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 날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빨래줄에 걸 사진 값이 없어 허둥대다 전시를 하루 남긴, 밤 늦게서야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주인도 없는 남의 작업실에 들어가 자정까지 사진 뽑아, 자르고 정리하느라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었다.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일어나보니 오전 아홉시였다.

부랴부랴 공원으로 달려가 빨래 줄에 사진을 걸었는데, 마침 강 호씨가 공원에 나와 있어 많이 도와주었다.

오전10시경 준비를 끝낼 수 있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추어 전시 할 수 있었다.






그 때야 동자동사람들이 새빛 공원으로 하나 둘 모여들어 빨래줄에 걸린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여기 용성이 사진 있네, 라면 먹고 있잖아”, “준기 썬그라스 죽이는데!”라는 등 사진을 들여다보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또한 동자동 ‘나눔의 집’에서는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추석한가위 합동제례가 열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차례대로 술을 올리며 조상님께 큰 절을 올렸다.

다들 고향을 찾지 못하는 불효막심에 용서를 비는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오전 11시경에는 주민들에게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도시락과 붉은 사과 한 알씩을 나누어 주었다.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도 그렇지만, 받아들고는 공원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식사하는 모습에서 연민의 정이 일었다.





그런데 빨래줄 사진전에 이변이 생겼다.


‘동자동 사랑방’의 강동근 사업이사가 돌아다니며 5,18묘역 참배사진을 골라 찢고 있었다.

그것도 도끼로 내 목을 친다는 등, 끔찍한 욕설까지 퍼 붇는데, 귀가 막혔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원호씨가 강씨더러 죽일 놈이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평소에 말 한마디 없던 분께서 어지간히도 화가 났던 모양이다.


강씨가 찍힌 사진은 지난번 광주 5.18묘지에서 찍은 공식적인 사진들이다.

강씨는 개인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동자동 사랑방' 임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런자가 막말을 해대며, 허락도 받지않고 남의 사진을 손괴한 것은 초상권 침해가 아나라 범죄행위다.

이건 분명 개인적 앙심에 의해서거나, 아니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헤프닝일 것이다.

.

그 사진은 개인 기념사진이 아니라, 주민들의 시대적 역사성도 지닌다.

구린데가 있어 자기의 모습을 숨겨야 한다면 임원직을 맡아서는 안되고,

그런 공적인 자리에는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찍을 때 포즈는 왜 취했는가?




당장 공개적인 해명과 사과를 촉구하며,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임원이란 자체가 조합원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다.

그 자리에는 동자동 식구들만 있었던 자리가 아니라, 신문 기자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찢은 일곱장의 518묘역 참배사진은 단체사진이라 먼저 본 사람이 가져가는 것이다.

집에 가져가 찢던 말 던 상관할 바 아니지만, 전시사진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찢는 건,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니다.

다른 사람까지 못 가져가게 방해하는 꼴이니, 그런 이기주의가 어디 있나.


저런 자가 어떻게 '동자동사랑방'의 사업이사가 되었는지도 궁금하지만, 공동체 자체의 존립이 의심스럽다.






그자가 떠나고 나니 김용만, 이기영, 송범섭씨 등 또 다른 사진주인공들이 나타나 싱글벙글 자기 사진을 골라갔다.

뒤늦게 나타난 정용성씨는 자기 사진이 없어졌다며 울상이었고. 정재헌씨도 사진이 없어졌다며 찾고 있었다.

용성이네 가족과 정재헌씨 사진은 그들만 찍힌 사진들이라 누가 전해주려 챙겨 두었을 것이라며 달랬다.


마침 취재를 나왔던 정영신씨가 이제 일 년 동안 동자동을 기록했으니, 끝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사진을 훤히 아는 자가 이 무슨 소린가? 이제까지 주민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시작일 뿐인데...






솔직히 사진쟁이로서의 욕심이 없을 수는 없다.

빈민들이 사는 쪽방 촌이 동자동 뿐만 아니니, 서울의 중점 관리지역 다섯 곳이라도 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 곳에 2년씩만 잡아도 10년이나 걸리는데, 그 때까지 내가 살 수 있겠나?

그 동안 정들었던 사람이 눈에 밟히기도 하고...






추석 하루전인 3일은 ‘동자동사랑방’에서 마련한 합동제례에 음식을 나누며 노래자랑까지 하였으나,

사진 때문에 허둥지둥 돌아다니느라, 가 보지도 못했다.





