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지는게 친구가 아니던가.

 

그러나 마음 편히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고,

어려운 일에 득달같이 나서 줄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개인주의로 치달으며 친구 만나는 기회도 점차 줄어들고,

만나게 되어도 물질문명에 찌들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러나 고향 친구는 다르다.

다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얼굴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곰삭은 정이 있잖은가?

신경림시인은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말했다.

 

얼마 전 서울 사는 고향 친구 수만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고향 동창들이 12일 여정으로 서울관광 오는데, 함께 할 수 있냐?' 는 것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기로 작정했다.

 

월요일 오후에 약속이 있지만, 이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참가비가 20만 원이라며, 낼 수 있?고 묻기에

문디 코구멍에 마늘 빼 먹지라며 핀잔을 주었다.

부자 친구도 많은데, 이럴 때 기분 좋게 안 쓰면 어디다 쓸 것인지 묻고 싶었다.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닌데, 돈이 아까워 어떻게 죽을까? 

 

거지는 안 받기로 했다지만, 만찬 후 이차 술값은 내가 낼 생각이었다.

마침 인사동5길에 있는 '센트마크 호텔'에 방 다섯개를 예약해 두었다기에

유목민에서 술 한잔 살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누가 기획했는지 궁금했다.

종석이 더러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냐고 물었더니, 자기란다.

돈은 죽고나면 아무 쓸모 없다며 즐겁게 살자는 취지였는데.

수식이와 의논했더니, 일사천리로 추진하더라는 것이다.

 가이드는 서울 수만이가 맡아, 책임지고 일정을 짰단다.

정말 잘 한 일이라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인사동에서 시작하여 경북궁, 청와대, 광화문, 청게천,

롯데월드, 한강유람선 등 시골 노인네들 관광코스야 뻔했다.

몇 년 전 정선 귤암리 노인들 관광왔을 때 다녔으나, 지금은 그 때와 사정이 다르다.

 청와대가 새로 생긴 볼거리지만, 아무래도 친구들과의 마지막 상면일 것 같았다.

팔순을 눈앞에 둔 노인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고향을 지키는 영산 친구를 비롯하여 서울, 인천, 부산,

그리고 광양 사는 친구까지 모두 열일곱 명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지난 7일은 일찍부터 마음이 들떴다.

서울역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가까운 거리지만, 마음은 바빴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대기하는 사람만 점점 늘어났다.

기다릴 특정 장소를 지정하지 않아, 이산가족 찾기보다 더 힘들었다.

열차 탈선사고로 오가는 열차가 모두 연착이라는 안내방송만 흘러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무심했으면, 전화번호 아는 고향 친구가 이수만 뿐이었다.

그는 찾아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아, 다음 집결지인 인사동으로 옮겨야 했다.

 

종각역에 도착할 무렵에야 대합실 2층에 있다지만, 아무래도 길이 엇갈릴 것 같았다.

호텔에서 막연하게 기다리다 다시 전화 걸었더니, 시간이 늦어 오찬 장소로 바로 가야 할 것 같단다.

 

시간이 남아 인사동에서 경복궁을 둘러 삼청동으로 갔는데,

오찬 장소로 정한 ‘삼청동 수제비집 앞에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긴 줄을 서서 수제비를 다 먹어도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다면 다시 서울역으로 갔어야 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죄 없는 담배만 연신 피우고 있으니, 그때 사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탈선하여 두 시간이나 연착되었다지만, 목이 빠지도록 기다려 그런지 더 반가웠다.

영산초등학교 45회 동창생 중 세상을 떠난 친구도 많지만, 사정이 있어 못 온 친구도 있었다.

 

영산에서는 신수식, 조대권, 김종석, 김공조, 이석중, 신규식씨가 왔고,

정대식, 김옥선은 부산에서, 조성호는 광양에서 왔다.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김이만, 김순남, 하금순, 김상현, 윤성관,

이수만, 구정희 등 다들 얼마 만에 만났는지 모르겠다.

 

이 사진은 5년 전 영산에 모인 동문들 기념사진이다. 그동안 이렇게 늙다니...

무정한 세월 속에 나만 늙은 게 아니라, 모두 늙어 버렸다. 

 

쌓이고 쌓였던 그리움이라, 코끝이 찡하며 눈물까지 어른거렸다.

죽을 때가 되어 그런지, 작은 일에도 감동하며 눈물이 많아진다.

친구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수제비 먹을 동안 또 다시 기다려야 했는데,

기다리며 피운 담배가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 아침에 산 담배인데...

 

다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청와대 관광부터 나선 것이다.

신수식이 잘 아는 국립고궁박물관장의 도움으로 청와대 입장도 비교적 수월했다.

북악산 아래 똬리 턴 청와대 자태는 웅장했다.

 

청와대 중심 건물인 본관은 대통령 집무와 외빈 접견 등을 위한 공간이다.

 

그곳에는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 사진이 순서대로 걸려 있었으나, 살인마나 사기꾼도 걸려 있었다.

당선만 되면 죄를 지어도 두고두고 대통령 대우를 받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정한 동선 따라 관람할 수밖에 없었는데, 넓고 웅장한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 다음은 해외 국빈을 맞거나 대규모 공식행사가 열리던 영빈관을 들렸다.

1978년에 지어진 이곳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받드는 형식의 건물이었다.

외국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빈 방문 시 공연과 만찬 등을 열던 곳으로

100명 이상의 대규모 회의도 진행할 수 있는 장소다.

 

조선 왕실의 불노장생을 기원하는 불로문을 거쳐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청와대 소정원에 있는 불로문은 16세기 말 조선 숙종 1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과 가족이 사는 주거공간이다.

생활 공간인 본채와 접견장인 별채, 그리고 우리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등산로의 작은 연못 앞에 조성된 화단도 아기자기했다.

 

그 다음에 들린 '인왕실'은 소규모 연회와 기자회견장으로도 사용되던 장소였고,

'충무실'은 임명장을 수여하거나 회의를 여는 장소였다.

