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품 Toy Pet 愛玩品
송용겸展 / SONGYONGGYEOM / 宋龍謙 / sculpture
2014_0312 ▶ 2014_031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Tel. +82.2.734.1333
『과거와 지금, 그 사이에서』 ● 17세기 서양에서 자연과학이 대두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이후 지속되어온 목적론적 자연관이 기계론적 자연관 Mechanistic nature view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기계론적 사유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데카르트의 생리학적 환원주의 사고는 1818년 영국의 여류작가 M. W. 셸리 Shelley가 출간한 『프랑켄슈타인; 혹은, 근대의 프로메테우스 Frankenstein; or,The Modern Prometheus』라는 공포소설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여러 사체의 부분들을 조합하여 비록 괴물과 같이 보일지라도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혹은 만들어내고자 욕망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기계론에서 비롯된 상상력의 일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첨단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생명공학 Biotechnology은 기계론적 자연관과 자본주의가 결합되어 탄생한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극단은 꿈의 만능세포인 줄기배아세포 연구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논리에서 잘 들어나고 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현실에서 생명의식도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지배받고 있다. ● 생명의식 혹은 윤리와 관련된 논의를 하다보면 오래 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르네 클레망 René Clément 감독의 1952년 작 『금지된 장난 Jeux Interdits』이다. 영화에서 전쟁 중 고아가 된 어린 폴레트가 자신의 죽은 애완견을 그의 친구 미셀과 함께 묻어준 후 묻힌 애완견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두 어린아이는 여러 주검들을 애완견 주위에 매장해준다. 심지어 산 것을 죽여서도 매장해 준다. 그리고 묘지를 장식하기위해 미셀은 폴레트가 예쁘다고 지목한 십자가들을 아버지에게 거짓말하고, 신부님에게 맞아가면서도 가지고와 묘지를 꾸민다. 어린 그들이 죽은 강아지가 홀로 묻히는 것은 외로울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상징계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해 상상계에서 머물고 있는 듯 한 아이들만의 죽음에 대한 인식으로 대부분의 어른들도 일면 공감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극중 폴레트와 미셀의 생각과 행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모든 아이들이 거치는 통과의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장광설을 한 이유는 송용겸의 이번 전시 제목 때문이다. 그는 이번 전시제목을 『애완품愛玩品』이라 명명했다. 그는 선재를 용접해 만든 다양한 동물들을 선보인다. 고양이, 닭, 도마뱀, 엔젤피시, 우리에게 날다람쥐라 알려져 있는 슈가글라이더, 우파루파, 거미, 햄스터 등이다. 한눈에 어떤 동물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각각의 동물을 선재의 특성을 살려 잘 만들었다. 그리고 이 동물들과 함께 전시장 안쪽에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호기심과 욕망을 가진 어떤 과학자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고 있는 실험실 공간이 재현되어 있다. 그 공간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기 위한 재료, 배양되고 조합되며 만들어지고 있는 이름 모를 생명체, 그리고 만들다 실패해 쓰레기통속에 마구 버려진 주검과 같은 물체 등으로 인해 관객에게 언캐니 uncanny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 공간은 선재들로 만든 동물들의 요람인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 하나가 보인다. 이 연구실에는 영화에서나 봄직한 새로 만들어진 생명체에게 기억을 주입시키는데 사용되는 것과 같은 헤드셋이 있다. ● 미술작품이 알레고리적 표현으로 가득 찬 것이라면 새로운 생명체를 탐구하는 실험실에서 과학자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각각의 동물들을 전시한 상황설정을 통해 필자는 직관적으로 실험실은 송용겸의 작업실이며, 그 실험실의 과학자는 조각가 송용겸으로 치환해 이번 전시를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시장의 이 동물들은 그가 그동안 '키웠던' 애완동물들이었다. 그가 '키웠던' 애완동물들인 만큼 그가 각각의 동물들과 많은 사연이 있었을 것임을 관객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과거에 키웠던 동물들을 이 시점에서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만든 것일까? 그런데 그에 의해 전시장에 환생한 그 애완동물들은 꼼꼼하게 살펴보면 납작한 거미, 탯줄을 줄줄이 달고 있는 햄스터와 고슴도치, 손발이 있는 엔젤피시, 도마뱀주위의 한 무더기의 잘린 꼬리들, 복어와 같이 배가 부푼 우파루파, 좌대에 몸의 일부분을 묻어놓은 고양이, 어딘지 마른 듯 한 닭, 마르거나 한쪽 팔이 부어오른 상태의 슈가글라이더와 같이 뭔가 낯설고 이상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처음으로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 때라고 한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자신이 그 동물들을 생명체로서 애완한 것이 아니라 '완구'로 취급하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호기심과 즐거움만이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그들 생명체의 고통을 그는 괘념치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마치 폴레트가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의 죽은 애완견의 외로움만을 걱정하며 미셀에게 다른 주검과 십자가들을 가져와 묘지를 장식하게 요구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전시장에 선보인 각각의 동물의 낯선 형태들로부터 관객은 어린 송용겸이 이 동물들을 어떻게 '완구'로 취급했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전시장 디스플레이 그리고 각각의 동물의 형태와 더불어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앞서 말한 헤드셋과 그가 선재로 사용한 우산살이다. 