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아산을 떠나겠다며 동자동으로 돌아왔으나 며칠을 넘기지 못한다.

 

주말에는 서울 볼 일이 많기도 하지만, 언덕에 고개 숙인 대마가 눈에 밟혀서다.

서리 맞기를 기다렸으나, 욕심이 또 다른 욕심을 부를 것 같았다.

 

지난 일요일 상경했으나 이틀 후에 다시 아산 작업실로 달려간 것이다.

사람들로 부산한 시간보다 혼자 즐기는 소소함이 행복하다.

 

아침 햇살 사이로 내리 깔리는 음악도 감미롭지만,

여기저기 흐트러진 식물이나 사물에서 이런저런 사유의 늪에 빠져든다.

 

빛바랜 백일홍의 모양에서 허물어져 내리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서리 내리기를 기다리는 국화 봉우리에서 실 날 같은 소망도 가져 본다.

 

화려하게 핀 꽃보다, 지는 꽃의 애잔함이 더 가슴을 파고든다.

 

일산 사는 동생이 조카 지향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다 눈을 감아 편안한 안식을 빌었지만,

남은 가족들의 아픈 상처를 어쩌랴!

 

아픈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친구 한봉림씨가 작업실을 방문하겠다는 전화를 했다.

 

그래, 옛이야기나 나누며 못다 한 정이나 나누자.

한 번 가면 다시 못 올 인생이 아니던가?

 

사진, / 조문호

한국현대도예 1세대 작가 한봉림, 흙-불 다뤄 물질 상상력 속 조형 시각화

한국현대도예 1세대 작가 한봉림 초대전이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봉림씨는 '영원한 운동’ 작가와의 대화에서

"작가는 쓸 데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예술이고 도예"라고 말했다.

도예는 늘 실용성과 관계지워져 왔기에 현대 도예는 ‘용도’를 벗어나 예술을 추구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작가는 1979년 공간예술대상전에서 현대 도예로 대상을 수상함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작품은 두터운 천이 주름잡힌 모양새의 조형성으로

자연스러운 굴곡을 형성하면서도 전통적인 색감과 미감을 곁들여 주목을 끌었다.

그의 시도는 한국 현대 도예의 새로운 장르를 여는 것으로 촉망을 받았다.

 

1974년 원광대학교에 도예과를 창설하면서 내려 온 그는

한국 최고의 도예과로 부상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자비로 1992년부터 개최했던 국제도예캠프는 96년도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과 동시에 국제적 방향으로

현대 도예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2015년 전북도립미술관 아시아현대미술전 당시 그는 높이 2m 쯤 되는 ‘장승’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것은 칼라풀하고 불규칙한 크기의 사각 형태를 2개의 수직 기둥으로 쌓아올린 작품이었다.

또한 매우 현대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영원한 운동>, 1986, 조합토, 망간유, 물레 성형, 62&times;130&times;90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의 작가 정신은 장르를 초월하는 성향을 갖는다.

그는 현대 도예의 성향을 도예라는 카테고리에 담아두기를 원치 않는다.

 

2017년 전북도립미술관 원로작가전 때에는 20여 개의 대형 평면에

즉흥적으로 뿌린 단청 물감의 흔적을 내보여 흥미를 끌었다.

순간적인 물감의 튀김과 번짐, 흘러내림을 그는 자유로운 예술 행위로 표현하고 있었다.

 

전북의 미술을 각성시키자는 취지로 펼치는 AX 그룹 운동에도 참여하면서

젊은 작가들 못지 않게 새롭고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원한 운동-7>(1986), 47*48*45, 조합토, 판 성형,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윤영필 학예사는 “한 시대를 앞서 간 외국 명문대학은 대부분 지역에 있고 전공에 따른 명문학과 역시 대체로 지역 도시에 존재한다. 한봉림의 열정은 일찍이 원광대에 부임해 도예 명문학과를 만들고 역량 있는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전문가로부터 도예과 하면 거론될 정도로 한강이남 최고의 명문 도예과를 만들었다. 전라도에서 흙을 만지고 도예를 배웠다면 그의 손길을 안 거쳐 간 사람은 없다. 그는 끝없이 갈구하며 도예를 진화시켜 나갔다.”고 설명했다. 도예가 한봉림(韓鳳林)은 홍익대 공예과를 졸업하고 공간대상 도예상(1979)을 받은바 있으며 원광대 미술대학 명예교수이자 한국현대도예 거장이다.

