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 요~. 이 내 사연 한 번 들어보소.

옛날 같으면 고려장 할 이 나이에

소가 갈아야 할 땅 파 엎느라 녹초가 되어부럿소.

손바닥 물집은 터지고 허리는 펴지지도 않는데,

슬피 울어주던 새소리 끊긴지도 오래 되었소.

사는기 죽는 긴지, 죽는기 사는 긴지 나도 모르것소.

이 좋은 봄날, 신세타령 한 번 합니더.

 

옛날 할매들의 한 맺힌 팔자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이 보다 더 좋은 위안의 말이 없어서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 정선 만지산에 농사 지으러 갔는데,

이제 체력의 한계가 서서히 느껴졌다.

매년 반복되는 농사지만, 땅 파 뒤 짚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의 하나다.

소도 경운기도 없이 오로지 곡괭이로 파 엎어야 하는 데, 간이 쑥 둘러빠지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곡괭이질도 서서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한 번 파고 헉헉대고, 두 번 파고 낑낑대다 결국 한 밭때기는 남겨야 했다.

 

몇 년 전만해도 밭 주변 나뭇가지에 다양한 산새들이 날아들었다.

힘들어 낑낑대면 새들이 조잘대며 다독이거나

뻐꾹뻐꾹 노래도 불러 주었으나 이제 새소리 멈춘 지도 오래다.

온 산을 개간해 농약을 뿌려대니, 새들도 더 이상 살 곳이 아니라 여겼는지 모두 떠나버렸다

 

어둡기 전에 집 주변 청소부터 해야 했다.

겨울내내 집을 비웠으니 집 주변에 몰린 낙엽이나 나뭇가지가 흩어져 할 일이 태산 같다.

오랜만에 지피는 군불이라 온돌 데우려면 불도 많이 지펴야 한다.

태울 것들 부엌에 가득모아 낙엽을 의자삼아 군불을 지피는데, 연기가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호흡기에 문제가 있어 약과 흡입기를 입에 달고 살지 않는가?

숨이 차고 눈물이 나도, 낙엽 타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가 정겨워 참는다.

 

낙엽과 가지들을 다 태우고 나니 방안에 연기가 들어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바닥 곳곳에 구멍이 생겨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 간 것이다.

방안 가득 찬 연기가 다 빠져 나가려면 오래 걸리지만,

검은 산 바라보며 잡 생각에 빠지는 시간도 싫진 않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연기가 다 빠져나갔는데,

라면 끊여먹고 방 청소 하니 밤 두시가 가까웠지만, 이 얼마만의 안온함이냐?

따끈따끈한 온돌에 아픈 등 지지는 그 노골 노골한 맛을 알랑가 모르겠다.

가히 여인네 품속과도 비길 수 있는데, 만약 품속까지 있다면 난리 나는 거지.

 

동창이 밝아 눈을 떠니 오전 아홉시가 되었다.

예전에는 창이 밝아오면 새 소리가 시끄러워 늦잠을 잘 수 없었는데.

깨워 줄 새들이 사라졌으니, 일손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온돌 덕에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돌아가신 강민선생의 동오리 집 방문앞에 핀 목련꽃에 반해

심었던 목련의 키가 지붕을 훌쩍 넘었는데,

이제 막 피어나려고 봉우리를 맺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목련 꽃 아래서 술 한 잔 할 수 있겠구나

 

저녁 무렵 서울로 돌아가려면 할 일이 바빴다,

먼저 산소부터 들려 아머니께 인사드렸다.

“엄마! 저승에는 코로나가 없는기요?” 물어도

오랜만에 찾아 삐쳤는지 대답도 없더라,

 

땅에 밑거름 뿌리려면 정선 읍내 퇴비 사러 가야했다.

가는 길목에 핀 ‘동강 할미꽃’에 어찌 문안드리지 않을소냐?

아직은 이른 시기지만 성질 급한 할미 몇몇은 벌써 고개 내밀었더라.

벼랑에 핀 할미 보며 노래 불렀다

 

“동강 할미야

열길 높은 벼랑에

누굴 그려 피었느냐?

