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쪽방에 처음 왔을 때, 이해되지 않는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물려줄 가족도 없고 오래 살지도 못할 사람이 돈을 이불 밑에 파묻어 둔다던지,

줄 세워 나눠주는 선물에는 목을 매지만, 더 좋은 문화혜택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술과 담배를 즐기는 사람 외에는 하루 종일 좁은 방에서 외출 한 번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기거한지 3년이 가까워오니 나도 모르게 서서히 길들어 가고 있었다.

서민 복지를 위한다는 사탕발림의 정책들이 재기할 수 없도록 주저앉히며,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사라는 빈민보호구역처럼...


 

나 역시 건강에 문제가 생겨 주민들과의 술자리를 자제하니, 하루 종일 꼼짝 않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다.

이젠 일기 쓰듯 블로그에 올리는 일조차 귀찮아 졌다.



몇 일전 샘터편집장 이종원씨가 찾아와, 요즘 왜 동자동 소식을 올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대개의 동자동 사람들이 모든 걸 포기하듯,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일에 매달리기 싫어진 것이다.

 


더구나 일기장처럼 올린 사진에, 딴지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초상권이 있다거나, 왜 관심 없는 이야기를 올리냐는 것이다.

관심이 없으면 보지 않으면 되고, 그래도 눈에 거슬리면 페친을 끊으면 될 것 아닌가?

그가 못한 일을 대신 끊어주었지만, 씁쓸했다.


 

이종원씨가 떠나고 난 뒤, 그동안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다시 힘을 내는 계기가 되었다.

오래된 사진을 정리하는 일이 더 급해, 마무리 할 일을 서두르기로 다짐했다.

아파 누워버리면 끝장인데, 더 미룰 일이 아니었다.


 

요즘 갑자기 날씨가 더워 그런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많다.

의욕을 잃어 술 취한 사람도 있지만, 더운 쪽방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다.



서울역 주변에도 여기 저기 모여 술을 마셨고,

그 날 밤은 열심히 사는 원용희씨까지 길거리에서 술을 마셨다

.

 

좋지 않은 일이 있는 모양인데, 얼마 전에는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3년 전 동자동에서 합동결혼식까지 올린 김만귀씨가 심경섭, 김정호씨 등 많은 사람의 돈을 빌려 날라버린 것이다.

밝혀 진 액수만 2,400만원이라는데, 쪽방 사람들에게는 적은 돈이 아니다.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악착스레 모은 돈을 사기꾼 입에 털어 넣어 버렸다.


 

쪽방 촌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산다.

순박한 사람들 속에 깡패, 양아치, 사기꾼도 있지만,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지 않으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엔 큰 사건만 터지면 서울역 부근에 사는 전과자부터 조사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기야! 불쌍한 사람 등쳐먹는 그 놈인들 편하겠나?


 

이달 초순에는 옆방에 사는 건물 관리인 정선덕씨가 방문을 두드리며, 라면받으러 공원에 나가자고 했다.

 서울역쪽방상담소’주선으로 대한결핵협회에서 결핵검진을 하는데, 엑스레이를 찍으면 라면 열개를 주었다.



다들 건강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라면 때문에 검진을 받는 것이다.

목숨보다 라면이 더 급한 사람들이다.


 

지난 17일은 서울역쪽방상담소에서 주민간담회를 열었다. 반상회 성격의 주민 자치회지만 다들 관심이 없다.

쪽방상담소 체제가 바뀌기 전인, 도망친 김만귀씨가 위원장으로 있을 때는 20-30명 정도 나왔으나, 그 절반도 나오지 않았다.

참석한 분은 쪽방상담소 전익형 실장을 비롯하여 김원호, 김정길, 전인중씨 등 열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가 올 여름 날씨가 더운 날에는 지하에 있는 회의장에 나와 자라거나,

몇 일후에 있을 화담 숲나들이에 참여해 달라는 등 통상적인 공지사항이었다.

일회용 곰탕 몇 개 담긴 봉지로 걸음 값을 대신했지만...


 

제발 신바람 나는 좋은 일이 아니라면, 이런 형식적인 회의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뭔가 자율적으로 하는 것처럼 구색이나 맞추는 이 따위 일에 왜 시간을 소모하는가?


 

지난 20일은 샘터이종원 편집장이 쪽방을 방문하기로 했다.

몇일 전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나, 난감했다.

