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은 얼마나 추웠는지 방안에 한기가 돌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잤더니, 아침에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몇 년 전에도 그런 증상이 생겨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또 도진 것 같았다.

방바닥에 오래 앉아 생긴 병이라 겁이 덜컥 났다.

그 당시 고맙게도 안애경씨가 쪽 침대를 책상 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준적도 있었다.

방이 코 구멍 만해 책상 앞에 앉으면 요지부동이지만, 그래도 한결 나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방문 앞에 없던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안 그래도 배가고파 라면 끓여 먹으려고 일어났는데,

고맙게도 누가 소리도 없이 이렇게 살짝 갖다 놓았을까?

아마 산타 할아버지가 코로나 격리에 걸려 늦게 오신 것 같았다.

밥에 온기가 남은 걸 보니, 가신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허리는 펴지 못하지만, 산타 덕분에 거룩한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나 허리 아프다고 누워 있을 수만 없었다.

움직여야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4층에서 완전 똥 싼 폼으로 내려왔는데,

공원에는 날씨가 추워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공터에 노숙하던 병학이는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울역광장의 선별검사소에 코로나 검사 받으러 갔다.

며칠 전에 가보니, 확진자가 생겼는지 검사 받은 사람도

시일이 지나면 다시 받아야 다시서기 쉼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나 자신도 불안했다. 며칠 전 노숙자들과 인터뷰한다고

마스크 내린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씻고 벗고 하나 뿐인 손녀 오겠다는 전화도 받지 않겠는가?

 

서울역광장 선별검사소에는 날씨가 추워 그런지 검사받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에는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간단히 해결했다.

면봉으로 코구멍을 쑤셔대면 기분은 더럽지만, 어쩌겠나?

나도 살아야하지만, 민폐 끼쳐서야 되겠는가?

 

다시서기 쉼터에 들어 가보니 노숙자보다 도우미가 더 많았다.

한 쪽 구석에는 네 사람이 누워 자고, 의자에는 한 사람이 축 쳐져 자고 있었다.

그래도 먹고 살라고 컵라면 몇 개 담긴 봉지를 발로 감싸고 자더라.

간밤의 매서운 추위에 어찌 잠들 수 있었겠는가?

 

요즘은 티브이도 안 틀어주고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온기만 준다.

모이게 할 수 없으니, 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서기 건물 벽에 누군가 웅크려 자고 있었다.

온몸을 똘똘 말아 사람인지 짐인지 헷갈렸는데, 햇살도 그를 비켜가고 있었다.

단잠의 포근함도 결코 오래 주지 않았다.

 

한쪽 벽에 웅크려 선 노숙자에게 말 걸었다.

담뱃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 줄테니, 당신 살아온 이바구 좀 해줄라요?”

얼씨구나 달라붙었다. 

이 동네서 인터뷰라는 말을 하면 손 내 젖는 사람이 많다.

말 못할 사연에 숨어 다니거나 아니면 내가 기레기나 사기꾼으로 보이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노숙하는 김씨는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자랐단다.

꿈이나 희망은 물론 좆도 씹도 모르고, 짐승도 그렇게 비참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강원도 골짜기 고아원인지 수용소인지 헷갈리는 곳에서

아무것도 배우지도 못하고 매만 맞고 자랐단다.

 

열아홉 살에 도망쳐 나와 30여년을 떠돈 삶은 이빨 빠진 들개의 삶이었다.

배도 탄 덕에 주소지는 부산으로 되어 있어나

가는 곳이 그의 집이고 주소고 빌어먹는 자리였다.

세상에서 더럽다고 피하는 일들만 골라 한 것 같았다.

한 때는 목포 염전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적도 있단다.

 

요즘은 어려운 기 뭐요?’ 라고 물었더니, 자기 입은 옷을 가르켰다.

얼마 전 자선단체에서 노숙인들에게 두툼한 외투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포장을 멋지게 해 놓아 거지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멀쩡한 놈에게 누가 적선하고 싶겠는가?

옷 속에 감추어 둔 암행어사 패말 같은 걸 보여주는데, 잘 아는 팻말이었다.

마스크에 가려 몰랐는데, 그 고아가 감투가 된 팻말에 알아보았다.

강명자표 인터뷰 사례비인 신사임당 한 장을 주었더니, 몸 깊이 감추기 바빴다.

 

그런데, 돌아오다 귀가 막힌 걸 보았다.

