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내 길이 되는거야

 

생각나는 데로 만들고 그리며, 작품이란 틀 자체를 깨부수는

김을의 김을파손죄전이 조계사 옆 ‘OCI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김을은 기존의 타성을 깨기 위해 늘 새롭게 생각하며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는 작가다.

전시장 1층에 설치된 작업실에는 수많은 망치가 벽에 걸려있었다.

붓이 있어야 할 곳에 망치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창작이란 망치로 깨부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난감 같은 다양한 오브제를 비롯한 수많은 드로잉 작품이 삼 개 층에 빽빽이

전시되었는데, 누구처럼 특정한 주제도 없고 일관된 방식도 없다.

닥치는 데로 만들거나 그리고, 아니면 사정없이 파손한다.

작업을 일로 보지 않고 즐기는 놀이에 가깝다.

 

전시장 곳곳에 갖가지 인형 형상이나 머리가 어지럽게 늘려 있고,

목마나 수레가 놓여있기도 해, 마치 어린이집이나 놀이터에 온 기분이다.

인형의 신체를 분해하여 다시 조립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다양한 행위들이 어린이처럼 자유롭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심각한 척 그렸으나 능청스러운 익살이 있고, 세상을 향한 야유도 엿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적절히 버무린 균형감이 김을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중요한 요체다.

 

작품 하나하나의 섹션 구성이나 형식이 작품 전체에 걸쳐 프랙털처럼 등장하기를 거듭한다.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으로 변형시킨 작품에서 우상파괴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요란한 놀이를 통해 그동안의 사색을 오브제나 드로잉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다.

 

작가를 빼닮은 민머리와 미소가 있는가 하면, 앙증맞도록 귀여운 인형도 곳곳에 늘려 있다.

물신적 욕망을 드러내는 인형 같은 오브제도 어쩌면 확장된 드로잉인 셈이다. 

그의 작품은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싱싱한 날것 같다.

 

작가는 무엇을 그릴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그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목표라지만, 작업에 임하면 여전히 갈등한다. 드로잉 곳곳에 등장하는

“나의 그림이 개지랄을 떨고 있다, 넌 무조건 지옥행!, 그림 이 새끼" 등의 글귀 들이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림을 집어던지는 사람, 날아가다 처박혀 벽으로 흘러내리는 그림, 

잘 마무리하다 냅다 긋고 찢은 캔버스까지 각양각색이다.

이와 같은 행위들이 작가의 진솔한 마음을 말해주는 민낯인 것이다.

 

어쩌면 김을파손죄란 주제 자체가 김을의 미술 행위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도화된 틀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 나려는 자유로운 행위 자체가 김을 작업의 핵심인데,

선택한 오브제나 드로잉을 파손해가며 만들었다는 자체는 창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동판을 부조처럼 오려 붙인 뒤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는 자화상 연작을 그렸고,

자신의 뿌리를 가계사에서 찾는 혈류 연작도 발표 했다.

이는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가족 또는 핏줄의 내면으로 영역을 확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인생의 슬픔이나 한을 산이라는 자연 공간에서 해방시키려는 ‘이산 저산’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가의 뇌리와 감성의 망에 걸려 탄생한 김을파손죄는 오는 64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완상의 벽(玩賞​의 癖)

 

2022 소장품 특별展 

2022_0113 ▶ 2022_0305 / 일,월,설연휴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이 전시는 2017년 한국 OCI 미술관에서 개최된 『그 집』을토대로 재구성되었으며,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의「트래블링 코리안 아츠 Traveling Korean Arts」사업 지원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주관 / 주오사카한국문화원기획 / OCI 미술관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설연휴 휴관▶ 전시관람 사전예약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1,2층 전시실

Tel. +82.(0)2.734.0440www.ocimuseum.org

 

