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 핫팩


얼마 전 인터뷰 촬영이 있었습니다.

‘팔십 명도 아닌 여덟 명 일정 맞추는 게 뭔 대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모처럼 입주 작가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한 달에 채 하루나 날까 싶은 귀한 시간이었지요.


늦가을로 접어들어 실내에도 제법 냉기가 서렸건만, 촬영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온기와 웃음이 넘쳤습니다.

누군가 최신형 핸드폰을 자랑스레 매만지자,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며 맞은편 작가가 실토합니다

“얘한테 넘어가서 나도 바꿨어요.” 그러자 신을 냅니다.

“선생님도 폰 바꾸셔야겠네! 공모전에 쓸 사진도 찍고, 아이디어도 바로 메모하고 얼마나 좋아~”


어제 같이 밥 먹은 작가, 서로 열흘 만에 본 작가도 있을 텐데 서로 모르는 근황도, 장난에 농담에 거리낌도 없습니다.

단독 인터뷰를 앞두고 심호흡에 여념이 없는 어느 작가. 떼 지어 문틈으로 엿보던 다른 작가들이 키득거립니다.

“진지 너무 잡수셨네. 평소처럼 해 평소처럼.” 생업과 작업, 서로 다른 일상으로 바삐 엇갈리는 와중에도

오며 가며 삼삼오오 다져 온 친분과 우정이 또렷이 느껴집니다.


입주 작가 생활에 친분이 늘 긍정적일 순 없겠지요.

파벌이 생겨 ‘친목질’을 부를 수도, 특정 작가 간 갈등의 빌미가 되어 오히려 작업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때 “웃고 떠들다가도, 언뜻언뜻 서로의 작업을 보면 자극받곤 한다.”


“먼저 와서 나중에 일어나는 누군가를 보면, 전시 소식에 들뜬 모습을 볼 때면,

‘열작’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늘 다짐한다.”라며 주억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면 아마도 이게 바로 시너지이며

입주 작가 생활을 하는 또 하나의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약력 한 줄 늘어나는 것 말고도 말이지요.


그리고 이번 《2020 CRE8TIVE REPORT》는 여덟 명이 그 시너지를 여러분께 자랑하는 자리입니다.

불안정한 위치, 불분명한 방향, 불확실한 태도…거대 사회 속 왜소한 현대인 대부분이 느끼는 자신일 것입니다.


김선영 작가는 이런 스스로를 외면하는 대신 부릅뜨고 마주보려 애씁니다.

알 수 없는 동네, 쓰임을 잃고 널브러진 무언가, 흔들리고 움츠러든 풍경들은 생김새가 단지 사람이 아닐 뿐

일종의 자화상입니다.


어떤 작가나 작업은 종종, ‘내면을 담았다’는 둥, 딱히 와닿지 않는 설명으로 외면받거나 오해를 사곤 합니다.

 ‘나를 닮은 녀석’이라 보면 쉽습니다. 나약한 내 꼴과 속과 겁을 꿋꿋하게 응시하는 작업이지요.

작품을, 같은 박자로 닳고 늙고 성숙하는 분신으로 애틋하게 바라보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김선영의 ‘성숙’은, 불안을 깨고 밟고 피하는 게 아니라,

마주하고 감싸 안아 원동력으로 키울 수 있는 자신감입니다.

세상 생김새가 모두 그럴싸한 건 아닙니다.

사랑은 불멸 아닌 필멸이고, 봄꽃 가을꽃은 서로 만날 겨를이 없으며, 달의 뒤통수를 볼 수도 없습니다.


김수연 작가는 세상을 반죽해 입맛대로 다시 빚어냅니다.

사랑은 다시 다듬어 더욱 굳건히 하고, 개나리가 코스모스를 만나며,

보름달 같은 대가들의 숨은 그늘을 전면에 꺼냅니다.


‘대가’라 하면 으레 유명세나 웅장한 작업이 떠오릅니다.

이를테면 색색의 조각들이 기하학적으로 공중에 사열한, 칼더의 ‘모빌’같은 것들 말입니다.

누구나 아는 그의 작업 말고, 작업실은 어떤 모양새일까요?

어쩌면 빨강 검정 노랑이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 원색을 사냥해 오와 열이 잘 맞게끔 꼬치에 끼워 익히고,

잘 익은 녀석을 다듬어 ‘모빌’로 출고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달의 뒷면엔 절구에 걸터앉은 토끼들이 ‘담배 타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요.


김천수 작가는 사진을 전공한 ‘정규 사진가’입니다.

그리고 그의 진짜 관심은, 반듯하고 진지한 정통보단 그 주변의 ‘삐침머리’나 ‘허점’을 기웃거립니다.

테러 현장 디지털 사진의 데이터 일부를 ‘테러하여’ 기괴하게 변형합니다.

카메라 센서 오류로 흔들린 사진을 바닥에 깔고,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재개발 현장에서 쓰는

먹줄을 가져와 먹선을 칩니다.


무척 낡고 바랜 스키장 사진, 색이 날아가고 곳곳이 박락된 표면을 계속 바라보면 문득 불꽃놀이라도 하는

광경처럼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최근에 찍은 사진입니다. 폐 건물에 덩그러니 남은 ‘사진을 사진 찍은’ 것입니다.

낚였다 헛웃음을 칠 게 아니라, 데이터를 마치 재료나 오브제처럼 사용하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유린하며 유희하는 그의 엉뚱함과 과감함에 주목해 봅시다.


각자가 사는 서로 다른 세상, 땅을 디딘 사람 수만큼의 세상을 콜라주한 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 아닐까 합니다.

이질적인 것들, 서로 다른 눈높이와 원근, 모순과 갈등이 마치 원래 한 덩어리의 장면인 것처럼 천연덕스레 얽혀 있지요.


