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예술인스마트협동조합서인형이사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전시를 철수하고 가까운 녹번동 응일식당’으로 화가 칡뫼 김구, 장경호씨가 왔으니, 오라는 것이다.

 

마침 동자동으로 가려고 나서던 중이라 식당부터 먼저 들렸는데.

칡뫼 김구, 장경호씨도 직원들과 함께 작품을 철수했다고 한다.

전시 마무리를 도운 두 분에게 저녁 식사 대접하는 자리에 끼어 앉은 것이다.

 

서인형씨는 씨앗페기금마련전에 많은 분이 도와주셔서 잘 마무리했다고 한다.

작품을 구매하거나 계좌로 후원해주신 분들도 고맙지만,

공연을 진행해주신 뮤지션을 비롯한 참여한 모든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나 역시 '씨앗페' 전시를 치루는 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 

더구나 이번 전시에 사진가도 아홉 명이나 들어가 전시 공간만 차지할 것 같았는데,

20여 점의 판매작 중 사진이 네 점이나 팔려 천만다행이었다.

두 점은 모르는 분이 샀지만, 나머지 두 점은 사진가가 사주어 더 고마웠다.

 

사진을 구입해 주신 황규태 선생은 몸이 불편해 전시장에 나올 수도 없었으나,

씨앗페” 전시 포스팅을 보시고 사진 두 점과 그림 한 점을 사겠다고 연락해 온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일에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하셨다.

기금 마련전 덕에 모처럼 통화를 했는데, 마무리하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말씀하셨다. 

 

정영신사진

그래서 이튿날 선생이 계신 평창동으로 정동지와 찾아간 것이다.

약속한 식당에 먼저 나와 계셨는데, 요즘은 허리 협착증으로 외출도 할 수 없다며,

부산에서 열린 개인전에도 못 가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데, 픽셀 작업하느라 너무 오래 앉아 생긴 병 같았다.

하루속히 완쾌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활동하시길 바란다.

 

팔린 사진 / 정영신 / 전남, 강진 / 75x47.8cm / 1988

선생께서 작품을 구입해 주어 씨앗페기금 마련에도 보탬이 되었지만,

작가에게도 절반이 돌아가니 어려운 살림에 도움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태 사진가가 사진가의 작품을 사준 일이 흔치 않은 일이라, 그 고마움을 깊이 새겼다.

 

팔린 사진 / 라인석 / 휘어진 세계로 부터 캠밸수프머시룸1 / 50X40cm / 2021

 

씨앗페에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 고맙고 고맙습니다.

 

사진, / 조문호

 

 

김창길의 사진공책

픽셀 Pixel, 하트 Heart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호모’로 시작되는 인간에 대한 작명은 다양하다.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 파베르’, 놀이하는 ‘호모 루덴스’ 등의 고전적 이름들은 지금도 인간에 대한 본질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후죽순 생겨난 신조어들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일면들을 좀 더 세밀하게 반영하는 듯하다. 정보화 시대의 인간을 뜻하는 ‘호모 인포매티쿠스’, 디지털 시대의 ‘호모 디지쿠스’,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콘수머스’, 플라스틱 없이 살 수 없는 ‘호모 플라스티쿠스’, 스마트폰을 손에 든 ‘호모 모빌리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

 

한국을 대표하는 호모 포토쿠스 네 명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있다. 1996년 강운구 작가가 서울 인사동 한 찻집에 있던 세 명의 호모 포토쿠스를 찍은 흑백 사진이다. 한정식, 김기찬, 그리고 황규태. 사진을 찍은 이는 찻집 유리에 반사된 실루엣으로 등장한다. 앞에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 강운구 작가는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며 그의 사진집 <사람의 그때>에 아쉬움을 적었다. 황규태 작가는 2년 전 강 작가의 사진전이 열렸던 부산 고은미술관에서 회고전 <사진에 반-하다>를 열고 있다. 1960년대의 ‘흑백 스트레이트’ 사진에서 시작해 사진의 경계를 넘어서는 최근 작품들을 펼쳐 놓았다. 전시는 아쉽게도 내일(12일)이 마지막이다. 기사를 남겨서 황규태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놓자는 생각이 들었다. 황규태라는 호모 포토쿠스는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사진의 화두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 반-하다>는 앞서 말했듯 사진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반-하다’의 ‘반’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사진에 홀딱 반했다는 뜻도 품고 있다. ‘열화당’ 사진 문고에 적어놓은 황규태 작가의 표현은 이렇다. “사진의 모든 것이 사진이고 모든 것이 사진이 아니다.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이다.” 첫 문장은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그가 아무래도 우리가 생각하는 통념과 다른 사진을 추구한다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한다.

