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화랑' 개관식에 참석한 원로사진가, 왼쪽 네째 이경모선생, 다섯째 임인식선생, 일곱번째 이해선선생, 열번째 성두경선생 / 임인식사진

인사동에 ‘눈빛사진산책’ 갤러리인덱스‘가 개관했다는 사실은

인사동에 불어오는 한 가닥 봄바람이 아니라 사진바람이다.

 예술 일번지에서 사진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동선생을 비롯한 원로사진가들이 인사동거리에 나섰다.

사진가들이 인사동을 드나들 때는 시인이 몰려들던 천상병선생의 ‘귀천’시절보다 훨씬 이전이다.

 

'북스갤러리'에서 열린 '인사동, 봄날은 간다' 전시 개막식에서...

1959년, 종군기자로 활동한 임인식선생께서 관훈동에 사진전문 갤러리인 '신한화랑'을 개관하며 비롯되었다.

임인식선생을 비롯한 성두경, 이해선, 이경모씨 등 작고한 원로사진가들이 자주 회합한 장소였다.

 

임인식선생게서 찍은 1953년의 인사동 거리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진 문화 발전을 도모하며 사진 아카이브 개념을 선도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인사동에 최초의 사진 화랑을 만든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옛 인사동 예총회관 앞 포장마차에서... 좌로부터 고영준, 조문호, 윤재성, 유성준

내가 부산에서 올라와 인사동과 인연을 맺은지는 1980년도 였다,

그 이전에 있었던 사진가들의 인사동 왕래는 알 수 없으나 남인사마당 맞은편 ‘예총회관’에

사진협회가 있어 사진인의 왕래가 잦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예총회관’에서 가까운 건물에 ‘꽃나라’라는 흑백현상소가 있었다.

 

인사동 골목에서... 고영준씨와 정영신씨

신작가로 불린 신희순씨가 운영한 ‘꽃나라’는 많은 사진인들이 몰렸다.

그곳을 왕래하는 사진인들이 ‘진우회(초대회장:양은환)’란 사진동아리를 만들었으니,

진로회 아닌 ‘진우회’가 인사동을 거점으로 활동한 최초의 사진 모임이었다.

 

'85동아미술제' 시상식에서, 좌로부터 고영준, 신희순, 양은환, 홍순태, 조문호, 정동석, 유성준

‘꽃나라’를 운영한 신희순씨는 참 성실하고 착한 분이었다.

촬영자의 뜻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프린트해 신작가란 별명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암실에서 인화하는 걸 보면 귀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래된 시커먼 약물에서 건져내는 인화지에 상이 드러나는 것이 신기했다.

 

옛 진우회 회원들이 인사동에서 만났다., 좌로부터 유성준,이혜순,정용선,김종신,목길순,김흥묵,하상일,최성규,배창완,조문호

모든 게 정해진 데이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감으로 결정하는데,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몽타쥬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한번은 하이포 약물통을 비워 보니, 약물에 쥐가 빠져 죽어있었다고 한다.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린 박옥수씨 개인전에서 장사익씨가 축가를 부르고 있다

‘꽃나라’ 신희순씨의 인화는 콘트라스트가 강해 사진 계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인화 가격이 재료비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싸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주변에서 찍은 기념사진들은 맡겼으나, 필름 현상만은 맡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프린트된 사진들이 공모전 심사위원의 눈에 들어 줄줄이 당선되는 것을 어쩌랴!

명암이 강하면 일단 눈에 먼저 들어오니까...

 

인사동에 촬영 나온 안00, 이용정씨와 이기윤씨

‘꽃나라’ 암실에서 탄생한 대상 작가는 한 둘이 아니었다.

양은환씨와 이기윤씨가 국전에서 바뀐 '한사전'에서 대상을 받았고,

윤 옥, 이혜순씨는 ‘동아살롱’ 금, 은상을 수상하는 등 주요 공모전을 ‘꽃나라’에서 휩쓸었다.

 

'토포하우스'에서 열린 권철개인전에서,,,이규상, 김지연, 김남진, 정영신, 권철, 곽명우, 엄상빈 등

그러나 ‘꽃나라’를 운영한 신희순씨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토록 건강한 사람이 유명을 달리 한 것은 바람이 통하지 않는 암실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 약물중독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진이 그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인사동 거리에서... 좌로부터 김보섭, 정영신, 한정식선생

아무튼, 만 명이 넘는 공룡집단이 된 지금의 사진협회 회원 모두가

작가의 주관이 결여된 공모전이란 과정을 거쳐 모였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구와바라 시세이 수상전에서,,,좌우로 김남진씨와 이규상씨가 있다.

이웃한 낙원동에는 민태영씨가 운영한 ‘한국사진학원’이 있어

지도교수로 있던 성낙인, 유동호씨도 종종 나타나셨다.

 

인사동 '양반집'의 원로 사진가 오찬모임, 좌로부터 한정식, 이완교, 이명동, 차용부, 황규태, 이기명

‘꽃나라’에 자주 방문한 사진인으로는 원로사진가 김대현, 정철용씨를 비롯하여

고영준, 양은환, 유성준, 김계산, 정동석, 정영신, 하상일, 이수영, 정용선, 윤 옥, 김종신, 박만재, 정철균

이혜순, 안영상, 변홍섭, 이기윤, 윤재성, 김정혜, 김순자, 민정진, 윤 옥, 고 헌, 최수영, 최성규

진대원, 배창완, 한상근씨 등 오래되어 이름도 가물가물한 많은 사진인들이 드나들었다.

 

인사동 벽치기골목의 '유목민' 에 모인 이광수, 한금선, 성남훈씨, 김문호씨 전시뒤풀이에서...

저녁 무렵이 되면 인사동의 삼겹살집이나 시골집에 모여 앉아

사진협회 비리를 안주 삼아 회포를 풀던 추억들도 아련하다.

