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들은 페이스북 Designersparty 사진첩에 올라 온 사료들을 스크랩했다.

이경모선생이 기록한 사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라이프지 기자들이 촬영한사진이다.

 

여순사건은 19481019일부터 1027일까지 전남 여수시에 주둔하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을 중심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남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 명의 민간인이 살해 당했고, 정부측 진압 군경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했다.

 

여수중학교 교감 송욱 때문에 많은 어린 학생들이 좌익화 되었다. 골수 좌익화된 여학생이 시내에 진입한 국군들을 유혹해서 허벅지에 숨겨둔 총신을 짧게 자른 칼빈소총으로 사살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에 많은 어린 여학생들이 용서 없는 죽임을 당했다.
광양 1948년 10월. 경찰은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은신하고 있던 김영배(당시 21세)도 그런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내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 / 이경모사진
1948년 10월 여순사건 사진. 반군과의 교전에서 희생된 경찰공무원 남편의 시신을 찾아 나선 아낙네. / 이경모사진
반군에 의하여 살해된 양민의 시신 앞에서 애통하는 부녀자들.

 

여수시내 수색중 저항하다가 체포된 어린 여학생들.
1949년 1월, 벌교 주민들이 호남지구 반도귀순촉진위원회 벌교지부가 게시한 귀순 촉구 공고문을 읽고 있다
포로가 된 반군 동조 부녀자들.
진압군에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양손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 주민들.
여수순천반란 진압과 좌익숙군의 핵심인물들 - 악질 친일파 백선엽, 이후락, 김창룡등
머리의 흰 띠는 반란군과의 구별을 위해서 표시한 것이나 일부 국군 토벌대 [광주주둔 4연대-14연대의 모체]가 반란군과 합류해서 아무런 구별의 의미가 없어졌다.

 

지휘관 잘못만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공비화된 전 14연대 소속 국군들.
미군 고문관에게 호소하고 있는 부녀자들.
국군이 처형한 좌익들, 웃옷을 벗기고 총살했다.
여수 시내수색에서 체포된 통비분자들- 김지회가 지휘하는 일천여명의 주력은 이미 여수를 빠져나가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작전수행중 주먹밥으로 한끼를 때우는 국군병사.
왼쪽 등을 보이는 자는 토벌여단의 지휘관 송호성,. 앞은 경찰서장 [또는 도경정보과장,] 그 오른쪽은 군산에서 내려온 12연대 백인엽 소령.
국군이 작전을 펼치는 동안 불안한 주민들...쫓기는 자 가운데 내 식구와 친지가 있다..
국군이 여수를 탈환한 후 원인모를 큰 불이 났다. 경계근무중인 국군.
재판장으로 향하는 반군 동조자들과 그 가족들.
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란군으로 의심되는 좌익분자색출 작업중.
여순사건 희생자 주검 앞에서 아낙네가 가족을 찾고 있다.
1951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생포된 빨치산 / 이경모사진

빨치산이 생겨난 배경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나타났는데,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한 후 러시아 공산당은 세계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5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나라를 이끌어갈 뚜렷한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북조선에는 북조선분국을 두게 되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 도시 일반 근로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서민생활을 급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선동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하고 있을 정도로 공산주의는 해방 이후 나라의 주도권을 선점하였다.

한편 한반도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따라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정권이 탄생하였고, 극심한 혼란과 대립의 격랑을 겪게 된다.

빨치산의 시발점

194512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었다. 남한의 우익세력은 반탁을, 박헌영을 중심한 좌익 세력은 찬탁을 외쳤고, 이후로 남한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19467,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써 갚자.’는 폭력전술,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면서 각종 반정부활동을 전개해나갔다.

1946923일 공산당은 흉흉한 민심을 선동하여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철도노조의 총파업을 일으켰고,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 전평)의 주도하에 대구 10.1 폭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남한 전체에 미군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퍼져나갔다.

미군과 경찰이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수배하자, 이들은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숨어들어 우리나라 빨치산의 시작인 야산대(野山隊)’를 만들었다. 뒤에 이들은 ()빨치산이라 불렀다.