칼바람에 오무렸다

햇살에 핀 동강 할미야

죽은 울 엄마 생각나는 동강 할미야.“

 

정선농협에 비료 사러 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니라 점심시간이었다.

마음은 바쁜데, 시간만 죽여야 했다.

퇴비 열 포 사 싣고 만지산에 돌아온 것 까지는 좋으나

또 하나의 고난도 일거리가 남았다.

마당에서 밭까지 퇴비를 올리는 일이었다.

 

언덕에 박아 놓은 토끼궁댕이 같은 돌계단 따라

비료 들어 올리는 일은 그의 곡예에 가깝다.

퇴비 무게에 자칫 중심을 잃으면 나자빠지기 십상이다.

줄 타듯 중심 잡아 올라가는데,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힘만 좋다면야 등짐으로 올리면 좋으련만,

힘이 딸리니 기생첩 끌어 안 듯 가슴에 안아 오르는데,

평소 여인네를 그렇게 끌어안아 주었다면 말년이 이렇지는 않을 게다.

 

어렵사리 퇴비 다 뿌리고 떠날 채비를 했다.

점차 힘들어지는 농사를 그만 두겠다며 다짐에 다짐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반복한다.

작년에는 땅에 휴식년 준다는 결심까지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땅을 놀리면 안 된다’는 농꾼들의 지론을 핑게 삼지만,

그 일마저 그만둔다면 이 산골에 일 년에 몇 번이나 올 수 있으며,

산 위에 누운 울 엄마는 얼마나 외롭겠는가?

그리고 정동지에게 무공해 야채를 전해 주는 그 즐거움은 어쩌랴?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약으로 긴 세월 애용했던 대마다.

농작물이야 농사 짓지 않아도 어디서나 구할 수 있으나

마약 올가미 씌워 놓은 대마는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밭 언저리에 몇 포기 심어 나물도 무쳐먹고, 강정도 만들어 먹고 술도 담아 버티는 것이다.

몇 년이나 더 버틸지 모르지만, 살아 움직이는 동안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강변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른한 밤길 운전에 졸음까지 몰렸으나, 졸음 쫒는 특효약을 잊어버렸네.

깜빡대는 졸음에 놀라 몸을 꼬집기도 빰을 때리기도 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차창을 모두 열어 재치고 미친 놈처럼 노래 불렀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

 

사진, 글 / 조문호

 

자연을 지키느냐? 편리하게 사느냐? 하는 것은 원칙과 현실에서 늘 갈등하는 문제다.

천만다행으로 편리하게 살 여건이 되지 않아 자연을 지키는 원칙을 따르며 살아왔다.

그러나 뜻밖에 원칙을 어긴 이변이 생겨버렸다.

 

정선 만지산 집 마당에 레미콘 한 차를 부려놓은 사진이 정영신씨 핸드폰으로 보내 온 것이다,

옆집의 윤인숙씨가 보낸 것이라며 날더러 보라고 했다.

지난 번에 도로 포장하는 사람 있으면 움푹 파진 입구 좀 부탁 했다는데, 마당부터 덮어버린 것이다.

그 마당은 자기 내 주차장으로 사용해 레미콘 비용의 반은 자기가 부담하겠다는 거다.

 

누가 들어도 고맙다고해야 할 일이라 아무 소리 못하고 20만원을 보내 주기로 했단다.

레미콘 값만 아니라 콩크리트를 바닥에 골고루 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백 번 고맙다고 말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마당을 차지한 점령군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시멘트라 쓸어 담을 수도 없었다.

 

그 집은 25년 전 동강 환경캠프로 빌려 사용하던 집인데,

이년 여의 활동이 끝 난 후, 개인 작업을 위해 혼자 눌러 앉은 집이다.

밭으로 지정된 땅에 무허가로 지은 농가주택인데, 불편하긴 해도 사는 대는 지장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환경캠프에 함께 한 회원 한 사람이 그 집을 사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집을 비워줘야 하는데, 그 많은 짐을 어디로 끌고 간단 말인가?