OCI 미술관은 2022년을 맞아 소장품 특별전 『완상의 벽』전시를 개최한다. 한국의 우수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의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Traveling Korean Arts)'사업 일환으로 주오사카한국문화원이 주관하고 OCI 미술관이 기획을 맡았다. 앞선 2019년 같은 사업을 통해 일본과 중국에서 개최한 『그 집』(2017)전시의 후속 전시이며, 당시 한국 미술에 대한 해외 관람객들의 높은 관심에 호응하고자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OCI 미술관의 소장품들을 추가하여 전시한다. ● 『완상의 벽』은 한국의 도자기와 회화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완상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이다. '완상玩賞'이란 '어떤 대상을 취미로 즐기며 구경한다'는 뜻으로 '감상鑑賞'과는 달리 '취미로 즐긴다'는 조건이 충족된 행위를 칭하는 단어이다. 완상의 대상은 저마다 가지각색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받은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그릇'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릇은 오래 전부터 완상의 대상이었다. 과거 우리의 선조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어떤 물건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일상 속의 그릇과 문방구 등을 통해 문인의 신념을 지키면서 완상하는 고아한 완상문화를 만들어냈다. ● 1부 『완상의 시대: 서가에 든 그릇들』은 실용기를 넘어 예술품이 된 한국의 대표적인 도자기를 선보인다. 전시작은 고려 10세기 「청자완」부터 조선 19세기 「백자청화운현명만자문병」에 이르기까지 한국 도자기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OCI 미술관의 대표소장품인 「백자청화운현명만자문병」은 병의 형태를 따라 사방으로 연속하여 퍼지는 독창적인 만자문卍字文이 시문되어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수준 높은 미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역사성, 조형성, 잔존상태 등을 인정받아 2016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 384호로 지정되었다.

백자청화운현명만자문병_31.5×19.5cm_조선시대 19세기
청자상감국화문유개사이호_44×28.5cm_고려시대 13세기
도기과형매병_33.7×18.5cm_고려시대 13~4세기
백자청화복자문화형탁잔_5.2×6.7cm(잔), 3.1×13.4cm(잔대)_조선시대 19세기
오관진_포도항아리_종이에 혼합재료_161×130cm_2009

이외에 도자기와 관련된 근현대회화 소장품을 함께 소개한다. 근현대회화 중 백자를 소재로 한 최영림의 「정물」은 '조선적인 향토성'을 찾기 위한 화가들의 노력과 당시 성행한 골동품 수집열을 확인할 수 있다.

 

최영림_정물_캔버스에 유채_56.2×39cm_1958

2부 『문방청완의 향수: 그릇을 그리다』에서는 조선시대 문방청완 취미의 확산과 함께 유행한 '기명절지도'와 '책가도'를 소개한다. 기명절지도는 진귀한 옛 그릇과 화초, 과일, 채소류를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조선 말기 장승업부터 전승되어 20세기 중반까지 활발하게 그려졌다. 전시되는 기명절지도는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부터 서화미술회의 안중식, 이도영, 교남시서화회의 서동균, 평안남도 전통자수인 안주수安州繡를 사용한 「자수기명절지도」까지 우리 기명절지도의 시기별‧지역별 경향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장승업_기명절지도 10폭 병풍_비단에 채색_105×29cm×10_조선시대 19세기
이도영_운창청공_종이에 채색_32.5×122.8cm_1929
자수기명절지도 6폭 병풍_비단에 자수_129×32cm×6_조선시대

책가도冊架圖는 책장과 서책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正祖(재위: 1776~1800)는 어좌御座 뒤를 장식한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책가도'로 교체할 정도로 관심을 두고 좋아하였으며, 책가도를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를 유지하기를 바랐다. 우리나라의 책가도는 서가書架에 책과 다양한 기물을 그린 형태와 서가 없이 책과 각종 물건을 그린 형태가 있다. 전시되는 「책가도 8폭 병풍」과 「책가도 10폭 병풍」은 서가의 유무에 따라 나뉘는 책가도의 대표적인 두 가지 경향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외에 이당 김은호의 「의암 유인석 초상」은 전통초상화 안에 책가도 속에서 그려지던 기물을 조화시켜 20세기 전반 전통한국화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책가도 8폭 병풍_종이에 채색_86.5×50cm×8_조선시대
책가도 10폭 병풍_종이에 채색_129×39cm×10_19~20세기