서울역 광장 돌아가는 코너에다 앉아 쉬라고 돌 턱을 만들어 놓았는데,

앉지 말라고 그 위에 강력본드 같은 것으로  돌맹이를 짖 이겨 놓았다.

그곳에 노숙인들이 앉아 있으면 그 옆 가게들이 장사 되겠는가?

저렇게 악착같이 돈 벌려고 못된 짓도 마다않는 세상에

그렇게 막 살고도 살아남은 게 용타싶다.

 

지하도를 내려가다 컵라면 하나만 사달라는 이씨를 만났다.

밥 사먹을 돈을 주겠다며 근황부터 물어 보았다.

바닥에 깔고 잘라니까 누가 박스를 가져가 막막하단다.

거리를 떠돈 지는 삼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셋방 살 때도 별 다를 바 없었단다.

불장난에 잘 못 꼬여 인생 망친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그가 인생 막장을 걷게 된 천형의 죄는 바로 게으름이었다.

환갑이 가깝도록 여자 한번 품어보지 못했다는 말도

결국 게을러서 용쓰기 싫었던 것 같았다.

 

인생 막장의 김용환, 이정희 두 전사의 이름을 여기 새긴다.

 

사진, / 조문호

 

 

집 없는 노숙인을 돕고 싶다며 백만원을 보내 준 강명자씨의 뜻에 따라

인터뷰 사례비로 5만원씩 드릴려고, 어제 밤에 이어 서울역광장으로 나갔다.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포근한 날씨 덕에 금세 녹아버렸다.

오 갈 곳 없는 부랑자로서는 아름다운 눈도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서울역 선별검사소 주변에는 코로나 검사 받으러 온 사람들이 길게 줄지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터줏대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노숙인 쉼터인 ‘다시서기’에 들어가려니, 입구에서 출입을 통제했다.

코로나 검사를 받아 음성으로 통보받은 자에 한해 출입이 가능하단다,

지난 22일자로 통보받은 음성 확인 메시지를 보여주었더니,

검사 받은 지가 며칠 지나 다시 검사 받아야 한단다.

 

그 사이 감염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나

그런 엄격한 통제라면 차라리 문 닫는 것이 편하다.

아니나 다를까 쉼터 안을 들여다보니 노숙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항이라면 노숙인 합숙소나 밥 나눔도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다.

일 년 넘게 끌어 온 코로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잔혹했다.

밥 먹을 곳도, 추위 피할 곳도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지하도로 내려가니, 노숙인 한 사람이 난간에 떨어질 듯 누워 있었다.

단잠을 깨워 인터뷰를 청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였다.

최승호씨는 30세 무렵 집을 나와 이제 환갑이 지났으니, 살아 온 절반을 거리에서 보냈다고 했다.

아무 간섭 받기 싫어하는 자신의 업보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단다.

 

이어 집 나온 지가 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김상순씨를 비롯하여

정정화, 김도식, 인태권씨를 차례대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왔는지 노숙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마 돈 받은 노숙인으로 부터 정보가 새 나간 것 같았다.

인터뷰 인원수도 많지 않지만, 줄 세워 줄 일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전염병으로 5인 이상 모이는 것을 금하지 않았던가?

 

서둘러 끝내고 자리를 떴으나, 여러 명의 노숙인이 따라붙었다.

돈이 무섭긴 무서운 존재였다.

하기야! 돈 준다는데 그냥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바꾸어 생각하니 내가 그들에게 갑 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갑 질도 아무나 할 짓은 아니더라.

 

서부역 방향으로 자리를 옮겨 안효덕, 김기웅, 최완구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집에서 쫓겨 나온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분도 절반이 넘었는데,

신분확인이 안되니 관청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돈 나누어 준다는 소문이 퍼져 서울역 부근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왔는데, 동자동 입구에 세 사람의 노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아는 노숙자 이용삼씨 따라 김용철, 박동렬씨가 찾아 온 것이다.

김용철씨는 온 종일 굶어 배가 고파 죽겠다며,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아는 노숙자는 제외하기로 했으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에게 간단하게 물어보고 사례비를 주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했다.

 

다들 몰래 만나야 했으나, 한 낯이라 노출될 수밖에 없었는데,

받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속 상할까?

더 이상 소문 번지면 나다니기조차 힘들 것 같아,

이용삼씨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쪽방에 올라와 돈 준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열세 명에게 주어졌고,

돈 봉투는 일곱 개가 남아 있었다.