 

그리고 '상춘재'는 국내외 귀빈에게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 또는 비공식 회의를 진행하던 곳이다.

 

'춘추관'은 기자 회견과 출입기자들의 기사송고실로 사용된 공간인데,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역사기록을 맡은 관아였던 춘추관에서 비롯되었다.

 

가는 길에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녹지원'도 보였다.

대정원에서 국빈 행사가 많았다면, 녹지원은 주로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 곳이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침류각'도 둘러 보았다.

침류는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는 뜻으로 본래 경복궁 후원에 있던 북궐의 부속 건물이란다.

 

이외에도 통일신라 석불좌상인 미남불도 있고, 조선시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칠궁',

5색 구름이 드리운 풍광이 마치 신선이 노는 곳과 같다 '오운정' 등, 못 들린 곳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건물보다는 넓은 주변 경관이 더 아름다웠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아름다운 북악산 일부를 독점하고 살았다는 건 너무하다.

때 마침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두 번째 행선지인 경복궁을 가기 위해 신무문을 통과하려니, 관람이 끝날 시간이라 들어갈 수 없단다.

도착시간이 지연되어 관광 일정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경복궁 대신, 만찬장인 경복궁으로 이동해야 했다.

 

경복궁은 인사동 센트마크호텔입구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음식이 정갈하다.

그곳 만찬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그 비용을 서울 김상현이 계산했다.

모처럼 흥겨운 술자리가 열렸는데, 옆자리에 김공조가 앉았다.

그 많은 친구 중에 담배 피우는 친구가 공조뿐이라 조가 맞았다.

 

김공조는 영산 구계목도 보존회회장이고, 김종석은 보존회 회원인데,

며칠 뒤 창녕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41회 민속예술축제

창녕군 대표 팀으로 출전하여 경연을 벌인단다.

 

신수식이 이끌어 가는 영산줄다리기

조대권의 영산쇠머리대기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구계목도만 지정되지 않아 서러운 것 같았다.

 

구계목도’가 민속경연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도 받았으나

이번에 열리는 도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야 경남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단다.

12일 경연대회 마지막 순서로 출전한다기에, 행사장에 찾아가 응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몸살로 드러누워 공수표를 날리고 말았다.

뒤늦게 '구계목도'가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장한 일을 해냈다.

친구야! 다 같이 축배를 들자.

 

이차를 가기 위해 유목민의 전활철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그날이 쉬는 날이란다.

만찬장까지 찾아와 술값 보태라며 20만원을 줘, 고맙기 그지없었다.

신수식의 딸 정화와 사위까지 찾아와 만찬장에 금일봉을 전달했다.

 

일이 생겨 함께 하지 못한 남이우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몸이 많이 불었더라.

한때는 대한항공중역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정년퇴직하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다들 손자 재롱이나 즐기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아니던가?

 

이석중은 마산 초등학교 선생으로 정년퇴직 했고,

김종석은 부산 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하다 정년퇴직 했으니, 연금 받아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다. 

김종석의 아내가 부산에서 살아, 혼자 구계리에 돌아와 '구계목도' 전승에 힘을 보탠다고 했다.

 

친구들이 조성국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 우리 문화 전승에 애쓰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

이것이 영산의 자부심이다. 영산 사람이라면 그 자부심 다 안다.

 

그나저나 술자리가 파하니, 이차 보다 청계천에 가잖다.

술 취한 노인들의 청계천 나들이는 볼만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딱 맞다.

물 위에 비친 불빛이 아름다워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돌다리를 건너 다니며 낄낄거리는 등 신났다.

 

다들 호텔로 돌아와 지정된 방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호텔에서 잘 형편이 아니었다.

카메라 충전도 해야 하고 메모리 포맷도 해야 하는데, 장비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김공조와 함께 자기로 했으나, 몰래 빠져나와 동자동으로 갔다.

콧구멍 만한 쪽방이지만, 내 집이 호텔보다 훨씬 편했다.

가자마자 뻗었는데, 눈떠 보니 너무 늦어버렸다.

충전할 시간이 없어 잘 쓰지 않는 라이카를 들고 간 것이다.

 

이미 친구들은 호텔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바삐 청진동 해장국으로 갔더니, 다들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장국에다 소주 몇 잔 들어가니, 어제 기분으로 바로 돌아갔다.

 

거지가 라이카를 메고 있으니, 사진 하는 친구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 카메라는 고향 후배 하재은씨가 선물한 카메라라고 자랑했으나,

 컴펙트 카메라인 니콘 coolpix P310’이 훨씬 편하다.

카메라는 장식이 아니라 손에서 자유롭게 놀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수만김상현도 사진을 찍지만, 각자 가는 길은 다르다. 나는 사람을 찍고 그들은 풍경을 찍는다.

처음엔 아마추어와 어울려 풍경이나 찍는다며 한심스럽게 생각한 적도 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인지라, 사는 동안 즐기며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좋아하는 풍경에 취해 인생을 즐기는것 처럼, 작업은 놀이가 돼야 하는 것이다.

 

2-30년 전 이수만이 정선 만지산 집에 놀러와 하룻밤 묶은 적이 있다.

구들장 바닥에 틈이 생겨 벌건 장작불이 방에서 내려 보이는

 궁상맞은 방에 드러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시장철 피어나고 온 국민이 다 찍는 꽃 풍경보다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옛집을 찾아 찍으면 어떻겠냐? 고 권한 적이 있었다.

문화도 양반 문화가 판친 역사라 서민들이 살던 오래된 집들이 사려져

누군가 그 기록을 좀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그 뒤로 일체의 친구사진을 보지 못했으니, 지금은 어떤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인사동 툇마루에서 우연히 만난 이수만

이 친구는 성균관대에서 정년퇴직했는데, 한번은 친구 덕을 본적도 있다.

