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하루 앞둔 31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집을 방문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인사차 들렸는데, 대접할 음식이 마땅찮았다.

설날 세찬과 함께 마신다는 도소주는 없으나 대마불사주로 목을 달랬다.

 

이년 넘게 어렵사리 가게를 끌어가는 그로서는 빨리 코로나 역병이 끝나고

정상적으로 영업 하도록 해주는 것이 새해의 바람일 것이다.

만사형통을 기원했지만, 다들 나이가 들어 건강이 문제다.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연식이라 술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활철씨는 당뇨가 심해 술을 멀리해야하지만, 술장사가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술만 마시면 숨이 가빠 정신을 못 차리지만, 거절할 줄 모른다.

그러나 혼자서는 마시지 않고 주량도 점차 줄여나가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설날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가까운 분들과 술 한 잔하기로 했다기에 나도 가겠다고 했다.

활철씨가 시장 보러 가야한다며 일어나기에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했는데,

자고나니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으슬으슬 추웠다.

감기 같았지만, 불길한 생각도 들어 온 종일 누워 뒤척였다.

 

유목민에 가겠다고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오후에야 몸을 추서려 인사동에 나갔다.

좀 이른 시간이라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한복 입은 사람은 커녕, 거리에 나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곳저곳 전시장만 기웃거리다 유목민으로 발길을 옮겼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담배 피우러 나온 정영철씨가 멀리서 반가워했다.

오후 여섯시 밖에 되지 않았으나, ‘유목민엔 손님이 제법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정영철씨와 필립, 두 사람 뿐이었다.

여지 것 약속 없이 술 마시러 나온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입구에 자리 잡아 전활철씨와 술 마시며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어제는 몸이 아파 오늘 왔다니까,

자기도 어제는 몸이 좋지 않아 안원규씨 에게 맡겨두고 잤다는 것이다.

이인섭선생과 장경호씨 등 몇 사람 나오지도 않았다며

어제 먹다 남은 갈비 살이 있다며 한 접시 구워냈다.

 

얼마 전 김홍성씨가 페북에서 궁금해 한, 적음의 산문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오래 전 김홍성씨 서문까지 받아두었으나,

시집 저녁에가을밤의 춤만 내고 산문집은 출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적음의 정리되지 않은 많은 원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손을 대지 못했다는데,

유목민에 메달리다 보니 출판에 관한 일은 손댈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그 일을 맡아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

 

마침 가을밤의 춤표지에 사용된 신준식의 담뱃불 그림 속에

적음 육필로 쓴 파적이란 시가 적힌 작품이 벽에 붙어 있었다.

김홍성씨 말처럼, 적음의 음모정렬체가 또렷했다.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 '파적' 부분-

 

두 사람 다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적음은 암자에서 술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신준식은 술이 취해 길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아무리 운명의 장난이라지만, 어찌 이리 기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사동 이야기사진전 이후의 불편한 심정도 털어 놓았다.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한라산을 두 병이나 깠는데, 손님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여덟시 반 밖에 되지 않았으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며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니 끝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이년 넘게 끌었던 코로나가 주당들의 음주문화까지 바꾸어 버렸다.

처음 보는 나야 황당했지만, 활철씨는 익숙한 듯 자리를 치웠다.

 

나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여지 것 이른 시간에 술 취해 돌아간 적이 있었던가?

하릴없이 인사동 밤거리를 방황했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흥타령이 잠잠한 인사동을 들썩였다

 

그런데,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실수를 저질렀다.

술이 취하면 숨이 가빠 마스크를 쓸 수가 없는데,

대중교통에서 어떻게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는가?

경노석 구석자리에 앉아, 몰래 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한 것이다.

 

세상에! 숨 못 쉬면 죽는 것 아닌가?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산소호흡기 달린 마스크는 나오지 않는가?

