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서울 가나 인사아트센터
사람 몸·자아 다룬 작품 선사


 

“나는 누구인가.”

매번 반복되는 공허한 질문 속에서 사람들은 답을 찾기도, 때로는 답을 찾지 못해 마른 숨을 내쉬곤 한다.

눈에 보이는 작은 현상에만 집중하며 흔히들 말하는 ‘물질적 성공’만을 목표로 둔 채 내달리는 이들을 향해 몸이 말한다. “우리는 잠시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여행을 온 것뿐” 이라고.

사람의 주체는 자아(自我)에 있음을 작품으로 말해 온 춘천 출신 고중흡(31)조각가가 첫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인사동 가나 인사아트센터 제1특별관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 ‘여행’ 에서는 사람의 몸을 모티브로 삼아 활동해 온 고 작가의 조각품 7점이 전시된다.

대표작 ‘완-묻다’가 지닌 의미에 대해 그가 내놓은 해석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짐작해 본다.

강원대 미술학과 조소 전공과 중국미술학원 구상조각을 졸업한 고 작가는 춘천미술협회전(2013)과 강원청년작가 초대전(2013) 등 다수의 단체전을 통해 작품을 알려왔으며 강원미술대전 특선(2005), 전국대학·대학원 조각대전 우수상(2006), 강원미술대전 대상(2007)을 수상했다. 개막식은 19일 오후 5시.

 

강원도민일보 / 전선하

 

 

 

오드리 헵번, 그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갤러리 시작은 오드리 헵번 타계 20주년 기념하는 전시 <아날로그 뷰티>展을 오는 3월 19일(수)부터 4월 1일(화)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시작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오드리 헵번 타계 20주년을 기념하는 국내 최초의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김일동, 김형욱, 이관영, 윤유나, 여 해, 송지혜, 최 잔 등 총 7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이 7명의 작가들은 그간 각기 다른 영역에서 작품 활동을 해왔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삶에 공감돼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됐다고 전했다.

김일동 작가는 그녀를 통해 현재의 우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김형욱‧윤유나‧여 해 작가는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통해 그녀를 표현하고 있다. 송지혜 작가는 그녀의 소품들을 입체적으로 제작함으로써 어릴 적 보았던 그녀의 환상을 표현하며, 최 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이관영 작가는 그녀의 아프리카 아동지원을 위한 한 인터뷰에서 그녀가 힘주어 이야기한 라이프(LIFE), 러브(LOVE), 케어(CARE), 아프리카(AFRICA) 등 언어를 이용해 그녀의 삶을 시각화한다.

갤러리 시작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은막의 스타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을 사랑했고, 가난한 어린이들의 구호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아름다운 한 사람의 삶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한편, 오드리 헵번 타계 20주년 기념하는 전시 <아날로그 뷰티>展은 오는 3월 19일(수)부터 4월 1일(화)까지 갤러리 시작에서 개최된다.

 

 유니온프레스 / 오진희 인턴

이번 시즌에 주목할 전시로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2013.10.29-3.3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박수근전’(1.17-3.16, 가나인사아트센터),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2.5-3.9,갤러리현대)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부터 열린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은 현재(2월 12일 자)로 23만명이란 관중을 동원한 근래에 보기 드문 열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박수근전’,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에도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반세기 전에 창작된 작품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획전들로 어떤 점으로 보면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은 20년대에서 70년에 걸친 반세기에 창작된 회화며 ‘박수근전’도 50년대, 60년대에 제작된 작품들이다.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은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30년을 상회하는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세 전시에 나온 작품들을 두고 현대의 고전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우리의 근, 현대란 시간의 개념이 보편적 기준에서 다소 벗어난 압축된 것이고 보면 더욱 현대의 고전이란 에피세트가 결코 과장은 아니리라 본다.