염지희 작가는 서로 다른 시공의 사람과 풍경, 시집을 읽으며 받은 영감 조각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직조합니다.

시선도 스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사는 인물들, 소실점을 소실하며 뒤섞여 버리는 풍경을 엮었음에도

의외로 화폭은 자연스럽습니다.

적당히 성글게 짠 화면 곳곳 틈새를, 감상자 저마다의 경험과 상상으로 채우며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별 기억 조각’과 ‘기억 덩어리’는 좀 다릅니다.


임지민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기억 타래 memory collage’입니다.

실타래와 달리 기억 타래는 알 수 없는 논리-그렇다고 또 ‘무논리’는 아닌-로 뒤얽혀 있습니다.

기억 조각들은 분명 내 것임에도 때론 낯설고 새삼스럽습니다.

한 몸이었던 기억이 파편화하고, 다른 기억에 치이고 짓눌리며,

정처 없이 떠돌다 색과 맛이 변하고, 심지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건만 다른 기억에 가리었습니다.

굴절되어 전혀 새롭게 현재로 소환되기도 합니다.


‘손’은 기본적으로 강한 지시성 의도성을 띠는 대상인데,

특히 그의 작업 전반에서 인물과 정황을 제시 혹은 암시하는 효과적 장치로 활약합니다.

상황을 그대로 담거나, 처지 혹은 감정을 우화적으로 풀어내는 등 기억 못지않게 변화무쌍 다채로운 표현도 돋보입니다.

수십수백 년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이나 웅장한 산세는 경이롭습니다.

전형적인 멋이죠. 반면 정재원 작가는 자연의 이면적인 매력을 찾아냅니다.


인적이 끊긴 재건축 현장은 을씨년스럽습니다. 주차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주민,

자전거 타다 넘어진 아이의 울음으로 번잡했던 시절이 불과 수 년 전일 텐데,

적막과 바삭한 낙엽 울음, 퀴퀴한 바람이 대신 들어찬 그곳의 첫인상은 사뭇 쓸쓸하고 공허합니다.

한편 미처 함께 이주하지 못하고 유기된 원래 주인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듭니다.

잎새는 더욱 짙어지고 수풀 사이로 이름 모를 온갖 식물들이 기다렸다는 듯 티격태격 세를 겨루기 시작합니다.

활기가 떠난 곳에 싹튼, 또 다른 활기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각축일 수도,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 틈새에서 건진 자연의 어부지리일 수도 있지만

이 ‘역설적 황홀’은 여전히 그곳을 지킵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가끔은, 장면을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정진 작가의 그림은 곳곳을 열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페이스트리 빵처럼 물리적 그림 층을 지녔지요.

뚫린 틈새로 엿보이는 또 다른 레이어는 보다 과감한 재료와 형식 변화도 너끈히 어루만지며

마치 한 화면의 확장처럼 자연스레 소화합니다.


틈새 너머 무한한 다른 시공을 암시하며 내용은 무궁무진 다방향으로 전개합니다.

만화에서 본 듯한 효과선을 회화 연출에 적극 활용하고, 동서양의 캐릭터나 설화를 거리낌 없이 호출합니다.

한정된 면적의 캔버스는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의미 밀도를 블랙홀처럼 계속 높입니다.

우주의 끝을 찾듯 회화의 의미, 역할, 가능성의 끝을 구도하는, ‘다채널 회화 실험실’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구석, 그늘, 언저리, 이면, 부작용, 모호함…정철규 작가의 눈길은 초점에서 소외된 것들을 어루만집니다.

‘사랑’ 하면 따뜻하고 황홀한 이미지부터 떠오르지 엇나간 혹은 과도한 ‘사랑이 부르는 갖은 부작용’이

주인공을 맡는 건 드물지요. 사랑은 때때로 상위 구조나 권력의 변호인이나 전위대, 하수인 노릇을 합니다.


“널 생각해서,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선의를 가장한 강요, 따뜻한 윽박지름에 도리 없이 아스러지는 연약한 존재들이 식물이나 돌멩이 등

작은 물체로 무대 중앙에 섭니다.

잊히고 버려진 것들은 트로피로 환생해, 오히려 이젠 ‘모시고 기릴’ 대상이 됩니다.

분명함을 강요받던 자신은 스스로 어중간하고 모호한 색상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미묘한 사람답게 감 색도 배 색도 아닌 중간색에 당당히 머뭅니다.


가끔은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작업만 보면 이번 기수 작가들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서 또 어느 때보다 서로 잘 살려줍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색채 대비 효과’같은 걸까요?

부디 이 화기애애의 불씨엔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로 고이 모셔다 미술계에 활기를 주는 큰 불씨,

9기 여덟 입주 작가 모두 서로 다른 색상과 모양새의 미술계 핫팩이 되길 기원합니다.


김영기 (OCI미술관 선임큐레이터)





윤석남_벗들의 초상을 그리다


여기, 얼굴들이 있습니다. 주름진 피부와 희끗희끗한 머리칼에서 세월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윤석남 선생님은 이들을 자신의 ‘벗’이라 부릅니다. 작가 윤석남의 인생 동지이자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함께 살아가는 이들. 하나같이 당당하고 멋진 여성들입니다.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사람들이라며,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슬며시 미소를 짓는 윤석남 선생님과 그림 속 올곧은 표정의 인물은 어딘지 서로 닮은 듯합니다. 실제로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인데도, 보는 저희도 괜히 이 ‘언니들’이 반갑고 손이라도 마주 잡고 싶어집니다.

