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씨

몸이 아프다고 방에만 처박혀 있을 순 없어 남대문사우나에 갔다.

서울시에서 한 달에 두 장씩 주는 무료목욕권을 아주 요긴하게 쓴다.

대개 비 오는 날 몸이 뻐근하고 아플 때 사용하지만, 이번엔 몸을 추스르기 위해 간 것이다.

냉탕 온탕을 드나들며 나부대니 훨씬 컨디션이 좋아졌다.

 

서울로육교를 거쳐 광장으로 내려가니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십여 년 동안 서울역을 누볐던 노숙인 김지은씨가 아닌가?

서울역 노숙하면 그부터 떠 올릴 만큼, 서울역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 그가 두세 달 전부터 보이지 않아 늘 궁금했는데,

마치 황야의 무법자처럼 넥타이 휘날리며 돌아온 것이다.

너무 반가워 손을 잡았더니, 손아귀에 힘이 실려 있었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더니, “갈 데가 어딧어요. 빵이지...”라며 말을 흐린다.

 

차마 자존심 상할 것 같아 무슨 죄로 갔냐고 물어볼 순 없었지만,

추측컨데, 남의 옷이나 탐내다 문제 생긴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술도 많이 마시지 않지만, 싸우지도 않아 폭행에 휘말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동자동에 조현성 정신질환자가 유독 많듯 그 역시 그런 병인 것 같은데,

먹고 자는 것 보다 오로지 멋 부리는 데 치중한다.

 

볼 때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을 선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번에는 멋 부릴 옷이 없었던지, 런닝 셔츠에 넓적한 넥타이만 메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게 몸이 좋아지고 힘이 실려 있었다.

삼시 세끼 밥 잘 먹고, 정해진 시간에 운동하고 잠재우며,

짐승처럼 사육 당하니 몸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출감 기념 초상사진 찍자고 했더니, 반색을 한다.

멋 부리는 것을 워낙 좋아하니,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

 

서울역광장을 거쳐 동자동으로 건너오다 또 한 사람 반가운 이를 만났다.

송범섭 역시 한동안 보이지 않아 어디 갔다 왔냐고 물었더니, 건너 마을로 이사 갔다고 한다.

오래전에 찍은 기념사진이 있어 방에 데려가 사진을 찾아 주었더니,

이왕 주는 김에 초상사진도 한 장 찍어달란다.

 

송범섭씨

이젠 어디 가나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

더구나 오랜만에 나타난 사람은 죽은 처삼촌 만난 듯 반갑다.

대개 이승을 떠난 사람이 많아지고, 이사 온 빈민만 늘어나고 있다.

 

나 역시 그들처럼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질 존재가 아니던가?

죽기 전에 복 받을 짓을 해야 저승 가서 푸대접 받지 않을 텐데, 가진 것이 없으니 복 지을 건덕지가 없다.

열심히 사진이라도 보시하면 잘 봐주지 않을까 위안한다.

그러나 몸은 비틀거리고 정신마저 오락가락한다.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사진, / 조문호

 

 

노숙자의 절반은 알콜 중독자로 볼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차가운 날씨에 술이 취해 잠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들이 술을 자제하며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려면

강제 수용하여 치료받게 하는 방법뿐이다.

 

지난 23일 정오 무렵, 산책하러 동네로 내려갔더니,

송범섭씨가 마치 장물애비처럼, 손목시계를 몇 개나 들고 있었다.

한 개 오천 원에 판다는데, 쪽방 촌에 시계 필요한 사람이 있겠는가?

필요하다면 밥 얻어먹는 시간이라도 알아야 할 핸드폰 없는 노숙자들뿐인데,

그들에게 무슨 돈이 있단 말인가?

 

새꿈공원으로 올라가니 주차장 모퉁이에서 노숙하던 병학이 일행이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가 깨끗하게 청소된 걸 보니, 어디로 쫓겨난 듯 했다.

멀리 공원 안쪽에서 누군가 노숙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보니, 쫓겨 난 그들이 공원 안으로 자리를 옮겼더라.

병학이는 이불 속에 파묻혀 자고 있었고, 옆에 있던 봉남이가 반색을 했다.

 

술이 고파 물주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주머니엔 천 원짜리 한 장 뿐이었다.

“천원 가지고 무슨 술을 사?‘라며 시큰둥했다.

