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먹을 게 있다고, 석회암 바위에 뿌리 내린 걸까

동강할미꽃

 

 

바위 틈바구니로 꽃 무더기가 소담히 피어있다. 흔하디 흔한 할미꽃이다. 하나 이 사진은 흔한 사진이 아니다. 할미꽃도 할미꽃 나름이어서다. 이름하여 동강할미꽃. 강원도 정선 동강 상류 산골짝에서만 볼 수 있는 할미꽃이다.

해마다 4월 들머리면 정선 귤암마을은 몸살을 앓는다. 막 개화한 동강할미꽃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군락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바위틈 비집고 할미꽃 몇 송이 띄엄띄엄 피어있을 뿐이다. 그래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 두메산골을 찾아 들어온다. 동강할미꽃 한 번 들여다보겠다고 해마다 소란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동강할미꽃은 우리나라 동강변에서만 피는 할미꽃이다. 1997년 사진작가 김정명씨가 최초로 촬영했다고 전해지며, 2000년 학계에 공식 등록됐다. 동강할미꽃의 발견은 동강댐 건설 사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꽃이 개발을 막은 것이다. 귤암마을은 동강할미꽃 최초 발견지역이자 최대 자생지역이다.

동강할미꽃은 ‘뼝대’라고 하는 정선의 석회암 벼랑에 매달려 산다. 이 척박한 석회암 바위에 뭐 먹을 게 있다고 뿌리를 내린 것일까. 바위절벽에 새치름히 피어있는 동강할미꽃을 보고 있노라면 용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다.

가파른 뼝대 중간에 얹혀사는 신세여서 햇빛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동강할미꽃은 할미꽃 부류 중에서 예외적으로 꽃대가 꼿꼿이 서 있다. 하늘을 향해 빳빳이 고개 쳐들고 있다. 꼬부랑 할머니처럼 잔뜩 허리 숙인 여느 할미꽃과는 다른 기품이다. 올해는 봄이 일러 동강할미꽃도 이르단다. 서둘러야겠다.

중앙일보 /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 김명식 작가가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작품 앞에서 지난 10년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사진=왕진오 기자)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살고 있는 뉴욕, 어느 날 작가 김명식(65)은 전철 창문을 통해 비쳐진 성냥갑 같은 작은집들이 마치 사람들의 얼굴로 보여 졌다.

순간 그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여러 인종으로 오버랩된 것이다. 지체 없이 작업실로 달려가 미친 듯이 그 사람들을 그려내기 시작한 것이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이다.

2004년 우연이 발견한 모티브로 시작한 연작이 벌써 10년을 맞아 김명식 작가가 4월 2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10년 회고전과 장리석 미술상 기념상 수상 전시를 연다.



▲ 김명식, 'East Side Story JF-14'. 90.9x65.1cm, Oil on canvas, 2014.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인종의 갈등을 없애고 서로 화합하명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제목에서 동쪽은 항상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희망을 상징한다. 유화로 시작된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연작은 점차 판화, 입체, 도조, 드로잉 등 여러 장르와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10년 전과 변화된 것을 다양하게 보여 주고 싶었죠. 평면을 단순화 시켰습니다. 나도 군더더기가 없어지니 차분해지는 것 같다"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90년대 '고데기 연작'에 이어 2004년부터 10년간 추구해 온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가 매너리즘을 탈피하고자 1999년 떠난 뉴욕여행에서 보았던 다양한 인종과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에서 시자됐다.

생전 처음 경험한 뉴욕여행은 작가에게 큰 영감을 일으켰고, 2004년 마침내 뉴욕에 둥지를 틀고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집과 사람을 하나로 묵어 하얀 집은 백인, 까만 집은 흑인, 노란 집은 동양인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창조된 것이다. 대담한 화면구성과 뛰어난 색채감각으로 완성된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마침내 화단에 주목을 받으며 2005년 1월 뉴욕 5번가의 리즈갤러리 '아시안 3인전(핫토리, 장궈수, 김명식)'에 초대되는 영광을 얻게 됐다.