윤석남 선생님께서 이번에 보여주시는 그림은 채색화입니다. 그저 민화를 재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료와 기법은 옛것에서 비롯하였으되 그 내용이 오롯이 ‘윤석남 표’입니다. 긴 한국 미술사에서 여성의 초상화는 유독 드물었는데, 윤석남 선생님께서는 보란 듯이 자신의 주변에서 만나는 근사한 여성들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하는 일이 무엇이든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면 우리는 다 옛 그림 속 위인들처럼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요?

다정한 벗들처럼 누군가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연대하는 것은 어쩌면 시공을 초월하는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윤 선생님의 <신가족(新家族)>, <소리>, <허난설헌>3점의 설치 작품은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는 윤석남 선생님의 자화상도 한가득 보여드립니다. 이토록 무수한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 고독의 시간을 저희도 감히 상상해 봅니다.

한국 미술의 큰 선배인 동시에 소소한 인연과 사연으로 둘러싸여 빚어진 ‘인간’ 윤석남의 면모가 저희 전시에서는 스스럼없이 드러납니다. 누구도 혼자 살 수는 없으며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었다는 자명한 일을 윤석남 선생님 특유의 솔직한 화법으로 전해드리며, 이 속에서 여러분들도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나의 친구들, 믿고 의지하는 후배들, 그들의 초상을 그리면서


정확한 날짜는 잊어버렸지만 약 10여 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접하게 된 한국 초상화전은 작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거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초상화는 거의 잊은 상태에서도 그날 나를 거의 울게 만든 초상화가 하나 있었다. 윤두서의 자화상이었다.

 

나는 이 자화상에 관해서 무슨 이러하고 저러한 얘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지식도 내게는 없다. 나는 그 초상화를 접한 순간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고나 할까? 형형한 눈빛, 휘날리는 기인 수염들 그리고 그이가 입고 있는 담백한 한복의 선들, 무엇보다도 살아서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전하고 있는 듯한 그 눈빛에서 난 왜 그렇게 놀랐을까?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이고 나는 이제부터라도 붓을 들고 먹을 갈고 초상화를 그려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먹을 갈기 시작하고 붓을 들고 선을 긋고 하는 것이지만 초상화로 바로 이어지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거의 40년 가까이 서양화의 테두리에서 헤매인 주제에 별안간 붓을 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명지대학에 계시던 이태호 선생님께 갑자기 청을 드렸다.

 

“한국화를 배우고 싶다. 선생님을 소개해 주시라”

 

부탁했더니 바로 그 자리에 좋은 분이 있다고, 도야 김현자(경기무형문화재 제28호 이수자)라고 소개해 주셨다. 그래서 곧바로 김현자 선생님 작업실을 찾아가서 선생님 밑에서 한국화 기법을 약 4년 동안 배웠다. 내가 이렇게 한국화에 빠질 줄이야 하고 스스로 자신한테 놀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국화 중 “민화”라고 불리는 길로 무단히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왔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한국화인지 민화인지 그 어떤 장르인지 잘 모른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정직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옛 초상화에 관한 서적들을 열심히 사서 읽어 보았다. 작품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내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 많은 이조 시대 초상화 중에 여성을 그린 그림은 딱 2개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도 초상화의 대상인 여성의 이름은 없고 그저 이름 없는 여인상이었다. 나의 좁은 견문일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슬펐다. 이조 5백년의 역사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이 슬프다가 점점 화가 일어났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의 국전 관람시 한국 부인들의 초상화를 보지 못한 바는 아니면서도, 그것은 그저 대상화였다 할까 어쩐지 삶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별 감흥이 없었다. 즉,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라는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초상화를 그려보자고 마음먹었다. 우선 친구들부터 기록하자.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비록 내가 만나보지는 못한 과거의, 혹은 역사 속의 작은 기록이라도 남아 있는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려보자 마음 먹었다. 아마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겠지. 어쩌면 비난과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 하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작품을 만든 후의 일이다. 후의 두려움 때문에 현재의 뜻을 버릴 수는 없지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한 가지 믿는 것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작업들이 현대 미술에 하나의 득이 될지 해가 될지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열심히 추구해오던 설치 작업들은 포기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닥쳤지만 아마도 이 문제도 서서히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직도 어떤 장소의 그 장소적인 매력에 빠지면 곧바로 설치로 표현해보고 싶은 충동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욕심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허락하는 때까지 초상화를 그리고 있겠지 할 뿐이다.

 

끝으로 내 초상화의 대상으로 기꺼이 응낙해준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진정 감사합니다.

 

2019. 10. 1

윤석남





'족쇄와 코뚜레'

