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걸 시인의 추모제가 49제를 이틀 앞둔

지난 29일 오후 4시 무렵, 양평 물안개공원에서 열렸다.

 

추모제에는 미망인 서상실여사를 비롯한 가족들과,

평소 선생을 존경해 온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린 것이다.

 

황명걸시인 추모제는 한 때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창예헌' 이사장 김명성씨가 발 벗고 나서서 추진한 행사다.

장례식 때 추모제를 지내지 못한 아쉬움에 자리를 만들었지만, 49제는 아니었다.

날자도 맞지 않은데다, 유족들이 착실한 기독교 신자기 때문이다.

 

사람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농심마니가을 산행과 함께 추모제를 지낸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과 농심마니’ 회원,  양평문인, 가족 등 60여명이 참여했다.

 

추모제에 참석한 분으로는 최유진 농심마니 회장을 비롯하여 김명성, 송상욱, 

김상현, 조준영, 수견 김정남, 이명희, 전활철, 조해인, 기국서, 김수길, 정복수, 

정영신, 이 성, 최진환, 노광래, 이강용, 송일봉, 박상희, 황예숙, 서길헌, 최정인,

오만철,나자명, 오치우, 박흥식,  권경업, 신영수, 윤성은, 조명환, 김각환, 

문창길, 이동국. 김성철, 강미숙,  이철순, 황요한씨가 함께했다.

 

모처럼 반가운 분들 만나 가을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었는데,

황명걸선생 시비 앞에 놓인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가슴 아린 회한이 밀려왔다.

오래전 선생께서 시화전을 하고 싶어 하셨으나, 그 걸 말렸기 때문이다.

시화전이라면 오붓한 장소가 어울리지, 백 평이 넘는 '아라아트'는 무리라는 생각에서다.

그 이후로 전시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나, 서운해 하실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다.

추모제를 맞아 그때의 배은망덕을 사죄한 것이다.

 

추모제에 앞서 행사를 주선한 김명성 시인의 간단한 인사에 이어

수견 선생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영령을 위안했다.

 

시인은 시를 낭송했고젊은 춤꾼은 위령무로 넋을 기렸다.

 

 '뮤아트' 김상현씨까지 나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김상현씨는 병원에서 위중한 수술을 받아 입원한 환자가 아니던가?

병든 자신의 몸보다 떠난 분의 그리움이 절절했던 모양이다.

 

김상현씨가 연주하는 애잔한 ‘부베의 연인음율에 맞춰

선생께서 너울너울 춤이라도 추는 것 같은 환영이 떠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시비 세운 장소가 중앙에서 옆자리로 옮겼을 뿐, 꽁지머리상은 여전했다.

시비에는 황명걸선생의 지조가 새겨져 있다.

 

한 포기 작은 풀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비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잎이 넓은

군자풍의 파초임에랴

빗방울을 데리고 논다

 

한 마리 집오리일지라도

그것이 살아 있으면

물에 젖지 않나니

더구나 몸가짐이 우아한

왕비 같은 백조임에랴

물살을 가르며 노닌다

 

배준석시인은 선생의 지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더라.

지조를 풀과 집오리로 비유하며 파초와 백조로 연결시킨다.

그중 두 번이나 반복되는 중요한 구절이 그것이 살아 있으면이다.

이를 목숨을 걸 수 있으면으로 바꿔 읽어본다.

멀리 있던 지조가 꿋꿋하게 곁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빗방울도, 물살도 데리고 놀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저항의 격문 같은 한국의 아이가 먼저다.

황명걸선생은 70년대 대표적 리얼리즘 시인으로,

'한국의 아이'에서 민족분단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결기 어린 시어로 토해낸 분이다.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

보다 더 뼛골이 부서지게 일을 해서/머지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잘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너무 외롭다고 해서/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빛나는 눈빛의 아이야/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한국의 아이' 부분)

 

'한국의 아이' 시집은 판금 되었고, 선생께서는 자유언론 운동으로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뜨거운 저항 의식에 고개 숙입니다.

 

추모제가 끝난 후, 35년 동안 심어 온 농심마니가을산행으로 이어졌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리는 산삼심기는 양평 '천주교 양근성지'라고 한.

 

양평군 강하면 이미란 발효학교에서 하루 묵으며 야외 술판과 굿판을 벌이고,

다음날 아침 산신제를 지내고 산삼을 심지만,

난, 오후 여섯 시까지 동자동에 갈 일이 있어 함께 할 수 없었다.