찍힌 사람들과의 약속이 추석이기도 하지만 사진 뽑을 돈이 없어 미루다, 임박한 3일에서야 간신히 준비를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 정선아라리촌의 ‘문학콘서트’에서 만난 김여옥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려고 꼬불쳐 두었다며 10만원을 주었고,

서초동에서 밥 집하는 누님이 과일이라도 차례상에 올리라며 보내 준 돈으로 사진 만들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러한 급박한 시기에 정영신씨 프린트기에 이상이 생겨버렸다. 분명 잉크가 남았는데, 없다며 작동이 되지 않았다.

연휴라 수리기사를 부를 수도 없지만, 새 잉크를 구입할 가게도 없었다.

다행히 사진하는 후배 하재은씨에게 부탁하여 주인도 없는 작업실에 처 들어가,

자정이 가깝도록 프린트 해, 어렵사리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재은씨에게 재료비라도 보내드리려고 연락했더니, 황송하게도 받지 않겠다는 거다.

전시협찬으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이 돈은 내년 어버이날 사진제작비로 쓰기위해 묻어두었다.





사실, 이번 빨래줄 사진 나눔전도 ‘동자동사랑방’에서 행사를 치루는 3일에 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치루는 4일에 할 것인가? 망설였으나

일이 풀리지 않아 떠 밀려 4일에 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더 잘된 것 같았다.


전 날은 박원순 시장을 비롯하여 기자들까지 달라붙었으니, 안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보여주기 위한 성격이 짙어 부담스러울 뿐더러, 추석명절이 아닌, 하루 당겨 합동제례를 치루는 것도 마땅찮았다.

추석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진짜 오 갈 때 없는 빈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 년에 봄 가을 두 번씩, 어버이날과 추석마다 사진을 돌려 줄 생각이다.

때로는 사진 값 조달에 어려움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이들의 흐뭇한 표정에서 보람도 느낀다.


특히, 그 날은 사진 찍는다고 멱살까지 잡았던 분이 찍어 달라 했고,

평소에 카메라를 피해 다니던 분도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내가 하는 일이 단발성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그 진정성을 읽은 것이다.






요즘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일들이 하나같이 아슬아슬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아마, 만지산 산신령님이 도와주는 것 같다.


“산신이시여!  이 늙은 몸 하나 제물로 바치려 하오니,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6일의 동자동 새꿈 공원에는 김정호, 유영기, 정재헌, 이재화, 김원호,

이홍렬, 강병국, 강재원, 김용만씨 등 반가운 분들이 나와 한담을 나누었다.

이 날은 빨래줄 전시로 사진을 돌려주기로 약속한 추석이 다가와서인지,

영정사진을 찍어달라는 분이 의외로 많았다.

 


주민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람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박성일씨는 몇몇 사람들은 양심을 전당포에 맡긴 사람들이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그런 이들 때문에 동자동 빈민을 지원해 온 명성도 손을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정민씨는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영정사진을 부탁해 찍어주었는데, 사진은 언제 줄 것이냐는 것이다.

추석에 빨래줄 전시 때 가져가라니, 그 때는 없다고 말했다.

육개월 정도 동자동을 떠날 것인데,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젠 사람이 무섭다며, 갑 질하는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다는 말도 덧 붙였다.

착한 정민씨가 무엇에 저렇게 마음을 다쳤을까?



 


짐작은 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 역시 실태를 알고 나니,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굴 위해, 뭘 위해 개고생을 하는지 한심한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선량한 주민들이 더 많다는데, 위안을 갖고 산다.

 

제일 시급한 것은 빈민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

주민들이 민관단체의 잘 못된 관행이나 갑 질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도 빈민들이 발 벗고 나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힘없다며 포기해버리고, 알고도 모른 척 한다면, 절대 개선할 수 없다.



 


지탄받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돈 없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정작 가진 자들이다.

그 많은 돈을 정당한 노력에 의해 벌었겠느냐? 전두환, 이명박 같은 도둑놈들이 가진 자들의 대부분이다.

요즘 일부 언론에서 빈민들의 인권 운운하며, 빈민들을 가두고 소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몰지각한 사진인들의 가시적인 접근도 문제이긴 하지만, 빈민들은 숨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당당하게 나서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빈민들이여! 자부심을 갖고 우리들의 권익을 되찾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자.

오는 4일 추석날 펼치는 동자동 새꿈공원의 합동차례도 함께하자.

첫 빨래줄 전시였던 5월 어버이날 이후에 찍은 사진을 다시 빨래 줄에 걸어 당사자에게 돌려주려 한다.

