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의 헌법재판소
최진욱展 / CHOIGENEUK / 崔震旭 / painting
2020_0904 ▶ 2020_0929 / 월요일 휴관
최진욱_351. 「우정-삼부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97cm×3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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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문명사적 이행기와 그림의 인지생태학적 과제 ● "지구라는 혹성은 이제 강렬한 과학기술적 변혁의 시기를 겪고 있지만, 그 대신에 치료되지 않으면 결국에는 지상에서 생명의 존속을 위협할 상태학적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격변과 함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인간 생활양식도 점차 악화의 길을 걷고 있다. … 그것은 주체성과 외부–그 외부가 사회적이든 동물적이든 식물적이든 우주적이든–의 관계가 일종의 내부 파열과 소아적인 퇴행이라는 전반적인 움직임에 말려 있다는 것이다."ⅰ
최진욱_352. 「창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 130.3×193.9cm, 53×45.5cm_2018
1. 생태계의 전반적 균열과 감각의 둔화 ● 30년 전 펠릭스 가타리가 『세 가지 생태학』(1989)의 첫 문장을 시작하면서 제기한 이 말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시사 주간지의 한 구절로 받아 들여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2020년 상반기 지구 전체를 강타한 이래 현재 진행형인 「코로나 19 팬데믹」과 올 여름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7~8월의 장마-폭우-홍수-산사태의 연쇄반응은 가타리가 경고했던 주체성과 외부의 관계가 "내파"되었음을 실연해 보이고 있다. 8월 들어 폭우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이들이 이번 장마비의 이름에 「기후위기」라는 '해시태그'를 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재난이 일회적 현상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경고해 왔지만 피부로 실감하지 못했던 기후온난화의 구조적 위기가 이제 일상생활의 위기로 체감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인 셈이다. "지상에서 생명의 존속을 위협할 생태학적 불균형 현상"을 일상의 「뉴노멀」로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 하지만 이는 실은 너무 늦은 반응이다. 같은 시각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시달린 유럽은 이미 오래 전부터 폭염과 한파와 홍수가 시도 때도 없이 급습하는 상시적인 기후재난에 시달려 오면서 다양한 형태로 '기후행동'에 착수해 왔다(2019년 가을 세계를 뒤흔든 15살 스웨덴 소녀 툰베리의 유엔 연설은 그렇게 누적된 기후행동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그동안 이런 일들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남의 일로 생각하며 오직 돈 버는 일에 매진하면서 온실가스 배출에 앞장서 왔다ⅱ. 온실가스 배출이라고 하면 미국, 중국, 브라질, 러시아 같은 대국을 떠올리지만 전후 국민소득이 67불에 불과하던 상태에서 최단 기간에 '3050국가'(1인당 국민소득3만불, 인구 5천만 이상 7개 국가)의 반열에 오른 저간의 압축성장의 위력이 지구 온난화에 미친 막대한 영향은 애써 외면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비로소 체감하기 시작하고 있다. ● 개인전 서문을 쓰면서 이렇게 장황하게 기후위기를 논하는 것이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작가의 이번 작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작가 노트에서 작가가 토로하고 있는 감각의 둔화가 우선 그렇게 보인다. ● "2019년에 그린 「거짓말 2」는 예전에 찍어 두었던 계곡의 사진 두 장을 이어서 붙이고, 어두운 그늘 속에 새끼 돼지 도살 장면을 넣어 꽤나 기대하면서 시작한 그림인데…전시장에서 보니 밍밍한 느낌이었다. 작업실에서 그렸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말하자면 이 작품도 「우정-삼부작」과 마찬가지로 나를 배반한 셈인데, 내 감각을 탓할 수밖에 없겠다."
