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기원_장승택_전명은_조소희展 

2018_1101 ▶︎ 2018_1222 / 일,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8_1101_목요일_05:00pm

큐레이터 토크 / 2018_1128_수요일_07: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미술 작품에서 위안을 얻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매우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작품과 마주한 시선에 온몸이 전율하며 환희와 적막에 빠지고, 찰나일지언정 하나의 세계가 온전히 구축되었다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어떠한 말과 글로도 설명이 부족한, 순수한 형상(image)의 세계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 OCI 미술관의 가을 기획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시각 예술이 빚어내는 침묵의 세계를 엿보고자 구상되었다. 출발은 예술에 대하여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내용, 즉 "무엇이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였다. 고작 사람이 만들어낸 것인데, 어찌하여 예술품은 우리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일까. 예술도 다변과 요설로 버무려져 있다지만, 그럼에도 어떤 작품은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한 번쯤 말 없는 미술의 본모습을 찾아가 보면 어떨까. 조형의 원형을 찾아가 보고자 이번 전시에서는 네 명의 작가를 초대하였다. 박기원, 장승택, 전명은, 조소희로, 각기 다른 매체를 다루는 이들의 작업을 통하여 이미지가 주는 함축으로부터 세계의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각예술가의 여정에 동참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1층 장승택 섹션_2018


우선, 1층에서 마주하는 장승택의 작품은 그의 '폴리 페인팅(Poly-painting)'과 '폴리 드로잉(Poly-drawing)' 연작 중 2018년 신작이다. 'Poly-'라는 접두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폴리카보네이트 플라스틱 계열의 재질을 사용하여 회화를 만든다. 붓의 터치가 주는 흔적보다는, 화폭 안에 중첩적인 빛과 색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얼핏 검은색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초록이, 보라가, 이 색과 저 색이 얇게 도포되어 웅크리고 있다. 'poly-'라는 어휘에 걸맞게, 재질도, 색상도, 기법도, 의미도 다중적이고 다층적이다. 물리적으로는 딱 평면 회화의 화폭만큼 두께를 지녔으면서도, 깊은 곳으로, 더욱 깊은 곳으로 시선을 끌고 들어가는 장승택의 작업은 빛을 내포하는 어둠이자 빛의 반사이다. 감각적인 동시에 인식적인 그의 작업은 불투명한 거울처럼 세상을 담으며 사유의 심연으로 향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2층 박기원 섹션_2018


이어 박기원의 「안개」는 비물질이 점유하는 공간이다. 최소한의 개입을 통하여 하나의 공간을 조명하고 볼륨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1층과 2층이 뚫려있는 OCI 미술관의 전시장 특성을 십분 활용하였다. 장소 특정적이라고도 설명되는 박기원의 작업은 장소에 대하여 복잡다단한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즉자적으로 감지되는 대기나 분위기 등을 주요 재료로 다룬다. 거시적 시점에서 과감하고도 감각적으로 공간을 읽어내기에, 장소의 구조적 원형성을 유지하면서도 몇 가지 장치를 통하여 전혀 성격이 다른 공간으로 전환한다. 오브제의 형태로 손에 쥘 수도 없고 그저 공기처럼 스며드는 작업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LED 조명과 얇은 비닐을 사용하여 맑고 투명한 깊이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2층 조소희 섹션_2018


여리고 섬세한 조소희의 작업은 한 걸음, 한 걸음 침착하게 전개되는 지적 여정이다. 얇은 실, 속이 비쳐 보이는 종이, 있는 그대로의 벽면, 높게 펼쳐진 하늘 등 흔히 볼 수 있는 사물과 환경에서부터 세계를 탐색하며, 그 속에서 색과 형태, 언어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한다. 결코 예술의 기원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과정을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몸짓이다. 바느질처럼 몸에 밴 손놀림과 반복적으로 축적된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의 작업은 한 땀 한 땀 시간을 잣고 사색으로 침잠하여, 스스로 세계를 투과하는 창이자 세계의 연결고리가 된다. 가느다란 선들의 겹침 속에 나지막이 일렁이는 마음의 웅성거림, 간절함, 고독과 이해, 포용이 모두 담겨 있어서, 한없이 가볍고 고요한 작업이지만 선명하고도 육중한 존재를 드러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_OCI 미술관 3층 전명은 섹션_2018


