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뀔 때마다 원로사진가 한정식선생께서 마련하는 신년 오찬회가 인사동에서 열린다.
지난 20일 정오무렵, ‘수연’에서 가진 모임에는 한정식선생을 비롯하여 김생수, 전민조,
이규상, 엄상빈, 김보섭, 김남진, 이재준, 최경자, 정영신씨 등 열 한분이 함께했다.

이 모임은 보수, 진보, 중도 등 다양한 정치적 색깔을 띤 분들이 모인다.
좌파의 대표주자 이규상씨는 나를 비롯해 엄상빈, 정영신 등 여럿이지만,
우파인 한정식선생이 좀 밀리는데, 다행히 이재준씨가 받쳐주어 위안을 받으시는 것 같다.
그런데,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중도파들이 더러 계신데, 그 분들 속내가 사뭇 궁금했다.

시국이 시끄러우니, 자연스럽게 정치적 현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나,
이규상씨의 첫 덕담이 죽였다.
“설날이 닥쳐오니, 온 동네가 떡치는 소리뿐입니다.”
정치이야기 보다는 차라리 떡치는 이야기가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나 역시 한정식선생이기에 넘어가지, 다른 자리 같으면 상종도 않는다.

그런데, 김생수 선생으로 부터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모인 사진가 중 유일하게 사진협회 소속이신데, 이사장 선거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다.
다들 관심 밖의 일이었으나, 후보 등록해 당한 이평수씨나,
손대지 않고 코 푼 조건수씨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건수씨는 ‘동우회’와 연관되어 8-90년대 자주 만났으나, 가는 길이 달라 소식이 끊겼다.
들은 바로 유산을 상속받아 잘 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돈 있으면 사진이나 허벌나게 찍지, 썩어 문드러진 사협 감투는 왜 탐내는지 모르겠다.

이사장 선거 내용인즉, 이평수씨와 조건수씨가 후보로 등록해 한 판 뜨게 되었는데,
뚜껑도 열어보지 못하고 이평수씨가 패했다고 했다.
이평수씨의 부이사장 런닝메이트로 출마한 분의 회비 미납으로, 즉 자격을 상실해 목덜미가 잡힌 것이다.
이평수씨가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되기를 반복하다 결국 투표일을 넘겼다고 한다.
조건수씨는 힘들게 선거를 치루지 않고 무투표 당선된 것이다.

누가되어도 사협을 개혁하여 올바른 사진단체로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닥 기대는 걸어본다.
이평수씨야 사협 집행부에서 활동한 전역으로 보아 기대할 수 없지만, 조건수씨는 처음 실세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정치판도 개혁되기 마련이니, 이 기회에 마음 독하게 먹고, 사협을 바로잡아 만 여명이나 되는 회원들 눈을 뜨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진협회 회원들의 아마추어적 시각에서 벗어나는 의식개혁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정식선생께서 축하전화를 하신다지만, 앞으로 한정식선생께 많은 자문을 받기 바란다.
부디 ‘사협’을 바로잡은 이사장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이 사진들은 대전의 원로사진가 신건이선생께서, 1960년대에 찍은 사진들이다.


달구지 타는 꼬맹이들의 마음까지 읽혀지는, 추억의 사진이다.

형 뻘되는 고삐 쥔 아이의 표정이나 쫄랑 쫄랑 따라가는 송아지의 모습도 정겹다.


그 다음 사진은 대전천변에서 유신개헌을 반대하는 군중들의 역사적 사진이고,
목척교에서 얼음 놀이하는 부감사진과 오래 전의 유성장 변두리 풍경도 있다.

신건이 선생은 한 마디로 사진에 미친 분이다.
사진가들이 대부분 미쳤지만, 신건이선생은 유독 그 병이 심한 분이다.
그러나 아마추어적 사진풍토를 부추기는 ‘한국사진작가협회’의 희생양에 다름 아니다.
사진의 가치를 잘 못 이해한 그림 같은 사진에 빠져 반 평생 동안 엉뚱한 일을 한 것이다.
오래 전의 사진들은 이렇게 좋았으나, 그 이후의 사진들은 보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 21일 신건이선생께서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아내의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는데, 서울 있으면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이다.
근 20여년 만에 만났으나, 여전 하셨다. 열 살이나 더 많으신 데도 나보다 더 짱짱했다.
무슨 바른 말을 했는지 모르나 “사진협회‘에서 쫓겨났다“며 투덜댔는데, 아주 잘 하셨다고 답했다.
감히 후배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김종필씨 말처럼, 노을처럼 마지막을 붉게 물들이는 뜨거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한국사진의 재발견'에서 옮겼다.

사진, 글 / 조문호







 


사진가 류경선씨가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중대사진동문들이 마련한 일주기 추모 사진전 개막식이 지난 16일 인사동 ‘경인미술관’3전시실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하여 사진가 강운구, 최인진, 최재영, 김녕만, 양재문, 차정환, 김종호, 이평수, 고 헌,

노연덕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전시된 사진들과 그가 사용했던 유품들을 돌아보니 지난날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아마 ‘사진협회’ 이사장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 빨리 세상을 하직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늘 해왔다.

왜 쓸데없는 감투에 그리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필자도 당시 ‘사협’을 개혁하려는 욕심에 두 차례에 걸쳐 이사장선거에 개입한 적이 있었다.

처음은 이명동선생을 후보로 모셨고, 두 번째는 류경선씨를 도왔는데, 두 분 모두 백현기씨의 치밀한 조직에 밀려났다.


이명동선생이야 선거비용을 주변에서 조달해 모셨으나, 류경선씨는 자기 돈 쓰 가며 집착했다.

그는 낙선해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 기어이 그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사장에 당선되었지만 ‘사협’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출마의 변으로 변화와 창조란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고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고 실추된 한사전을 새롭게 부활시키겠다고 내 세웠지만, 조직에 둘러싸여 못했다.

결국 임기 중에 병석에 드러누웠는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심적 고통이 컸겠는가?

그 이사장 자리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을 것인데,

전임이었던 문선호씨와 백현기씨도 이사장자리로 수명을 단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자리다툼과 공모전에 따른 이권 배분 등, 숱한 비리 한 복판에서 처신하기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류경선교수는 사진병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며 사진인생을 시작했다.

서라벌예대 사진과를 거쳐 일본에 유학하여 줄곧 중앙대 사진과 교수로 재임하며 후학들을 양성해 왔다.

정년을 한 해 앞두고는 1톤 트럭을 개조해 0,5mm 구멍을 뚫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핀홀카메라를 만들어

전국 해변을 돌며 촬영하기도 했다.

마치 흐릿한 안경너머로 떠오르는 옛 그림자를 회상하는 듯한 ‘바다, 그 기억을 그리다’전이 그의 마지막 전시였다.


사진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한 평생을 사진에 바친 그의 흔적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그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정년퇴임하여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때, ‘사협’ 이사장에 머리 싸 맬 것이 아니라 작품활동에 혼신을 다했어야 했다.

명예롭지 못한 경력 한 줄에 모든 걸 바친 고인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 아파 드리는 말이다.

부디 저승에서나마 이승에서 못 다한 모든 걸 성취하길 기원한다.

사진,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