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S교육방송 ‘디지털평생교육원’의 ‘장터에서 만나는 인문학’이 개강되었다.

아내는 강의 준비하느라 몇 달을 낑낑댔지만, 여지 것 지켜보기만 했다.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 참견할 상항도 아니었다.
녹번동에서 송파까지의 먼 거리를 오갔지만, 한 번도 데려다 준적도 없다.

마지막 12강이 열리는 24일, 처음으로 IBS방송국에 따라 나섰다.
강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내의 말솜씨가 걱정되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그동안 얼마나 연습을 했던지, 장터의 약장사처럼 말을 잘했고, 강의 내용도 괜찮았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우습기는 했으나
참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녹화하면 두고두고 재방이 가능 하다니까...

강의를 끝내고는 '나도여행작가다' 라는  과목을 하나 더 맡겠단다.
얼마나 많은 수강생이 모여들지는 모르겠으나,
이러다 사진가에서 약장사로 전향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다.
돈 못 버는 자신이 새삼 한심스럽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굶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만도 고맙게 생각한다.

사진,글 / 조문호

 

 

 

 

 

 

 

 

 

 

 

 

                                                                                                        

            


 

프로젝트 ‘장에 가자2’ 정선전시를 어렵사리 끝 마쳤다.
27일간 서울과 정선을 오가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일반인들의 참여를 확대하기에는 한계를 느꼈다.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전시 문화에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하는 큰 숙제만 남긴 셈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지역 사진인의 비협조적인 자세다.
주최 측인 정선문화원에서 정선군청 홈페이지에 ‘장에 가자’ 초상사진 퍼포먼서 안내를 했는데,

그곳에다 비난하는 댓글을 올린 것이다.
정선 사진의 대가로 자처하는 스스로의 존재를 몰라주는데 따른 불만인지 모르지만,
전시는 보지도 않은 채,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 와 실소를 머금게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협회원’이란 과대망상적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정선문화원의 전시작가란 말에 공식 인증된 작가 타이틀을 공개하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사진작가란 말이긴 하지만, 사협 회원이 아니니 촬영기사라는 것이고,

사진을 무료로 찍어 주면 자기같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논지였다.
한 사진인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우물 안 개구리 격인 일고의 가치 없는 글이었으나,

아마추어 공룡 집단 '한국사진작가협회'의 병폐를 보는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이었다.
회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교육은 뒷전으로 한 채,

숱한 공모전으로 회원들과 감투 늘리기에만 급급하더니, 이제 그 한계점에 달한 것 같았다.

나도 20여년 전 ‘한국사협’이라는 회보 편집장으로 그 조직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공모전비리는 일상이었고, 조직의 패거리적 병폐에 한계를 느꼈다.

그 당시 이사장이었던 고 문선호씨가 나의 ‘87민주항쟁’전시 추진에 제동을 건 적도 있었다.

사진가를 대표하는 사람이 어떻게 격려, 지원은 못할망정 전시를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사직서를 내 던지고 강행했지만, 사협이란 단체가 본래 힘 있는 정치에 아부나 하는 그런 어용단체인 것이다.

그 이후 사진과 교수들을 비롯하여 작가의식이 투철한 사진가들은 모두 사협을 탈퇴하여

‘민족사진가회’란 새로운 단체에 영입되었으나, 그 또한 사진가 김영수씨의 독주로 회원들의 결집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사실 작가들에게 단체는 중요치 않다. 공익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작가 개인으로서는 제약에 불가할 뿐이다.

‘예술인총연합회’ 산하 각 예술단체의 창립 배경도 결국은 부패 정권이 예술가들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일그러진 사진계 내막도 모른 채, ‘사진작가증’이라 적은 전대미문의 회원증 하나에 현혹되어 

가입한 다수의 피해자(사협회원)들을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그들을 공모사진이나 형식사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진으로 이끌 수는 없을까?
이 것 저 것 고민거리만 안겨준 정선 전시였다.