정초부터 저승 문턱에 갔다 온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오래전 '인사문화마당'에서 찍은 포도대장과 순라꾼들

인사동은 추억을 먹고 산지 오래다,

40여 년 전 예총회관이 있던 인사문화마당 자리는 ‘포도대장과 순라꾼’들이 사용한 곳이다.

순라꾼들이 인사동 거리를 돌며 조선시대 풍정을 연출했으나,

재개발로 파헤쳐지며 지하에 묻힌 유물만 쏟아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사동은 문화마당만 바뀐게 아니라, 사람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고 인심까지 변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지만 아무런 대책도 관심도 없다

왜, 나만 못잊어 한물 간 인사동 노래를 줄창 부르고 있을까?

아마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 추억의 창고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모처럼 인사동에 나갈 일이 생겼다.

‘인사동이야기’ 사진전 결산이 안 된다는 노광래씨 연락을 받아서다.

홍수표씨가 사진 값을 본인이 직접 와야 준다는 것이다.

사진 전해 준 사람에게 주거나 계좌이체하면 될 텐데...

 

해가 바뀌었으나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 탓인지 인사동 거리는 한산했다.

홍수표씨를 만나러 인사동14길 골목을 들어서서 ‘신궁장 모텔’ 앞에 섰는데,

 ‘지리산’ 건물이 사라진 골목이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지리산’에 가려 보이지 않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서쪽 면이 훤히 드러났다.

다시 새 건물이 들어서면 볼 수없는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철거된 자리에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나, 변하는 것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SK허브빌딩 쉼터인 ‘개천정’위로 솟은 앙상한 가지들이 스산한 겨울풍경을 연출했다.

‘개천산업’ 회장실에 들어가니 홍수표씨 혼자 있었다.

자주 만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얼굴 한번 보자는 심사였다.

 

홍회장은 사진가 한정식선생의 고등학교 제자였고, 나와는 동갑내기다.

젊은 시절 법원 서기로 일했으나 월급 많이 주는 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단다.

행원 공채에 응시해 인사동 태화관 자리에 있는 국민은행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홍회장 사무실은 흡연이 가능한 보기 드문 장소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연신 줄담배를 피운 것은 흡연자의 설움에서다.

얼마나 냉대를 받았으면, 담배 피우는 사람만 만나면 동지애를 느낄 정도인가?

 

그곳을 나와 거리를 싸돌아다녔으나,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대감집’으로 바뀐지 오래된 옛 실비집 주변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실비집에서 만났던, 먼저 떠났거나 소식 끊긴 사람이 그리워서다.

 

적음 시집출판기념회에서 스스로 천재시인이라며 웃고 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민폐를 가장 많이 끼친 땡초 적음이었다.

‘월간 빠’란 이야기로 온몸을 흔들며 파안대소했던 옛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잡지지만, 자기가 주간이고 날 더러 조대표라며 수시로 깔깔거렸다.

서울만 오면 실비집에 죽치며 물주 나타나기를 기다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실비집에서 술 마시다 잠든 적음스님

그런 그가 갑자기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한 번 웃자며 ’일소암‘이라 이름붙인 그의 방을 들여다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오래 전 찍어 준 초상사진은 영정사진이 되었고,

숨진 지 며칠이 지났는지, 바닥에 시신 썩은 자욱이 선명했다.

벽에 목을 기대어 기도가 막혀 숨진 것 같았으나, 스스로 열반에 들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의 시 처럼 너무 그리워서 이승을 떠났을까?

 

적음스님이 열반한 자리

저녁에 / 최영해

 

“왜 그처럼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

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

 

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저녁을 꾸려가야 하는 것인가

 

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실비대학 총장 모녀와 사진기자 김종구, 소리꾼 김민경씨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세상을 하직한 인사동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랴 마는 유독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낄낄거리며 인사동 술꾼들 물주 노릇 톡톡히 한 '한국일보' 사진기자 김종구,

 

인사동 밤거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화가 이청운과 강용대

별을 그리다 별나라로 떠난 작은 거인 강용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끊긴 이근우씨와 실비대학 총장님

 

이근우와 벼평모씨가 어울려 '레떼'에서 춤을 추고있다.