전시는 서울 수송동 OCI 미술관 본관에서 1월 13일부터 3월 5일까지 진행되며 3월 중 주오사카한국문화원의 주관으로 온라인 전시를 통해 일본 시민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또한 한-일 양국 전문가가 함께한 부대행사 등을 통해 좀 더 심도 깊은 한국의 문화예술을 세계를 소개한다. ■ OCI 미술관

 

 

Vol.20220113h | 완상의 벽(玩賞​의 癖)展

10년은 강산도 바꾸고 학번도 주민번호 앞자리도 바꾼다. 평점은 대개 10점 만점이다. 장수의 상징 하면 또 십장생이다. 변화와 만개, 영속이 모두 ‘10’에 담겨 있다. OCI미술관의 지난 10년은 일일이 손꼽기 힘든 많은 작가들의 기발하고 독창적인 작업, 그들의 손으로 꾸린 각양각색의 전시로 반짝였다.

작가들의 목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려 늘 고민하는 것이 전시이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그들도 마주치면 더 크게 진동하지 않을까? 따로 볼 때 미처 몰랐던 색다른 면모가 보다 또렷해지고, 서로 한층 돋보일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각자 왼손 혹은 오른손이 되어, 짝과 둘씩 마주 어우러진다. 깍지 끼는 모양새도 제각각이다. 팽팽하게 맞서다 때론 기대어 서고, 꼬치에 꿰어 도는가 하면, 거미줄로 두루 얽는다. 넌지시 이어지는 시각적 박자 속에 저마다 무언가 확장하고 뛰어넘는 ‘초월 얼개’를 심지처럼 품는다. 영 딴판이면서도 어딘가 자못 통하는 다섯 쌍의 작가들. 의기투합 깍지 끼고 쭉 뻗어 서로 밀어주는 양손을, OCI미술관을 빛낸 ‘금손’들을 다시 만난다.

 

김영기 (선임 큐레이터)

빌런들의 별

 

쾅! 폭음과 함께 세상이 쪼개어진다. 그저 짓궂은 장난 좀 친 것뿐인데 자꾸 나를 ‘빌런(villain)’이라고 부르니, 차라리 내 뜻대로 다른 세상을 열어볼까 한다. 맘껏 부수고, 들어 엎고, 잔뜩 휘젓다가, 그러다가 난처해지면 뿅, 순간 이동하고 그러면 얼마나 신날까. 이 당돌한 빌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근육질의 몸매를 뽐내며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 정수정의 빌런은 화가라면 누구나 꿈꾸어 봤을 소망-내가 그리는 대로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을 거침없이 구현하는 캐릭터이다. 세상의 도덕이나 규칙 따위는 시원스레 날려 보내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연상 작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뒤죽박죽 왁자지껄 야단법석 다차원적 우주를 만든다. 오직 그림의, 그림에 의한, 그림을 위한 세계이다.

탄탄한 드로잉을 바탕으로 그려진 페인팅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소재의 디테일로 관객의 눈을 한 번 사로잡고, 선명한 색상과 붓의 스트로크, 말랑거리도록 두텁게 올라가거나 혹은 오히려 반대로 주르륵 묽게 흘러내리는 물감의 마티에르로 또다시 눈을 사로잡는다. 통통, 화폭 구석구석 부비트랩이 놓여 있어 보는 사람도 빌런들만큼이나 분주해진다. 진지한 척, 심오한 척하지 않는 빌런들의 솔직함이 그간 무겁게 올려진 미술의 의무감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창작과 감상의 기쁨으로 우리를 이끈다.