글 / 조문호

-아래는 군청 홈페이지에 올린 전석원씨의 글-

“정선문화원에서 시행하는 전시사업은 작가가 아니라
촬영기사라고 표기해야 맞습니다
아무나 같다가 붙이는 작가타이틀 말고
국가에서 공식 인증된 작가타이틀을 공개 해주시면,
어떤 공인단체에서 그런 일을 하는지 의문이 가서 묻고 싶습니다.
정선에 포크레인 공사를 정선문화원에서 무료로 다 해준다고 하면
정선에 포크레인 하시는 분들 포크레인 정선문화원에다가 다 세워놓고 항의 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문화 홍보와 마케팅이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추락시키면서까지 그렇게 절박하게 정선문화원을 운영 하는 것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정선문화원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제데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사)한국사진작가협회 디지털아트분과 부위원장
(사)한국사진작가협회 강원도지회 사업간사
강원포토 대표 전석원 “

 

 



-정영신씨가 찍은 아래 사진들은, 전시가 끝나는 지난 15일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이다.-

대구에서 온 양기원씨, 부산에서 온 최종렬씨, 서울에서 온 이도영, 심재현, 이명화, 송민준, 손영주, 이해인, 박찬의씨 정선의 이하윤, 이진순씨, 그리고 무지개빛 청개구리라는 이은영, 엄세빈, 박상우, 박준우, 박용현, 전도연, 송영은, 김민지, 박종선, 김봉섭, 신윤택, 정우준, 임나경 학생 등

 

 

 

 

 

 

 

 

 

 

 

 

 





 

 

지난 9일 벼루고 벼루던 이명동선생 댁을 방문키로 했다.
일주일 전부터 선생님께서 한 번 오라는 전화를 하셨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뒤늦게 날짜를 잡게 된 것이다.

아침 일찍 전화를 드렸으나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선생님 핸드폰은 잘 연결되지 않는 고물이라 내심 걱정되었다.
네 번째 전화에서 어렵사리 연결되어 아내와 함께 부랴부랴 약수동 자택으로 달려갔다.

마중 나온 선생님보다 밝게 웃으시는 사모님의 모습이 더 좋았다.
끼니마다 선생님께서 쑨 죽으로 연명해 그런지 초채한 모습이긴 하나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다며 해맑은 웃음을 지어셨다.
“하도 죽을 많이 끓여 이젠 죽 박사가 됐다”며 선생님도 웃으셨다.

탁자 위에는 이번에 나온 “사진예술“8월호가 놓여 있었다.
최민식선생 사진상 논란을 대충 아실 것 같아 선생님 생각을 여쭈어 보았다.
"1968년3월1일,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만든 개인사진집이 최민식 휴먼1집이다"며
말문을 여셨다.

선생께서 추천해 동아일보에서 그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작가정신이나 사진들이 좋아 만들었는데, 그 일로 중앙정보부까지 끌려 같다고 한다.
거지일색으로 찍은 사진 책을 만든 것이 북한의 사주를 받지 않았냐는 것인데,
동아일보라는 배경만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하셨단다.
요즘 젊은 사진가들이 최민식선생의 사진을 비하하는 것은 두고 꺼낸 말씀이시다.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던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의 시대적 배경부터 생각해야 한다며,
평생을 몸 바쳐 일군 업적을 얄팍한 논리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맥에 의한 수상자 결정은 사람들이 정에 약해 그런 것이지만,
이젠 바뀔 때도 되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서둘러 일어 나셨다.

“요 앞에 잘 하는 도가니탕 집이 있으니 가자”
이번에는 제가 대접하러 왔으니 선생님께서 계산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씰데없는 소리’라며 말을 자르신다.
가게 가서는 주인더러 ‘이 사람한테 돈 받으면 다시 안 온다’며 엄포까지 놓으신다.

자리를 끝낸 후 댁까지 모셔 드리겠다는 말도 일거에 뭉게버리고,
지하철 에리베이터까지 따라 내려 오셔서 민망스럽게 만든다.
“선생님 부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저도 마누라 아프면 선생님께 죽 쑤는 거 배우러 올게요.”

사진, 글 / 조문호

 

 

 

 

 

 

 

 

 

 


 

 

정선시외버스터미널에서 열리고 있는 ‘프로젝트 장에가자2’ 사진전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호객행위로 전시장의 공백을 메워가는데, 막상 사진전에 들려 초상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대 만족이었다.
지척에 있는 좋은 전시를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며 정선군의 홍보부재를 아쉬워했다.