인사동이 그리워 ‘서울로 서울로’ 노래 부른 미국계신 최정자시인,

 

최정자시인 좌우로 김정혜씨와 이점숙씨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만 / 최정자

 

사람만

사람을 속이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미워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배신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등치는 거야.

 

사람만

사람을 뒤집는 거야.

 

사람만

양의 탈을 쓰는 거야.

 

눈오는 인사동 거리에서 포즈를 취한 최정자시인과 정영신씨

다 바뀐 인사동을 방황하는 것은 그 때 그 사람들이 그리워서다.

 

사진, 글 / 조문호

 

최정자시인 출판기념회에서... (좌로부터 최규일, 최정자, 박이엽, 채현국선생)

 

나이가 들수록 친구를 그리는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그토록 좋아했던 친구였건만, 흩날리는 낙엽 같다.

 

난, 어릴 적부터 유달리 친구를 좋아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듯이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정불화의 대부분이 친구와 연관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살다보니 가치관이나 생각도 달라졌다,

종교나 정치적 갈등도 생기고, 말 한마디에 상처도 받는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전화기를 멀리 한지도 일 년이 넘었다.

속내를 털어 놓을 사람은 동지이며 친구인 딱 한 사람 남았다.

이제 사 철든 것 같다. 아니, 죽을 때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먼저 떠난 친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술만 취하면 전화하던 정남규는 전화를 걸고 있고,

온 몸을 흔들며 파안대소하던 적음은 웃고 있다.

무게만 잡던 콧수염 김영수가 측은한 듯 바라본다.

'내 노래는 영원히 잠들지 않는다'던 홍수진이 노래 부른다.

 

먼저 떠난 것을 서러워했지만, 살아남은 자가 불쌍하구나.

나도 갈 날 머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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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에선 바삐 일만 해야 하는 건가?
모처럼 한적한 시간을 보내니, 상념에 잠 못 이룬다.
눈을 떠보니 아직 새벽 세시.
어두워 일도 못하는 시간에 뭘 할까?
갑자기 적음의 시 ‘새벽녘’이 생각난다.
책꽂이에서 시집을 찾아보았다.






“잠 안 와 뒤척이는
새벽녘 그만
불을 켜고 일어나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읽을까(아니),
차나 한 잔 (아니),

木石처럼 앉아 있는
두 빰에
웬 일인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





갑자기 저승 간 적음이 보고 싶다.
외로움을 낄낄거림으로 위장한 땡초가 보고 싶다.
아직 ‘월간 빠’는 유효한 건가?

발문은 표성흠씨가, 그림은 신동여씨가, 사진은 내가 찍었다.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는 꽃잎처럼 떨어져 사라진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서러운 것은 쉽게 잊혀진다는 것이다.





힘든 세상사, 어쩌면 죽음 자체가 축복일 수도 있겠다.

난, 초상집이 잔치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문상객의 슬픈 모습보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웃을 수 있는 영정사진까지 만들어 두었다.





죽음이란 떠나가는 망자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다.
슬픔도 잠시 뿐, 쉽게 잊어버리고 좀처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프다.





흐르는 세월에 잊혀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으나,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도 조금만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혀진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건망증 환자다.






얼마 전, 인사동을 사랑한, 한 여인이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지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
다 가난이 원죄다. 절망의 벽이 너무 높았던 모양이다.






삶을 끝낸 것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무관심한 것은 쪽방촌에 사는 빈민들도 마찬가지다. 강아지가 죽어도 그러지는 않는다.

가족들이 방관하는 시신은 냉동실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태워진다.






돈과 명예를 가진 자의 죽음은 온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시끄럽지만,

그 여인의 자살은 많은 신문의 어느 한 구석에도 실리지 않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만 무성하지, 가진 것 없는 낮은 사람은 죽어서도 외면 당한다.