 

194827, 남한만의 단독선거 5.10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은 당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로당은 경찰이 빠르게 진압한 것에 놀라 앞으로의 5.10 선거 반대투쟁은 육지에서 떨어져 진압이 어려운 제주도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48,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함을 목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다. 1947년 가을부터 무장폭동을 준비하고 있던 인민유격대는 전면적인 무력투쟁을 펼쳤다. 육군본부에서는 제주 폭동 진압을 위해 여수 14연대에 진압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의 주도로 남로당 50여명이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들은 여수 시내에 있던 6백여 명의 좌익 세력과 합류하여 여수 시내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군 좌익 세력뿐 아니라 지방 좌익 세력과 동조자들이 가담함으로써 그 세력은 여수에서 순천까지 확대되었다. 사건 발생 8일 만에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일부 반란군은 백운산을 경유,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여 빨치산 부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산을 타고 북한과 연락하면서 수년동안 정부에 계속 저항했다. 입산 이후 전술을 장기 항전으로 결정하고, 월동을 위하여 흩어져 지내기로 하였다. 반란군은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 곡성, 광양, 무주, 장수, 남원, 거창, 산청, 함양, 진주, 하동에 출몰하여 관공서 습격, 방화, 약탈, 살해, 납치 등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낮에는 대한민국 치하에 살고, 밤에는 반란군의 치하에서 생활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빨치산의 재조직

1950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 9,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단행된 한국국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에 의해 전선이 급속하게 북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퇴로가 막혀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낙오부대와 패잔병들의 상당수가 각 지역의 산악 지대로 잠적하여 그 곳에서 지방 빨치산 부대들과 합세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비정규전을 위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지역 교란 활동을 계속하였다. 비정규전 부대의 규모는 38도선 이북 지역에 약 10,000, 38도선 이남 지역에 약 15,000명 정도였다. 지리산은 빨치산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세력과 규모가 대단했으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빨치산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이었다.

빨치산의 최후

빨치산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195010월 빨치산 소탕을 위해 11사단을 창설하였다. 19513월에는 3개 사령부를 신설하였고 1126일에는 백야전사령부를 설치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을 거친 후 빨치산은 대폭 감소하였다. 이때 빨치산은 큰 타격을 받아 대부분 사라지거나,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여 자수하는 자가 많았다. 당시 빨치산 중에는 수많은 양민이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이념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거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한 것이었다.

19537월 휴전 이후 빨치산은 이현상을 탄핵, 사살했으며 그의 사후 지리산의 빨치산은 완전히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과 덕유산 등을 떠돌며 산짐승 같은 생활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고, 병으로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갔다. 매년 겨울을 보내고 나면 그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631112일 새벽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의 체포로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다.

학교 창고에서 반란군의 사격으로 집단 총살된 시체가 쓰러져 있다. 창고벽에 무수히 나 있는 총탄 자국이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여순반란 사건 첫날 400여명의 우익인사와 가족이 학살당했으며, 이틀 동안 여수 경찰서에서만 경찰관 59명, 경찰관 가족 40명이 학살당했다
인적 끊어진 시가지에 쓰러진 우익인사. 며칠이 지났건만 좌익들 눈이 무서워 아무도 치우지 못했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여순 반란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왼쪽) 소령이 송호성 사령관(담배 문 이)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 복귀 뒤 남로당 군사책의 혐의로 숙군작업에 걸려들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194810월 숙군 작업이 펼쳐지기 직전 박정희의 모습이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를 변화시켰다. 하나는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분법적 사회구조이다. 반공주의는 누구나 쉽게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분법적 사회구조는 무엇일까. 모든 것을 옳거나 그름으로 판단했다. 옳음의 기준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이 되었다. 그런 개연성이 있는 사람마저 으로 간주했다.

으로 간주한 국민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 권력이 동원되었다.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탄생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1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문에 어울리지 않는 사회 변화에 국민들도 빠져들었다. 이승만 정부의 왜곡된 세뇌는 여순사건 자체를 거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했다. 여순사건을 말하는 것은 용공주의자이며 빨갱이이며 이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오롯이 이승만 정부에만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더 고착화되었다. 세간에 박정희가 여순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박정희는 빨갱이탄압에 더 열을 올렸다고 한다. 그중 여수에서 풍문으로 전해지는 것은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다.

이우헌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인물이다. 1963년에 있었던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처음 실시한 국회의원 총선거이다. 부연설명하자면, 당시 여수지역구에는 유경식(1911년생)과 이우헌(1902년생)이 민주공화당 공천을 신청했다. 유경식은 여수에서 유명했던 제중의원 원장으로 의사였다. 지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경식이 공천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 이우헌이 공천을 받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와 이우헌의 관계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옮겨보면, “1948년 여순사건 발발 당시 박정희가 14연대 대위였으며, ‘반란의 주모자로 쫓기던 중 이우헌이 집에 숨겨주어 살아났다. 그리고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보은차원에서 이우헌을 공천했으며,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풍문이다.