고전이란 과거에 만들어진 전범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전범은 하나의 모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야 할 준거틀, 가치의 기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근, 현대미술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전개되었느냐는 역사적 맥락을 추구할 수 있으며 종내에는 우리미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미학적 탐구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


이들 전시에 많은 관중이 밀려온다는 것은 단순한 흥미 본위의 차원을 떠나 우리 것에 대한 목마름의 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통해서 외국의 고전이나 명화들을 대할 기회는 많아졌으며 흥행 위주의 해외명작전들이 수없이 많이 열린 반면 막상 우리미술에 대한 보다 집중된 전시가 없었다는 데 대한 반사작용이라고나 할까. 외국 것에 대해 식상할 즈음에 나타난 우리 것에 대한 보상심리의 단면이라고나 할까. 국립박물관이나 간송미술관에서 가끔 열린 우리 고전에 대한 기획전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점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63, Oil on canvas, 65×53cm



우리의 아름다움 다시 찾기

우리 것이 좋다, 우리 것이 아름답다는 국수적 발상이 아니라 우리 것이 결코 외국 것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자각현상, 우리 독특한 아름다움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야 말로 감상적, 편파적 국수풍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우리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 남 것의 아름다움도 제대로 보인다는 데서 진정한 미술감상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근현대 회화 100선전’은 우리의 근, 현대미술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획이다. 시대별 경향의 추이, 방법의 다양한 모색, 그 속에서 가꾸어진 개별성을 점검해볼 수 있으려면 이만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모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박수근전’은 박수근의 전체 유화작품이 대개 300점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추론되고 있는데 이 전시에 유화작품이 100점이 나왔다는 것은 그의 전체 작품의 약 3분의 1이 출품되었다는 계산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각기 독특한 향기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이 한자리에 대량으로 진열되었을 때는 또 다른 감동의 열기로 다가온다. 개별에서 못 느끼는 무게라고나 할까. 파워라고나 할까. 우렁찬 합창을 듣는 기분이다. 그래서 한자리에 대량의 작품들이 진열되는 회고전이 유달리 감동을 자아내는 이유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5월에 열리게 될 박수근 탄생 100주기 기념전(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의 인간적인 면모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올 것을 기대하게 한다.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전은 종이란 매체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만을 모았다는 데서 또 다른 기획의 묘미를 발견한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 종이는 각별한 데가 있다. 종이로 에워싸인 공간에서 생활해온 한국인들에게 종이란 매체는 단순한 지지체에서 벗어난 정서로서의 그 엇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인과 육화된 어떤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조형의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데서 이 전시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있지 않나 본다.

이봉금展 '공존'

2014.3.5-3.11

가나인사아트센터

 

계절마다 피고 지는 산과 들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야생화와 친숙한 곤충을 소재로 따뜻한 이야기를 건네는 이봉금 작가. 그가 5일부터 10일까지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공존’을 펼쳐보인다.

 이 작가의 작품의 소재는 야생초와 꽃, 곤충들로, 작가는 이들 생명체를 화폭에 담으면서 늘 같은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수많은 꽃과 나무, 곤충들이 사라지고 없음을 알게된다. 지금, 그 자리는 검은 아스팔트로 덮여 영원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모습이다.

 작가의 메시지는 착하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며 지나치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 아무리 작은 것도 자연은 소중하고 위대하기 때문으로,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고 작은 생명도 존중할 수 있고 소박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되어 진다고 말한다.

 작품의 기법은 한국화의 장르에서 초충도(草蟲圖)라고 하는 전통화목에 바탕을 두고 있다. 먹과 함께 채색을 혼용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적인 회화재료인 지(紙), 필(筆), 묵(墨)에 채색을 사용하는 것. 먹으로 표현한 그릇의 형태는 대지(大地)를 형상화 한 것이고, 종(種)을 담아 보존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뜻을 담고 있다.

 김현정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을 대하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말한다”면서 “작은 생명도 존중할 수 있고 소박한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마음을 찾을 수 있게 할 것이다”고 소개했다. 

 전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다수의 단체전 및 기획전에 초대되었으며, 이번 서울관의 전시가 작가의 6번째 개인전이다. 온고을대전 입선(2006년), 한국미술대상전 우수상(2009년)을 수상, 현재 건지회, 전북회화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북도민일보 / 김미진 기자  

 

   

 

 

 

 

 

 

 

 

 

 

 

 

 

 

 

 

 


12일~18일 인사동 갤러리미술세계에서 개최

[스타데일리뉴스=박미혜 기자]

이진한 화가의 개인전이 오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미술세계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이 작가는 국내 풍경들을 매개체로 강렬함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부드러운 색과 선을 이용해 특유의 ‘한국미’를 멋스럽게 표현해냈다.