부랴부랴 아내에게 부탁해 복에 없는 그 집을 사게 된 것이다.

당시 시세보다 비쌌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살 수 밖에 없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유랑민 체질인지라

아름다운 자연도 버릴 수 있겠다 싶어 돌아가신 어머님까지 그 곳에 묻어 두었다.

 

김대중정부에서 댐을 취소하는 결단을 내림에 따라 동강 환경운동도 끝나게 되었는데,

문제는 농민들의 보상이 이루어지며 모든 게 달라졌다.

주택건설비를 비롯해 축사나 버섯재배장 같은 농가지원이 실시되며,

오래된 농가주택은 모조리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양옥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아마 그 때 주택이라고는 내가 사는 집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뿐 아니라 집집마다 티브이 수상기가 들어와, 사는 방식이나 습관마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가슴 아픈 것은 순수하기 그지없었던 동내 인심이 서서히 변해갔다는 것이다.

 

산골에 살다보면 마당에 제초작업도 해야 되고 소나기라도 퍼 붓게 되면 땅도 질퍽거리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당에서 조차 흙을 밟을 수 없다면 굳이 산골에서 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옆집 차가 자주 들락거려 잡초도 자랄 틈이 없지만, 자주 머물지 못하니 불편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마당가에 코스모스가 너울거리고, 딸기가 조롱조롱 달리는 풍경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 여름 폭우 속에 만난 아름다운 장면도 이제 사진으로만 남았다.

 

집에 없는 샤워한다며 알몸을 드러낸 아내의 몸에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는데,

황토물이 발 위에 튀어 오르는 소란스러움과

무성하게 핀 맨드라미의 붉은 꽃술은 정염을 토하듯 매혹적이었다.

아쉽게도 보도검열에 걸려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젠 그 장면도 서랍 속에 갇힌 풍경이 되고 말았다.

 

지난 19일 정선 집에 들려보니, 마당의 2/3는 콘크리트로 하얗게 덥혀있었다.

이젠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처지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두 번째 레미콘 차가 도착했을 때는, 함께 도와 바닥을 고를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 탓하기는커녕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했으나,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만지산과의 인연을 끝내야 하는 것 인가?

정이 떨어지니, 모든 사물까지 싫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89년 귤암리 옛집에서 촬영한 최종대, 이선녀부부


정선 최종대씨는 만난 지가 25년이 넘은 오랜 인연으로 이웃을 넘어 동생처럼 가까웠던 사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지하수 사용에 대한 이웃과의 분쟁에 휘말려 등 돌리고 말았다. 그가 주도한 갑질을 용납할 수 없어서다.




그런데, 작년 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뒤늦은 부고로 장례조차 지켜보지 못해 어쩔줄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고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최종대씨는 하루에 담배를 서너 갑씩 피우는 골초로, 운명하기 전부터 심한 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변을 당하기 하루 전에는 장모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진주를 갔는데, 차 안에서 눈물을 그리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아마 죽음을 예견한 것 같았다.




돌아와서도 얼굴 붉혀가며 악착스럽게 살아 온 지난날이 후회스러운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술 좋아 하는 아내에게 술 좀 줄이라고도 부탁하고, 내가 보고 싶다는 등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많이 하더란다.

그러더니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켜 손도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임종한 것이다. 


 

정말 인생무상이란 말을 절감했다.

떠나기 전에 따뜻하게 다독여 주지 못한 게 한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집안 일은 누가 꾸려 갈 것이며, 그 많은 농사는 어쩔지 걱정스런 일이 하나 둘 아니었다.

더구나 큰 아들 창수는 정신병을 앓아 병원을 들락거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아들 창수가 언제 정신병을 앓았냐는 듯 멀쩡해진 것이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나하나 챙겨가며 어머니를 돕는다고 했다.

해마다 엄청나게 짓는 고추 농사를 그만두고, 손이 덜 가는 유기농에 전념하기로 했단다.



농장이름도 엄마이름을 딴 ‘선녀농원’으로 지어 새로운 삶을 예견하게 했다. 남편 잃고 자식 살린 셈이다.