 

이애선 전북도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그만의 예술적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전북과 한국 현대 도예에서 잘 평가되지 않은 작가의 도자 세계와 현대 도예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나아가 한국 도예의 동시대적 의미를 재고하는 계기가 되기를기대한다”고 밝혔다.

 

<무제>(1979), 36*80*36, 조합토, 판 성형, 개인소장

전시 리뷰 대부분을 '전북도민일보'에 게재된 미술평론가 장석원씨의 글을 옮겼는데,

그는  전시 개막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전북 현대 도예사에서 지울 수 없는 기념비적 족적을 남기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서 한국 현대 도예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작가 정신을 온전히 보여주는 전시로 기록될 것이다.

그가 시도해 왔던 현대 도예로서의 창의적 정신은

예술이 우리 가슴에 살아 있는 한 지속적으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도예가 한봉림

이 전시는 2023년 3월 5일까지 열린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금천뉴스, 시대일보, 뉴스1

 




현대도예의 거목 한봉림씨가 요즘은 그림 삼매경에 푹 빠졌다. 
작년에 완주 작업실에 가보았더니, 완성된 대작들과 진행 중인 작품도 있었다.

아마 원광대에서 정년퇴임하며, 그림에 매달렸던 모양이다.
이미 그만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보여주어, 보는 이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일에는 그가 상경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끼는 몇 안 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인사동에서 전시를 한다는 거다.
그동안 인사동에서 술 한 잔하자는 말은 여러 차례 오갔으나 성사되지 않았는데,
모처럼 친구와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인사동의 ‘인사아트센터’6층으로 올라가니 최범홍씨의 도예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봉림씨와 안문선씨가 먼저 와 있었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 좋았다.
“연을 먹인 器”란 제목이 붙은 최범홍씨의 도예작품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연 먹인 빛깔도 이채롭지만, 도자에 번진 무늬가 신비로웠다.





뒤틀린 도자 작품들도 있었는데, 인상적이었다.
난, 마음이 뒤틀려 그런지, 뒤틀린 작품이 좋았다.
좌우지간, 한봉림씨가 아낄만한 제자였다.






식당으로 옮기는 길에 시장 봐 오던 ‘유목민’의 전활철씨를 만나기도 했다.






‘툇마루’ 된장비빔밥으로 간만에 입맛을 돋구었는데,
한봉림씨는 밥은 거들떠보지 않고 술만 마셨다. 점심은 본래부터 안 먹는다나...
그냥두기 아까워, 두 그릇이나 먹어 치웠더니, 술 들어 갈 자리가 없었다.
낮술에 쥐약인 내가 그 날 살아남았던 이유다.






한봉림씨는 인사동 옛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학창시절엔 연적을 만들어 인사동 필방에 납품한 적도 있단다.
그가 디자인한 독특한 맵시의 연적을 필방주인이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만난 친구가 인사동의 양두 거목인 ‘통인가게’ 김완규 대표와

공화랑’의 공창호 대표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학교 다니는 것 보다 전통 문화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공창호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표구점에 들어갔지만, 김완규씨는 달랐다.
학교를 안 가고 가게를 기웃거리니, 부친께서 가게 점원으로 일시키고,
대신 밤에 가정교사를 불러 공부시켰다고 한다.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장인이란 정규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는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했다.
작업이 풀리지 않아 “내가 왜 이 짓을 하냐?”며 붓을 놓은 적도 있단다.
그렇지만 한봉림이가 누구인가? 그 장인정신은 기어이 뿌리를 뽑는다.