더러운 세상, 저주의 굿판이나 벌일까 보다.






꽃잎처럼 떨어져 세상을 등진 정성애씨는 참 착한 여자였다.
지난 여름, 우연히 인사동 ‘유목민’에서 찍은 사진이 그녀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필이면,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을 배경으로 찍었는데,
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가는 엄마를 뿌리친 소녀의 한에 버금가는가?
담배 연기속의 애잔한 웃음에 가슴이 아린다.


우연히 그녀 사진을 만나, 그리운 분의 모습을 찾아 보았다.







“문디 자슥아~ 문디 자슥아~”를 연발하던 천상병 선생은 윙크하고 계셨다.

노자돈 받아 막걸리 사 드시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그립다.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선생께서 인사동 고서점을 기웃거리는 사진도 있었다.

말씀 없이 웃으시며, 허름한 봇짐에서 붓글씨를 꺼내 나누어 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유분방한 선생만의 필체는 오래된 인사동 가게라면 부적처럼 붙어있다.






선배들은 챙겨주고, 후배들은 다독거리던 ‘민예총’의 거목 김용태씨도 반겼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 바지춤을 추켜 세우며 부르던 청포도사랑이 듣고 싶어진다.

저승에서라도 재기의 깃발 올리는 '민예총'에 힘을 실어주길 부탁한다. 





민속박물관장을 지낸 김동수선생은 점심 먹자는 전화를 가끔 하셨다.

인사동에 작업실이 있을 때인데, 선생께서도 사무실을 인사동에 두었다.

만나기만 하면 인사처럼 하시는 말씀이 조군 사진 값을 줘야 할텐데...”였다.

인사동 사람들전시 후, 선생사진을 전해 드렸더니 그게 마음에 걸렸나보다.





‘인사동, 봄날은 간다’ 사진전에 오셨던 이계익 장관도 보고 싶어진다. 
노 풍류객의 아코디온 소리가 아직까지 귓전에 생생하다.

그 와중에 민영시인과 연극배우 이명희씨가 나누는 밀담은 무엇이었을까?





혼 술로 속세를 마감한 적음선사도 내 눈에 밟힌다.

땡초처럼 살았지만, 마음은 깊다. 그가 기거한 '일소암'에서만 볼 수 있는 속내다.

정선 '만지산축제'에서 불렀던 '긴머리 소녀'도 잊을 수 없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중이 부른 노래라 다들 배꼽 잡았지만, 나는 슬펐다.






별을 그리다, 별 따라 간 강용대 화백,

인사동에서 일원짜리 동전 가진 사람에게 십원짜리로 바꾸어주는 퍼포먼스도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사동 거지 까딱이를 반기며, 대작해준 유일한 술 친구였다.

김용문씨의 '옹관장전' 퍼포먼스에서는, 왜 온 몸을 칭칭 감은 시신 역활을 자처했을가?

일찍부터, 더러운 세상 살고 싶지 않았나보다.





인사동 콧수염으로 통하는 김영수는 성질 한번 고약하다.

그는 마음이 상하면 두 번 다시 보지 않는 성격이다.

괴팍한 그의 박치기에 나가떨어진 사람도 여럿 보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장례식장 가다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도 당했다.

장례식장에 구급차 타고 갔던 귀 막힌 사연이다.





 

문영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지인들 전시에는 빠지지 않는 의리파다.

그가 그린 심상석을 보여 달래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더니,

결국 죽고 나서 모든 작품을 보여주었다.

저승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상병 선생 뒷바라지로 고생하셨던 '귀천'의 목순옥 여사 모습도 안스러웠다.

천상병 선생 기리는 사업을 그렇게 악착스레 밀어 붙이더니, 결국 빚더미에 오르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돈을 못 구해 전전긍긍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위한 삶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가련한 분인데...





