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발표 작을 담은 ‘공(空)은 열려 있다’ 사진집은 신청한 분에 따른 한정본으로 발행된다.
전시가 끝나는 12월 14일까지 신청 받는다고 한다.
아래는 선생께서 남긴 글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空)은 열려 있다.“
내 사진은 사물의 존재로 향하고 있다. 특히 물, 돌, 풀 등 자연 자체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요 애정이라 해도 좋다. 내가 왜 자연으로 눈을 돌린 것일까. 내 눈을 끄는 것은 대개의 경우 인간을 떠난 자연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자연의 사진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재현이 아니라, 그 안 깊이 잠겨 있을 시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그 아득함을 생각한다. 그것을 찍고 있다가 아니라, 찍고자 한다, 찍고 싶다.
하지만 시원의 광야를 나는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그리로 가고는 싶은데 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 시원의 하늘과 땅을 드러낼 방법을 아직은 모른다. 자연의 그 장엄함이 원시의 힘찬 숨결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풍경을 향해 서 있을 뿐 그리 들어가는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 개 사물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원을 찾아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모색해 오던 사진의 경지, ‘적정, 적멸(寂靜, 寂滅)’ 곧 ‘공(空)’의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사물의 근원적 존재 양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움직임이 사라진 고요, 움직임도 움직임이 아님도 아닌 고요, 다시 말해서 생성 소멸을 벗어나 형태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은 열려 있다.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내 <고요>의 또 하나의 시도이기도 하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그 고요가 곧 ‘공’이다. 존재의 근원이다. 적정, 적멸이 그것이고, 그리고 이 <고요>는 그 ‘공’을 향한 나의 발자국이다. 하늘이 열리던 날의 바람 소리가 듣고 싶다. 땅이 처음 솟던 날의 울림을 느끼고 싶다. 그 땅으로 처음 싹을 피워 올린 풀잎의 작은 촉감을 손가락 끝에 누리고 싶다.
"사진은 아름답지만 보는 이의 감정을 속이고 때로는 진짜로, 때로는 가짜로 혼동을 주며 허망하고도 아름다운 상상을 하게 만든다. 순수하거나 아니거나, 그 속에 들어있는 자신을 느끼고 세상을 향한 모습을 상상한다." (작가의 일기 중에서)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7_50×37.5cm_2023
KP 갤러리에서 4월 14일부터 5월 6일까지 조성현 작가의 개인전 『Naked as a Jaybird / 부유하는 파편들』 전시가 개최된다. 낯선 공간을 내면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조성현작가의 과거 작업과 달리 이번에 새롭게 소개되는 사진들은 작가의 내면에 침착되어 있던 고유한 감정들을 주변의 사물들을 통해 드러내는 작업이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07_120×80cm_2023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과 생각의 덩어리들, 조성현은 규정할 수 없지만 자신 속에 존재하는 '날 것'과도 같은 그의 마음을 '순수'라 정의하고 '사랑', '미움', '분노', '연민', '자유'와 같이 그와 연결된 각각의 감정과 울림을 사진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작품 속 하얗게 빛나는 몸과 인간의 신체를 연상하는 형상들, 완성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일련의 덩어리들과 흩뿌려진 가루들을 통해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05_90×75cm_2023
솔직하게 써내려간 작가의 일기장처럼 그의 작업에서 깊숙하게 숨겨져 있던 감정들이 표면으로 떠올라 부유한다. 하나로 뭉쳐질 수 없는, 그러나 떼어놓을 수도 없는 '날 것'의 감정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며 찾아낸 그만의 시각들. KP 갤러리는 『Naked as a Jaybird / 부유하는 파편들』 전시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순수함과 스스로를 확인하고 지키고자 했던 노력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KP 갤러리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08_50×37.5cm_2023