 ▲ 이진한 화가의 개인전이 오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미술세계에서 개최된다. ⓒ 이진한

 

특히 '남해바다의 새벽'이나 '여수바다'는 비슷한 색감으로 캔버스를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연의 감동을 고스란히 선사한다.

이외에도 관람객들은 '순천만 갈대밭'이나 '남양주', '백마강', '세미원'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진한 작가는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수료했으며 1971년 코스모스 화랑을 시작으로 국립 공보관 화랑, 조성희 갤러리, 신상 갤러리, 자이 갤러리 등 다수의 개인전으로 호평을 받았다. 또 대한민국 신상미술대전 초대작가상을 비롯 Cachet전, 르네상스 등과 같은 단체전에도 참여한 바 있다.

MBC미술대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 국제문화미술대전에서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미협과 강남미협, 국제화우회 회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낡은 면 Backside



손은아展 / SONYUNA / 孫銀娥 / painting
2014_0319 ▶ 2014_0325

 

손은아_Backside 13-9147_캔버스에 유채_80×116cm_2013

 

 

초대일시 / 2014_031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낡은 면-Backside ● 버려지고 쓸모없는 물건에서도 나름의 미를 찾아내는 게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진 지금, 길을 가다 또는 여행을 하다 찾아보는 낡은 면들은 언제나 사진기 속에 차곡차곡 담아둔다. 낡은 면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나 풍경에서 비롯된다. 얼마만큼을 싣고 달렸는지 알 길 없이 수없이 부딪히고 일그러진 금속판의 표면엔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어 갖가지 재미나 형태를 보이는 면으로 이루어진 화물차의 모습을 말하기도 하고, 수 없이 많은 짐을 날랐을 천막 달린 트럭의 엉긴 밧줄과 그로 인해 생긴 닳고 닳은 천막의 주름들, 또 비바람에 풍화되어 표면이 마모된 나무와 녹슨 금속 슬레이트로 덮인 담벼락이나 좁은 골목의 구석진 자리들, 해가 들지 않아 축축한 땅 냄새나는 그늘 속 풍경들, 폐차장에 버려져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누운 부서지고 분해된 차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은 항상 나의 이목을 끄는 작품소재들이다.

 

 

손은아_Backside 14-3079_캔버스에 유채_116×80cm_2014

 

                                                             손은아_Backside 12-9560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2012

 

 

 

이러한 소재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가져 온 믿음, 즉 화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물이나 형상의 가치를 찾아내어 아름다운 형태와 구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건대 나의 낡은 면들은 그 것 안에 마치 효용을 다해 점점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인간의 지친표정과 인생의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삼킨 채 주름진 사람의 얼굴과 닮아있진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이라는 것은 언제나 작가의 경험과 그에서 얻어진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 인생에 대한 태도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저 젊기만 하던 때를 벗어나 인간이 피해갈수 없는 생로병사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접하면서, 비로소 생명의 근원에 대해 점점 의문을 두게 되기도 하며,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하는 어른이 되고 보니, 인생은 기본적으로 슬프고 허망하며, 노년은 무기력하고 쓸쓸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리던 차의 버려진 모습이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형태들이 사연 많은 세월을 견뎌 온 노인의 모습처럼 다가왔다는 것이다. 과거엔 그저 물성을 직접 묘사하는 기술적 향상에 대한 재미와 사실적 표현의 회화에서도 기본적인 조형미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는 도구로서 선택된 소재에 불과하였는지 모른다.

 

 

 손은아_Backside 12-G_캔버스에 유채_60×100cm_2012

 

                                                               손은아_Backside 14-tb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4

 

 