 

'부산식당' 전시뒤풀이에서 고헌씨가 춤을 추고 있다. 옆엔 전상삼씨가 앉았다.

85년도 무렵 ‘귀천’이 생겨나며 사진인보다 문인이나 화가를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분으로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선생이 계셨고,

뒤를 이어 김동수, 이계익, 심우성, 강 민, 채현국, 황명걸, 이호철선생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적음스님에서 부터 강용대, 김종구에 이르기까지

전설처럼 인사동을 떠돌던 많은 분들이 이승을 하직했다.

 

옛 ;실비집'에서 찍은 기념사진. 실비대학 총장 모녀와 김종구, 김민경씨

김종구씨는 수시로 '실비집'이나 '시인통신'에 들려

오가는 거지 예술가들 술값을 도맡았으니,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육명심, 이명동, 한정식선생, 뒤에 이완교씨와 전민조씨도 보인다

87년도 '민주항쟁' 시절엔 김종구씨에게 필름도 많이 얻어 썼다.

필름이 떨어 져 인사동 ‘귀천’에 죽치고 있으면 체류탄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와

진토닉 한 잔으로 분노를 삭혔다.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김영수 유작전에서.. 좌우로 곽명우씨와 정범태선생

박한웅씨도 한 때 인사동을 풍미했다.

사진가는 아니지만 당시 '사협' 회보 편집장으로 일하며

 사진판과 인사동 패거리를 오가며 여러가지 일화를 만들었다.

 

'실비집' 골목에서.. 좌측이 박한응씨고 그 옆은 조해인시인

사진인 모임은 술값을 똑같이 나누어 내지만, ‘실비집’ 술자리는 돈 있는 사람이 냈다.

돈 낼 사람이 없으면 외상도 통하는 인간적인 면이 참 좋았다.

 

인사동 '초당' 앞에 선 주명덕 선생

주명덕, 육명심선생도 인사동을 자주 찾으셨다.

주명덕 선생은 ‘초당’이 단골인데, 차보다 초당 보살이 더 좋았는지 모른다.

나도 그랬으니까...

 

'갤러리 나우' 옆에 사진가들이 모여있다.

육명심선생은 ‘갤러리나우’를 기점으로 '전각갤러리' 등 들리는 곳이 많았는데,

한번은 ‘백상사우나’까지 따라붙은 적이 있다.

목욕사진을 찍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경찰관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사동 '백상사우나'에서 찍은 육명심선생

인사동은 예술단체가 모여 있었다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남인사마당 맞은편의 포도대장 터에는 초창기 ’예총회관‘이 있었고,

80년대 중반에는 ‘민미협’이 생겼고, 88년에는 ‘민예총’이 건국빌딩에 둥지 틀었다.

 

인사동거리에서...한정식선생과 이완교선생

94년에는 고 홍순태선생이 총대 맨 ‘민사협’이 북인사마당 크라운베이커리 2층에 자리 잡으며,

예술 판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졌다.

 

인사동 '쌈지'를 배경으로 포즈 취한 김영수씨

김영수씨가 주도적으로 이끈 ‘민족사진가회’는 정범태, 주명덕, 홍순태, 이창남, 박옥수,

이갑철, 김광수, 양성철, 김영태, 정인숙씨 등 많은 사진가를 규합하여 활동했는데,

정기적인 기획전 외에도 한국사진사를 대표하는 굵직한 기획전도 여러 차례 열었다.

 

인사동 '관훈미술관' 앞에 선 정인숙씨

인사동에서 거주한 사진가로는 김영수, 정인숙씨가 유일하다.

‘민사협’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콧구멍만한 방 하나와 암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김영수씨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민사협’은 10년을 넘기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물 같은 그 잡동사니와 집기들은 잘 있을까?

 

인사동 '이즈갤러리' 앞에서 만난 곽명우씨

그 당시 곽명우씨는 ‘민사협’의 행사 기록을 맡아 사진전이 열릴 때마다

전시장을 들락거렸으니, 누구보다 인사동과의 인연이 많은 편이다.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권태균사잔전에서... 좌로부터 박옥수, 정범태, 권태균

사진 모임에 끼이지 않는 사진가로는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씨와

곤충사진가 이수영, 자유기고가로 활동한 이만주, 하형우, 김문호씨가 전부인데,

김문호씨는 이구영선생의 ‘이문학회’ 회원이라 주기적으로 인사동을 들락거렸다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김문호씨의 '풍리진경' 사진전에서..

2000년대의 인사동은 사진의 전성기였다.

2003년 김영섭화랑이 생겨나며 일본의 호소에 에이코사진전이 개관전으로 열렸고,

2006년은 ‘갤러리 나우‘의 개관에 이어 2007년은 ’갤러리룩스‘도 개관했다.

 

'갤러리나우'에서 열린 박진호씨의 '내가 저달을 훔쳤다'전에서 박진호씨가 양재문씨를 소개한다.

인사동에 사진전문화랑만 세 곳이나 생긴데다, 돌아가신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의 ‘밝은방’과

사진평론가 진동선씨가 기획한 ‘하우포토’도 인사동에 있었다.

'밝은 방'에서는 한정식선생 제자인 김정일씨의 사진강좌도 있었다.

 

한정식선생의 작업실 '밝은 방'에서.. 옆에 안미숙씨도 있다.

그리고 한정식선생께서 정기적인 사진인 모임을 만든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명동선생을 모시는 오찬 모임 외에도 가까운 분들과 신년 모임을 갖는 등

틈틈이 사진가들을 인사동으로 불러 모아 친목을 도모했다.