이선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도 잠시 뿐,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지난 4월 25일은 정선에 땅 뒤집으러 갔다가 카메라와 지갑이 든 가방을 두고 와 

십 여일 동안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고 가슴 조려왔기에 빨리 정선 갈 날만 기다렸다.



5월5일 야채 파종하러 갈 때는 정영신씨가 따라 붙어 마치 야외 나들이 하는 기분이었다.

두릅 철이라 두릅 따러 간 것이다. 신세진 분들과 나누어 먹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름 값이 경유 1리터에 970원까지 내려 간 것이다.

예전에 전국 장터 쫓아다닐 때는 1500원까지 올랐는데, 그때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살다보니, 코로나 덕도 보나 싶다.




평창장에서 야채 모종을 산 후, 만지산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열흘 전에 핀 탐스러운 도화꽃과 배꽃은 시들시들하고, 새롭게 핀 철쭉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쩔까?” 갑작스런 더위에 두릅이 다 피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양이 적어 창수네 두릅을 사기로 했지만,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정선 가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며 여유롭게 지내다 왔는데,

요즘은 서울에 예쁜 여자 숨겨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바삐 설치는지 모르겠다.

죽도록 일만하고 돌아와, 이젠 정선 가는 게 두려워진다. 아마 동자동에 살며 생긴 조급증인 것 같았다.




평창장에서 구해 간 야채 모종부터 옮겨 심었는데, 그 날은 보슬비가 내려 모종에 물줄 일은 덜었다.

하던 일을 끝내고 창수네 집으로 올라갔는데, 창수엄마가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나야 운전 때문에 술 마실 처지가 못 되지만, 술 마시며 하는 이야기가 눈물겹다.




처음 시집왔을 때, 낮 시간의 중노동이 끝나도 밤에 디딜방아 찧는 일도 일상의 하나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막걸리와 콧등치기를 좋아해 옥수수를 비롯한 여러가지 곡식을 찧었는데,

체중이 가벼워 디딜방아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큰 돌을 등짐에 짊어지고 밟으라고 시켰다는데, 찧고 나면 온 몸이 파김치가 된다는 것이다.




구절구절 지나간 이야기보다 앞으로 살아 갈 이야기가 더 기대되었다.

여지 것 일에 치이고 남편 눈치 보느라 못 푼 신명을 다 풀 것 같아서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이선녀씨로 부터 두릅을 전해 받았는데, 두릅 값을 기어이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전에 못 전한 조의금을 겸한 두릅 값인데, 정말 입장 난처했다.




“우리 사이는 돈이 오 가는 사이가 아니지요”라는 창수엄마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요. 다음에 맛있는 거 많이 사오리다. 부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맑은 날 사진은 4월25일 찍은 사진이고, 흐린 날 사진은 5월5일 찍은 사진.

아래는 삼년 전 ‘인사동 사람들’ 블로그에 올린 창수엄마 이선녀씨 이야기랍니다. 
  http://blog.daum.net/mun6144/4251


















무더운 쪽방을 탈출하여 찾아 간 정선 만지산은 휴가지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몇일 내내 술에 절어 살아야 했고, 제 마음대로 자란 풀과 나무 벌목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곤욕을 치러야했다.

그런데다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벌어진 물 전쟁이 2년이 가깝도록 해결의 조짐조차 없으니,

해도 해도 너무 한, 편치 않은 여름휴가가 되었다.

지난 3일 이른 아침 도착한 만지산 집은 잡초에 뒤 덥혀 있었다.
온 종일 벌인 잡초와의 전쟁으로, 온 몸에서는 땀이 빗물처럼 흘러 내렸다.
그러나 갈증으로 들이키는 시원한 물맛이 유일한 보상이었다.
난, 오나가나 전쟁을 치룬다. 사람 사는 곳이 어쩌면 전쟁터가 아닌지 모르겠다.






이튿날은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와 홍천에 사는 화가 양서욱씨가 만지산으로 찾아 온 것이다.

덕분에 일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었지만, 그 날은 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기를 구워 이른 시간부터 술판이 벌어졌는데,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까지 합류하여 술판은 무르익었다.