모처럼 음유시인 송상욱선생께서 무거운 앰프까지 짊어지고 오셨는데 말이다.

그 푸짐한 술상의 놀이판을 마다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는데...‘

 

사진 :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인사동을 사랑한 황명걸 시인께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암으로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어 예견은 했지만,

날아 온 선생의 부음은 더 이상 방구석을 뒤척일 수 없게 만들었다.

 

황명걸선생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인사동에 일만 생기면 노구를 끌고 달려오시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사동에서 선생을 지켜본 20여 년의 세월을 잊을 수가 없다.

 

선생은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셨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중퇴한 뒤 1962'자유문학''이 봄의 미아'로 등단했다.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동인으로 참여하며 '요일연습', '한국의 아이', '삼한사온인생', '서울 19755' 등을 발표했다.

 

주부생활등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다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해직되었다.

그 후 LG그룹 사보 편집장으로 일하다 북한 강변의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대표 리얼리즘 시인으로 꼽히는 황명걸 시인의 첫 시집은 판매금지 수난을 겪은 '한국의 아이'(1976).

그 외에도 '내 마음의 솔밭'(1996), '흰 저고리 검정 치마'(2004)가 있고, 2016년에는 그동안 발표한 시와 신작을 묶어 정리한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가 있다.

신경림시인은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만큼 아름답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사모님 서상실씨를 비롯하여 아들 황요한씨와 딸 황서정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되었고, 발인은 15일 오전 630분이다.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 묘역이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순천향병원'은 동자동에서 먼 거리가 아닌지라 정동지는 장례식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워가며 기다렸는데, 늦게 사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먼저 들어가 기다릴 수도 있지만, 빈손으로 고인을 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아는 분이라고는 미망인이신 사모님과 조준영시인 내외뿐이었다.

앞서 구중서선생과 장경호, 노광래씨가 다녀갔다지만, 생각보다 아는 분이 적었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발디딜 틈없이 조화가 들어찼다.

이제 허례허식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장례문화다.

 

좀 있으니 건축가 임태종씨가 조문을 왔다.

아는 분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주고 받는 거야 좋지만, 술이 들어가니 지난 이야기로 말이 많아졌다.

더 이상 사람을 미워하는 악업을 쌓지 않으려면 이승의 삶을 끝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다. 돌아가신 선생님이 부럽다.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 사진 / 조문호

 

 

 

인사동의 원로 시인 황명걸(87)선생께서 지난 9 13일 새벽무렵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달 전에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병 병문도 못한 채 운명하시어 더 가슴 아픕니다.

 

황명걸선생을 인사동 대표 시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창예헌)’고문이기에 앞서,

인사동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기 때문입니다. 인사동에 일만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달려오시던 선생의 따뜻한 마음도 이제 그리움으로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명걸시인의 강력한 현실비판시는 60~70년대 한국시단을 풍미한바 있습니다.

서울대불문과를 중퇴한 후 여상’, ‘주부생활’, 여성동아기자로 일했으며,

1962자유문학봄의 미아가 당선되며 등단하셨지요.

그동안 ‘한국의 아이’(1976)를 비롯하여 마음의 솔밭’(1996),‘ 저고리 검정 치마’(2004),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2017)등의 시집을 펴낸바 있습니다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되어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가 나오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지요.

생계를 위해 일했던 LG에서 퇴직한 뒤는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은백양 또는 자작나무처럼 가을 들판에서 허연 흉터를 스스로 드러내며

저녁노을을 향해 서 있는 그의 시들은 서러울 만큼 아름답다.

칠순이 되어서야 시의 참맛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신경림 시인이 황명걸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읽고 상찬한 말입니다.

아래는 판금 조치라는 수난을 겪기도 한, 선생의 대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한국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빛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 백성이라서
허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 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도시 소시민의 무기력한 생활을 반성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 시였지요.

인사동을 못 잊어, 시와 그림으로 여생을 달랜 선생의 지난 자취가 너무 가슴 아립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장례식장 :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6호

발인 : 2022년 9월 15일 오전6시30분

장지 : 마석 모란공원, 예술인묘역

 

상주 : 황요한 유성희, 황서정 김경덕

배우자 서상실

손자 : 황일우, 손녀 : 황지은, 황지혜

외손녀 : 김나영, 김경민

손서 : 변문균, 손부 : 서가이

 

그동안 찍은 선생님의 사진들을 모았습니다.