최진욱_353. 「거짓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 130.3×193.9cm, 53×45.5cm_2018
작업실에서 그릴 때와 달리 전시장에서 보니 "밍밍한 느낌"이 들어 그림이 자신의 감각을 배반하고 있다고 느끼는 혹은 반대 방향의 느낌이 드는 이유를 일차적으로 나이가 들어 감각이 쇠퇴했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심층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예술가는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는 말이 있다. 독일 잠수함 승무원이었던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공기가 탁해져 토끼가 죽자 환경에 민감한 자신이 토끼 자리에 앉혀졌던 전시의 체험을 책에 적으면서 유명해진 경구다. 그런데 잠수함 속의 토끼가 조기 경보의 역할을 하는 방식은 자동 경보장치처럼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는 방식이 아니라, 산소가 부족해 호흡하기 어려워 힘이 빠지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는 눈에 보이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복합적인 기후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쉽게 체감하거나 의식하기 어렵다. 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예술가도 처음에는 왜 몸에 힘이 빠지고 감각이 둔해지는지 그 이유를 의식하기 어렵다. ●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알려진 바와 같이 동물들은 먼 곳에서 오는 진동을 먼저 감지하고 사람보다 먼저 대피한다고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사람들은 목전에 가시적인 변화가 나타날 때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각적-의식적인 것」과 「비시각적-무의식적인 것」 사이의 간극이다. 사람도 동물이기에 비시각적-무의식적인 감각과 지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직립으로 자유로워진 손과 입술과 시각의 발달로 동물과 달리 '2트랙'(1차의식과 고차의식)으로 얽힌 복잡한 인지생태학적 발달 과정을 거쳐오면서 양자 사이에 간극이 생겨났다. 비극적인 것은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이 이 간극을 아예 잊어버리게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상품과 기술이 이 간극을 메워주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이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산다. 그러나 게오르규의 말처럼 예술가들은 이 간극이 커져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 좀 더 민감할 거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주체성과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관계가 "내파되거나 소아적으로 퇴행하는" 생태학적 위기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예술가들은 이 간극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을 먼저 보이면서(기운이 떨어지거나 감각이 둔화 혹은 마비되는 이상 현상 등) 그 원인에 대한 무의식적 탐색을 시작할 것이다. ● 우리 사회에서 "소아적 퇴행"의 조짐은 2017년 이후 사회 전반에 만연하기 시작한 '가짜 뉴스' 현상을 들 수 있다. 자연적인 집중 호우가 대기의 규칙적인 순환 리듬을 파괴하고 물길과 들길의 경계를 흩뜨리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킨다면, '가짜 뉴스'의 홍수는 진실과 거짓말의 경계를 파괴하고 정신적 생태계를 마비시킨다. 물론 가짜 뉴스의 홍수는 단순한 한국적 현상이 아니라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전후로 세계화된 현상이다. 그 배후에는 2010년대 이래 중부 유럽에서부터 확산된 우익 포퓰리즘의 거센 물결이 있다. 자연 생태계의 "내파" 조짐은 2010년대 중반 이후 호흡곤란을 가져오기 시작한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확산, 2018년 아프리카 돼지 열병, 2019년 강릉 산불, 2019~2020호주와 아마존 일대를 태운 거대한 산불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ⅲ. 2020년 코로나 19 팬데믹은 이렇게 내파되어 들끓기 시작한 생태적 화약고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정신 생태계가 마비된 데에 더해 자연 생태계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형국이 된 셈이다. 작가가 말하는 「그림의 배반」이 기후위기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그림들이 2018년 개인전 이후 우리 삶의 안과 밖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런 정신적-자연적 생태적 교란과 내파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과 탐색을 기록한 회화적 다큐멘타리와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최진욱_355. 「꿈, 분노, 현실-삼부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30.3cm, 130.3×97cm, 97×130.3cm_2019
최진욱_357. 「석양의 헌법재판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8×227.3cm×2_2019