 

사진에 대한 정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대개 사진의 기원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1939년에 발명했다고 선언한 사진술에서 찾는다. 요오드 용액을 이용한 은도금 동판에 상을 맺히게 하는 은판사진술로 ‘다게레오타이프’로 불린다. 하지만 당시의 사진술은 다게레오타이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입이 존재했다. 그와 같은 나라에 살았던 이폴리트 바야르와 영국의 폭스 탤벗은 종이를 이용한 ‘칼로타이프’를 발명했다. 다게르의 사진술도 독자적인 발명은 아니었다. 그는 역청을 바른 백랍판을 이용해 1826년 경 창밖 풍경을 찍은 발명가 니에프스의 사진술을 참고했다. 이들 이외에도 감광성 표면 위에 이미지를 정착시키려는 사진술을 고민했던 사람들은 많았다. 1790년부터 1839년까지 24명에 달했는데, <사진의 고고학>을 쓴 미술사가 제프리 베첸은 이들을 ‘원시 사진가’로 부른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사진술의 기원은 특정할 수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사진을 향한 욕망이 여기저기서 출현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의 기원은 물론 단일한 사진의 정체성도 없다. 빅터 버긴, 존 탁 등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의미는 맥락에 의해 결정되므로 사진 자체라고 할 만한 정체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은 미술관에 걸리면 예술이 되고, 과학자의 진리를 뒷받침하고, 범죄의 증거가 되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보도사진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들’을 거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황규태 작가의 사진은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던하다고 할 수 있다. 황 작가는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라고 말했다. 묵직한 독일 카메라로 찍어야만 작품 사진인 것은 아니다. 그는 빛에 반응하는 이미지를 움켜잡으려는 모든 장치들을 활용한다. 세기말에는 디지털 사진이 과연 사진인가라는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사진 역시 사진의 맥락에 자리 잡을 수 있다. 필름 대신 센서에 닿은 빛에 대한 반응을 디지털 정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인화된 사진조차도 디지털로 스캔하고 복원해 스마트 기기를 통해 바라보는 호모 디지쿠스가 아니던가.

 

흑백 Black and White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호모 포토쿠스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1963년 황규태는 경향신문사 사진기자가 된다. 이형록, 전몽각 등 걸출한 사진가들이 활동했던 현대사진연구회에도 몸담았다. 이 시절 남겨놓은 흑백 사진 중에는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사진이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인을 찍은 사진이다. 그녀의 허벅지와 오른손은 프레임 밖으로 잘려 나갔다. 구도가 역동적이다. 초점은 흐리다. 앵글은 다소 높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무릎을 구부리며 수줍게 인사하는 장면이라고 상상해보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한 장면만 기억에 남아 있는 꿈속의 찰나 같은 느낌이랄까. 짝사랑에 빠진 사내의 개운치 않은 백일몽의 한 장면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1965년 황규태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호모 포토쿠스로서의 정체성은 타국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컬러사진 현상소에서 돈을 벌었다. 기술자로 안주하기에는 호기심이 너무 강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실험정신으로 가득 찬 테라(tera)급 바이오칩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규태는 사진과의 놀이를 시작했다. 필름을 태우고, 오리고, 붙이고, 겹치고, 합성하고, 확대하고…. 정통 사진을 고수하는 사람들 눈에는 불경스러운 짓이었지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전위적이라며 ‘아방가르드’라는 예술 용어를 헌사했다.

 

버노그라피 Burnography, 녹아 내리는 태양, Melting the Sun (왼쪽) / 포토몽타주 Photo Montage,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lsquo;s World - 앤드류 와이어스 이후 After Andrew Wyeth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버노그라피(burnography). 필름을 태워(burn) 만든 사진(photography)이라고 작명한 황규태의 사진술이다. 그가 원조는 아니었다. 1930년대 초현실주의 화가 라울 위박이 처음으로 흑백 필름을 태웠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황규태의 필름은 컬러였다. 컬러에서는 그가 원조라지만, 이제 기원이나 원조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앞서 말했듯이 사진의 의미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녹아내리는 태양(Melting the Sun)’은 태양을 찍은 필름에 열을 가해 뒤틀린 이미지를 인화한 사진이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사진을 가능하게 하는 빛의 근원인 태양을 불태운다는 아티스트로서의 실험 정신, 그리고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감이다. 이즈음 그는 맥락이 다른 사진들을 합성한 몽타주 작품들도 내놓았다. 핵무기의 위험성과 문명 비판적인 메시지가 담긴 포토몽타주였다.