 

 

▲ 김명식, 'East Side Story LAN-05'. 72.7x53.0cm, Oil on canvas, 2014.


이번 전시는 2004년 뉴욕에서 김명식작가가 처음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탄생시킨 10년을 돌아보는 전시이자, 2013년 '장리석 미술상'수상을 기념하는 전시이다. 10년 동안 작가의 작품이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는지 작품을 통해 그가 살아온 치열한 삶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작가는 선화랑 전시를 시작으로 5월 부산, 6월 뉴욕, 7월 일본 고쿠라, 9월 몽골 울란바트, 12월 마이애미, 2015년 2월 일본 시코쿠 등으로 월드투어에 나선다.


▲ CNB뉴스, CNBNEWS, 씨앤비뉴스/ 왕진오 기자


이란 출신 탈라 마다니의 풍자된 중년의 욕망

“중년 남성은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존재예요. 인간의 부조리를 가장 잘 드러낸 갈등의 시기라고 할까요.”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작품들은 뭔가 사연을 담은 듯하다. 기존 미술의 개념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 탈라 마다니의 ‘3D Pussy with Projection Light’. 소녀의 성(性)에 탐닉하는 아랍 중년 남성들을 내세워 체제의 모순을 꼬집었다. 
                                                  PKM갤러리 제공

이란 출신의 여류 작가 탈라 마다니(33)는 요즘 영국 화단에서 ‘뜨는’ 젊은 화가다. 육체적 요소에 블랙 유머를 적절히 섞어 사회의 관습과 모순을 꼬집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작품에는 끊임없이 중년 남성이 등장한다. 이들의 욕망은 어둠 속 프로젝터를 통해 화면에 투사되는 감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예컨대 어린 소녀는 치마를 들추며 요염한 포즈를 취하고 이를 바라보는 중년 남성들의 눈빛은 반짝인다. 아예 넋을 놓고 있다. 다른 그림에선 한 중년 남성이 기저귀 차림의 자신이 기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본다. 마다니는 “어린아이처럼 본능에 충실한 남성의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 탈라 마다니

그는 미국 오리건주립대와 예일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주 던져 왔는데 청소년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에 대한 비판 의식이 돋보인다.

작가는 15세 때 이란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런 성장 배경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작품 속 중년 남성은 모두 아랍인이죠. 이들은 뭔가 욕망을 표출하려 해요. 어린 시절 이란에서 성장했던 경험이 무의식 중에 투영된 겁니다.”

오는 5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PKM갤러리에서 이어지는 전시에는 마다니의 약혼자인 영국 출신의 나다니엘 멜로스(40)도 함께 참여한다. 둘 다 한국 나들이는 처음이다.

영상, 퍼포먼스 작업에 천착해 온 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굴 비유’를 담은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한 현대인이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 동굴벽화를 그린 원시인을 인터뷰한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또 보라색과 주황색으로 범벅이 된 셰익스피어의 뇌에 빨대를 꽂은 조각도 내놨다. 이성이 지배하는 현생 인류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얼마 전 결혼을 약속한 두 작가가 함께 전시를 여는 것은 처음이다. 과도한 표현 때문에 영국에서 전시가 취소됐던 작품도 포함됐다. 두 작가는 “예술 작품은 본능과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며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데 저항하는 건 예술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임미령展 / LIMMIRYUONG / 林美齡 / painting

2014_0402 ▶ 2014_0408

임미령_The Earth-Lucky_캔버스에 유채_81×163cm_201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임미령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4_0402_수요일_06:00pm

후원 / 주식회사 금비

관람시간 / 10:00am~06:00pm

 

 

토포하우스TOPOHAUS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6(관훈동 184번지) 2층Tel. +82.2.734.7555/+82.2.722.9883

www.topohaus.com

 