영정사진은 물론 지난 5‘5,18민주묘지 참배에서 찍은 사진과 도끼상소 등

각종 행사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으니, 많은 참여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지난 25일 오후 무렵, 반가운 손님이 방문했다.
‘서울역쪽방상담소’ 직원이 추석선물을 가져 온 것이다.
선물봉투에는 만원짜리 상품권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선물의 가치보다 배려하는 마음이 담겼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거지처럼 줄 세우지 말고, 필요 없는 상품이 되지않도록

빈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상품권을 주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았던가.

이게 빈민들을 위한 값진 봉사이며, 진정한 선물이다. 
힘들어도 직접 방문하여 전달해야만, 그 고마움도 배가된다.
몸이 불편해 나오지 못하는 노인들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후암로 57길 1동 3층에 사는 조장섭씨는 책을 베게 삼을 정도로 독서를 즐긴다.
다들 티브이만 끼고 사는 쪽방촌에서 책읽는 모습을 보기란 흔치않다.

매번 빌려 보는 그에게 책 한 권 선물하고 싶어, 상품권 한 장 주었다.
남은 한 장은 책 좋아하는 정영신씨에게 추석선물하련다.


덕분에 기분 좋은 추석명절을 보낼 것 같다.
다들 행복한 추석 명절 보내길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토요일의 동자동은 빵 배급 시간을 제외하고는 한가했다.
서울역 주변을 돌아봐도 오갈 때 없는 노숙인들만 눈에 들어왔다.

문 닫힌 ‘사랑방’ 사무실 앞에는 김호태, 조두선, 선동수씨 등 사랑방을 끌어가는 분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사진 찍는 김원씨도 끼어 있었다.

김호태 사랑방 대표에게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아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한마디로 거절 당했다.

그 거절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바쁜 일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다음으로 미루었다.
사랑방의 운영을 책임진 분이라면 앞으로의 포부나 진행 상황을 알려
조합원들의 알권리를 해소해 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그 날은 구멍가게가 문을 닫아서인지 다른 날에 비해 한가했다.

남종호, 유정희씨가 막걸리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유정희씨는 아홉 살 때부터 남종호씨를 형님처럼 모셨단다. 각박한 세상에 그 오래된 인연이 부러웠다.
한 쪽에는 이기영, 이상준, 이홍렬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는데,
그 날의 화제는, 몇 시간 전 이원식씨가 경찰에 연행된 사실이었다.

요즘은 이원식씨가 폐품을 열심히 주워 모아 어렵게 살고 있으나,
오래전 싸움에 연관되어 부과된 벌금 70만원을 내지 못해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유롭지 못한 것 외에는 지금 사는 것보다 더 편할 수도 있겠다싶다.

“원식씨 부디 잘 수양하고 돌아오시게나~”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 쪽방주민을 위한 무료 이발소’가 동자동 ‘새 꿈 공원’에 차려졌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주선한 지난 12일의 무료이발소는
지역주민 문성재씨가 자원봉사로 나선 것이다.
이홍렬씨 등 극히 일부 주민들이 머리를 잘랐지만,
추석에 대한 그리움을 일으킨 하루였다.






대부분 고향이나 가족을 등진 분들이라 추석이 다가와도 가지 못하는 분이 더 많다.
그래서 ‘동자동 사랑방’에서 공동차례도 지내고,
노래자랑을 하는 등 추석잔치를 벌이지만,
어찌 옛날 추석의 아련한 그리움에 갈음할 수 있겠는가?






옛날 명절 대목이 되면 목욕탕과 이발소 가는 것은 피해갈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 목욕탕도 싫어했지만, 이발소는 딱 질색이었다.
가기만 하면 머리를 짧게 깎아 촌놈을 더 촌놈같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명절 대목만 되면 이발소는 사람들로 붐볐다.
순서를 기다리다 지켜본 이발소 풍경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주인은 바리깡과 가위를 바꾸어가며 분주하게 머리를 잘랐고,
주인아줌마는 뜨거운 물수건으로 얼굴을 덮어놓고, 혁대에 쓱쓱 면도날을 문질러댔다.
바보처럼 늘 비실비실 웃는 아저씨는 손님들 머리 감기느라 물조리 춤을 추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단지 눈길을 끌었던 것은 벽에 걸린 야한 달력 사진보다,
시쳇말로 이발관그림이었다.