지난 날을 돌아보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모처럼, 인사동 터줏대감들이 총 출동하셨다.
‘엉겅퀴 꽃’의 민영시인과 ‘한국의 아이들‘을 쓴 황명걸시인,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 시인, 문학평론가에서 서화가로 발 넓힌 구중서선생,
조선의 3대 구라 중 한 분으로 꼽히는 방배추(방동규)선생 등
인사동을 주름잡던 터줏대감들이 여럿 나오신 것이다.






암으로 투병중인 신경림시인께서 나오지 못했지만,
원로 다섯 분을 한자리에서 만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양평이나 용인 등 멀리 계시기도 하지만, 이제 연세가 많아 예전 같지 않으시다. 
열 몇살이나 작은 나도 빌빌거리는데, 다들 지팡이에 의지하며 힘들게 사신다.
이젠 작정하여 모시지 않으면, 한자리 모시기 힘들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밖에 없다는데, 친구들 끼리 한데 뭉쳐 살수는 없을까?
별로 나눌 말씀이야 없겠지만,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추억이 줄줄 하니 행복하지 않겠는가?
이제, 인사동 터줏대감을 모시는 경로잔치라도 자주 열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창예헌“이란 모임에서 모셨으나, 그마저 풍비박살 나 자주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번 모임은 지난달, 영주의 신동여화백 왔을 때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다.
그 날 ‘유목민’ 술자리에서 우연히 구중서 선생을 만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김명성, 조준영시인이 한 번 모시자고 제안한 것이다.
29일로 정한 것은 조준영교수의 수업 없는 날로 택한 것이다.






그것도 양평 계시는 황명걸선생을 모셔오기 위해
조준영시인이 차로 모셔 와서는 끝난 후 다시 모셔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준영시인은 차 때문에 반가운 자리에서 술 한 잔 못 마시는 징역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저만한 제자 둔 황명걸 선생은 진짜 복 많은 분이시다. 요즘 그런 제자 없다.






29일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오찬회를 갖기로 했으나, 갑자기 ‘툇마루’로 자리가 바뀌어 버렸다.
전활철씨는 시장까지 보아두었는데, 친구 힘들까 바 김명성씨가 바꾼 것 같았다.
그래서 ‘유목민’에서 만나 '툇마루'로 옮겨 간 것이다.
된장비빔밥과 북어찜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전활철씨는 꼬불쳐 둔 중국술 한 병을 내놓았다.






그 날 마주앉은 방동규선생께서 여러 가지 충고 말씀도 주셨다.
“네가 쪽방에 들어가므로 결국 쪽방 하나가 더 늘어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노숙자 탓도 하셨다.
방선생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 박킹 끼우는 일을 받아 하신다고 했다.

한 개 끼우는데 3원씩이니 만개를 끼워야 삼 만원 벌지만, 손톱이 달도록 일하신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이지만, 노숙자들도 여러 계층이 있다.
질병이나 신체장애로 일 못하는 노숙자도 있지만, 대개가 알콜 중독자들이다.

그러니 늘 술에 취해 있는데, 스스로의 통제력을 잃은 상태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나도 서서히 노숙자에 동화되어 간가는 점이다.
그들을 알기 위해 어울리다보니, 이제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노숙자들과의 술자리를 가능한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뜻밖의 중국술에 이게 왠 떡이냐며 두 잔 받아 마셨는데,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오후3시부터 '프레스센터'에서 열리는 김경린시인 학술심포지움 사진 찍어야 하는데, 걱정스러웠다.

술 취해 찍는 취사야 몸에 베였지만, 점잖은 분들 계시는데, 쫄랑대면 남사스럽지 않겠는가?






다들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냉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일어서야 했다.
뒤늦게 페북에 올라 온 사진을 보니, 김상현씨와 전활철씨가 노래를 불러가며
흥겨운 판을 만들었는데, 나만 놀지 못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이 날 모신 다섯 선생님 외에도 많은 후배들이 나왔다.
처음 말 꺼낸 김명성, 조준영, 김상현. 전활철씨 외에도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정영신, 장경호, 고중록, 이상훈, 김영국씨가 어떻게 알았는지 줄줄이 찾아왔다.
우짜든, 김명성씨가 잘 풀려야 이런 자리라도 자주 만들어질텐데...