오래 전 인사동 크라운베이크리 이층에 있던 민사협사무실에 갔더니

콧수염 김영수씨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들 영보가 성균관대에서 등록금 거부운동을 주도해, 잘릴 처지라는 것이다.

수만이 에게 부탁하여 등록금 갖다주고 무마되었는데, 인연이란 묘하게 연결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롯데월드타워'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갔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그 많은 인원이 지하철로 움직이기는 좀 소란스러웠다.

동화책에 나오는 돼지 새끼 소풍처럼, 줄로 엮어 다녀야 할 판이다.

 

종각역에서 타고 시청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는데,

늙은이 들의 무임승차라 괜히 젊은이들 눈치 보이더라.

말은 안 하지만, ’노인네들이 집에서 티브이나 보지, 왜 몰려다니냐?‘는 듯 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높다는 롯데월드타워에 도착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빌딩이다.

123층에 555미터의 높이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지만, 롯데 신회장의 고집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높은 곳에서 느끼는 아찔함과 서울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눈요기야 되지만,

아직도 적자에 시달려, 마천루의 저주를 답습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사무실 공실률이 너무 높아 계열사로 채워 겨우 땜빵을 한다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겹쳐 호텔 사업까지 힘들기 때문이다.

워낙 손해가 크다 보니, 다른 초고층 빌딩 계획이 축소되거나 변경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롯데월드타워'가 그곳에 들어서기까지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가?

긴 세월에 걸쳐 비행항로까지 바꾸어 가며 어거지로 이루어 낸 것이다.

신격호회장 숙원사업이라 살아 있을 때 완공하려 안간힘을 썼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회전초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돌아가는 접시가 다 돈이라 생각하니 밥맛이 떨어졌다.

 

옆자리에 앉은 김이만은 청주 한 병을 시켰는데, 거기다 소주까지 시킬 수야 없지 않은가?.

나는 청주 마시고 혼 난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청주 청자만 들어도 취한다.

기어이 술 한잔 줄여주지 못하고 혼자 다 마시게 했으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음 행선지인 여의도나루로 가기 위해 네 사람씩 모여 택시를 탔는데, 김이만이 핸드폰을 흘린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핸드폰에 꽂힌 카드가 열 개나 된다는데,

왜 카드를 전부 갖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돈 자랑이 아니라 카드 자랑인가?

 

다급해진 이만이가 택시에서 내리자, 구정희도 따라 내린 것이다.

이만이가 술도 취했지만, 구정희는 군장교 출신이 아니던가?

치밀하게 일을 해결하는 대는 일가견이 있다.

 

시골 노인네들의 한양 나들이에 꼬이는 일도 많았다.

어제는 열차 빵구로 두 시간이나 헤매게 만들더니,

김이만에 이어 조성호도 사고를 쳤다.

할마시 셋을 뒤에 태우고 앞자리를 차지한 성호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도 다른 좌석에서 술을 한 병쯤 마신 모양인데,

왜 금실 좋은 부부처럼 금순이를 끼고 디니던 규식을 따돌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겠다.

택시 기사 더러 여의도나루가 아니라 잠실나루로 가자고 한 것이다

 

잘 못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유람선 탑승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들은 유람선이 돌아올 때 까지 여의도 나루에서 기다려야 했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할마시들 한테 뒷머리가 다 뽑혔을 텐데,

다시 고문받아야 할 운명의 장난이었다.

 

광양에서 올라 온 조성호는 오래 전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잘릴 지경까지 갔으나.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 간신히 걸음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예능에 다양한 재질이 있었다.

음악에 빠진 줄 알았는데, 한국화도 그렸다더라.

아직도 조그만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삶 자체가 예인의 길이나 다름없다.

 

지팡이가 있긴 하지만, 걸어서 서울 구경하기란 만만찮을 것이다.

거기다 하금순까지 성한 몸이 아니라 화장실을 연락부절로 다녀야 했다.

세상에! 친구 볼려고 그 아픈 몸을 끌고 먼 길을 왔다니, 어찌 눈물 겹지 않겠는가?

자판기 두드리다 눈물 흘리는 것도 난생 처음이다.

 

나는 신수식, 이수만과 같은 택시를 탔는데,

수식이가 두 곳의 사정을 일일이 연락 받아, 마치 우리 택시가 작전사령부 같았다.

그러나 택시 요금 올라가는 걸 보니, 가슴이 콩닥거려 죽겠더라.

마침, 엊저녁에 유목민’ 전활철이가 주고 간 돈 봉투가 생각나 회비를 냈더니, 난색을 표했다.

회비라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마지못해 받았지만, 자기 호주머니에서 신사임당 두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돈의 가치를 떠나 가슴이 따뜻해지더라. 이게 사람 사는 정이다.

 

한강 유람선 이랜드 크루즈엔 신수식을 비롯하여 조대권, 이석중, 이수만, 신규식,

김종석, 윤성관, 김상현, 정대식 등 아홉 명만 승선하여 한강 유람을 했다.

유람선을 타려면 밤에 탔어야 서울야경이라도 즐겼을 텐데,

승무원 잔소리 들어가며 갑판에 둘러앉아 캔맥주나 마시는 억지 춘향의 뱃놀이였다.

그것도 캔맥주 하나에 오천원이고 컵 하나에 오백원 하는 바가지를 쓰가며...

 

다행히 김이만과 구정희는 핸드폰을 찾아 다음 행선지인 광화문광장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택시 세 대에 나누어 타고 광화문으로 이동했는데, 이제 서서히 막 내릴 준비를 했다.

바뀐 광화문광장을 둘러보고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토속촌에 마지막 식사하러 간 것이다.

 

삼계탕에다 인삼주까지 마셨는데, 잘 먹어야 하루 두 끼 먹는 놈이 세끼를 먹었으니, 배가 놀랠 지경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 인생 졸업사진을 찍었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날 광양 사는 조성호가 전라도 여인 예찬론을 폈는데, 김상현이도 두 며느리가 모두 전라도 여자라네.