내가 도와준 서울문화투데이와는 어쩔 수 없이 인터뷰를 했으나, 일체의 인터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종원씨는 작년에 만나적도 있지만, 사진가 김수길씨 친구라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는 처지라 문자를 씹었더니,

그 이튿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인터뷰 못할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동자동이야기를 빼고 하겠다기에 마지못해 승낙한 것이다.


 

오후 세시 무렵, 공원 앞에서 이종원씨를 만나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사는 이야기에 동자동 이야기가 빠질 수 없어 걱정스러웠다.

좀 있으니, 남원에 사는 사진가 최선호씨가 주소만 들고 쪽방으로 찾아왔다.


 

프로필 사진만 찍는 것이 아니라 골목에서도 사진을 찍었는데, 지나가던 이배식씨가 쳐다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사진 찍는 사람이 오늘은 찍히는 신세가 되었네


 

일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가 소주 한 잔 나누었다.

많은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술 자리에서 이런 저런 하소연을 했다.

술만 들어가면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는 버릇이 뒤늦게 걱정되었다.

편집장께서 잘 걸러 옮겨야 할 텐데...


 

21일은 동자동 공원에서 오랜만에 박성일씨를 만났다. 넓은 집으로 이사 했다며 집 구경 가자고 했다.

따라가 보니 아내 박소영씨 혼자 있었는데, 집이 꽤 넓었다. 거실까지 있었지만, 옮겨놓은 짐은 별로 없었다.


 

좋은 집에 어떻게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했는데,

구세군에 어려운 사정의 편지를 보내는 등 곳곳에 도와달라는 SOS를 보냈다고 한다.

덕택에 구천만원의 대출을 받아 입주하게 되었는데, 그 이자는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는 것이다.


 

노숙 10년에 쪽방생활 16년차인 박성일씨는 3년 전 박소영씨와 짝을 맞춰 동자동에서 합동결혼식을 올렸으나,

쪽방에서 뚱뚱한 아내와 함께 살기가 어려웠다. 여기 저기 옮겨 다닌 지가 여러 차례지만, 이제 한시름 놓은 것 같다.


 

그런데, 몰랐던 소식도 전해 주었다. 동자동 주민 100여명이 변두리 임대주택으로 이사 갔다는 것이다.

어떤 조건으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동자동 개발에 따른 물밑작업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자기도 김만기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나, 돈이 급한 아내의 채근으로 간신히 받아냈다며 한숨을 썰어 내리기도 했다.


 


22일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화담 숲으로 단체 나들이를 했다.

마침 김용철, 김정심씨가 옆자리에 있기에 은근히 마음을 떠 보았다.

두 분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결혼해 같이 살면 어떠냐고 말했더니, 한사코 손사래 쳤다.

기초생활수급비가 깎여 더 살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아마 주거비 20만원이 줄어든다는 말인 것 같은데, 오나가나 그 놈의 돈이 원수다.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기초생활수급비를 탈 수 없는 사각지대의 노숙자도 많지만,

조금만 수입이 생겨도 잘리거나 삭감되어, 아예 일을 하지 않게 만드는 기초생활수급 규정을 빨리 개정해야 한다.

자립하는 일이 어렵기는 하지만, 최소한 희망은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사진,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에서 할 일이 많아 바쁘다.
그 많은 사람들을 제켜 놓고, 오랜 인사동 흔적 찾아보는 일이 제일 먼저고,

그 다음에는 ‘유카리화랑’의 서정춘시화전과 ‘민예사랑’의 최선호전시에 들려야하기 때문이다.



맨 먼저 내가 붙들고 있는 인사동의 오랜 흔적을 찾으러 돌아 다녔다.
매번 보던 풍경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꼼꼼히 살펴보니 살아남은 아스라한 이야기도 있더라.  

시멘트가 벗겨져 배가 터져 나온 담장의 흙과 돌에서 오랜 인사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어렵게 버티고 있는 오래된 전신주는 물론 여러군데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고 문영태 화백 미망인 장재순여사의 골동가게 ‘민예사랑’에서 최선호씨의 그림과

도예전을 연다기에 좀 의아했다. 그 좁은 공간에 있던 골동들은 다 어쩌고, 두 가지 전시를 하는지?

입구들 들어서니 200호 남짓한 꽃그림이 마음을 움켜잡더니, 주변의 소품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골동가게에서 갤러리로 왔다 갔다 하는 ‘민예사랑’의 변신술도 기막히더라.




세 번째는 인사동 마당발 노광래씨가 ‘유카리’에서 서정춘시인의 시화전을 열고 있었다.
서정춘시인이 누구인가? 노벨문학상에 목맨 주책시인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다.