이윽고 3층에서 마주하는 사진 작업은 전명은의 작품이다. 조각의 표정을 담았다. 매체의 물성과 그 내부 구조를 탐색하는 추상 조각, 석고 모형을 찍은 것으로 얼굴이 없는데도 여간 표정이 풍부한 것이 아니다. 사진의 피사체는 지금은 고인이 된 조각가가 남긴 흔적들이다. 그의 오래된 모형을 꺼내놓고 조각가의 딸, 전명은이 사진을 찍었다. 입체 조형물을 평면 사진으로 옮기고, 아버지의 언어를 딸의 언어로 옮긴 '번역의 번역'이다. 사실, 이미지의 세계에서 번역은 필연적이다. 형체가 없는 진리, 근원, 영혼에 어떠한 모양을 입히는 것은 일종의 언어 없는 번역이다. 찰칵, 셔터를 눌러 실재의 겉모습을 떠내는 사진처럼, 모든 시각 예술은 침묵하는 세계의 표피를 떠내어 우리의 눈앞으로 옮긴다. ● 침묵에 대한 예찬론, 저서 『침묵의 세계』에서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 1888-1965)는 형상과 침묵의 사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형상은 침묵하고, 침묵함으로써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형상 속에는 침묵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그 침묵 곁에는 말이 있다. 형상은 말하는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서울: 까치, 2015) p. 103) 형상은 침묵과 말 사이의 경계에 있다. 피카르트는 뒤어이 서술한다. 형상이 그렇게도 인간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말 이전의 현존'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고. 형상은 인간 내부에 현존에 대해 동경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영혼에 속한 것이다. 말로 표출되지 않은, 형상이 내포한 함축적인 긴장에 우리는 전율한다. ● 침묵을 해치지 않기에 전달되는 무언의 세계가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아서, 말로는 전부 표현할 수가 없어서, 미술가는 입술을 움직여 단어를 옮겨내는 대신 형상으로 말을 전한다. 언어의 밖에 있어서 오히려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네 작가의 작업은 말이 되지 못한 무수한 형상 중의 일부이다. 함부로 말하려 들지 않고, 쉽게 설명되지도 않으나 진실하게 형상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이 형상 전부는 아닐지언정 형상의 침묵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기를 바란다. 보다 현존에 가깝도록, 보다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직 말해지지 않았다. ■ 김소라




Vol.20181104e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展










한윤정

Gaze & Trace


 물건 말고, ‘사건’에도 생김새가 있을까? 한윤정은 세상을 가득 채운 무형의 것들을 빤히 바라보면(gaze) 각도에 따라 실루엣도 비치고 색상도 들어오며 언뜻언뜻 그 결마저 엿볼 수 있음(trace)을 귀띔한다.

 

평생 머리 위에 이고 살면서도 깨닫지 못할 뿐, 별이 서로 부둥켜안고, 부풀고, 터지고, 흩날리는 저 밤하늘만 해도 이미 ‘사건의 생김새’이다. 있는 대로 부릅떠도 시커먼 허공에 희끗한 점 몇 개가 고작이라면 가시광선의 한계, 보는 방법의 문제에 불과하다. 감마선, X선, 자외선, 중성자선, 자기장, 중력장⋯ 갖은 각도로 뜯어보고 색을 입힌 게 바탕화면 단골 테마인 천문 사진들이다. 수채물감처럼 번진 성운, 긴 팔 휘날리는 나선은하, 그 귀퉁이 어느 한편의 ‘지구’라는 약간의 부스러기마저 서사의 궤적이며 동시에 내용이다. 이렇듯 물건과 사건의 경계는 칼 같지 않다. 사건의 아주 짧은 단위, 극히 좁은 구간의 스냅샷을 편의상 ‘물건’으로 부를 따름이다.