역시 술자리에는 여성이 있어야 생기가 돈다.

옆집에 사는 윤인숙씨는 이사 온지가 2년 가까이 되었지만, 술자리에 함께 하기는 처음이었다.

가끔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 나누었지만, 함께 하기를 꺼려했다. 혼자 사는 여자라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집이 붙어있어 수시로 들락거리다 보면 서로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내 소문도 일조했다.

남자 녹이는 킬러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주변에서 “마음 약한 작가님은 특히 가지 말라”며

만날 때마다 신신당부했는데, 은근히 당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마침 윤인숙씨가 술자리에 인사하러 왔기에 자리에 앉기를 권했는데, 무척 친절한 분이었다.

사내들이 굽는 고기가 신통찮았던지, 대뜸 자기 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 집이 구멍가게라면 그녀 집은 슈퍼마켙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테라스까지 만들어 놓은 주변 환경에 주눅 들었다.

밤 늦도록 전활철씨의 기타소리와 윤인숙씨의 북소리가 만지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활철씨의 노래솜씨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윤인숙씨의 소리도 보통은 아니었다.

급기야 전활철씨 와는 친구로, 양서욱씨와는 남매로 둔갑하는 친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의 친화력에 고개가 꺼덕여졌다.

사람 사는데 친화력보다 더 좋은 게 없으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잘 꼬시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화력의 양면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깊은 산골에서 여자 혼자 살려면 그러한 성격이 아니면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네 물 분쟁에 시달리며 남자를 잘 꼬들기는 요녀로 둔갑한 것이다.
윤인숙씨가 기존 집을 사서 들어 올 때에 이미 동내 지하수가 연결되어 있었으나,

동네에서는 물 사용 기금으로 2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며 동네에서 물을 끊어 버린 것이다.

난, 서울에 살아 한 달에 한번 밖에 들리지 못해 지하수에 대한 권한 일체를 동네 결정에 위임한 처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지만, 딱하기 그지없었다.

그 지루한 싸움이 오래 지속되어 정선 읍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했다.

신판 봉이김선달이라는 바아냥까지 받아야 했는데, 이제 제발 물싸움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그 날 밤은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해 완전히 맛이 갔다.
방으로 돌아와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옆집에서 밥 먹으러 오란다며 양서욱씨가 전했다.

가보니 친절하게도 가마솥에다 닭죽을 끓여 아침상을 준비해 둔 것이다.

자기는 정선에 손님 맞으러 가야 한다며 “서욱아! 잘 챙겨먹고 전화번호 두고 가”라는 말을 남기며 사라져버렸다.

싹싹하기도 하지만, 부지런한 여자였다.

전활철씨와 양서욱씨가 떠나 간 후 어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갔다.

내일이 어머니 기일이라 서울에서 가족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제초기와 기계톱만 있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낫과 톱으로 일하자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덤 앞을 가린 잡목들 베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숨이 막힐 듯 헉헉거렸다.






이틀 날은 서울에서 영희 누님과 일산에 사는 동생 창호, 그리고 부산에 사는 여동생 진옥과 매제 김종성씨가 찾아왔다. 

교회에 다니는 동생들은 다들 묵념만 올렸지만, ‘엄마 덕에 반가운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며 다들 좋아했다.
산소에서 내려 와 수박으로 더위를 식히는 자리에서 동생 창호가 말을 꺼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내 꼴이 안 서럽던지, ‘형님 몸보신 좀 시켜야 되겠다’며 횡성한우 먹으러 가잖다.

정선에서 횡성까지 만만찮은 거리인지라, 밥 한 끼 먹으러 먼 거리를 간다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모처럼의 제안이라 서울 가는 길 마중가는 셈치고 따라 나섰다.






제사 준비로 서둘러 돌아 와야 했는데, 이웃 최종대씨로 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 저녁, 정대식씨 집에서 집들이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동네사람들이 모인자리에서 물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만지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길이 너무 가파러 중간에서 시동이 꺼지는 일도 생겼지만, 주변 경관 하나는 끝내 주었다.