신랑은 물론 시댁에 그렇게 잘 한다며 며느리 칭찬에 입이 말랐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 함평댁 정영신 동지를 보면 알지 않겠는가?

맛을 보고 맛을 아는 셈표간장이라 칭찬하다 더러 혼나기도 하지만...

 

사실, 경상도 사내들은 정나미 떨어진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경상도 사내들이 밤늦게 들어오면 아내에게 하는 말은 세 마디 뿐이다.

"밥 뭇나?" 먹었어요. "아는?" 잡니다. 자자! ...

웃을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처럼, 그런 사람 많았다

말이 좋아 무뚝뚝이지, 요즘 여자들 한테 걸리면 국물도 없다.

 

차례대로 일어나 그동안의 소회나 좋은 말을 한마디씩 했는데,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 자리에서는 고맙다는 인사밖에 못했지만, 우짜던지 아프지 말고 재미있게 살자.

 

시골 내려갈 친구들과 구정희만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 조성호 누님도 나왔더라.

배웅나온 고향 선배와 잘 가세요. 잘 있어요손 흔들어가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끝으로 친구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나는 사람이 죽으면 슬퍼 할 것이 아니라 축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된 삶을 끝낸 영혼이 승천하는데, 울긴 왜 울어? 박수 쳐야지...

 

가끔 아는 분이 돌아가셔도 차마 축복이란 말은 꺼내지 못하지만,

지난 사진이라도 돌려보며 다시 만나지 못할 그 때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십여 년 전에 남자 알몸을 찍어 실물 크기로 출력하여 세우는 영정 작업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신체발언이란 택도 아닌 제목을 붙였지만, 그 사진은 당사자가 돌아가시면 영정사진으로 내 걸기로 했다.

초상집에 온 문상객도 마음껏 웃으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목욕탕에 가면 당연히 옷을 벗지만, 왜 다른 곳에서 벗어면 난리를 칠까?

영혼이 가볍게 날아가려는데, 뭐가 그리 보기 싫은가?

상갓집을 잔치집으로 바꾸려는 계산도 깔렸지만, 다 생각의 차이다.

 

초상집에서 꽹과리치고 춤추면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세상의 풍습이나 법까지 통치자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 너무 많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정남규와 이종문의 장례는 너무 늦게 알거나,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제 신나는 잔치를 열게 될, 내 차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정선 있을 때부터 사후에 있을 일을 정동지에게 다짐에 다짐을 해 두었다.

농주 걸러 가마솥에 고깃국 끓이고, 술 마시고 노는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사물놀이가 체질에 안 맞으면, 노래방 기계라도 갖다 놓으라고 했다.

 

이제는 정선 집이 불 타버려, 내년에 옮기게 될 아산에서 치룰 작정이다.

시신은 화장하여 그 부근에 묻으면 그만이다.

 

친구야~ 내 죽었다는 소리 듣거들랑 꼭 놀러 오너라.

축의금도 필요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화끈하게 한 턱 쏠게...

나의 십팔번 '봄날은 간다'도 라이브는 안 되지만, 동영상으로 보여 줄 작정이다.

그리고 죽을 때 죽더라도 자주 만나자.

 

사진, / 조문호

 

(이틀에 걸쳐 찍은 사진이라 너무 많네요. 필요하신 분은 살펴보세요.)

 
 

 

 

삼일절 전 날 밤은 고향 생각에 잠을 설쳤다.

영산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고장이다.

그래서 삼일절이 다가오면 옛 생각이 떠오른다.

 

고향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기개는 대단했다.

그 독립정신을 되 세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영산삼일문화제'다.

옛 부터 정월대보름이면 즐기던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를

60년 전부터 시작된 삼일문화제에 끌어들인 것이다.

 

삼일문화제는 중요무형문화재인 줄다리기와 쇠머리대기 외에도

구계목도, 문오장, 연등놀이 등 많은 전례 민속놀이를 주축으로 3일 동안 치루어 진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진영을 나누어 벌이는 줄다리기다.

지금은 고향친구인 신수식씨가 이어받았지만, 조성국선생의 열정으로 재현된 민속놀이다.

 

60년 전 삼일문화제가 처음 열릴 때는 중학생 시절이다.

그 당시 부친의 친구끼리 동부와 서부 대장을 나누어 맡았는데,

적장이 된 후로는 원수처럼 으르렁 거렸지만, 지금의 대선 판처럼 추잡하진 않았다.

우리 집은 동부의 거점이 되어 며칠 동안 풍물패 술과 음식 대느라 잔치집처럼 북적였다.

 

 줄다리기도 지금처럼 학교운동장에서 벌인 것이 아니라 영산 큰 들에서 벌였다.

장수들이 말 위에서 칼춤을 추며 진영을 지휘했는데, 줄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터지는 군중들의 함성과 자욱한 흙먼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밀리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동안 곁 줄이 끊어져 넘어지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기도 했으나

승부가 판가름 나는 긴박한 순간들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고향을 등진 후에도 삼일절이 되면 찾았으나, 카메라 장비를 몽땅 잃어버리는 낭패도 당했다.

삼일문화제는 전국에서 많은 사진인들이 몰려오는데, 카메라를 노리는 전문절도단에게 털린 것이다.

전야제가 있던 날, 고향친구 조대권을 만나 다방에서 차 한 잔 하고 나오니

카메라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사진인들이 장비를 차에 두고 간편한 카메라만 휴대하는 습관을 노린 것 같았다.

 

파출소에 카메라 분실을 알리며 사진인에게 카메라를 조심하라는 안내를 부탁 했는데도

그 이튿날 행사장에서 세 사람이 카메라가방을 도둑맞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분실한 사람 중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진가였는데, 나처럼 오래된 차는 차문을 쉽게 열었으나

문이 열리지 않는 좋은 차는 차 유리를 깨어 훔쳐 간 것이다.

