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_벗들의 초상을 그리다


여기, 얼굴들이 있습니다. 주름진 피부와 희끗희끗한 머리칼에서 세월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윤석남 선생님은 이들을 자신의 ‘벗’이라 부릅니다. 작가 윤석남의 인생 동지이자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함께 살아가는 이들. 하나같이 당당하고 멋진 여성들입니다.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사람들이라며,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슬며시 미소를 짓는 윤석남 선생님과 그림 속 올곧은 표정의 인물은 어딘지 서로 닮은 듯합니다. 실제로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인데도, 보는 저희도 괜히 이 ‘언니들’이 반갑고 손이라도 마주 잡고 싶어집니다.

윤석남 선생님께서 이번에 보여주시는 그림은 채색화입니다. 그저 민화를 재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료와 기법은 옛것에서 비롯하였으되 그 내용이 오롯이 ‘윤석남 표’입니다. 긴 한국 미술사에서 여성의 초상화는 유독 드물었는데, 윤석남 선생님께서는 보란 듯이 자신의 주변에서 만나는 근사한 여성들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하는 일이 무엇이든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면 우리는 다 옛 그림 속 위인들처럼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요?

다정한 벗들처럼 누군가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연대하는 것은 어쩌면 시공을 초월하는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윤 선생님의 <신가족(新家族)>, <소리>, <허난설헌>3점의 설치 작품은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더불어 이번 전시에서는 윤석남 선생님의 자화상도 한가득 보여드립니다. 이토록 무수한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 고독의 시간을 저희도 감히 상상해 봅니다.

한국 미술의 큰 선배인 동시에 소소한 인연과 사연으로 둘러싸여 빚어진 ‘인간’ 윤석남의 면모가 저희 전시에서는 스스럼없이 드러납니다. 누구도 혼자 살 수는 없으며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었다는 자명한 일을 윤석남 선생님 특유의 솔직한 화법으로 전해드리며, 이 속에서 여러분들도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소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나의 친구들, 믿고 의지하는 후배들, 그들의 초상을 그리면서


정확한 날짜는 잊어버렸지만 약 10여 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접하게 된 한국 초상화전은 작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거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초상화는 거의 잊은 상태에서도 그날 나를 거의 울게 만든 초상화가 하나 있었다. 윤두서의 자화상이었다.

 

나는 이 자화상에 관해서 무슨 이러하고 저러한 얘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지식도 내게는 없다. 나는 그 초상화를 접한 순간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고나 할까? 형형한 눈빛, 휘날리는 기인 수염들 그리고 그이가 입고 있는 담백한 한복의 선들, 무엇보다도 살아서 나에게 무슨 말인가를 전하고 있는 듯한 그 눈빛에서 난 왜 그렇게 놀랐을까? 지금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이고 나는 이제부터라도 붓을 들고 먹을 갈고 초상화를 그려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먹을 갈기 시작하고 붓을 들고 선을 긋고 하는 것이지만 초상화로 바로 이어지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거의 40년 가까이 서양화의 테두리에서 헤매인 주제에 별안간 붓을 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명지대학에 계시던 이태호 선생님께 갑자기 청을 드렸다.

 

“한국화를 배우고 싶다. 선생님을 소개해 주시라”

 

부탁했더니 바로 그 자리에 좋은 분이 있다고, 도야 김현자(경기무형문화재 제28호 이수자)라고 소개해 주셨다. 그래서 곧바로 김현자 선생님 작업실을 찾아가서 선생님 밑에서 한국화 기법을 약 4년 동안 배웠다. 내가 이렇게 한국화에 빠질 줄이야 하고 스스로 자신한테 놀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국화 중 “민화”라고 불리는 길로 무단히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왔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한국화인지 민화인지 그 어떤 장르인지 잘 모른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정직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옛 초상화에 관한 서적들을 열심히 사서 읽어 보았다. 작품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내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 많은 이조 시대 초상화 중에 여성을 그린 그림은 딱 2개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도 초상화의 대상인 여성의 이름은 없고 그저 이름 없는 여인상이었다. 나의 좁은 견문일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슬펐다. 이조 5백년의 역사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이 슬프다가 점점 화가 일어났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의 국전 관람시 한국 부인들의 초상화를 보지 못한 바는 아니면서도, 그것은 그저 대상화였다 할까 어쩐지 삶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별 감흥이 없었다. 즉,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라는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초상화를 그려보자고 마음먹었다. 우선 친구들부터 기록하자.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비록 내가 만나보지는 못한 과거의, 혹은 역사 속의 작은 기록이라도 남아 있는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려보자 마음 먹었다. 아마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겠지. 어쩌면 비난과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 하는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작품을 만든 후의 일이다. 후의 두려움 때문에 현재의 뜻을 버릴 수는 없지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한 가지 믿는 것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작업들이 현대 미술에 하나의 득이 될지 해가 될지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열심히 추구해오던 설치 작업들은 포기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닥쳤지만 아마도 이 문제도 서서히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직도 어떤 장소의 그 장소적인 매력에 빠지면 곧바로 설치로 표현해보고 싶은 충동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욕심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허락하는 때까지 초상화를 그리고 있겠지 할 뿐이다.

 

끝으로 내 초상화의 대상으로 기꺼이 응낙해준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진정 감사합니다.

 

2019. 10. 1

윤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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