Backside 라는 것은 이러한 사물들의 뒷모습, 뒷면도 되지만 수많은 세월을 견뎌온 노인의 초상이나 뒤안길 같은, 초라하지만 결코 추하지 않은 뒷모습 같은 느낌을 담아내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흔히 눈 여겨 보지 않고 지나치는 사물이나 풍경의 그늘, 사람의 절제되고 감춰진 마음들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단어다. 뒷모습이지만 앞모습처럼 얼굴의 주름이나 감춰진 표정을 느낄 수 있고, 앞모습이지만 전혀 생각이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이면을 가진, 마치 낡은 차의 모습이나 표면들이 사람의 다양성만큼이나 각기 다른 초상화와 같은 느낌으로 보여 지길 바란다. 세밀한 녹의 모양이나 형태들은 잔 붓으로 일일이 그리고, 여기저기 긁히고 벗겨진 페인트 색이나 오염되어 묻은 때를 일일이 묘사하려는 것은 객관적인 실재성을 배가하려는 게 아니라, 마치 사람의 얼굴에서 보여 지는 표정을 묘사하듯이 낡고 초라한 사물이나 풍경의 단면에서도 마치 생명체인양 감정을 가진 것처럼 깊은 무게감이 표현되길 바라는 것이다. 녹의 모양이 하나도 같은 형태가 없는 것처럼 대량생산으로 만들어 내어 같은 차종이 수도 없이 많지만 낡은 차들은 차번호라는 행정적 주체성 말고도 새로이 생겨난 녹의 형태와 다양한 일그러짐을 통해 나름의 고유성을 지니게 된다.

 

 

 손은아_Backside 12-8654_캔버스에 유채_90×140cm_2012

 

손은아_Backside 10-P_캔버스에 유채_90×140cm_2010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붓을 든 모든 날마다 새로운 기분과 감정과 생각을 가지게 되어 마치 일기를 쓰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 완성되기까지 떠오르는 수 만 가지 생각의 찌꺼기들, 일상으로 비롯된 갈등으로 인한 감정의 묵은 때를 그림에다 묻히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 탓에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고행과 같은 시간이 실제 사진이 갖는 사실성보다 좀 더 회화답고, 깊어지는 톤의 느낌으로 만들어져 갈 때 묘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며, 이러한 만족감이 다시 또 다른 낡은 면을 찾아 새로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가 되곤 한다. 사실적인 묘사를 하다고 해서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이 추구하는 극단의 객관화와 실물인가 보여 지는 착시에서 오는 허무함을 추구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실적 묘사도 주관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 사진의 색이 가지는 형형색색의 화려함 대신 빛바랜 사진과 같은 채도 낮은 단색과 중간 톤을 많이 사용하여 분위기 있는 양감을 강조하고, 디지털 프린트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실사에 가까운 느낌보다는 좀 더 만들어진 회화에 가까운 느낌이 더해지길 바래왔다. ● 대학 시절부터 동기나 은사님으로부터 사진을 찍어 프린트하면 될 것을 뭐하려 그리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완성 하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시절만 해도 구상을 하는 이가 거의 없었던 때였으니 들었던 말이련만, 생각해 보건데 그 질문은 직접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묻고 되물었던 질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많은 미디어와 최첨단 장비들이 미술작품의 도구가 된지 오래고, 다른 작가들이 다양한 재료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수 만 가지 다양한 생각의 개념풀기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 때 나에겐 아마도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그림들이 갖고 있는 물성들과 붓질이라는 수작업으로 완성하는 그림에 대한 묘한 성취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미술가에게 적용되는 과정은 성실함과 우직함이며, 요령을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 미술은 축복이며 선물이다.' 라고 말한 모 평론가님의 글이 반갑게 느껴지고, 선배작가님의 '붓질은 가장 전통적이고 숭고한 회화 표현 방법이다'라고 말한 부분들을 자주 되새기고 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으로 완성한 그림이라도 꼭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거나 희대의 명작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노력에 대한 가치는 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손은아

 

    

 

