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욱씨의 사진은 한마디로 카메라로 그린 산수화였다.

전시를 기획한 박인식씨의 '산은 자연회귀 본능과 영혼의 영역이다’라는 말이 실감났다.

산의 뼈대와 속살을 드러낸 담백한 맛이 마치 단원이나 겸제의 수묵 산수화를 보는 듯 했다. 

지난번에 전시했던 안승일씨의 백두산 사진이 있는 그대로를 찍었다면,

임채욱씨의 사진은 작가의 의도가 사진 깊숙이 개입되었다는 점에서 확연히 달랐다.
임채욱씨는 동양화를 전공한 사람으로 카메라는 하나의 도구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작품들을 감상하며 “아! 이렇게도 되는구나!”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였고,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인화지의 출현과 메카니즘의 발전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횡으로 길게 펼쳐진 옅은 능선들과 강한 실루엣으로 드러난 산의 윤곽 등

작가의 창의적 노력이 곳곳에 응축되어 있었다.

 

마치 붓 터치 같은 느낌을 주는 새로운 한지의 매력도 돋보이지만,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 준 프린트기술이 수준급이었다.

사진의 계조가 마치 산속으로 파고들 만큼 깊었다.

확 트인 원근법과 여백, 단색조의 깊은 질감, 구름이나 안개에 의한 몽환적 산세,

기존의 틀을 넘어 선 자유로운 프레임은 보는이로 하여금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처음으로 시도한 입체사진도 눈길을 끌었다.

한지에 프린트한 사진을 주무르고 접어, 평면 사진을 입체적인 산의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영상실에서 보여준 이미지들도 흥미를 더했다.

한지로 산의 형태를 만들어 다양한 이미지를 투과해 계절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했다.

작품들을 살펴보다 이건 사진이 아니라 종합예술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산의 형상을 재현한 사진에다 신비로움으로 이끌어 간 미술적 터치, 입체사진의

조형성을 보여준 조각가적 기질, 미디어 아트 등 예술의 전 부문을 아우르고 있었다.

 

전시작들은 한지전문회사 천양과 함께 개발한 새로운 한지로 프린트했다고 한다.

필자도 ‘인사동 사람들’ 전시 때 한지를 활용한 적 있으나 한지의 거친 결이

기계의 노즐을 막아 애를 많이 먹었는데, 그 문제점도 해결되었단다.

 

 

임채욱씨의 'inside mountains'은 꼭 한 번 봐야 할 전시로 판단된다.

설산, 능선, 구름, 나무, 바위, 인왕산 등 여섯 파트로 나누어진 작품들이 

견지동 '아라아트'전시장의 1층에서부터 지하4층까지 전시되고 있다.

3월28일까지 이어진다.


박인식씨가 전시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다.

입체 작품들

 

 

작가 임채욱씨가 작품설명을 하고 있다.

 

영상설치물

지하1층에서 내려다 본 전시장 풍경

 

전시발문 등 상세한 전시작품들을 감상하려면 본 블로그, 인사동 전시가이드의

'임채욱의 'inside mountains'展, 아라아트에서..'를 참고하십시요.

 

 

 

 

다시 찾아온 꽃샘추위에 몸을 움츠립니다. 하지만 봄은 이미 곁에 있습니다. 발길 분주히 오가는 낮은 곳에 자리 잡은 야생화. 그들은 무채색 겨울에 갖가지 색의 물감들을 방울방울 떨어뜨려 놓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의 짧은 이별 뒤 만남이 반갑습니다.

새초롬한 소녀 같은 얼레지 ①, 봄의 전령을 자처하는 샛노란 복수초 ②, 솜털이 뽀송뽀송한 꽃받침을 하고 있는 노루귀 ③. 이 외에도 바람꽃, 깽깽이풀, 애기똥풀 등등. 이들은 허리를 굽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꽃 이름을 잘 몰라 대부분 ‘이름 없는 꽃들’로 불려지지만 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큰 나무가 아니라 작은 야생화들입니다. 사진은 오는 12~25일 서울 인사동 갤러리 나우에서 열리는 ‘박병원 사진전’에 소개될 야생화 사진 작품 중 일부입니다.