2. 초현실주의적인 회화적 다큐멘타리 ● 미세먼지/초미세먼지에 오랫동안 시달리면 기운이 떨어지고 맥이 빠진다. 여기에 코로나 19로 마스크 쓰기와 장기간 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와 봉쇄 등이 겹치면 우울증과 유사한 정신적 침체 현상이 야기된다.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의 자유로운 미메시스를 장기간 옥죄이는 이런 변화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낯설고 기괴한 악몽을 계속 꾸는 것과 유사한 무의식적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반복되는 악몽이 누적되는 것과 유사한 정신적 변화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진시키며, 격리와 봉쇄로 인해 움직임이 줄어들면 뇌의 신체지도가 공간적으로 위축되고 감각이 협소화되는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환경과 몸의 상호작용이 점진적으로 축소되는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무의식적인 에너지 집중과 의식적인 감각 사이에 간극이 커질 수 있다. 머릿속과 화면에 이중의 그림 그리기를 반복하며 비교하고 수정하는 화실에서의 집중적인 작업이 마치 악몽을 꾸듯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데 반해 전시장에서 보았을 때 결과물이 밍밍하게 느껴지는 것은 악몽을 꾸고 식은 땀을 흘리며 깨어나서 언어로 설명하고자 할 때 누구나 느끼는 감각의 격차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유추해 볼 수 있다. ● 꿈의 해석이 말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그림은 여러 가지 꿈-내용의 흔적들을 물리적으로 남긴다. 거짓말, 창조, 우정, 꿈-분노-현실, 재난 공동체의 기호 등과 같이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작품 제목들은 악몽의 기억-흔적이 유발하는 어떤 정동이나 감정의 분출을 지시하거나, 악몽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적인 기록 작업을 건조하게 보고하는 보고서의 제목과도 같아 보인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1900)에서 「지각」(1)과 「지각-기록」(2), 「무의식」(3), 「전의식」(4), 「의식」(5)를 구분한 바 있는데, 이번 그림들이 (1), (2), (3)이 뒤섞인 사물-표상들의 기록과도 같다면, 그림의 제목들은 (4)와 (5)의 수준에서 그림에 병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과 제목 사이에 어떤 칸막이가 세워져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꿈, 분노, 현실 삼부작」이 꿈과 분노와 현실이라는 세 가지 상이한 차원을 3 개의 캔버스에 병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전시가 오늘의 다중위기 시대가 촉발한 「불안-꿈의 회화적 다큐멘타리」로 읽힐 수 있는 단서가 여기에 있다. ● (1)~(5)로 이르는 지각과 생각의 회로 전체를 살피면 이런 병렬이 무미건조한 나열이 아니라 괴리와 균열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여러 작품들은 삼부작이라는 명시적 언어와 화면 구성으로 통일성을 유지해주고는 있지만, 각 화면들 간의 내용적인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 상당 부분 형상을 지워버리는 붓터치가 전면화되고, 붓 터치들은 동그랗게 말려 있거나 마구잡이로 휘갈기듯이 따로 놀고 있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마치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문이 막힌 것 같은 이런 역설적 상태를 정밀하게 분석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계열로 구분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 1) 제목과 그림 내용 간의 연관성을 어림짐작 하기 쉬운 「꿈, 분노, 현실 삼부작」부터 살펴 보자. (1) 빛이 하얗게 반사하는 얼어 붙은 겨울 계곡, 얼음 조각 같이 쪼개진 바위들 사이로 얼음과 물이 뒤섞여 흐르는 듯한 화면의 중앙 좌측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있는 「꿈-그림」, (2) 어두운 색깔들로 어지럽게 칠해진 큰 붓 터치들이 솟구치는 아래에 칼을 불쑥 내미는 듯한 웅크린 사람과 나머지 화면의 하단은 흰 물감들이 어지럽게 칠해진 「분노-그림」, (3)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 오르는 호텔 수영장의 파라솔 사이를 지나가는 88만원 세대 알바생을 그린 「현실-그림」은 서로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세 개의 화면은 색조 면에서는 1:2의 뚜렷한 비대칭성이라는 어떤 관계를 내보인다. 한 쪽에는 10년 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지거나 반복되고 있는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밝고 화사하게 그린 「현실」이 있고, 다른 쪽에는 격렬한 「분노」와 불안-꿈과 비슷해 보이는 「꿈」이 어두운 그림자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불안과 분노의 비중이 현실의 이미지를 압도하고 있어, 언어-표상(제목)은 삼부작이지만 사물-표상(이미지)의 흐름은 2부작인 것처럼 보인다. ● 2) 이런 꿈-분노-현실의 이질적인 리듬의 삼중주는 다른 그림들에서는 더 응축되거나 또는 반대 방향으로 이완된다. 아파트 뒤편을 세 폭으로 이어서 그린 「재난 공동체의 기호들-삼부작 2」에서 「분노」는 형체 없이 용해되고 「꿈」과 「현실」만이 뒤섞이는 것 같다. 반면 「우정-삼부작」에서는 현실/비현실의 경계 공간이라고 할 화실의 바닥과 거울 평면에서 삼중주의 리듬이 아주 느린 템포로 이완되면서 리듬감을 느끼기 어렵게 '편평해져'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작품은 이번 출품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듯한 「꿈-분노-현실의 삼중주」의 두 가지 극한 값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아파트 뒤편을 그린 그림에 「재난 공동체의 기호들」이라는 화제를 붙인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징후적이다. 하나는 최근 부동산 대란의 주역이 된 서울의 아파트 자체가 사회적 양극화와 경제위기로 심화되고 있는 재난 공동체의 '내파'의 징후적 기호로 읽힐 수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75년 전국의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2%에 불과했는데 2018년에는 61.4%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 때문에 아파트 값의 급상승은 전체 가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무주택자들에게는 자연 재해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재난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이 그림에서 이와 관련된 분노의 조짐은 찾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코로나 19로 발이 묶인 주민들이 베란다에 서서 노래하며 소통하려 하던 유럽 재난 공동체의 