깨진 대형 거울 위에 그린 그림이었는데,
거울에 금간 자욱 따라 뻗은 고목 가지에는 이름 모를 새들과 꽃이 여기 저기 그려져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자욱 따라 그리다보면, 뭔가 어색해야 되는데, 너무 잘 어울렸다는 것이다.
누가 그린 그림인지 모르지만, 어렸던 내가 보기에는 꽤 좋아보였다.
저런 그림과 유명 화가의 그림은 어떻게 다르며,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는지도 궁금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저런 의문 속에 머리 감으려 고개를 쳐 밀었는데,
비눗물이 들어가 눈이 따가워 죽을 지경이었다.
눈, 눈,하며 거품을 무니, 바보 아저씨는 비누 묻은 손으로 눈부터 문질렀다.
잇따라 물조리에서 쏟아지는 물 세레에 시원해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콩나물시루에 물 뿌려 키우 듯, 내 머리도 키웠다는 생각이 든다.






이발 무료봉사 소식 전한다는 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예전만큼 추석이 설레지는 않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하루였다는 말이다.
이번 추석에는 공원에서 열리는 콩쿨대회에 나가 대야라도 하나 타고 싶지만,
이가빠져 새는 소리 때문에 상 받기는 틀린 것 같다.






다들 잊을 수 없는 추석명절의 추억 한 자락씩 남기시길...

사진, 글 / 조문호










내가 사는 쪽방은 본래 송범섭씨가 살던 방이다.
작년 6월에 단장하여 입주시킨 ‘디딤돌하우스’로 이사 간 양반인데,
일 년 쯤 살다 다시 우리 건물로 돌아 왔다.

입주한 주민을 내쫓으려는 건물주와 싸워 만들어 낸 ‘디딤돌하우스’는
당시 쪽방 사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방세도 다른 곳보다 싼데다, 실내외가 깔끔하기 때문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옮긴 방 자랑을 해댔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따라가봤더니, 방을 깔끔하게 꾸며놓았더라.
나비를 만들어 창틀에다 촘촘히 붙여 놓았는데, 행운의 나비를 계속 만들 것이라 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 없지만, 방 꾸미는데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하고 일 년만에 다시 돌아 왔는데,

그는 어디에서 살아도 방 내부는 잘 정리해 놓고 산다.
4층에는 빈방이 없어 3층에 살지만, 수시로 4층을 오르내린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조건도 그 곳이 더 좋지만, 이사하는게 번거롭기 짝이없기 때문이다.
‘왜 돌아왔냐?’고 물었더니, 한마디로 재미가 없더란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외롭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얼마 전 쪽방 사는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는 절대 반대한다고 했다.
불편한 변두리 아파트일 것이 뻔한데, 외로워 못 산다는 것이다.
‘얼마나 살 것이라고 거기서 징역생활을 해야 하느냐?’는 거다.

혼자 사는데 무슨 아파트가 필요하며, 관리비도 부담이라고 했다.
지금 사는 동자동은 교통요충지라 어디든 쉽게 다녀 올 수 있지만,
그곳에서 시내에 나오려면 온 종일 걸린다고 말했다.






송범섭씨는 한쪽 뇌에 이상이 있어 심한 정신적 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옛날엔 주방장 생활을 하며 성실하게 살았으나,
세 번의 결혼생활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고 했다.
딸까지 두었으나, 결국 혼자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병에 대한 구체적인 증상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 볼 수 없었는데,
보기로는 활달한 성격이다.
바쁘게 이웃 방을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따끈 따끈한 소식도 전해준다.
틈틈이 ‘쪽방상담소’에 나가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며 성실하게 산다.






그가 오고부터 닫혔던 족방 문들이 여기 저기 자주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장기를 두거나, 술을 마시거나,  옆방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좁은 복도에 자리를 깔기도 하지만, 서로 정 나누며 소통하는 모습이 보기좋다.
다들 방문 열듯, 마음의 문도 활짝 열었으면 좋겠다. 

누추한 방에 살아도 이웃과 정 나누고 산다면, 잘 사는 것이다.
송범섭씨가 만드는 행운의 나비가 훨훨 날아, 건강도 되찾고 가족도 되찿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강석남(64)씨가 동자동에 둥지 턴지가 올해로 5년째다.

몸이 아파 일을 그만두었고, 돈을 벌지 못하니 가정에 불화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가족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이혼하여 동자동으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남은 것 다 넘겨주고,

단돈 15만원에 옷가지 담긴 배낭하나 달랑 짊어지고 가족과 등졌다.

 

요즘은 폐암에다 당뇨, 고혈압 등의 지병에다 불면증과 우울증까지 겹쳐 약에 싸여 산다.

몸 자체가 그의 종합병원 수준이다. 아픈 걸 잊으려 사약 같은 술과 담배까지 한다.