박병원 전국은행연합회장이 최근 10여 년간 강원도 인제군 곰배령에서 한라산까지 다니며 찍은 야생화 중 50여 점이 전시될 예정입니다. 꽃망울에서 낙화까지 이 외 5071점은 USB에 저장된 디지털 액자를 통해 선보입니다.

수익금은 독일 ‘카리타스재단’과 ‘사단법인 봄’에 전달돼 북한 어린이 510만 명의 풍진 예방접종에 쓰일 예정입니다. 꽃이 사랑입니다.


글=조문규 기자 사진=박병원





한민족 역사성화 61점을 완성한 최종린 화가 인터뷰

 

 ▲ 5일 '한민족 역사성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작품 <신시개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최종린 화가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많았죠. 저도 국민의식을 깨우는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 전시가) 그분들의 해온 일이 음식이라면 그 위에 조미료를 뿌렸다고 봅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대중적으로 더 재밌는 콘텐츠가 많이 나와야 해요.”

지난 5일 서울 인사동 갤러리이즈 1층에서 만난 최종린 화가(44)는 선도문화진흥회(이사장 만월 손정은)가 주최한 한민족 역사성화 전시회(클릭)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최 화가는 20대 초반에 선도(仙道)수련을 했다. 그의 그림이 ‘선仙의 세계’를 담게 된 계기다. 그동안 미국 애리조나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난 2009년 선도문화진흥원의 의뢰를 받아 마고시대부터 단군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5년 동안 61점의 그림으로 완성했다. 전시회는 17점이 출품됐다.

“한 작품씩 계획적으로 하지는 않았어요. 떠오르면 바로 그렸죠. 안 떠오르면 수행하거나 등산하고 그랬습니다.”

전쟁의 군신(軍神), 치우천왕의 다른 모습은?

올해 브라질 월드컵이 열린다. 이날은 100일을 앞둔 붉은악마와 시민 1천여 명이 서울광장에서 출정식도 했다. 붉은악마는 배달국 14대 ‘치우천왕’으로 유명하다.

치우천왕을 처음으로 그린 최 화가는 “제일 극적인 인물이라 재밌게 그렸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전쟁에 나서는 장수의 모습이지만, 무섭지가 않다.

“치우천왕을 지배자의 모습으로 패국적으로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저는 힘도 있으면서 백성들을 품는 연민의 모습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리게 되었는데 의도했던 것에는 많이 못 미쳐요.(웃음)”

치우천왕은 동양의 군신으로 숭앙됐다. 한고조 유방이 전쟁에 나갈 때마다 치우 천왕에게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

최 화가는 “여러 자료를 보면 덕(德)으로 다스린 모습도 있다. 그런 부분에서 시각을 달리해서 봐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백성과 같은 옷을 입은 ‘단군’

최 화가의 말을 듣고 나니 그림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왕의 옷이 백성들과 같은 점도 흥미로웠다.

“너무 권위적이지 않게 일반 백성과 차이가 없도록 표현했습니다. 배달국이 밝은 땅을 나타내죠. 태양을 닮은 옷인 흰옷을 주로 입었습니다. 왕과 신하가 다르다는 것보다 함께 아우르는 상징일 수 있죠. 백성과 비슷한 하얀 옷으로 진리를 품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어 <신시개천> 그림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달국 1대 거발환(居發桓) 환웅이 나라를 세우고 신단수 아래에서 신시(神市)를 개천하는 모습을 그렸다.

지난 2004년 천안 국학원 개원 기념으로 전시한 <신시개천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한 손에 청동거울과 방울을 들고, 또 한 손은 검을 치켜든 모습이었다. 3천여 명의 백성들보다 더 높은 단상에 있는 환웅의 모습은 그림을 압도한다. 이에 반해 <신시개천>에서 환웅은 신하들과 같은 위치에서 검을 들었다. 그러나 환웅이 높이 든 칼의 뜻은 다르지 않다고 밝혔다.

“검은 법입니다. 우리 민족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이죠. 근본적인 법을 들고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 5일 '한민족 역사성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최종린 화가가 <배달국 14대 치우 환웅>을 보고 있다(사진=선도문화진흥회)
 
스스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야

한민족의 역사를 담았다고 해서 동양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서구적인 느낌도 든다. 초등학생이 보면 환웅 할아버지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라고 볼 수도 있겠다고 농을 던졌다.