전작 'I Saw You'로 낯선 공간을 응시하던 조성현의 신작 '부유하는 파편들'은 객체를 바라보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무엇을 말해야할지 모르면서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많은 생각들, 그 생각의 덩어리들과 시선을 그는 자신의 언어로 옮겨온다. 하얗게 빛나는 몸, 주무르는 대로 뭉쳐지는 하얀 클레이,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액체 덩어리. 완성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일련의 덩어리들. 그리고 떨어지는 가루들. 조성현이 말하는 순수는 '날 것'에 가깝다. 마치 언어를 갖추기 전의 아이들의 옹알이처럼. 아직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고백은 순수 이전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순수라는 언어가 생기기 이전의, 발화 언어 이전의 무엇. 그러나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3_90×75cm_2023
후설은 "그 자신의 의미에 대한 순수한 표현을 가져오는 것이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없는 경험(expérience muette)"이라고 말한다. 후설의 주장을 이어받아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철학의 근본 목표가 말없는 경험의 고유한 의미를 표현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조성현의 사진들은 언어적 사유를 넘어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시각적 사유로 빚어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고백은 순수 이전의 날것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메를로-퐁티의 논의를 빌면, 우리들의 '세계-내-존재(etre-au-monde)' 위에 토대하고 있는 지각은 그 자체로는 인식을 주지 못한다. 지각(知覺),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내-존재'로부터의 물러섬이 필요하다.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한 단계 물러서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1_90×75cm_2023
조성현의 작업들은 물러섬의 행위를 보여준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본인이 느끼는 것을 그대로 시각화한다. 작가의 말대로 '순수'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의 감정들 – 사랑, 미움, 분노, 연민, 자유를 물질적 요소들을 통해 사진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매순간의 감정의 경험은 개별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전환된 이미지들은 작가의 시간으로 구현된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균형을 잃어버리다가 다시 감정에 휩쓸리는, 날 것의 작가 그 자신의 모습으로. 솔직하게 써내려간 작가의 일기장에서 잃어버린 날 것의 감정이 떠오른다. 깊숙하게 숨겨져 있던 감정들이 표면으로 떠올라 부유한다. 하나로 뭉쳐질 수 없는, 그러나 떼어놓을 수도 없는 날 것의 감정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며 찾아낸 그만의 시각이다.
조성현_부유하는 파편들 #13_90×75cm_2023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드러내는 작가의 노력은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사각의 프레임에 놓인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철저하게 작아진 '나'라는 존재일수도, 혹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나'라는 존재일 수도. 작가의 말대로, 순수하거나 아니거나, 우리는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놓인 존재들이다. '부유하는 파편들'은 조성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관객들이 순수 이전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레나
사진가 이재갑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역사의 현장을 기록해 온 정통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강제징용 ‘잔혹사’를 기록한 ‘일본 속 한국풍경’, 경산 코발트 광산사건의 진실을 기록한 ‘잃어버린 기억’, 베트남전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현장을 찾아다닌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등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골 깊은 역사를 파헤쳐 왔다.
이번에 선보인 '어느 특별한 동행'전은 이 땅에서 태어났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배타적 차별을 감내하며 살아 온 혼혈인들과 함께한 전시다. 그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우리 이웃의 또 다른 초상이다.
주명덕 선생께서 기록한 혼혈아, ‘섞여진 이름’이 발표된 지가 1965년이었니, 어느듯 반세기가 지났다. 그 이후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도 되돌아보지 않았던 삶을 이재갑씨가 조명한 것이다.
지난 10일 오후5시 무렵, 모처럼 전시장을 찾아 나섰다.
여태 전시 보는 것 자체를 피해 온 것은 전시리뷰나 이런 저런 글을 쓰기 싫어서다. 글로 인해 많은 사람이 등을 돌렸는데, '씹 대주고 뺨 맞는' 격이었다. 개인적인 감상문에 불과한 글을 느낀 대로 쓸 수 없다면 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분이 쓴 전시리뷰나 서문으로 소개를 대신 하기는 했으나, 평론가의 고충을 알만했다.