 

김소라(OCI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스스로 재구성되는 회화

 

회화면에서 중력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화면 안에서 삼차원 공간의 질서를 조직하는 가상적 힘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물감 발린 캔버스와 화가의 신체에 작용하는 실제적 힘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중력은 회화의 광학적 평면에 내재하는 힘이 아니다. 회화면을 순수하게 색채들의 평면으로 접근한다면 거기에는 중력이 작용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화면 안에서 중력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화가가 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도입하거나 또는 적어도 방조한 것이다. 정수정의 전작들을 보면, 그는 여태까지 중력을 굳이 회화면 안으로 가지고 올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다. 그의 구상 회화는 삼차원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차원의 평면에서 스스로 원하는 세계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가까웠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중력적 감각으로 충전되어 있었다.

 

이전 개인전 《Sweet Siren》 (레인보우큐브 갤러리, 2018)과 《A Homing Fish》 (갤러리 밈, 2019)에서 정수정은 식별 가능한 객체를 구성하는 색면과 윤곽선을 종종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배치하거나 일부 누락하면서 그것들이 오로지 붓질의 결과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냈다. 그렇지만 화면은 너덜너덜하게 무너지지 않고 치밀하게 조직되면서 포동포동한 몸체들이 뛰어노는 자유로운 가상세계로 성립했다. 여성형으로 보이는 인간 형상의 몸체들은 두께 없는 표면과 확실히 구별되는 입체감과 운동감을 전달했다. 이들은 투시도법에 의해 규정된 별도의 바닥면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회화면의 모든 곳에서 스스로 원하는 대로 올록볼록하게 솟아났다. 물감의 유체성 속에서 동물과 식물, 배경과 전경의 경계를 손쉽게 넘나드는 이 말랑말랑한 존재들은 캔버스라는 지지체 위에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다. 외부의 힘으로 간단히 밀고 당길 수 없는 물체의 고유한 질량감을 과시하면서, 이들의 팔과 다리, 머리와 엉덩이는 멋대로 움직이거나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회화면은 이들의 자세를 통해 위아래의 방향을 획득했지만 거기에 중력의 감각은 희박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 《빌런들의 별》은 중력에 맞서 날아오르는 것들의 이미지들로 넘쳐난다. 정수정은 그저 예전과 좀 다른 것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드로잉 작업을 보면 로켓과 비행기의 이미지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SF 장르에 기반한 환상세계가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래픽 노블 또는 일련의 서사적인 회화 연작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마치 시공간의 질서가 깨져버린 것처럼 각각의 회화는 단편적인 동시에 중층적인 상태로 진동한다. 일례로 《No Graffiti Here》를 보자. 착륙 또는 추락한 것 같은 비행접시가 있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한 인물이 있고, 그의 발치에 쓰러진 또 다른 인물이 있으며, 각종 비행기와 화구들이 이들을 에워싸고 있다. 여기서 아무 데나 물감을 칠하고 다니는 파괴자-화가의 이야기를 상상하기는 쉽다. 하지만 회화면 내부의 인물이 스스로 붓을 쥐고 있는 까닭에 화면 바깥에 있는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하나로 결정하기는 어렵다. 붓을 쥔 인물은 비행접시를 탈취하고 그 위에 낙서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회화의 세계에 비행 장치의 이미지를 그려 넣으면서 원래의 목가적인 풍경을 망치고 있는 것일까? 화가의 붓질로 그려진 것과 파괴된 것은 어떤 기준으로 구별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가능한 이야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자신이 구축한 회화의 세계를 벗어나려는 화가는 말하자면 그 세계의 중력을 탈출하기 위해 우주를 넘나드는 비행 장치 또는 회화면을 넘나드는 화가의 이미지를 꿈꾼다. 하지만 회화면에서 날아오른다는 것은 주어진 평면과 충돌하여 그것을 부수고 나가거나 또는 스스로 부서지는 파괴적인 과정으로 밝혀진다. 화가는 분열하고 비행기는 두 동강이 나고 해골은 네 조각으로 깨어지고 화면은 조각조각 갈라진다. 결과적으로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SF 적인 비행 장치보다도 어떤 공 같은 것, 무언가 빠르게 던져지고 때리고 터지고 추락하고 부수는 운동체 또는 에너지 덩어리의 이미지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캔버스가 하나의 화면을 이루는 《Fly》의 한 가운데 던져진 하얗고 둥근 것이 있다. 확실히 그것은 힘의 작용점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거기 던져진 충격으로 화면의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움직였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화면의 모든 요소들은 일종의 운동체로서 그 공 같은 것과 조금씩 상동성이 있다. 데굴데굴 구르는 감귤과 반으로 갈라진 수박, 민들레의 솜털 달린 씨앗, 나비와 잠자리가 그려진 종잇조각 같은 것들, 그리고 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인물은 모두 비행체로서 불완전한 몸을 가졌지만 충격파를 타고 일시적으로 떠오른다.

