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욕망의 의지

류화정展 / RYUHWAJEONG / 柳和廷 / painting 

 

2022_0629 ▶ 2022_0705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175×145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토포하우스

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

Tel. +82.(0)2.734.7555

www.topohaus.com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 칼 구스타프 융 ● 무의식의 심연(深淵) 속을 오늘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기다린다. 깊은 바다에 바늘도 없는 낚시를 드리운 채, 계절이 지나기를 기다렸던 세월이 그 얼마인가? 그 속에 똬리를 틀고 때를 기다리는 욕망의 의지들을 이제는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온갖 욕망의 씨앗들은 언제 어느 때 발아해 드러날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22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22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97×130.3cm_2019

오랜 내상(內傷)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은 내 작업의 시작이었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욕망은, 마음의 중심을 뒤흔들며 불안하게 하는가 하면, 때론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의지로 나타난다.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149×149cm_2021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3×305cm_2019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150×300cm_2022

무의식의 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것들은 내 개인적인 것들도 있고 인간 보편의 문제들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꺼내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알아가고 치유하며 나와 대상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러한 이해의 토대 위에서 나의 작업은 한층 더 깊어지고, 작품의 의미는 명료해지며, 무엇보다도 내 안의 어둡고 거친 욕망은 사라진다.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53×41cm_2022
류화정_무의식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20

내 안의 온갖 욕망이 사라지고 생명 본원의 순수의식이 회복되면, 바깥 경계를 만나도 흔들리거나 끌려가는 일 없이 마음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화(淨化)된 마음은 아무 생각 없는 무기(無記)에 빠짐도 없이, 매 순간 눈앞의 경계와 하나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작업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2022년 6월) ■ 류화정

 

 

Vol.20220629a | 류화정展 / RYUHWAJEONG / 柳和廷 / painting

리틀보이 도영씨의 그림일기

 

송도영展 / SONGDOYOUNG / 宋道永 / painting 

2022_0525 ▶ 2022_0531

 

송도영_붉은 방의 자화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1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토포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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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고백의 시대 ● 자화상은 개인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시각예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에 따르면 모든 화가는 화면에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다. 즉 어떤 그림이든 일종의 자화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에서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로 이어지는 회화에 대한 믿음에 따르면, 자화상은 작가의 영혼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사물이다. 우리는 화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그 중에서도 자화상을 통해 타인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송도영'이라는 중년남성의 자기고백 앞에 서 있다.

 

송도영_The cav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22

에너지의 응축 ● 송도영의 청년 시절은 파란만장했다. 군복무를 마친 1995년에 사이판의 한 공장에 입사해 3년 정도 일을 한다. 사이판에서의 반복되는 삶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신만 커져가는 상황이었기에 송도영은 1998년 미국으로 무작정 떠난다. 지인을 만나는 여행을 핑계로 미국까지 왔지만 불행은 시작에 불과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돈은 금새 떨어져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불법체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숙식을 기댈 수 있는 모텔청소를 시작으로, 인도식당에서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악용한 인도인은 월급조차 주지 않았고, 건강마저 최악으로 악화되어 간다. 이후 캐나다 토론토로 이동하여 사이판에서 일했던 기간의 퇴직금으로 새 출발을 시도한다. 그래서 당시 만난 아름다운 여자와의 불같은 첫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금방 실연으로 이어진다.

 

송도영_양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5cm_2021

이때부터 송도영은 세상에 무엇인가 남기고자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후 식당보조로 일하면서 우연히 본 사진책을 보게 된다. 그 사진책은 송도영에게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다음 삶의 방향을 만들어주었다. 송도영은 한인 사진관으로 찾아가 사진관 보조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사진을 공부했다. 그곳에는 뉴욕의 예술학교에서 공부한 사진 선생님이 과외 수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에 빠지며 스스로의 삶에 애착과 욕심이 생겨 2002년에는 온타리오 컬리지 아트앤 디자인에 입학한다.