온갖 기행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중광스님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만나뵈러 댁에 갔더니, 조기를 갈비처럼 뜯어 드시며 어린애처럼 식탁을 어지럽혔다.

사진처럼, 허접한 것들을 보여주며 이게 바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업실에선 들통에 가득 담긴 먹물을 샤워하듯 온 몸에 부어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다.

자우지간 괴짜였다. 저승에서는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다.





'인사동 밤안개'로 불리는 목탄화가 여운도 그립다.

인사동 카페 '산타페'에다 양주를 맡겨두고, 술 값 없으면 그 술 마시라는 멋쟁이다.

자신을 위해선 남에게 부탁 한 번 않지만, 어려운 친구를 위해선 손발 걷어 부친다. 

자칭 '전푼련"(전국푼수연합회) 회장이시다. 






온 몸을 비틀며 시를 토해낸 이선관시인,

공단 폐수에 썩어가는 바다를 절규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썩어가는 인간들 정신에 통곡했을 것이다.





기타 하나 둘러메고 인사동을 떠돌던 유랑객 이종문씨는

대마초 한 모금에 세상 시름 다 녹이며, 아름답게 살다 떠났다.





정남규와 홍수진은 둘 다 병들어 떠났지만, 죽는 방식은 달랐다.

정남규는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목 매달아 죽었지만, 홍수진은 병원에서 끌려갔다.

다들 정남규를 나무라지만, 누가 더 현명했는지는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홍수진의 시 처럼,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





마지막 사진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심우성 선생이다.
민속극과 인사동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사셨지만, 허허롭게 떠난 것이다.

넋전춤으로 선생의 넋을 기리는 제자 양혜경씨가 있어 그나마 위안된다.






그러나 죽는 것만 죽은 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못한 채, 병석에서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이 더 불쌍하다.
어눌한 말로 낄낄 거리던 이청운화백 모습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원망스럽더라.






우리 모두, 그리운 사람들 추억이나 씹자.
죽는 것 보다 더 서러운 것은 잊혀진다는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달 26일부터 보름 가까이 더러 누워 낑낑거렸다.
창 너머로 유혹하는 봄바람도, 술 마시러 오라는 기별도 못들은 체, 매일같이 약에 취해 잠만 잤다.





처음엔 정선에서 몰고 온 감기몸살로만 알았으나, 숨을 쉴 수 없는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러 가지 증상을 검사 해 보더니, 폐 기능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목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언어장애는 있었으나, 담배 탓으로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다.

병원에 가보라는 지인들의 충고를 묵살하였더니, 기어이 올 것이 찾아오고 만 것 같았다,

호흡기에 이상이 있어도 갑자기 이런 경우가 올 때는 분명 동기가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3월부터 전시하기로 되어있는 ‘산골사람들’ 사진을 전해주고 오기 위해

천장 위에서 끄집어낸 액자 때문인 것 같았다.

14년 동안 부엌아궁이에서 나오는 끄름에 쌓여 있었는데, 마스크도 하지 않고, 그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문제는 제대로 기능하는 장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평소의 미련한 고집을 차마 자백할 수 없었다.

”숨 쉬지 못하면 죽는다“는 의사의 말이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자는 일만 반복하는 무료한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뻔뻔스러운 것 같았다. 일체 병실을 알리지 않은 채, 문병조차 사양했다.

티브이는 물론 핸드폰마저 꺼 버렸으니,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시간이었다.

안쓰럽게 생각한 정영신씨가 노트북을 병실에 갖다 주었으나, 그것도 무용지물이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니, 아무런 생각도 의욕도 없었다. 심지어 살고 싶은 생각마저...

그냥 고통 없이 죽는 주사 한 방에 조용히 눈감고 싶었다.






별다르게 진행하는 치료도 없이 약만 받아먹는 처지라, 산더미 같은 약봉지를 안고 퇴원해 버렸다.