 

돈을 그냥 받지 말고 수고비로 당당히 받으라고 인터뷰를 시작했으나,

서두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사실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부랑자의 삶을 취재해 알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남은 일곱 분의 인터뷰 사례비 전달은 서둘지 않기로 했다.

더 어려운 노숙인을 찾아 한 분 한 분 진솔한 속내를 들어보려 한다.

당사자의 고통스러운 삶과 더불어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전하고 싶은 것이다.

 

새해에는 밑바닥 인생 일곱 분의 이야기를 만나는 대로 소개하련다.

 

사진, 글 / 조문호

 

몇일 전 페친 강명자씨로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며 100만원을 보내왔다.

고맙게 받았으나 어떻게 나누어 주어야 할지 걱정되었다.

물론, 노숙인 쉼터나 밥 나누어 주는 단체에 보내주면 간단한 일이지만,

보낸 사람이 그걸 몰라서 나에게 보냈겠는가?

노숙하는 어려운 분들에게 바로 전달해 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에겐 현금이 제일 필요한데, 만 원 정도는 가볍게 여긴다.

비상금으로 간직하려면 신사임당 한 장이 딱 좋은데, 20명을 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누어 줄 수도 없고, 누군 주고 누군 안 줄 수도 없다.

이왕이면 아는 노숙인 주고 싶지만, 자칫하면 갑 질하기 십상이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인터뷰를 하고 사례비로 지급하기로 했다.

말이 인터뷰 사례비지 이름과 나이, 어려운 점 정도만 이야기 해 주면 된다.

거지 적선이 아니고, 당당히 말하고 수고비로 받으라는 것이다.

일단 인터뷰에 응해주는 사람에 한하되, 잘 아는 노숙자나 알콜 중독자는 제외하기로 했다.

 

내일부터 마땅한 사람들을 찾아 나설 계획인데,

서울역광장에 코로나 선별검사소가 생겨 다들 쫓겨났다.

요즘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자정이 가까웠으나 서울역으로 나가 보았다.

 

몇몇 사람은 라면박스를 모아 관처럼 만들어놓았더라.

자는 사람도 있고, 잘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의 제안에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사례비를 준다 해도 인터뷰란 말에 두 사람이나 손사래 쳤다.

돈도 싫어하는 걸 보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사기꾼으로 보였던지...

 

강 훈씨 (69세)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올해 69세인 강훈씨와 60세인 이미자씨 인데,

강훈씨는 이혼하고 거리에 나선지가 십 오년이 되었다고 한다.

노가다 판에 나가 벌기도 했으나, 이젠 힘들어 못한단다.

이미자씨는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더라.

연신 깡통에 침을 뱉으며 횡설수설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 사례비로 오 만원씩 드리고 돌아왔다.

 

이미자씨(60세)  

 

내일은 아침식사 배급할 때 나가봐야겠다.

아무쪼록 자선한 분의 따뜻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어

노숙하는 분들에게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서울역광장 주변에 모여 있는 노숙자는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함께 어울려 놀아도 아무도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

행인들이 노숙자들을 지렁이 보듯 피해 다니니, 코로나에 감염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밥 주는 사람이나 복지사들 뿐이다.

슬픈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전염병 유입을 막을 수 있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22일의 동자동 풍경은 몇몇 사람만 거리를 오갈 뿐 한산했다.

만물상 차량과 식료품 파는 차량이 골목골목 대기하고 있었지만, 찾는 손님은 없었다.

 

큰 길가에는 두 내외가 끌고 다니는 폐지 수집하는 삼륜차가 서 있었지만.

동자동 안쪽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쪽방촌에는 폐지 수거하는 분들이 많아 그들의 밥벌이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배려리라.

 

흔한 일이기는 하나, 누군가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도 나 붙었다.

‘식도락’ 문에 고)옥남일씨 부고가 붙었는데, 한창 나이에 무슨 병으로 죽었을까?

장례 날자가 정해지지 않은 걸 보니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동자동 주변에는 대형 건물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젊은 회사원들로 붐빈다.

주차장 옆 공터에는 항시 흡연족들로 넘쳐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어울려 담배를 피워도 누구도 제재하지 않는다.

코로나가 담배연기를 싫어할까? 아니면 흡연족은 사람도 아닐까?

 

나 역시 담배를 피우지만, 흡연자의 공중도덕은 심각한 지경이다.