Vol.20140319a | 손은아展 / SONYUNA / 孫銀娥 / painting

애완품 Toy Pet 愛玩品

송용겸展 / SONGYONGGYEOM / 宋龍謙 / sculpture

2014_0312 ▶ 2014_0317

송용겸_Memento mori-Rooster_우산살_89×87×61cm_2014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과거와 지금, 그 사이에서』 ● 17세기 서양에서 자연과학이 대두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이후 지속되어온 목적론적 자연관이 기계론적 자연관 Mechanistic nature view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기계론적 사유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데카르트의 생리학적 환원주의 사고는 1818년 영국의 여류작가 M. W. 셸리 Shelley가 출간한 『프랑켄슈타인; 혹은, 근대의 프로메테우스 Frankenstein; or,The Modern Prometheus』라는 공포소설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여러 사체의 부분들을 조합하여 비록 괴물과 같이 보일지라도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혹은 만들어내고자 욕망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기계론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일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첨단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생명공학 Biotechnology은 기계론적 자연관과 자본주의가 결합되어 탄생한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극단은 꿈의 만능세포인 줄기배아세포 연구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논리에서 잘 들어나고 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생명의식도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지배받고 있다. ● 생명의식 혹은 윤리와 관련된 논의를 하다보면 오래 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르네 클레망 René Clément 감독의 1952년 작 『금지된 장난 Jeux Interdits』이다. 영화에서 전쟁 중 고아가 된 어린 폴레트가 자신의 죽은 애완견을 그의 친구 미셀과 함께 묻어준 후 묻힌 애완견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두 어린아이는 여러 주검들을 애완견 주위에 매장해준다. 심지어 산 것을 죽여서도 매장해 준다. 그리고 묘지를 장식하기위해 미셀은 폴레트가 예쁘다고 지목한 십자가들을 아버지에게 거짓말하고, 신부님에게 맞아가면서도 가지고와 묘지를 꾸민다. 어린 그들이 죽은 강아지가 홀로 묻히는 것은 외로울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상징계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해 상상계에서 머물고 있는 듯 한 아이들만의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대부분의 어른들도 일면 공감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극중 폴레트와 미셀의 생각과 행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모든 아이들이 거치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송용겸_Memento mori-Hedgehog_우산살_63×66×15cm_2014

 

 

장광설을 한 이유는 송용겸의 이번 전시 제목 때문이다. 그는 이번 전시제목을 『애완품愛玩品』이라 명명했다. 그는 선재를 용접해 만든 다양한 동물들을 선보인다. 고양이, 닭, 도마뱀, 엔젤피시, 우리에게 날다람쥐라 알려져 있는 슈가글라이더, 우파루파, 거미, 햄스터 등이다. 한눈에 어떤 동물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각각의 동물을 선재의 특성을 살려 잘 만들었다. 그리고 이 동물들과 함께 전시장 안쪽에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호기심과 욕망을 가진 어떤 과학자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고 있는 실험실 공간이 재현되어 있다. 그 공간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기 위한 재료, 배양되고 조합되며 만들어지고 있는 이름 모를 생명체, 그리고 만들다 실패해 쓰레기통속에 마구 버려진 주검과 같은 물체 등으로 인해 관객에게 언캐니 uncanny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 공간은 선재들로 만든 동물들의 요람인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 하나가 보인다. 이 연구실에는 영화에서나 봄직한 새로 만들어진 생명체에게 기억을 주입시키는데 사용되는 것과 같은 헤드셋이 있다. ● 미술작품이 알레고리적 표현으로 가득 찬 것이라면 새로운 생명체를 탐구하는 실험실에서 과학자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각각의 동물들을 전시한 상황설정을 통해 필자는 직관적으로 실험실은 송용겸의 작업실이며, 그 실험실의 과학자는 조각가 송용겸으로 치환해 이번 전시를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시장의 이 동물들은 그가 그동안 '키웠던' 애완동물들이었다. 그가 '키웠던' 애완동물들인 만큼 그가 각각의 동물들과 많은 사연이 있었을 것임을 관객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과거에 키웠던 동물들을 이 시점에서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만든 것일까? 그런데 그에 의해 전시장에 환생한 그 애완동물들은 꼼꼼하게 살펴보면 납작한 거미, 탯줄을 줄줄이 달고 있는 햄스터와 고슴도치, 손발이 있는 엔젤피시, 도마뱀주위의 한 무더기의 잘린 꼬리들, 복어와 같이 배가 부푼 우파루파, 좌대에 몸의 일부분을 묻어놓은 고양이, 어딘지 마른 듯 한 닭, 마르거나 한쪽 팔이 부어오른 상태의 슈가글라이더와 같이 뭔가 낯설고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송용겸_Memento mori-Angelfish_우산살_85×48×28cm_2014

 

 