박정희가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참여하여 언론에 노출된 것은 평화일보가 유일하다. 그리고 호남지구 작전참모로서 작전회의를 하는 사진도 남아 있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기자회견이 보도된 다음 날인 1111일 박정희가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울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박정희가 사형을 언도받고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풀려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육군참모총장 송호성 장군과 Col. Hurley B. Puller 여수-순천 상대역

송호성 장군은 함경도 함주에서 출생했다. 함경도 흥남에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913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2]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기병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한 그는 대한독립군에도 투신한 적이 있으며 1942년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제5지대장을 지냈다.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이었던 만큼, 해방 이후 김구계열로 분류되었다.

대한독립군 시절 홍범도, 김원봉 등과는 대립하는 등 독립운동 역사의 비극을 겪기도 한 있는 그는 광복군 훈련처장을 거쳐 광복군 지대장을 역임하였다.

194612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초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정부 수립후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의 한 사람이다.

1946년에 귀국하여 광복군 출신으로는 드물게 유동열이 미군정의 통위부장에 임명된 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19461213일부터 만주군 출신이었던 원용덕의 뒤를 이어 국방경비대 육군총사령관을 지냈다.

1948615일부턴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정부수립 후 초대 육군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된 후 보여준 군사적인 능력은 그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

광복군에서 참모장으로 송호성과 함께 복무한 이범석은 반공적이지 못한 인물이라고 여겨 엄청 싫어했다. 사실 이범석과는 광복군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정적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송호성의 배경은 유동열이었으며 이범석은 기존 임정 세력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범석은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었고 광복 이후에는 김구 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그러나 최근들어 그 평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는 아래 여순반란사건을 참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국군의 광복군계의 송호성의 등용은 광복군계 중용을 통한 군의 정통성 확립과 광복군의 중국군 계를 끌어안기 위함이었다.

19481210, 이응준·채병덕·김홍일·손원일과 함께 국군 최초의 준장이 되었다.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그의 납북사실 때문이었다.

 

이범석은 송호성이 아닌 지휘체계상의 지휘를 받는 군인들과 직접 협의하였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 작전참모 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진압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국방부 장관 이범석과 직접협의하며 진압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였다.

 

국방경비대를 기른 아버지 송호성 등은 가능하면 희생을 작게 하며 은밀하게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송호성은 확성기를 가지고 반란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최전선에 나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청년애국장병들이여! 총을 버려라! 국방군끼리 싸울 때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않았다! 나의 생명을 걸고 제군의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울면서 반란장병들에게 호소했다.

 

송호성은 진격하는 도중 여수 북방 약 8km 지점의 미평리 근처에서, 매복 중이던 반란의 주역 지창수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는다. 이때 송호성은 반란군의 기습에 고막이 터진다.

 

육군 총사령관 직위에서 밀려난 이후에는, 통위부 차장(19486), 19493월 호국군 사령관, 육군 제5사단장(1949512), 1949712일을 기하여 육군 제2사단장(육군 태백산지구 전투사령관 겸임),
19502월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19505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 이후 1950610일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을 역임하였다.

김구의 측근으로, 김구의 암살과 함께 권력에서 밀려나며 1950512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해 남하하지 못하고, 납북되었다.

1953년 인민군 해방전사 여단장을 지냈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을 지냈다. 19565월 중순 송호성은 재북인사로서 내각청사에서 김일성주석의 접견했으며 또 195710년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뎐 중 김일성주석을 다시 만나 조국통일에 앞장서 달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는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58년 평남 양덕으로 유배되었고, 1959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하였고,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은 그를 기려 조국해방 45돐이 되는 때에 조국통일상을 수여하였다

 

 

광양 백운산 1948년 11월 공비가 됐다가 다시 붙들려 온 과거의 동료 전우들을 진압군이 감시하고 있다.
1948년 10월 여수서국민학교 교정. 사태진압에 나선 국군들이 반란폭도와 양민을 가려내기 위해 주민들을 한곳에 모아 놓았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혐의자로서 이들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 이경모사진
이경모 사진
이경모 사진
이경모 사진
이경모사진
이경모 사진

 

194827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전개.

/ 1948226

유엔 임시총회에서 미국측의 '가능지역 총선거안'이 가결, 남한은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510일 단독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정.

/ 194843

제주 4·3사건 발생. 미군이 진압 개시.

/ 194854

현지 모집 인원과 광주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 800여 명으로 여수 14연대가 창설.

/ 1948101

여수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구속.

/ 19481019

여수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 남조선노동당 일원 지창수가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하며 부대를 장악.

/ 19481020

지창수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여수 읍내로 진격해 관공서와 주요기관 장악하고 이어서 순천을 점령.

/ 19481021

반란군이 남원·구례·보성을 장악. 친일파를 처단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처형.