블로우업 Blow up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블로우 업(Blow Up). 이것은 사진술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크로핑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초기 흑백 사진들의 세부를 2000년대에 확대(blow up)한 작품들이다. 부인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사진가는 자기가 찍는 장면을 완벽하게 파악하며 셔터를 누르는 것은 아니다. 화가는 장님이라고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야기했다. 그려야 할 대상을 바라보던 화가는 캔버스 위에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실재의 대상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에도 해당한다. 뷰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보던 사진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셔터막이 닫히기에 피사체를 볼 수 없게 된다. 아주 짧은 찰나이기에 사진가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황규태 작가는 자기가 찍어놓고 몰랐던 사진의 부분들을 극단적으로 확대한다. 결과물은 그의 초기 흑백 사진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적이다. 상체가 잘려 나간 한 여인의 걷는 모습은 오싹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악몽이다.

 

사진의 세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려는 욕망은 오래됐다. 발터 벤야민과 함께 ‘원시 사진비평가’라 부를 수 있는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1927년 독일 신문에 실린 영화 스타의 사진을 보며 다음과 같이 썼다.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면 그녀, 곡선, 호텔이 수백만 개의 작은 망점과 그리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망점들의 모자이크가 아닌 리도의 살아 있는 스타다.” 황규태 작가가 들여다본 것은 신문 사진이 아니라 TV 화면이었다. 루페(돋보기)를 통해 확대된 모니터의 세부는 반복되는 사각 무늬였다. 그는 모니터를 접사해 찍고, 그 결과물을 또 접사해 찍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렇게 확대를 반복한 끝에 목격한 픽셀의 어떤 이미지는 자기 머릿속에 심어진 바이오칩과 닮은꼴이었다.

픽셀 Pixel, 반복과 차이 Repetition and Difference -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반복과 차이(Repetition and Difference)’. 철학자 들뢰즈의 말을 차용한 픽셀 사진의 제목이다. 차이는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이라는 것인데, 기존의 사전적 단어 풀이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현대 철학의 논리이다. 반복되는데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하지만 황규태의 픽셀 시리즈 사진을 본다면 들뢰즈의 사유를 짐작하게 한다. 힐끗 쳐다본다면 황 작가의 픽셀 사진은 반도체 형태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반복되는 패턴에서 서로 다른 세부 형태들을 발견하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반복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 하나의 이미지로서는 비교될 대상이 없기에 동일성이나 차이점도 따져볼 수 없다. 그래서 차이는 반복되어야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세부와 전체의 관계는 어떨까? 크라카우어는 ‘작은 망점들의 전체는 모자이크의 합이 아니라 살아있는 여배우의 얼굴’이라고 했다. 그에게 세부는 전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황규태가 발견한 사진의 세계는 다르다.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픽셀이 그 자체로 하나의 형태로 나타난다. 반복되는 픽셀의 집합은 우연히 ‘하트(Heart)’ 모양이 되고, ‘육각형 생삭코드 그라데이션(Hex Color code gradation)’이 되며, 셜록홈즈 머리 모양이 된다. 황 작가는 셜록홈즈의 실루엣으로 나타난 픽셀 사진을 ‘게슈탈트(Gestalt)’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부분과 전체의 형태에 대한 감각을 뜻하는 독일어다.

픽셀 Pixel, 게슈탈트 Gestalt - 형태심리학 Configurationism (왼쪽) / 픽셀 Pixel, 육각형 색상코드 그라데이션 Hex Color code gradation ⓒ황규태,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황규태 작가의 근황을 물었다. 허리가 고장이 나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온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본 결과였다. 그의 작업실에는 컴퓨터는 있지만, 카메라는 없단다. 그래서 20여 년 전, 그가 그렇게 말했던 거였다. 복사기도 스캐너도 모두 카메라라고.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밤하늘의 별도 찍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도 중요하지만, 도처에 넘쳐나는 사진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누군가 무심히 찍은 단 한 장의 사진 속에 우주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황규태라는 이름의 호모 포토쿠스는 그렇게 사진의 우주를 탐사하고 있다.

 

경향신문 / 김창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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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한미 삼청, 개관 기념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
1929년 첫 개인 사진전~예술매체 인정받은 1982년 미술관 전시까지 다뤄
사진·자료 총 300여점 대거 나와···1880년대 ‘역사적 사진’들도 선뵈
“한국사진사 정립위해 ‘한미사진미술관’의 지난 20년 역량 총동원”

한국사진사 정립을 위한 뮤지엄한미 삼청(옛 한미사진미술관)의 개관 기념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가 열리고 있다. 사진은 개인 사진전을 연 최초의 사진가 정해창의 작품들(1920~1930년대,Gelatinsilverprint). 뮤지엄한미 소장, ⓒ정형식. 뮤지엄한미 제공

사진은 등장 200년이 된 현재 독자적 예술매체로,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기계조작의 결과물”로 치부하던 예술계의 무시, 비아냥을 극복한 것이다. ‘바늘구멍 사진기’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거쳐 1820~30년대 니엡스, 다게르 등 선구자들이 사진 역사를 열어젖힌 이후 세계 사진가들이 치열하게 작업하고 사진 미학을 구축한 덕분이다.