요즘은 밤 그림자에 끌려 다닌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동안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다닌다고 한다.
아내는 “몽유병 환자처럼 어디를 떠돌아 다니냐?“고 타박한다지만,
대붕의 뜻을 누가 알리오.
그가 구상하는 작품이 어떤 울림으로 닥아올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빈 술병이 몇 개나 나왔다.
안문선씨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한봉림씨가 세병은 마신 것 같았다.
이미 고속버스 표를 예매해 둔 터라, 더 마실 수는 없었다.






안국역으로 지하철 타러 갔다.
난 습관적으로 인사동 거리를 찍다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이다.
화가 장흥래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부리나케 지하철로 내려갔는데, 이산가족 찾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빨리 종로경찰서 앞으로 오라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가는 안문선씨를 배웅해 주고, 지하철로 내려와서는 나를 잠시 보잖다.
똘똘 뭉친 파랑새 뭉치를 내손에 쥐어주며, 술 사먹지 말고, 밥 사먹어란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추위를 녹였다.


"고맙다 친구야! 술 안주로 밥 사먹을께..."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9일 오후6시 무렵, 인사동 센터마크호텔 지하 ‘경복궁’으로
60여명의 인사동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사동에서 칠백평이 넘는 전관을 갤러리로 운영하다 망한,
‘아라아트’ 김명성씨가 재기의 깃발을 들고 입성한 것이다.





부도가 나 ‘아라아트’가 중국기업에 넘어갈 때, 가슴을 친 사람은
당사자 뿐 만 아니라, 인사동의 가난한 예술가들도 많았다.






몇 년 동안 무료대관으로 전시를 연 작가도 부지기 수지만,
‘창예헌’이란 인사동 사람들의 모임을 김명성씨가 후원했기 때문이다.
인사동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빈 털털이도 마음껏 취할 수 있었다.






그의 몰락과 함께 모임도 흐지부지해 인사동의 구심점을 잃어 갔는데,
느닷없이 옛 벗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다.






그 명목은 청백리 이 성 구로구청장의 삼선을 축하하고,
현충일 추념식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러 건재함을 과시했던,
가수 최백호씨가 내세우는 孝사상의 효교 모임을 만든다는
쌍권총을 들고 입성한 것이다.






이 날 참석한 분으로는 인사동을 노래하는 강민시인을 비롯하여,
방배추로 통하는 조선의 구라 방동규선생, 원로 만화가 박기정선생,
원로 언론인 임재경선생, 이수호, 박재동, 조경석, 정기범, 강찬모, 신상철,
이미례, 진옥섭, 이 성, 최백호, 김신용, 조해인, 이만주, 김상현, 조준영, 이청조,
임채욱, 정영신, 허미자, 임태종, 공윤희, 송일봉, 김혜련, 최유진, 서길헌, 최 윤,
고중록, 이상훈, 김용국, 전인미씨 등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이 어울려,
완전 잔치 집 분위기였다.






그런데, 전주로 간 음유시인 송상욱씨와 도예가 한봉림씨도 나타났고,
울산에서 황금기와로 유명세를 떨친 기와장 오세필씨가 김위경씨를
데려 오는 등 지방에서까지 올라오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못오게 된 가수 장사익씨는
그 날 만찬비용을 부담하겠다는 등, 다들 김명성씨의 재기를 축하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빠진 분이 너무 많았다.
사정이 있어 못 나왔으면 모르겠으나, 미처 연락을 못 했다면 욕먹을 소지가 있었다.
예전에는 ‘창예헌’ 총무가 일괄적으로 통보해 별 탈이 없었지만
김명성씨가 직접 연락했다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다.






아무튼. 별다른 행사 없이 술 마시며 회포 푸는 자리로는 너무 과분했다.
덕분에 맛있는 음식에다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시고,
‘유목민’으로 옮겨 밤늦도록 흥청댔지만, 뭔가 아쉬웠다.






술이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남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쪽방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거지 행색이 아니라, 바로 거지였다.



 



그래도 인사동이 맺어 준 인연은 아름다웠다.