정부, 광주에 반란토벌사령부 설치.

/ 19481022

반란군이 여수·순천·고흥·보성·광양·구례·곡성 지역 전체를 장악.

정부군,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 순천으로 진격하여 저녁 무렵 전역을 탈환.

/ 19481024

정부군, 여수 전역 탈환.

/ 194812

이승만 정부, 국가보안법 제정.

/ 19492

여수·순천 지구 계엄령 해제.

/ 19494

여수 반란군 주도급 인물 모두 사살.

/ 19499

이승만 정부,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을 공포. 중고등학교에 학도호국단 창설.



지난 주말의 광화문 광장은 검찰 개혁을 지지하는 목소리와 윤석열을 응원하는 상반된 주장의 집회가 열렸다.




'검찰개혁 광화문탈환 촛불문화제'에서는 "윤석열 사퇴와 정치검찰의 퇴출"을 주장하며 검찰인사를 환영했고,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에서는 검찰 인사를 규탄하며, “윤 총장이 일을 못하도록 손발을 잘랐다"는 것이다.




입 아픈 논쟁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유령을 보는 듯한 행군이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생각만 해도 이 갈리는 친미와 친일의 앞잡이가 아니던가?
부관참시해도 부족한 놈을 우상화하는 패거리라면, 분명 정상은 아닐 듯싶다.




이승만은 미국 놈에 달라붙어 숱한 양민을 학살한 독재자고,

박정희는 일본 놈한테 충성을 명세한 독재자가 아니던가?




남노당 전력이 있는 박정희는 사형선고까지 받고도 살아났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빨갱이가 빨갱이로 몬 학살에도 앞장섰다.

쿠데타로 장기 집권한 폭압의 세월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아직까지 박정희 잔재가 살아 꿈틀거린다는 것 자체가 소름끼친다.
그 패거리가 바로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를 굴비로 묶은 ‘우리공화당’이다.
악의 싹은 미리 잘라야 한다.




그들의 시위 행진은 마치 군부대 사열을 보는 것 같았다.
군중을 선동하는 군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조기는 물론이고 트럼프 동상까지 등장했다.
나라를 미국에 팔아먹겠다는 말인가?




치매 끼 있는 노병들의 완장놀음 같아 웃음이 절로 났다.
요즘처럼 재미없는 세상에 이런 코미디 구경거리가 어디 흔하던가?
그런데, 매주 쏟아 붙는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박정희가 죽을 때 스위스은행에 숨겨두었다는 비자금이라도 찾은 것인가?




그래서 잘 못된 역사는 철저하게 파헤쳐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전력과 남노당과 관련된 배경, 학살사건에서의 행적,
김재규 총 맞을 당시 숨겨 둔 비자금 등 모든 것을 조사하여 밝혀야 한다.
박정희의 유령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3일 정오 무렵,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는 오찬회가 인사동 ‘가회’에서 열렸다.
‘도서출판 답게’ 장소임씨가 매년 이맘때면 오찬자리를 만들어 강민선생을 비롯하여 친구 분들을 모셔왔는데,

그 날은 강 민선생과 장소임씨를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시인, 소설가 김승환선생, 아동문학가 정두리씨,

민속학자 심우성선생, 문학평론가 구중서선생, 시대의 협객 방동규선생 등 모두 열 분이 모이셨다.

난, 그 자리에 끼일 군번은 아니지만, 모처럼의 인사동 터줏대감 회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제대로 차린 밥상을 대할 수 있는 호사도 누렸지만...

마침, 강민선생 옆자리에 앉게 되어, 선생의 핸드폰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핸드폰 창에 소설가 이국자선생의 생전 모습이 떠 있었다.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지가 8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리워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토록 못 잊어 그리워하는 님을 둔 사모님이 더 부러웠다.

10여 년 전 양평에 사셨던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 뵈었는데, 인자했던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손수 끊여주신 된장국 맛과 방문 앞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 꽃의 기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래서인지 목련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구수한 된장국 맛이 잘 어우러진 그런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준비한 생일 케익을 자르며, 강민 선생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나누는 대화라고는 대개 그렇고 그런 말씀이셨다.

이제 말년에 접어들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복되는 삶을 되 뇌일 필요도 없었을 게다.

그런데, 그 날은 조선의 주먹으로 통했던 방배추선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화기애애했다.

선생의 자선전을 읽어 대개 아는 사실이지만,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와전된 이야기라지만, 깡패 열 일곱 명을 한 판에 때려 눞혔다는 이야기와,

친구이신 백기완선생과의 첫 만남에 빰을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했다.

백기완, 황석영선생과 함께 조선의 삼대구라라 불리지만, 그런 호칭을 들을 만 했다.