“그런 느낌이 있죠. 동양적이지도 않고 서양적이지도 않은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모든 인종을 복합적으로 그리다 보니 서양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웃음)”

인사동은 외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그들은 작품을 어떻게 봤으면 좋겠는지 물어봤다.

“어떻게 보면 우리 민족 우월주의나 국수주의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근본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인류를 포괄할 수 있는 홍익정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역사보다 그 분들이 가진 정신과 사상에 초점을 맞춰서 보면 그분들과 우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감하게 될 겁니다.”

단군조선 47대 마지막 단군 고열가를 그린 <2천년 후의 약속>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산을 배경으로 뒤돌아선 단군의 표정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싶었어요. 나라를 폐관하고 산으로 수행하러 가는 모습에서 민족적인 애환도 있을 것이고 어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있지 않았을까요? 감정을 초월한 면도 있습니다.”

최 화가는 우리 민족이 인류의 뿌리 민족이라고 하는데 우리 스스로 말하지 않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역사를 조명할 수 있어야한다고 지적했다. 과거의 역사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그의 말에 공감됐다.


■ 최종린(Al Choi)

197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선도수련을 했다. 이후 선仙의 세계를 그리기 시작했다. 선도수행과 명상은 그의 무의식을 깨워주어 그림 작업에 무한한 생명력과 창조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동안 미국 애리조나 주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국내에서 작업하고 있다.


2000년 세계밀레니엄 세계평화회의 전시(서울 코엑스)
2000년 개천절 행사 초대전
2003년 미국, sedon artist association 공동전
2003~2004년 미국, SHAA(sedona healing art association) 아트디렉터&전시 활동
2007~2009년 미국, jerome art association 공동전
2008년 NOISE 아리조나 매거진 인터뷰
2008년 미국, 스캇데일 갤러리 전시
2008년 미국, 세도나스토리 전시

[브레인 미디어] 글, 사진. 윤한주 기자 kaebin@lycos.co.kr

숨겨진 삶의 근원 그리고 싶어 히말라야에 왔죠
베트남전서 쓰라린 인생체험 미국선 술·마약 빠져 나락으로
화가 아내 만나면서 그림에 영감 '한국의 고갱' 이라는 별명 얻어
내 모든 것 던져 도전하면 결국 원하는 것 얻는 게 인생


[서울경제 / 정민정기자]


"'끈질기게 낭떠러지로 뛰어내려라, 낙하산은 떨어지면서 만들게 돼 있다.' 어느 과학소설가의 말입니다. 젊은 시절 우연찮게 접한 이 주문은 내 인생의 모토가 됐어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던져 도전하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고갱'이라 불리는 재미화가 최동열(63·사진) 화백의 일명 '낭떠러지 철학'이다. 베트남전 첩보대원으로서의 활동, 술과 마약에 빠져 지냈던 미국 플로리다 생활 등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온 그에게는 '보헤미안(Bohemian·방랑자)'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파리에서 명성을 쌓은 후 타히티에 매료됐던 후기인상파의 거장 폴 고갱처럼 멕시코 유카탄, 히말라야 등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대통령을 꿈꾸던 소년, 거친 세상을 만나다=최 화백은 6·25전쟁 이듬해인 1951년 피난통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국은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꿈을 안겨 줬다. 그의 원대한 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이는 다름 아닌 친할아버지였다. 1994년 갑신정변의 시발점이 된 우정국 사건 후 일본으로 건너가 관서대 법대를 졸업했고 3·1 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을 변호했던 우리나라 초대 변호사이기도 한 최진 변호사가 바로 그의 조부다.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부모님께 들었던 할아버지의 삶은 제게 큰 가르침이었어요.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변호를 맡고 항일운동을 하는 독립투사를 위한 일에도 물불을 안 가리셨다고 하더군요. 납북된 후에는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어린 제게도 할아버지의 삶은 피폐한 우리나라를 위해 정치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결심을 하게 만든 셈이지요."