 

내가 도둑맞은 장비만 해도 중소형 카메라 바디 세 개에 달린 갖가지 렌즈를 합하면

분실 액수가 만만찮은데, 그 속에는 빌려 온 핫셀브라드 망원렌즈가 있어 더 걱정되었다.

그 외에도 당시 '이미지 라이프'라는 취재대행업을 했는데, 부탁받은 일 때문에 난감했다.

오래 전 찍어 둔 사진으로 어렵사리 위기를 모면한 기억도 난다.

 

근 이십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일만 생각하면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던 카메라를 모두 잃었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메라를 잊어버린 후로는 삼일문화제에 가기가 싫어졌다.

그 대신 삼일절만 되면 탑골공원에서 선열들을 기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늦잠에 빠져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오전10시가 가까웠다.

지하철 타러 서울역으로 달려 갔으나 정신없이 타다보니 반대방향의 열차를 탔는데,

남영역에서 내려 갈아타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종로3가역까지 몇 구역 되지도 않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현장에 도착하니 오전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추념식은 끝났는지 공원은 텅 비었고,

탑골공원 주변에는 민족지도자대회나 시민대회라는 이름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신명을 돋우는 풍물패를 찍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못한 장경호씨를 만난 것이다.

 

그 곳에서 최석태를 만나기로 했다지만, 목부터 추기자며 인사동으로 옮겼다.

술시가 이른지 ‘유목민’도 ‘사랑채’도 모두 문이 잠겨있었다.

둘 다 아침을 먹지 않아 ‘부산식당’으로 갔다.

 

모처럼 시원한 생태탕으로 반주까지 곁들였는데, 그날따라 장경호씨가 술을 아꼈다.

하기야! 매일 같이 마시는 술을 이른 시간부터 취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최석태씨가 나타났다.

 

최석태씨 따라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즐거운 찻집’이라는 처음가는 곳이었다.

술 마시다 차 마시는 별난 자리지만, 아마 그 곳에서 우문명씨를 만나기로 한것 같았다.

그 날 술값과 찻값을 모두 최석태씨가 계산했지만, 술값은 아깝지 않은데 차 값은 왜 그리 아까울까?

 

‘유목민’으로 옮겼더니, 그때 사 전활철씨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소주 한 병을 다 마셔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술도 땡긴다고 마구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계산해 마셔야 했다.

하루종일 버텨내기 위해 막걸리를 아껴 마신 장경호씨가 이해되었다.

 

‘유목민’ 전활철씨 말로는 가게 문 열 때 들어와 문 닫을 때 간다지만,

술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그리운 것 같았다.

그런데, 장경호씨와는 왜 매번 길이 엇갈렸는지 모르겠다.

 

인사동을 사랑한다는 인사동사람은 많지만, 다들 말로만 사랑한다.

얼마 전 ‘나무화랑’에서 ‘인사동이야기’ 전시할 때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경호 처럼 인사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인사동하면 천상병시인 떠 올리듯, 먼 훗날 화가 장경호 이름을 떠 올릴 것이다.

 

사진, 글 / 조문호

 

 

3.1 백주년기념 민족예술큰잔치에 초대된 '영산줄다리기'





2019년 03월 03일 (일) 16:03:27

정영신 장터사진가 


매년 삼일절을 맞아 경상남도 영산에서 열렸던 줄다리기가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부대행사로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지난26일 청계광장에서 줄 비나리를 시작으로 새끼줄을 꼬고 엮어 말아 거대한 두 갈래의 몸줄을 만들었다.



▲ 비녀목으로 암줄과 수줄이 한몸이 되었다. Ⓒ정영신


중요무형문화재(26호) ‘영산줄다리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민족의 대동놀이다. ‘영산줄다리기’는 마을의 화합을 위하여 500여 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해온 문화유산으로 우리민족의 혼을 당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지난달 26일 줄비나리 축원을 하고 있는 변우균씨 Ⓒ정영신


또한 용신앙에 바탕을 둔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 굿으로 1969년 무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되어, 대한민국 문화유산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산줄다리기는 용을 상징하는 250센티미터의 폭에 40메타의 긴 줄로 암줄과 수줄을 고정시키는 비녀목을 꽂아 연결한 후, 수많은 젓줄에 매달려 승부를 겨룬다.


▲ 영산줄다리기 보존회사람들이 새끼줄에 물을 묻히고 있다. Ⓒ정영신


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을부터 짚을 준비해 두었다가 정월대보름을 맞아 새끼줄을 꼬고, 여기에 풍물패가 어울려 신명을 일으키며 줄을 만드는데 200명이상이 모여 준비한다. 여기에 줄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소금과 물을 뿌리고, 줄이 터지지 않도록 밟아주는 과정을 거친다.



▲ 줄을 단단하게 하기위해 소금을 뿌리고 있는 모습 Ⓒ정영신


이번 한겨레 큰 줄 당기기 집행위원장이자 ‘영산줄다리기 보존회’를 이끌어가는 신수식씨는 “우리고향사람들은 줄다리기를 하지 않으면 한해농사를 시작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만큼 줄에 대한 열정이 크다.


▲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줄을 단단하게 여미고 있다.Ⓒ정영신


영산은 독립만세를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외친 성지로서 우리조상들의 정신이 이 줄 속에 담겨있다. 오죽했으면 일본인들이 우리의 협동심과 단결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줄다리기 인원을 제한했겠느냐, 영산줄다리기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저 모든 마을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줄다리기를 준비하면서 한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암줄과 수줄이 만나기 위한 과정 Ⓒ정영신


이번 영산 큰 줄다리기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줄을 만드는데 쓰이는 볏짚을 구하지 못해 전라도에서 공수해온 점과, 사람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기계가 동원되어 안타까웠다. 전통 줄다리기는 온 몸으로 줄을 당기기 때문에 상대를 앞질러 가지 않고, 뒷걸음을 많이 쳐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줄다리기다. 3.8선에서 줄다리기를 해 우리가 뒷걸음으로 북한을 껴안으면 그게 바로 평화통일이 아니겠느냐? 우리 영산에서는 암줄과 수줄의 성패로 한해 농사를 점친다”고 말했다.