입맛이 없어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지만, 술 생각과 담배 생각은 간절했다.






그래, 다시 한 번 시도해보자.

어쩌면 마지막 일지 모르니, 술도 한 번 마셔보고, 담배도 한 대 피워보자.

모든 것이 사람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니, 콤펙트카메라만 호주머니에 넣고 인사동 나들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날은 박진화씨의 드로잉전이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날이지만, 숨이 차 4층까지 올라 갈 기력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참새들의 방앗간 ‘유목민’으로 들어갔는데, 조해인시인과 사진가 이수길씨가 먼저 보였다.

옆 자리에는 윤성광씨와 박혜영씨 친구들이 어울려 있었다.






그런데, 눈에 꽂히는 그림 한 점이 기둥에 걸려 있었다.
이미 저승으로 떠난 적음선사의 ‘파적’이란 시에 신준식씨가 그린 그림이었다.

두 사람 다 끼가 있는 꾼이었지만,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한 사람은 암자에서 술이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한 사람은 술이 취해 길을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이 무슨 암시인가?

‘가을밤의 춤’ 산문집 표지에 실린 그림이었는데, 그 이글거리는 담배불의 유혹에 온 몸이 마비될 것 같았다.






뒤늦게 다인 최종선씨와 공윤희씨도 나타났고, ‘통인’의 관우선생께서 도예가 김정범, 터너 이동환씨 등 여러 명을 대동하여 나타났다.

가히 인사동 아지터라 불릴 만큼, 한꺼번에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입구에 자리잡은 조해인, 이수길씨와 조용하게 소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는데, 온 몸에 이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말 없이 술집을 나서며,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죽고 사는 것은 신의 소관이라며...





몇 걸음 걷다 한 참을 쉬어 가야하는 인사동의 밤거리가 낯설어 보였다.

그 늦은 밤에도 땅을 파 뒤집고 있었고, 마치 조계사의 야경이 저승 풍경처럼 음산했다. 




적음의  '파적' 부분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다니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사진,글 / 조문호








 

 

지난 해에는 세명의 벗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사동에서 살던 사진가 김영수씨가 지병으로 먼저 떠났고,

뒤 이어 봉화에 살던 최영해씨도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적음의 갑작스런 부음을 받고 제일 가슴 아파했던 화가 신준식씨도 따라갔어요.

김영수씨는 지병에 의한 죽음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적음과 준식의 죽음은 인재라 더 가슴이 아파요.

봄이 오면 적음의 시비라도 만들어 떠난 벗들을 추억할 수 있도록 합시다.

위의 사진은 작년 겨울, 아리랑에서 있었던 '후원의 밤'에 참석한 적음과 신준식의 모습입니다.

그 때부터 두 인간이 탈출작전을 공모한 것은 아닌지, 수사를 한번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2.1.5


"무주공산의 빈 달처럼" 



           

-시집 '저녁에'에 쓴 시인 표성흠씨의 발문-

무주공산의 빈 달처럼 허허롭게 가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인생살이의
고달픔도 욕심도 벗어 던지고 바람처럼 떠돌며 그야말로 운수납자 생활
을 했다.
그가 열 다섯 살때 출가해 어언 몇 해인가. 떠도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승가에서 이르기를 비구는 乞僧이라고 했다. '거지중'이란 말이고 중은
곧 거지이고 거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배고프면 물로 배를 채우고, 여비
없으면 걸어다닌다. 그의 삶을 여지껏 지탱해 주는 것은 다름아닌 비구,
걸승의 정신 한 가지 때문이다.