그 분의 시를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어 좋았는데, 억지춘향 격의 작품도 있어 시를 모독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30여명의 화가와 사진가들이 참여했는데, 화가가 시에 빠져 그림으로 승화시킨 작품도 있더라.

 





네 번째는 '유카리화랑'에서 김진열씨를 만나 ‘시가연’에 갔더니, 신나는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가연’은 시인은 물론 음악인과 예술가들이 어울리는 장소로, 인사동의 풍류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임방울선생의 판소리 '추억'을 우지용씨가 들려주었고, 그림 그리는 김진열씨의 창도, 명창 빰 치더라.

시와 소리와 춤이 함께 하는 곳, 그것이 인사동의 풍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직은 괜찮은 인사동이더라.

갑자기 할 일이 생기니, 힘이 절로 솟는 하루였다.


사진,글 / 조문호





























고 문영태화백

 

 

민중미술가 문영태씨가 지난 9일 아침,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났단다.

이틀 전 박진화화백으로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져 어려울 것 같다며 영장사진 한 장 만들어 달라는 연락을 받아 

걱정은 하고 있었으나, 억장이 무너지는 전갈이었다.


문영태씨는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늘 존경하는 친구였다.

1980년대 중반 '통일전', '여성과 현실전', '탄압사례전', '반고문전', '정치와 '미술전' 등의 미술운동으로 문화의 힘을 결집시켜 사회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 이후 90년도에 들어와서는 이지누, 박불똥, 류연복, 박 건, 조경숙씨 등 열일곱 명이 모여 ‘경의선모임’이라는 작업공동체를 만들어 '분단풍경'(눈빛출판사)이라는 사진집을 펴내는 등 사진작업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글이다.

한 때 진보잡지에 연재했던 한국 문화에 대한 독보적 비평들이 큰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도 중반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관장으로 일할 무렵이었다.

인사동 길거리나 술집에서 자주 부딪혀 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는데,

작업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후원자로 술 친구로 한 30년 지낸 것이다.

 

지난 5월27일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김포 자택에서 열리는 전시가 내일까지니 와 달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줄 알고 예정된 약속까지 취소하며 달려갔으나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전시였다.

너무 실망스러워 “문형의 작품은 언제 보여 줄 거냐?‘고 투덜댔더니 ’한 번 해 볼까‘라는 긍정적인 말을 뱉어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아무리 가는데 순서가 없다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날 찍었던 기념사진이 영정사진이 되고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가슴이 미어진다.

 

다른 작가들은 인터넷까지 올려가며 작품을 못 보여줘 안달인데, 어찌 그토록 자신을 알리는데 인색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세상 돌아가는 꼴 더러워 몽땅 싸가지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저승에서나마 당신의 전람회도 열고, 당신의 생각을 담은 글도 발표하구려.

그리고 미워도 이 세상 끝까지 그 아름다운 향기를 좀 전해주시오.


여보시게 친구! 부디 잘 가시게.

먼저 가신 인사동 터줏대감들께 안부도 전해주고, 저승에서 만나거들랑 푸대접이나 하지 마시게...

 


사진: 정영신,조문호 /글: 조문호

 

 

2015,년 5월 28일, 그의 서재에서

 

 

2015년 5월 28일,자택 뜰에서

2015년5월 28, 서양화가 최선호씨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라며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2015년 5월 28, 사진가 정영신씨에게 저 물 건너가 북한의 개풍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015년 5월, 28일, 자택 거실에서 부인 장재순씨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

 2015년 5월, 28일, 필자와 함께

 

김포 월곶면의 살림집에 들어앉은 별난 전시장 '민예사랑'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지난 5월20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초대전은 도예가 변승훈씨와 서양화가 최선호씨의 '빙빙유람'전 이었다.

 

'민예사랑'은 꽃 피는 오월을 맞아 일 년에 한 차례만 전시를 연다는데, 올 해로 벌써 열세 번째 전시라고 한다.

 

동양화가 출신의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섬유미술가 출신의 도예가 변승훈씨는 전공을 바꾸어

또 다른 세계를 개척한 이력이 서로 엇비슷하다.

 

 

추상화 중 추상화인 미니멀리즘으로 무장한 화가 최선호씨는 한국의 색을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졌는데,

단색으로 이루어진 시적 느낌의 추상화가 매우 인상깊었다.