▲ ‘영산줄다리기 보존회’를 이끌어가는 신수식 Ⓒ정영신


특히 이번 3.1 백주년기념 ‘영산 큰 줄다리기’는 “서울시민들과 자원봉사자의 노력으로 잘 마무리되었다며,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인사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 말뚝이와 함께 세종대로로 진입하는 모습 Ⓒ정영신


동부줄과 서부줄로 나눠 청계광장에서 출발한 두 줄이 풍물을 지피며 세종대로에 진입하자 서낭대 싸움과, 말뚝이춤으로 기 싸움을 벌였다.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는 비녀목에 꽃은 후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 말뚝이와 시민들이 줄을 진행시키고 있다. Ⓒ정영신


많은 시민들의 함성아래 치러 진 줄다리기는 신명난 풍물소리와 출렁이는 깃발이 힘겨루기의 박진감을 더해 주었다. 동부 줄과 서부 줄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해 서부 줄이 이기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고 한다.



▲ 동부줄과 서부줄이 풍물과 함께 기 싸움을 하고 있다 Ⓒ정영신


영산줄다리기는 우리나라 줄다리기의 시초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를 지나면서 잠시 단절되었지만, 1963년 3.1문화제에 재현된 후, 3.1민속문화제 때마다 매년 열리고 있다. 이번 ‘영산 큰 줄다리기’로 우리농촌이 삶의 근본이 되고, 암줄과 수줄은 ‘민족통일 줄’과 ‘생명평화 줄’이 되어 시민들 마음에 우리민족의 공동체를 인식시켰다.



▲ 말뚝이 춤을 구경하는 시민들 Ⓒ정영신


특히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줄다리기가 끝나자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새끼줄과 꽁지줄을 잘라갔다. 영산에서도 줄다리기가 끝나면 이긴 편의 짚을 한웅큼씩 잘라 자기 집 지붕위에 올려놓으면 한해 집안이 평안하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고, 소에게 먹이면 소가 튼튼하게 잘 크고, 이 짚을 거름으로 쓰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고 한다.


▲ 승리한 쪽의 줄을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자르는 모습 Ⓒ정영신


또한 시민들의 참여로 펼쳐진 영산 큰 줄다리기는 두 동강이 난, 우리의 역사를 이어주는 거대한 판 놀이였다. 100년 동안 우리 땅에서 벌어진 틈을 거대한 비녀목으로 연결해 암줄과 수줄의 교합처럼 남과 북이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


▲ '3.1 백주년기념 민족예술큰잔치' 예술감독 최희완 민족미학연구소 소장 Ⓒ정영신






삼일혁명 100주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일제 잔재들이 각계 각층에 똬리 틀고 있다.

대한독립만세을 외친 33인의 순국선열과 일제 탄압을 맞서 싸우신 선열께서 얼마나 통탄하고 계실까?
일제에 부역한 친일세력의 잔재를 밝혀내어 뿌리 뽑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삼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열들을 기리는 행사가 지난 26일부터 3월1일까지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서 펼쳐졌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3,1운동 100주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주최한 ’만북울림 문화제‘와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추진본부‘에서 주최한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이 열렸다.





그 중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서 준비한 ‘한겨레 큰 줄당기기’에 관심을 가진것은
고향의 ‘영산줄다리기’가 참여해서다.






'영산줄다리기보존회'를 이끄는 고향 친구인 신수식씨를 비롯하여 차재현, 황태암, 장상록,

김정식, 이일선, 차창규, 조찬호, 이철식, 윤호웅, 김건수, 김홍광씨를 만났다,
그리고 재경 동문인 김상현, 송장식, 이수만씨와 조창호, 김판호, 강판순, 이영태, 김대곤,

하영종, 김진규, 이상국, 배일윤, 이용기씨도 만났다.






그 외에도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을 진행하는 채희완, 장순향, 김봉준, 변우균, 안봉모씨를 비롯하여

김정헌, 박종관, 김이하, 정덕수, 정영철, 이수환, 정복수, 하형우, 김문호, 이만주, 김명지. 이희종,

리 반, 손병주, 성기준, 정영신, 여현수씨 등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만북울림 문화제‘에 참여한 ’몸북‘의 유진규씨를 바롯하여 유홍영, 윤시중, 김기상,

김발렌티노, 안재근, 전형근, 강지수, 양길호, 김종학, 황현성, 장성진, 김선미, 하택후,

홍윤경, 서승아, 서우림, 방관철, 한혜민, 고명희, 한준휘, 홍성표, 최원석, 위다은, 신지은,

김초원, 이소라, 김동효, 양철해, 이창준, 이유현, 이채은, 김태영, 하태웅, 김상인, 이요한,

김현신, 이성희, 최정산,  Ian John, 권제인, 박광선, 손건우, 고은별, 이은주, 윤혜경, 윤지원,

이두원, 최수라, 최수현, 이재돈, 김국원, 안상현, 정기욱, 문숙경씨도 만났다.




'몸북' 단체사진(유진규 페이스북에서 스크랩)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진가 박옥수, 최광호씨와 김정숙씨도 만났지만,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다,
분주하게 돌아 다니느라 차도 한 잔 못 나누었지만, 다들 반가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삼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26일부터 3월1일까지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공식적인 추념행사 외에도 ‘3,1운동 100주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주최한 ’만북울림 문화제‘와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추진본부‘에서 주최한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많은 시민들이 함께했다.






전국에서 약 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북과 장구 등 우리악기를 갖고 나와 만북을 울리며 신명을 일으켰고,

생명평화제전 열 두 마당에서는 전통연회형식의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등 많은 구경거리가 열렸으나, 

그 중 눈길을 끌며 마음을 모은 것은 ‘한겨레 큰 줄당기기’였다.





매년 삼일절 마다 경상남도 영산에서 열렸던 줄다리기가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 행사로 서울광장으로 올라 온 것이다.