작품만 보고 전시리뷰는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싫은 소리는 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속에 넣어두고 배겨나지 못하는 성질머리를 어쩌겠는가?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더 속 편했다. 그런 일로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미운 오리 새끼’신세가 되었는데, 심지어 가까웠던 친구나 가족까지 등 돌렸다. 잘 못 쓴 글이 아니라면 절대 내리거나 수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재갑씨의 ‘동행’전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전시였다. 전시가 열리는 ‘KP갤러리’가 동자동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기도 하지만, 기대했던 전시라 통풍이 도져 아픈 다리를 끌고 찾아간 것이다. 예술지상주의의 허접한 사진들이 판치는 세상에, 이재갑씨 만한 사진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사진도 기록한다고 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아니다. 아무런 작가의식 없이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넝마주이 사진이라 한다. 작년에는 원로 사진가 두 분이 찍은 60년대 중반 무렵의 사회기록사진들이 서랍 속에 잠들다 반세기만에 빛을 본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 다 학창시절에 찍은 사진이었고, 그 이후부터 상업사진이나 문화재사진으로 전향한 형태도 비슷했다.
그 당시는 임응식선생이 주창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아 거리의 스냅사진이 성행할 무렵이었는데, 세월의 무게에 실려 작가의식과 상관없이 소중한 역사적 사료가 된 것이다. 요즘의 아마추어 사진인들처럼 아름다운 풍경만 쫓아다니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작가라면 뚜렷한 주관을 갖고 찍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주명덕선생의 ‘혼혈아’나 최민식선생의 ‘인간’, 그리고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처럼 사람 속으로 파고 든 작업과는 차원이 다른 기록이다.
또 한 가지 사진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한 분은 표준렌즈로 찍었고, 한 분은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 많다는 점이다. 망원렌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나, 동작을 포착하는 스포츠사진에나 활용되는 렌즈라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적절치 않은 렌즈다. 망원렌즈로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사람 속으로 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몰래 찍는 도둑 사진이나 다름없다. 요즘은 초상권 침해에 걸려 마음대로 발표할 수가 없어 그런지, 거리스냅 하는 사진인도 사라져버렸다.
가끔 사진가들의 프로필 사진에 대포 같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자랑스럽게 목에 건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난 사진가가 아니라 사냥꾼’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기야! 요즘 렌즈들은 광각에서 망원까지 사용할 수 있는 줌렌즈가 장착되어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니,카메라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재갑의 "어느 특별한 동행"이 열리는 전시장을 찾아 갔더니, 전시 작가 이재갑씨와 전시기획자 이일우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전시된 작품은 작가가 혼혈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 전시장에 내걸린 초상사진과 단체기념사진들은 얼핏 보면 평범한 사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작가와 당사자와의 끈끈한 교감이 느껴졌다.
‘동행’이란 전시제목처럼, 그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 지난 시간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눈 흔적이 역역했다. 전시장에 찍힌 당사자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재갑씨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사진에 앞서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람을 찍는 다는 것은 그 사람과 얼마나 소통하며,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으니, 그냥 찍은 사진과는 격이 달랐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인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 특별하지만 특별하지 않게, 함께 걷기 -
‘한 배를 타다(be in the same boat)’라는 표현은 한국어와 영어에서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같은 운명이나 처지에 놓이다. 모든 이의 운명이 완전히 똑같이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처지가 비슷할 때,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고 의지하며 위안을 얻는다. 사진가 이재갑은 혼혈인들의 일상 속에 시선을 멈추어,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의 평범한 시간을 포착한다.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생일을 축하하며, 함께 야유회를 떠난다. 사진 속에 담긴 일상은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주 약간의, 외모적인 차이가 언뜻 엿보일 뿐이다. ‘아주 약간의 차이’,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다.
미군정기(美軍政期)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외국인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혼혈인이 생기고 그 수가 늘어났지만, 한국사회는 이들의 존재를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방식을 택해왔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국가주도로 단일민족(Monoethnicity)이라는 신화를 기조로 삼아 민족의 우수성을 공교육에서 강조하고,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통합하는 동안, 외모가 다르거나 혈통이 다른 이들은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한국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돌아야 했다.