 

'양반집' 오찬회, 좌로부터 유병용, 한사람 건너 이명동, 한정식, 이기명, 김녕만,이완교, 황규태선생

초청하는 인사로는 이명동선생을 비롯하여 육명심, 황규태, 이완교, 차용부, 구자호,

최재영, 유병용, 김녕만, 김영수, 윤세영, 이기명, 최경자, 이규상, 전민조, 김보섭, 이재준,

김생수, 엄상빈, 정영신씨 등의 사진가들이 인사동 ‘양반집’이나 ‘수연’에서 주기적으로 만났다.

 

'양반집' 오찬모임, 좌로부터 이완교, 최재영, 이명동, 구자호. 한정식. 유병용, 이기명, 김녕만씨

2011년부터 인사동에 차 없는 거리가 실시되며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이상한 거리로 서서히 변해가며 인사동의 사진 문화도 퇴행 길에 접어들게 된다.

 

김영섭씨가 '김영섭화랑에서 포즈를 취했다. (장성용사진)

인사동에 살가도와 브랏사이, 브레송, 빌 브란트, 로베르 두아노, 로버트 프랭크, 게리 위노그란드 등 세계 사진사에 남을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유치하여 사진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김영섭화랑’이 먼저 문을 닫았고, 2015년에는 심해인씨가 개관한 ‘갤러리 룩스’도 옥인동으로 옮겨갔다.

 

'갤러리인덱스' 최건수관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낸다.

옮겨간 ‘룩스’를 최건수씨가 인수하여 ‘인덱스’로 바꾸었으나, 대관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순심씨가 개관한 ‘갤러리 나우’도 사진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원룸 원포토' 캠페인을 벌이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2020년 2월, 14년간의 인사동 시대를 접고 강남으로 옮겨 사진에서 미술로 전향해 버렸다.

 

'갤러리나우' 이순심관장

인사동을 오가며 기록하는 사진인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이기윤씨와 김순자씨는 주말마다 ‘인사아트센터’ 앞에서 지나치는 이들의 표정을 망원렌즈로 포착했다.

때로는 정운봉, 이용정, 정철용씨 등 원로사진가들도 함께 있었다.

 

'인사아트센터' 앞이 촬영 대기실인가? 이용정씨와 이기윤씨가 보인다.

그렇게 열심히 기록하던 이기윤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는데,

그 많은 사진 자료들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인사동에 있었던 '김영섭화랑 '

한때 ‘한사전’ 대상 수상 작가라는 영광도 아무 소용없었다.

반평생을 사진과 살았으나 개인전은 물론 사진집 한 권 내지 않았다.

하기야! 팔리지 않는 전시나 사진집 만드는 것 또한 자뻑에 불과하니까...

 

인사동 사진출력실 '아트온'을 방문한 인사동 사람들, 좌로부터 전활철, 김의권, 변형주, 김언경씨

89년에는 ‘툇마루’ 옆 건물 5층에 ‘카메라워크’란 취재대행 업소를 차려 ‘한국환경사진가회’ 사무실도 겸했다.

공덕동에서 충무로로 떠돌다, 2010년부터  정영신씨와 함께 '아트온'이라는 사진출력소를 다시 차렸다.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린 '청량리588'사진전에 사진수강생들을 데리고 온 최건수씨

그 외에 인사동에서 업소를 운영한 사진가로는 고미술점 '하가'의 윤옥씨와

출판사를 운영한 안영상씨, 그리고  ‘구름에 달 가듯이’란 카페를 운영한 김수길씨가 있다.

 

'갤러리인덱스'가 있는 인덕빌딩

그리고 건물주와의 오랫동안 분쟁에 휘말렸던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KOTE’에서

성남훈씨를 비롯한 젊은 사진인들의 활약도 이어지고 있다.

 

'나무화랑에서 열린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전시에서... 좌로부터 이규상,양시영

지금은 양한모씨가 운영하는 마루아트 ‘아지트’와

‘눈빛‘ 안미숙관장이 운영하는 ‘갤러리인덱스’가 사진갤러리로 남았다.

 

지난 11일, '갤러리인덱스'가 재 개관하며  ‘그해 겨울은 따뜻 했네’로 막을 올렸다.

1948년 겨울, 이름도 모르는 어느 미군이 촬영한 소중한 기록이다.

 

그리고 '눈빛'에서 출판한 800여종의 사진책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진귀한 사진집을 골고루 만날 수 있으니, 도랑치고 게잡는 일이 아닌가. 

인사동 가는 길에 32계단의 '눈빛사진산책' 하자.

 

‘그해 겨울은 따뜻 했네’는 2월 13일까지 열리지만, 인사동 사진바람은 계속분다.

 

G A L L E R Y I N D E X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인사동길 45. 인덕빌딩 3층 02-722-6635

사진, 글 / 조문호

 

인사동 '수연' 에서 열린 신년오찬회에서...
찻집에 들린 사진가들, 좌로부터 김생수, 이재준, 김보섭, 전민조, 이규상, 엄상빈, 한정식선생

 

며칠 전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이 잡혔다는 정 동지의 연락을 받았다.

찾아뵌 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개월이 훌쩍 지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더니, 정말 총알처럼 빠르다.

 

선생께서는 부엌일 돕는 분의 요리솜씨가 형편없어 하루에 한 끼는 꼭 외식을 하신다.

혼자 식사하러 가시기가 편치 않으신지 가까운 지인들에게 가끔 연락하신다.

복요리를 좋아해 그 날도 ‘초원복집’에 갔는데, 종업원 서비스가 여간 아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다 돌아가신 사진계 선배 M씨의 유작전이

인사동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전해 드렸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웬만하면 돌아가신 분 욕은 하지 않을 텐데, 대뜸 사기꾼이란 말씀부터 하셨다.