 

공 또는 원반 같은 형상은 다른 회화면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폭발의 섬광 같기도 하고 반짝이는 눈 또는 스크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그냥 ‘구멍’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구멍을 뚫는 힘이 집중되는 초점인 동시에 그렇게 뚫린 구멍으로부터 파괴적인 힘이 확산되는 폭심점을 표시한다. 소실점이나 중력의 중심점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평평한 화면에 불균등한 힘의 장을 조성하는 이 역동적인 점은 어떻게 보면 단지 화가의 붓이 캔버스를 누르면서 만들어 내는 커다란 물감 얼룩이기도 하다. 화면 속 세계의 창조자이자 그 세계의 외부자인 화가가 스스로 만든 세계에 붓으로 쑤시고 들어온다. 이 세계에서 붓은 강력하고 거의 절대적인 무기지만, 그가 붓으로 만들어내는 객체들도 수동적인 물감 얼룩에만 그치지는 않기에 필연적으로 힘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 결과는 일종의 액션 페인팅이다. 다만 화가는 순전히 물리적인 차원에서 붓과 물감으로 캔버스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조성한 가상의 평면에 들어가서 싸운다. 각각의 회화는 계획되고 연출된 장면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화가의 영웅적인 투쟁을 이상적으로 재현하는 역사화적 성격도 있지만, 그 투쟁은 화가의 눈과 붓을 통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광학적이고 물질적인 과정으로서 회화면 내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밑그림의 질서에 속박되지 않는 덧칠, 물감의 흩뿌림과 흘러내림은 본래 명확한 형상을 내포하지 않는 회화적인 것 고유의 무정형성을 드러낸다. 특히 이번 신작들은 전작들과 달리 묽게 흘러내리는 물감의 반투명한 흔적들이 만화적으로 구성된 장면들에 문자 그대로 얼룩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물감 얼룩은 선적인 구성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면으로 전달되는 이야기-자신이 만든 세계와 싸우는 화가의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요소로 작용한다. 정수정의 회화 작업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회화적인 것의 힘이 그 순수성보다도 오히려 혼성성을 통해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회화면에 가장 회화적인 것만 남겨서 응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화면을 팽창시켜서 원래 거기에 속하지 않는 온갖 것들을 집어삼키고 소화시키려는, 그럼으로써 실제와 가상, 평면과 입체, 순간과 지속의 어느 한쪽에 한정되지 않는 제3의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화가의 야심이 있다.

 

전시 전체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며 실제로 가장 마지막에 완성된 작업인 《Our Starman》은 정수정이 이번 모험의 끝에서 마주한 새로운 지평을 암시한다. 화가와 그가 창조한 세계가 충돌하면서 생겨난 화가의 분신들, 세계의 파편들, 또는 그 부서지는 세계와 함께 출현한 새로운 힘의 화신들이 한 회화면에 집중된다. 여기서 둥근 원반의 형상은 회화면을 넘어서는 크기로 확대되어 마치 일그러진 지평선처럼 나타난다. 물감 얼룩은 사방으로 튀고 위아래로 쏟아져 내리면서 그 넘치는 에너지로 기묘하게 휘어진 공간감을 유발한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입구이자 변신의 공간으로서 회화적인 꿈의 잠재적 영토를 표상한다. 원칙적으로 화가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그린 세계의 왕이 된다. 그렇다면 이 왕은 자신이 아직 그려보지 못한 미지의 영토를 어떻게 지도 그릴 수 있을까? 정수정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부수고 다시 세우면서 그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 여지를 찾는다. 또한 그것은 화가 자신이 번데기를 찢고 나오듯이 반복해서 다시 태어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윤원화(시각문화 연구자)