 

 

변승훈씨는 분청사기기법을 현대화한 부조작업으로 도자벽화 등 여러 가지 설치작품들을 만든 실험적인

성향의 작가인데, 덤벙기법으로 제작된 그의 분청그릇들은 자유분방한 멋을 한 껏 풍기고 있었다.

 

 

실내에는 품격있는 조선의 고가구 사이사이로 단색의 그림과 분청 그릇의 정겨운 질감이 오밀 조밀 전시되어 있었고,

정원에는 돌확과 장대석, 동자석등 몇 백 년은 됨직한 갖가지 골동들이 토종 나무들과 어울려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양화가 문영태씨의 아내 장재순씨는 인사동에서 30여 년 동안 '민예사랑'이란 앤티크숍을 운영해 온 골동전문가지만

이렇게 훌륭한 생활공간을 갖추고 오순도순 사는지는 미처 몰랐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라 두 부부의 생활이라는 점이다.

작품이나 생활 용품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절하게 배치해 주변과 조화를 이루었다.

 

문영태씨는 내가 동강생태환경 기록하려 정선 만지산에 가서 눌러 앉듯이

민통선 따라가는 기행문을 연재하다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앞 창문을 통해 북한 산하가 바로 눈에 들어오니, 늘 남북을 오가는 셈이다.

 

그런데 전시회를 개최하며 방명록 첫 장에다 '봄맞이, 이천 몇 년 꿈속에서'란 글을 쓰며

자신의 이름 영태를 적는다는 것이 우연찮게 용태로 적었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글 쓴 날이 김용태씨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기가 되는 날이었단다.

 

"전시회 준비하느라 일주기에 참석하지 못해 '용태형'이 직접 찾아 왔다"며 그가 웃었다.

 

사진,글 / 조문호

 

 

 

 

 

 

 

 

 

 

 

 

 

 

 

 

 

 

 

 

 

 

 

 

 

 

 

 

 

 

 

 

 

 

 

 

 

 

 

 

 

 

도예가 변승훈씨와 서양화가 최선호씨의 '빙빙유람'전이 끝나는 5월28일 오후6시경,

김포시 월곶면 '민예사랑'전시장에서 안톤 바라노프 초청연주회가 열렸다.

 

이 날 연주회에는 러시아출신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안톤 바라노프와

성악가 김재연씨가 초청되어 참석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안톤 바라노프의 섬세한 기타 연주와 소프라노 김재연씨의 청량한 소리가 어울려

마치 통일을 갈망하는 메시지가 북녘 땅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찬조출연한 도예가 변승훈씨는 '진주낭군'을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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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아침, 서양화가 문영태씨로 부터 전시회에 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연락이기도 하지만, 내일 전시가 끝난다고 해서 더 당황스러웠다.

예정된 일정을 바꾸어, 네비의 안내를 받아가며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꼬불꼬불 좁은 길을 따라가다 북한을 눈앞에 둔 서해안 최북단마을에 멈춰 섰다.

문영태, 장재순씨 부부가 사는 ‘민예사랑’은 정말 기막힌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쪽 물 건너  있는 산들이 북한의 개풍군이라는 말에
"오늘 술 한 잔 먹고 넘어 가야겠다"며 흰소리까지 해댔다.

그런데 위치도 위치지만 고관대작의 저택인지 미술관인지 살림집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걸린 그림들이 문형 작품이냐?'고 물었더니,
서양화가 최선호씨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내가 잘 못 알고 온게다.

문영태씨는 1990년도 경의선모임이란 공동작업체를 만들어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다.
그가 주축이 되어 사진가 이지누, 화가 박불똥, 유연복, 최민화, 김기호, 김태희, 남궁산, 백창흠,

박 건, 송진헌, 유은종, 이정희, 조경숙, 공예가 김원갑, 이송열, 미술평론가 라원식씨 등 열일곱명이 참여했다. 

그 결과물로 ‘분단풍경’(눈빛출판사)이란 사진집을 펴 내, 통일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화가인 그의 그림을 볼 수 없었기에 이번이 기회다 싶었는데, 허탕 친 것이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녔으나, 어디 숨겼는지 작업실은커녕 그의 작품 한 점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서양화가 최선호씨와 도예가 변승훈씨의 작품들을 감상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특별 초대된 안톤 바라노프의 클래식 기타연주와 성악가 김재연씨의 청량한 소리에

매료되어, 황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년 오월에 열릴 전시에는 문영태씨의 숨겨 논 작품들이 걸리길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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