있는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가들이 페미니즘에 집착하는 폐단이 떠올랐다.

그 문제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걸 여태 보지 않았던가?

 

개안적 견해에 불과한 미투의 문제점 제기에 안면까지 몰수할 정도라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주의로 흐르는 세태가 안타까운 실정에, 페미니즘 문제까지 부채질 한다.

 

메주알고주알 까발리다 보니 말이 엄청 길어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사동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의 정체성은 골동품이나 예술품보다 예술가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풍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10여 년 전부터 인사동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김명성씨가

인사동 대표적 묵객으로 여겨지는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선생의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관청의 협조를 얻지 못해 미루어져 왔다.

 

대중의 인지도가 낮은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과 멋쟁이 방송작가 박이엽선생은 차지하고라도

‘귀천’ 찻집을 주 무대로 인사동 낭만을 풍미한 천상병 시인 동상만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일요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유진오씨를 데리고 녹번동을 급습했다.

주말은 녹번동에서 개기는 것을 알아 술안주까지 준비해왔는데, 어찌 술자리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두 달 전 술을 사두고 갔으니, 술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진오씨는 이른 시간부터, 때 늦은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 흥겨운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술 마시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인사아트플라자’에서 장소를 제공해 그 인근에 천상병시인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동상을 제작할 작가는 최민화씨로 정해져, 머지않아 인사동의 상징물 하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인사마당에 대형 붓 하나를 오래 전에 세워놓았으나, 사물보다는 사람이 더 정겨울 것이다.

어떤 모습의 천상병 선생이 인사동에 등장할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애들처럼 깔깔거리는 천상병선생의 천진난만한 웃음도 매력적이지만,

천국 갈 시간을 기다리는듯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도 생각난다.

그리고 장난 끼 넘치는 모습의 술자리도 연상되었다.

 

다들 낮술에 취해 인사동으로 넘어왔다.

'서울아트가이드' 6월호 구하러 간다는 핑게로 따라나섰지만,

천상병시인 동상 세워질 장소가 궁금해서다.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건물 가까이는 자칫 건축 조각으로 여겨질 수 있어 조심스러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동집’ 골목으로 들어가는 코너가 마땅할 것 같았다.

 

주말의 인사동거리지만 거리두기 정도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예년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모습은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

 

거리를 지나치는 행인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마치 외계인들 세상 같은 삭막한 느낌도 들었다.

인사동도 세월 따라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천상병시인이 살아계신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목여사 말씀은 곧잘 들었으니, 쓰기 싫은 마스크를 턱 아래 걸치고 거리를 휘젓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동집 골목 안에 있는 지금의 최대감집이 선생께서 자주 드나들던 ‘실비집’이었으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 골목을 돌아 서는 포즈도 연상되었다.

 

아무튼 최민화작가의 기발한 구상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너무 일찍부터 김칫국 마시는 것 아닌지 모르겠으나,

인사동의 멋진 상징물이 들어서길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엊그제 인사동에 들려 어느 외국관광객 팀을 따라 다니며 유심히 지켜보았더니,

대부분 큰 길가에 있는 잡화상만 기웃거리며 군것질만 하다 돌아갔다.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한 듯 한데, 그런 사람들이 두 번 다시 인사동을 찾겠는가?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가는 인사동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전통과 예술의 거리로 살려 낼 방법을 다 같이 찾아내야 한다.
정체성을 잃고 잡상들만 득실댄다면, 인사동의 유명세를 언제까지 유지하겠는가?




인사동은 우리 전통과 함께 예술가들의 발자취가 담긴 곳이다.




먼저, 인사동의 역사부터 한 번 살펴보자.
조선 건국으로 수도가 된 한양은 창덕궁이 있는 북촌 주변에
고관들의 집과 양반들의 저택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멀리 떨어진 북악산과 남산자락에 모여 살던 양반들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후 북촌은 조선의 역사와 함께 500년의 역사를 지켜왔지만,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하여 왕조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사라지며,
북촌 양반들의 가세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살기 막막해진 지체 높은 양반들이 집안의 귀중한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하며
북촌주변이 점차 골동품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1914년 관인방 일대의 이름을 인사동으로 바꾸었다.




해방 후에는 전통과 현대의 모습이 뒤섞인 매력에 끌려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전통찻집과 전시장들이 생겨나며 전통과 낭만의 거리가 형성된 것이다




인사동에 화랑과 표구점이 많이 들어서며 미술인의 출입이 꾸준히 늘어났다.
60년대 명동을 거점으로 모이던 문인들이 관철동을 거쳐,

70대 후반 인사동으로 옮겨오며 '사루비아'다방을 거점으로 인사동 문화가 꽃 피우게 된다. 
80년대 초반에 생긴 천상병시인의 찻집 ‘귀천’과 '누님칼국수'로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실비집'과 '하가'는 물론 피맛골'에 박종수시인이 문을 연 '시인통신'도 많은 예술가들이 더나들었다.

90년대 들어 이해림씨가 개업한 '평화만들기'에는 예술가들과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기도 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인사동에 시인들과 관련된 자리가 많았다는 점이다.

63년 김상옥시인이 '아자방'이란 골동품점을 차려 문인들의 교류처가 되었고,

목순옥씨가 차린 '귀천'에 이어 84년도에는 정동용시인이 교장으로 있던 '시인학교'도 개업했다.