한국사회가 이들을 ‘타자(the other)’로 규정하는 동안, 혼혈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과 교류하고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혼혈인들은 다른 혼혈인 가족과 기꺼이 시간을 나누고 가족끼리 교류하며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카메라는 이들의 일상과 행사에 드러난 얼굴을 기록한다. 타자로 규정된 얼굴들이 따로 또 같이 기념사진을 위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동질감을 강조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거리를 두는 것은 가장 편리한 방법일지 모른다. 나와 같은 존재만 수용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일에는 많은 생각의 품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는 같고, 어느 정도는 다르다. 제각기 다른 뿌리와 직업, 사고방식, 환경을 가지고 있는 혼혈인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동질감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느슨한 연대를 만듦과 동시에 이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한국사회에 기꺼이 ‘동일자(the same)’로 자신들의 자리를 만든다.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와 선을 스스로의 존재로 지우고, 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타자를 집에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가 우리 삶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말한다. 내 테두리 밖의 ‘타자’는 익숙하지 않기에 낯선 자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지워질 수 없고 내 옆에 있으며, 함께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이웃’이기 때문이다. 환대. 이웃을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 이런 측면에서 이미 혼혈인들은 각자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거대하고 불친절한 이웃을 환대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세계로 또 다른 타자를 초대한다. 낯선 카메라에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자신들의 일상을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벌거벗은 얼굴들’은 바로 우리 이웃의 초상이다.
이재갑의 사진전 “어느 특별한 동행”은 한국이라는 배타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혼혈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사진에 담긴 이들의 시선은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함께 걸어갈 것(동행)’을 제안한다. ‘아주 약간의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탄 배에 동행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은 같고, 조금씩은 모두 다르다.
글 / 레 나(LENA)
KP 갤러리가 2023년 새해 첫 전시로 선정한 “어느 특별한 동행(同行)” 이재갑 사진전은 3월 4일까지 열린다.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에서 2022년 3월 10일부터 3월 30일까지 'I Saw You' 조성현사진전을 개최한다. 조성현은 패션사진가이자 자신만의 색깔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으로 주목받는 밀레니얼 사진작가이다. 그가 낯선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한다.
조성현_I Saw You, Iceland#01_180×150cm_2018
조성현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거침이 없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모든 것에 솔직하다. 사실 이런 그의 성향은 자신의 이야기를 오픈하는 것에 소극적인 기성세대에게는 부러움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낯선 세계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다. 즉흥적이고 현실도피로 보일 수도 있는 일탈, 하지만 조성현은 스스로 혼자이기를 원했고 본인이 선택한 고립을 통해 자신의 깊은 곳을 바라보고 그에게 필요한 삶의 호흡을 다시 찾으려 하였다. 때문에 'I Saw You' 전시는 낯선 여행길에서 찾으려 했던 것에 대한 조성현의 독백이자 사진들은 독백을 통해 발견된 결과물이다. 그는 마치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확인하듯 여행을 통해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감각과 인식의 눈을 다시 오픈 하고 세계를 마주하며 경험한 것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였다.
조성현_I Saw You, Iceland#17_180×150cm_2018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나' 와 '존재하기 위한 나' 사이에 있는 간극을 좁히는 일이다. 여행이 지친 마음과 몸을 추스르고 현실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듯이 KP 갤러리는 'I Saw You' 전시를 통해 어쩌면 우리 모두가 희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KP 갤러리
조성현_I Saw You, London#01_120×100cm_2018
2018년, 사랑하는 사람과 내게 소중한 것들을 뒤로한 채 런던으로 훌쩍 떠났다. 나는 '홀로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야만 온전히 나와 내 눈앞에 마주하는 순간들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의 나의 삶은 가슴 한켠에 존재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채우기에 부족하였다. '홀로 걷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것이 ' I Saw You' 작업의 시작이었다.