지난 7일에는 시간 내어 찾아 온 지인들이 많았다.
정선의 문인 안영환, 김우영씨를 비롯하여 장승공예가 서덕웅, 최원희, 귤암리 최연규, 지동진, 신승철씨 등

여러 명이 들려 축하해 주었고, 그 외에도 전제덕, 이서정, 김혜진, 전형수 이성학, 이승준, 정상임, 임기덕,

강효순씨가 들려 초상사진을 찍었다.

메마른 삶의 현실에 장터가 유일한 희망이다. 모두들 장에가자.
이 전시는 오는 15일까지 열린다.

사진: 정영신 / 글 조문호

 

 

 

 

 

 

 

 

 

 

 

 

 

 

 

 

 

 

 

 

 

 

 

 

 

 

 

 

 

 

 

 






 

 

정선 장날을 맞은 지난 7일 정오 무렵, 정선아리랑시장을 찾아 나섰다.
사진도 찍고 시장식당에 들려 곤드레 밥을 사먹을 작정이었다.
‘장에가자’ 사진전이 열리는 터미널에서 시장까지는 걷기엔 좀 먼 거리였다.

 
이 날처럼 무더운 날씨는 생전 처음이었다.
밀리는 자동차 사이로 어렵게 주차하였으나, 내려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푹푹 찌는 열기에 숨이 탁탁 막혔다.

장터에는 사람 반 물건 반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사람들을 헤집고 식당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주변을 돌며 사진만 찍었다.
난전에는 철이 철인지라 옥수수가 많았으나 그보다는 시원한 냉차가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이라 장터공연은 중단되었지만 사람들은 모여 앉아 연신 부채를 흔들었고,

자신의 더위보다 데리고 나온 강아지에 열심히 부채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운 날씨에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 시원한 가게를 찾아 나섰다.

시장입구의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어섰더니, 그 곳에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들 물건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스크림 하나 사 들고 더위를 식혔다.
시장 안의 매장들도 그 많은 사람에 비해 상품은 잘 팔리지 않았다.

요즘 정선에는 피서 온 관광객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하루 전에 들린 평일도 장은 열렸으나, 장날 보다는 한결 여유로웠다.
외곽에는 어린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시장조합의 이윤광 이사장은 손자를 업고 시장바닥을 돌아 다녔다.

질서정연하게 들어 선 매장이나 상인들의 익숙한 손놀림에서 정선시장만의 저력이 느껴졌다.

성공한 정선아리랑시장을 지켜보며, 재래시장의 밝은 내일을 점쳐본다.

사진, 글 / 조문호

 

 

 

 

 

 

 

 

 

 

 

 

 

 

 




 

 

예전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당이 도처에 있었다.
대개 서낭신이 붙어사는 오래된 나무나 돌 더미를 서낭당이라 했으나,
곳에 따라서는 사당, 즉 당집을 지어 서낭신을 모시기도 했다.

서낭당은 잡귀나 병을 막아주며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역할 외에도
마을 어귀에 자리 잡아 먼 길에서 돌아오는 가족들이 서로 만나거나 헤어지는
작별의 장소이기도 했다. 마음의 평안까지 안겨주는 곳이었으니,

이 얼마나 신성하고 드라마틱한 장소였던가?

이렇게 오랜 세월 민중과 함께 해 온 서낭당이 이젠 대부분 사라졌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우리 고유의 의식과 전통을 깡그리 없애 버린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란 깃발아래 씨를 말려 버렸다.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종교는 손대지 않았다.
미신이라 내쳤지만, 다른 종교도 결국 마음의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힘센 다른 나라 눈치는 보면서 국민 아니 조상은 거지 발싸게 처럼 얕본 것이다.
그런 짓을 했으니 어찌 천벌을 아니 받겠는가?

우리 마을 만지산 서낭당이야기하려다, 괜히 열 받았다.
그렇게 서슬 퍼른 칼날에도 살아남은 곳이 내가 사는 정선 만지산 서낭당이다.
그만큼 깊은 산골에 숨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해마다 만지골 사람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기도 하고,
몇 년 전에는 만지산에 산삼 심으러 온 서울의 ‘농심마니’들도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무당을 불러 서낭당축제를 개최할 만큼 애착을 가진 곳이다.