병학이가 자서 심심했던지, 날더러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니네 가족은 서울에 사냐?고 물었더니, 사연을 줄줄이 쏟아냈다.

 

운전면허증부터 꺼내 놓으며 집에서 이혼 당해 쫒겨 나온 이야기를 했다.

택시기사로 일하며 살았는데, 그 놈의 술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운전해야 할 사람이 술을 너무 좋아해 일 나가지 않는 날이 많으니, 누가 그를 쓰겠는가?

결국 직장 잃은 가정불화로 집에서 쫓겨나게 된 사연 사연을 털어놓았다.

“자식은 없냐?”고 물었다니, 갑자기 딸년이 보고 싶다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슬피 울어대는지 옆에 있는 나까지 눈물이 나더라.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괜히 쓸데없는 걸 물어 초상집 분위기를 만들었다.

자리가 민망해 일어나니, 대뜸 하는 말이 “천원만 더 갖다 줘”란다.

자식이 보고 싶어 그렇게 슬피 울다가도 술값 걱정을 하는 것을 보니, 술이 무섭기는 무서웠다.

이제 오십대 중반이면 한창 일 할 나이인데, 보통 일은 아니었다.

 

작년 이맘 때 비명에 간 용성이도 술 때문에 죽었는데,

술 값 구걸에 못 이겨 술값 준 적 있는 내가 죽인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속히 알콜중독자를 강제 수용하더라도 구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매일같이 국회에서 개지랄만 떨지 말고 사람 살릴 걱정 좀 하라.

 

사진, 글 / 조문호

 



쪽방 올라가다 길에서 송범섭씨를 만났다.




송씨는 만나기만 하면 찍은 사진들 언제 주냐며 독촉이 빗발 같다.
빚쟁이 된 것처럼 만날까 피해 다닐 정도다.




예전에는 어버이날과 추석에 했던 빨래줄 전시로 사진을 주었으나,
그 일을 방해하는 사람으로 접고부터는 사진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빨래줄 전시는 협찬 받아서라도 꼭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젠 정해진 날자가 없으니, 차일피일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일전, 재난지원금 받은 게 남아, 사진을 만들어 두었기에 전해줄 수 있었다.




생각난 김에 다른 분도 주어야 할 것 같아, 사진을 챙겨 동네 한 바퀴 돈 것이다.
먼저 노숙자 아지트로 찾아가 유정희씨와 병학이 사진을 전해주었다.
병학이는 사진 둘 때가 없어 유씨가 챙겨두겠단다.




노숙하는 이의 설움이다.
몸 하나 거둘 곳 없는 사람에게 사진이 무슨 소용이랴!




공원에서 만난 이남기씨에게 사진을 주었더니,
고맙다며 음료수 한 잔 마시라고, 천 원짜리 한 장을 준다.
한 푼이라도 남에게 신세지는 걸 싫어하는 성미다,




박성일씨와 박소영씨도 만났는데, 소영씨는 식혜를 주었다. 
다른 사람 주지 말고, 보는 앞에서 마시라며 채근했다.



자기 핸드폰을 열어 이런 저런 사진을 보여주며 속삭였다.
별 일도 아닌 사소한 일을 열심히 설명해가며 수긍해 주길 바랬다.
그 만큼 외롭다는 이야기다.




요즘 공원에서 술 마시는 사람도 많이 줄어 들었다.
무료급식도, 줄 세워 배급 주는 일도 다 끊겼다.
코로나가 빈민들의 생활 환경까지 서서히 바꾸고 있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세상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사진, 글 / 조문호







 






쪽방사람들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는지, 다들 걱정되는 모양이다.
사진하는 정영신씨가 지난 12일 동자동을 방문했다.





내 사는 것도 보고 싶겠지만, 용성이 모자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수면바지 두 개와 먹거리를 사가지고 왔는데,
온 김에 송범섭씨와 장애인화가 윤용주씨도 만나보라고 했다.

 





그 들 살아 온 이야기 들어 보면 책 몇 권 읽는 것보다,
더 값진 공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방 아래층에 사는 송범섭씨 방부터 찾았는데,
그 방은 항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방이 작아 세 사람 앉으니, 꽉 찼다.






한쪽에는 약봉지가 줄줄이 놓여있고,
한쪽에는 나비 접기 위해 모아 둔 종이 봉지도 있었다.
이 친구는 늘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갖고 산다.