몸짓을 연상시키기도 한다(하지만 이 그림에 등장한 여자는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식의 인상 기술은 어떤 증상의 표면을 기술한 것이지 원인을 파헤친 분석은 아니다. ● 3) 「석양의 헌법재판소」에서는 「꿈」과 「분노」가 「현실」의 단면을 찢고 난입해 현실과 충돌하면서 사회 시스템의 내적 모순을 폭발시키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헌법재판소는 정면으로 그려지는 대신 건물 후면의 길가의 시점에서 석양의 하늘을 배경으로 화면의 하단을 길게 가로지르는 공사장 차단막에 가려진 채 비스듬히 기울어진 각도로 그려져 있다. "박근혜를 탄핵한다"는 한 마디로 전 국민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헌법재판소가 불타는 노을 속에서 회화적으로 리모델링되고 있는 것 같은 이 그림은 오늘의 소용돌이치는 「이행기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끄집어내는 지표로 읽힐 수 있다. ● 4) 「거짓말」에서는 대량 살육처분 당하는 새끼 돼지들과 아파트 뒤편과 나무들의 단편적인 「현실」들이 4개 다이어몬드 형태의 트럼프 카드로 분할한 것 같이 구성된 중앙 화면에 마치 트럼프 대통령의 현란한 손짓과도 비슷해 보이는 상반된 손가락질에 의해 분할 병치되어 있다. 그리고 양쪽 옆에는 거짓말처럼 소가 축구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마치 비담론적 현실과 담론적 제스처와 비현실적 이미지들이 서로 경합하듯 그려진 사물-표상과 거짓말이라는 언어-표상이 다시 경합하는 것 같은 중층 구조를 취하면서 「꿈」과 「분노」는 뒤로 물러서고 「현실」이 전경화되는 형국을 보여준다. 한편, 크기와 구도상으로는 거짓말과 짝을 이루는 「창조」에서는 아파트 거실 바닥에서 미래의 꿈나무인 어린 아이(작가의 손자)가 강아지와 놀고 있고, 아파트 뒤편에서는 나무들이 시원스럽게 쭉쭉 뻗어가고 있다. 현실의 아파트를 발판으로 미래를 창조하고 싶은 소원 성취의 꿈 같은 이 그림은 이번 전시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색조를 띄고 있다. ● 5) 「창조」와 내용적으로 가장 대비되는 계열은 「너의 세계」 시리즈다. 여기서 「현실」은 화실 안으로 축소되고, 화면은 가파르게 서 있는 화실 바닥과 거울에 비친 화실로 이중화되면서 「불안-꿈」과 「분노」가 격렬한 이중주를 펼치듯이 클로즈업 되고 있다. 이 그림들은 똑 같이 화실 안의 장면을 그린 「우정 삼부작」과도 대조를 이룬다. 편안해 보이던 우정 삼부작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작가 노트에서 언급했던 "사막에 이는 모래폭풍"이 마치 「너의 세계」로 밀어 닥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정 삼부작」도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같은 장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리되, 초점은 롱숏에서 풀숏을 거쳐 미디움숏으로 집중되는 가운데 시야 공간은 좁아지고 바닥이 전경화되며 색조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마치 '모래 폭풍'으로 하늘이 흐려지면서 목전의 사물만이 보이는 형국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너의 세계 1~5」 연작과 「우정 삼부작」은 서로를 전제하는 하나의 순환 고리로 묶일 수 있겠다. ● 6) 마지막으로 비교적 담담하게 사물표상과 언어표상 사이의 간극이 별로 없어 보이고 안정적인 구도로 그려진 현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있다. 돼지 도살 장면과 계곡을 합성한 「거짓말2」와 88세대와 코로나 19의 장면을 연결한 「재난 공동체의 기호들-삼부작1」에서 꿈과 분노는 전경화된 「현실」의 이면에 깊이 배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작품들 모두에서 나타나는 큰 붓으로 휘갈겨 지운 자국에는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어떤 「분노」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이런 식으로 계열화해서 보면 「계열 6」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은 꿈과 분노와 현실을 뒤섞는 일종의 '초현실주의' 계열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변화가 의식적인 계획을 가지고 일어난 것 같지는 않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변화는 전체 맥락 상 우리 삶의 안과 밖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신적-자연적-사회적 생태계의 균열과 내파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에 더 가깝게 읽혀지기 때문이다. 물론 각 작품들에는 이런 무의식적 반응에 대한 의식적 성찰과 자기 분석의 과정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무의식적 반응과 의식적 탐구가 새끼줄처럼 얽힌 창작 과정을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최진욱_358. 「너의 세계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20
3. 세계와 몸과 마음과 그림의 간극에 대해 ● 작가 노트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시간 속의 진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말이 있다. 그림은 그리는 과정의 몸 전체의 활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시간 속의 신체적 삶의 진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거나 감각이 둔화될 때가 있다. 특히 마음이 「세계-그림」보다 「그림-기호」에 더 전념하고 있다면 마음은 얼마든지 몸의 진실을 배반할 수 있다.
최진욱_359. 「너의 세계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20
"그림(미술)은 결국 '너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너의 세계는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 흔들리면 안 된다. 오염되면 안 된다. 이것은 나의 현실주의(?) 노선과도 사뭇 배치되는 것인데, 아무튼 그것에 꽂혔다. 나는 어차피 자화상을 그리게 되었다. 내 속에 침잠하여 자화상을 그리다가, 작업실을 그리다가, 발을 그리다가 하였는데, 20-30호의 작은 그림 다섯 장을 그렸다. 「너의 세계 1~5」." ● "마지막으로 '그림은 내 안에 있다'는 생각(강조: 필자). 머릿속에 끝내 떠오르는 그림으로 견고하게 빈 곳을 채워나갔고, 아무 의심이 없었다."