주먹이 먼저라는 말이 있듯이, 다른 이야기보다 주먹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었다.

찻집인 ‘인사동 사람들’로 옮기다 연출가 기국서씨를 만나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지만,

다들 반갑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강 민선생님의 생신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어 오래 오래 인사동을 지켜주시길...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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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김승환, 박정희, 강민, 추은희, 심우성, 장소임, 채현국, 신경림, 김희연, 장경호씨, 앞엔 조문호



인사동 아리랑을 노래하는 시인 강민선생의 생신기념 오찬회가

지난 3일 인사동 가회에서 있었다.

 

끈질긴 감기로 어렵사리 나갔더니, 인사동은 완연한 봄 날씨였다.

옷을 너무 두텁게 입고나와 걱정스러웠는데, 뒤에서 누가 쿡 찔렀다.

돌아보니, 그림 그리는 장경호씨였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재환선생 전시 때문에 일찍 나왔다는 것이다.

나도 깜빡 잊어버린 일을 새겨 주었는데, 시간이 남아 함께 갔다.

 

가회오찬장에는 인사동 터줏대감들께서 여럿 나와 계셨다.

강 민선생을 비롯하여 신경림, 박정희, 추은희 시인, 소설가 김승환,

김희연선생, 민속학자 심우성선생과 요즘 유명세를 타는 채현국선생,

도서출판 답게장소임대표 등 아홉 분이 자리하고 계셨다.

본래 2월이 생신이었던 강 민선생께서 따뜻한 3월로 바꾸셨다는데,

답게출판사 장소임씨가 매년 생일 오찬회를 마련해 왔다는 것이다.

 

풍성한 음식에 배 두드려가며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뜻밖의 사실도 알았다.

한 때 탄광을 운영하신 채현국선생의 말씀으로는,

그 당시 회사 경리직원이 지금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소임씨라는 것이다.

회사에 강도가 들어 와 금고에 있는 돈을 털어 달아나려는데,

죽을힘을 다해 돈 보따리를 잡고 늘어져 기어이 뺏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용감한 소녀로 알려진 일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으신 채현국선생과 신경림선생은 키가 엇비슷하다,

궁금증이 발동해 어느 분이 큰지 여쭈었더니, 신경림선생께서 좀 더 크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민 영시인도 키가 작은 분이나, 그중 나아 항상 어깨에 힘을 주셨다고 했다.

! 그런데, 두 선생님을 나란히 세워 확인하는 사진을 찍는다는 게 깜빡 잊었다.

 

가회입구에서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강 민, 김승환, 신경림, 장경호씨만 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재환선생의 전시 개막식에 가려면 시간이 남아 예당에서 한 잔 더 하실 모양이었다. 

감기로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인사동 거리나 쏘다녔으면 좋으련만,

시간만 죽이다 학고제 가야 했다.

 

강 민선생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사진,/ 조문호












































 


팔순에 이른 여섯 문인들, 지난 세월을 詩로 노닐다 어느덧 소년·소녀가 됐다

 

강민 시인 시선집 ‘외포리의…’ 출간회서 해후

팔순의 벗들이 오랜만에 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신경림 민영 황명걸 박정희 서정란 시인과 극작가 신봉승 등이 그들이다. 우리네 세는 나이로 팔십을 넘겼거나 팔순 언저리에 도달한 이들이다. 모두 한 세월 건너오며 이름을 날린 문인들이라는 점도 같다. 벗 강민(81) 시인의 시선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참으로 긴 세월의 고개를 넘어왔구나/ 굽이굽이 80굽이/ 험하고 눈물 많던 고개, 고갯길/ 한 많던 굽이길, 가시밭길/ 그 길을 이렇게 쉽게 넘다니/ (중략) / 그 많던 동반들/ 아리고 아픈 내 사랑, 풀꽃 노을에 타버린/ 아리고 아픈 내 사랑/ 따뜻했던 피붙이, 그 친구, 그 여인들/ 이제는 손 놓고 떠난 이들/ 그 문 들어서 이제는 꿈의 본향 찾았는가”


팔십이 넘은 연치에도 견결한 문장이 돋보이는 강민의 ‘산수령(傘壽嶺)’이다. 1962년 ‘자유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시 동인지 ‘현실’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세대는 일제 강점기에 성장기를 보내고 청년기에 6·25전쟁을 겪었으며 팔팔한 20대에 전후 황폐한 1950년대를 보냈다. 이어 4·19, 5·16, 10월유신,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의 역사적 현장을 온몸으로 통과해 왔다. 이미 그들 표현대로 ‘저 위로’ 떠나간 이들이 더 많다. 이날 인사동에 모인 이들은 지나온 세월 막역하게 부대껴온 몇 안 남은 벗들이다. 강민 시인은 모두에 이런 인사말을 했다.