참여작가 : 김동현, 도파민최, 박수호, 신민, 오순미, 장하나, 최호철, 허보리

전시일시 : 2019,9,5-10-26

전시장소 : oci미술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다.좀 추슬러 차리니 아무래도 먹기가 편하다.종류별로 나눠 가지런히 담아내니 더 깔끔하고 맛있는 것 같다.갖은 모양을 내어 예쁘게 플레이팅 하니 요리의 급수가 오른 기분이다.음식인지 작품인지 알 수 없는 수준으로 정성을 들이니, 아까워 먹을 수 없을 정도이다.평생에 다시없을 독창적인 꾸밈새가 나오니, 이건 더 이상 음식의 영역이 아니다. 먹고사는 일과 美1의 추구는 전혀 딴판 말고 같은 판에 있다.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산 것이고, 걸치면 옷이고, 씹어 삼키면 다 음식인가? 맛있는 것보다 기왕이면 맛있고 예쁜 걸, 치마 하면 다홍치마를 집어 드는 건, 욕구 단계론이라도 끌어다 논리적인 척할 것도 없이 그냥 ‘본능’이라 퉁치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울 듯싶다. 쾌快의 수많은 가닥 중 굵직한 하나가 단연 美라면, 의식주를 벗어나서도 마찬가지로 좋은 걸, 더 좋은 걸 찾을 것이다. 그런데 美의 추구에는 대가가 따른다.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는데, 너도 나도 찾는 홍상이 동가일 리 있나. 동가에 ‘ㄷ’만 꺼내도 ‘홍상 프리미엄 모르냐?’는 타박만 돌아온다. 제품도 그러할진대 작품이야 말해 무엇하랴. 당장 입지도 못할 홍상을 훨씬 멋지게 짓는 일인 것을. 그런데 어럽쇼? 천신만고 마다않고 다 지어 놨더니 ‘입지 못할 홍상, 매입 사절’이란다. 짓는 족족 팔려 나가도 시원찮을 판에, 빌붙어 늙는 자식놈처럼 철없이 눌러앉은 치마 더미를 보고 있자니 썩고 타는 건 그저 속이요, 언감생심 다음 치마 넘볼 처지가 못 된다. 치마는 쌓이고, 여력은 깎이고, 확신은 꺾인다. 작업을 하면 할수록, 작업 하기 더더욱 어려워진다. 연년생 키재기하듯 무럭무럭 쌓이는 울긋불긋 고지서와 갖은 독촉장을 우두커니 바라보자니 휑한 깨달음이 온다. ‘다른 모든 걸 끊고 작업에 매진하다가는 까닥, 작업도 끊게 될 판이구나.’ 이러나저러나 ‘작업을 하려면 작업 아닌 것을, 작업의 ‘여집합’을 열심히, 또 잘 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요번에 필feel 한번 제대로 꽂힌 회심의 역작, 하늘을 나는 다홍치마 작업 하려면, 공장에서 바지 백 벌은 기워야 할 성싶다. 모자랄지 모르니 이백 벌 해 놓자. 그냥 넉넉하게 천 벌 할까?’ 여집합에 몰두할수록 든든히 작업을 뒷받침할 수 있으리란 기대 하나로, 치마 지을 힘이며 짬이며 좌우간 있는 대로 박박 긁어다 바지 공장에 기약 없이 들이붓던 어느 날, 인터뷰가 들어왔다! 무려 ‘바지 달인 특집’이란다. 치마 작가 말고. 여집합은, 몰두할수록 작업과 서먹해지는 부작용 표기가 소홀했다. 발목 잡히지 않으려 뛰어든 여집합에 코 꿰어 정신없이 끌려가다 보니 숫제 여긴 어디쯤일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무엇에 취한 듯 덜 깨어 아직 흐리멍덩한 눈, 도통 갈피가 서질 않아 여전히 망설이는 얼굴로 연거푸 두리번댄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 족쇄 차고 고군분투 마른 풀숲을 훑어야 할까? 여물 때만 손꼽으며 이름 모를 논두렁 따라 그저 ‘존버 앞으로’ 해야 할까? 갈 힘과 갈 길, 어느 쪽을 저당잡힐는지.족쇄냐 코뚜레냐 그것이 문제로다.

1문두에서 ‘예쁜 것’으로 순화-연수기로 거르듯 ‘연화 軟化, softening’라 하면 더욱 적절하겠다-한 좁은 의미의 ‘美’와 관련, 진리, 보편, 합리, 숭고, 우아, 희소, 비장, 황홀 등 하고많은 모양새를 규정해 왔지만, ‘그럴듯함’이야말로 너무 한정적이지도 난해하지도 않고 사뭇 적절해 보인다. 앞서 나온 단어들 또한 ‘이런저런 그럴듯함’의 나열이 아닌가.

김영기 (큐레이터)









물의 기억: 백정기의 접촉주술

 

 