사진,글 / 조문호





































































얼마 전 도예가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벌인 난장 퍼포먼스로 뒷말이 많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으나,
그 행위 자체에 대리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았다.
더구나 그 난장판에 법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도 의아해 했다.

한봉림씨는 그 난장판을 치우고 정리하느라 사흘이 걸렸다지만,
가족의 원망 받아가며 부글부글 끓인 속은 보나 마나다.
문제는 작품을 망가트리고, 기물을 부순 경제적 손실에 앞서,
퍼포먼스를 폭력으로 이끈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가 없다는 점이다.

차마 두려워서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어린애도 아닌 사람이 여지 것 아무런 대꾸가 없다는 것은
잘 못을 시인하지 못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난 25일 복구 현장을 찍은 몇 장의 사진을 보내며,
껄껄 웃는 한봉림씨 전화에 뱃심 좋은 그의 기질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어이~ 친구! 그 친구가 멋진 작품 하나 만들었어.
뻥 뚫린 구멍으로 울분을 날려 버린 멋진 작품이야!”
“작품제목은 뭔데?”라고 물었더니. 대뜸 ‘미지랄’이란다. 즉 미친놈 지랄이란 뜻이다.

겹 유리창이라 가능했지만, 깨진 유리를 그대로 둔 채, 
사방을 검게 칠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구멍 뚫린 그림도 보수했다지만, 흔적은 조금 남았단다.

그림의 훈장으로...

그동안 속 끓인 사정을 생각하면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파괴 현장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마음의 울화까지 날려버린 호탕함에 속이 후련해진다.
오늘, 서예가 여태명씨가 위로 차 작업실에 들렸다가 그 작품을 보더니.
‘이 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작품은 없다’며 좋아 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깨진 거울에 그림을 그리는 이발소 그림이란 게 있었지만,
그 것이 감추기 위한 그림이었다면, 이건 드러내기 위한 현장 작업이었다.
이 보다 더 힘 있는 현장감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은 떼어 낼 수도 없으니, 구입하려면 집채 사야할 대작이다.

이제 더 이상 가해자에게도 사과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둔다면, 평생 멍에로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일 테니까...

사진: 한봉림 / 글: 조문호



한봉림의 '포말 퍼포먼스' 일화를 모른다면 아래를 클릭하면 된다.


http://blog.daum.net/mun6144/4601



야 이 개새끼야~ 우당-탕 탕술 자리에 난리가 났다.

지난 14일 새벽, 완주 한봉림씨 작업실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술 취해 졸다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꿈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듯 사람은 보이지 않고 고함소리만 들렸다.

소화기 포말 냄새로 보아 불이 난 걸로 착각했다

슨 일로 왜 싸울까 궁금했지만, 꿈 꾸듯 헷갈렸다.

옆 자리에는 자다 깬 송상욱, 이만주, 박인식씨가 놀란 망아지처럼

우두커니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는 사람은 바로 이상훈씨와 김명성씨였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와 의자를 집어던져 벽의 통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화가 서길헌씨는 이상훈씨를 부여 잡았고, 김영국씨는 김명성씨를 떼어놓느라 정신없었다.

그런데 작업실에 있던 한봉림씨가 방에 들어나자

이상훈씨의 화살이 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보니, 이상훈씨와 한봉림씨 싸움 같았다.



    


나이 많은 선배에게 행패부리는 것을 김명성씨가 그냥 두고 볼리 없기 때문이다.

힘에 부친 김영국씨가 손을 다쳐, 김각환씨가 나서서야 간신히 김명성씨를 제압했다.


결정적인 것은 한봉림씨가 2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100호쯤 되어보이는 그림에

술병을 날렸는데, 캠퍼스천을 뚫으며 액자가 바닥에 나 뒹군 것이다.





간신히 이상훈씨가 밖으로 밀려 나가서야 사태가 수습되기 시작했다.

김시인씨가 쓰레기를 한데 끌어 모아 대충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진 찍을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카메라를 들고 놀았으나, 왜 그 기막힌 현장을 찍지 안했을까?

무의식적으로 카메라에 눈은 갔으나, 차마 잡을 수 없었다.