최진욱_361. 「너의 세계 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20
거울에 비친 자화상과 작업실은 88년 개인전과 「그림의 시작」 연작이 시작된 1990년대 이래 작가가 가장 오래 동안 탐구하고 있는 주제다. 따라서 새로울 건 전혀 없다. 이 주제만을 놓고 보면 재현성-추상성-형상성의 차이를 놓고, 오염성 여부를 따져온 20세기 현대미술의 오랜 미학적인 논쟁으로 아무 의심 없이 되돌아 갈 수 있다. 이건 철저히 의식적인 문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몸이 마음을, 무의식이 의식을 배반하고 침입한다는 데 있다. ● "그러는 동안에도 팬데믹이 일상의 삶을 조여와서 그 발들과 예전에 그리던 인물들을 연결해서 「'재난 공동체'의 기호들 1, 2」를 30호로 그렸다." ● 무의식이라고 하면 종종 「이드」만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는 착각이다. 프로이트가 강조했듯이 무의식에는 강력한 처벌 기능을 가진 무시무시한 「초자아」의 무의식이 있고, 심지어 의식적이라고 믿는 「자아」마저 상당 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외부의 실제 현실이 붕괴되어 자아의 일상을 크게 조이고 흔들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로 인해 자아가 위축된 틈을 타고 이드가 "도약"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축대에서 뛰어 내리기 놀이를 하던 때를 연상하면 아파트 뒤편의 시멘트 축대를 그리는 일이 정말 "신 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드의 신나는 도약이 자유로울 수만은 없고, 강력한 초자아의 무의식적 개입에 의해 일그러지고 변형되기 쉽다. 아파트 뒤편의 열대 야자수의 원시림 같이 시원하게 쭉쭉 뻗은 남보라빛 나무들과 축대들과 건물들은 약간씩 뒤틀리는데, 얼핏 이번 산사태와 폭우로 일그러진 풍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물론 아파트 뒤편 그림은 이미 2018년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니 이는 단순히 평자의 연상일 뿐이다). 공사장 가림막으로 하단이 가려진 석양의 헌법재판소 풍경 역시 이드와 자아의 합작물만은 아니다. 외부의 현실이 무너져 내리면서 초자아의 불안과 이드의 불안과 자아의 불안이 서로 어긋난 합주를 벌이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1932년에 출간한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의 다음 구절들은 지난 3년 간 급변하는 현실과 그림 사이에서 작가의 초자아, 이드, 자아가 겪었을 법한 일련의 무의식적 드라마를 잘 해설해주는 것 같다. ● "자아가 섬기는 세 주인은 외부 세계, 초자아, 그리고 이드입니다… 그것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방향에서 조여 들어오는 힘을 느끼면서 세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그것들의 지나친 압박을 받게 되면 불안 공포로 반응하게 됩니다…이드와 현실 사이를 중재하려는 노력 속에서 자아는 종종 이드의 무의식적인 계율을 자신의 전의식적 합리화를 통해 위장시키고, 이드와 현실 간의 갈등을 얼버무리고 이드가 완고하고 절대로 굽히지 않겠다는 듯이 버틸 때에도 외교적인 술책으로 현실에 대한 고려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한편으로 자아는 매우 엄격한 초자아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습니다. 초자아는 자아의 행동에 대해 일정한 규범을 정해 놓고 이드와 외부 세계로부터 자아에게 가해지는 어려움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하며, 정해진 규범들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열등감이나 죄의식과 같은 긴장감으로 자아를 벌합니다. 그렇게 이드에 의해 충동질을 받고 초자아에 의해 옥죄임을 받으며 현실로부터는 거부당하는 자아는 자신 안에서, 또 자신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힘들과 영향들 간에 조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경제적 과제를 완수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인생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군!」 하는 탄식을 억누르기 힘든 것입니다. 자아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그것은 불안으로 촉발됩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실재적 불안」, 초자아에 대한 「양심의 불안」, 이드 안에 있는 억누를 수 없는 열정에 대한 「신경증적 불안」 등이 그것입니다"ⅳ. ● 「세계체계의 안정기」에는 이드의 불안과 초자아의 불안이 겹쳐 일상적으로는 신경증에 시달리더라도 현실원칙에 따르는 지성의 통제에 의해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체계의 이행기」에는 외부 세계가 급격히 붕괴되기 때문에 안정기에 수립되었던 현실원칙 자체가 흔들리면서 감정의 동요에 지성의 표류가 더해진다. 외부 환경의 실재적 위기가 주체성의 내적 위기를 촉진하고, 주체성의 내적 위기가 새로운 실재적 위기를 촉발하는 악순환이 초래되는 것이다ⅴ. 오늘날 이와 같은 총체적 표류로부터 안전한 사람은 없다. 소용돌이 속에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모두가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거대한 문명사적 이행기였던 17세기를 살았던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해결책을 다시 사용해 보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외부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면 나의 생각으로 세계를 새롭게 시뮬레이션 할 수도, 흔들리는 내부를 생각으로 버티게 해줄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이후 수학과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신과 왕의 권위에 맞서는 자율적 주체성의 토대가 되면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화가의 입장에서 이 방법은 다음 같이 번역될 수 있겠다: '이 세계가 요동치고 있고 이 세계를 그리고 있는 나 역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림-생각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 나는 그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한 2주 정도 지나자 '도약'의 효력은 서서히 소멸되고, 그림은 역시 '언어'가 되어야만 했다. 