 

잔 재주를 잘 부려 평소 상종을 하지 않았는데,

82년 무렵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을 제작한다며 작품 두 점을 보내달라기에

사진사용에 따른 원고료를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당사자 반응에 더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을 제작하여 큰 돈을 벌었는데,

"우리나라의 내로라는 화가들도 돈 싸들고 와 작품 넣어주길 부탁했는데,

그냥 실어주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원고료는 무슨 원고료냐?"는 말을 하더란다.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는데, 세 번이나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와

거절하지 못한 게 지금도 후회 된다는 말씀이셨다.

 

하기야!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가인 한정식선생 작품이 들어가지 않고

어찌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사진원고를 부탁하면서 필름원판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전체 인쇄 농도를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는데, 문제는 필름을 다루는 사진가의 자세였다.

비슷한 사진 세 컷이 담긴 120필름 한 줄을 보내주었는데,

필요한 한 컷만 분리하기 위해 토막을 내어버렸다.

그 것도 가위로 정교하게 잘라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찢은 것이다.

나중에 필름을 돌려 받아보니, 찢어진 선이 아슬아슬하게 이미지를 스쳐갔더라.

 

그리고 책을 발간한 후 전국으로 끌고 다니며 순회전을 한 것도 차기 ‘사협’ 이사장을 노린 포석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전시가 끝났으면 사진은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충무로에 건물도 가진 재력가인데, 돈이란 결코 좋게 벌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그 분과의 인연은 끝나야 했는데, 좁은 사진판에서 끝낼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85년 ‘사협’ 이사장에 당선되어 ‘사협’ 편집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월간사진’에서 그만두고 ‘청량리588’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땐데,

돈이 아쉬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당시에는 ‘사협’에서 나오는 회보가 사진 잡지라기보다 소식지에 가까웠다.

'사협' 총무가 소식들을 주워 모아 인쇄소로 보내 만드는 책인데,

편집장이란 직책까지 둔다기에 생각 자체가 가상한 일이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거기에도 개인적인 욕심이 깔려 있었다.

매달 권두언을 쓰려니 대필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자리를 받아들인 게 탓이었다.

한 이년 정도 일하는 동안 ‘사협’에서 벌어지는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목격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만 둘 수 있는 핑계거리가 생겼다.

‘87 민주항쟁’ 개인전을 하려는데, 이사장이 못하게 제지한 것이다.

‘사협’에 근무하면서 어떻게 그런 전시를 할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귀가 막혔다.

사진하는 선배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미련 없이 사표내고 전시를 강행했는데, 그 뒤부터 그 이를 사진가로 보지 않았다.

그의 죽음도 갑작스런 비명횡사였는데, 이상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십여 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그가 갑작스러운 유고 전으로 그 때 일을 일깨웠다.

돈과 권력이란 자칫하면 죽어서도 욕 먹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그 와중에도 이중 인격자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인데, 다들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사진, 글 / 조문호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시리즈 ‘눈빛사진가선’은 

한국인이 살아 온 삶의 흔적을 기록 표현한 사진집이다.

 

일관된 주제로 작업해 온 국내사진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유 무명을 구분하지 않고 오로지 완성도와 작품성 위주로 만들어진다.

 

‘눈빛사진가선’은 이제 사진인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였다.

책이 안 팔리는 현실에 양성우의 ‘청춘길일’과 조문호 ‘청량리588’은

재판을 찍을 정도로 인기서적이 되었다.

 

1호로 나온 구본창씨의 'DMZ'가 2014년도에 출판되었으니,

7년 가까운 사이 무려 64권이 발행되었다.

‘눈빛사진가선’ 시리즈에 거는 출판사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한국사진계의 대표적 작가들이 망라된

‘눈빛사진가선’은 한국사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지침서다.

 

그동안 한국사진가들이 외국 사진가들의 작품집을 구해보며

서구의 가치를 따라 배우기에 급급하였으나,

사라져가는 우리의 모습이나 현실은 뒷전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추어 사진인의 의식전환도 절실한 시점이다.

아직도 사진작가협회에 가입하기 위해 공모전사진에 급급 하는가?

이 사진집 시리즈를 살펴본 후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

작품해설과 작가노트도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다.

판형이 작아 휴대하기도 편하지만, 가격도 12,000원이라 부담 없다.

 

독창적인 국내 사진가들의 작업을 통해

한국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는 ‘눈빛사진가선’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구독을 바랍니다.

 

글 / 조문호

 


장흥군물축제에서 열린 세미누드 사진촬영대회를 알리는 현수막 (오마이뉴스 스크랩)



아침부터 인터넷을 뒤적이다 간 뒤집어지는 기사를 읽었다.
장흥의 '정남진장흥물축제'에서 세미누드 사진촬영대회로 물의을 빚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까지 이러한 몰상식한 짓거리가 예술이란 이름을 달고 버젓이 열린다는 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언제 적 일이냐? 수 십 년 전부터 아마추어 사진인을 대상으로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해 왔는데,

아직까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버젓이 열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회원이나 늘리려 저질스러운 행사를 추진하는 단체의 저급함이야 오래 전부터 알지만,

이에 동조하여 대포 같은 장비를 차에 실고 몰려다니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형태가 추하기 짝이 없다.



2019년 신탄진에서 열린 제27회 대전 세미누드 전국사진 촬영대회 장면 (중도일보 스크랩



지난 27일 장흥댐 인근에서 벌어 진 ‘세미누드 사진촬영대회’라는 이름을 건 행사에서

네 명의 여성 모델을 발가벗겨 나체 쇼를 벌였는데, 결국 말썽을 일으켜 막을 내리게 되었단다. 

물놀이장 안팎을 오가며 십 수 미터 위에 설치된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을 뒤집어쓰거나 우산을 펼치기도 하고,

붉은색 물감을 온몸에 끼얹기도 했는데, 물과 물감으로 흥건한 바닥은 미끄러워 위험 했다는 것이다.

