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씨 껍질 모아 한 모금 피웠다.
도무지 일손이 잡히지 않고, 마음이 어수선 해서다.
사진 동지가 물 밑으로 가라앉아 연락 두절이었다.
떨어져 있어도 소통은 되었는데,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햇님이로 부터 손녀 태어났다는 연락도 왔고,
사진가 이정환씨의 장인 돌아가셨다는 부고도 떴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손녀야 볼 일이 많겠지만, 세상 떠난 망자부터 찾아 나섰다.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은 없으나, 편안한 저승길이 되길 빌었다.
문상객이 넘치는 장례식장에서 모처럼 이정환씨와 술 한 잔했다.
처가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 준 장인이었다고 한다.
해외여행에서 오자마자 돌아가셨으니, 힘들어 보였다.






충무로 사진축제 부활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충무로 사진축제에 관여한 적이 있으니, 사정을 잘 아는 듯 했다.
우선 명동에서 충무로 넘어오는 건널목 만드는 게 시급하단다.





사진축제에 사진인들이 협조하지 않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사진으로 먹고사는 카메라점이나 각종 업주들의 무관심을 더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진인을 포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한 것 같았다.


소주 한 병으로 끝내고 일어나니, 알딸딸한 게 기분 좋았다.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잠실나루 역 가는 길은 호젓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야경을 찍어려니, 세 다리가 없었다.
카메라가 흔들려 불빛이 미끄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진이면 어떻고, 빛 그림이면 어떠랴?






유난히 밝은 보름달에 끌린 건, 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손녀 같았다.


이 험난한 말세에 태어난 걸, 과연 좋아만 할 일인지...



사진,글 / 조문호
















충무로 상권이 을지로를 비롯한 주변지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와 사진을 대표한 충무로였지만, 요즘은 밤만 되면 한산하단다.



 


지난 11일 충무로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남진씨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술 한잔하자며 630분까지 갤러리로 오라기에, 전시 오프닝이 있는 줄 알았다.



 


전시장에 들렸더니, 박승만, 송석우, 정휘동씨 삼인전이 열렸는데, 작가들은 보이지 않고 반가운 분만 여럿 있었다.

오늘 오프닝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어제였다며 오늘은 술 한 잔 하기 위해 모였단다.




 

먼저 전시된 사진부터 돌아보았다.

박승만씨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사물에 대한 존재 이유를 나름으로 해석하고 있었고,

송석우씨는 살면서 겪는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정체성의 키워드로 풀어갔다.

바다를 찍어 화면을 분할시킨 정휘동씨는 삶의 공허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 보였다.

젊은이들의 아픔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공통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진 작업에 고민이 많은 분이나, 매너리즘에 빠진 사진가들은 꼭 한번 볼만한 전시였다.




 

이 날 전시장에 모인 분은 브레송김남진 관장을 비롯하여 비움갤러리김상균씨, ‘꽃피다갤러리 김유리관장 등

충무로에서 사진갤러리를 운영하는 세 분이 모여, 의외로 생각되었다.

그 외에도 눈빛출판사이규상씨와 사진가 김문호, 김영호, 이수철씨도 와 있었다.



 


다들 충무로에 있는 중국집 서동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동관은 오랜만에 갔지만, 20여 년 전에는 자주 들린 단골집이다.

삼성카메라클럽에서 현대사진가회로 바뀌며서 옮겼던 사무실이

지금의 해물탕집인 조방낙지 맞은편에 있었기에 종종 들린 것이다.



 


주인도 그대로였지만, 오래된 집기까지 눈에 익었다. 골동품에 가까운 금성에어컨이 아직까지 붙어 있었다.

모든 게 수시로 바뀌는 세태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오래된 것들은 가게나 물건이나 모두 정겨웠다.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니 정영신씨도 왔는데, 충무로에서 50여년을 살았다는 손필수씨가 나타났다.

중부거북상조회회장이라 적힌 명함을 돌렸는데, 충무로 상권을 살리기 위해 애쓰시는 분이었다.



 


아마, 김남진씨에게 충무로 사진축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자리를 주선한 것 같았다.

그래서 충무로에서 사진갤러리 운영하는 분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사진 인들이 힘을 뭉쳐 충무로에 사진바람을 다시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때는 충무로가 사진인들의 메카가 아니었던가?

필름현상에서부터 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충무로에서 이루어졌는데, 사진이 디지털화되며 사진인들 발길이 점차 줄었다,

예전에는 길거리에서 반가운 사진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으나, 요즘은 가뭄에 콩나기 수준이다.



201512월 이해선사진상을 수상한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과 함께한 김한용선생, 오른쪽은 윤주영선생

 


충무로 사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돌아가신 김한용선생 이야기가 나왔다.

그분이 누구인가?

한 평생을 충무로에서 광고사진을 위해 몸 바친 분이다.

선생께서 사용하신 연구소 자체가 우리나라 광고사진의 역사며, 충무로 역사다.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좌로부터 김한용, 정범태, 이명동선생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집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으시던 선생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그러나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며 건물이 매각된다는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는데,

김남진씨 말에 의하면, 45억에 팔려 철거되었고, 이미 신축건물 완공이 목전에 있다는 것이다.

예상은 했으나 막상 현실로 닥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좌로부터 최봉림, 김한용, 강운구, 이명동, 한정식선생

 


그런데 서동관식사비를 손필수씨가 모두 계산해 버려 부담스러웠다.

그 밥 값을 위해서가 아니라, 충무로 사진축제를 비롯하여 충무로가 다시 사진의 메카로 발돋움하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자리가 파하여 김남진씨가 생맥주 한 잔씩만 더 하자지만 사양했다.