찬 달이 뜨면
찬 달이 만산 가득히 떠올라 오면

나는 가리라
이 육신 다 벗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실려
둥둥 떠나가리라
서방정토에 눈이 오는가 비가 오는가
바람이 부는가

그의 산문집 '저문 날의 목판화"에 실린 한 귀절이다.
찬 달, 寒月. 무주공산의 빈 달처럼 그렇게 그는 오고 갔다.
그런 그가 이제 한 자리를 잡아 머물곳을 마련하였다.
소백산 자락의 '一笑唵'이 그 곳이다.
들며 나며 한 번씩 웃으며 살자는 것이고, 만사를 一笑한다
는 것이기도 하다.
적음이 일소암에 들어가 무슨 일을 했을까? 그는 거기 머물며
시를 썼다.

왜 그처럼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
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

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저녁을 꾸려가야 하는 것인가

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 하겠다

-저녁에(전문)

순수무구, 그 자체다. 여기서는 시적 기교도 메타포어도 필요가 없다.
시인 중에는 시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시를 억지로 만들어 쓰는 사람
이 있다. 시처럼 사는 사람에게는 일거수 일투족이, 혹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가되고, 시만 쓰는 사람은 억지로 기교를 부려야 시가 된다.

우리나라엔 시처럼 살다 간 시인들이 몇 있다. 그 중에서도 천상병시인
이 우리 곁에 있다가 간 시인이고, 풍문에 의하면 김관식 같은 시인도
그러 했다고 들었다.
나이 사십도 훌쩍 넘어, 뜨거운 여름날 그는 나를 찾아왔다. 형, 보고
싶어서 왓어. 하룻밤 내내 술을 마시면서 그는 울었다. 좀 편하게 살 수
없느냐고, 좀 이 기나긴 터널을 벗어나서 안녕할 수 없느냐고.
그는 빈 손이다. 그 빈 손의 시인이 또 이런 노래를 한다.

흘라가는 강물속으로 몸을 적셨다가
달은 이 산상에 고이 떠있다.
한 사내가 서서 허공을 향해 오른쪽 손을 내민다
달의 몸을 만져보려 한다
웃으면서 달은 구름속으로
몸을 숨긴다

-산상의 달(일부)

달과 하나가 되어 시인은 무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 시를 억지로 만들어
쓰는게 아니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놀고 있다. 아마 강물속으로 뛰어든
이태백이 이랬을지 모른다.

숲에 가려서 달은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고 서서
달을 보았다

-숲속의 달 (일부)

현대시의 기법상으로 본다면 이런 건 시가 될 수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가슴 한 구석이 녹아 내리는 느낌을 받는다.
무기교의 기교다. 시란 느낌을 주면 그만이다. 느낌을 주기 위하여
온갖 기교가 필요한 것이지 기교를 위한 기교가 필요한 건 아니다.
시에는 시의 몸인 형식이 있고 시의 정신인 시혼이 있다. 둘이 합일이
되면 더 좋겠지만 비록 몸이 늘씬하지 못해도 그 내면의 아름다움이
흘러나오는 지성미가 있듯 시혼에서 우러 나오는 아름다움도 있게
마련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느낌은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느낌이다.
그는 자연의 일부로서 서 있는 나무처럼 그냥 서 있기만 한다. 그런
데도 나무와 달과 내가 하나가 되어 몰아일체가 되는 공감대를 형성
한다. 이 공감이 바로 시가 아니던가.

禪詩에 가까운 시들을 묶어 시집을 낸다기에 몇 자 부끄러운 소리를
보탠다. 적음이 이제 그 오랜 방황을 끝내고, 이름 그대로 조용한 소리
를 내고 있거나 그 소리조차도 침묵으로 다스리는 시 작업을 하고 있다
는 생각에서다.



(적음 최영해의 약력)

寂音은 법명이고 본명은 崔永海(1948-2011)다
경주에서 태어나 15세 때 含月山 기림사로 출가.
동화사 혜붕노사께 내전을 이수하고 전국을 떠돌다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소요집', '저녁에'가 있고
산문집으로 '어디엔들 머물 곳이 없으랴',
'저문 날의 목판화','가을 밤의 춤' 등이 있다.
그동안 경북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의 '일소암'에서 혼자 살다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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