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사의 취미생활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 년에 한 차례씩

방에 있는 물건들을 바꾸어 옮겨가며 주거공간을 바꾸는 일이다.

집이란 게 콧구멍만한 12평짜리 연립이라 옮겨 보았자 그게 그거지만, 기어이 일을 치러야 직성이 풀린다.

이것저것 재고 짜 맞추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 주로 내가 없을 때 해 치우는데,

뒤늦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크고 무거운 짐들을 여자의 힘으로 어떻게 옮겼는지 몰라서다.

책장 옮기는 것은 다반사고 심지어 가구까지 위치가 바뀌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 연립주택은 24년 전 오천만원 주고 산 집인데, 열두 평이지만 아래층 차고 위의

서너평 되는 다락방이 평수에 없는 공간이라 혼자 살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는 집이다.

그러나 내가 들락거리며 서로 걸리적거릴 때가 많고 일하기도 불편해

빨리 동자동 쪽방으로 가라는 말을 밥 먹듯이 해댄다.

조금만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불만도 털어놓지만,

여사님께 딱 맞는 집이라며, 욕심 부리지 말라고 입을 틀어 막아왔다.

 

얼마 전 옆집이 팔천만원에 팔렸다며, 삼천만원 오른 것을 좋아했다.

삼천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24년 만에 집값이 삼천만원 올랐다면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아파트 한 채가 몇 십억씩 하는 미친놈의 서울 땅에 팔천 만원짜리 집이 어디 있겠는가?

그 돈으로 전세방도 제대로 얻지 못한다.

더구나 지하철 역촌역이 집에서 1-2백 미터 거리에 있고, 은평공원이 지척에 있지 않은가?

최고의 교통조건과 쾌적한 환경이라 복중의 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각적 변화를 찾고자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짐을 옮기는 대소동을 벌인다.

얼마 전에는 내가 있을 때 일을 벌여 도와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옮길 자리도 없거니와 어떻게 바꿀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침대 아래쪽 코너에 있던 책장과 오디오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디다 갖다 놓을 거냐고 물었더니, 다 생각이 있다는 거다.

책상 옆에 있는 책장을 비우기 시작해 그 책은 어쩔거냐고 물었더니, 잔소리 말고 큰 짐만 옮겨달란다.

결국 다락방 책장에서 버릴 책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바꿀 때마다 죽어나는 건 죄 없는 책 뿐이다.

한 때는 버리기가 아까워 ‘동자동 사랑방’에 갖다 주기도 하고 더러는 고물상에 갖다 팔았다.

 

그런데, 다락방 모퉁이에 쌓아 둔 액자들이 문제였다.

‘장에 가자’전시를 끝낸 후 정선으로 옮겨야 했지만,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만약 정선에 가져갔다면 이마저 화재의 불쏘시개가 되지 않았겠나?

옆집 주려고 만들어 둔 만지산 사진 액자도 집이 불타 없는데, 어디다 걸어 준단 말인가?

하여튼 정여사의 지시대로 많은 책이 버려졌고, 오디오는 책상 옆 수납장으로 옮겨졌다.

 

이제 마무리 할 일만 남았다.

몇 년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을 비웠으니, 장판도 이어 깔아야 하고 도배도 해야 했다.

도배야 예전부터 잘하는 일이라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조풀칠이란 아호까지 얻었겠는가.

도배지래야 장터사진전 포스터 몇 장이면 충분하고 장판은 다이소에서 산 조각 장판으로 간단히 끝냈다.

 그 좁은공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궁금했는데, 그 곳에 의자를 갖다놓고 책 읽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죽은 공간을 살려 낸 기 막힌 변화인데, 오디오도 눈에 띄는 공간에 옮겨 놓으니 음악듣기도 한결 쉬워졌다.

 

긴 세월동안 반복되어 온 정영신의 돌려치기 공사로는 최고의 공간 활용이며 최고의 취미생활이었다.

 

사진, 글 / 조문호

 

 




추운 겨울 날의 노점상은 안스럽기 그지없다. 
그 자리에 얼어 붙어 미라 될까 걱정된다.

한 할머니는 추위를 못 견디어 은행을 무단 점거했다. 
녹번동 '신한은행' 현금지급기 수위를 자청한 것이다.

다 팔아야 만원도 되지 않는 변변찮은 야채를 펼쳐놓고,

늦으막에 돌아 올 지하철 손님을 기다렸다.


자리 지키기가 껄끄럽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팔아서 손주 용돈 주는 재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별 것 있더냐?

사진, 글 / 조문호




추석 명절에 대한 즐거움도 나이가 들어가며 점차 시들해진다.


어린 시절엔 꿈에도 그리던 명절이 아니었던가?