부모님을 따라 상경해 경기중학교에 들어간 최 화백은 비평준화 시절 최고의 명문이었던 경기고 진학을 위해 시험을 봤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낙방이었다. 인생 첫 번째 실패에 큰 충격을 받은 화백은 일반고 진학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1967년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당시 베트남 전쟁으로 국내외가 어수선한 시절이라 베트남어에 관심이 가더군요. 외국에 대한 묘한 동경 같은 것도 작용했고요. 친구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저는 대학생이 된 셈이었는데 1년 지나니 대학 생활도 싫증이 나더군요. 그래서 군 입대가 가능한 나이인 만 16세가 되던 대학 2학년 때 해병대에 지원했어요."

군 생활 일 년 후 베트남 전쟁 첩보대원으로 지원해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의 부패, 인간의 잔인함, 전쟁 중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사람들 등 많은 것을 목격하고 체험하게 된다.

"베트남어를 할 줄 아니까 포로 심문을 자주 맡았는데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 그런 게 더욱 힘들더군요. 그들을 속이고 회유하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뽑아내고 필요 없어지면 죽이기도 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미국에서의 방랑, 그 끝에서 예술과 조우하다=군에서 제대한 후 1972년 교환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전쟁을 겪은 그에게 대학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질감이 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결국 공부를 그만뒀어요. 그냥 방탕하게 미국 생활을 했죠. 한국인들이 많은 LA가 아닌 미국의 동남부 지역에 있었는데 플로리다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유도와 태권도 사범을 하기도 했고 술집 문지기, 바텐더 등을 하면서 술과 마약에 빠져 밑바닥 인생을 살아봤습니다."

그러다 1977년 뉴올리언스에서 지금의 아내이자 화가인 엘디(LD 로렌스)를 만났다.

재즈의 고장인 뉴올리언스는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간 한국 청년에게 많은 영향을 줬고 그는 영시를 지어 당시 연애 중이던 엘디에게 읽어줬다고 한다. 어느 날 엘디 옆에서 붓글씨 연습(화백은 미국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붓과 벼루 등을 챙겨다녔다고 한다)을 하다가 갑자기 어렸을 적 반 고흐와 폴 고갱을 동경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싸는 종이를 한 통 사와 100m나 되는 종이 위에 뛰는 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8년 말의 해였어요. 붓에다 먹을 묻혀 말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미칠 것처럼 어떤 열정에 사로잡혀 수백 마리를 그려갔던 겁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마음에 드는 말 그림이 두어 개 나왔지요."

말 그림을 시작으로 미술계에 입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술의 혼을 찾아 떠돌아다니다=최 화백은 뉴올리언스를 떠나 멕시코와 미국 서부 남부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문명과 부딪치지 않는 원시적인 수렵생활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완성한 작품들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미술계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예술가의 존재 의미를 찾아 방황했다고 한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오랜 방황 끝에 문명이 없는 자연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뉴욕을 떠나 인적이 없는 멕시코 유카탄 코바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되찾으면서 신들린 무당처럼 작업에 전념해 풍성한 대작을 완성한다. 1985년 그간 작업했던 대작들을 갖고 세계적인 작가들이 모여 있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전시하면서 '신표현주의 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때 얻게 된 별명이 바로 '한국의 고갱'이다. 이후 국내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대형 화랑에서 초대전을 열어줄 정도였다.

미술계에 알려진 후 1987년 15년 만에 서울로 금의환향한다. 그 시절 화두가 됐던 한(恨)을 찾기 위해 아내와 10개월 된 딸을 데리고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 여귀산 기슭 탑리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했다.

"진도는 바다와 산, 하늘과 바람, 별이 같이 있어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곳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가장 어린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술을 통한 동서양의 만남을 시도하며 초인 시리즈, 진도의 장례식 풍경, 우리나라의 억압적인 정치, 사회 모순에 대한 상징성 있는 작품들을 완성했어요."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과 워싱턴주 올림픽반도를 오가며 작업하던 중 미국 서북부에 있는 염소 농장에 정착해 연어 낚시, 등산, 정원 가꾸기 등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1992년에는 두 달 동안 우루무치, 둔황, 나주, 시안, 티베트, 네팔, 인도의 시킴 라다크 등 주요 지역을 답사하며 동서양 예술의 융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2011년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지난 20년간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런데 히말라야에 오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턴 아예 히말라야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고산지대인 만큼 작업이 쉽지 않다. 추운 날씨와 거센 바람이 그의 작품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고산지대는 산소가 부족해 애써 그린 작품들의 물감이 잘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히말라야의 숨겨진 얼굴을 그리고 싶어 한다. 해가 떠오르기 전 설원 너머로 빛이 퍼지는 순간, 자연의 위대함과 편안함을 느낀다고.