 

 

지구, 꽃나무가 자라는 지상낙원 ● 태초에 신령스런 나무가 있었다.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나무며, 하늘과 땅을 중계하는 나무고, 하늘로 치솟은 형상이 우주의 남성원리(남근)를 상징하는 나무다. 세계의 중심은 또 있는데, 우주의 배꼽에 해당하는 옴파로스가 그것이다. 남성원리가 수직(다르게는 계통)을 지향한다면, 여성원리는 수평(다르게는 계열)으로 흐른다. 우주의 여성원리를 상징하는 옴파로스는 우주의 남성원리를 상징하는 세계수와 합치된다. 세계수는 옴파로스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우주의 배꼽이 제공하는 생명력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우주적 배꼽의 수유가 세계수를 양육하는 것. 그러므로 세계수는 우선은 우주의 남성원리를 상징하지만, 이처럼 우주적 배꼽의 양육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주의 남성원리와 여성원리가 합치된 양성구유며 자웅동체를 상징한다. 음과 양이 합치되고, 생과 멸이 무한순환 반복되는 우주의 운동성이며 항상성을 상징한다.

 

 

                                                   임미령_The Earth-Glorify_캔버스에 유채_262×163cm_2014

 

 

임미령은 이처럼 그림 속에 신령스런 나무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나무가 보통의 나무가 아니라, 다름 아닌 세계수임을 어떻게 알까. 작가는 그림 속에 지구를 상징하는 둥근 원 형상을 그려놓고, 대개는 그 원 형상의 정중앙 위쪽에 나무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는 마치 지구(지모)로부터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그 인상이 세계수로서의 토포스(위상학)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는 그렇다 치고, 원형상은 어떻게 지구를 표상하는가. 예로부터 원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완전한 형상을 의미했다. 시작과 끝이 따로 없고 처음과 마지막을 한 몸에 수렴하고 있어서 무한순환운동을 반복하는 존재의 생멸원리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닫힌 구조를, 그래서 자족적인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무한순환운동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자기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의 뱀이나 뫼비우스의 띠와도 그 상징적 의미가 통한다.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운동?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운동을 원심성이라고 한다면, 자기에게로 수렴되는 운동을 구심성이랄 수 있겠다. 여기서 원은 닫힌 구조며 그 자체 자족적인 구조로 인해 자기 속에 이런 원심성과 구심성으로 나타난 존재의 운동성의 계기를 하나로 합치해 들인다.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그리고 재차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운동성을 통합하는 원리이며, 그 통합원리에 비유되는 자기반성적 계기 내지는 경향성을 함축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처럼 원에는 가장 기본적이고 완전한 형상으로서의 의미가, 그 자체 닫혀 있어서 자족적인 구조가, 그리고 매번 자기에게로 되돌려지는 자기반성적인 계기가 탑재돼 있다.

 

 
                                                     임미령_The Earth-Glorify_캔버스에 유채_326×131cm_2014

 

그래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의 인식 자체는 자연과학의 결과이며 성과이겠지만, 여기에는 이런 원 형상과 관련한 신화적 사실이며 상징적 의미도 일정부분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자연과학적 사실과 신화적 사실(이를테면 자연관과 같은)이 합치된 경우로 봐야 한다. 이런 사실의 인식은 최근 과학의 성과가 점차 이런 신화적 사실을 인정하는 경향으로, 신화적 사실을 자신의 일부로서 수용하는 입장으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에도 부합한다. 작가는 이처럼 원 형상으로 나타난, 그래서 완전성을 표상하고 있는(사실은 완전성의 욕망으로 나타난 인문학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지구 속에 이러저런 삶의 풍경을 앉혀놓고 있다. 첩첩이 중첩된 산세가 펼쳐지는가 하면, 산으로부터 발원한 강이 무슨 젖줄처럼 흘러내려 바다로 모인다. 산과 산 사이에는 드문드문하거나 빼곡한 집들이, 성채들이며 현대도시들이, 다리며 교회가 펼쳐진다. 그런가하면 전통적인 민화의 그것을 상기시키는 기암괴석이, 양식화된 파문과 물고기들이, 휘어진 고송이 전경에 포치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비록 알만한 형상을 그린 것이지만 감각적 실재를 그린 것은 아니다. 관념적 실재를 그린 것이며 상징적 실재를 그린 것이다. 세계의 됨됨이에 대한 관념상을 그린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지구를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아님 그보다는 마치 마술사의 수정 공위로 파노라마처럼, 만화경처럼 흘러가는 삶의 정경을 그린 그림 같다. 실제로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왜곡돼 보이는 상이나 부분적으로 감지되는 투명성의 암시가 그렇다.