지난26일부터 청계광장에서 줄 비나리를 시작으로 새끼줄을 엮고 말아 거대한 두 갈래 몸줄이 만들어졌다.





이번 ‘한겨레 큰 줄당기기’는 두 동강 난 우리의 역사를 잇는 거대한 판 놀이로 연출되었다.

암줄과 숫줄은 ‘민족통일 줄’과 ‘생명평화 줄’로 나뉘어져 한민족 공동체 정신을 각인시켰다.

100년 동안 벌어진 틈을 암줄과 수줄로 연결하여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큰 뜻을 품었다.

우리의 전통 줄다리기는 상대를 앞지르지 않고, 뒷걸음치며 끌어 껴안아 둘이 하나 되는 것이다. 



 



3월1일 오후세시부터 청계광장에서 동부 줄과 서부 줄로 나누어 출발한 두 줄이 풍물을 지피며 세종대로에 진입했다.

서낭대 싸움의 진잡이로 신명을 일으키는 가운데,

거대한 비녀목으로 두 줄을 교합하자 시민들의 함성 속에 역사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서낭대와 깃발로 기싸움을 벌이며 “이어~차, 이어~차” 힘겨루기를 한 결과 암줄의 승리였다.





영산줄다리기 전승자인 신수식씨는 “암줄이 이겼으니 풍년이 들겠다”면서

"오늘은 어느 편이 이겼다는 승부보다 모두가 화합하는 의미로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시민들은 줄다리기가 끝나자 암줄의 젓줄을 잘라갔다.

영산에서도 줄다리기가 끝나면 이긴 줄을 잘라 자기 집 지붕위에 올려놓으면 한해 집안이 평안하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여겼다,

소에게 먹이면 소가 잘 크고, 거름으로 쓰면 풍년이 든다고 믿어왔다.






‘한겨레 큰 줄당기기“ 연출로 전래된 영산줄다리기와는 약간 바뀌어 진 부분도 있었다.

줄에 올라타는 장수대신 말뚝이가 올라 춤을 추었고, 줄다리기 시작과 끝을 알리는 총소리도 없었다.

화합으로 이끌어 통일을 이룬다는 의도였지만, 영산 줄다리기의 백미는 승부다.

서로 이기려는 승부욕이 애살과 신명을 끌어내는데, 승부에 의미를 두지 않으니 흥미가 반감된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지켜 본 50여 년 전의 줄다리기로 한 번 비교해 보겠다.

마을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대장, 중장, 소장으로 나누어 세 명의 장수를 선발하였다.

그들의 지휘로 모든 행사가 진행되었지만, 그들이 풍물패와 줄꾼의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물주였다.

그 당시는 장수가 이동하면 말을 탔는데, 진잡이를 비롯한 줄 싸움이 얼마나 치열 했는지 모른다.

서부대장의 목검은 두 동강이가 났고, 동부대장은 말에서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평소에는 서로 친한 사이지만, 줄다리기 동안은 원수처럼 적대감을 가져 승부욕에 불태우는 것이다.





주민들의 애살로 만들어진 줄을 지키느라 밤을 지세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여성들에게 큰 낭패 당할 일이지만, 그때는 여자가 줄을 넘으면 진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래서 줄을 넘지 못하도록 밤 세도록 지킨 것이다. 유교의식에서 비롯된 속담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했으니, 꼭 여성을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포수가 쏜 신호탄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되면 마른 논에서 이는 흙먼지와 함성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젓줄(곁줄)이 끊어져 나뒹구는 사람이 여기 저기 생겨나고, 밀리고 당기기가 한 동안 반복되었다.

다들 논 턱에 힘을 실어 버텼는데, 그 긴박한 순간들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한 쪽이 끌려가 지더라도 모두 이겼다고 풍물을 지피며, 한데 어울리는 한마당을 이루었다.

자기편이 이겼다고 우기면서도, 줄은 이긴 상대의 줄을 잘라가는, 웃기는 짜장면도 속출했다.

승부로 시작되어 승부로 끝났지만, 결국은 대동놀이에 의한 화합이었다.





3,1절 행사인 줄다리기는 세종대로와 광화문일대의 도로가 차단된 가운데 열린 엄청난 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한 축제 한마당이었는데, 그 현장에 중요 언론사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다.

물론, 전날 북미회담 결렬에 따른 시사성에 기인했겠지만,

냄새나는 곳으로만 몰리는 똥파리 근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심지어는 엉터리 보도까지 따랐다.

오후 두 시가 넘어 점심 식사하러 프레스센터 옆의 중국식당에 들어갔는데, 마침 티브이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앵커가 삼일절 기념행사를 소개하며 오후4시부터 열릴 줄다리기를, 줄다리기가 열렸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이런 편향되고 왜곡된 엉터리 언론을 하루 종일 끼고 사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삼일 혁명 백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영산줄다리기는 성공적인 한마당이었다.

광화문 광장의 태극기부대가 벌이는 격렬한 시위가 맞서는 상황이라 아쉽기는 했으나,

이것이 오늘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 아니겠느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축제 마당에 참여한 시민들과 태극기부대 시민들이 줄다리기로 한 판 승부를 겨루면 어떨까? 

줄다리기를 흥겹게 하는 승부욕을 극대화하면서도 결국 화합하여 하나가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꿈에 불과한 일이지만, 꿈이라도 행복해진다.






영산에서 올라온 신수식씨를 비롯한 ‘영산줄다리기보존회’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

더구나 3월3일 영산에서 치뤄 질 줄다리기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사용할 짚이 없어 전라도에서 짚을 사왔다는데, 그 짚 값이 무려 4천만원이라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축제가 열리는 4일 동안 좁은 여관방에 머물며 줄 만드는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했다.

줄 옮길 받침대를 조립하고 해체하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니,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다들 칠순이 지난 늙은인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더구나 총책을 맞은 신수식씨의 사명감 넘치는 활약상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 많은 대중을 상대로 줄을 이해시키며, 한 마당으로 이끌어 내는 솜씨가 경지에 달해 있었다.