쪽방상담소 봉사요원으로 일하며, 틈만 있으면 희망의 나비를 만든다.
한 때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젠 달라졌다.
얼마 안 되는 기초생활수급비를 아껴 적금까지 들며 꿈을 키운다.






세 번이나 결혼에 실패하며 희망과 좌절을 반복했지만,
모든 욕심 버렸으니, 더 이상 좌절할 것도 없다.






두 번째는 장애인화가 윤용주씨 방을 찾았다.
들여다보니, 좁은 방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몇 일전 성당에서 치룬 그림전이 성공적으로 끝나 의욕이 충천했다.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다리의 통증마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젠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보라는 부탁도 했다.
그 정도 의욕이고 투지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가 절망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술의 힘이다.






세 번째는 오층 옥탑 방에 사는 황춘화씨 방을 찾았다.
쪽방에서 두 명이 살 수 없어, 높고 가파른 옥탑 방을 얻어 사는 데,
방안에 있어도 입김이 절로 나왔다.






전기장판으로 간신히 온기를 유지하지만, 말이 방이지 창고나 마찬가지다.
두 모자는 큰 냄비에다 술국을 끓여놓고 있었다.






황춘화씨는 40여년 전 남편의 폭력에 견디지 못하여 어린 용성이를 안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 뒤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은 다른 사람에게 맞아 죽었단다.





자활봉사로 떠돌며 공중화장실 청소에서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마저 힘이 미치지 못하니,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젠 힘든 일을 할 필요는 없으나, 늘 아들과 술로 소일하고 있다.
함께 마시다 차례대로 쓰러져 자지만, 행복해 보였다.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이 혼자 사는 쪽방에서,
사랑하는 두 모자가 즐겁게 사니, 그 게 행복이 아니겠는가?





두 사람 모두 술기운에 젖어 살지만,
서로 챙겨주며, 술도 조금씩 절제시켰다.
오히려 나더러 술 좀 적게 마시라며 용성이가 충고했다.






세 사람 살아 온 이야기만 옮겨도 책이 몇 권은 될 것이다.
정영신씨는 작은 위안이라도 주고 싶어 왔지만, 오히려 위안을 받은 것 같다.
어느 누가 그들을 보고, 세상에 불만이 있겠느냐?



사진, 글 / 조문호


























내가 사는 쪽방은 본래 송범섭씨가 살던 방이다.
작년 6월에 단장하여 입주시킨 ‘디딤돌하우스’로 이사 간 양반인데,
일 년 쯤 살다 다시 우리 건물로 돌아 왔다.

입주한 주민을 내쫓으려는 건물주와 싸워 만들어 낸 ‘디딤돌하우스’는
당시 쪽방 사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방세도 다른 곳보다 싼데다, 실내외가 깔끔하기 때문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옮긴 방 자랑을 해댔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따라가봤더니, 방을 깔끔하게 꾸며놓았더라.
나비를 만들어 창틀에다 촘촘히 붙여 놓았는데, 행운의 나비를 계속 만들 것이라 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 없지만, 방 꾸미는데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하고 일 년만에 다시 돌아 왔는데,

그는 어디에서 살아도 방 내부는 잘 정리해 놓고 산다.
4층에는 빈방이 없어 3층에 살지만, 수시로 4층을 오르내린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조건도 그 곳이 더 좋지만, 이사하는게 번거롭기 짝이없기 때문이다.
‘왜 돌아왔냐?’고 물었더니, 한마디로 재미가 없더란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외롭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얼마 전 쪽방 사는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는 절대 반대한다고 했다.
불편한 변두리 아파트일 것이 뻔한데, 외로워 못 산다는 것이다.
‘얼마나 살 것이라고 거기서 징역생활을 해야 하느냐?’는 거다.

혼자 사는데 무슨 아파트가 필요하며, 관리비도 부담이라고 했다.
지금 사는 동자동은 교통요충지라 어디든 쉽게 다녀 올 수 있지만,
그곳에서 시내에 나오려면 온 종일 걸린다고 말했다.