 

송도영_Cheer up! 아버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97cm_2021

그러나 아직 송도영의 불안한 삶은 끝나지 않았다. 34살인 2004년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등록금을 날려 버리게 되었고, 그길로 포르투갈 리스본을 시작으로 육로를 8개월 동안 이동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36세에 결혼을 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송도영은 이후 10년동안 일이 끝나면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47세가 되던 날 술에 취해 얼굴을 크게 다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영적인 목소리에 귀를 열었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송도영_남자의 이데아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_112×145cm_2021

에너지의 변환 ● 얼굴이 아물고, 거동이 가능해지자 송도영은 걷기 시작했다. 48세가 되며 육체와 정신이 회복되자 송도영은 10년 넘게 잊고 살았던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드로잉을 시작한다. 1년 정도가 지나고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단독으로 사진전을 열었고, 드로잉을 함께한 사람들과 누드 크로키 전시를 열게 된다. 내면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드디어 꺼내기 시작했다. 송도영은 처음으로 정면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 것이다. 송도영이 그림을 그리면서 선택한 소재는 자기 자신이다. 거울을 이용해 자기 자신을 직접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이후 송도영은 제도권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되었고, 3년이 지나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자화상을 모아 첫 번째 회화 전시를 단독으로 열게 되었다.

 

송도영_비상을 위한 날개짓_캔버스에 유채_100×170cm_2021

에너지 해석 ● 송도영의 회화들은 매우 강렬하다. 마치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선언하듯, 송도영은 스스로를 화면에 중앙에 배치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송도영은 보색의 배치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감추고 싶을 만한 육체의 상처와 내면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송도영의 회화들은 자기불만에서 응축되기 시작한 에너지들을 자신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면서 정제하고 농축시킨 결과물이다. 도덕을 허구라고 말하는 프리드리히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적으로 해석 한다면 '그의 붓질은 승화된 형태의 자위행위(自慰行爲, masturbation)'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도영_In the beginning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20

정신분석학에서 강박적 자위는 거세 불안, 즉 자신의 성기가 온전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한다. 그리고 정신적 자위는 신체에 특별한 자극 없이 흥분을 완전히 방출할 만큼의 아주 강렬한 환상을 내포한다. 즉 송도영의 작품 활동은 자기 존재의 온전함을 확인하는 동시에 강력한 성취감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물론 다빈치의 견해를 다시 소환한다면 모든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송도영은 이것을 숨기지 않고 전면에 드러낸다. 즉 송도영 회화의 특징은 자기 존재의 확인과 성취가 자신감 넘치고 꾸밈없는 터치들로 발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송도영_Fake meditat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26cm_2021

리틀 보이의 등장 ● '리틀 보이'는 160cm 남짓한 송도영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무시당했던 시절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시에 '리틀 보이'는 2차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던 핵무기의 코드네임인 동시에, 이름과 반대로 엄청난 에너지를 함축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2차대전이 끝난 세상은 냉전으로 이어져 '리틀 보이'의 후계자들을 양산하는 경쟁에 돌입했고, 세상은 긴장감과 견제를 바탕으로 한시적 평화가 찾아온다. 핵의 가공할 에너지는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재앙과 풍요, 모두로 연결될 수 있다. 송도영은 자신이 가진 엄청난 에너지의 활용법을 몰라 스승을 찾는 긴 여행을 떠났었다. 스스로 밝히길 첫 번째 스승은 가난이었고, 두 번째 스승은 실연이었으며, 세 번째 스승은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병이었다. 세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긴 시간이 필요했고, 결국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송도영_La Goumandis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22

되는대로 '그냥' 살았던 시기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혜안이 없었다. 결국 송도영은 그냥 사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세상에 드러내며 '아재'와 '꼰대'가 되어버린 동년배들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 미학은 복합적이고 독특하다. 원초적인 동시에 진지하지만 항상 유머가 따라온다. 50대 아재의 그림에는 어린 소년의 순수함과 중2병스러움이 공존한다. 그러나 생각은 자유가 아닌가? 예술을 통한 송도영의 세상 정복은 죄가 아니다. 그가 새롭게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송도영_Lemon tig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45_2021

사족 ● 개인적으로 미디어와 함께 자라온 MZ세대의 특징을 '완벽주의'라 생각한다. 그들은 아주 극단적인 행동패턴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세상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세계적인 성과를 거두지만, 어떤 이들은 세상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위해 소통의 문을 굳게 닫는다. 그들은 엄청난 자기애와 엄청난 자기혐오로 각각 나아간다. 개인의 삶은 스스로 선택 할 수 있고, 각자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는 삶을 살면 그만이다. 그 책임을 진작에 느낀 것일까? 그리고 자신이 '리틀 보이'라는 것을 이제야 인정하게 된 것일까? 지천명에 이른 송도영의 작품들에서 MZ세대의 고민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몇 번의 전시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의 관심사가 '자신'에서 '인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 구영웅

 

 

Vol.20220525a | 송도영展 / SONGDOYOUNG / 宋道永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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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가까이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진가 김보섭씨의 ‘수복호사람들’이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2일 전시가 시작되었으나 24일 정오 무렵에서야 갈 수가 있었는데,

전시장은 사진계 마당발 곽명우씨가 지키고 있었다.