대상의 리얼리티는 '지각'을 통해 그림이 되는데, 그 과정은 한마디로 언어화의 과정이다. 언어는 면과 터치로 분절되고, 은유화를 통해 형상을 얻는다. 그러나 거기까지도 군데군데 흰 여백을 메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림은 내 안에 있다'는 생각. 머릿속에 끝내 떠오르는 그림으로 견고하게 빈 곳을 채워나갔고, 아무 의심이 없었다." ●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었던 것은 사회와 일상과 생각이 교란되고 흔들려도 생각이 작동하는 몸은 안정적으로 받쳐줄 자연이라는 거대한 토대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연 자체가 교란되고 있어 생각을 받쳐줄 몸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또 하나의 문제는 생각하는 내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다. 자아 자체가 외부 세계와 이드와 초자아라는 세 주인을 섬기다가 지쳐 버리기에 나 자신이 초자아와 이드와 자아가 벌이는 전장터가 되어 버린다. 가령 화실에서 그릴 때 그림은 초자아와 이드의 격렬한 전장터일 수 있는 반면, 전시장에서 자기 그림을 보는 나는 주변을 의식하게 된 자아일 수가 있다 따라서 각각의 느낌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인과 바깥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이런 균열들을 고려할 때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뇌신경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의 해법이 적합해 보인다. ● "결합한다. 고로 존재한다!(강조: 필자) 자아는 시간 결맞음에 의해서 단일하게 지각되는 복합구조로 형성된다. 시간 결맞음이 하나의 자리를 만들어냄으로써 뇌의 예측 기능이 조화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주관성 혹은 자아는 시상과 피질 간의 대화에 의해 생겨 난다. 다시 말해서 자아의 토대인 것이다."ⅵ ● 여기서 "시상과 피질 간의 대화"란 해부학적으로 시상 아래의 뇌간과 변연계에서 만들어지는 「몸-내부의 가치평가 정보들」과 시상 위에 포진한 전후뇌와 좌우뇌에 걸친 신피질의 다양한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외부 세계의 정보들」 간의 부단한 대화를 뜻한다. "시간 결맞음"이란 공간적으로 떨어진 외부와 내부 정보들 사이의 이질적 리듬에 40 Hz로 진동하는 일종의 멜로디나 화음을 부여해 비록 한시적이라도 서로 공명하도록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변화하는 환경과 몸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면서 양자의 이질적인 정보와 리듬들 간의 일치/불일치의 역동적 과정을 조율하는 뇌 안에서 다중스케일 네트워킹(미시적-중간적-거시적 시공간 스케일들의 연결)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안팎으로 모든 것이 요동치는 이행기에는 이런 연결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해결책은 연결하는 길 밖에는 없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뇌 신경 구조가 자체가 연결해야만 작동하니 말이다. 환경을 '괄호치고' 오직 생각하는 것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데카르트적인 해법의 자연적 토대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자연의 표류 속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생각과 지각과 느낌과 행동과 세계를 다시 연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진욱_363. 「'재난 공동체의 기호들'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20
최진욱_366.「'재난 공동체의 기호들'-삼부작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130.3cm×3_2020
4. 개인-사회-자연의 선순환 회로 구성을 위하여 ● 먼저 연결 고리가 끊긴 곳을 확인해야 한다. 어떤 도로에 '피트홀'이 생겼는지, 산사태로 도로가 끊겼는지 침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이주해야 할 지역은 어딘지를 확인해야 하듯이, 외부 세계의 불안과 초자아의 불안과 이드의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아가 어느 정도로 위축되거나 마비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또 지각과 기억-흔적, 무의식, 전의식, 의식의 연결 회로 전체를 재점검해야 한다. 시간의 상이한 스케일과 공간의 상이한 스케일도 점검해야 하고,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의 여러 차원들을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마디로 자연 생태계와 사회 생태계와 마음의 생태계 각각의 회로와 세 가지 생태계를 연결하는 전체 회로의 균열과 내파를 모두 살피면서 개인과 자연과 사회라는 세 가지 생태계가 선순환할 수 있는 새로운 회로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새롭거나 거창한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미 30여년 전부터 가타리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 과학자, 활동가들이 이런 얘기를 해왔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을 모두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 19 팬데믹과 여름의 이상 기후는 이제 이런 일들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고 있다. 처음에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을 닥치는 대로 흡입해 상품화하던 자본축적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망가져 왔던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생태적 순환 고리 전체를 새롭게 '수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 물론 여전히 막강한 힘을 지닌 자본순환의 무한궤도가 짓밟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균열 상태를 단번에 선순환 관계로 전환시킬 방법은 없다. 