그 이유는 알레고리적 표현으로서 헤드셋과 우산살은 '무엇인가를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 봐왔던 것과 같이 헤드셋은 기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만든 각각의 동물은 그가 키웠던 동물들을 보고 사실적으로 재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각각의 동물을 '완구'로 대하던 자신의 생각들을 기억해내 그 기억들을 형상화했다. 송용겸은 유년시절의 기억을 이립而立-인생관이 서는 나이- 할 때가 다 된 나이에 다시 들춰내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형상화하기 위해 그는 우산살을 사용했다. 그 우산살들은 버려진 우산들에서 추린 것이라 하였다.
송용겸_Memento mori-Axolotl_우산살_85×48×28cm_2014
이번 전시 이전부터 그는 우산살을 용접해 여러 형태들을 만들어왔다. 그는 언제부턴가 우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오는 날 아침에 우산을 가지고 나갔다가 오후에 날이 개면 귀가 시에 우산을 잊어버리고 빈손으로 오는 것을 우리는 흔히 경험한다. 이를 건망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송용겸은 이런 것이 자본주의에 기반 한 소비사회의 가치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면서 은연중 발현되는 현상 중에 하나라고 보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없고,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합종연횡도 가능하다. 그리고 소비사회에서 오늘 신제품은 내일 구제품이 된다. 소비사회에 사는 우리들은 추억을 간직한 물건을 가지기 보다는 새로운 것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하며 유행에 뒤쳐져 살면 안 된다. 특히 과거에 안주하면 안 된다. 앞만 보고 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속도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용도폐기된 것은 즉각 쓰레기통에 버려야한다.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용겸은 멈춰 서서 뒤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유년시절에 키웠던 애완동물들이 '애완'의 목적이기보다 자기중심적으로 즐기기 위한 '완구'에 가까웠음을 자성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주인의 무관심으로 버려지는 완구들이 겪는 애환을 그린 영화 『토이 스토리 Toy Story』를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한다. 그래서 그는 선재인 우산살을 재료로 자신의 기억속의 애완품들을 역지사지易地思之입장에서 그려나간 것이다. 역지사지하는 것은 자성의 첫 단계이다.
송용겸_Memento mori-Spider_우산살_가변설치_2014
인류 최초의 그림들은 대상을 보며 그린 것이 아니었다. 보았던 대상을 기억해서 그렸다. 그 흔적은 지금도 아이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린다는 것은 기억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장소-동굴 벽-에 기록해 놓은 기억을 공유하며 집단의식과 문화를 형성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기억의 공유를 위한 인류 최초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한편 기억의 축적은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과거를 멀리 볼 수 있는 만큼 미래를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이 과거 기억을 토대로 현재를 분석해보면 미래의 선택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성찰이라는 것이 이런 과정일 것이다. 송용겸의 작업도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억은 철부지 시절의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으로서 우리들에 대해 성찰해 보고 있다. 그는 유년기 동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대한 기억과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비교해보았을 때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심화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의 작업은 만드는 즐거움에서 점차 삶의 표현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표현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 미술작품 제작 시 직관이 크게 작용하기는 하나 미술작품은 시각이미지로 표현한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송용겸의 첫 번째 개인전을 보며 앞으로 그의 작업이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지켜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송용겸은 이제 이립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 그가 불혹이 되고 지천명할 때가 되면 그동안의 경험과 사유의 폭이 작업의 지평을 확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작가 송용겸에게 이런 가능성이 있음으로 해서 앞으로의 작업에 기대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 박춘호
Vol.20140315b | 송용겸展 / SONGYONGGYEOM / 宋龍謙 / scul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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