 

만석동의 굴 따는 할머니들 이야기를 담은 사진집 '수복호 사람들'에 실린 작품들을

10여 년 만에 다시 볼 수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밀려왔다.

 

김보섭씨의 사진들은 끈끈한 바닷바람과 소금기 밴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고단한 삶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애가 사진 전면에 가득하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진가는 따로 가 아니라 서로를 깊숙이 끌어 안았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뜻한 정감을 일게 했다.

 

물때에 맞추어 만석부두를 떠나는 수복호를 따라 나선 작가는

사진에 앞서 그들의 고달픈 삶에 주목하게 된다.

 

고된 몸을 이끌고 굴을 따며 때론 배에서 새우잠을 자가며

밤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에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주름 잡힌 얼굴과 거칠어진 여인네들의 손발은

스스로를 희생하며 자식들을 키워 온 우리의 어머니였다.

그 안타까움과 애절한 마음이 사진에 그대로 전이되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김보섭씨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사진에 담는 사진가다.

"어릴 때 조개 캐던 갯벌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사진으로나마 정겨웠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오래전 김보섭씨의 사진전을 보고 쓴 이광수교수의 비평 한 단락으로 마무리하겠다.

“자신의 고향인 인천에서 사라져 가는 공간의 모습은 가족이나 동네 혹은 일터를 구성하는 여러 하위문화의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런데 각 사진 한 장 한 장은 사진 미학적으로 볼 때 매우 뛰어난 물성(物性)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한 자료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그의 인물과 정물 이미지는 매우 잘 다듬어진 시어(詩語) 하나, 하나와 같다. 둘이 섞이면 시어로 기록한 민족지가 된다.”

 

이 전시는 28일까지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수복호 사람들

 

김보섭展 / KIMBOSUB / 金甫燮 / photography 

2021_1222 ▶ 2021_1228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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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수복호 사람들』에서도 김보섭은 그 강한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끈끈한 바닷바람과 소금기가 진하게 밴 사람들의 냄새가 사진 전편에 무겁게 흐르고 있다. 그 짠 소금 냄새는 어쩌면 이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의 고단한 삶의 냄새일지 모른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그의 영상을 무겁고 어둡게 만들어 준 것이겠지만, 하여튼 김보섭은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눈을 반짝이는 사진가라는 것이 이번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결국 대상과 작가가 내면적으로 진하게 만난 것이다. 내면적 만남으로 대상과 작가는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의 안으로 깊숙이 끌어 들인다. ● 김보섭의 사진이 이를 실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류의식, 이들 사진에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은 바로 이 동지적 동류의식이다. 그는 처음에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 배를 탔고, 이들 아주머니, 할머니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그러나 그들을 찍는 동안 이웃처럼, 친척처럼, 때로는 자기 누님처럼 느껴져 격의 없이 그들과 어울리고, 그 자신이 그대로 조개잡이가 되어 버렸다. 그와 대상이 구분이 되지 않는 경지인 것이다. 진한 소금 냄새가 거기에서 나온다. 격의가 없어야 이런 사진은 찍힌다. 몰입해야 이러한 영상은 나온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고단한 삶이 뿜어내는 후끈한 열기까지가 『수복호 사람들』에서는 느껴진다. 이들 사진에 그러한 것이 느껴지고 맡아진다는 것은 작가 김보섭이 뿜어내는 열정과 진정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 대상과 작가가 진정으로 발가벗고 만나고서야 이러한 영상은 맺힌다. 우선 작가가 빠져야 관객도 빠지는 법이다. 이러한 것을 솜씨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면에서 작가 김보섭은 솜씨가 좋은 사진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은 솜씨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솜씨는 외형은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데까지는 미치기 어렵다. 작가의 열의 없이, 진정성 없이는 대상이 자기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한정식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한식구 같은 수복호 사람들 ● 지금부터 수복호를 타고 다닌 인물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수보호의 선장이자 책임자인 최순기 님은 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는 분이셨습니다. ● 그의 아내 유광복 님은 선장의 동반자이자 선원으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사무장 최병국 님은 홀로 외아들을 기르는 어머니로 선장의 의여동생이며, 아주머니들의 리더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오반장(박근숙) 님은 말을 조리 있게 하고 어떠한 것이든 빠르게 이해하였으나 이곳 저곳 참견하는 일이 많아서 아줌마들 사이에서 '칠득이 오반장'이라고 흉을 보던 것이 별명으로 굳어졌습니다. 차인애 님은 어린 자식들 때문에 배 떠날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별명이 '지각생'이 되었습니다. 그 밖에 순하다 해서 김순덕, 금자 엄마 김순오, 섭섭이 할머니 박선옥, 얼굴이 넓적한 넙순이 영배 엄마, 화수동의 꼬부랑 할머니, 뻐꾸기 할머니, 선장을 많이 도와주던 수열네, 작은 고모 최금순 등 여러 아주머니들이 매일 한 배에서 한 식구처럼 지내 왔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은 만석동 일대와 북성동(똥마당)과 송월동 일대, 화수동과 그 외 인천 곳곳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미로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에서 주로 생활하였습니다.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김보섭_수복호 사람들_젤라틴 실버 프린트_27.9×35.6cm_2006