 

그 부스러기 지구에도 숱한 사건이 들끓는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들고, 베스트셀러와 유행어가 뜨고 번지며, 갖은 군상이 피고 진다. 데이터가 모이고 쌓일수록 그 판세는 제법 해상도를 차리고 점차 모양새가 읽히기 시작한다. 한윤정은 이 모양새를 추슬러,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작품을 빚는다. 홍채의 색상 값은 입체의 요철로, 지문의 흐름은 음파의 고저로, 가뭄에 신음하는 땅은 그 가쁜 심박을 도형으로 치환한다. 말하자면 자연의 문맥, 사회의 줄거리, 인류의 사연을 장노출로 담은 디지털 초상이다.

 

‘데이터’는 각지고 건조하고 단단할 것만 같은데, 그의 작업은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다. 사건은 정착할 줄 모르며, 변덕이 끓어넘치는 때문이다. 감상자의 홍채와 지문은 서로 겹칠 겨를 없이 저마다 뜻밖의 모양, 갖은 색상, 판이한 소리로 화답한다. 다이얼을 돌리면 수온이 오르내리고, 시간이 뒷걸음질 친다. 툭툭 밀친 돌멩이를 타고 멜로디는 늘 새로이 출렁인다. 보여 주는 방법 또한 시시각각 자란다. 버전업을 거쳐 모델은 거듭 성숙하고, 새로운 기술의 접목은 이 내러티브의 싱싱한 새 단면을 또 한 꺼풀 들춘다.

 

김영기 (OCI미술관 큐레이터)




 

시선과 흔적


 W. 칸딘스키는 소리를 색으로, 색을 소리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예를 들어 언어가 달라도 같은 인류로서 공유하는 삶이 있다면 거기에 같은 개념의 단어가 존재하듯이, 오감의 각각 다른 감각들 사이에도 공유하는 영역(=공감각)이 있다는, 즉 오감에는 지구상의 사람들의 언어들처럼 일대일 대응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어떤 색에 대응하는 소리를 찾아내는 일종의 ‘번역’이 가능하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공감각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할 사실은, 칸딘스키가 그 ‘공감각’의 공유부분이 단지 말초적인 오감들 사이에만 걸쳐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정신적 영역, 영혼의 통합적 영역에 까지 관여되어 있다고 믿은 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음악을 동작으로 바꿀 줄 안다. 춤을 추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대일 대응되는 공감각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리듬이나 감정 등 다른 요소에 의해 매개되고 또 어떤 때는 정신적이거나 초현실적 감각에 의해 소통되는 번역이다.

 

미디어아티스트 한윤정의 이전 작업들 중에서 많은 경우는 형태와 운동을 사운드로 전환 혹은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발표해 왔던 일련의 작업들은 그러한 경향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sound tree ring>(2013)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악기’라고 부를 만하며, 형태가 소리로 번역되고, 조형으로 작곡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one> (2009)이나 <color note>(2007)는 관객의 개입이나 새롭게 설정된 연주코드에 의해 다른 규칙이 생성되도록 유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이미지의 생태계가 형성되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 한윤정은 이전의 추상적이거나 보편적 원리보다는, 각 개체의 생체정보를 통해 생명의 내적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터렉티브 설치 작품인 <손끝소리>(Digiti Sonus)는 개인의 지문을 3D프린터로 입체조형화하고, 그 나선형 패턴을 따라 마치 레코드판의 트랙에서 기록을 읽어내는 것처럼 소리가 발생되도록 고안하였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 개인의 ID이기도 하고, 혹은 정체성의 상징으로도 통하는 지문에 내재된 생체의 비밀스런 코드를 매개로 해서, 그 본인=관객으로 하여금 ‘생의 심연으로부터 호출된 예기치 못했던 자신’과 만나고 놀고 소통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번 OCI미술관 전시에서 지문 대신 홍채를 이용한 인터렉티브 설치 작품 <Eyes>를 선보인다. 이 일련의 작품에 사용되는 지문 혹은 홍채에서 얻은 생체정보에는 게놈지도보다 훨씬 복잡하고 방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끈이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우주의 파동과 입자, 중력과 양자력, 전자기력 등이, 그리고 이런 것들의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면,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해 왔던 시간은 실로 일부에 불과하고, 빅뱅이나 물질진화(material evolution) 등 너무 장대한 스케일의 시간이 그 속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지의 자기정체성과 만나고 놀고 소통하기 위한 이 작품이 실제로는 우리를 전혀 낯선 우주와 맞닥뜨리게 할 수도 있다.