무심코 던진 담배공초가 바닥을 잔뜩 어지럽히고 있었는데,

그 쓰레기를 쪽방 촌 노인들이 치운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요즘은 서울역광장에 중구 코로나 선별검사소가 생겨

그 곳에 모여 있던 노숙자들이 모두 쫓겨났다.

 

지하도나 서울역 인근 구석구석에 틀어박혀 숨죽이고 있다.

가난할수록 전염병에 의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만,

그중에서도 노숙자는 코로나의 최대 피해자다.

 

밥 주는 집이 문 닫는 곳이 많아 끼니 해결도 어렵지만,

적선하는 손길조차 그들은 피해 다닌다.

 

어저께는 페친인 강명자씨로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노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선이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나누어주려니 누구를 선정할 것이며, 주는 방법도 걱정이다.

그들에겐 돈이 제일 필요하지만,

알콜중독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온 몸이 쏙 들어가는 침낭이 제일 필요하지만,

새 침낭을 주면 남대문시장에 가져가 싼값에 팔아버리니 그게 문제다.

 

일단 만나 그들의 의중부터 살펴보아야겠는데.

사람 만나는 일이 잦은 내가 전염병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전지역에 있는 그들에게 전염병을 감염시켜 줄 초상 치루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서울역광장의 선별검사소에 가서 코로나 검진부터 받았다.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으나, 대부분 젊은이 뿐이었다.

 

노숙자나 쪽방 촌 주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노숙자들은 그렇다 치고, 대면을 기피하는 쪽방촌 주민보다

상대적으로 외부접촉이 잦은 젊은이들의 검사가 더 필요할 것 같다.

 

검사결과가 언제 통보될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 기다려보자.

 

사진, 글 / 조문호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서울역광장에서 홈리스와 무연고 사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매년 밤이 가장 길어 홈리스에게 더 혹독한 동짓날,

외로히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자리도 올해로 20년째를 맞았다.

 

지난 21일 열린 추모제는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동자동사랑방 등 42개 단체가 모인

'홈리스 추모제 공동기획단'에서 준비한 행사다.

 

쪽방, 여관, 거리, 시설 등에서 세상을 등진 이들을 추모하고,

열악한 노숙인 인권실태 고발 및 지원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예년에 비해 대폭 축소되었다.

작년에는 노숙인과 일반인이 참여한 노숙탈출 윷놀이, 삼행시 짓기,

액운 날리기, 동지팥죽 나누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으나,

이번에는 ‘동료를 위한 동료의 추모’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중계되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1월까지 한 해 동안 거리에서, 여관에서, 쪽방에서

비명에 죽어 간 무연고자는 모두 295명이라고 한다.

작년에 사망한 166명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숫자지만, 급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매년 몇 명의 홈리스가 사망했는지 공식 통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숫자는 시민단체에서 나름으로 파악한 비공식 집계로

실제 한 해 몇 명의 홈리스가 어디서, 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국민이 아니고 유령인가? 왜 정부에서 손을 놓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울역광장에는 노숙인들의 의료, 혐오, 노동, 주거, 밥, 추모 등에서 겪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2020 홈리스 10대 뉴스’와

‘코로나19 홈리스 생존&공존 전시가 열렸다.

 

‘재난지원금 신청서를 쓰고 싶었지만 통장도, 카드도, 핸드폰도 신분증까지 없어 포기했다’는 등

코로나19 때문에 홈리스들이 겪는 혐오나 어려움에 대한 호소가 적혀있었다.

 

오후2시에는 홈리스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이 열렸다.

서울역광장 ‘홈리스 기억의 계단에는 무연고사망자의 이름이 적힌

책과 장미 295송이가 빼곡히 놓여있었다.

 

무슨 팔자가 그리도 기구하여 죽어 지내는 추모제조차 제대로 못할 때 떠났나?

부디 극락왕생하여 이 세상에서 받은 설움과 고통을 보상받으소서!

 

2016년 홈리스 추모제에서 발언한 당사자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

 

 

“우리에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 질문은 네가잘못 살아서거리잠을자게된거아니냐고비난하는것입니다.

그질문에는개인의불행에대한사회의책임이빠져있습니다.

지금우리가이자리에서요구하는것은최소한의잠자리와일자리와치료받을권리입니다.

그것은모든국민에게동등하게주어져야하는당연한권리입니다.”

 

사진, 글 / 조문호

 

한 때 서울역전을 떠돌던 부랑자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 동지 날 보고 처음이니 일 년 가까이 된 것 같았다.