조선인이 사진을 접한 것은 기록상 1860년대다. 1880년대에는 서화가이던 김용원·지운영·황철 등이 사진관을 세웠다. 1900년대 초반에는 김규진의 천연당사진관 등이 신문광고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최초의 개인 사진전이 1929년 3월 이 땅에서 개최됐다. 정해창(1907~1968)이 서울 광화문빌딩 2층에서 연 ‘예술사진 개인전람회’다. 사진가·평론가인 최봉림(뮤지엄한미 부관장)은 “정해창은 사진을 예술매체로, 자신의 미학적 역량을 개인전이라는 근현대미술의 사회적 형식으로 선보인 한국 최초의 사진가”라며 “한국 사진사에서 본격적인 예술은 이 전시와 더불어 비로소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전에도 전시 등은 있었지만 정해창과 달리 작품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고 작가 이력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진은 50여년 후인 1982년 변곡점을 맞는다. 당시 덕수궁 석조전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로작가 초대전으로 사진가 임응식(1912~2001)의 ‘임응식 회고전’이 열린 것이다. 최 부관장은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매체로, 순수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은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전시와 함께 사진이 미술관의 전시·소장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한국 사진은 1982년 6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응식 회고전이 열리면서 마침내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고 미술관 전시와 소장의 대상이 됐다. 사진은 당시 전시 팸플릿. 뮤지엄한미 제공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사진가들은 국내외의 주목 속에 여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사진계가 이룩한 갖가지 성취의 뿌리, 역사적 토대와 흐름을 살피고 짚어보는 일은 중요하다. 사진사 정립을 위한 치열한 연구·노력은 곧은 성장을 담보하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국 사진의 튼실한 발전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뮤지엄한미 삼청’(서울 삼청동)에서 열리는 기획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는 주목할 만하다. 1929년 정해창 개인전부터 1982년 임응식 회고전까지 50여년 동안 한국 사진이 어떤 조건·환경 속에서 발전했는지 새롭게 고찰해 의미가 크다. 사진 200여점, 자료 100여점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기획전으로, 쉽게 마련하기 힘든 보기 드문 사진전이다.

사실 한국사진사를 다루는 대규모 기획전은 여러 이유로 쉽지 않다. 사진사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데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소장·관리·자료의 부실, 빈티지 프린트의 한계는 물론 아직도 소유권·저작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여전해서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 소장품에 개인·기관 소장품들까지 모은 전시는 그 의미를 더한다.

이번 전시는 한미약품을 모기업으로 한 가현문화재단 한미사진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서울 삼청동에 미술관을 신축하고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재탄생한 개관 기념전이다. 국내 최초이자 한국 대표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관장 송영숙·사진가)의 내공, 자부심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전시는 정해창의 작품으로 시작해 먼저 1920~1930년대 사진들을 살펴본다. 회화주의 사진(살롱사진)이 중심이었지만 ‘신흥사진’으로 불린 모더니즘 사진에 대한 사진가들의 관심도 엿볼 수있다. 1930~1940년대는 공모전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사진가들에게 공모전 입상은 사회적 인정, 예술적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형록·임응식·김정래·최계복·정도선·구왕삼·정인성 등 당시 각종 공모전 수상작들을 만난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응식의 포토그램 습작1 부양(1933, ⓒ임응식사진아카이브), 이형록의 전원(1934, ⓒ이명민), 임석제의 반출(1948,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소장

해방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은 여느 분야처럼 사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극단적 이념 대결과 전쟁 전후의 혼란 속에서 사진계는 기존 회화주의를 비판하며 현실의 객관적 기록성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이 대세를 이룬다. 르포르타주(르포)도 부상했다. 사회의 부조리, 전쟁, 노동현장, 농업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 조짐 등 있는 그대로의 현실·현장을 담아내는 것이다.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을 다룬 이경모, 전쟁터나 전쟁에 따른 고단한 삶을 기록한 임응식·이명동·구왕삼·임석제·임인식 등의 작품은 당시 사진계를 잘 보여준다.