 

지문 혹은 홍채에는 우리들 인간의 과거의 내력이 축약/코딩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작가는 물론 이 작품을 대하는 관객의 마음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그 신비한 모양이, 공감각의 경우에서처럼 일대일 대응방식이 아니라, 수학적이거나 임의로 설정된 다중코드에 의해 번역되고, 그 결과와 대면하고 소통하며 나아가서는 공감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자신의 생체정보의 골짜기에서 울려나오는 사운드의 잔향(殘響 : sound reverberation) 속에서, 예기치 못했던 자신의 기이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관객은 미지의 심연으로부터 자신을 자각하고 공간에 체현되는 자신과 만나고, 지금까지 자신이 본 적이 없었던 마음의 내면이거나 생의 뿌리였다는 생각에 경이로운 감정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시뮬레이션이고 환영이다. 원래 세상에는 가짜는 아닐지라도 오독되는 정보가 더 많다. 정글이나 자연계에서도 생명체들은 생존을 위해 가짜정보를 생산하거나 위장하고, 나아가 생명체의 내부에서도 면역체계와 바이러스의 정보전쟁이 일상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수행된 ‘형태에서 사운드로의 전환‘도 일대일 대응하는 단어를 번역하듯 하지 않았으므로 오역일 수도 있고, 말하자면 관객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환영일 수도 있다. 특히 새로운 방식의 정보는 오독되는 것이 숙명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 환영도 우리의 그림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처럼 자신의 생체정보가 읽히고 변환되고 반향하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발신되는 그림자와 만나고 공감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윤정은 매우 과학적인 태도로 작업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디지털 시선’과 그것을 통한 ‘가시화’이다. ‘디지털 시선’이란 가시광선에 의해 한정되는 시야를 넘어, 데이터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곳에까지 인식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적외선, 각종 전파 그리고 심지어 이제는 중력파까지, 센싱(sensing)에 의해 수치로 표시되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모든 영역이 ‘시선’의 대상이다.

 

한윤정이 이번에 선보이는 또 하나의 작품 <Drought in California and Korea>(한국과 캘리포니아 가뭄)은 두 지역 가뭄의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한, 디지털 시선에 의한 가시화작업이다. 1980년대부터 관심을 끌었던 과학적 가시화(scientific visualization)는 말 그대로 과학연구의 수단으로 추구되었던 미션이다. 가시화는 자잘하게 흩어진 생각들을 하나로 모아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유효한 작업이다. 예를 들면 지구환경이나 온난화 등의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위한 가시화가 그것이다.

그런데 ‘가시화’는 미술의 중대한 사명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있거나, 있다고 믿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그것들을 가시화하는 것. 대표적으로 교회와 사원에 수없이 그려지거나 조각된 신상들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한윤정은 이 작업에서 촬영과 측정한 각종 데이터를 디지털처리하고, 한국과 캘리포니아 두 지역에서 일어나는 같은 종류의 현상에서 차이점과 유사한 점 그리고 관계성을 발견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측정된 데이터 혹은 해석된 결과가, 전술한 지문이나 홍채처럼, 장대한 지구의 역사가 빚어낸 생체정보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가이아이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두 지역은 서로 다른 생리적 특성을 지닌 개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전시의 타이틀을 ‘시선과 흔적’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의 내면과 순환 관계, 그리고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에 숨어있는 내러티브는 새로운 의식의 탐험, 감상자의 자각을 위한 스토리텔링이다. 이 작가처럼 인체의 생체정보로부터 새로운 예술의 내러티브를 모색하거나, 존재의 출발점으로부터 먼 여정의 흔적을 통해 우주와 자연과 나를 각성하도록 인도하는 작업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예술이 세상에 기여하는 가장 의미있는 발걸음이라고 생각된다.