인도의 성스러운 강, 강가(Ganga; 갠지스 Ganges)는 비슈누 신의 연꽃 모양 발에서부터 솟아 나와 하늘나라를 흐르는 은하수였다가 시바 신의 헝클어진 머리 타래를 타고 땅으로 내려온 물줄기라는 전설이 있다. 인도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성지인 이 강의 물을 마시거나 이 물로 목욕을 하면 세상의 더러움, 외양은 물론 더럽혀진 영혼과 업(Karma)까지도 씻어내는 효험이 있다고 세속의 인간은 믿는다. 종교의식에서 물이 정화(淨化)의 의미로 쓰이는 것은 비단 힌두교에서만이 아니다. 일본의 신사를 들어설 때면 데미즈야(手水舍)에서 몸과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신 앞에 나아가며, 천주교에서는 성수(aqua benedicta)를 뿌려 축성하고, 우리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 첫 우물물로 정화수를 길어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마음에 품고 기원하는 대상은 다를망정, 물은 삶과 죽음, 물질과 영혼, 성과 속, 천상과 지상을 잇는 매개였다. 그런데 여기에 줄곧 궁금증이 남는다. 온 세계에서 물에 씻어낸 더러움은 대체 어디로 가버리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지난 십여 년간 백정기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의 작업은 꾸준히 변모해왔음에도 작품의 상당수가 물을 다루고 있다. 마르지 않도록 바셀린을 발라 물을 가두고, 기우제로 단비를 부르며, 그도 아니라면 각종 실험 도구들로 물을 분석하고, 희석하고 또 정제한다. 그가 그토록 물을 통해 찾고 있는 것은, 여전히 세상에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다. 과학의 설명도 구해보고 주술적 의식에도 빌어보지만, 그래도 세상은 아직 불가해한 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본질이자 원리라고도 할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백정기의 예술은 바로 이 ‘알 수 없는’ 커다란 세상을 총체적으로 탐구한다. 그리고 물은 곧 그에게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이자 동시에 세계를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백정기의 이번 개인전<접촉주술>도 물을 다루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물의 신인 용(龍)이 한껏 전시장을 받쳐 들고 있다. 아무도 실체를 본 적이 없기에 ‘상상의 영수(靈獸)’라고 일컫는 용이지만, 옛 건축물의 장식이나 복장, 하다못해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몸에 그려진 문신으로 수시로 보이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익숙한 존재이다. 반쯤은 허구에서, 나머지 반쯤은 실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용에게 치수(治水)를 구하는 선인들의 방법은 크게 두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나는 용에게 정성을 들여 비바람을 부르거나 잠재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을 도리어 괴롭히고 자극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허무맹랑해 보여도 때때로 이런 기우제가 정말로 작용하였다니, 적어도 영험 하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니, 사뭇 지금과는 다른 앎과 믿음의 체계이다. 백정기는 이 전시에서 기우제라는 의식을 오늘날로 소환하여, 3D 프린터로 제작한 용두(龍頭)와 건축용 비계를 세워 가상의 용소(龍沼)를 전시장에 구현한다. 과거를 답습하거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전시장을 실제적이면서도 주술적 장소로, 일종의 상징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실 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정보가 들어있다. 그의 <Is of>연작은 어느 특정 현장의 물에 담긴 자연적/환경적 성분을 염료로 전환하는 실험이다. 그 중 <Is of: 서울>은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을 프린트한 작업으로 적 양배추에서 추출한 시료로 직접 리트머스지를 만들고, 여기에 한강 물을 잉크로 사용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리트머스는 산성과 염기성을 측정하는 지시약이다. 한 도시를 흐르는 강의 산/염기도는 이 물이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비는 얼마나 내렸는지, 오염도는 어떠한지, 무엇이 강을 오염시키는지,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인구와 산업체가 관여하는지 등 여러 환경 요인과 행위 주체에 대한 정보를 함유한다. “물은 기억한다(water memory)”는 구절로 요약되는 저장소로서의 물의 특성은 동종요법(homeopathy)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많은 양에 노출될 때에는 암을 유발하는 원인이지만 적은 양은 치료에 사용되는 방사능처럼, 동종요법은 질병 원인과 같은 물질을 극소량 사용하여 신체의 자연치유력을 높이는 방법이다. 다량의 물에 희석된 독은 더는 독으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몸의 면역 기능을 촉진하는 약이 된다. 백정기의 는 이와 같은 동종요법을 적용한 작업이다. 유독한 물질을 희석하고 정제하여 약으로 만드는 과정을 영상과 설치 작품으로 보여주는데, 관찰력이 좋은 관객이라면 이 작업에 쓰인 원료 봉지에 ‘녹은 플라스틱’이라 적힌 화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을 사람이 먹어도 되나, 아니, 그전에 저 재료는 무슨 사연으로 또 어디에서 구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끔 하는 장면으로, 실은 이 작업은 작가가 실제 화재 사고의 현장에서 직접 채집해온 검은 재를 물에 풀어 그 성분을 정제하여 약을 만드는 시도이다. 물에 독을 씻어낸다고 할 수 있는 이 과정에서 ‘독’은 단지 물질적인 잔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화마(火魔)가 불러온 아픔이나 슬픔, 공포, 원망, 회한과 같은 모진 마음의 독까지도 풀어내는 심리적 제의이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면, 씻어낸 더러움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여전히 물속에 있다. 다만 그것이 천 배, 만 배 희석되어 ‘더럽다’는 경계를 녹여내며 다른 곳에서, 다른 기능으로,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갔을 테다. 어느 지표면을 흐르며, 어딘가에 고이고, 누군가의 몸으로 흡수되며 말이다. 결국 우리는 같은 물을 조금씩 나누어 가진 존재들이다. 기억의 보관소인 동시에 물질/영혼의 전환소이자 공유소인 물을 백정기는 <자연사박물관>이라는 생물학적인 메타포로 담백하게 제시한다. 이 작업에서 그는 ‘자, 여기, 지구상의 포유류 샘플이 있는데 그 라벨에서 보다시피 저마다 다른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여러 종의 생명체는 물이라는 접점을 통하여 공시적일 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는 고찰을 거시적으로 보여준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유리병에 담겨 바로 당신의 눈앞에, 그리고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대류 안에도, 심지어 당신의 살과 뼈 속에도. 결국 물의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딘가에 저장될 뿐.
 
이번 전시에서 시종 일관된 관점을 제시해온 백정기가 피날레로 선택한 작품은 <Is of: 가을>이다. 이번에는 가을 명산에 알록달록 단풍이 든 잎사귀로부터 잉크를 추출하여, 그 산을 찍은 풍경 사진을 출력했다. 실제 가을 산의 풍경이 가공되어 사진 속 풍경으로 전이되는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색이 바랜다. 아무리 자외선을 차단하고 아크릴수지에 담가 산소와의 접촉을 방지하더라도, 그 변화를 지연시킬 뿐 완전히 변색을 막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라진 색의 성분도 아마도 어딘가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저 큰 시공간의 소용돌이 속 어느 곳에.
 