수심이 얕은 물놀이장이나 높은 계단, 다리 등의 공원 곳곳에서 온갖 포즈를 취했다는데,

돈 벌이로 나선 모델들을 탓할 수야 없으나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형태나 언행이 가관이었단다.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여성을 빙 둘러싼 채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 반말로 포즈를 요구하는가 하면,

심지어 주위에서 피켓팅하는 녹색당원과 지나치는 사람에게 호통을 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한 남성은 촬영대회를 항의하는 자의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기는 등 행패도 부렸단다.




2014년 창원시 봉암수원지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세미누드 촬영대회 장면 (경향신문 스크랩)



"니들이 예술을 아냐?", "우리는 돈 내고 예술 사진 찍으러 왔다"는데, 정말 쪽팔려 못 살겠다.

“예술 좋아하네. 여자 알몸 찍는 것이 예술이냐? 차라리 호텔 가서 포르노나 찍던지...”

문제가 된 ‘세미누드사진촬영대회’는 ‘한국사진작가협회 장흥지부' 주최라는데,

올 해가 처음이 아니라 '정남진 장흥물축제'가 열리는 해마다 열었다는 것이다.

장흥의 청정 수자원을 기반으로 깨끗하고 바른 지역의 이미지를 알려 지역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시작축제가 고작 여자나 발가벗겨 상품화하는 이 따위 짓거리나 벌이냐?

더 웃기는 것은 이 축제가 한국관광공사의 우수축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2014년 창원시 봉암수원지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세미누드 촬영대회 장면 (경향신문 스크랩)



다행스럽게도 이번 누드촬영대회가 물의를 빚자 "내년부터 누드 사진촬영대회는 안 한다고 했다지만,

문제는 '누드사진촬영대회'가 장흥에서만 열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진협회는 이제부터라도 전국에서 열리는 누드촬영대회를 없애고, 사진인들 교육에 힘쓰야 할 것이다.

하기야! 구성원 자체가 그렇게 배워온데다, 대개 그 나물에 그 밥이니 무슨말을 하겠는가?

그리고 이름도 '한국사진작가협회'가 뭐냐? 개가 들어도 웃을 이게 작가냐?

차라리 아마추어 사진단체 자체를 해산하는 것이 답이다.



글 / 조문호




2014년 창원시 봉암수원지에서 열린 제30회 전국 세미누드 촬영대회 장면 (경향신문 스크랩)

















동자동에서 일하는데, 정영신씨가 차 끌고 오라는 전화를 했다. 

총알같이 달려갔더니, 민예총사무실에서 인수 인계하던 서인형, 최석태씨도 함께 내려왔다.

일 마무리하며 뒤풀이로 술집을 가는 모양인데, 가다 가다 녹번동까지 갔다.

차 버려두고, 술 한 잔 하자는 배려였는데, 덕분에 양 갈비 집에서 한 잔했다.



    

 

매번 지나치던 집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인데, 정성스레 구워 준 양고기와 중국술 연태주가 찰떡궁합이었다.

과분한 술상에 기분 좋게 취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공모전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업기획의 베테랑인 서인형씨와 추진력 있는 미술평론가 최석태씨, 민예총사진단체 구성을 위해 고민하는

정영신씨가 모인 자리라 대략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사진 활동을 해 오는 동안 제일 진절머리를 낸 것이 사진공모전이었다.

공모전이란 상을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발굴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대개의 공모전들이 주객이 전도되어 왔.

그 상을 놓고 벌이는 주최 측이나 심사위원들이 벌이는 구역질나는 형태를 생각하니, 말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취기도 올랐지만, 사라지는 게 덕일 듯싶어 먼저 일어났다




    

그런데, 다음 날 생각하니, 공모전의 악몽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과오를 발판으로 새로운 신인 등용문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나의 경험담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며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무렵인 70년대에도 사진공모전이 대세였다.

주로 '사협'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인데, 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서 점수를 축척해야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 한 장으로 작가의 능력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우연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협회에 가입해야 작가로 인정받는 줄 알았으니, 공모전에 매달린 것이다.

공모전이란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에는 해악이 될 뿐이다.

연출이던 조작이던 튀는 이미지만 만들어 내면 백발백중이다.



국전에서 분리되어 개최된 첫 '한사전(1981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은주씨의 '환회'


 

그 땐 전국 지부에서 공모전이 있었으니, 점수 채우기는 쉬웠다.

그러나, 준회원은 최초 입선에서 2년이 경과되어야 했고, 정회원은 4년이 경과되어야 가능했다.

세월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입회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공모전이란 것이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상 따먹는 재미인 셈인데, 자신의 작업은 뒷전이고, 심사위원들 비위 맞추는 사진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그 심각한 폐해를 깨달은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던 중 81년도 무렵, 동아일보 신문을 보고 무릎을 친 적이 있었다.



제2회 '한사전'(1983년) 대상 수상작인 고) 양은환씨의 '나들이'

몽타쥬에 의해 만든 작품으로 연출냄새가 나는데다 화면 배분도 엉성하다.


 

신문에 동아미술제공모 수상작이 게재되었는데, 대상에 차용부씨의 기지촌의 이후가 발표되어 있었다.

이 또한 공모전이긴 하지만, 방법이 달랐다.

일단 새로운 형상성이란 기치를 내걸었고, 이년 전에 공모할 주제를 미리 공고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구미를 당기는 것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연작사진으로 출품하는데다

85년도 공모작의 주제가 직업인으로 발표되어 있었다.

당시는 사창가인 전농동 작업을 준비하며 주위를 맴돌아 다닐 때인데, 그 작업에 추진력이 붙게 된 것이다.

운이 좋아 다섯 장의 사진으로 조를 맞춘 홍등가라는 사진을 출품했는데,

85년 동아미술제 대상으로 뽑힌 것이다.



1985년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작인 조문호의 '홍등가'와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김희룡씨의 '풍어제'



빈 집에 소 들어온다는 속담처럼, 상금에다 작품 매입대금까지 들어왔으니 횡재한 것이다.