 

 
                                                      임미령_The Earth-Cavern_캔버스에 유채_193×131cm_2014

 

작가의 그림은 비록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대상을 그린 것이지만, 감각적 실재를 그린 그림은 아니라고 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아님 도서관에 앉은 채로 세계의 구석구석을 답파하듯 하나의 화면 속에 삶의 풍경들을 낱낱이 불러들여 재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처럼 재편집되고 재구성된 그림은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탑재하고 있는가. 아마도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세계의 끝에 가닿고 싶은 욕망이, 그러므로 결국에는 진정한 자기를 지향하는 존재론적 물음이 내장돼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구에는 세계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사실상의 중심)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그 세계상을 마치 뿌리로 흙을 아물고 있듯 아우르거나 굽어보고 있다. 그리고 그 나무 밑에는 빈 의자가 놓여 있는데, 바로 작가의 얼터에고(자기분신)에 해당한다. 작가는 말하자면 의자에 앉은 채로 세계를 답파한다. 바로 공상을 통해서 세계의 끝을 자리에게로 불러들인다. 이따금씩은 말로 화해진 그리고 더러는 새로 분한 자기분신을 자기 대신 내보내기도 한다.

 

 
                                                      임미령_The Earth-Glorify_캔버스에 유채_163×131cm_2014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와 만나지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 것이며, 특히 일종의 유토피아로 나타난 이상세계를 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세계는 작가의 그림에서 알만한 혹은 알 수 없는 온갖 만개한 꽃들 천지로 나타난다. 특히 지구의 머리맡에 포치해있는 아름드리나무는 감각적 현실로부터 건너온 것이 아니다. 어떤 나무라기보다는 그저 온갖 꽃들이 만개한 나무면 좋은 것이다. 온갖 과일들과 온갖 수종의 꽃들이 종을 무시하고 공존하고 있는 나무는 그래서 작가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고, 풍문으로나 떠도는 지상낙원의 비전을 그린 것이다. 실제로 어떤 그림에는 무성한 꽃나무 사이를 헤집고 일종의 관문과도 같은 통로(아마도 경계 혹은 거듭남의 계기를 상징할)가 설핏 그려져 있기도 해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고 있기도 하다.

 

 
                                                     임미령_The Earth-Glorify_캔버스에 유채_131×163cm_2014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는 전통적인 민화에 대한 재해석도 일정한 의미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형식의 차용이나 재해석에 대해선 앞서 살핀 바와 같고,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민화에 반영된 관념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민화에 그려진 세계상은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설핏 감각적 실재를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관념적 실재를 그린 것이라는 점이다. 부귀영화와 무병장수와 같은 세속적인 욕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실상 지상천국에 대한 비전을 반영해 그린 것이다. 그 비전을 통해서, 그 비전이 열어 보이는 환상을 통해서 비루한 세상살이를 견디고 건널 수 있게 해준 그림이다. 결국 풍문으로 떠도는 유토피아를 그린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진즉에 민화에 배태된 유토피아 사상을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나마 전유한, 그리고 그렇게 자기화한 그림으로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만개한 꽃나무로 나타난 작가의 그림은 유토피아(아님 나이브한 세계)를 표상한다. 적어도 유토피아가 갖는 사회학적 의미가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인 지금 마주하게 되는 유토피아가 새삼스럽다. 혹 개인의 무의식 속에서나마 유토피아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는 기획이 아닐까. 유토피아가 아니면 삶의 꽃은 이내 시들고 만다는, 환상이 아니면 삶의 의미는 구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실되고 만다는 자기반성적 강조를 그린 것이 아닐까. ■ 고충환