 

이원곤  (미디어예술론 / 단국대학교 교수)




 

오선영

Rainbow Forest


 알록달록 큼직한 롤리팝 사탕 하나 쥐어 주니 서럽게 흐느끼던 하늘도 뚝 그친다. 세어 보니 더도 덜도 말고 딱 일곱 빛깔, ‘빨주노초파남보’가 틀림없다. 그래서 무지개(rainbow)라 불렀다. 음성 언어는 이야기를 장면으로, 수백 가닥을 일곱 다발로, 다시 이들 모두를 달랑 한 마디로 수렴하곤 한다. 속된 말로 ‘싸잡아 퉁치려’ 든다.

 

무지개. 그 어감이 왠지 발그레하고, 감빛이 돌고, 샛노랗고, 푸르께하며, 거무죽죽하다. 달착지근한 과일향이 솔솔 풍기니 하늘도 울다 문득 반쯤 덥석 베어 문다. 오선영의 언어는 발산한다. 단어 하나가 움터 장면들이 줄지어 꽃피고 이야기 향기가 사방으로 물씬 퍼진다. 널브러진 몇 조각 연분홍 꽃잎으로 장미 반 찔레 반 동화 속 덤불숲을 두르고, 녹 투성이 열쇠 하나로 해 질 녘 외진 저택의 휘황한 대문 너머 빛바랜 설화를 열어젖힌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란 대상을 호출하는 시각적 단서에 가깝다. 복숭아 그림은 복숭아의 초상이다. 그러나 오선영의 복숭아는 복숭아면서 못다 핀 장미 꽃망울이고, 도자기로 구운 물감 덩어리이며 펑 터진 가슴의 잔해이기도 하다. 애써 코앞에 따다 놓은 달은 봐도 봐도 그냥 달일 뿐이다. 적당히 사이도 두고, 때론 흐린 날도 있고, 침침히 달무리도 져야 토끼가 방아도 찍고, 두꺼비도 뛰고, 사자도 산다. 오선영은 이야기를 잘 빚어 실루엣을 차려 잡는 대신, 이토록 넓게 펴 바르고 불규칙하게 부서뜨린다. 그물이 촘촘하다고 대어를 낚는 게 아니다. 낭만 어부 오선영은 흔적과 자취를 굵게 꼬아 성글게 얽은 회화 그물로 더욱 씨알 굵은 이야기 뭉치를 포획하려 든다.

 

이야기가 한바탕 들끓으며 사방으로 튄 흙탕물 자국 같은 그림들은 경쾌하고 산뜻하면서 즉흥적이고 또한 격정적으로 다가온다. 두께가 주는 마티에르를 과감히 반납한 오선영의 터치는 단지 특유의 섞임과 결을 통해 물성을 인증하곤 한다. 수정할 겨를 없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승부. 에스키스를 거듭하고, 순서를 가다듬고, 색상을 저울질한다. 너덜거리는 작업 진행 수첩은 ‘계획적이지 않아 보일 계획’으로 빽빽하다. 무심한 몰입의 중첩은 묘사를, 철두철미한 가늠은 즉흥과 격정을 낳는다니 사뭇 역설적이다.

 

김영기 (OCI미술관 큐레이터)

 


틈이 만드는 끊임없는 틈, 입 벌린 상처, 미끄러지는 기표


“문자는 야생에서 볼 수 없다”

– Sigmund Freud, Die Traumdeutung, 1899.

 