강민 시인의 새 시집을 축하하기 위해 모처럼 서울 인사동에 모인 팔순의 벗들. 왼쪽부터 강민

신경림 박정희 시인, 극작가 신봉승, 민영 황명걸 시인. 민영 시인은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 다 먼저 가고 이만큼만 남았다”고 웃었다.


“중학교 6학년, 요즘 학제로는 고3 때 6·25를 만났습니다. 피란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이여 안심하라고 방송하더니 자신은 대전 부산으로 도망가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해버렸습니다. 남은 이들은 발이 묶이고 무심히 다리를 건너던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물속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날 대한민국호는 이미 침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 살아온 세월은 늘 배멀미를 하듯 어질어질했는데 세월호 참사에서도 여전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니, 대체 달라진 게 무언지 답답합니다.”

그는 1950년 8월 또래의 인민군을 만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밤을 밝히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경안리’에서라는 시편에 적었다. 서로 적의는 없었다. 북에서 고급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로 끌려나왔다는 ‘그’에게 ‘나’는 철없이 “북이 쳐 내려오니 남으로 달아나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서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하염없는 얘기로 밤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에 그는 떠났다/ ‘우리 죽지 말자’며 내밀던 그의 손/ 온기는 내 손아귀에 남아 있는데/ 그는 가고 없었다/ 냄새나고 지치고 더럽던 그의 몸과는 달리/ 새벽별처럼 총총하던 그의 눈길/ 1950년 8월 경안리/ 새벽의 주막 사립문가에서 나는 외로웠다”(‘경안리에서’)


강민 시인은 그때 이별의 인사말로 나누었던 “우리 죽지 말자”는 다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해 서럽다고 했다. 전후 폐허의 거리에 청춘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당시 문인들의 무대는 그나마 얼기설기 엮은 폐허의 건물더미 사이에 자리 잡은 명동의 술집과 음악다방이었다. 이날 어렵사리 만난 벗들도 그 시절 명동을 누비던 추억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었다.

민영(80) 시인이 시를 읊듯 말했다.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 아름다운 친구들이 다 먼저 가버렸어. 강물을 지나서 바닷속으로 빠져버렸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도에 쓸려서 없어지고 말았어. 여기 온 사람들 몇 명만 남았어.”

강민 시인은 그들이 명동 시대에 이어 인사동을 누비던 시절을 추억하며 이렇게 적었다.

“늘 다니던 길인데/ 갑자기 물감을 뿌린 듯/ 내 눈에는 이상한 필터가 걸린다/ 동서남북이 분별되지 않는다/ / 그이가 떠난 여기는/ 스산한 여기는/ 내 마음의 황무지// 가면을 쓰고/ 물구나무 선 이들이 다가온다/ 그리운 이들이 나비처럼 춤을 춘다/ 황혼을 마신 이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갈 길 잃은 내가 헤매고 있다”(‘인사동 아리랑 4-황무지’)

연전에 아내마저 떠나보낸 강민 시인은 그리운 이들이 모두 떠나간 곳은 ‘황무지’라고 썼다. 노경의 시인들이 실감하는 삶의 무게와 헛헛함이 생생한 자리였다. 이날 팔순의 벗들은 너나들이하며 소년 소녀들처럼 들떠서 떠들었다.

세계일보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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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시인들 “읽어도 이해안되면, 詩 아니다”

 

신경림 등 원로시인들 쓴소리

 

▲  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강민(윗줄 왼쪽 첫 번째)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 기념회에서 신경림·민영·황명걸 시인, 신봉승 작가(윗줄 왼쪽 두 번째부터 시계방향으로) 등이 시 낭송을 듣고 있다. 서서 시를 낭송하는 이는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 김선규 기자 ufokim@munhwa.com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난해한 시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밤중에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거랑 같아요.”

시를 읽지 않는 시대다.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원로 시인들은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9일 강민(81) 시인의 새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을 축하하기 위한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다.

이날 자리에 모인 신경림, 민영, 황명걸, 구중서, 서정란, 박정희 등 원로 시인들은 새 시집에 대한 얘기에 앞서 독자들과 멀어지고 있는 현 한국 시단의 흐름에 쓴소리를 했다.