청량리 588에 입주할 돈이 생겼으니, 도랑치고 게 잡은 셈이었다.

상금이란 바로 이처럼 사진가의 작업경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동아미술제'도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에 의해 취지가 흔들맇 수밖에 없으니,

세월 따라 변질되다 결국 없어지고 말더라.



제9회 한사전(1990년) 대상 수상작인 최주억씨의 '북소리'

 


그 뒤 이름도 거룩한 한국사진작가협회에 편집장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호구지책으로 똥 판에 들어갔지만, 이 기회에 사협이란 회보지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사협이란 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다 보니,

그 곳에서 진행되는 공모전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웃기는 짜장면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돈 놓고 돈 먹는 장삿속이었다.



한 때 박근혜가 이사장이었던 '정수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제11회 '대한민국 정수사진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종두씨의 '저산 팔읍 길쌈놀이'다

이 사진이 대통령상이라는데, 누가 뽑았는지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 뒤 87년도 무렵 민주항쟁개인전을 하려니, 이사장이란 자가 전시를 말려,

기회다 싶어 사직서를 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 싶다.

아니나 다를까 한 참 후에는 국전 급에 해당되는 한사전공모전의 실태가 세상에 까발려 진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심사 전에 여관방에 모여 입을 맞추는 추태가 들통 난 것이다.

결국 농간을 부렸던 사무국장이 구속되며 사진인들 얼굴에 똥칠 시켰다.


만 명이 넘는 거대 단체로 성장한 원인도 바로 사진공모전이 효자노릇을 했으나, 사람은 많으나 사진이 없다

그 것을 본보기로 좋은 공모전을 만드는데, 참고할 일은 되겠다고 생각되었다.



 


그 뒤 아들 조햇님이가 부산경성대 사진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자식 등록금을 마련 할 수 없어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삼성항공' 카메라 사업부에서 콜이 온 것이다.

삼성카메라클럽이란 전국적인 단체를 만드는데, 사무국장직과 삼성포토패밀리라는 계간지 편집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다.

얼씨구나!’하며 계약직으로 들어가 자식이 졸업할 4년 동안 일한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이강수씨의 "서울' (20매 중 4매)


 

삼성카메라클럽에서 공모전을 만들어 신인을 발굴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아마추어들의 모임이라 그들의 입맛에 맞는 단사진 공모 부문도 있었지만,

연작사진부문을 추가한1한국사진대전을  95년도에 공모한 것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홍순태선생과 육명심, 한정식선생께서 운영과 심사를 하셨는데,

심사결과 연작부문의 ‘95한국사진가상우수작으로 송미경, 이강수, 장석주씨 세 사람이 뽑힌 것이다.

다 젊은 신예작가로 개성이 뚜렷했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 (20매 중 4매)


 

이강수씨는 서울을 주제로 도시의 그늘진 풍경을 보여주었고,

장석주씨의 명진원 사람들은 나환자촌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이었다.

젊은 여성작가였는데, 공단 여공들의 매춘을 다룬 소재로 충격적이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우수작에 선정되었으나, 삼성 측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당시 담당 전무가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입상을 취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95년 제1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수상자들


 

예사 일이 아니었다.

사무국장직을 그만두고 문제 삼던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한정식선생께 전화드려 부탁한 것이다.

결국 상은 주지만, 전시는 안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원하는 사람만 입상작을 볼 수 있도록, 전시장에 입상작 사진과 면장갑을 준비한 것이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최우수작 조임환씨의 '이농지대'(20매중 3매)


 

그 다음해인 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사진 부문의 수상자는

최우수상에 조임환씨의 이농시대가 뽑혔고,

우수상에는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와 신 옥씨의 초충도가 결정된 것이다.

첫 해에는 완전한 신인들의 출현이었지만, 두 번째는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의 출현이 달라진 점이나

성공적인 공모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성남훈씨의 '사라예보-전쟁이후'(20매중 3매)


 

그러나 다른 입상작은 작품집에 남아 있으나 문제의 작품인 송미경씨의 가리봉의 아이들은 자료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송미경씨의 그 이후 활동조차 알 수 없어 더 안타까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작가를 수소문해, 그 때 사진들을 재조명하고 사진사에 남기는 것도 숙제로 생각한다.



1996년 제2회 한국사진대전 연작부문의 우수작 신옥씨의 '초충도'(20매중 3매)


 

그러나 한국사진대전도 그 것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삼성항공사장이 바뀌며 강남 삼성동에 있던 삼성포토스페이스를 없앤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진가회' 첫 회장이신 고,홍순태선생과 김한용선생의 현판식 장면



반 협박에 가까운 비장의 카드를 꺼내 얻어낸 것이 충무로 세기양행2층에 마련한

한국현대사진가회사무실 임대보증금과 운영비 일부 보조였다.



돌아가신 후 '최민식사진상'으로 구설수에 오른  최민식선생의 생전 모습

 


그 이후에는 공모전에 관련될 일이 없었는데, 뒤늦게 최민식사진상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동강사진상이 작업 성취도에 따라 작가를 선정하는 상이라면,

최민식 사진상은 주최 측의 시상 목적대로 사람을 대상으로 작업한 다큐사진가를 뽑는다고 했으나,

그 또한 성취도 위주의 동강사진상이나 마찬가지였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일으킨 최광호씨의 '천제'



형식만 포토폴리오를 제출하는 공모 형식이었지, 끼리 끼리 노 잔치였다.

첫해는 이갑철씨가 받아 그냥 넘어갔으나, 두 번째는 최광호씨가 받아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부산의 이광수교수 문제 재기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그 공모전도 두 번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공모전은 절대 운영위원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사심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 재확인시켜 준 셈이다.