부디, 선생님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요.


사진, 글 / 조문호












































































요즘 연이어 술 마실 일이 생긴다.
어제도 마시고 내일도 마셔야 하는데, 오늘은 조준영시인과 마시기로 했다.
얼마 전 황명걸선생께서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라는 시선집[창비]을 내셨는데,
책을 전해받기 위해서다.




애주가로 소문난 분이지만, 요즘은 몸이 편찮아 인사동에 잘 나오지도 못하신다.
그 흔한 출판기념회 한 번 못하는 선생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언젠가는 축하의 자리를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6일 오후6시 무렵, 인사동 ‘유목민’에 갔더니 조준영시인과

공윤희, 정영신, 김기영, 허미자, 전활철씨 등 여러 명이 모여 있었다.
반가운 분들 만나 술 한 잔 해야 하는데, 이가 아파 걱정이었다.
요즘 치통으로 진통제를 먹지만, 술 때문인지 통증이 가시질 않는다.
이 날은 작심하고 술에 눈 돌리지 않으니, 시선집이라도 살펴 볼 수 있었다.






한 평생 쓰 오신 시편을 구중서, 신경림께서 4부로 나누어 정리하셨는데,
1부에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아이’도 실렸고,
한포기 작은 풀일지라도로 시작되는 ‘지조’도 실려 있었다.


2부에서는 두 번째 시집 ‘내 마음의 솔밭’의 시로 짜여졌고, 
3부에서는 세 번째 시집 ‘흰 저고리 검정치마’에 실린 작품이었다.
4부의 최근작들은 전반부의 냉철한 현실의식보다는
황혼녘에 다다른 시인으로서의 삶의 통찰이 담겨 있었다.






“꽃 피우고 새 우는 봄날이 오면 / 나 떠나리, 이 산하 어드메에 /
쇠잔한 몸 추슬러 외양 단정히 매만지고 / 명아주 단장에 의지해 /
희고 가는 머리카락 날리며”(‘새날’전문)





마지막에 하셨던 ‘이럴러고 시를 썼는지 자괴감이 든다’는 말씀은 남의 말이 아니었다.

누구나 작품을 정리할 때면 느끼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좀 더 치열하지 못한 아쉬움은 다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집 날개에 박힌 황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을 보니, 내 사진이 아닌 것 같았다.
‘창비’에서 사진원고료까지 10만원 받았는데,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 사진을 사용한 줄 알았는데, 사진이 눈에 설었다.
선생님께서 헷갈렸는지 내가 헷갈리는지 모르겠으나, 한 번 알아봐야겠다.
아니, 알아볼 것도 없이, 받은 원고료를 황선생님께 드려야겠다.


꽃피는 봄날 인사동에서 약주 한 잔 대접해 드리며...


사진, 글 / 조문호










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난 황명걸 시인. 숨이 차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걸음도 불편했다. 그래도 시와 그림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의 시엔 유난히 세상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많이 담겨있다. “4·19때 철학과 후배 어머니가 하는 중학동 다방에 있었어요. 2층에서 내려다보니 의대생이 피묻은 흰 가운을 입고 쓰러진 학생들을 들것으로 나르고 있더군요. 그게 눈에 선합니다. 옆에서 주먹만 쥐고 끼어들지는 않았어요.” 시선집이 나온 데는 절친 신경림 시인의 도움이 있었다. “신경림 시인이 ‘죽을 때도 됐는데, 시선집 하나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더군요.”


평양 출신 부친 해방뒤 치안대장
‘완장’ 싫어 미대 원했지만 ‘반대’
시쓰고 그림 그리다 서울대 ‘중퇴’

1962년 시로 등단…첫시집 ‘판금’
‘동아투위’ 거리시위 격문시 맡아
90년대 양평서 카페 운영하기도



시선집 낸 해직언론인 출신 황명걸 시인(82·사진)은 자신의 인생을 ‘자유혼’ 한 글자로 요약했다. 대학 졸업장에 얽매이지 않았고,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다. 언론자유를 외치다 직장을 잃었고, 남한강과 북한강변에서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최근 시선집 <저희를 사랑하기에 내가>(창비, 구중서 신경림 엮음)를 펴낸 시인을 10일 경기 양평군 강상면 자택에서 만났다.