시스템 다이나믹스 이론이 규명해 주듯이 두 개 항 이상의 관계가 악순환 고리에서 선순환 고리로 전환하려면 두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하나는 일단 빠르게 회전하는 악순환 고리를 정체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순환 고리의 맹아를 찾아내거나 발명해서 지속 가능하게 안정화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연결 방식을 실험하는 것이다ⅶ. 자연과 사회와 개인의 관계도 이와 동일하게 「악순환정체선순환안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연과 사회와 개인의 삶의 리듬이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악순환 고리에 휘말려 있어서 이 과정은 선형적으로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고 중첩되고 소용돌이 치듯이 전개된다. ● 이런 소용돌이가 사회 전반과 세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시기가 바로 역사적 이행기이다. 이 상황에서는 악순환 속에서 선순환의 맹아가 부상하는 동시에 선순환이 정체로 퇴행하고 수많은 균열과 공백이 나타난다(알튀세르가 말했던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 동시에 중첩되는 역동적인 과정)ⅷ.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선형적인 인과관계, 환원주의적인 단순화와 체계의 안정화 가 모두 불가능해진 시대, 1910~20년대 보다 더 복잡하고 전 지구적인 규모의 새로운 문명사적 이행기가 도래한 것이다. 자연적 사회적 재난과 거짓말이 악순환 고리를 이루며 소용돌이 치는 이 이행기를 어떻게 새로운 문명 창조의 과정으로 역전시킬 것인가? 이는 정치가, 과학자, 사회운동가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생존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에 처한 우리 모두의 과제다. ● 그런데 이런 시대에는 예술가들에게 특별한 과제가 제기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술가들은 환원주의와 결정론과 빠른 계산이 지배하는 일반적인 관습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꿈과 상상력과 무의식적 지각으로 세계와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하면서 창조적 실험을 일삼는 비일상적인 습관을 주무기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체계의 안정기에는 세 가지 불안이 느슨해지고 예술가들도 안정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기 때문에 예술에 내재적인 이런 장점들이 억압되거나 무시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위기가 심화되고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충돌하는 체계의 이행기에는 기존의 억압 자체가 무효화되기 때문에 잊혀졌던 이런 역량들이 부활한다. 말하자면 예술사에서도 「안정기의 예술」과 「이행기의 예술」이라는 이질적인 흐름이 큰 주기를 가지고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1910~20년대 이행기에 구성주의와 초현실주의와 다다와 같은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등장했던 이유, 중세가 해체되고 자본주의의 맹아가 부상하던 문명사적 이행기에 '르네상스 예술'이 등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광범위하고 다중적인 위기들이 응축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상황은 과거의 르네상스와 역사적 아방가르드 시기보다 더 창조적인 실험을 요구하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실험과 창조가 「체계의 안정기」에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작품이나 천재적인 미디어 같은 새로운 「사물」의 발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문제는 작품 자체가 아니다. 작품들은 이미 수많은 사물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도처에서 차고 넘치고 있다. 진정한 과제는 가타리가 『세 가지 생태학』에서 강조했듯이 미적-윤리적-정치적 차원에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새로운 「주체성」, 새로운 「실존양식」의 발명에 있다. ● "인종주의, 남근 중심주의, 근대적 도시계획이 가져온 파탄, 시장 체계에서 벗어난(해방된) 예술적 창조, 교육과 사회를 연결하는 사회적 조정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육 등의 문제들에 하나의 동일한 윤리-정치적 준거가 관통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설정은 결국 새로운 역사적 맥락에서 인간 실존의 생산이라는 문제 설정이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적 생태철학은 커플 사이에, 가족∙도시생활∙노동 등에서 존재 방식을 수정하고 재발명하는 데로… 정신적 생태철학은 신체∙환상∙지나간 시간(과거)∙생과 사의 '신비'에 대한 주체의 관계를 재발명하는 데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정신적 생태철학의 실행 방식은 과학성이란 시대에 뒤진 이상에 항상 집착하는 '정신분석' 전문가들의 방식보다도 예술가의 방식에 더 가까울 것이다."(15~16쪽) ●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실존양식의 생태철학적인 재발명이란 격자화되고 분리되었던 개인의 내부와 외부, 의식과 무의식, 수많은 제도들로 쪼개진 정치와 문화와 교육의 칸막이들을 가로질러 각 개인들의 암묵적인 인식과 감정과 의지를 연결하고, 물과 기름처럼 떠돌던 학문과 예술을 실존의 풍요로움을 위해 새롭게 연결해 순환하도록 하는 통합적인 회로를 발명하고 창조하는 실험적 과정이다. 양분을 담은 피와 산소가 사지와 온 몸의 다양한 곳곳으로 연결된 혈관을 타고 유연하게 순환하듯이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지닌 모든 역량을 「인간의 자연(human nature)」과 「비인간의 자연(non-human nature)」에 내재된 생명력의 고양을 향해 정조준 할 필요가 있다. 