 

[작가 약력]

 

학력

글래스고 예술학교(The Glasgow School of Art) 순수예술학 석사(Master of Fine Art)
가천대학교 회화과 학사

 

주요 개인전

2020 빌런들의 별, OCI미술관, 서울
2019 A Homing Fish, 갤러리 밈, 서울
2018 Sweet Siren, 레인보우큐브 갤러리, 서울

 

주요 단체전

2020 동그라미에게, 의외의조합, 서울

Blind Spot, A.ROUND, 부산

2019 There Might Be More Light, 서울로 미디어캔버스, 서울

인사살롱 2019: 바깥으로 굽는 팔, 갤러리 미술세계, 서울

핑퐁프로젝트: 우정수×정수정, 의외의조합, 서울

코너스 1: 응답과 대응, 킵인터치, 서울

2019 서울 포커스: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18 유니온아트페어 2018: Let’s Make Together, S FACTORY, 서울
2016 MFA Degree Show, The Glue Factory, 글래스고, 영국
2015 Awoo, Project Space 1, 글래스고, 영국

Look About Ye!, Stirling Castle, 스털링, 영국

Interim Show, Reid Gallery, 글래스고, 영국

 

수상/선정

2020 2020 OCI YOUNG CREATIVES, OCI미술관

 

연락
veinjung@gmail.com
www.soojungjung.com

 

 

 


회화적인, 너무도 회화적인


 

 
캔버스를 마주한 화가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인가? 수 세기 동안 화가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을 이 미술사적 과제는 작가 샌정에게도 오랜 탐구의 대상이자 작품의 주제 의식이었다. 특히 최근 그의 작업은 회화성, 회화‘의’ 세계, 회화‘와’ 세계에 대한 고뇌를 거듭한다. 지난 몇 년간 그의 개인전 제목인 ≪그림 연습/ 그림 그 자체/전시장의 그림/형태에서 세계로/우주를 형성하기/그림들≫1 만 살펴보더라도, 개념적이며 포괄적인 단어를 선택하여 그의 작업에서 구체적이고 감상적인 접근 대신 객관적인 이론화와 추상화가 꾸준히 가속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OCI미술관의 개인전 역시 <VERY ART>라는 묵직한 제목의 전시이다. 그만큼 작가가 소신껏 준비한 것으로 이 전시는 그의 사유가 어떻게 캔버스 안으로 수렴되고 있는지를, 그리고 회화 세계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망라하여 보여주는 자리이다. 우선, 샌정 본인은 이 전시를 이렇게 규정한다.
 
 