“아버지에 대한 역심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언젠가 아버지와 나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자유혼과 불가분의 관계처럼 엮이는 듯했다. “아버진 쁘띠(소) 브루주아 근성이 농후하셨죠.” 의대나 법대를 고집하며 아들의 미대 진학을 끝내 반대했다. 시인은 타협책으로 서울대 불문학과에 들어갔다. “미술사학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도 제대로 안하고 유학도 좌절되면서 결국 졸업을 못했죠.”


시인의 고향은 평양 대동강변이다. “아버지가 완장을 좋아하셨어요. 일제 때 사업을 하셨어요. 자동차도 있었죠. 당시 집엔 일본도가 몇개 걸려 있었어요. (해방 때) 아버지 무릎에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는데, 아버지는 유카타(일본식 가벼운 겉옷) 차림에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계셨어요. 해방 뒤에는 권총을 차고 치안대장을 하셨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겹쳤다. “외삼촌은 소련군 장교였고, (한국전쟁 때 납북당한) 친삼촌 둘은 서북청년단 간부였어요.”

아버지의 ‘쁘띠 브루주아 근성’이 너무 싫었던 아들은 화가를 꿈꿨다. 한국전쟁 때 부모는 제주로 피난을 가 냉면집을 했다. 고교생이었던 시인은 제주의 유일한 화방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렸다. 물방울 화가인 김창렬도 같이 배웠다. 

 

전쟁이 끝난 뒤 부모는 서울 중구 초동에 냉면집을 냈다. 군 복무를 마친 시인은 대학에 복학하지 않았다. “대학을 하찮게 생각했어요. 시를 썼어요. 소설도 쓰려고 했죠.” 대학 다닐 때 이화여고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 서상실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했다. “이대 작곡과나 피아노과를 나온 며느리를 원했어요. (아내가) 고교생이었으니 반대가 심했죠. 집에서 쫓겨났어요.”


‘고졸 가장’은 잡지 편집자 생활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1962년 <자유문학>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 ‘이 봄의 미아’란 시로 등단했다. 여성지 <주부생활> 등에서 편집기자로 인정받은 그는 6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8년 뒤 자유언론운동으로 해직당할 때까지 <신동아> 등 잡지 쪽에서 일했다. 해직 기자들의 거리 투쟁 때 ‘격문시’는 등단 13년차인 그가 도맡았다. 해직 뒤 <미술과 생활> 편집장을 거쳐 엘지의 전신인 럭키금성사의 사보 편집자로 취직했다. “격문시를 써서 그런지 형사들이 럭키금성사 시절에도 한동안 따라다녔어요.” 88년 <한겨레> 창간 때 주주로도 참여했지만, 동아일보에서 해직 당한 뒤엔 돈 주고 신문을 사서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강제로 쫓겨난 상처가 그만큼 컸다.


시인은 등단 이래 50여년동안 시집 3권을 냈다. 유신 때 펴낸 첫 시집 <한국의 아이>(76)는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20년 뒤 <내 마음의 솔밭>(96)을, 2004년엔 <흰 저고리 검정 치마>를 펴냈다. 이번 선집에는 세 시집에서 각 25편을 골랐고, 신작시 25편도 보탰다.


구중서 평론가는 발문에서 “시 ‘한국의 아이’ 한편만으로 황명걸은 불멸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썼다. 이 시엔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리도록 하여라”란 표현이 있다. 기성 체제와 권위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을 담았다. “65년에 통혁당 사람들이 만든 <청맥>이란 잡지에 이 시를 발표했어요. 내가 객원필자였죠.” 3년 뒤 통혁당 사건이 터졌다. ‘통혁당 핵심’ 김질락은 사형을 당했다. “나도 잡혀갈까 봐 조금 떨었어요.”