이렇게 어렵게 살면서 만석동(팽이부리)의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굴을 따기 위해 물때시간에 맞추어 모였습니다. 하루하루 고된 몸을 이끌고 굴을 땄고, 때론 배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밤늦게까지 작업하였습니다. ● 이를 '묵세기'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흔적인 아주머니들의 주름 잡힌 얼굴과 거칠어진 손과 발은 한국의 어머니들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자식들을 배고프지 않게, 또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열심히 가르치겠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훈장인 셈입니다. ● 1960년대에는 선박의 입.출항 신고가 없어서 자그마한 배에 수십 명을 태우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굴을 따러 다녔습니다. 배가 헐어 물이 스며들기고 하였는데 많이 스며들면 교대로 물을 퍼내곤 하였습니다. 기계도 낡았기 때문에 고장도 자주 나곤 하였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면 가마니로 돛을 만들어 섬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를 지나고 많은 선박을 거쳐 지금의 수복호가 되었습니다. ■ 최영식

 

Vol.20211222a | 김보섭展 / KIMBOSUB / 金甫燮 / photography

김종원씨의 '화성을 훔친 남자'전이

지난 8일부터 인사동 토포하우스 2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신화-통영신명 / 211x148cm, 종이에 먹과 주사, 2021

김종원씨는 현대회화의 원형을 글씨에서 찾는 작가다.

글의 의미를 문자 본래의 주술성에 버무려 필획언어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획으로부터-곡신불사[춘야청우몽상전도] 부분

작가는 “글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는 천지신명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졌기에

작품은 조형에 주술과 치유의 힘이 깃들여져 있다"며

"먹으로 표현된 검정색 지구 위에 경면주사의 붉은색으로 형상화했다.”고 말한다.

 

 

글자가 그림이 되었고, 그림은 신화로 승화되었다.

전시는 14일까지 이어진다.

 

글 / 조문호

 

노신시2수 /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용-통령신명 택풍산뢰/ 210x149cm, 종이에 먹과 주사, 2021
용-통령신명 천지수화/ 210x149cm, 종이에 먹과 주사, 2021
곡신불사,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곡신불사,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풍신영가, 136x76cm, 종이에 먹, 2021
풍신영가, 136x76cm, 종이에 주사, 2021
획으로부터-곡신불사[춘야청우몽상전도] 175x430cm, 종이에 먹, 2011 
작가 김종원

약력

경남도립미술관 관장(2019~현재)
(사)한국문자문명연구회장(2009~현재) 
국립창원대ㆍ국립경상대 한문학과/미술학과 강사역임

국내외 개인전
2018 아트링크초대전(서울)
2014 중국심천자공예술제(중국 심천)
2009 영국런던한국문화원 G20런던정상회담기념 HANGUL = SPIRIT전
2009 벨기에EU의회 한국문화의날기념 한글퍼포먼스전
2008 창원컨밴션센타(제1회 창원친환경건축제 초대전;文字建築空間)
2007 서울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서예문화사 초대전)
2007 AKZENTA GRAZ (오스트리아)
2006 ART SALZBURG (오스트리아) 
2006 무외전無畏展(창원성산아트홀) 등 국내외개인전 다수.

야전예술가

우창헌展 / WOOCHANGHEON / 禹昌憲 / painting

2020_0603 ▶︎ 2020_0609

 

우창헌_지붕 슁글 치는 원기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717b | 우창헌展으로 갑니다.