그 이후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에서 이생진시인이 정기적인 시낭송회를 가졌으며,

음유시인 송상욱씨가 인사동에 집필실을 차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소리시인 이춘우씨가 시 낭송회를 위한 업소 '시가연'을 개업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시공간이 몰려 있어 미술인들의 출입이 많았던 반면, 문인들의 출입도 이에 못지않았다.
그 이후 '귀천'의 천상병선생과 목순옥여사를 비롯하여 민병산, 박이엽, 강 민, 심우성선생 등

인사동을 사랑하던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살아계시는 분마저 몸이 불편해 잘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대형건물이 여기 저기 들어서고 새로운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며
옛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예술가들의 발길마저 서서히 끊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인사동에 애정을 쏟아 붙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천상병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명성씨는 긴 세월 동안 사재를 털어 인사동 예술가들을 지원해 왔다.

틈틈이 모임을 주선하여 예술가들의 판을 만들고, 원로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는 애정을 보였다.

‘통인가게’ 김완규회장은 무료 판소리공연을 정기적으로개최하여 우리문화를 알리는데 힘 써 왔으며,

‘나무화랑’을 운영하는 미술평론가 김진하씨는 좋은 전시들만 유치하여 인사동 전시문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리고 작고한 김수영시인이 찍힌 판화를 담벼락에 붙이는 Street Art를 펼치는 이태호교수 같은 분이 있기에

인사동은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내가 몰라 그렇지, 어디 이 뿐이겠는가?




지금이라도 전통과 낭만의 거리를 되찾기 위해 많은 분들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먼저 인사동에 몰려 있는 전시장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자.




그 첫 번째 시도로 인사동 전시 소식을 알려주는 간단한 주간지를 만들어 안내소에 배치하자.
미술평론가 한 분을 선정하여 전시 소식지를 만들고 좋은 전시를 집중적으로 소개하자.
또한 인사동에서 전시되고 있는 다양한 전시를 홍보하므로서, 명실상부한 전시문화의 본거지로 만들자.




둘째, 예술가들이 다시 인사동으로 모여들게 만들어 인사동 낭만을 부활시키자.
천상병시인, 민병산선생, 박이엽선생, 중광스님 등 돌아가신 분들의 동상을 골목에 세우는 등

인사동에 예술혼을 불어넣자.




인사동의 매력은 이리 저리 얽힌 수 많은 골목이 아니던가?
골목마다의 특징을 살려 문학의 거리나 미술의 거리로 지칭해
예술가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찻집이나 술집, 어디를 가도 반가운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모여 들 것이고,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멋이 낭만의 거리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기존의 ‘인사전통문화보존회’는 상인들의 모임이라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종로구청’ 또한 그들의 눈치나 보는 탁상행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제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나서는 길 밖에 없다.
다 같이 지혜를 모아 종로구청과의 협의체부터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협력을 부탁드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7일 오후7시부터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 이사회가 인사동 '이모집'에서 열렸다.

2012년 에 이사회가 열리고 처음이니 근 5년 만에 열리는 이사회였다.

사단법인의 이사회를 5년 만에 연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를 신문에 기고하기 위해 여기 저기 정보를 묻고 다닌 터라, 그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여지 것, 천상병선생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자가 사무국장에서 부이사장 직함까지 맡아 혼자 갖고 논 것이다.

그동안 매년 봄마다 의정부에서 천상병예술제를 개최하고 천상병문학상도 여러 군데서 시상했으나,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감사는 제대로 받았는지, 임원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김명성, 김병호, 구자홍, 목영태, 길상호, 공윤희이사 등 나까지 일곱 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모두들 자기가 이사라는 것조차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관심이 떠났는지 흐지부지됐다.

김병호 부이사장에게 물었다.“5년 만에 여는 이사회인데, 그동안 어떻게 처리했냐?”고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감사가 두 분이나 있으나 한 분도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관심 없는 사람을 앉혀 두었으니, 제대로 감사 했을 리가 없다.

“회계나 업무처리에 관해 조사를 의뢰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죠?”라고 물었다.

하기야, 혼자 독주하도록 방치한 김명성이사장의 책임 또한 크다.

그러나 개인의 잘못보다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활성화시켜 인사동 발전에 기여하게 하는 게 급선무라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 회의진행을 지켜보았다.

회의록에는 천상병문학관건립을 위한 천상병선생의 저작권과 유품관리 권한을 의정부시에 넘겨주자는 안건과,

내년 4월22일부터 열릴 ‘제14회천상병예술제’ 준비를 비롯해 임원개선 및 사업회 활성화 방안이란 명목만 적혀 있었다.

천상병예술제 계획안도 십 여 년 넘게 해온 방식에서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참석 이사들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천상병 선생 조카인 목영태이사는 아직 저작권이나 유품을 넘길 상황이 아니라고 말했고,

김명성이사장은 의정부 행사도 좋지만, 인사동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

그동안 벼랑에 선 ‘아라아트’를 살리기 위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나,

이제부터 인사동과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함께 발전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으로 신경 쓰고 있었다.

먼저 기념사업회 사무실부터 인사동에 옮기려고 좋은 장소를 물색해 두었다는 것이다.


사실 천상병선생은 의정부보다 인사동과 더 연이 깊은 분으로, 인사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인사동에 있는 ‘귀천’이 천상병시인의 창작무대였고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로구청’이나 ‘인사전통문화보존회’에서는 특색 없는 관광지로 변해버린,

인사동의 정체성을 살리는 문제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천상병시인께서 돌아가신 20주기를 맞은 3년 전, 인사동‘아라아트’에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가지며,

인사동에 천상병선생 동상건립을 위한 구체적 제안이 있었으나 해당 관청에서는 마이동풍 격이었다.

이제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를 모태로, 인사동을 사랑해 온 ‘인사동사람들’이 힘을 모을 때가 된 것 같다.

인사동 다운 문화와 풍류가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풍류 깃던 문화1번지를 다시 살리기 위해 새바람 한 번 일으키자.

사진, 글 / 조문호








천상병선생의 어릴 때 모습으로, '귀천'에 걸린 사진이다. (위측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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