시인은 정년 퇴임 뒤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변에 터를 잡았다. 91년이었다. “퇴임 뒤 노름에 빠져 퇴직금과 모아놓은 그림도 팔아먹었죠. 아내의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건축가인 아들이 지은 예쁜 집도 화재로 불탔다. 화마를 당한 집을 손봐서 갤러리 카페(무너미)를 냈는데, 대박이 났다고 했다. 예술인의 사랑방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번엔 ‘무허가 영업’으로 고발돼 경찰서 유치장에 한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그뒤 남한강가인 옥천면 아신리로 옮겨 카페 ‘어린왕자’를 열었다. 역시 아들 작품이었다. 3년 전 사진작가에게 카페를 남겼다. 요즘은 동네 노인정에서 서예 공부를 하는 일 외엔 집 밖 출입을 하지 않는다. 서재 밖으로 남한강 물결이 넘실거리지만 장애가 있어 운동이나 산책은 못한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최근 <양평문학>에 ‘노 시인의 아내’란 시를 발표했다. “집사람에 대한 속죄를 담은 헌시죠.” 서재엔 그의 그림 200여점이 보관돼있다. “2008년에 시화집을 내고 전람회도 한번 했죠. 그뒤에 그린 그림도 전시하고 싶지만 쉽지 않아요. 전시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스크랩 / 한겨레]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아라아트’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준영 시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큰 일 날 뻔 했다는 것이다.
대형 트레일러에 받힌 큰 사고였으나, 다행히 운이 좋았다고 한다.
함께 다친 아내와 50일간이나 병원에 있었다는데, 그동안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남의 경조사엔 빠지지 않고 챙긴 그가, 정작 자신의 일엔 입을 다문 것이다.

걱정스러워 인사동에 나갔더니, 청진동 ‘청일옥’으로 오라했다.

피맛 골 화재로 그 쪽 방향의 길이 확 바뀌었던데,
시골노인 서울 김서방 집 찾듯, 얼마나 돌고 돌았는지 다리가 아프더라.

지금은 집에서 가료중이나, 근일간 인사동에 한 번 나온다 했단다.

'청일옥'에는 황명걸시인을 비롯하여 양평의 송화백, 횡성의 김영호선생,
김명성, 이희종씨 등 여러 명이 계셨는데, 몇 분은 먼저 가셨다고 했다.
어떤 모임이었는지는 모르나, 다들 일찍부터 거나하셨다.


황명걸선생은 마시다 졸기를 반복하셨는데,
김명성씨가 쓴 민병산선생을 기리는 시에다,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김영호선생은 모든 게 양면성이 있다며,
알려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가짜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나 때문에 술자리가 지연되는 것 같아, 급히 몇 잔 들고
인사동 ‘여자만’으로 넘어왔는데, 그 곳에서 신상철씨를 만났다.
나오는 길에 ‘귀천’을 들여다보니 심우성선생께서 맥주를 드시고 계셨다.
오는17일 오후4시, 강남 ‘한국문화의집’에서 ‘귀천하는 마음’이란
넋전 공연이 있다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의존하다보니, 아날로그 소식이 너무 어두웠다.
인사동을 그렇게 들락거리지만, 모든 소식이 깡통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네 멋대로 해라 중에서


황명걸


아내가 제 멋대로 해석하는
일요일의 의미는 가관인 것이 ,
죽씬하게 낮거릴 하고 손맥이 풀려
나른해 자빠져 한 숨 잔 뒤,
해 떨어져 선선하면 밤 화장으로
명동엘 나가, 한일관이나 삼오정 같은 데서
'불백' 으로 잔뜩 몸보신하곤,
장장 두 시간 반의 70밀리 (벤허) 보고서
'새나라' 타고 훌쩍 집에 돌아와,
도너츠 구멍에 바나나 끼는 장난질 또 치며



.....이런 정서가 지금이야 더러 눈에 띌 뿐더러 장삿속으로 권장되기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철저하게 금기시되던 때다.
말하자면 시란 점잖고 진지하고 치열해야 한다.
한데,,,아무리 비유라 하더라도 아내를 동원해 망신을 시키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시에서 그의 사생활을 유추한 독자도 없지 않았을 터로,
이 시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눈에 야비하고 추잡하고 음란한것으로 비쳤다.
나 역시 이 시에서 음습하고 부조리한 사회현실의 데포르메된 그림을 찾아 읽지는 못했다...
예컨대 잡놈기가 없으면 이런 시는 쓰지 못할 것이라고쯤 생각했었다.
나 같으면 용기가 없어 쑥스러워 못 쓴다.
그러면서도 왜 충격을 받고 당황했을까.
나로서는 촌에서 갓 올라온 시골뜨기로서는 어림도 없는 그의 용기가 부럽고
자유분방한 발상이 부러웠을 것이다

.....이 시는 본질적으로 당시의 다른 사람들의 시와는 달랐다.