명절이 다가오면 모처럼 목욕도 하고, 엄마는 기와장 부순 재로 녹그릇 닦는다고 바빴다.
다들 옷에다 신발까지 새것으로 갈아주어, 완전 케이스 갈이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먹거리도 지천에 늘렸었다.





들리는 친척 집마다 좋아하는 제삿밥은 물론 푸짐한 음식을 내놓았다.
대암골 산소에 가도 과실이 늘려있었다.

감나무 과수원이었으니, 감은 말 할 것도 없고, 밤, 대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장난 삼아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형 더러 감나무를 흔들라고 했더니, 진짜 홍시가 떨어졌다,

그런데 입이 아니라 눈에 떨어져, 눈탱이가 밤탱이 된 적도 있었다.
새 옷 버릴까바 얼굴을 풀밭에 비볐던 기억도, 이제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버렸네.





어른이 되어서는 명절만 다가오면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없는 돈에 선물 보낼 곳도 많은데다, 돈 들어 갈 곳이 한 둘이 아니었다. 

또한 고속도로에서 진을 빼버리는, 고향가는 길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늙어버린 말 년에는 그래도 은근이 기다려졌다. 좋아하는 제삿밥 생각에...
제삿밥은 탕국을 잘 끓여야 제맛이 나는데,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듯이 정영신씨도 곧 잘 끓인다.
전라도 여자지만, 경상도식 탕국을 제법 맛 낼줄 안다.  단지 박을 구할 수 없어 무우를 넣었지만...

그런데 동자동에 들어가고 부터는 그 좋아하는 제삿밥을 맛볼 수 없었다.






여지 것 명절 차례는 ‘서울역 쪽방상담소’에서 마련한 공동차례로 대신했는데,
소장이 바뀐 올 해부터, 추석날 지내야 할 제사를 삼일이나 앞당긴 21일에 치러 버렸다.

명절이라 직원들도 쉬어야 겠지만, 그렇다면 주민자치회에 제사를 맡겨야 할 것 아닌가?
이건 사진 찍기 위한 제사지,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주민을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은 부득이 제사상을 차릴 수 밖에 없었다.

장가간 햇님이도 며느리 데리고 온다는데,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누님께서 제사상에 과일이라도 올리라며 보낸 십만 원이 있어,
정영신씨를 대동하여 녹번동 대조시장으로 장보러 갔다.






물가가 높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으나, 진짜 물가가 장난이 아니었다.

병어 한 마리에 2만원이라, 만 원짜리 생선으로 대체하고,
과일 한 알, 나물 한 줌, 전 조금, 구색만 갖추었는데도, 십만 원이 금세 날아가 버렸다.

제사만 아니면, 식당에서 사 먹는 것이 싸게 먹힐 것 같았다.






다들 귀찮아 그런지, 시장에서 산 음식으로 제사 지내는 사람이 부쩍 많아 진 것 같았다.

대목장이라 분잡 서러웠는데, 나물과 전 부쳐 파는 곳은 장사진을 쳤고,

떡집은 불난 호떡집처럼 소란스러웠다.








정지용 시인의 “녹번리”가 적힌 공사장 가림막도 인상적이었고,
한쪽에서는 상인들의 노래 장단이 신바람을 돋우었다.







언제나 대묵장의 북적임은, 사람 사는 맛을 진득하게 느낄 수 있어 좋다.
물건이 잘 팔려, 돈 세는 장꾼 모습까지 얄미우면서도 정겹더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힘이 느껴졌다.






그래도 조상 덕에 제사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했다.
쪽방에서는 제사 밥은커녕, 라면이나 빵으로 해결하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다.  






십만 원짜리 제사상이라 초라하지만, 감지덕지다.
제사는 간단히 지내고, 음식은 햇님이 내외와 네 사람이 먹고 나니 깨끗하게 없어졌다.
좀 부족한 듯 했지만, 최고의 추석 상이었다.






이번 추석은 그래도 괜찮은 장사였다.

과일 사라며 보태 준 돈으로 제사까지 지냈으니 말이다.

평소 먹고 싶었던 제삿밥도 먹고, 아들 내외 밥까지 먹여 보냈으니, 괜찮은 장사 아닌가?

또 보름달은 얼마나 예쁜지, 햇님이가 질투할 지경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이대훈, 노인자씨 내외가 모처럼 우리 집을 방문했다.
가끔 들려 술을 사 주어, 이번엔 우리가 한 잔 대접키로 한 것이다.
없는 살림에 술집으로 모실 수 없어, 참치 두 마리로 안주 삼았다.

코 구멍만한 집이지만, 네 사람이 술 마시는대는 지장없었다.

술상은 초라하지만, 분위기는 더 오붓했다.
아! 그런데 통풍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장사집이 아니니, 한 잔하며 노래 한 자락 뽑을 수 있었는데..
이대감은 내 술까지 다 마셨으니, 이튿날 속께나 쓰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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