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그러운 코로나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 비정한 세상에 함께 어울리는 것을 거부하며 방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세상사는 방법과 질서를 하나하나 바꾼다.

 

쪽방 사람들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들 꼼짝 하지 않으니, 사람만나기가 어렵다.

노숙인은 한결같지만,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게 낫다.

 

날씨까지 정신 나갔는지, 한 여름을 방불케 한다.

4층은 달구어진 옥상 열기에 찜질방이 되어버렸다.

다들 팬티만 입고 살아 벌써부터 십구금이다.

 

옆 방 사는 김씨는 교도소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하겠단다.

차라리 코로나에 걸려 죽고 싶지만,

사람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게 억울해 죽을 수도 없단다.

 

사람들 발길이 줄어든 공원도 낯설기 그지없다.

거리는 담배 피우러 나온 회사원만 서성일 뿐, 한적하다.

골목 구석에서 외로움 달래는 자의 술잔만 허허롭다.

 

이제, 무료급식과 모든 지원이 줄어들어 살기도 힘들어졌다.

슈퍼마켓은 문 열었지만, 빈민들을 위한 푸드마켓은 문 닫은 지 몇 달째다.

아랫 공원은 거지들 들락거리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코로나 핑계로 줄이고 생략해, 외롭고 배고파 못 살겠다.

 

코로나가 사람들 정신 차리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여지 것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었으나, 코로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또 하나 신통한 것은 빈민들 줄 세우는 일도 사라졌다.

 

몇 년동안 길들이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나팔 불었지만 쇠귀에 경 읽기더니,

코로나가 ‘서울역쪽방상담소’ 직원들 버르장머리를 고쳐 버렸다.

지금처럼 하면 될 걸, 왜 그렇게 고집 부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쪽방에만 처박혀 있으니 할 일이 없어졌다.

별 일 없는 동자동보다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서 개길 때가 더 많아졌다.

올 여름엔 정선에서 무너지기 직전인 집이나 수리할 작정이다.

 

녹번동에서 편한 밥 얻어먹자니, 사모님께 알랑방귀를 뀌어야 살아남는다.

청소나 설거지는 물론, 궂은 일은 모두 내 차지다.

식모 아니, 식부의 설음을 알랑가 모르겠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하다 그릇 깨는 일은 다 반사고,

너무 열심히 해, 할 때마다 팬티가 다 젖는다.

그보다 더 귀찮은 것은 담배 피우러 밖으로 들랑거리는 일이다.

 

누군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는 소리라지만,

길 잃은 사나이의 비애를 여인네들이 어찌 알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부랑자는 하늘에서 날아 온 외계인인가?

 

육신 하나 달랑 남았지만, 기초생활 수급도 못 받는다,

부자도 다 받는 코로나 긴급재난기금도 못 받았다.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거나, 집에 갈 수 없어서다,

가족에게 버림받으면, 사회도 버려야 하는가?

 

약자 인권 유린이 알려지면 세상이 시끄럽지만,

노숙인은 길에서 죽어가도 아무렇지도 않다.

 

무슨 죄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정부는 왜 노숙인 문제를 방치하는가?

 

지금이라도 전수조사에 들어가 노숙인 등록부터 실시하라.

돈이 가장 절실한 그들도 긴급재난기금을 지급하라.

 

사진, 글 / 조문호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다.

죽지 못해 연명할 뿐이다.

 

주린 배는 채워야 하지만, 이내 체념한다.

 

구걸한 막걸리로 허기를 메운다.

그 술에 종일 땅바닥을 헤맨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진, 글 / 조문호

서울역 광장에 눈부신 햇살이 비치면,

노숙자들 고단한 하루도 시작된다.

 

서울역 김씨는 부랑생활에 이골 났다.

 

오래전 사진 한 장에 거지가 사람으로 찍혔단다.

사진 놔둘 곳도 없지만, 옆 사람에게 자랑해댄다.

 

빵 한 조각 보다 사람대접을 받고 싶단다.

버림받고 살아 사람을 그리워한다.

 

세상은 거리 두라지만, 그들에겐 안 먹힌다.