벗들이 죽자 살자 싸우는 그 다급한 판에 어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사진은 냉정함을 요하니, 차라리 사진가이기를 포기하는 게 낳겠다.



   


뒤늦게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한봉림씨의 술 취한 퍼포먼스를 이상훈씨가 과잉 대응한 것 같았다.





다들 하루종일 술을 너무 많이 퍼 마셨다.

낯부터 전주 막걸리골목에서 마시고, 한봉림씨 댁에 준비된 술은 물론 비축주마저 씨를 말리지 않았던가.

자정이 지나서는 그마저 없어져 콜택시에 연락해 전주에서 소주 한 박스와 맥주 두 박스를 사 오게 만들었다.

얼마나 기분좋게 놀았는지, 내 생애 최후의 화려한 만찬이라 했다가,

그 자리에 정영신씨가 없어 최후란 말은 거두었다.




 

술 마시며 재미있게 놀다 분위기가 식은 시간은 새벽 두시 무렵이었다.

두시부터 시작되어 새벽 네 시 무렵에야 사태가 진정 되었으니,

무려 두 시간 동안 난장을 벌인 것이다.



 


분위기가 시들해서 포커 판을 벌였는지,

포커 판 때문에 술자리 열기가 식었는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이상훈씨등 네 사람이 벌인 포커 판이었다.



 


나 역시 포커하는 게 싫어 자리에 누웠지만, 다들 그 때부터 술자리에서 물러난 것 같았다.

그 무렵, 작업실에 있던 한봉림씨가 갑자기 소화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벽난로의 불이 옮겨 붙는 착각에 소화기를 잡았는지 모르지만,

느닷없이 포커 판 쪽으로 소화기를 쏜 것이다.



 


그래서 직격탄을 맞은 이상훈씨가 난리를 친 것이다.

하나의 퍼포먼스 였으나, 이상훈씨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다.

차라리 하얀 눈가루를 맞으며 춤이라도 너울너울 추었으면 좋으련만...




 


무작정 한봉림씨에게 욕하며 달겨드니, 김명성씨가  빰을 몇 대 때렸다고 한다.

그래서 분풀이로 기물을 때려 부수며,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되고 나니, 사고 친 이상훈씨를 비롯한 다섯명은 콜택시를 불러 탈출하고 없었다.

미처 차를 부르지 못한 김상현씨는 아코디온과 기타 통을 둘러메고 한 시간 반을 걸어 읍내까지 나갔다고 했다.

어두운 눈길을 걸어가며, 살아남은 유랑악단의 설움을 절절히 씹었을 것이다.





그 난장판을 피한 사람도 있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간 전활철씨 가족과 김혜련, 황예숙씨만

그 사실을 깜쪽같이 몰랐는데, 현장을 확인하고 아연실색했다.



 


남은 사람이라고는 김명성, 서길헌, 김영국, 송상욱씨 등 다섯 명인데,

이불은 소화기 가루가 뿌려져 버슥 버슥했지만 그 위에 쓰러져 잠시 눈을 붙여야 했다.





아침 무렵, 한 숨 자고 나온 한봉림씨가 현장을 보고 한 말이 죽인다

하하하~ 대단한 퍼포먼서였어


포말가루 자욱한 컵들을 씻어 커피 한 잔씩 마셨으나, 한봉림씨는 남은 맥주로 속을 풀어야 했다.




 

한참 후, 버스타고 올라가며 보내오는 메시지도 각양각색이었다.

화가 강찬모씨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날아가는 나비만 보았다고 적었고,

무용평론하는 이만주씨는 소화 분말을 많이 마셨더니, 속에 있는 울화가 다 사라졌다고 적었다.





 

인사동 풍각패의 유랑 길에 어찌 이 정도의 풍파를 거세다 할소냐?



 

 

전주로 유배 떠난 지가 몇 달된 음유시인 송상욱씨께 위문공연 가자는 이야기는 지난 년 말부터 나왔다.


난, 새해 첫날부터 감기에 걸려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년초에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근일 간에 전주 가야하는데, 전주 가는 날을 형이 잡아라고 다잡았다.