구왕삼의 작품(1950년대, 동강사진박물관 소장, ⓒ구경훈, 위 사진)과 임인식의 6.25전쟁-군번없는 학도병(1950, 청암아카이브 소장, ⓒ청암아카이브). 뮤지엄한미 제공
이해선의 명암 (1950년대, 개인소장, ⓒ이길주, 위 사진)과 이해문의 제일보(1957, 개인소장, ⓒ이성주). 뮤지엄한미 제공

1950~1960년대 해외 공모전들도 사진사에 영향을 준 제도적 조건의 하나다. 사진가들은 일본은 물론 미국·프랑스·영국 등의 해외 공모전에 적극 참여했다. 국내 공모전 심사의 불신, 문화 선진국에 대한 선망 등에 따른 것이다. 전시장에는 국내 사진가의 최초 해외 공모전 입상(19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으로 알려진 임응식의 ‘병아리’를 비롯해 김한용·박영달·이해문·한영수·배상하·최민식 등의 작품과 관련 출판물 자료가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이어 ‘인간가족’전(1957년)과 긍정·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등의 영향을 살핀다. 신한국·김종헌·김테레사·한정식·홍순태·정진필·배동준·육명심·차용부 등의 작품을 만날 수있다. 여기에 리얼리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작업방식을 고민·시도한 ‘싸롱아루스’와 ‘현대사진연구회’의 이상규·김형오·황규태 등의 작품들도 선보인다. ‘인간가족’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기획한 세계 순회전의 하나로 한국을 찾아 42만명의 관람객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황규태의 빅 브라더(1968, 몽타주, 작가소장, ⓒ황규태, 왼쪽 사진)와 김종헌의 격정(1965, 개인소장, ⓒ김선미). 뮤지엄한미 제공
강운구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면 수분리(1973, 뮤지엄한미소장, ⓒ강운구, 왼쪽 사진)와 홍순태의 갈치 (1971, 개인소장, ⓒ홍성희). 뮤지엄한미 제공
육명심의 사별(1974, 작가소장 ⓒ육명심, 왼쪽 사진)과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연작)(1978, 작가소장, ⓒ차용부). 뮤지엄한미 제공


1960~1970년대가 되면 사진가들은 공모전을 넘어 개인전, 출판 작업에 활발하게 나선다. 주명덕의 ‘홀트씨 고아원’,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 등을 비롯해 서순삼·이해선·전몽각·강운구 등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전통문화에 대한 민족주의적 인식을 잘 보여주는 고건축물·유적·명소를 촬영한 작품들이 쏟아진 것도 이 시기다.

전시장 한쪽에는 기획전과 별개로 역사적 사진들이 나와 있어 관심을 가질 만하다. 수장고와 접해 마련된 전시공간에서는 황철의 1880년대 사진, 고종·흥선대원군 초상사진, 최초의 여성사진가로 알려진 이홍경의 작품 등이 선보이고 있다.

관람객은 이번 기획전을 통해 한국 사진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은 물론 1920년대 이후 근현대의 다양한 장면들을 생생하게 접할 수있다. 사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송영숙 관장은 “한국 사진사 정립을 위한 소중한 기회라는 책임감으로 이번 전시에 지난 20년의 역량을 총동원했다”며 “전시 성과를 사진계, 문화계가 공유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와 연계한 세미나도 마련돼 2월 11일에는 ‘미술관·박물관의 사진 컬렉션과 사진의 진본성’을 주제로 제2차 세미나가 열린다.

뮤지엄한미 삼청은 소장품(2만여점) 보존을 위해 국내 처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저온·냉장 수장고도 갖췄다. 또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진은 물론 설치와 영상·사운드 전시도 수용가능하며, 관람객 편의시설도 마련했다. ‘비움의 구축’이란 건축철학으로 유명한 원로건축가 민현식 대표(기오헌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미술관은 개관과 더불어 건축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시는 4월16일까지.

한국 최초이자 대표 사진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이 뮤지엄한미 삼청으로 거듭났다. 사진 왼쪽은 신축 개관한 뮤지엄한미 삼청전경(ⓒ김재경)이다. 오른쪽은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개관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는 뮤지엄한미 삼청의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기자

경향신문 /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한정식선생께서 고요의 선계에 편안히 잠드셨다.

 

부음 받은 지난 23일 장례식장을 찾아 선생의 명복을 빌었으나,

떠나시는 선생을 배웅하고 싶다는 정동지 채근에 25일 새벽을 서둘러야 했다.

장례식장 변두리를 뒤덮은 호박꽃이 선생님 가신 극락세계 연꽃인양 반기더라.