"히말라야는 우리 마음의 근원, 혹은 원형이 아닌가 싶어요. 그 속에 있으면 삶 그 자체를 만나는 것 같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방인의 눈으로 히말라야를 보지만 나는 (우리 민족과 뿌리가 같은) 히말라야를 우리의 삶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고자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그림, 나의 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순한 형태·강렬한 컬러 실험정신 돋보여

한국적 정서 표현 '안과 밖 시리즈'도 눈길

11일까지 '타임라인'전

'보헤미안' 화가 최동열 화백이 오는 11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타임라인(Time line)'전을 갖는다. 작가가 미술을 시작한 1977년부터 최근작까지 50여점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1층과 2층에 걸쳐 시기별로 나눠 전시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보헤미안'이라는 타이틀로 구성된 작품들은 작가의 초창기 작품을 비롯해 멕시코 유카탄 코바 마을에서 원주민을 만나 그린 작품 등 다양하다.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이 시기에는 작가로서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 정신이 엿보인다. 화백의 첫 유화 작품인 '뉴올리언스의 재즈 뮤지션'은 1977년 뉴올리언스 프렌치쿼터공원의 벤치에서 공연하고 있는 두 명의 흑인 뮤지션을 단순한 필치로 표현한 수작이다. 1981년작 '학살'은 베트남전 참전 경험이 녹아 있는 듯 전쟁의 참혹함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부서진 인형 조각과 인체를 절단해 처참한 분위기를 희화시키면서 전쟁에 의해 파괴당한 인간의 실존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유카탄(1984년작)'은 멕시코 유카탄 코바 마을에서 한 여인이 출산을 하다가 아이가 주검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극한의 상황에 놓인 인간의 절규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최 화백을 '신표현주의 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요 작품 중 하나다.

1984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지는 '안과 밖 시리즈'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다니며 길에서 훔쳐 보던 실내를 작품으로 옮겨 놓았다. 1984년 유카탄에서 시작된 '한국 산수가 보이는 한국 침실' 시리즈는 뉴욕 생활 중 정지됐다가 1996년 올림픽 반도 작업실에서 다시 부활한다. 한국에서의 삶을 회상하며 그린 한국의 방은 이불·요·베개·요강·장·화장대 등 한국의 실내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조화롭게 배치해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했다는 평이다. 이후 뉴욕에서 생활한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배경을 뉴욕 야경으로 대치하고 2001년부터는 동양화로 처리된 산수와 올림픽 반도 작업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수를 실내의 정물과 대치한다.

이후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곳의 정서를 바탕으로 도시와 정물·누드를 적절히 배치해 안과 밖 시리즈를 연작한다.

최근에는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러운 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히말라야를 직접 다녀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02) 734-0458

 

He is…
△1951년 부산
△1963년 경기중학 입학
△1967년 검정고시 거쳐 한국외대 베트남어과
최연소 입학
△1968년 대학 중퇴 후 해병대 입대
△1969~70년 베트남전 참전
△1971년 미국 유학
△1972~77년 플로리다·뉴올리언스 등 체류
△1978년 미술 입문
△1985년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첫 개인전
△1987년 한국 초대전
△2011년 히말라야에서 작업 시작

사진=권욱기자


-인사동  뉘우스-

 

막사발씨의 김용문전이 인사동 '아라아트'에서 열립니다.

아! 작가명과 그릇명이 바뀌었네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김용문과 막사발은 동격어니까요.

 

오는 12일 오후4시부터 막사발전 오프닝 파티가 열립니다.

모두들 인사동으로 봄나들이 오세요.

오랜만에 추억하나 엮어봅시다.

 

 

 

 

 


 

 

나무 통해 바라본 우리의 삶, 3월 24일부터 인사동 포토하우스

 



 

사람들을 스치지 않고 채 100미터도 걸어갈 수 없는 곳.