그가 처음으로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 때라고 한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자신이 그 동물들을 생명체로서 애완한 것이 아니라 '완구'로 취급하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호기심과 즐거움만이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그들 생명체의 고통을 그는 괘념치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마치 폴레트가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의 죽은 애완견의 외로움만을 걱정하며 미셀에게 다른 주검과 십자가들을 가져와 묘지를 장식하게 요구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전시장에 선보인 각각의 동물의 낯선 형태들로부터 관객은 어린 송용겸이 이 동물들을 어떻게 '완구'로 취급했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전시장 디스플레이 그리고 각각의 동물의 형태와 더불어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앞서 말한 헤드셋과 그가 선재로 사용한 우산살이다. 그 이유는 알레고리적 표현으로서 헤드셋과 우산살은 '무엇인가를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 봐왔던 것과 같이 헤드셋은 기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만든 각각의 동물은 그가 키웠던 동물들을 보고 사실적으로 재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각각의 동물을 '완구'로 대하던 자신의 생각들을 기억해내 그 기억들을 형상화했다. 송용겸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이립而立-인생관이 서는 나이- 할 때가 다 된 나이에 다시 들춰내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형상화하기 위해 그는 우산살을 사용했다. 그 우산살들은 버려진 우산들에서 추린 것이라 하였다. 

     

 

송용겸_Memento mori-Axolotl_우산살_85×48×28cm_2014

 

송용겸_Memento mori-Lizard_우산살_가변설치_2014

 

 

이번 전시 이전부터 그는 우산살을 용접해 여러 형태들을 만들어왔다. 그는 언제부턴가 우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오는 날 아침에 우산을 가지고 나갔다가 오후에 날이 개면 귀가 시에 우산을 잊어버리고 빈손으로 오는 것을 우리는 흔히 경험한다. 이를 건망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송용겸은 이런 것이 자본주의에 기반 한 소비사회의 가치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서 은연중 발현되는 현상 중에 하나라고 보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없고,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합종연횡도 가능하다. 그리고 소비사회에서 오늘 신제품은 내일 구제품이 된다. 소비사회에 사는 우리들은 추억을 간직한 물건을 가지기 보다는 새로운 것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하며 유행에 뒤쳐져 살면 안 된다. 특히 과거에 안주하면 안 된다. 앞만 보고 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속도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용도폐기된 것은 즉각 쓰레기통에 버려야한다.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용겸은 멈춰 서서 뒤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유년시절에 키웠던 애완동물들이 '애완'의 목적이기보다 자기중심적으로 즐기기 위한 '완구'에 가까웠음을 자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주인의 무관심으로 버려지는 완구들이 겪는 애환을 그린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를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한다. 그래서 그는 선재인 우산살을 재료로 자신의 기억속의 애완품들을 역지사지易地思之입장에서 그려나간 것이다. 역지사지하는 것은 자성의 첫 단계이다.

 

송용겸_Memento mori-Spider_우산살_가변설치_2014

 

송용겸_Memento mori-Sugar glider_우산살_가변설치_2014
 

 

인류 최초의 그림들은 대상을 보며 그린 것이 아니었다. 보았던 대상을 기억해서 그렸다. 그 흔적은 지금도 아이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린다는 것은 기억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장소-동굴 벽-에 기록해 놓은 기억을 공유하며 집단의식과 문화를 형성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기억의 공유를 위한 인류 최초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한편 기억의 축적은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과거를 멀리 볼 수 있는 만큼 미래를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이 과거 기억을 토대로 현재를 분석해보면 미래의 선택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성찰이라는 것이 이런 과정일 것이다. 송용겸의 작업도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억은 철부지 시절의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으로서 우리들에 대해 성찰해 보고 있다. 그는 유년기 동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대한 기억과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비교해보았을 때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심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의 작업은 만드는 즐거움에서 점차 삶의 표현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표현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 미술작품 제작 시 직관이 크게 작용하기는 하나 미술작품은 시각이미지로 표현한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송용겸의 첫 번째 개인전을 보며 앞으로 그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지켜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송용겸은 이제 이립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 그가 불혹이 되고 지천명할 때가 되면 그동안의 경험과 사유의 폭이 작업의 지평을 확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작가 송용겸에게 이런 가능성이 있음으로 해서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 박춘호

     

 

 

Vol.20140315b | 송용겸展 / SONGYONGGYEOM / 宋龍謙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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