일주일 후에는 감기가 나을 것 같아 토요일로 정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감기도 완쾌되지 않았지만, 창원의 양철수씨가 보냈다는 택배를 받아 노숙인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데,

빼도 박도 못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구체적인  일정이나 누가 가는지도 모른 채강남고속터미널로 나갔더니,

이만주씨와 김상현씨가 먼저 나와 있었다.



 


주모자인 김명성씨가 무작위로 불러 모은 사람이 공교롭게도 십 팔명이었다.


십 팔년의 첫 유랑 길에 십 팔명이 떠난다는 암시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진 모르지만,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아무튼 괜찮은 년일 것 같은 예감은 들었다.





뒤이어 박인식, 김혜련, 황예숙, 김시인, 서길헌, 김각환, 이상훈, 김영국, 이만주,

강찬모, 전활철씨와 아들 시원이, 딸 예원이 까지 다양한 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사동 창예헌농심마니 팀으로 이루어 진 잡탕이었.



 


전주터미널에 도착하니, 송상욱선생과 한봉림씨가 나와 있었다.

첫 코스는 송상욱선생 작업실이 있는 전주 막걸리 골목이었다.

처음들린 집이 옛촌 막걸리였는데, 공교롭게도 바가지 집이었다.






술에 안주가 따라 나오는 게 아니라 안주를 시켜야 술이 한 주전자씩 나왔다.

많은 안주를 시킬 수 밖에 없어 잠깐 동안 마신 술값이 무려 40만원이나 되었다.

전주의 맹주 한봉림씨가 내려는데, 김명성씨가 먼저 내버려 구역침범했다며 화를 냈다.

그보다 엄청난 바가지 골목이 되어버린 막걸리골목의 못된 장삿속에 더 울화가 치민 것 같았다.

인터넷에 올려 아무도 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펄펄 뛰었다.





그 자리에서 황예숙씨는 송상욱선생께 도예작품을 이주선물로  전하기도 했다.

이어 송상욱씨의 재미있는 노래와 김상현씨의 구성진 연주가 이어졌다.


“사랑이 좋으냐 친구가 좋으냐?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 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이어지는 열두냥짜리 인생도 들었고, 김상현씨가 부른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도 들었다.



    


지척에 있는 송상욱선생의 무대로 옮겨갔다.

입구에는 송상욱선생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무무놀랑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안에는 송상욱선생께서 노래 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 져 있었고,

부인이 춤 출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벽에다 거울을 붙여 그런지 엄청 넓어 보였는데, 더 놀라운 것은 가게 임대료였다.

한 평도 되지 않는 쪽방  임대료가 23만원인데, 그 넓은 작업실이 한 달에 20만원이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송상욱선생의 아내인 김미옥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인사동 아라가야에서 처음 만난 지가 벌써 10이나 흘렀는데,

세월이 빠른 건지, 사는 게 급한 건지, 나도 모르겠.


김미옥여사가 준비한 다과에다 보드카도 한 잔 씩 마셨다.

방음된 공연장에서 듣는 아코디언 연주와 노래소리는 좀 달랐다.  

역시 뽕짝은 술집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부르는 맛이 좋더라.



    


늦을세라, 한봉림씨 아지트가 있는 완주 소양면 종남산 자락으로 옮겼는데,

그런 귀 막힌 퍼포먼스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앞서 말했지만, 그 날만큼 재미있게 논적도 드물었다.

유목민주인장 전활철씨의 노래도 한 몫했다.

달래듯, 빈정대듯 하소연하듯 상대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며 부르는

쌍팔년도 포크송에 세 여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다양한 춤이 어우러진 가무 또한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을 듯 싶었다.



 


그런데 종남산자락의 집터가 샌 것인지, 오래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창예헌가을여행과 농심마니산행이 겹쳐진 10년 전에도

이곳에 전국각지의 명물 100여명이 모였는데, 그때도 가관이 아니었다.