다른 어느 것 보다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의 도심. 그 안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다운 환경만이 아니다. 

어느 대중가수의 노래처럼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현대의 도시인 들을 그대로 닮은 도시의 나무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억지로 조경되고 잘라내지는 도시의 나무들. 

이러한 도시의 나무들과 현대인의 모습을 담은 그림 전시회가 열린다.

오는 3월 24일부터 4월 1일까지 서울 인사동 포토하우스에서 열리는 김종수 화백의 개인전은 도시나무라는 명제로 도심속에서 살아가는 나무를 통해 현대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닌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심어지고 조경되며, 만들어지는 도심의 나무 속에서 작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담고 있다.

김종수 화백은 자신의 작품인 도시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전인교육을 받으며 인성을 키워 사회에서 서로의 예의를, 또는 우리가 살아가며 서로가 필요한 룰 속에서 적응하며 인간으로서 품위있는 삶을 영유한다. 그러나 이는 자연 속에 자연인으로 본능적인 원시인으로 살고 싶은 동물의 근본적인 본능을 억제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도시 속에 심어있는 도시 나무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조경되고, 만들어지는 현대인의 일상과 닮아있다.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채 단순히 나무라는 기능을 위해 키워지고 길러지는 도심 나무들 속에서 동물이라는 근본적 본능을 잃은 채 사회에 의해 길러지고 있는 현대인들. 

김 화백은 둘 사이에 공통점을 찾아 작품에 표현함으로 현대인의 삶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 화백의 이번 전시회는 인간이라는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김종수 화백 프로필

▲ 개인전 16회 ▲ 스페인 Gallera Victoria Hidalgo초대전 이베리아전(갤러리빅토리) ▲ 2011뉴욕아트엑스포(뉴욕, 맨하탄) ▲ 독도문화심기운동-2011특별기획 100인 초대전 '독도를그리다' ▲ 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 및 각 공모전 심사 (現) 현대사생회 회장, 용산미술협회 고문, 청색회 고문. 신기회 상임위원. 서울아카데미회 이사, (사)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사)한국전업미술가협회 자문위원

 



 

최동열의 ‘타임라인(Timeline) 1977-2014’전=파란만장한 삶으로 유명한 최동열 작가가 미술 작업을 시작한 1977년부터 오늘날 까지의 대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은 개인전 ‘타임라인’을 11일까지 선화랑(서울 인사동)에서 개최 중이다. 역동적인 붓질, 원색에 가까운 화려한 색채, 단순화·상징화시킨 인물과 사물 등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유화를 비롯해 드로잉·판화·밀랍작품 등 모두 50여점을 선보인다. 베트남 전쟁 첩보대원, 미국 유학, 술과 마약에 취한 밑바닥 인생, 미국인 화가인 아내와의 만남 등의 이력을 지닌 작가는 미국,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을 떠돌며 작업한다. (02)734-0458.


5일부터 '신춘대길'전..결혼축하 행복 의미담은 현대민화 50여점 전시

[아주경제/박현주기자]

서공임작가가 그림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사진=박현주기자


인생은 타이밍이다. 하지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

지금부터 18년전인 1996년 생애 첫 전시회를 연 서공임(54)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당시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76)국왕과 소피아(76)왕비가 한국을 방한했을때 인사동에 들렀다. 소피아 왕비가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 인사동에는 마침 '가장 한국적인 우리 민화'를 그린 서공임의 작품이 전시중이었다. 소피아 왕비는 작품에 반했다. 왕비는 방한기념으로 호랑이 그림을 구입해 가져갔다.

흑백사진으로 남은 사진에는 앳된 모습의 서공임 작가앞에 소피아 왕비가 호기심을 보인채 바짝 당겨앉아있다. 그 옆엔 고개를 숙이고 그림을 바라보는 카를로스 국왕도 있다.