우창헌 홈페이지_www.woochangheon.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9일_10:00am~12:00pm

 

 

토포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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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삶의 최전방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 주방보조나 건설 노동자, 택배 배달부, 모텔 청소부, 편의점 알바생 등에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약육강식의 정글의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적 전위도 바로 그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술이란 것이 변함없이 삶과 세계의 진실에 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렇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우창헌_석고보드 치는 영복이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8

 

우창헌_콩쥐 화이팅!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8

 

나는 땀을 철철 흘리는 노동자의 등짝이야말로 어떤 예술가의 예술보다도 예술적이라고 생각된다. 그건 바로 삶이고 세계이며, 현실 그 자체를 웅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이 우리 사회의 하부에서 온몸으로 싸우는 최전방 사람들의 편이 되어줄 수 없다면, 대체 예술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만약에 예술이란 것이 수난의 길을 걸어가는 저 고통받는 사람들 편이 돼 주었던 적이 실제로 드물었거나, 이를테면 행여라도 그들을 위한 12폭 제단화 같은 찬가를 바쳤던 적이 없다면, 왜 지금 그렇게 하면 안되는가? 또 아방가르드 전위의 시절을 넘어, 진작에 행위이고 실천이며 철학적, 정치적 메시지이자 개념으로 간주된지도 오래인 우리의 예술은, 왜 삶과 현실 속으로 온몸으로 뛰어들어서는 안되는가?

 

우창헌_청년 노동자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9

 

우창헌_청년 노동자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9

 

삶이 바로 예술이다. 그리고 실천이 바로 예술이다. 또 이를테면 가족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며, 자신이 가진 나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아름다운 삶과 세상에 대한 찬가이다. 예술이란 노래이며, 노래이기에 우리 척박한 삶에 절실히 필요하며, 단도직입적으로 실용적인 것이다. 삶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느낀 태초의 예술가는 아마 터져나오는 감격으로 첫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 고마운 축복임을 발견한 그는 아마도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거친 벌판을 행군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적 정글의 밑바닥에서 고난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 속에 이 삶과 세계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겸허히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창헌_다시 태어남_캔버스에 유채_194×97cm_2019

 

우창헌_꽃 핀 나무_캔버스에 유채_45.5×65.2cm_2018

 

16회 개인전은 사람다운 사람들, 땀 흘려 일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아울러 이 삶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나의 노래들이 들어 있다. 가슴 속에 노래가 있는 한,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고마운 멋진 삶이었으며, 하루 하루가 믿기지 않는 축복이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축복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창헌_꽃 핀 나무_캔버스에 유채_45.5×65.2cm_2017

 

우창헌_사람의 집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7

 

우창헌_꽃 핀 나무_캔버스에 유채_60.6×60.6cm_2015

 

우리 예술가들이 창조해야 하는 것은 예술 그 자체만은 아니다. 바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점과 살아야 할 이유까지도 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가치있고 가치 없는지, 무엇이 고귀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무엇이 아름다우며 무엇이 추한지, 혼돈의 시대가 되어 실제로 온갖 쓰레기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몰려들며, 진정한 보석들이 자갈밭에 널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업수이 여겨지며 버려져 있다면 곱게 보듬어 소중히 감싸주고 싶다. 이를테면 그건 땀 흘려 온몸으로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한없는 인내와 용기와 열정이며, 또는 가족을 일구고 소박하게 서로에게 헌신하며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이며, 또는 마치 들꽃처럼 평가절하되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정성어린 애틋한 삶이다. 나는 예술이란 것은 그 스스로가 추앙받거나 가치있어지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모든 진정으로 훌륭한 것은 그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고 남을 빛나게 해 주므로, 예술은 마땅히 그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을, 아름다운 사람들을 비춰줄 수 있어야 한다. 낮게 살고 높이 행하라. 이는 야전예술가의 첫째 지상명령이다. 자갈밭에서 보석을 일구라. 이것이 두번째 지상명령이다. ■ 우창헌

 

 

Vol.20200603a | 우창헌展 / WOOCHANGHEON / 禹昌憲 / painting

 

남종화의 대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바라본 붓질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5월 13일~25일 개인전 갖는 남농손자 허준 작가 어린시절 회상
먹의 농담을 위해 붓을 혀에 가져다 대시는 모습 지금도 생생"


산수풍경을 극단의 조형성으로 몰아부쳐 사의적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는 허준 작가