우리가 설명하지 못할 일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기에 우리가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 우리가 우연이라고 치부하는 일들이 진짜로 ‘우연’일까, 어느 큰 맥락에서는 모두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규칙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 백정기는 내내 이와 같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답을 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건축적인 구조나 과학 기초 이론,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실험이 기반하기도 하는데, 물론 세인의 눈에는 전시장에 놓인 파이프와 시험관, 기다란 호스와 시약 따위가 생소할 수는 있겠으나, 이는 그 스스로 답을 얻기 위해 선택한 방법론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크게 본다면 과학이니 주술이니 예술이니 철학이니, 그런 차이가 다 무어란 말인가. 지구의 나이 46억 년 중 인류가 출현한 것은 길게 잡아도 고작 5백만 년, 그 중 한 사람의 생은 어림잡아 80년, 그야말로 티끌보다 작은 정도만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터, 우리는 단지 우리가 만지고 스쳐 지나간 모든 것들로부터 맞닿아 접촉주술에 걸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백정기의 작업이 우리의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두는 것은 그것이 상식으로 당연하게 여겨온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품게 하며, 어렴풋이 감지되는 근원적 에너지나 힘, 불가항력적 존재에 대하여 환기하기 때문이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나 영혼에 이르는 물,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연히 흐르는 물처럼 그의 작업 역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전달되며 예술이라는 이름의 주술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주술에 기꺼이 현혹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전시가 백정기가 취하는 마법의 언어와 행위로 우리를 ‘전염’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올인원

 

 
종교, 예술, 과학의 광활한 세계를 지탱하는 공통의 사고를 가늠해본다. 종교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을 절대적 가치의 영립을 추구하고, 과학은 사고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특정 체계 안에서 세계를 지속적으로 재발명, 업데이트한다. 그에 반해 예술은 모든 가설과 사고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체계화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포함한다는, 그리고 그 인과관계가 하나의 절대적 가치에 귀속된다는 신학적 개념을 의심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은 마치 과학처럼 나름의 사고와 가설을 공유 가능한 체계-형식으로 전환 구술하기도 하고 때론, 아니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종교처럼 탈시간적 절대적 가치를 추구해왔다. 분명한 차이를 보이지만 결코 서로 타자화할 수 없는 종교, 예술, 과학의 세계에는 어떤 공통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 공통의 시학을 굳이 따져본다면 의례로 구동되는 세계가 드러난다. 종교, 예술, 과학의 세계는 이 ‘의례-형식-체계’의 고용 없이 그 어느 곳에도 당도하지 않는다. 오늘이 화려한 사유에 열광하며 형식을 지루한 관습으로 치부하더라도 형식의 실천이 사유와 이상으로 향하는 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백정기는 종교, 예술, 과학의 의례와 형식을 사회, 역사, 문화, 지리 등의 다양한 맥락으로 확장 탐구해왔다. 작가가 지속해 온 기우제 작업은 그러한 시도의 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왜 기우제를 현재의 시공에, 그것도 전시라는 미술의 체계 안에 재구성하는 것일까? 먼저 기우제는 작가의 오랜 관심인 ‘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물과의 연결을 잠시 제쳐두더라도 기우 의례는 그 자체로 다채로운 사회적 역사적 역동성을 내포한다. 대부분의 기우제는 가뭄 해갈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말해 위기를 극복하고 불시의 재앙에서 구제받으려는 열망과 함께 진행된다. 절박한 상황에서 진행된 이 임시 의례에는 염원의 행위뿐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주변 문제와 상황을 헤아려보는 행위도 함께 수반된다. 기우제가 거행되는 기간 동안 왕이 뜨거운 노천으로 전각을 옮겨 지냈다는 고증은 기우 의례가 일상의 여유를 견제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태도를 전제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시공에 기우 의례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주변을 헤아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와 그것의 가치를 오늘 다시금 고양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유추해 본다.
 
작가의 이번 개인전 <접촉주술>역시 기우 의례와 관련된 <용소>와 <침호두>를 포함한다. 전시장 입구를 시작으로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용소>는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결속부위(joint)에 흔히 말하는 비계파이프를 연결한 구조물로, 제목 그대로 용의 거처(龍沼)를 시각화한다. 그리고 전시장 1층 가장 안쪽에 작은 재단처럼 만들어진 <침호두>에는 용과 상극인 동물-호랑이를 상징하는 물질인 철광석이 놓인다. 이 두 작업은 다양한 기우 의례 중 용신(龍神)과 관련된 기우제룡(祈雨祭龍)의 방식을, 그중에서도 상룡과 잠룡기우의 형식을 재현한다. 풀어 설명하면, 작업은 강우의 직능을 가진 용을 형상화해 비를 기원하고(상룡) 용소에 머물고 있는 잠룡을 자극해 경천동지할 비상을 이끌어 강우를 얻어내는(잠룡기우) 주술 방식을 재구성한다. 이 작업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용과 재단을 재현하는 의례의 핵심 과정을 3D프린터가 대신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여러 유적지와 박물관을 방문해 전통 건축양식의 다양한 용두를 3D 스캐닝 기술로 디지털화하고 조인트로 설계해 3D 프린터로 출력한다. 기우 의례에 내재된 염원과 반성의 행위를 몸소 실천하듯 줄곧 노동 집약적 과정을 통해 기우제를 재현한 이전과 달리, 3D프린터라는 비교적 새로운 기술을 작업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이전에도 기술과 과학의 예술적 접목을 나름의 실험으로 전유해왔다. 그럼에도 이번 시도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기술의 적용과 전유가 이전보다 실제적 차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또 그것이 작업 과정과 형식의 간소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러한 적용이 작가의 원래 사유를 왜곡하거나 어설프게 단순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업에 전유된 기술은 결코 새로움, 미래, 외부,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움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이전, 전통, 내부와 같이 반대의 것과 결부되어 있음을, 오직 그러한 관계에서만 가치화될 수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전통건축 양식인 용두를 3D 프린터로 출력하고 이를 조인트 삼아 구조물을 가설하는 작업은 그렇게 의례와 기술, 개인의 열망과 미술의 형식, 또 전통과 현대가 결합(joint)된 상태를 구현하다. 그리고 이는 너무 멀리 있어서 혹은 이미 일반화되어 쉽게 감지되지 않는 새로움, 외부, 타자의 세계를 고찰하게 한다. 다름이라는 텅 빈 구멍 안에 모든 가치를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 구멍으로 아득한 외부를, 보다 다양한 세계를 접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시는 주변을 헤아리고 나를 돌아보는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며 보다 넓은 세계와 존재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는 물을 매개로 거대한 전체를 상상하고 다양한 존재를 고찰하는 <자연사박물관>과 <Is of: 서울>, 그리고 <Is of: 가을>로 확장 연결된다. 먼저 전시장 2층에 설치된 을 보면 여러 종류의 물병들이 어떤 법칙에 의거한 듯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수십 개의 유리병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병에 수돗물을 담아 마치 자연사박물관의 전시실처럼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여러 종을 구분하고 표기해 나열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물’을 공유하게 때문에 ‘물’이 곧 생명체를 지시하는 표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상에 물이 생성된 이후 그것의 총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작가는 모든 생명체의 탄생과 멸종, 진화의 과정은 ‘하나의 물’이 만드는 전체 세계를 공유한다고 설명한다. 작업이 애써 구분하고 나열한 생명체들은 어쩌면 병에 담긴 물처럼 애초에 분리 불가능 존재일지 모른다. 물을 통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나누고 정렬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생명의 통합과 순환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선택된 몇몇 종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구분으로 존재 자체를 사유하는 방식을 고찰하게 한다. 이러한 시도는 오만한 인간의 허영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업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인간을 탁월한 존재로, 선택된 절대자로 간주하기보다 폭넓은 존재를 사유하는 최소치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을 메타포로 하나의 전체를 가설하고, 인간을 최소값으로 존재를 탐구하는 작업은 세상 모든 생명체의 개별성이 녹아 구분이 모호해지는 곳, 그래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는 거대한 존재의 심연을 상상하게 한다.