우선 도시의 감수성이다.
대체로 우리에게는 도시적 감각 또는 정서의 시가 많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끌린 것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군복 물들인 것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는 우리와는 달리
그는 유행하는 양복에 양말 색깔까지도 신경을 쓰는 것이 갈 데 없는 서울내기요,
라이터며 만년필도 이름 있는 것 아니면 가지고 다니지 않는 얌체였지만,
나는 그가 가진 도시 분위기가 차츰 좋아졌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2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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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걸의 "초가(歌)"




얼마나 맛좋을까.


고운 국수발 맑은 육수
갖은 고명에
배도 한 조각 떴겠다
꿩 완자도 한 알 얹혔으니,
눈치가 촉새 같은
계집이라도 곁에 있어
조금 초를 쳐 주면
그 냉면 얼마나 맛좋을까.



얼마나 잘 될까.


날로 헐벗어 가던 가난
사사건건 틀어져만 가던 일
난마처럼 뒤얽히던 생각
이런 불행한 사태들이
하나 둘 바로 풀리는 듯할 때,
감초하줌마같이 원만한
여편네라도 곁에 있어
좀 거들어만 준다면
그것들이 얼마나 잘 될까.



한데 얼마나 힘드냐.

어느 모임 어느 직장 어느 동네나
애써 성사시킨 일 그르치게 하고
겨우 차지한 자리 가로채고
멀쩡한 사람 헐뜯어 내리는
장화홍련의 계모년같이 고약한 심보의
초 치는 놈 있으니.
게다가 제 어미 장단에 춤추는
장쇠녀석 같은 놈 있으니
세상 살기 얼마나 힘드냐.



초 치지 마라.

하긴 봉이 김선달이
쉰 죽에 초 쳐 팔아먹었다지만,
발끈한 청년이 변심한 계집의 얼굴에
초산 뿌려 앙갚음했다지만,
좋은 건 좋은 거고 초는 촌데
근량깨나 나가는 불알 찬 친구들이여,
남 망치고 저 망치는 초일랑
아예 칮 마라.

출전 : '창작과 비평'(1969. 봄호)



전 8연으로 되어 있지만 독립된 한 행을 그 다음 연에 붙여 읽으면 4단락으로 볼 수 있겠다. 이것은 내용상 다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얼마나 맛 좋을까', '얼마나 잘 될까'로 시작되는 부분이 초[醋]의 긍정적 측면을 말하고 있다면, '한데 얼마나 힘드냐', '초치지 마라'로 시작되는 부분은 초의 부정적 측면을 말하고 있음이 눈에 뜨인다.

알다시피 초는 조미료이다.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맛은 아니다. '냉면'에 적당히 초를 치면 맛이 한결 상큼해지겠지만, '쉰 죽'에 초를 쳐 팔아먹는다면 이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초친 놈'이라는 말이 있다. 난봉이나 부려서 사람 구실할 여망(餘望)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근량깨나 나가는 불알 찬 친구들이여, / 남 망치고 저 망치는 초일랑 / 아예 치지 마라.'라는 말로 끝난다. 이런 자들 때문에 '세상 살기 얼마나 힘드냐'고 화자는 반문한다. 이 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말이 어눌(語訥)하지 않고 초친 맛처럼 시원시원해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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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저고리, 검정치마 - 황명걸

 

 

흰 저고리 검정 치마 너무 아름다워 흠갈라

운을 떼지 못하다가

생 꽁지머리에 엷은 화장

둥근 어깨에 초승달 눈썹

이밥 눈에 박꽃 미소가

조선 미인의 전형이라서

매끈한 몸매 타고 흐르는

긴 고름끝이 춤추는 듯

걸음새마저 날렵하니

아, 내 사랑하고픈 여자여라

 

 

늦은날의 연가


불혹을 넘어서 난데없이 사랑을 배운다
모자란 찻삯을 얼굴 붉히지 않고 내던 날
부끄럼도 모른 채
이팔청춘 같은 사랑을 느꼈다

그날 밤 가을비가 추적 내리고
사랑인 듯 몸살인 듯 몸 부여안으니
그리는 정에 신열은 뜨겁지만
멀리 있는 이에게로 가는 눈이 맑아지던 걸

사랑은 참으로 영험한 것
어둠속에 귀머거리로 하여금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다시 듣게 하고
오랜만에 빗물 머금은 화초를 보게 한다

이제 삶의 빛으로 떠오르는
그이의 달래 얼굴이
어쩌면 사람 사는 일까지 다 깨우쳐준다

동에서 서으로 흐르는 한강 따라
나의 그리움 강동에서 강서로 간다

그대 향한 그리움에 티없어
아릿하게 저며오는 아픔은 견딜 만하고
훗날 깊은 상처에는 꽃이라도 필 법하여
늦게사 새롭게 사랑을 배우고자 한다.