그런데 올 들어 이 골에 자꾸 우환이 생기는 것이다.
모두 아흔은 넘겼으나 만지골의 어르신 두 분이 차례로 돌아가시더니,
두 달 전에는 옆집에 사는 노성수(60)씨가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과음으로 팔을 헛짚어 유리에 동맥이 끊기는 끔찍한 사고가 난 것이다.

지난 8일 밤늦은 시간 아내와 서낭당 앞에 무릎 꿇고,
제발 우환을 거두어 달라며 서낭신께 빌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만지골의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내친김에 이 사악한 세상까지도 바로잡아 주소서!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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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장에가자2’가 정선버스터미널 문화공간에서 막을 올린지도 벌써 보름이 되었다.
초상사진 촬영 날만 전시장에 나가지만 사진전을 보러오는 관객은 별로 없다.
정선 곳곳이 피서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데,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이냐?
하기야 서울서 하는 전시들도 텅텅 비어있는데, 멀리 나온 피서지에서 그까짓 사진전이 무슨 소용이랴!

피서객들을 겨냥한 정선문화원의 순진한 생각만 나무랄 수 없어 적극적인 호객행위에 나선 것이다.
“아주머니~ 공짜로 찍어주는 사진 한 판 박고, 우리 시골 장 좀 사랑하이소!”
공짜라는 말에 끌리기는 하지만, 뭔가 의심쩍은지 다른 사람들의 눈치까지 살핀다.
그렇게 얼굴에 철판 깐 호객행위로 관객들은 끌어 모았지만,

사진 뽑는데 정신이 팔려 사진전은 아예 관심도 없다.

세상에! 제사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운 걸 내가 어쩌랴.
그게 정선을 찾는 관광객들의 문화수준인데...

사진, 글 / 조문호

 

 

 

 

 

 

 



 

 

디지털카메라를 접하면서 낭만적 삶의 시대는 끝난 줄 알았다.

사진정리하며 인터넷에 몰두하다 보니, 아내로부터 컴퓨터 중독자란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나 역시 기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한심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컴퓨터를 통해 소통하는 인연도 인연이려니와 사진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선에 있는 컴퓨터를 버리고, 정선 있을 때는 휴대폰도 사용하지 않는다.

정선 갈 때도 고속도로로 가지 않고 양평으로 가는 국도 따라 쉬엄쉬엄 간다.

완전히 서울과 정선을 구분해 불편한 이중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한 달에 열흘 정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사는 정선의 삶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자연을 즐기는 행복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잡초와의 전쟁으로 진땀께나 흘린다.

서울에 올라와도 밀린 자료 정리하느라 밤잠 설치기는 매 마찬가지다.

대신 서울에서는 잠꾸러기처럼 늦게 일어나지만, 정선에서는 새벽부터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새소리에 깨어서는, 표도 나지 않는 일을 온 종일 하는 것이다.

 

지난 말일부터 8월3일까지 머문 정선 체류기간은 평소보다 더 바빴다.

낯에는 전시장에 나가 ‘‘장에가자’ 퍼포먼서의 초상사진 찍어주느라 시간 보내고,

집에 들어와서는 밭을 점령한 잡초 뽑으며, 화재로 불탄 문짝 단장하느라 정신없었다.

그렇지만 하루 일을 끝내는 밤이 되면 아내와 함께하는 술잔 속에 하루가 스르르 녹아든다.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우리를 축복해주니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인사동을 기록하는 서울생활도 보람은 느끼지만, 힘들어도 정선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행복하다.

수시로 변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서부터 땀 흘리며 벌컥벌컥 마시는 시원한 물맛까지 더 없이 좋다.

그렇지만 현실과 밀접한 디지털과의 불륜, 아니 불편한 이중생활을 접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본처도 첩도 아무도 버리지 못한채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다.

 

이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작정이다. 어차피 함께 즐겨야할 동반자니까...

 

 

사진 : 정영신 /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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