 
이렇듯 전시장의 물(병)은 비규정성의 심연을 전제로 무수히 많은 존재의 임시적 규정을 가시화한다. 다시 말해 작업은 거대한 심연 안에 다양한 갈래와 분기를 가설하는 방식으로 외부 존재를 인식한다. 희미하게 감지되는 존재는 언제든 현재의 장면과 결속될 수 있다고, 대상의 구체적 사유는 현재에 내밀한 조건을 가설하며 가능해진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과 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Is of: 가을>은 가을 산의 풍경을 담은 사진 시리즈 작업이다. 작업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작가는 가을 산을 방문해 가지각색의 단풍잎을 수집하고 여러 장치를 이용해 단풍잎의 색소를 추출한다. 그리고 그 색소를 잉크 삼아 단풍이 든 가을 산의 풍경을 프린트하고 특수 설계된 장치로 보존한다. <Is of: 가을>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한강 물을 채집하고 이를 잉크처럼 사용해 리트머스 종이에 서울의 풍경을 프린트한다. 두 작업 모두 조건의 가설을 통해 비규정적 성질(색소, 물)을 분명한 현재의 장면으로, 규정성 가득한 상황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상황만을 전환할 뿐 대상의 본래 속성은 탈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은 비규정적 성질을 규정성의 요체로 차용하며 서로 다른 두 성질의 등치를 시도한다. 낙엽에서 추출한 색소로 프린트한 사진은 대상의 재현이 정확하지 못하고 빛이나 산소에 의해 색이 쉽게 변질되는데, 이는 수시로 변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실제 가을 단풍의 성질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또 강물은 도시 환경과 기후에 따라 고유의 산성도(pH)를 갖는데, 이 산성도로 프린트된 도시 이미지는 해당 장소의 생태환경, 경제, 문화를 가늠하는 여러 실질적 지표를 포함한다. 여기서 관객은 이미지를 보며 대상이 기인한 세계를 감지하는 경험을 하며 규정성과 비규정성이 서로 상통함을 재확인한다.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순환의 개념은 <Materia Medica: Cinis>에서 다시 치유의 개념과 포개진다. 작가는 질병을 일으키는 성분(독)으로 해당 질병(독)을 치료한다는 동종요법(homeopathy)의 과정을 직접 실행한다. 그리고 그를 기록한 영상과 실제 제조한 치료제-알약을 함께 전시한다. 처참한 사고가 있었던 곳에서 몇 가지 물질/성분들을 채집해 약을 만드는, 일종의 유사 과학을 실행하는 영상 속 장면은 엄숙함을 넘어 제의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애초에 작업의 목적은 약을 제조하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닌 그 행위 자체에, 그러니까 의례의 실천에 있었을지 모른다. 마치 삶 밖으로 밀려난 받아들이기 불편한 것들을 내 안의 세계로 조심스레 끌어안듯, 작가는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와 기억들을 치유의 물질로 분쇄하고 희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저 멀리 밀어 둔 기억들을 현재의 시공으로 재호명하며 치유의 개념을 재고한다. 상처는 상처를 마주할 때 아물기 시작한다고 말하는 작업, 상처와 치료의 개념을 순환의 체계 안에 위치시키는 작업은 물의 순환을 통해 치유를 사유한 작가의 기우제 작업, 또 존재론적 고찰을 시도한 <자연사박물관>, <Is of>시리즈와 함께 독해된다.
 