상품과 기계에 예속된 부품으로서의 단조롭고 수동적인 인간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역동적인 신진대사의 순환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사물들과 기호들을 재배치하고 재조합하는 새로운 능동적 인간성의 발명과 창조, 서로 연대할수록 점점 더 다르고 개성적이 되는 '화이부동'의 공동체를 발명하고 결합하는 일에 가장 깊고 넓게 관여하고 앞장서야 한다는, 가장 포괄적인 인지생태학적 과제가 오늘의 문명사적 이행기를 사는 예술가들에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 2018년 개인전 때 최진욱은 자신의 작업이 뭔가 "포괄적인 단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꿈」과 「분노」와 「현실」을 각기 다양한 형태로 그리고 연결해온 그림 그리기의 실천은 그 포괄적인 단계의 느낌을 구체화하려는 의식적-무의식적인 실험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안과 바깥, 자연과 사회와 개인의 삶의 선순환 회로를 하나의 그림 속에서 실현하고 있지는 않지만(실제로 이런 그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서로 무관해 보이는 여러 개의 삼부작들을 관객의 입장에서 연결해 보면 자연 생태계와 사회 생태계와 정신 생태계의 '내파'와 '퇴행'의 얼룩진 과정을 역동적으로 기록하면서 어둠 속에서 새로운 순환회로의 맹아를 발견하고 창조하려는 무의식적인 분투의 흐름을 식별할 수는 있다. ● 전시회가 갖는 장점 중의 하나는 좁은 화실에서 개별 화면들에 집중해야 하기에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집중 촬영의 분산된 경험들을 넓은 공간에서 일련의 순서로 배열한 편집의 흐름 속에서 전체적으로 연결해 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작가 역시 관객의 입장에 서게 되는 셈이다.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이 감각을 배반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준비한 이번 전시는 촬영과 편집, 작가로서의 경험과 관객으로서의 경험 사이의 간극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여, 다중스케일 네트워킹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거라는 점에서 작가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도약이 문명사적 이행기의 새로운 실존양식을 발명하는 예술의 새로운 실천으로 확장되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이 새로운 실천은 마찰이 없는 인공적인 도로를 매끄럽게 달려가는 것과는 아주 다른, 양차 대전이라는 격동의 이행기를 거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했던 것과 같은, 구부러지고 단절된 거친 땅들을 스스로 연결해 길을 내면서 걸어가는 일과도 유사할 것이다. ● "우리는 마찰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는 그 조건이 이상적인,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또한 걸어갈 수도 없는 비판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걸어가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대지로 돌아가자!" ■ 심광현
ⅰ 펠릭스 가타리, 『세 가지 생태학』(원저 1989) 윤수종 옮김, 동문선, 2003, 7쪽.ⅱ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이 발표한 세계 각국의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실제 이행 현황을 비교·분석한 '배출량 격차 보고서(EGR) 2019'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 중 78%를 차지하는 주요 20개국(G20) 중 미국 브라질 캐나다 한국 호주 일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7개국은 기후변화 대응에 더욱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콕 집어 경고했다. 한국은 인구 1인당 탄소 배출량이 12.4t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캐나다에 이어 세계 4위이고 온실가스 배출 총량에서도 중국 미국 유럽연합(EU) 인도 등에 이어 세계 7위 수준이다. 한국은2017년 11월 유럽 「기후행동네트워크(CAN)」가 발표한 '기후변화 대응지수 2018'에서 60개국 중 58위로 최하위에 그치기도 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지금은 미세먼지보다 온실가스 문제에 더 신경 써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매년 1.5%씩 증가해 지난해 한 해 동안만 550억t이 배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해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407.8PPM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유엔은 "파리기후변화협약은 산업화 이전 대비 2100년 온도 상승 폭을 1.5도까지 낮추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이번 세기 말 지구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3.2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강조했다(송경은 기자, 「유엔의 경고…"탈원전 한국 온실가스 줄여라"」, 『매일경제』, 2019.11.27)ⅲ '2020 행정안전통계연보'에 의하면 2019년 대형화재 등 사회재난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전년보다 420%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태풍 등 자연재해 피해액은 53% 늘었다. 2019년 산불, 다중밀집시설 대형화재, 해양선박 사고, 가축 질병 등 사회재난 발생 건수는 27건으로 전년보다 7건 늘었다. 사회 재난 유형별로는 다중밀집시설 화재가 1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산불(6건), 해양선박 사고(3건) 등 순이다. ⅳ 지그문트 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홍혜경/임홍빈 옮김, 열린책들, 2018 신판 12쇄, 106~107쪽.ⅴ 심광현, 「문명사적 이행기와 인간의 미래: 인간학과 정치학의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연결을 위한 밑그림」, 『문화과학 100호』, 문화과학사, 2019, 17~18쪽 ⅵ 로돌포 이나스, 『꿈꾸는 기계의 진화: 뇌과학으로 보는 철학 명제』, 김미선 옮김, 북센스., 2007, 186쪽.ⅶ 심광현, 「제3세대 인지과학과 신체화된 마음의 정치학」, 『맑스와 마음의 정치학』, 문화과학사, 2014, 473~477쪽.ⅷ 심광현, 「두 가지 '알튀세르 효과'의 마주침: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우발성과 마주침의 유물론의 생산적 이중주를 위하여」, 『문화연구 7권 2호』, 한국문화연구학회, 2019
Vol.20200904b | 최진욱展 / CHOIGENEUK / 崔震旭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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