영화사를 운영하던 임정하씨가 술이 취해 넘어져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고,

관객모독의 연출가 기국서씨가 여우 공격법으로 한봉림씨를 활킨 사건은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의 사건 사고였다.





그 날이 한봉림씨 모친 구순 생신이라 다들 인사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젠 백수를 넘기도록 종남산을 지키고 계시니, 보통 명당은 아닌 듯싶다.



 


한봉림씨의 안 서러운 배웅을 받으며 10시버스로 다들 전주 시내로 나왔다.

콩나물 해장국으로 속을 달랜 후, 또 다시 술집을 찿았다.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술집을 물어물어 갔더니, 가는 날이 공일이라 문이 잠겼다.

하나님 만나러 간다나...





닥치는 대로 찾아 들어간 집은 '구일집'이었다.

생각 밖의 맛있는 음식집이었다. 김밥도 가락국수도 나오는 음식이 모두 맛있었다.



 


오후3시 무렵에서야 서울로 올라오며, 지난 일들을 곱씹었다.


술이 취한 상태지만, 이상훈씨가 너무 무례했다. 그렇게 막 나갈 군번이 아니었다.

젊은 혈기라 그런지 모르지만 나이 많은 선배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 같았다.

좀 지혜로웠다면 소화기를 빼앗아 퍼포먼스를 대신 할수도 있잖은가?



 


그리고 이런 술자리에서 포커판을 벌여서는 안 된다,

일단 돈 냄새나면 역겹다. 꼭 해야 한다면 방을 빌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한다.

어쩌면 호탕한 성격의 노장 한봉림씨의 거침없는 가르침 일 수도 있다.


어떻게 자기집에 찾아 온 손님에게 포말을 쏠수 있냐고 흥분하였지만,

남의 집이 아니고 자기가 청소할 집이니 가능한 것이다.





이번 일은 남의 기물을 망가트린 손해배상에 앞서 진정한 사과가 따라야 한다.

한 쪽 모서리가 터진 작품은, 또 하나의 훈장을 단채 의미를 더할 것이다.





아무튼, 술판의 돈 놀이를 채찍질한 훌륭한 퍼포먼스라 생각된다.

오랫동안 추억할 일이 틀림없으니, 이게 좋은 유랑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소설가에서 미술평론, 희곡, 극본, 시나리오 등 글 쓰는 일이라면 전방위로 활약해 온

박인식씨가 이번에는 ‘겨울모기’라는 시집을 내놓아 주변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한 때 월간지 ‘산’을 비롯해 ‘사람과 산’에서 일한 산악인이었으나,

삼십년 전부터 일 년에 봄가을 두 번씩 전국에 산삼을 심으러 다닌 ‘농심마니’ 좌장 노릇을 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여지 것 TV는 물론 핸드폰, 컴퓨터, 신용카드, 운전면허증 등

일체의 이기를 거부해 온 아날로그 맨 이라는 거다.

그중 제일 불편할 것 같은 게 핸드폰과 컴퓨터일 것으로 생각된다.


핸드폰이야 불편한 대신 이로운 점도 많다. 자신이 필요한 연락은 다른 전화를 사용하면 되지만,

그 외의 전화는 일체 받을 수가 없으니 남의 일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독선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건 그렇다 치고 글 쓰는 사람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다니...

시라면 모르겠으나 소설은 공력이 많이 드는데다 결국은 출판사에서 다시 쳐야하니, 그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 불편함을 모두 참고 끝가지 버티는 집념이 정말 대단 하다는 거다.





‘도서출판 다빈치’에서 출판된 박인식의 ‘겨울모기’시집은 한글 자모를 활용한 시 작업이다.
‘일찌감치 한글의 글꼴을 보는 詩로, 읽는 그림으로, 듣는 말로 여겼다,“는 시인의 말처럼

옛날에는 글씨와 시와 그림을 종이 한 장에 하나로 표현했다. 그래서 인지 그의 시는 그림 같은 시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많은 시작들이 작품을 감상하며 느낀 단상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박인식의 시는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을 한글 자모의 통합으로 표현하면서 사랑의 조건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어울림으로 사랑의 조건을 내 세운다“고 문학평론가 이경호씨는 말했다.