 

장례식장에는 유족들과 이일우씨만 발인을 서두르고 있었고,

조문객으로는 강용석, 곽명우씨 등 서너 명의 사진가만 보였다.

뒤이어 '사진예술' 발행인 이기명씨 등 제자 몇 명이 찾아와 운구에 힘을 실었지만,

한국 사진 교육계 거목이 떠나는 상여길 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타 예술단체에 비해 사진인들의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나 예의가 소홀한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 선생의 장례식이 이럴진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먼 길 떠나는 원로사진가 영전에 잠시 모여 추모사로 위업을 되새기거나,

떠나시는 선생을 위해 살풀이라도 한 번 추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이번 장례식에는 제자 이일우씨가 시종 차고 앉아 사진인을 맞았지만, 가족들은 인사도 안 했다.

선생께서 그동안 말씀은 안 하셔도 마음고생 많이 했겠더라.

아들 셋보다 딸 하나가 더 좋은 세상을... 

 

요즘 사진판에 짚고 넘어가야 할 심각한  문제는 가족들의 사진에 대한 무관심이다.

돈 되지 않는 사진에 메 달려 온 선친에 대한 원망스러움은, 사진이란 말조차 듣기 싫은 것이다.

그러니 당사자가 돌아가시면 사진에 관한 모든 자료들이 쓰레기로 사라진다.

 

사진이고 뭐고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선생의 평소 말씀에 공감 하지만,

그래도 살아 남은자의 도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사진, / 조문호

 

이 사진은 홍순태선생 마지막 전시회에서 찍은 원로사진가들의 기념사진인데,

 이제 살아계신 분보다 돌아가신 분이 더 많군요, 

좌로부터 주명덕, 강운구. 이완교, 황규태, 홍순태, 김한용, 한정식선생

 

사진가 이완교(82) 선생께서 지난 513()일 돌아가셨습니다.

사진가로 반세기를 사셨지만, 한 번도 사진가다운 대접 한 번 받지 못하고 가셔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한국의 대표사진가로 꼽히는 육명심, 한정식, 홍순태, 삼교수를 비롯하여

지금의 원로급 사진가가 다 친구며 사진도 거기서 거긴데, 왜 번번이 선생만 밀렸을까요?

다른 분과 달리 대학 강의도 항상 보따리 장사만 하시고...

이완교 선생의 실력이 미치지 못할까요?

'기운 생동'하는 선생의 사진을 다시 한 번 조명해 봅시다.

 

그것은 한 번 갑이면 영원한 갑이고, 한 번 을이면 영원한 을이기 때문입니다.

생전에 억울하다고 역정도 더러 내셨지만, 잘 참으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것을 이제 아셨지요.

언젠가 선생 가신 길 따라가서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빕니다.

 

빈소 : 분당서울대병원 39호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300

전화 031-787-1500

 

발인 : 2022, 516() 630

장지 : 성남 시립봉안당

 

조의금 보내는 곳

하나은행 143-910101-30207

예금주 : 이선민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보이는 고인 기념사진을 무작위로 올렸습니다.

지난 날을 추억하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주기적으로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회를 인사동에서 가졌습니다.

아래 단체 사진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양반댁' 앞에서 찍었는데,

이완교 선생의 모습은 7-80%가 인사동에서 찍은 사진이네요

 

아래 사진 석장은 '양반댁' 주모께서 찍었는데, 나보다 훨씬 잘 찍었네요.

아래 사진 넉장은 홍순태선생 마지막 전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정영신 / 이명동선생 사진전에서...

사진가 황규태선생의 짝사랑 PiXEL ai Pixy전이 4월 1일부터 29일까지

대안공간 ‘space22’에서 열리고 있다.

 

색의 변주에 빠져들게 하는 짝사랑픽셀 작품을 돌아보며, 선생의 끊임없는 매체 실험이나 치열한 작가정신에 존경심이 일었다. 사실 생존한 원로사진가 중 선생만큼 열심히 하는 분이 있던가? 다들 기존 작품으로 회고전이나 여는 처지에 따끈따끈한 신작을 펼쳐 보이며 새로운 시각언어를 토해내고 있으니, 분명 아직도 청춘임이 틀림없다. 더 중요한 것은 작업을 일로 생각하지 않고 선생의 자유로운 생활처럼 놀이로 즐긴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렵게 생각하고 힘들게 작업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짓은 없기 때문이다.

 

황규태선생의 작가적 역량을 모르는 분이야 없겠지만, 몇 마디 부언할까 한다. 선생은 60년대 초반, '경향신문'기자로 시작했으니, 첫 사진은 분명 보도사진인 셈이다. 그러나 신문사특파원으로 미국에 건너가며 실험에 의한 초현실주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을 형상화 하는 등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확립한 것이다. 그때부터 필름을 태우거나 합성하거나, 이중 노출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표현 방법을 활용하여 메시지에 힘을 실었다.