통풍으로 맥주는 못 마시지만, 과음하면 숨이 가빠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다.




 

집에 돌아왔으나, 사라진 김한용선생 스튜디오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일찍 서울시에 청원을 넣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상황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살펴보려, 이튿날 아침 다시 충무로에 나갔다.





큰 길 가의 건축물은 마무리 중이었고, 선생의 스튜디오가 있던 골목도 마찬가지였다.

꿈의 공장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곳에 있던 집기나 장식물은 다 어디 갔는지,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김한용선생께서 임종할 무렵에 스튜디오가 있었던 골목길


 

그 곳은 광고사진의 대부이신 김한용 선생께서 60여 년 동안 희망을 키워온 꿈의 공장이며,

우리나라 광고사진의 요람이었다.

선생의 사진 속에는 추억의 스타들과 함께한 추억이 있고, 우리나라 산업 발전사가 담겨있다.

사실, 그 건물은 서울시에서 구입해 광고사진 박물관으로 영구 보존해야 했다.



 


돈 앞에는 역사고 인륜이고 모두 무너지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

이제부터라도 사진 인들이 똘똘 뭉쳐야 한다.

사진가들의 권익을 찾는 것은 물론, 우리 사진의 역사는 우리가 지키자.

 

사진, / 조문호

    

















김한용 선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을 찿아 보았다.


2016년 5월29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김한용선생께서 운명하신 해 겨울, 충무로 스튜디오를 찾았다.

굳게 닫긴 정문 앞에는 낙엽만 딩굴었는데, 김남진,이규상, 엄상빈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정영신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장사익씨와 환담을 나누는 김한용선생

20133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홍순태선생 개인전에서..

좌로부터 주명덕,강운구,이완교,황규태,홍순태.김한용,구본창,한정식선생

20133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홍순태선생 개인전에서..

김녕만씨가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윤세영, 권태균, 김남신, 이완교, 조문호, 강운구,

황규태, 송영숙. 민병헌, 홍순태, 김한용, 주명덕, 한정식, 구본창, 박영숙, 최봉림씨



 



 



충무로에 자주 가지만, 맛 집들이 몰려있는 인현시장(仁峴市場)은 미처 생각 못했다.
인현시장은 50년대 말엽에서 6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시장으로, 5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단다.
그 이전은 잘 모르지만, 영화거리와 인쇄골목으로 알려진 충무로 뒷골목이라, 현재와 과거가 함께 하는 장터풍경을 연출한다.






인현시장의 골목 폭 은 1-2m정도로 좁지만 길이는 2백미터  남짓되는 곳에 100개가 넘는 점포가 밀집해 있다.

숨겨진 맛 집이 많은데다 가격까지 저렴하니, 인근의 인쇄공이나 가난한 장사꾼들이 많이 이용하는데,
그 오밀조밀 붙어있는 밥집의 정취가 서민적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지난 18일 충무로 ‘반도갤러리’에서 열리는 조성기사진전에 간 김에, 

 ‘브레송’에서 열리는 고정남씨의 ‘우리는 예술가(0)사’전에도 들렸다.
‘갤러리 브레송’ 홈피 만드느라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는 김남진관장은 만날 수 있었다.
난 이미 취했지만, 술 한 잔하자는 김관장 따라나섰다.






어딘지도 모르며 따라 가다보니, 30여년 전 김문호씨와 함께 사무실로 쓰던 충무로 ‘카메라워크’ 이층집도 보였고,
참치백반집과 된장집 등 안면있는 식당들이 하나 하나 나오더니, 평소 시장이라 생각지도 못한 인현시장 골목을 만난 것이다.
김남진씨 단골집을 찾아가 앉았으나, 난 더 마실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마시도록 놔두고 난 시장이나 돌아보았다. 






내가 없다고 마누라 뺏길 일은 아니니,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며 오랜 추억자락이나 뒤진 것이다.
진화된 세상 풍경속에는, 원초적인 것을 자극하는 것들이 족쇄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이 곳은 인사동 못지않게 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충무로에 사무실을 두기도 했지만, 한 때 근무한 '월간사진'사무실도 인현동에 있지 않았던가.

근일간에 다시 인현시장에 들려, 못다한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한 곡 부를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14일에는 원로시인 강 민 선생과 소설가 김승환 선생께서 전시장을 찾아 주셨다.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페친이라 알고 오신 것 같았다.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추운 날씨라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진보다 나를 만나러 오셨기에,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강민 선생님께서는 잘 아는 곳이 있다며 따라오라 하셨다.
찾아 간 곳은 길 건너편 골목에 숨은 ‘호미곳“이란 식당이었다.
‘문학의 집’ 가까이 있어 문인들이 자주 드나 더는 밥집이었는데,
십 오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

선생님도 십 여 년 동안 단골이셨다는데, 싱싱한 해산물이 주 메뉴였다.
시원한 대구탕에다 소주까지 곁들였더니, 엊저녁에 다친 속이 다 풀렸다.
그러나 메뉴판을 보고나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책 판돈 삼 만원만 집어넣어 왔는데, 술값이 좀 부족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을 언제 읽었는지, 강민 선생께서 먼저 계산해 버렸다.
삼 만원이라도 꺼냈으나, 막무가내셨다.
매번 신세만 져, 모처럼 밥 한 끼 대접하려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시가 끝난 후, 인사동에서 사드릴 작정으로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돌아가시는 두 선생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선생님 부디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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