그리고 그에게 생명줄 같은 기초생활수급비도 마음이 좋아 이웃에 다 푼다.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어려운 사람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동자동 사는 분들의 사정이 보나마나니 호주머니에 돈 남을 틈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 희망이란 말은 잊은 지 오래다. 죽지 못해 살 뿐,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다들 가슴 아픈 사연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은 대개 부정적이다.

일하지 않고 술로 세월을 보낸다는 단편적인 생각들인데,

젊은 층 중에 그런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다.

다들 일자리도 얻을 수 없지만, 몸이 성치 않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할 것이냐?

 

세상을 헤쳐 나갈 아무런 방도가 없으니 체념하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그들이 더 아파하는 것은 사회로부터 받는 멸시와 소외감이다.

제발 잘사는 사람들의 잣대로 그들을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과연 하늘 님이 계시기는 계신 것인가?

계시다면 한영애 노래처럼 세상 조율 좀 해주세요,

 

사진, / 조문호











난, 오래전부터 생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울 엄마가 살아 계실 때는 하는 수 없어 생일상을 차렸지만,
돌아가신 후로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이 살 던 정영신씨와 늘 부딪히는 문제인데,
작년에는 정영신 장터 사진전과 연결해, 억지 칠순잔치도 벌였다.




페이스 북에서 생일축하 메시지 받기조차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이번 생일을 기해 나쁜 습관 하나 바꾸기로 작정했다.
똥 누는 화장실 옆에서 설거지하는 게 싫어, 일 년동안 밥 한 번 해먹지 않고,
교회에서 나누어 주는 노숙자들 빵 뺏어먹으며, 일회용으로 살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배 속에 똥을 잔뜩 넣어두었는데,
똥통인들 설거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밥해먹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9월4일 생일에 맞추어 쪽방상담소에서 밑 반찬 표를 나누어 주었다.




삼개월간 열 차례에 걸쳐 나누어 주는 ‘밑반찬 지급 확인서’였는데,
처음 받는 일이라 30분전에 나갔으나, 모두 나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250명 선착순으로 준다니까, 다들 일찍부터 나온 것이다.




가구별로 신청 받아 조금씩이라도 골고루 나누어주는 방법은 없을까?
무슨 똥개 길들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한 시간씩이나 땡볕에 세워 구워야 하나?
늙은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당기면 될텐데,
기어이 오전10시를 채워 쪽지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여지 것 ‘한강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주는 빵 배급은 줄을 서 보았지만,
반찬배급은 처음이었는데, 노숙자들이나 모르는 분이 많던 빵 배급에 비해,
반찬배급은 주민들이라 대부분 아는 분들이었다.



김정호, 송범섭, 강병국, 이재화, 유한수, 정재헌, 김정길, 김원호씨 등
반가운 분도 많이 만났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한 쪽에서는 막걸리를 마시는 분도 계셨다.
다들 질서를 잘 지켜 11시경에 끝났는데, 못 받은 분은 없는 것 같았다.




‘밑반찬 지급 확인서’라고 적힌 쪽지에는 열 군데의 확인란이 있었는데,
'한강교회'에서 나누어 준 빵 배급표와 비슷했다,
이제 빵은 받지 않기로 했으니, 노숙자 신세는 면한 것 같았다.
어떤 밑반찬을 줄지 궁금했으나, 처음 나누어 주는 7일이 기다려졌다.




오후에는 정영신씨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이 생일이니 저녁식사라도 함께하자는 것이다.
시간 맞추어 녹번동에 갔더니, 조촐하지만 최고의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지난 번 정선에서 갖다 준 ‘메이드 인 만지산’으로 밥 반찬을 만들었더라.
7년 전 심은 도라지 한 뿌리를 캐 주었는데, 거짓말 좀 보태 어린애 팔뚝만 했다.
술은 지난번 김남진씨가 동자동에서 파티하라고 준 ‘MIXX TAIL’이 있었다.
개복숭아 효소에 칵테일해 마시니 맛이 죽였다.




이런 저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해가며 마셨더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동녘이 밝아 오는 것 보고 잠들었으니 보나 마나지만, 죽어도 좋았다.




삼일 뒤에는 쪽방상담소에 밑반찬 받으러 갔다.
밥차에서 문규도, 송범섭씨가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나누어 주는 밑반찬은 우엉조림과 닭고기, 두 가지 였다.



일회용 밥 한 개와 음료수 하나도 끼어 주었다.
한 두 끼 먹으면 끝날 반찬으로, 밑반찬이라 하기엔 좀 그랬다.




“제발 잔소리 말고, 주는 대로 받아 쳐 먹어라”
감히 거지 주제에 어따 대고...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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