우리는 ‘말하는 존재’(parlétre)다. 말(언어)은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고정하는 도구다. 하지만 이 고정은 강제적이고 편의적인 고정이기에 우리는 늘 말의 실재(the Real)를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결국 로고스(λόγος, 말, 이성)로는 온전한 실재에 다가설 수 없다. 이것이 말이 가진 불가능성이다. 작가 오선영은 바로 이 지점을 감지한 듯하다. 작가는 “잔인한 인간사를 각종 미사여구로 풀어내는” 신화, 전설, 우화, 동화 등의 고전 환상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소재와 그것의 의미를 고정하는 단어에 주목한다. 익히 알고 있듯이, 고전 환상문학에서는 숲, 정원, 저택, 장미, 화살, 별, 시체, 고양이 등과 같은 특정 소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재들은 성향이 다른 작품에서 거듭 등장함으로써 그 내적 의미의 깊이와 너비를 확장해 나간다. 이 소재들은 문학작품에서 문자(기표;記標)라는 형태로 잠시 잠깐 의미(기의;記意)에 고정된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내포하고 있는 암시, 은유, 상징 등은 문자의 일상적 의미를 초과하여 범람하고, 결국 임시적 고정점은 의미의 물결을 따라 한없이 떠밀려간다. 언어를 뛰어넘어 대상에 도달할 수 있는 신적 직관을 갖고 있지 않은 ‘말하는 존재’는 실재에 접근할 수 없는 유한성(말; 언어)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에, 결코 대상의 실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언어와 실재 사이에 있는 메꿀 수 없는 틈, 그 ‘입 벌린 상처’에서 오선영의 작업은 시작된다.

 

단어의 정령(精靈) 불러내기

오선영의 작업은 한마디로 ‘단어 속에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정령(精靈)을 불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먼저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 내려오다 하나의 텍스트로 자리 잡은 고전 환상문학을 집어 든다. 그리고 거기서 자주 등장하는 상징성 있는 명사를 수집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지시하는 대상이 가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상상 속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순간 설레게 하는 명사”를 하나씩 수집해 나간다(작가노트). 이 명사들은 가시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수집 행위에는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성, 기표와 실재의 불일치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붙어 있다. 작가는 이렇게 수집된 명사들의 이미지를 맥락 없이 화면 안으로 불러온다. 그럼으로써 무의미하게 분절된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어떤 의미도, 서사적 맥락도 없는 작가의 이야기가 마치 특정한 사건을 내포하고 있는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맥락 없는 이미지의 조합들이 사건이 되고, 긴장감을 불러올까? 소쉬르(Saussure) 이래로, 단어나 상징 그 자체에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또는 상징과 상징 사이에서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오선영이 맥락 없이 나열한 (수집된) 단어의 이미지들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서 파생되는 어떤 의미가 하나의 새로운 사건을 발현시키며 이야기 구축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사실 의미 형성의 일반적인 구조적 분석일 뿐이다. 오선영의 작업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심층으로 들어가야 한다.

 

흔들리는 기표, 끊임없는 생성되는 틈; 단어의 역사성과 기표의 불완전성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일으키는) 이 새로운 사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내적 작동 기저와 외적 작동 기저가 결합하면서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내적 작동 기저는 작가가 수집한 ‘단어(명사)의 역사성’과 언어라는 ‘기표의 불완전성’이고, 외적 작동 기저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유동적 표현성’으로 보인다. 이 내외적 작동 기저가 오선영 작업을 독특한 지점으로 이끄는 동력으로 기능한다고 판단된다.

내적 작동 기저 중 하나인 ‘단어의 역사성’은 작가가 선택하는 문학작품의 특성과 맞닿아있다. 여기서 작가는 현재에서 한걸음 물러난다. 오선영은 역사성을 가진 고전 환상문학(전설, 신화, 우화, 동화 등)을 택하고 거기에서 특정 단어를 추출한다. 그래서 그 단어들에는 역사성이 스며있다. 작가는 자신이 추출한 단어가 “19세기 라파엘 전파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These were] symbolized reminiscent of nineteenth century’ Pre-Raphaelite paintings.)”라며, 자신은 “도상학적으로 작품을 정밀하게 구성했다(My paintings elaborated iconography)”고 말한다(석사학위 작업론). 그의 작업에는 역사성과 고전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과거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 장르(고전 환상문학)와 그것에서 추출한 단어들, 그리고 도상학적 접근. 이러한 과거를 향하는 역사성은 서정적/고전적/장식적/표현주의적인 작가의 외적 표현성과 맞물리며 어딘가 낯설지 않은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오선영의 작품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것은 이러한 조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내적 작동 기저, 즉 ‘기표의 불완전성’이 이 낯설지 않은 작품을 일순간 낯선 “신비한 풍경”으로 변화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현재에 서 있다. 기표(문자, 혹은 기호로서 이미지)는 늘 불완전하다. 기표는 그 기표의 앞과 뒤에(혹은 주변에) 존재하는 기표들에 의해 의미가 확정될 뿐이며, 언어의 창고에 있는 ‘대체 가능한 기표’(동의어)에게 언제든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늘 흔들린다. 그리고 기의와 기표 사이에 상상적 관계(임의적 연결 가능성, 은유나 상징)로 인해 틈을 가지게 된다. 이 틈은 다른 기표들과 관계 맺으며 끊임없는 또 다른 틈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기표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작가는 추출한 명사(단어) 중 “순간 떠오르는” 명사들을 조합하거나, 뉴스, 잡지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동시대 사건의 이미지들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때 이 ‘기표의 불완전성’, 그 멈추지 않는 흔들림과 끊임없이 생성되는 틈은 ‘단어의 역사성’으로 인한 발생하는 진부함(cliché)을 걷어내고, 임의적이고 가변적이며 변화무쌍한 새로운 사건을 출현시킨다. 우리가 그의 작업을 클리셰로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끊임없이 틈을 만들며 흔들리는 기표들의 관계, 그 기표의 분절적 관계가 들려주는 새로운 열린 이야기를 듣기(보기) 때문이다.