 

 

                                                      임미령_The Earth-Glorify_캔버스에 유채_131×163cm_2014

 

 

지구 여행 = 그림 = 삶의 정화 ● 인생은 끊임없이 불확실한 결말을 향해 여행하는 것...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서 꿈을 꾸며 자유로운 영혼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여행을 한다. 지구여행... 여행은 삶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가다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고, 먼지 풀풀 날리는 사막을 걷다가도 오아시스를 만나면 환상인거지... 여행과 삶의 여정을 같은 선상에 놓고 여행을 통해서 느낀 체험을 화폭 속에 담는다. 화폭 중앙에 배치한 원형이나 반원형적 형상은 삶의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앞 뒤, 위아래 구분이 없는 원은 삶의 철학적 의미를 포함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인 지구가 되고 그 배경은 우주가 되고... 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항상 존재하면서 이상적인 완전성과 신성함을 가지고 우주적인 상징으로 표현된다. 화폭에는 색 위에 색... 다양하고 화려한 색들을 붓 터치로 하나하나 펼쳐놓듯 그어가며 흰 캔버스를 가득 메워간다. 원을 그리고 배경을 또 다른 색으로 화려하게 깔려있는 밑 색이 문득문득 보이게 덮기 시작한다. 지구를 상징하는 원 위에 나무를 한그루 심는다. 지구가 작게 보일 만큼 큰 나무를... 그 나무는 화려한 꽃을 피우고 마치 세상의 꽃을 다 담기라도 하듯 다양한 꽃들로 가득 메운 근사한 나무를 한 그루 심어놓고 그 밑에 깨끗하고 편안한 의자 하나를 놓아둔다. 그곳에 앉아 쉬며 사색하고 꿈을 꾼다. 그리고 세상을 관조하고 미지에 대한 동경을 그리며 가다린다. 내게 다가올 또 다른 미래의 삶을... 원 안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을 담는다. 산과 들... 사막도 있고... 도시도 있다. 강과 바다도 있고 날아다니는 새와 물고기도 있고.. 그곳을 한 마리의 흰 말이 잠재의식에 솓구치는 열정과 고통을 딛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여행을 한다. 이러한 지구 여행을 통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고리들을 풀어내고 세상이 다름에 공존을 배우고 자연의 신비감과 숭고함에 겸손을 배우고 위대한 창조주를 만나게 되며 삶을 정화 해 나간다.

임미령

 

 임미령展 / LIMMIRYUONG / 林美齡 / painting

'3D IMAX', 110X80X7cm, 도자기에 중화도안료 2014년.

 

배트맨, 원더우먼, 토르와 같은 영화 캐릭터부터 레이싱 선수, 츄리닝 맨, 데이트 중인 커플, 영화관 속 풍경 등 소소한 일상의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군상들까지. 도자기 위에 빼곡하게 그려진 인물들이 익살스런 인형 같다.