여행은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고 현실의 삶에서 무뎌진 나의 감각을 깨우는 촉매제의 역할을 해 주었다. 나의 눈이 열리고 한숨 한숨의 호홉을 느끼고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느끼게 한다. 나는 주변 공기의 온도를 느끼며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세상에서 마주한 작은 순간 순간들이 가슴 한켠에서 요동을 친다. 때로는 외로움으로 , 때로는 그리움으로 , 때로는 사랑으로. ● 사진 안의 피사체가, 공기가, 작은 빛 한 줌이 각각의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조성현
KP Gallery에서 2022년 1월 19일부터 3월 3일까지 '고요_존재는 고요하다' 한정식 사진전을 개최한다. 한국 사진예술을 대표하는 한정식은 '고요'의 미학을 완성한 사진가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적 사진예술'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201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작가로 선정되어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들을 소개하는 『한정식_고요』 전시를 2017년 개최하였다.
한정식_고요 H034 양양 2011_114&times;114cm
한정식은 과거 대상의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존재 본질에 대한 질문과 철학적 탐구를 "고요" 작품들을 통해 소개하였다. 이번에 새롭게 소개되는 작품들은 사진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내면의식을 추상의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사진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한정식은 그의 관념 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본질을 사진적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소개하며 "사진의 예술성을 향해 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추상의 세계이다. 이는 사진이 가지고 있는 주제(theme)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진이 사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존재성을 사진 위에서 지워 사진 그 자체를 제시하여야 한다." 라고 그가 지닌 '고요'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 KP 갤러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의 정신미학과 고유한 문화정체성 위에서 한국사진예술의 근간이자 토대로서 의미있는 역할들을 제시하는 한정식 작가의 '고요' 작품들을 소개하고 사진예술을 통해 사진 본연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KP 갤러리
한정식_고요 H034 양양 2011_114&times;114cm
공상(空像, 空相),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한정식 작가는 사진 자체가 진리(본질)가 아니라, 사진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고, 진리에 이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사진 교육자이자 작가로서 사진을 대할 때 엄중하고 엄격한 절차를 중시하고 사진이 담아야 할 의미를 충분히 끌어올려 형식과 내용이 다툼이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견지했다. 「고요」가 전시되고 사진집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때마다, 세계-대상-피사체의 동일성을 지향한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의미로 꽉 찬 사진 재현은 좀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형식처럼 생각됐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감각과 지성이 교차하고 선명하게 흔들린 멈춤, 혹은 구체적인 상 속의 떨림 같은 비의(秘意)적인 자유가 흐른다. 무엇일까. 이 내밀한 이미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것'이 '있는' 사진. 한정식 작가의 미발표작에는 그러한 것들이 (고요 속에서) 소란스럽게 생성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바로 공(空)이었다.
한정식_고요 H034 양양 2011_114&times;114cm
한정식 작가의 사진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이것은 공(空)이다! 이 텅 빈 이미지는, 놀랍게도 작가가 그동안 발표했던 '고요' 시리즈를 촬영한 필름 곳곳에, 사이에, 끝에 아무렇지 않게 그냥 있었고, 어떤 연유에선지 세상에 전시될 선택권을 놓친(받지 못한) 사진이다. 이 사진 옆과 위와 아래…에 있던 사진들은 밖으로 나와 자신이 작품임을 입증하고 있었다면 이 사진들은 오랜 시간 빛을 머금고만 있었다. 자신의 몸에 닿은 그때 그곳의 빛을 기억하며, 사진의 시공 속에 고요히 머물렀다. 한정식 작가의 기발표작이 사진의 본질에 닿으려는 욕망에 충실했다면, 선택받지 못한 이 사진들은 '고요'의 의미도 모르고 다만 정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찍은 채 숨 쉬고 있었다는 것. 이번 전시는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공상(空像, 空相)이 드러나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명명한 '세계-내-이미지'와 '공상(空像, 空相)'은 한정식 작가의 작업 세계의 근간을 이룬 불교의 연기설에서 영향을 받은 말이다. 세계 내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에 의해 의미 지어지거나 의미가 지워지고, 존재는 세계 속의 인연(因緣)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설의 요지이다.