송범섭씨는 한쪽 뇌에 이상이 있어 심한 정신적 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옛날엔 주방장 생활을 하며 성실하게 살았으나,
세 번의 결혼생활이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고 했다.
딸까지 두었으나, 결국 혼자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병에 대한 구체적인 증상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 볼 수 없었는데,
보기로는 활달한 성격이다.
바쁘게 이웃 방을 들락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따끈 따끈한 소식도 전해준다.
틈틈이 ‘쪽방상담소’에 나가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며 성실하게 산다.






그가 오고부터 닫혔던 족방 문들이 여기 저기 자주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장기를 두거나, 술을 마시거나,  옆방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좁은 복도에 자리를 깔기도 하지만, 서로 정 나누며 소통하는 모습이 보기좋다.
다들 방문 열듯, 마음의 문도 활짝 열었으면 좋겠다. 

누추한 방에 살아도 이웃과 정 나누고 산다면, 잘 사는 것이다.
송범섭씨가 만드는 행운의 나비가 훨훨 날아, 건강도 되찾고 가족도 되찿았으면 좋겠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2일은 하루 종일 쪽방에서 죽쳤다.
하는 일이래야 컴퓨터와 노닥거리다 잠자는 것뿐이다.
마침, 맞은편 방에 사는 김응수씨가 소주 한 잔 하잖다.
소주 세병과 소시지 세 개를 사왔지만, 방에 들일 수가 없었다.

침대에다 책상까지 들여 놓았으니 방이 좁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어 문턱에다 술상을 차려 손님을 맞았는데, 그와는 처음 갖는 술자리였다.

나이는 일흔 셋인데, 그 날은 오랜 숙원사업이 해결의 기미가 보인다며 약간 고무되어 있었다.





부산에서 아들과 아내가 살고 있지만, 사업자금 융자받으러 상경해 쪽방에서 체류한지가 삼년이 되었다고 한다.

경남 고성이 고향인 그가 고성에다 대규모 야시장을 개발하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었는데,

서류 갖추고 보완하느라 3년이 흘렀단다, 그런데 융자 신청액이 무려 300조가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포 용지에 적힌 확인서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었는데, 너무 큰 금액이라 믿기지 않았지만, 한 번 물어 보았다.

야시장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냐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서냐 물었더니 당연히 돈 때문이라고 했다.

그 나이에 엄청난 일을 꾸며 벌어본들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들과 손자를 위해서란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그만두는 것이 돕는 것이라며 말을 끊었더니, 이번엔 정치이야기를 꺼냈다.

박정희의 경제 성장론을 늘어놓으며, 삼년만 더 했다면, 세계 최고의 경제국가가 되었을 것이란다.

더 이상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화장실 가는 송범섭씨를 불러 앉혔다.

이 친구는 아래층 사람들과 복도에 둘러앉아 한 점에 백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돈 따는 것보다 시간 보내는 놀이였다.

후래삼배라며 석 잔을 연거푸 따라 주었으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던지 서둘러 내려가버렸다.






이번에는 옆방에 사는 최완석군이 나타났다. 이 친구는 막걸리만 마셔 끼일 형편도 아니지만,

이미 취해 들어왔다. 내년이면 50에 접어들지만,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틈틈이 괴성을 질러 옆방 사람들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

건물 관리하는 정씨로부터 숱한 욕을 먹으며 구박 당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그런데 방에서 조그만 컵에다 물고기를 키우는데, 하루에 몇번이나 물을 갈아주었다.

유일한 친구인 냥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티브이도 물고기가 노는 화면을 자주 틀어놓았다.

다들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쪽방 촌에는 별의 별 사연의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같이 힘들어하는 것은 소외감이고 외로움이다.

문제는 이웃과 어울리거나 공원에 나와 사람을 만나는 분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다들 혼자 사는데 익숙해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 먹는 것조차 부실할 수 밖에 없어 결국은 건강마저 잃어버린다.

혼자 살다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은 고사하고 언제 사망한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 이어 급증하는 고독사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시대가 만들어 낸 사회적 병이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경우, 지난달부터 한국 야쿠르트와 업무협약을 맺고 개인정보제공을 조건으로

3회씩 야쿠르트 배달원들이 홀몸노인 가구를 방문해 음료를 전달하며 안부까지 확인하기로 했는데, 정말 잘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극소수의 사람들이 신청했고, 그것도 외부 출입이 잦은 분들이 대부분이다.

아무 조건 없이 해당되는 분은 주기적으로 방문해주었으면 좋겠다.

정부의 좀 더 적극적인 대처가 절실하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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