신 시인은 “최근 나오는 시들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읽었을 때 이해가 안 되는 시는 시인 스스로가 무엇을 쓰는지 모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시 쓰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일반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무엇인가를 계속 요구하는 비평가들 때문에 영국프랑스의 시 경향이 지나치게 난해해졌고, 결국 독자와 호흡하지 못한 채 망가져 버렸다”며 “우리도 이들의 경향을 따라 해석이 안 되는 시들을 쓰려 하지만, 각 나라에 맞는 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 시인은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결국 말로 하는 것이고, 말은 통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며 애정 어린 조언도 남겼다.

강 시인 또한 “김수영 시인도 1950년대 모더니즘을 추구했지만,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난해한 시를 썼던 ‘후반기’ 동인에 대해선 ‘그건 시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며 “읽히는 시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민 시인은 “후배(시인)들이 정성이 담긴 시를 썼으면 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시를 쓰면서 10번은 더 고치고, 잡지사에 보낸 후에도 다시 가서 고쳤던 기억이 난다”며 “시 한 편을 쓰더라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자리에서 원로 시인들은 함께한 지 50년이 된 만큼 첫 만남, 동인 활동 등 추억도 자주 꺼내 이야기했다. 이경철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교수는 “6·25전쟁, 4·19혁명, 군사독재 등 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서온 원로 시인들의 경험이 그냥 잊혀서는 안 된다”며 “문단에서 원로들과 현 활동 문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만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mail 유민환 기자 /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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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시]

 

그을린 도심의 빌딩 위로

창백한 초승달이 떠 있다

피곤한 시민들의 우수가 떠 있다

분노가 떠 있다

 

-강민의 '만추' 중

 

 

 

 

숨막히게 더웠던 지난주 어느 날,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강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외포리 갈매기’가 나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소감을 말하라자 시인은 뜬금없이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동네 교회를 지킨답시고 피난 행렬에 끼지 않았다. “그때 (정부가) 이런 방송을 했습니다. ‘서울 시민이여, 안심하라.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얼마 후 한강다리를 폭파시켰습니다.” 단어가 주는 뚜렷한 기시감에 자리는 일순 침묵에 빠졌다. 차가운 바닷물을 보며 뿜어냈던 분노와 다짐은 어느새 폭염 속에 녹아 일그러지고 있었으나, 백발의 시인은 여전히 파랗게 분노하고 있었다. 윗글은 ‘외포리 갈매기’에 수록된 첫 번째 시 ‘만추’의 마지막 연이다.

 

한국일보 /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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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인사동 아리랑 6 -세모(歲暮)

 

강 민

 

눈이 내릴 듯
우중충한 하늘이 겨울 햇살을 가린
인사동 뒷골목을
약속도 없이 배회하고 있다
섣달그믐이 내일인데
이제 곧 질곡의 경인년은 가고
새해가 온다는데
이 굽이에선 작은 꿈이라도 영글려나
흑룡(黑龍)의 임진년이 온다는 날

 

-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푸른사상)에서

 

[한겨레신문]

강 민선생의 시집 ‘외포리의 갈매기’ 출간에 대한 기자간담회가

지난 7월9일 정오 무렵 인사동 ‘포도나무집’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인사동의 원로시인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문학평론가 구중서, 극작가 신봉승, 시인 민 영, 신경림,  황명걸, 맹문재, 박정희,

서정란, 이경철씨와  문화일보 유민환기자, 세계일보 조용호기자,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등

일간지 문학담당 기자 7명이 참석하여 오찬을 겸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강 민 선생께서는 시집출판에 대한 인사말에서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라 했다면서 세월호 참사의 동질성을 질타했고,

신경림선생께서는 시집출간을 축하하는 격려 말씀을 주셨다.


 

시인 민 영선생에 이어 맹문재씨가 낭송한 강민선생의 “명동, 추억을 걷는다” 시 한편을 옮긴다.

 



명동, 추억을 걷는다.

2007년3월29일, 오전 11시40분경
약속 시간이 남아
내 추억의 앨범에는 없는
낯선 명동을 걷는다.
2,30대의 우리가 거의 날마다 들려
헤매던 거리와는 완전히 달라진
화려하게 분칠한 명동을 걷는다.