 

70년대 생태적, 환경적, 문명적인 것에 대한 비판 정신을 바탕으로 태어난 원 풍경 환경의 변화를 예견한 일종의 경종이었고, 통렬한 비판이었다. 기록성과 고발성에 더해 조형적 회화의 속성까지 띄고 있었으니,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작품 경황은 당시 리얼리즘 사진이나 살롱사진에 한정된 한국사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입장에서는 비 사진적이란 생각도 들었으나, 마음을 당기는 흡인력은 대단했다. 지구환경과 문명의 위기를 경고하며, 종말적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요즘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그런 실험정신 덕에 한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사진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황선생의 자유롭고 은유적인 작품들을 보면 80년도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며 민중미술의 길을 걸어온 원로 화가 주재환 선생이 연상된다. 패러디의 거장답게 삶의 곳곳을 직시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재치도 닮았지만, 그 장난스러운 기발함이 유치찬란한 예술로 승화하는 것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대개의 작가들이 한 가지 방법에 빠져 작업하다 보면 생소한 옆길로 빠지기가 쉽지 않지만, 선생은 달랐다. 60여 년 동안 끊임없는 매체 실험으로 터득한 다양한 방법으로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예술적 관심사가 자신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예술이 멀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흔한 주변 삶 속에 있다는 진리를 터득한 노익장의 여유가 만들어 낸 놀이 세계이자 색으로 부르는 연가인 셈이다.

 

색으로 평화와 사랑을 노래한 '픽셀'작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니 20년은 족히 넘었다. '픽셀'은 이미지를 계속 확대하다 보면 이미지가 깨지거나 흐려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선생의 '픽셀'은 선명하고 현란했다. 지난 픽셀 작업이 직선과 사각으로 이뤄진 단순한 형태로 구성되었다면, 이번에 보여주는 픽셀 작업은 구불구불한 곡선과 일렁이는 듯한 파장이 느껴지는 독특한 형태로 바뀌었다.  짝사랑이란 제목처럼 유치찬란한 색의 변주 속에 숨은 사유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색과 면의 경계를 파괴하거나 확장해 가며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까지 꿈틀거리게 한다.

 

어쩌면 짝사랑이란 제목처럼, 사랑이란 말조차 계산적이거나 변질되어 갈 미래의 시대 상황을 예견하며 보내는 작가의 안타까운 연애편지인지도 모른다. 마치 체음제처럼 보는 이의 느낌이 포근해지고 뜨거운 연정이 일어나니 이 얼마나 신통한 일이더냐? 비록 짝사랑에 그칠지라도 아름다운 사랑의 꿈에 젖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살맛 나는 세상인가? 기존상식을 희롱하고, 무거운 예술에 야유를 던지는 선생의 지칠 줄 모르는 창작 정신에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이 전시는 강남역 1번 출구에 있는 미진프라자’ 22층의 ‘SPACE22’에서 429일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지난 주말 북촌로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는 황규태선생의 'PIXEL'전에 들렸다.
무한한 시공간을 보여주는 선생의 끝없는 실험정신을 만날 수 있었다.






3개 층에 전시된 여러 형태의 작품들을 돌아보며, 전체적으로 텅 빈 느낌이 오는 것은 왜일까?
작은 픽셀로 이루어 낸 색의 패턴이 합쳐져 결국 사라진다는 말인가?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이란 말처럼, 모든 형체는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마치 선승이 던지는 화두 같았다.






선생께서는 60년대부터 필름 태우기. 몽타쥬, 이중노출 등으로 기존 사진틀을 깨며
새로움에 도전해 온 한국 아방가르드 사진의 선구자로 알려진 분이다.
80년대부터는 디지털이미지의 시각 확장으로 젊은 작가들 기를 죽였는데,
선생의 연세가 이제 팔순을 넘기지 않았던가?






작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는 방식도 젊은이들 빰 칠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그 열정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존경스러웠다.
아무리 창의력이 용솟음쳐도 건강이 따라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데 말이다.






그리고 충무로에서 열리는 윤한종의 ‘보이지 않는 존재’도 눈여겨 볼 전시였다.
전자부품 검사 장비인 정밀한 눈을 이용해 깨알 같은 전자 부품을 찍었더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결을 더러 낸 형상이 마치 우주처럼 낯설었다.
사진과 미술의 구분이나 과학과 예술의 경계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에 산다.