"7년 전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지하철 속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고 일률적이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그렇게 살고 있더라구요. 사소한 주변의 것들에 재미를 발견해 이를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정도영)

"대학에서 도예를 배울 때 워낙 전통소재를 위주로 해서 팝적인 작품을 해보고 싶었어요. 정 작가는 도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용감한 면이 있고, 저는 작업할 때 끝까지 파고드는 면이 있죠. 서로의 장점들을 맞춰나가며 작업하고 있어요."(명가을)


정도영, 명가을 작가(왼쪽부터)

단아한 수묵화가 그려져야 할 것 같은 도자기 위에 만화적인 캐릭터가 담긴 정도영(32)·명가을(여·30)의 협업 작품들은 해학적이다. 작품에 표현된 과장된 표정과 색채, 경쾌한 속도감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들은 '도자기'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작품이 갖는 의미와도 결합시킨다. "도자기는 화려한 색상을 지속할 수 있는 동시에 한 순간의 충격에도 산산이 조각날 수 있는 이중성을 지녀요. 이 시대가 추구하는 '물질'에 대한 욕망의 모습과도 닮아 '존재'가 아닌 '소유'의 삶이 지니는 아슬아슬한 현실이 담겨있죠."

5년 동안 함께 이 같은 작업을 해온 이 젊은 커플 작가팀이 지금까지 만든 인물은 1000여명 정도. 스케치 단계부터 그림이 그려질 도자기 원형을 뜨고 가마에 굽고 채색하고 유약을 바르고 다시 또 굽는 과정에서 어떤 색이 나올지는 알 수 없어 "재미가 배가 된다"는 게 이들의 말이다.

이들의 작품이 다음달 2일부터 8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그림손갤러리에서 전시된다. '행복의 발견'전이라는 이름의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경영연구소가 대한적십자사와 주관해 기부활동으로 연계한 프로젝트다. 전시 기본경비를 제외한 작품 판매 수익금 전액이 구입자의 이름으로 대한적십자사에 기부된다. 작품은 대부분 50만원 전후에서 300만원 미만으로, 기부를 통해 소득공제 해택을 볼 수 있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은 "작품들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 바로 여기에 행복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며 "이런 미술전시가 젊은 유망작가들을 키우고, 사회공헌의 매개체로 활용돼 일반인들에게 미술의 저변이 확산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 /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소묘화가 김태형 작가 개인전, 4월 23~29일까지…경인미술관 제 2전시실에서

 


사실적·구상적(具象的) 소묘화가 김태형씨의 개인전이 내달 4월 23~29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경인미술관(구 관훈동 30-1) 제2전시실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김태형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서 연필과 목탄· 혼합재료를 사용하여 잊혀져 가는 한국호랑이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 100호 6점을 비롯해 60호· 50호· 30호 등 총 16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실제 고양시 일산 정발산동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에는 이번 전시회에 선보일 정교한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들과 호랑이 기운이 가득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많은 호랑이가 서식하여 ‘호랑이의 나라’로 일컬어지며, 1988년 올림픽에서는 ‘호돌이’가 한국을 상징하는 마스코트로 부각되기도 했다.

호랑이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왔으며, 역동적이면서도 인정 많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서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형상을 잘 대변하는 가장 익숙한 동물로 여겨진다.

한국호랑이 그림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김태형 작가는 “그 동안 연구해온 기법을 통해 한국호랑이를 그림으로 담아 보려 했었다”며 “작품을 그리면서 호랑이의 용맹함과 성스러움· 인자하고도 효성스러운 좋은 기운을 느꼈으며 또한 민속에서 전해오듯 호랑이는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영물임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한국호랑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사나운 호랑이 모습이 아닌 왠지 정감이 가는 작품들로 보여진다. 이에 대해 작가는 “호랑이의 사나운 모습은 그 기운에 눌릴 수 있기 때문에 친근하면서도 강인함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그린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지난 10여 년의 시간 동안 여러 기법들을 만들어온 작품들로 연필화의 특징인 빛에 반사되어 번들거리는 현상이 없는 섬세하고 묵직한 어둠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다.

특히 한국호랑이의 복원과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안타까운 한국호랑이의 모습을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느끼는 이 좋은 기운을 많은 그림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며 “할 수 있다면 한국호랑이를 담는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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