아마 끝나 집으로 돌아가면, 몸살로 자리에 더러 눕지 않을까 쉽다. 다들 고생은 했지만, 장하고 장하다.





아무쪼록, 영산줄다리기가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통일 줄이 되기를 축원한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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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 조성국(1919-1993)선생은 ‘한국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영산줄다리기(당기기)의 기능보유자였다.



'창녕을 사랑하는 사람들'카페에서 스크랩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태어 난 선생께서는 일제 때 맥이 끊겨 잊혀져가던

영산줄다리기를 되살려 마을 놀이로 자리 잡게한 장본인이다.





영산줄다리기는 애살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잡이로 신명을 일으키며 답합으로 이끄는 대동문화다.

선생께서는 198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지방대에서 줄 바람을 일으켰는데,

그 신명난 대동놀이로 삼일독립정신을 일깨우며, 민주화에 불씨를 지피기도 했다.





1950년대부터 10여 년 동안 영산중학교에 근무하는 등 향토교육에도 기여하셨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며, 양파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는 등 농촌경제를 일으키려는 향토애도 대단하셨다.

창녕이 양파 주산지가 되도록 이끌며 '양파재배법'(1972)을 비롯한 여러 권의 문화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다.





난, 조성국선생님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영산중학교 은사이기도 하지만, 아버지 친구 분이라 어린 시절 기억들이 너무 새록새록 하다.

학기가 바뀌어 교실에 들어와 처음 하신 말씀은 아직까지 기억난다.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얽은 자신을 소개하며, “곰보도 정이 들면 구멍구멍마다 든다”며 웃기셨다.





국어와 농업을 가르쳤는데, 선생님의 수업시간은 유달리 기다려졌다.

가끔 여러 학생에게 각자의 대사로 연결하는 연극형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수업의 지루함을 해소시키며 머리에 주입시키는 선생의 교육방식은 틀에 박힌 다른 분들과 사뭇 달랐다.

한 번은 내게 여자 배역을 맡겼는데, 너무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 친구들로 부터 웃음을 산 기억도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선생님께서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당분간 못 나오신다고 했지만, 동내 소문은 “빨갱이로 잡혀 갔다”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더니 교원노조에 연루돼 구속되었다고 하셨다.

석방되어 해직된 후로는 농사꾼으로 변신해 양파재배와 줄다리기를 정착시키는데 이바지했다.





그 이후 고향을 떠나 와 잊고 있었는데, 1970년대는 인간문화재의 권익과

올바른 전통 계승을 위해 '한국인간문화재연합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 이후 어느 날, 서울에서 열린 ‘민예총’ 창립총회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고은시인과 미술평론가 김윤수선생, 조성국선생. 세분이 '민예총' 초대 공동의장으로 선임되었고,

신경림시인은 사무총장,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장은 김용태씨가 맡게 되었다.





너무 반가워 이런 저런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블로그에 올리려 찾아보니 한 장도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선생의 사진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필름이라 정선에 쳐 박아 둔 모양인데, 필름 찾아 스캔 받는 일이 찍는 일보다 더 급한 것 같았다.





문화운동, 지역운동, 사회운동으로 기여한 공적이 큰 분이지만, 세상에 덜 알려진 것은 틀림없다.

부산대 명예교수 채희완씨는 장일순선생과 조성국선생께서 닮은 데가 너무 많다고도 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시며 당대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인품까지 꼭 같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꼭지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참여한 영산줄다리기를 소개하는 면이다.

그러나 오늘의 줄다리기가 있도록 만든 조성국 선생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는데다,

공적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아 선생님 이야기부터 늘어 놓게 된 것이다.




지난 26일부터 시작된 3,1일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에

영산줄다리기가 참여한다는 소식을 진즉 듣고, 행사를 기록하기 위해 찾아 간 것이다.

더구나 조성국선생님께 줄다리기를 물려받는 신수식씨는 초등학교 동창이 아니던가.

참여한 보존회 회원 대개가 고향 선후배인데다 사촌까지 있었다.





신수식, 차재현, 황태암, 장상록, 김정식, 이일선, 차창규, 조찬호, 이철식,윤호웅, 김건수,

김홍광씨 등 향에서 열 두 명이 올라왔는데, 두세 명 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들 몇 십 년을 떨어져 늙어 왔으니, 모를 만도 했다.





덕분에, 같은 서울 살지만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고향 동창까지 만난 것이다.

김상현씨와 송장식씨를 만났고, 줄다리기가 시작되는 3월1일이 되면

더 많은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해마다 3,1절에 맞추어 열리는 영산 3,1문화제는 어떻게 하고 왔는지 물어보았더니,

서울 광화문줄다리기가 끝나는 즉시 내려 가야한다고 했다.

정말 불알에 요령소리 나게 됐다.





가닥 줄은 영산에서 가져왔지만, 엮고 밟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니 옛날 생각도 났다.

줄다리기를 전수받은 신수식씨의 능란한 지휘와 통솔력은 조성국선생을 너무 닮아 있었다.

기능에 이어 선생님의 정신까지 이어 받은 게 너무 장하고 고마웠다.





첫 날은 숙소에 띠라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오랜만의 회포도 풀었다.

술 자리에는 서울 ‘에이스다원’ 대표이사인 오정혁씨와 직원 한 분이 합류하였고,

이차로 옮긴 ‘봄 여름 가을 겨울’에는 본 축전의 예술감독인 채희완씨도 오셔서 함께 했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듯이 기분좋게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3,1절 백주년을 맞는 오늘 다들 청계광장으로 나가자.

‘3,1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의 하이라이트인 줄다리기가 오후3시 부터 열린다.

광화문광장으로 줄을 옮겨 4시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되니, 다들 신명난 한 판을 벌여 보자.


"이어~차, 이어~차, 이어~차"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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