VERY ART

회화의 심미적 영역과 관련해 미적 판단의 테두리 안에서 그려내지고

ART적인 너무도 ART적인 생각의 궤적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세계를,

흐릿하게 관조의 중심 축으로 자리하는 형상들을 추상적 노스텔지어와

멜랑콜리아로 표현한 전시


 
‘ART’라는 거대 담론의 전제 아래, 그가 추구하는 회화는 주관적 표현이나 감각적 쾌락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판단 내려지는 것이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천명한 무관심성, 일체의 관심 없이 대상을 판단하는 것이자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로, 샌정의 회화에는 필연적으로 거리 두기, 즉 관조의 태도가 요구된다. 그림을 그리는 개성적인 창작자인 동시에 그림을 무관심적으로 바라보는 감상자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화가에게 캔버스란 주관성과 보편성이 마주하고 충돌하는 장(場)인 동시에 중립을 지키는 중성적 공간이다. 말 그대로 일종의 ‘회색지대’로서 캔버스는 펼쳐지는데, 샌정은 실제로도 캔버스 위에 밝은 회색 물감을 올려 배경을 그린다. 여기에는 옅은 듯, 혹은 짙은 듯,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대기감(大氣感)이 어려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실제에서는 어디에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이 가상의 세계는 감상자로 하여금 철학적 의미를 찾고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나, 회화는 그 자체로 침묵하며 섣부른 ‘자리매김’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의 회화에서 먼저 감지되는 것은 캔버스 표면의 붓질과 물감으로 이루어진 물질성이다. 붓을 든 작가의 제스처에 따라 표현되는 고유의 호흡은 화폭 위로 형상을 떠 오르게 하고, 또 깊숙이 가라앉게 한다. 샌정의 전작(前作)에서 이 형상들은 이국적인 여인상이나 들판 위의 백마처럼 몽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 형상은 점차 반추상에서 기하학적 추상으로,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몇 가닥의 선으로까지 응축된다. 형상의 기화(氣化)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과정에서 작가의 회화-밖-경험은 회화-안-형태로 나타나기까지 무수한 정보의 생략과 함축, 감성의 증폭과 절제가 포개어지고 가다듬어진다. 그 결과, ‘이것은 OO을 뜻한다.’라는 정의 대신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는 무심한 바닥으로 작품을 이끈다.
 
원시적(primitive)이라고 여겨질 만큼 형상의 틀을 벗어나 내밀함을 강조하는 그의 회화는 얼핏 모노 톤의 화면으로 균질하게 정돈되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물감의 두께감, 선의 갈라짐, 색의 충돌 등 회화적 요소로 인해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개별 작품마다 고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때때로 동일한 모티브가 여러 점의 작품을 통해 변주되고는 하는데, 그 속에서 색과 선은 뭉쳐지고, 흩어지고, 미끄러진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긴장과 균열은 그의 작품 속 대기감에 섬세하게 파문을 일으키는데, 이 잔잔한 운동 속에서 어느 쪽으로도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 미묘함이야말로 샌정 작품에 주요한 분위기이다. 작가는 이를 ‘부유감’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달리 말하면, 창작 활동 중 끊임없이 감각과 사유의 상호 탐색과 침투가 벌어지며 그 지난한 과정이 마침내 가라앉을 때, 비물질적인 사유가 떠다니다가 캔버스 위에 침전하여, 그렇게 회화가 된다.
 
뻔한 얘기 같지만, 결국 회화는 물질과 정신의 상호 교환 속에서 그 책무를 이행한다. 샌정은 작가 노트에서 “세계는 회화라는 장르에 생각이 이르게 하고, 회화는 숙명처럼 그 세계를 열어 보인다.”2 라고 고백한다. 그에게 회화-밖-세상은 회화-안-세상으로 이동 가능한 동시에, 두 세계는 전체로서 동일하다. 은폐된 세계의 본질은 작가의 감성적 주관성이 가까스로 세계의 보편성과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샌정의 회화에서 ‘추상적 노스텔지어와 멜랑콜리아로 표현되는’, 그 그리움과 아득함의 대상이야말로 예술의 근원일 것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그 기원을 찾아 헤매는 행위 자체가 ‘VERY ART’한 것이 아닌가. 샌정의 작업은 이렇게 영원히 지속될 비완성의 노정을 걸으며, 화가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오늘도 묵묵히 세상을 그린다.

 

 


 

1 Study Painting(nook gallery, Seoul 2015); Painting Itself(gallery EM, Seoul 2016); Pictures in a Gallery(nook gallery, Seoul 2015, 2018); A Form to the World(Choi & Lager, Cologne/Germany 2018); Formed the Universe(Choi & Lager, Seoul 2019); Paintings(Osterhaus Museum, Hagen/Germany 2020)
2 샌정, 회화론,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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