 

 

 

 

<SEVEN DAYS IN A WEEK>

 

 

SEVEN DAYS IN A WEEK

 

중학 영어교재의 어느 한 귀절이 아니올씨다.

요일 따라 하나씩 색색으로 갈아입게 된

딜럭스 숙녀용 일주일분 팬티의 상품명이올씨다.

나의 아내가 애독하는 생리위생독본이올씨다.

줄줄 대하가 흐르는 여자가,

아래를 몹시 소중히 여기면서 마구 굴리는 그 여자가

유일무이한 도서목록으로 잡은 처세독본이올씨다.

 

(저녁 외출이 잦은 그녀는

성당의 앙젤르스가 은은히 들려오면,

뒷물을 하고

로코코풍 디자인의 곽에서 색팬티를 하나 꺼냅니다.

토실한 아래의 유연한 선이 그대로 살아난 팬티,

그 한 옆 위쪽에는 <순결>이라는 꽃이 수놓여져 있읍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올 때는 꽃잎은 다 시들어져 있고,

다시 뒷물을 해야 합니다.)

 

 

<Seven days in a week>

 

딜럭스 숙녀용 일주일분 팬티의 상품명만이 아니올씨다.

나의 여자가 애독하는 생리위생독본만이 아니올씨다.

그 여자가 교제하는 모든 훌륭한 인사들의 처세독본이올씨다.

매일이 다르고, 매시가 다르며,

갑에게 다르고, 을에게 다르며,

그때그때 희비애락을 적절히 연기하게 하는

아주 편리하고 완벽한 연기지침서올씨다.

 

(요즘 시정에서는 이 책이 장기 베스트 셀러로,

사람마다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도 남들에게 뒤질세라, 사서 읽어는 보았읍니다만,

너무 어려워 그만 책장을 덮어버리고 말았읍니다.

그래도 한번은 꼭 통독해야 한다기에

의무감 같은 것으로 다시 책장을 들척거리기는 하지만,

아직 나에게는 어렵기만 합니다.)

 

                                                                                <세대. 1967.9>

 

 

이런 짓거리

 

이런 짓거리는 어떨까?

눈길이 분주한 미스를 꼬여

ㄱ진 구석에 몰아붙이고는,

핏발선 눈알을 꽉

한 대 쥐어박아주면 어떨까?

에어컨이 잘 돼

짜증스런 사무실에서 ----.

 

이런 짓거리는 어떨까?

귓속말 좋아하는 미스터를 불러

귀 좀 빌리자 하고서.

벌렁대는 귀를 쭉

냅다 찢어주면 어떨까?

에어컨이 잘 돼

짜증스런 사무실에서 ----.

 

이런 짓거리는 어떨까?

입이 걸고 큰 사장님을 배알해

싹싹 두 손을 비비며,

헛기침하는 입에다가 철컥

걸레를 처넣어주면 어떨까?

에어컨이 잘 돼

짜증스런 사무실에서 ----.

 

이런 짓거리는 어떨까?

유난히 젖가슴을 드러낸 사모님을 뵈어

경의를 표해 머리 숙여,

희멀건 젖통 골짜기에다 슬쩍

풀어진 사꾸를 쑤셔넣어주면 어떨까?

에어컨이 잘 돼

짜증스런 사무실에서 ----.

 

이런 짓거리는 어떨까?

저 편리하기 이를데없는 연필깎개에

이 주체할 수 없이 난처한

열 손가락을 하나씩 넣어,

뾰족뾰족 깎아버리면 어떨까?

에어컨이 잘 돼

짜증스런 사무실에서 ----.

 

이런 짓거리는 어떨까?

112를 부르든가 117을 부르든가

청량리 뇌병원을 찾아가,

이런 짓거리는 어떠냐고

용용 놀려주면 어떨까?

에어컨이 잘 돼

짜증스런 사무실에서 ----.

 

*사꾸 : 콘돔

                                                                            <현실 1집. 1963.4>

 

 

            

韓國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빛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허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 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 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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