한정식_고요 F014 홍천 2008_114&times;114cm
다양한 존재가 다기하고 다채롭게 움직이다 인연이 되어 만나고 흩어지는 것.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중요해진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즉, 학습 받은 데로 보는 것이 아닌, 대상이 드러낸 본무자성(本無自性)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처는 공(空)으로, 노자는 도(道)라고 일컬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드러나는 상이 '공상(空像)'이고, 모든 상(像, image)은 상호 연결 속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이 '공상(空相, co-existence)이다. 모두 세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현현(顯顯)하는 것이다.
한정식_고요 H052 하선암 2011_114&times;114cm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지만, 무엇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이 사진들은 카메라의 광학적 작용과 그곳에 있었던 대상, 공간의 상호침투로 만들어낸 이미지다. 미술사적으로 접근하면 추상(抽象)이라 하겠지만, 단순히 상이 있고 없고(有無)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노자가 이 이미지를 본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 이미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구상과 추상을,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구상(具象)은 상(象)을 갖추는(具) 것이고 추상(抽象)은 여러 부분 중에 하나를 뽑아낸(抽) 낸 상(象)이다. 구상은 추상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 추상이 구상이 될 수도 있는, 둘은 사실 한 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구체적인 상이 보이지 않거나, 구상의 반대 항에 추상을 놓지만, 이항 대립적으로 둘을 해석하려고 할 때 언어 프레임에 갇히는 형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별개일 수 있으나 존재론적으로 둘은 서로 의지, 보충, 보완하며 존재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말과 침묵, 양달과 응달, 빛과 그림자, 흑과 백으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이미지. 한정식 작가의 텅 빈 이미지는 '모든 것의 이미지'로 관객과 함께 공상(空相)하고 공생(共生)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사진이다. ■최연하
한정식_G066 화엄사 2010_114&times;114cm
영혼에 닿도록 '고요'한● '고요'한 한낮이었다. 어느 '고요'에서는 나뭇잎 하나 물에 떴다. 물 속 그림자 한 점 물고기 되어, 물 바깥 햇살 우러르며 헤엄친다. 또 다른 '고요'에서는 물이 가득 찬 하늘로 돌이 떠오른다. 그 돌은 부석사로 날아가려는 걸까? 물보다 공기보다 가벼운 돌을 본다. 물이 돌알을 낳고 있다. 난생설화는 공기 속에도 있다. 물이 사랑으로 돌을 들어 올렸고, 또 돌은 물의 영혼으로 제 마음을 비워 차츰차츰 가벼워진다. 그런 초현실을 현실로 사고 있는 사물들의 세상이 한없이 고요하다. 사물들의 영혼이 그 고요를 징검다리 삼아 이웃으로 나들이 다닌다. ● 앙리 부르통은 초현실주의를 '외과 수술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이라 했다. 한정식의 '고요' 작품을 처음 본 날, 부르통은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초현실주의 정의를 다시 썼다. 많은 '고요'들은 순수사진이어서 형태를 알아볼 수 있지만 묘하게도 초현실로 가는 추상이다. 그는 대상의 아름다움에 관심두지 않았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존재들은 그의 사진 눈빛을 받지 않게 된다. 물과 공기처럼, 자연과 일상에서 늘 함께 살아가면서도 의식하지 않았던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불러내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그는 모든 사물에 고정된 이미지를 벗겨 내려했다. 이름을 바꿔 불러주려 했다. '고요'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무기물이라 하더라도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어떤 감정 상태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뭣보다 자신이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인간이 아닌) 사물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또 작가 자신의 마음밭이 그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조건 또는 어떤 상태가 '고요'였다. 그 고요는 오직 고요만으로 소통되고 교감되었다. 자신의 내면이 대상의 내면만큼 고요해질 때, 그는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 라고 속삭이는 그때, 바로 그때, '고요'가 태어났다. ■박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