내복도 안 입은 행색을 보니 정신이 온전한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용타 싶다.

 

한 보름 가까이 장돌뱅이 정영신씨 '장에 가자‘ 따라다니느라 바빴다.

덕분에 술도 제밥 얻어 마셨고 반가운 분도 많이 만났다.

코로나가 번진 일 년 동안 만난 사람에 버금갈 정도다.

그렇게 많이 만나도 별탈 없는 걸 보니, 아직 죽을 때는 아닌 것 같다.

 

동지 덕에 먹고 자는 문제도 쉽게 해결되었다.

낮 시간은 충무로와 동자동을 오갔지만, 밤에는 녹번동에서 개겼다.

 

다시 복귀했으나, 환경이 바뀌어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쪽창을 여니, 시베리아 벌판같은 찬바람이 몰아쳤다.

나야 문만 닫으면 얼어 죽을 염려는 없지만, 노숙자들은 어떻게 버틸까?

아무리 생각해도 얼어 죽는 사람도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정오 무렵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역전으로 갔다.

허급지급 허기를 메우는 자도 있고,

여기 저기 웅크려 잠들었거나, 드러누운 사람도 있었다.

간밤의 추위에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었겠는가?

 

노숙왕 김지은씨 한데 물었다. “간밤에 얼어 죽은 사람 없냐?‘고...

“사람이 그래 쉽게 죽나? 어젯밤은 맛배기에 불과한데...‘

 

몇 일 사이 김지은씨를 비롯한 몇 몇 부랑자의 움막이 모두 철거되고 없었다.

하필 추운 날 골라 철거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모진 목숨,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지 모르겠다.

죄가 있다면 배우지 못해 사기를 제대로 칠 줄 모르는 죄뿐인데...

 

나도 어디가서 뭘 좀 먹어야 했다.

마침 엊그제 쪽방상담소에서 배급 탄 식권 두 장이 있었다.

한 장은 ‘한강오리탕’집 만원짜리 식권이고, 한 장은 ‘청국장’집 팔천원짜리 였다.

둘 다 13일까지 사용할 수 있어 비상식량으로 꼬불쳐 둔 것이다.

 

그러나 동자동 ‘청국장’ 집에 들어가다 문전박대 당했다.

“한 시 반 이후에 와요. 점심시간은 안 돼요”

쪽방 촌 거지행색에 앉기도 전에 쫓아 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식권을 찢어버렸다.

 

어떠한 이해득실로 식권을 발행했는지 모르지만,

위선의 자선이라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두 번째는 후암시장 부근에 있는 ‘한강오리탕’으로 갔다.

이집은 지난 여름에 갔더니, 친정아버지처럼 살갑게 챙겨주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 대하는 태도는 똑 같았다.

주인의 곱고 아름다운 천성이 몸에 베어있었다.

 

옆에 있는 ‘경향신문’을 가져다보니, 죽일 놈의 전두환이가 일면에 나왔더라.

밥맛 떨어 질까봐 얼른 넘겼는데, 정말 신문 볼 것 없었다.

 

이어 정갈한 밥상이 나왔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오리탕을 먹었다.

코에서는 콧물이 눈에서는 눈물이 범벅될 정도로 맛있었다.

 

고맙다! 이게 온정이고 자선이다.

얻어먹는 각설이도 언젠가는 그 빚을 갚는다.

시간 맞추어 가족사진이라도 한 장 멋지게 만들어드려야겠다.

 

부디 ‘한강 오리탕’이 대박 나길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이제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쪽방이라도 있는 사람은 걱정할 것 없으나, 길바닥에서 자는 노숙자들이 걱정이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추워진다는데, 그들을 위한 대책이 절실하다.

 

지난 26일은 자정이 넘도록 잠이 안와 밖에 나가 보았다.

골목매점 앞은 잘 모르는 사내가 마스크를 이마에 걸친 채 자고 있었다.

아마 술 마시다 잠든 것 같은데, 거리로 내 몰린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서울역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다들 광장 구석에서 두더지처럼 자고 있었다.

 

오래된 고참 노숙자들은 나름의 움막이라도 있어 찬바람은 피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 정도 움막 하나 짓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것도 언제 철거될지도 모르는 움막이 아니던가?

 

두 번째는 이불 하나라도 기어이 사수하는 대개의 노숙자다.