전시는 서로 다른 개념을 뒤섞고 순환시키며 통합과 치유를, 보다 넓은 존재의 사유를 시도한다. 그 안에는 하나의 대전제가 존재한다. 대상의 고찰을 시도하기 이전에 이미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진술의 엇갈림, 시차를 수긍하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철학적 질문이 이미 존재를 인정하며 시작했듯 새로움, 타자, 외부를 사유하는 작가의 작업은 이미 다른 존재를 긍정하며 진행된다. 다만 작업은 앞서 받아들인 세계와 존재를 다양한 상황과 가설을 통해 감각할 뿐이다. 그럼 그것은 실재를 창조하지 못하는 추상적 존재의 무한한 변주인가. 전시는 새로운 대상, 외부 세계의 인지란 결국 존재를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게 아니라 이미 드러난 것,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가치를 전도하며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작가는 이러한 인식과 가치의 전복을 기술과 의례, 형식과 삶, 비규정성과 규정성을 등치시키는 상황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전시 전반에는 객체와 전체가 혼합된 정서가 흐른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마주하기 힘든 상처와 기억을 보듬으려는 태도가, 통념적 질서를 재고하고 반감을 공감하려는 행위가 함께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들의 경계를 지우고 전체로 엮어내려는 전시를 개별 존재의 특이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보다 넓은 세계를 포착하려는 시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확장된 세계를 사유하고 언제든 그 안에 다른 세계가 틈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작가가 말하는 스쳐간 모든 것이 연결되는 접촉주술의 세상이다.

                                                                                                                                                        

                                                                                                                                                         권혁규 (독립큐레이터)



백정기


 

학력

2008 글라스고 미술학교 순수미술 석사, 글라스고, 영국

2007 첼시 미술학교 순수미술 수료, 런던, 영국

2004 국민대학교 입체미술과 학사, 서울

 

개인전

2018 접촉주술, OCI미술관, 서울

2015 Revelation, 두산갤러리 뉴욕, 뉴욕, 미국

Mind Walk, 두산갤러리 서울, 서울

2012 Is of, 대안공간루프, 서울

2011 The 20th Bridge Guard, 브릿지 가드 아트 앤 사이언스 센터, 스투로보, 슬로바키아

2010 Sweet Rain, 인사미술공간, 서울

Blue Pond, 스톤앤워터, 안양

2009 Wasser + Oleon, 스페이스 15번지, 서울

2006 Finger’s Madam Ch. 6, BMH (Blind Sound Media Hub), 서울

 


 
단체전

2019 Greetings from South Korea, Three Shadows Photography Art Centre, 베이징, 중국

2018 Power Play, Defina Foundation X 주영한국문화원, 런던, 영국

Will you be there?, Project Fulfill Art Space, 타이페이, 타이완

예술+농촌, 공감-농업과 기술의 연결, 인사아트센터, 서울

Delfina in SongEun: Power play,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Jimei x Arles International Photography Festival, 샤먼, 중국

고체-액체 임계점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날씨의 맛,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서울

2017 Spirit from objects, Caso(Contemporary Art Space Osaka), 오사카, 일본

Ecology of Creation, Fukuoka Asian Art Museum, 후쿠오카, 일본

송은 수장고: Not your ordinary art storage, 송은수장고, 서울

2016 Neo-Eden, Jinjihu Lake Art Museum, 쑤저우, 중국

Nanjing International Art Festival, Baijia Lake Museum, 난징, 중국

한 뼘의 온도-관계 측정의 미학, 블루메미술관, 파주

OLD & NEW, 간송미술관, 서울

Apmap_Make Link,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울

아트스펙트럼, 삼성 리움미술관, 서울

다중시간,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15 SEOUL, Vité, Vité, Lille Tripostal, 릴, 프랑스

Singapore Open Media Festival 2015, Gillman Barracks, 싱가포르

2014 그만의 방, 아트선재센터, 서울

청춘과 잉여, 커몬 센터, 서울

Gate Opener, 베이징 꼬뮨, 베이징, 중국

초자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드림 소사이어티, 서울 미술관, 서울

Unseen Photo Fair, 베스터가스파브리크,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Apmap_Between Wave,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주 서광다원

가방 방정식, 0914 갤러리, 서울

네오산수, 대구시립미술관, 대구

CMCP: 기억 반성 비전, 대구지하철1호선 중앙로역, 대구

2013 Roots of Relations, 송주앙미술관, 베이징, 중국

The Nest Generation, 두산갤러리, 서울

젊은모색,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2 Hydromemories, 토리노 자연사 박물관, 토리노, 이탈리아

정신건강검진, 남송미술관, 가평

10CURATORS&10FUTURES,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1 FORMA fest, Pre-Freetex, 수트로보, 슬로바키아

아이파크 아티스트 레지던시 오픈 스튜디오, 커넥티컷, 미국

2010 동동 숲으로의 여행, 북서울 꿈의 숲 아트센터, 서울

사랑의 시작, 류화랑, 서울

2009 플랫폼 인 기무사, 옛 기무사 터, 서울

Hydromemories, 카라카스 시립현대미술관,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Wasserleben, 워터 페어 베를린, 독일

기침,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안양

또 다른 상식, 어반아트, 서울

2008 Apartment Viewing, 아드 비아 베를린, 베를린, 독일

And so it goes, 아트뉴스 프로젝트, 베를린, 독일

Read your tea carefully, 현대미술센터, 글라스고, 영국

Flock Glasgow-TLV, 브뤼셀 갤러리, 텔아비브, 이스라엘

2007 Black Milk, 트라이앵글 스페이스, 런던, 영국

2004 사랑 그 힘, 키미 갤러리, 서울
 

수상 및 레지던시

2018 Exit 레지던시, 인도한국문화원, 델리, 인도

2016 델피나 파운데이션 아티스트 레지던시, 런던, 영국

2015 산 뉴욕 레지던시, 두산 갤러리, 뉴욕, 미국

2014 노마딕 아티스트 레지던시문화예술위원회, 체나이, 인도

2013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2 송은미술대상,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2011 아이파크 파운데이션 아티스트 레지던시, 커넥티컷, 미국

노마딕 아티스트 레지던시문화예술위원회, 체나이, 인도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8 아드 비아 갤러리 아티스트 레지던시, 베를린, 독일

2004 제 3회 전국 대학 대학원생 조각대전, 대교문화재단,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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