새로 지은 집은 조립주택 비슷했지만,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 몇 그루가 산세의 위용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들 모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동네 물 분쟁으로 얼굴들고 살 수 없다며 이제 타협점을 찾아 마무리 짓자고 했지만,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 기금으로 적립해 두기 위해 돈을 받는다지만, 모터가 고장나면 수리비까지 읍사무소에서 대 주는데, 기금은 어디다 쓸려는지 모르겠다.

새로 입주한 분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랫만지 최영규씨 뿐이었다.

이 친구는 울 엄마 무덤까지 공짜로 빌려 준 인심 좋은 친구다. 그러나 동네 어른으로 사리대로 말했다가 주민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누가 해코지했는지 그 쪽으로 가는 물 라인에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동네로 변하는지 모르겠다.






최영규씨 내외와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마침 물 논쟁 당사자인 윤인숙씨 댁에 술판이 벌어져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도 손님이 찾아와 흥청댔다.

마당 한 쪽에 술상을 차려 집주인과 찾아 간 세 사람이 앉았지만,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200만원을 내 놓기도 했으나, 추가 공사비로 50만원을 더 요구해 무산되기도 했고,

결국은 200만원이나 들여 모터를 설치해 냇물을 끌어 올려 쓰지만, 가물면 그 물도 끊길 수밖에 없었다.

윤인숙씨도 여러 차례 자기주장을 굽히려 했지만, 아랫만지 장영서씨가 거듭 만류하고 나섰다고 한다.

어쩌면 갑질의 전형을 뜯어고치려 한 장영서씨가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얄팍한 지식을 내세워 지역민들을 너무 무시했기 때문이다.

주민들 자존심을 건드려 수습의 실마리를 잃은 것인데, 결국은 장영서씨 댁 물도 끊기고 말았다.


물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가구당 30만원씩을 추가로 걷기로 했는데, 장영서씨가 못 내겠다며 버텼는데,

차라리 물을 먹지않겠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정말 물을 잘랐는데, 이 더위에 물을 끊는다는 것은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이제 다시 물을 먹으려면 200만원을 내야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다.

집을 팔고 이 지역을 떠나겠다지만, 집 값조차 만만찮으니 쉽게 살 사람이 나서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최영규씨에게 말했다.
산골마을이 유난히 많은 정선군에서 지하수를 직접 관리하도록 건의하자고 했다.

군에서 지하수를 파주었으면, 지역민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직접 관리하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계량기를 설치해 일반 수도요금처럼 군에서 징수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동안 지하수에 대한 분쟁은 귤암리 만지골 뿐 아니라 숱하게 많았는데, 언제까지 뒷짐 지고 남의집 불구경 하듯 보고만 있을 것인가?

수도요금을 징수하는 대신 수질검사도 틈틈히 하여 식수인지 허드렛 물인지도 주민들에게 알려 주어야한다.

지금은 물사용료 조로 모터 돌린 전기요금을 균등하게 나누어 내지만, 일반가정과 농가의 물 사용량이 같을 수도 없다.

어쨌든 얼굴 들기 부끄러운 물 분쟁을 이제 끝낼 수 있도록 정선군에서 적극 나서주기 바란다.

지역민들로 부터 따돌릴 것을 걱정했는지, 최영규씨는 나더러 나서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언제까지 옆집과 물도 나누어 먹지 못하는 이 야박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인심 좋은 마을 귤암리”라는 오래된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인심 좋은 귤암리가 되도록, 다 같이 한 발씩 양보하자.






자정이 가까워서야, 제사지내러 우리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술이 취했으나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는데, 변압기가 터져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부득이 제사상을 마루에 차렸는데, 어두워 유리컵이 방바닥에 떨어져 박살난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한 조각 한 조각 유리를 찾아가며 파편을 쓸어 모으는 일은 숱한 인내를 요구했다.

제사상 차리는 정성을 엉뚱한 곳에 쏟는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술 깨도록 귀신이 보낸 일거리라 생각하니 마음 편했다.
큰 절을 올리며, 제발 살기 좋은 동네로 되돌려달라고 빌었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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