온 몸을 이불에 돌돌 말아 잠드니 죽고 사는 문제는 하늘에 맡길 뿐이다.

 

문제는 갑자기 쫓겨 나 아무 대책 없는 초짜 노숙자들이다.

아무리 잠들고 싶지만, 추워서 잠이 오겠는가?

문제는 그 고통을 잊으려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노숙자들 중에 유독 알콜 중독자들이 많은 것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 모든 걱정까지 잊어버리고 싶어서다.

 

해마다 거리에서 죽어나는 무연고자가 300명을 넘는다.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대개 생활전선에서 쫓겨 난 부랑자들이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그들은 국민이 아니고, 사람도 아닌가?

 

온 세상이 다 보는 서울역 광장 상황을 정치인들이 몰라서 방치할까?

알고도 외면한다면 간접 살인이나 마찬가지다.

기초생활수급자 규정을 보완하여 그들도 쪽방에서 살게 하라.

 

여러분들도 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을 만나면 관심 좀 가져주세요.

하나님과 부처님께 바칠 돈 삥땅쳐서라도 그들에게 적선하세요.

하나님도 부처님도 그걸 원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직업처럼 손벌리는 앵벌이는 물론

술에 절어있는 알콜 중독자에게는 절대 돈 주지 마십시요.

알콜 중독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빨리 죽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들은 강제 수용시켜 치료받게 해야 합니다.

보건복지부 담당자는 즉각 그들을 수용하여 치료하라.

 

다들 무슨 전생의 죄가 그리 많아 짐승보다 못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신이시여! 제발 세상 조율 좀 해주세요.

 

사진, 글 / 조문호

 

노숙자의 절반은 알콜 중독자로 볼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차가운 날씨에 술이 취해 잠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들이 술을 자제하며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려면

강제 수용하여 치료받게 하는 방법뿐이다.

 

지난 23일 정오 무렵, 산책하러 동네로 내려갔더니,

송범섭씨가 마치 장물애비처럼, 손목시계를 몇 개나 들고 있었다.

한 개 오천 원에 판다는데, 쪽방 촌에 시계 필요한 사람이 있겠는가?

필요하다면 밥 얻어먹는 시간이라도 알아야 할 핸드폰 없는 노숙자들뿐인데,

그들에게 무슨 돈이 있단 말인가?

 

새꿈공원으로 올라가니 주차장 모퉁이에서 노숙하던 병학이 일행이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가 깨끗하게 청소된 걸 보니, 어디로 쫓겨난 듯 했다.

멀리 공원 안쪽에서 누군가 노숙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보니, 쫓겨 난 그들이 공원 안으로 자리를 옮겼더라.

병학이는 이불 속에 파묻혀 자고 있었고, 옆에 있던 봉남이가 반색을 했다.

 

술이 고파 물주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주머니엔 천 원짜리 한 장 뿐이었다.

“천원 가지고 무슨 술을 사?‘라며 시큰둥했다.

병학이가 자서 심심했던지, 날더러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니네 가족은 서울에 사냐?고 물었더니, 사연을 줄줄이 쏟아냈다.

 

운전면허증부터 꺼내 놓으며 집에서 이혼 당해 쫒겨 나온 이야기를 했다.

택시기사로 일하며 살았는데, 그 놈의 술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운전해야 할 사람이 술을 너무 좋아해 일 나가지 않는 날이 많으니, 누가 그를 쓰겠는가?

결국 직장 잃은 가정불화로 집에서 쫓겨나게 된 사연 사연을 털어놓았다.

“자식은 없냐?”고 물었다니, 갑자기 딸년이 보고 싶다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슬피 울어대는지 옆에 있는 나까지 눈물이 나더라.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괜히 쓸데없는 걸 물어 초상집 분위기를 만들었다.

자리가 민망해 일어나니, 대뜸 하는 말이 “천원만 더 갖다 줘”란다.

자식이 보고 싶어 그렇게 슬피 울다가도 술값 걱정을 하는 것을 보니, 술이 무섭기는 무서웠다.

이제 오십대 중반이면 한창 일 할 나이인데, 보통 일은 아니었다.

 

작년 이맘 때 비명에 간 용성이도 술 때문에 죽었는데,

술 값 구걸에 못 이겨 술값 준 적 있는 내가 죽인거나 마찬가지였다.

하루속히 알콜중독자를 강제 수용하더라도 구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매일같이 국회에서 개지랄만 떨지 말고 사람 살릴 걱정 좀 하라.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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