좌우지간 남의 이야기는 제쳐두고, 그의 ’저절로‘라는 시 한 편을 들어보라.






“나를 낮춰 너를 높이는
산의 절
저 절로
산은 산

너를 낮춰 나를 높이는
물의 절
저 절로
물은 물

저절로
저절로“






지난 29일 ‘로마니꽁띠’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는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원로 만화가 박기정 선생, 시인 송상욱, 김명성씨,

‘도서출판 다빈치’ 김영선대표,  문학평론가 이경호씨, 화가 송성묵, 서길헌씨, 도예가 한봉림, 황예숙씨, 사진가 정영신씨,

구로구청장 이성씨. 뮤지션 김상현씨, 사업가 김각환, 이상훈씨등 대략 20여명이 모였다.






시낭송은 물론 송상욱, 송성묵, 김상현, 세 사람이 돌아가며 들려준 흘러간 가요와 판소리, 째즈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음악회에 온 듯 신명난 출판기념회가 되었다.





출판기념회에 오기 직전 ‘툇마루’와 ‘여자만’을 돌아다니며 많은 분들과 어울려 퍼 마셨기에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회비도 받지 않으면서 그 비싼 와인 값은 누가 내는지 걱정스럽더라.

김명성씨 잘 나갈 때 같으면 그까짓 것쯤이야 걱정할 필요도 없으나, 좌우지간 인사동 술꾼들에게 찬 바람 도는 시절이다.

박인식의 시집 제목 ‘겨울모기’는 마치 비실비실 맥 못 추는 인사동 술꾼들을 비유하는 것 같더라.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지난 29일은 술 마시느라 바쁜 하루였다.
전주 문화계 맹주 도예가 한봉림씨가 인사동에 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논산 강경장에서 열리는 보부상축제에 있었으나,
서둘러 저녁시간은 맞출 수 있었다.






오후6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는데,
김명성씨와 장경호씨의 전화가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걸려왔다.
장경호씨는 최명철씨와 ‘툇마루’에 술판을 벌여놓았고,
김명성씨는 한봉림씨를 맞이해 ‘여자만’에다 술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오후7시엔 ‘로마네꽁띠’에서 열리는
소설가 박인식씨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있지 않던가.






먼저 들린 ‘툇마루’ 입구에는 화가 장경호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새김아트의 창시자 정고암씨의 모습도 보였다.
제주를 다녀 온 최명철씨는 짐 보따리를 옆에 둔 채 술을 마셨다.





급히 막걸리 두 잔만 연거푸 마시고 일어나려니,
최명철씨가 한봉림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안주가 그대로였으나, 술 잔만 비운 채 옮겨야 했다.






‘여자만’에 들려 오랜만에 한봉림씨를 만났다.
몇 년 만인지 아득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여유 있는 너털웃음에 세상설음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전주로 이사 간 송상욱시인도 와 있었고,
김명성, 김상현, 김각환, 이상훈씨 등 반가운 분들이 많았다.
회와 탕 등 안주를 잔뜩 시켜놓았으나,
다들 박인식씨 출판기념회 때문인지 마음이 바빠 보였다.






한봉림씨만 ‘여자만’에 남아 장경호씨와 어울려 마셨다.
그 날 따라 가는 곳 마다 술상이 푸짐했으나, 다들 술꾼들만 있어 음식이 줄지 않았다.






담배 피우고 돌아오니, 한봉림씨는 옆 자리 분과 합석해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어 보니, BMC 대표로 있는 조민제씨 였다.
함안 조가의 제자 항렬이면 대개가 일가이기도 했으나, 폐친이라 더 반가웠다.
건너편 자리에는 김종철씨와 신학림씨의 모습도 보였고,

그날따라 눈에 익은 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난 출판기념회에 걸려 술자리가 편치 않았다.
한봉림씨가 기꺼이 자리에 남은 것도, 남은 사람이 마음에 걸려서 일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어쩌랴!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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