2회 최민식사진상 부정심사 의혹 문제를 매듭지으려는 자리가 온빛사진가회의 주선으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석재현씨의 사회아래, 이 문제의 핵심이었던 이상일 당시 운영위원장과 정주하 심사위원장,

그리고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이광수 사진비평가와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가 패널로 자리했다,

    

 

오랜 세월 우리나라 사진상들이 잘못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진인들에게 많은 빈축을 사왔기에, 공모 형식의 사진상이 더 조심스러운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이젠 중견작가들을 위한 포상식의 작가주의 사진상은 그만두자. 첫번 째로 '동강사진상'부터 바뀌어야 한다.

뒷자리로 물러 난 사진가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신진들을 발굴하는데

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민식사진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명 사진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가난한 최광호씨를 지지했다”고 말하는 이상일 운영위원장


 

많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해야겠지만, 개인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다.

기존의 공모 형식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 전시회를 평가해 상을 주자는 것이다.

일단 수순을 밟은 작가가 민예총에 등록하여 개인전을 열면

여러 명의 미술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이 비밀리에 전시를 돌아 본 후,

일 년 동안의 개인전을 모아 총평가하여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자는 것이다.

수상자에 대한 수상작 전시는 물론 전시를 둘러 본 평론가들 모두가 작품을 평론하는 등

제대로 된 작품집까지 만들어 문제작가로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제1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그 세부적인 운영은 서인형씨와 미술평론가인 최석태씨를 비롯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마련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날 술자리에서 드리지 못한 의견을 이 글로 대신함을 양해 바란다.

아무튼,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제2회 한국사진대전 시상식과 전시개막식 장면
































 

 



이동식이 살해하여 찍은사진, 당시 보도된 일간지에서 스크랩했다




▲조문호 사진가



사진도 제대로 모르는 얼치기 아마추어 사진 인들이 전체 사진가들 얼굴에 똥칠시킨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공모전에만 집착하여 상장 쪼가리 몇 장 받고나면 자기도취에 빠져 안하무인이 되어버린다. 취미로 즐기며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야 나무랄 일은 못된다. 그러나 자연을 훼손하거나 부정을 저지르는 등 온갖 부도덕한 짓거리로 말썽을 일으켜 문제다,

반세기 동안 공모전 수상 경력을, 한 사진단체의 입회 자격으로 삼은 것이 원인인데, 그 폐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공모전 입회점수제를 폐지하라며 목청을 높여왔으나, 여지 것 반복되고 있으니, 어쩌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모든 부정부패나 불협화음이 공모전에서 비롯되지만, 돈과 모든 이권이 공모전에 걸려 있으니 없앨 수 없는 것이다, 그 폐해는 사람을 죽여 사진을 찍는 이동식 같은 살인마도 탄생시켰다.

이동식이 죽음에 집착한 동기도 공모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차례 공모전에 출품하여 고배를 마셔오다 우연히 죽어가는 비참한 닭을 촬영해 출품했는데, 그게 은상을 받은 게 사건의 발단이다. 그래서 끔찍하고 자극적인 사진이 예술사진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이 굳으며 엽기적인 살인마로 변한 것이다.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한 단체가 구성되려면 구성원의 인성이나 자질은 물론, 교육이 중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그 살인 사건도 창피하다고 쉬쉬할 것이라, 입회규정에 명시된 공모전 수상경력을 폐지하여 회원들의 자질이나 사진교육에 치중했더라면, 오늘처럼 작가 없는 작가단체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작가란 허울 좋은 이름에 순수한 아마추어 사진 인들이 공모전을 추종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조직의 규모가 공룡집단처럼 비대해졌다, 이젠 한 술 더 떠 예비회원이란 이름으로 선모집도 한단다. 이게 작가증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전국에 깔린 조직들의 지역 이기주의 또한 보통문제가 아니다.

몇 일 전 속초 청호동에 ‘아트 플렛폼 갯배’란 갤러리가 개관되어 엄상빈씨의 ‘아바이 마을 사람들’ 초대전이 열렸는데, 지역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항의성 민원이 물의를 빚었다는 것이다. 지역 사진가를 두고 왜 외부 사진가를 끌어들여 개관전을 하느냐?, 지원액도 지역 사진인들과 차별하느냐?‘는 내용이라는데, 사진이면 다 같은 사진이냐?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는 심보인지 모르지만, 제발 주제 파악 좀 하라. 이런 일들이 지방마다 비일비재하다.

앞서 이동식사건을 새삼 언급한 것도 그 희대의 살인마가 그 사진단체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동식씨는 서울 가락동에서 보일러 배관공으로 일하며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모델촬영대회를 쫓아다니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주변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목 맨 모습이나, 밧줄에 묶여 칼에 찔려 죽는 모습 등 비참하게 죽어가는 잔인한 사진을 연출해 찍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실감나는 사진을 얻기 위해 마침내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이동식은 이발관 면도사였던 김경희(24)양을 모델 시켜 주겠다며 산으로 유인해, 청산가리를 담은 캡슐을 감기약으로 속여 먹였다고 한다. 당시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한 그가 찍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진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더 귀가 막히는 것은, 그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올림픽을 앞 둔 시점이라 나라 망신시킨다며 수사를 중단시킨 채, 그냥 덮어 버렸다는 점이다. 몇 년 전 담당 수사관이 뒤늦게 밝힌 바에 따르면 전처를 비롯하여 21명이나 되는 또 다른 여성 실종자에 대한 살해자백도 받아 냈다고 한다. 전처의 시신이 묻힌 자리를 파는 순간, 수사를 종결하라는 지시에 막을 내렸다니, 이제 죽은 자에게 더 물어 볼 수도 없게 되었다.