 

녹아내린 완결과 미결 사이의 장벽; 유동적 표현성

오선영의 작업은 완결과 미결 사이의 장벽을 녹이면서 우리 앞에 놓인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사건으로 이끄는 외적 작동 기저라 할 수 있다. ‘유동적 표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외적 작동 기저는 사건의 전개를 열어놓듯이 작업의 완결을 열어놓는다. 그리다만 듯한 화면, 무심코 칠한 듯한 붓자국, 흘러내리는 물감, 비어 있는 캔버스의 공간, 간략하게 그린 듯한 스케치……. 작가의 작품은 (관례상) 미결된 상태로 우리를 마주보고 서 있다. 하지만 이 미결된 상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 계획된 미결이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보이는 오선영의 표현 방식은 사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그는 작업을 위해서 꼼꼼하게 사전 스케치를 하고, 표현 방식과 그것이 가져올 예상 효과를 적는다. (나는 공들여 스케치하고 관련 내용을 꼼꼼하게 적은 작가의 스케치 노트를 직접 보았다.) 이러한 계획된 미결은 그의 작업을 완결된 느낌으로 만든다. 작가의 표현성은 묘사와 물성연구를 가로지르고, 완결과 미결을 넘나들고, 스케치와 채색을 동일 선상에 놓는다. 이 유동적 표현성은 ‘단어의 역사성’과 ‘기표의 불완전성’과 맞물리며 화면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건을 미결인 채로 영원히 열어놓는다.

작가의 유동적 표현성은 평면을 넘어 입체로도 향한다. 하지만 일반적 입체는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입체는 (은유적으로) ‘평평한 입체’다. 그의 작업 중에는 도기(陶器) 기술을 사용한 입체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다면체 형태로 ‘여러 평면들’이 결합한 구조물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전히 입체가 평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평면 작업에서 두꺼운 임파스토(impasto) 없는 평평한 표현성(flatness)을 추구한다. 이러한 특성이 고스란히 입체로 전이(轉移)되면서 소위 ‘평평한 입체’로 이어진 듯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그림과 도자기가 장식적인 부분, 낭만적인 부분이 혼용되는 경우가 있고, 다른 재료이지만 서로 레퍼런스(상호 참조)가 된다.” “이질적인 면들[특성들]이 상호작용하는 듯하다.”(작가 인터뷰) 두 양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다. 이러한 평면과 입체라는 이질적인 양식의 상호작용은 완결과 미결을 넘나드는 유동적 표현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오선영은 이번 전시에서 하루를 시간 순서에 따라 전시하면서 “일상으로 침투하는 낭만적 풍경”을 선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하루는 틈을 끊임없이 만들며 기표를 끊임없이 미끄러트리는 유동하는 하루일 것이다. 완결과 미결의 경계 없는 열린 하루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하루에 목격자로 초대하는 오선영의 초대장을 쥐고 있다.
 

안진국(미술비평)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