황규태 선생은 기하학적인 이미지로 무한한 시공간을 보여주었고,
윤한종씨는 미시적 결을 끄집어내 첨단화 되어가는 물질문명을 말했다.
디지털문명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미지 정체성을 생각게 하는 전시들이다.






북촌로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는 황규태선생의 ‘픽셀’전은 4월 21일까지 열리고,
충무로 ‘반도카메라갤러리’에서 열리는 윤한종씨의 ‘보이지 않는 존재’는 3월 19일까지 열린다.



글 / 조문호



황규태 ‘PIXEL’





윤한종 ‘보이지 않는 존재’







 

 

 


지난22일, 한 달에 한번 가는 정선 집에 들렸다.
영월 사진축제 가느라 평소보다 일주일정도 앞 당겼다.
개막식에서 저녁 먹고 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작물은 돌아볼 틈 없이 빈 집 청소만 하고 자리에 누웠다.
시간이 없어 군불 때지 않고 잤더니,
온 몸이 떨려 두시 무렵 잠이 깨 버렸다.

 

 

 



 

먼동 트기를 기다리기란 죽을 맛이다.
티브이도 컴퓨터도 핸드폰마저 없으니, 책 볼일 밖에 없다.
돋보기가 눈을 따르지 못해 30분만 보면 눈이 아프다.
영월에서 가져온 ‘동강사진축제’도록이나 뒤적이며 시간 죽인다.
드디어 동창이 밝아왔다.

 

 

 




밖에 나가 농작물부터 살펴보았다.
고추, 오이, 도마도, 옥수수 등 모든 작물의 성장이 멈춰있었다.
그 동안 한 두 차례 비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이곳만 피해간 듯하다.
간밤에 걸린 감기로 코를 훌쩍여가며, 물 조리 춤을 추었더니,
어느 듯 따가운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사실, 다른 야채농사야 지어도 원가도 나오지 않는다.
심을 때 모종 값만 칠 팔만원 들어가는데,
농약을 치지 않으니, 병충해 때문에 수확을 제대로 못한다.
차라리 고생 안하고, 그 돈으로 시장에서 사먹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
그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잘 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틈틈이 수확하여 정영신씨께 상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공해 야채 받고 좋아하는 표정에 온 몸의 피로가 싹 풀려버린다.

 

 

 

 

라면을 끓여 허기를 메운 후, 제초작업에 들어간다.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은 다 그대로인데, 왼 놈의 잡초는 그리도 잘 자라는지...
허리가 아파 앉은뱅이 의자를 끌고 다니며 일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발가벗고 한들 어떠리...
한낮이 되니 더워서 더 이상 일 할 수가 없었다.

 

 

 

 

시원한 냉수 한 바가지로 땀 좀 식히고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며 사물을 살핀다.
일하느라 눈 맞추지 못한 사물들과 교감을 나눈다.
탁자 위에는 오디가 떨어져 새똥처럼 굳어버렸다.
봐주는 사람 없어 혼자 노는 장미가 반긴다.

 

 

 

 

화장실은 숲이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문 열고 일보기 딱 좋은데, 똥 누며 보는 자연의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그런데, 새소리가 귀가 막힌다.
무슨 새인지 모르나, 어느 악기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다.
한 놈이 째째째째~ 긴 노래를 부르니, 다른 놈은 까르르르 받아친다.
가끔 뻐꾸기가 뻐꾹~ 뻐꾹~ 추임새까지 넣어준다.
이렇게 자연과 노니는 시간이 좋아 만지산에 눌러 앉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외로워서 못살겠다.

 

 

 

 

 


요즘은 님마저 발길이 뜸하니,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서울에 숨겨놓은 것도 없는데, 뭐가 급한지 떠날 채비부터 한다.
동자동도 인사동도 기다리지 않는데, 혼자 짝사랑한다.

 

 

 



 

떠나기 전에 산소에 들려 술 한 잔 올리며 울 엄마께 하소연했다.
“아따! 햇님이 힘 좀 실어주라고 그래 부탁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떠랐뿌요?”
“야 이놈아! 산꼭대기 누워있는 내가 무슨 힘이 있노?”
하나 마나인 소리 주고받으며 시름 달랜다.

 

 

 

 

 


따놓은 상추와 고추 잎을 차에 실고 서울로 줄행랑쳤다.
그날따라 어둠이 몰려오는 조양강 풍경이 낯설었다.
평창올림픽으로 생겨 난 교각인데, 그동안 무엇이 바빠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나 둘 세상은 변해 가고 있었다.

 

 

 

 


황규태선생의 '묵시록'처럼 사람은 없고 살풍경만 있었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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