이날 이후 서공임은 일약 '민화작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 있는 한국문화원장님은 이 사진(스페인왕과 왕비가 있는)을 대형으로 걸고 전시한번 하자고 했는데 아직 성사되진 않았어요.하하"

4일 만난 작가는 활짝피어난 꽃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릴적에 유니세프에서 무료로 나눠준 옥수수빵이 유일한 끼니였어요. 큰 비닐에 담겨 위생도 엉망인 그런 빵이었죠. 그런데 제가 그 유니세프 카드에 작품을 그리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전북 김제출신의 가난했던 소녀는 이제 지구촌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유니세프 카드에 작품을 실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민화작가라는 브랜드도 구축했다.

""과거와 똑같은, 그런 '전통 민화하는 사람이야' 하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어요."

작가는 "민화를 그린다고 하면 옛그림을 베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래서 뭔가 새롭고 다른 민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원래의 그림을 재해석해보기도 하고 재료를 바꿔서 또 다른 느낌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고 했다.



결혼 축하드려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50x70cm, 종이에 수간분채,2010

롯데갤러리에서 5일부터 여는 '신춘대길'전에 현대감각으로 살아난 민화 50여점을 전시한다.

'민화로 홀리다'를 타이틀로 여는 이번 전시에는 부귀영화와 수복강녕의 의미가 가득하다. 200년전부터 서민들이 그리기 시작한 민화는 우리 주변에 늘 함께한 익숙한 그림이다. 회갑연 돌잔치 결혼식 합격등에 축하와 덕담을 전하는 '상징의 문법'같은 그림이다. 이러다 보니 동양화와 달리 대우를 못받는 설움도 겪었다.

전통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은 구김살하나 없다. 판판하게 칠한 배경에 까치와 나비 고양이 살구나무 석류나무가 비단에 수놓듯이 그려져있다. 단순미가 돋보여 그래픽같은 느낌도 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살잖아요. 아파트에는 기존의 민화보다 색깔이 있고 단순한 민화가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삶은 양면이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은 언제나 함께한다. 국내 대표 '현대 민화작가' 로 등극한 작가에겐 류머티즘등 관절염이 따라붙었다. 그는 "민화작업은 등골이 휘고 몸 망가지는 일"이라고 했다.

19세때 민화에 반해 바닥청소도 하면서 도제식으로 민화를 배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 10~16시간을 꼬박 그림만 그렸다. 집, 화실, 화실, 집만을 왔다갔다하며 몰두했다. ​

"민화는 수백 개의 점을 찍어야 하고 수만 개의 선을 그려야 하는 작업 과정을 거쳐야 해요. 인내를 요하는 민화가 내성적이었던 저와 잘 맞았죠. 제가 무식하리만치 인내심이 많거든요."

민화의 특성상 그리는 시간보다 준비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물감을 사서 바로 쓸 수 있는 서양화와 달리 민화는 색 가루를 직접 빻고 체로 걸러내고 아교와 섞는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루 종일 물감만 개는 날도 있고, 석회반죽을 개다가 열 때문에 손이 데인 적도 있었다.

성냥꼴처럼 손가락이 너무 가늘다고 하자 "엄마가 늘 두 손을 잡고 비비며 아이고, 이 손으로 네가 벌어먹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한다며 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민화는 천대하는 경향이 있어요."

민화작가로 30년째, "우리나라에서 전시보다 해외에서 더 감동을 받는다"는 작가는 폴란드 중국 프랑스 아르헨티나등에 한국의 현대 민화를 소개하며 한류에도 기여하고 있다. 10년 넘게 함께 작업한 디자이넌 장광효의 의상에 작가가 꽃 그림을 그렸고,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휘호여사와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여사 해외순방 한복에도 꽃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외국에 나가 전시를 할 때 한국의 정서에 감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문화를 알리는 위치가 된 것에 보람을 느끼고 역시 민화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축! 합격’(행림춘연) ‘복을 빌어드립니다’(정오모란) ‘결혼 축하드려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죽매쌍희) ‘아버지,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사셔요’(수거모질) 등 한글로 재미있게 풀이한 '서공임의 민화'는 5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을지로 롯데갤러리에서 볼수 있다. 민화로 제작한 스카프등 아트상품도 선보인다. 롯데갤러리 에비뉴엘에서도 로비부터 4층까지 복도에 그림이 걸렸다. 4월 21일까지 작품을 볼수 있다.(02)726-4456.


어머니, 사랑해요!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해요, 50x70cm,종이에 수간분채,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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