지하철 명동역에서 내려 충무로를 가로지르려다
문득 태극당 앞 건물 지하에 있던 [음악회관] 생각이 난다.
건장한 체구의 노익장이셨던 첼리스트 김인수 선생이 운영하시던
거기서 천상병을 위시한 우리는 무척 선생의 속을 썩혀 드렸다.
이추림, 김희로의 [오시회/午時會]도 여기서 주로 모임을 가졌었지
충무로에 들어선 김에 우측으로 돌아 명동성당 길로 발길을 옮긴다.
길모퉁이, 여기 쯤이던가
이산 김광섭 선생이 내시던 문예지 ‘자유문학’사가 있었지
편집을 하던 이는 시인 김시철, 또 다음에는 소설가 박용숙이었던가
거기를 통해 남정현, 최인훈, 송혁, 남구봉, 권용태, 황명걸 등이 등단했고
아니지 결국 나도 그리로 등단하지 않았던가
조금 내려가니
우측에 빈대떡집 ‘송림’, ‘송도’ 자리가 보인다
아나운서 유창경, 소설가 정인영, 송기동, 시인 김춘배, 출판편집인 김승환, 김상기 등이
때로는 거의 고장 난 고물 시계를 맡기고 외상술을 마셔도
싫은 내색도 없이 오히려
“너희들 술 좀 작작 마셔라. 몸 상할라”
염려하시던 주인아줌마들...
70년대 어느 날에는 ‘겨울공화국’에 쫓기는 양성우 시인과 야인 백기완과
여기서 급한 회포를 나누기도 했지
아, 잊을 수 없다. 그때 쏘아보던 양성우 시인의 새파란 야수 같은 눈빛!
폭격으로 페허가 된 건물 지하에 수십 집이 얼기설기 칸을 막고 영업을 해서
우리가 ‘아방궁’이라 불렀던 곳에는
이제 이름 모를 큰 빌딩이 치솟아 있고
박성룡, 이규헌, 이일, 이창대, 김관식, 이현우, 송혁, 신기선, 송영택 등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 동동주라는 카바이트 술을 마시던
언덕배기의 ‘몽파르나스’는 이일 시인의 명명(命名)이었던가
이현우가 자주 노숙을 한 공원이었던 제일백화점 자리는 흔적도 없고
그 앞에 있던 음악감상실 ‘돌체’, ‘엠프레스’
폐질환으로 파랗게 질린 표정의 천재 화가 김청관을 비롯한 박서보, 문우식, 최기원 등의 화가며 조각가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거기서 DJ 역할을 하던 나중에 ‘조선일보’문화부장을 한 정영일 생각도 나고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쌍과부집’은 알콜 중독의 천상병이 주기(酒氣)가
떨어지면 가서 큰 유리잔으로 막소주 한 잔을 홀짝 마시던 곳이었지
다시 명동의 본길로 돌아와 복원 중인 ‘국립극장’ 쪽으로 걷는다
왼쪽의 화려한 패션 상점 거기에 ‘청동’에서 ‘금문’, ‘송원’으로
이름이 바뀐 찻집이 있었지
늘 그 자리에 눌러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 물며
끊임없이 찾아오는 여학생들의 손을 만지작거리시던
‘청동문학’의 주인이시며 우리 문단의 원로 공초 오상순선생!
거기서 만난 남구봉, 신봉승, 김종원 등의 친구와 멋쟁이 선배 황명, 최재복
그리고 김금지, 최희숙, 박정희 등의 여자 친구들
아, 지금의 내 아내 소국당(小菊當)도 거기에 이따금 출입했었지
그 위가 ‘송원기원’이었는데
우리나라 바둑계를 이끌던 조남철 선생이 운영하시던 그곳에서
민병산, 신동문, 김심온, 신경림, 황명걸, 이시철, 김문수 등을 만났다.
겨우 두 집 내면 사는 정도밖에 모르는 내게
조선생은 떡 8급 딱지를 붙여 주시고...
네거리에 서면, 국립극단 초년생으로 무대에 섰지만, 열정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김금지의 ‘만선(滿船)’ 무대 연기가 생각난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을지로 쪽으로 꺾는다
텔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그 유명한 목로‘은성‘
그 자리 앞에 선다.
그 집의 벽화로 불리운 명동백작 이봉구선생, 박봉우, 문일영, 김하중, 이문환 등의 시인 묵객들...
모두가 그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 앞집이 ‘몽블랑’이었다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은 영화감독 김소동 선생이 늘 진치고 계시던 찻집
어려서부터 영화에 미쳐서 그 길로 가려고
서라벌예대 첫해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려는 나를 극구 말려 동국대 국문과로 돌려놓으신 선생님!
여기서 문득 내 추억 걷기는 멎는다
약속시간이 다 되고 그 장소가 바로 거기 보였기 때문이다
‘갈채’ ‘코지코너’ ‘동방살롱‘ ’청산‘ ’도심‘ ’문예살롱‘ 등의 찻집과
‘명천옥’ ‘구만리’ ‘할머니집’ ‘도라무통집’ 등의 대폿집...
많은 이들이 가고 명동은 변했다
허지만 아직도 많은 명동 구석구석의 추억을 찾아 나는 또 여기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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