86년도 사형이 집행되며 그 살인사건은 모두에게 잊혀 졌지만, 난 부끄러워 잊을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 입을 막았고, 사진 계에서도 입을 닫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달 사진계 원로학자를 만난 사석에서 그 이야기도 사진사에 남겨야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가치 없는 그런 일은 입에 담지도 말라는 것이다. 치욕의 사진사는 역사가 아니던가? 꼭 남겨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 그 것은 예술이다. 나는 예술사진을 찍은 것이다.“라는 한 사이코의 괘변이 아직도 머리를 짓누른다. 미쳐도 제대로 미쳐야지, 어중간하게 미치면 사람도 잡을 수 있다는 경고의 말이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압수된 사진들과 증거자료를 설명하는 이동식.



어제는 샤진가 하재은씨에 이어 엄상빈씨가 병문안을 오셨다,
하재은씨는 세계 시장을 기록하는 잦은 해외 나들이와 국내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으로 바쁘고,
엄상빈씨는 6월15부터 7월31일까지 속초 청호동의 ‘아트 플렛폼 갯배’의 ‘아바이 마을 사람들’ 초대전 준비로 바쁘다,
더 이상 바쁜 분들에게 민폐 ‘끼치는 병원생활을 빨리 접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엄상빈, 정영신씨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밥 먹다 어이없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속초시에서 실향민들이 사는 청호동에 갤러리를 만들어, 개관전으로 엄상빈씨를 초대했는데,
속초에 거주하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이 속초시에 민원을 넣어 물의를 빚었다는 것이다.

속초시 담당자의 표현으로는 '지역 사진인들의 반란'이란다.  

지역 사진가를 두고 왜 외부 사진가를 끌어들여 개관전을 하느냐?, 지원액도 지역 사진인들과 차별하느냐?‘는
내용이라는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왜 주제 파악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사진이면 다 같은 사진이냐?

지역 아마추어 동아리 전시와 프로 사진가의 기획전도 구분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다. 

 

갤러리를 아마추어 사진인들의 놀이터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누가 기획을 하던, 실향민 지역 개관전이라면 청호동의 역사적 기록사진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엄상빈씨 만큼 긴 세월동안 실향민을 기록한 사람이 있는가?

사진이라고는, 고작 옛날 이발관 그림 비슷한 공모전 사진이나 찍어오는 주제에... 


몇 년 전, 정선에서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무식하니 뻔뻔스러운 것도 몰랐다.
아직까지 지역 이기주의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들이 있다는 현실이 사진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쪽 팔리지도 않냐? 제발 사진 망신 그만 시켜라.



'

사진, 글 / 조문호















조문호/사진가

사람들이 사진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다.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이나 기록적가치가 높은 사진은 차원이 다르다. 예술 보다 더 소중한 기록의 역사성을 하잖게 여기니, 어찌 역사가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수 많은 무명사진가들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쓰레기더미에 썰려나가도 사진계의 어느 누구하나 나서는 이가 없고, 정부도 사회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진가들이 평생 찍어 온 필름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냥 소멸되고 만다. 이런 지경이니 사진가들이 잘 팔리지도 않는 사진집이지만, 살아생전 책 한 권이라도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부기록보존소’에는 왜 역사적인 사진자료를 발굴하여 소장하는 부서가 없을까? 고작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알려진 작가 위주로 소장전을 갖기도 했으나, 사진가들의 이전투구로 그마저 뜸하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빈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에 대한 빈곤의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사진가이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다. 탁상에서 할 수 있는 문학 같은 일과 현장을 누비고 다녀야 하는 다큐사진과는 경제적 비용 발생에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이나 보장도 없지만 오로지 사명감하나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해도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견디지 못한다. 사회는 다른 직업을 갖고 틈틈이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원하고 있다. 

사진가들이 다들 살기 어려우니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고 있다. 최근 폐북에 글을 올려 말썽을 일으킨 두 사진가 모두 가난에서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은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있으나, 그 행위 자체는 용납할 수 없다. 거론된 해당 출판사나 갤러리 측은 많은 사진 중에 선택해야했으니, 밀려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갑 질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건 아니다. 어려운 사진계를 위해 애쓰는 분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며 의욕을 꺾어버렸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심의한다는 모욕적인 말을 퍼트리기도 하고,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며 협박하고 나선 것이다. 두 분 다 정중히 사과해야 한다. 그 피해를 입은 당사자만이 아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많은 사진가들을 부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그 불미스러운 사건은 개인적 욕심과 자기도취에 빠진 사진가들의 전형적인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다큐멘터리사진가들만이 아니라 사진계 전반에 문제가 많다. 아마추어 사진가들 모임인 ‘한국사진작가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포기한지가 수십 년 넘었지만, 그 대안으로 창립한 ‘민족사진가회’마저 개인의 사유화로 방치되고 있으니, 참담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구심점이 없으니 단합 할 수 없고, 단합할 수 없으니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다. 여지 것 그 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점에 저항하며 기자회견장 한 번 마련 한 적 없고, 타 단체와 연대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사진에 대한 문제점을 시정하고 바로잡기 위해 힘을 모아 나선 적도 없었다. 선배나 후배나 모든 사진가들이 자기밖에 모른다. 어느 예술매체보다 사회현실과 가까워야 할 다큐멘터리사진가들 조차 나서지 않으니,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사진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으려면 정치인들과 교류도 있어야 되지만, 정치적인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예술행위에 정치가 개입되는 자체는 말이 되지 않지만, 사진계 발전이나 후진을 위해서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 사진인 스스로 권익을 찾지 않으니 누가 권익을 찾아주겠는가? 그러니 정치인마저 사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대선후보의 문화포럼에 모든 예술분야 인사들이 골고루 참석했으나, 유독 사진가만 한 사람도 없었다. 이건 한 사례일 뿐이지만 도처에 사진이 개 취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또한 자업자득일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사진인들은 물론 모두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쪽 팔려 못 살겠다.

[스크랩 / 서울문화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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