“어릴 적 학교를 다녀 온 후 해가 어스름하게 질 때쯤이면 항상 할아버지의 화실에 저녁 인사를 드리러 가곤 했다. 화실 안은 항상 할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는 제자들과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모를 손님들로 항상 북적거렸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종종 무릎에 앉혔고 ,그림 그리는 전 과정을 구경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 시절엔 할아버지의 붓놀림에 산과 나무의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마냥 신기했고 먹의 농담을 내실 적에 붓을 혀에 가져다 대시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성장해서인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매우 좋아했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손자들이 그림을 그리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한 평생 그림만을 그려 오셨던 할아버지로선 그 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가장 즐겨하던 놀이는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되어 버렸고 자연스레 미대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너무 어릴 적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그림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없었던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요즘도 힘들거나 지칠 때면 할아버지 기념관을 찾아 작품과 작업 도구들을 보며 혼잣말처럼 할아버지께 푸념도 하고 내 생각도 얘기를 드리곤 한다. 작업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조언을 듣고 싶을 때가 많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인고의 삶에서 이미 그 길은 알려 주셨지만, 내가 아직 부족해서 미처 깨닫고 있지 못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남종화의 대가 남농 허건의 손자 허준이 전시를 앞두고 털어놓은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다. 그는 너무나 ‘큰 산’인 할아버지에 누가될까봐 그동안 손자라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자칫 작가로서 할아버지 이름에 가려 자신의 세계를 제대로 펼치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한 몫했다. 사실 그는 작품으로 승부를 걸고 싶지 남농의 손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지는 것이 싫다




”내 이름 앞에 남농 손자가 붙는다는 것은 작가 허준으로서 아직미진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나는 작가 허준으로 당당히 서는 것이 바램이다.“
그는 요즘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알바(미술학원 강사)와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전업작가로 살아남기 위한 호구지책이다.
”기존의 작업들은 주로 산수풍경을 주제로 진행을 해 왔었다. 그것은 아마도 집안내력도 있지만, 주 관심사가 자연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제가 그 방향으로 흘러 간 듯하다.“
그의 작업이 산수풍경이라고 해도 옛 것의 답습은 아니다. 나름 시대적 미감에 맞는 이미지 구축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산행경험을 바탕으로 내 의식 속에 존재하는 기억의 풍경들을 재조합 해 이미지를 표현했다. 그 속에는 산행 중에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과 그 당시의 심리상태 그때그때 느꼈던 감흥들도 녹아있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종의 산행일기식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느시점부턴가 내면의 심리상태에 방점을 두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양평으로의 이주 시기부터다. 나름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양평에서의 작업은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할 시간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작업방향도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좌절과 기법적인 실패 충분히 표현되지 않는 이미지에서의 불만족 등 힘든 시간을 오랫동안 겪었고 그 과정에서의 결론은 한정된 하나의 이미지에 생각을 고정하지 않고 하나의 주제로 여러 이미지에 대입을 하는 것 이었다.“

결국 그에게는 이미지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 됐다.

”최근작들은 앞서 얘기했듯 철저히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 되었다. 집안 형들에게서 느끼는 나의 콤플렉스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지만 답답하고 복잡하고 불편한 내 현실상황,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내 욕망, 욕구 그런 상황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리 등 내 내면의 이런저런 생각들을 여러 이미지에 담는 작업들을 진행해 오고 있다.“

예를 들면 날개, 새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파 등에 자신을 이입시키는 것이다. 날개라는 것은 자유, 희망, 비상, 탈피 등이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인 것처럼 현재의 답답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다. 하지만 정작 날개들은 꺾여 져 있어 무의식적으로 작가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이 시대 30~40대의 모습도 연상된다.

새장 안의 동식물들도 매한가지다. 사이사이로 비집고 나오려는 모습이 불편해 보인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어울리는 이상한 상황이 다. 버거운 현실에 체념하고,순응하고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 있다.

”대파연작은 양평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작은 텃밭에 고추, 토마토, 대파같은 식물들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다른 식물들과는 달리 추워지는 날씨에도 버텨내는 대파의 생명력에 감동이랄 것 까진 아니지만 어떤 미묘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나 또한 저렇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불완전한 내 심리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된다. 아주 작은 것에서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시골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내 입장에선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한 동안은 자신의 심리상태를 주로 다루는 작업들을 계속 진행 할 예정이다. 그게 무슨 이미지이건 간에...



5월13일부터 25일까지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 제목은 ‘THIS AND THAT’이다. 그냥 직역하면 이것저것이다. 작가로서의 다양한 모색이 응결된 표현이다


[스크랩/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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