마스크도 없이 하루 종일 어울린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전염병도 얼씬 못한다.

육신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깊다.

 

따뜻한 말이 듣고싶다. 정에 굶주려...

 

사진, 글 / 조문호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부자나 거지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밥은 먹어야 산다.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노숙인은 어떻게 끼니를 해결할까?
옛날 각설이처럼 깡통 들고 밥 얻어먹으러 다닐 수는 없잖은가?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엔 무료급식이 늘렸으나, 요즘은 대개 문 닫았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노숙인들을 지켜봤다,
다들 어떻게 먹고 사는지 알아 보고 싶었다.
술 마시는 부랑자나 고참들은 밥집을 찾지 않았으나,
시간이 되니 다들 밥집으로 몰려가 줄서기 시작했다.

서울역에서 남영동 방향으로 300미터 쯤에 ‘따스한 채움터’란 밥집이 있었다.
서울시에서 제공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오후 4시부터 밥을 주지만, 3시부터 줄을 서기 시작했다.
평소 보지 못한 노숙인들이 많았는데, 쪽방 사는 분은 보이지 않았다.

관리자의 이야기로는 한 끼에 3-4백명씩 찾는다고 했다.
밥집은 1-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대기실이 식당보다 더 넓었다.
다들 질서정연하게 밥을 타서 먹는데, 음식은 먹을 만했다.
비록 칸막이에 갇혀 개처럼 먹지만, 먹는 시간만은 행복했다.

쪽방에서 라면 끓여 먹는 것에 비한다면 진수성찬이었다.
줄서고 기다리는 게 싫어 대충 때우는 것 같았다.

귀찮아도 먹어야 산다. 그래야 술을 마셔도 버틸 수 있다.
밥은커녕, 안주도 없이 깡술을 마셔대니 어찌 버틸 수가 있겠는가?

밥 한 끼의 행복을 모른다면, 살 자격도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동자동에는 빈민들의 세탁물을 맡아주는 ‘돌다리골 빨래터’가 있다.
2년 전 KT에서 시설을 제공하고 서울시에서 운영비를 대는 빨래터가 공원 앞 건물 1층에 들어섰는데,

손빨래에 의존하던 쪽방 주민으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탁기 진동에 따른 소음으로 지금의 골목 가건물로 이전한 것이다.



난, 대부분의 빨래는 주말에 들리는 정영신씨 집 세탁기에 의존하지만,

공용시설이 생기고 부터 두터운 이불 세탁만 가끔 한 번씩 이용하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두 차레에 불과하지만, 이불 개수가 많아 두 번에 나누어 맡겨야 한다.



겨울만 되면 이불을 나누어주니, 비좁은 쪽방에 이불이 4개나 된다.

딱딱한 나무침대 쿠숀을 겸해 여러 겹 깔아 사용하니, 헌 이불도 버릴 필요는 없었다.




연례 행사처럼 치루는 봄철 대청소가 이번에는 차일피일 미루다 늦어졌다.

코구멍한 쪽방 청소가 큰일은 아니지만, 겨울 내내 밤배연기에 찌든 이불 세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염치 불구하고 침구를 모두 꺼내 맡겼는데, 다음 날 깨끗하게 세탁해 비닐로 포장까지 해 두었다.

모두 공짜라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일하는 분들까지 친절해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덕분에 포근한 이부자리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되었으나,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분들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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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0일 / 서울역 / 추교부

대궐 같은 집에서 진수성찬 받았다.
아름다운 여인네와 사랑도 했다.

역무원 발길질에 단잠을 깼다.
꿈도 꿀 수 없는 팔자다.


사진, 글 / 조문호

꿈은 아래 이덕영씨가 꾸었고, 윗 사진은 최근 찍은 추교부씨



2016년 10월 4일 / 서울역 / 이덕영

2016년 11월 29일 / 동자동 / 이기영



왜 영악하게 살지 않았냐고 탓하지 마라.
왜 악착같이 벌지 않았냐고 탓하지 마라.

내 비록 빈 털털이라 멸시 받고 살지만,
그렇게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돈에 고개 숙이거나

돈에 영혼을 팔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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