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잉태

 Concealed Conception

박설미展 / PARKSEOLMI / 朴雪美 / photography

 2022_1116 ▶ 2022_1122

박설미_은폐된 잉태 26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불분명한 생성적 사진  1. 어둡고 침침한 화면에는 희미한 빛 그리고 희박한 색채들이 안개처럼 자욱하다. 뭉개진 색채의 더미 같기도 하고 대상이 지워진 모종의 흔적을 애매하게, 조바심 나게 안기는 사진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진이 지닌 명료한 지시성이나 재현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검은 덩어리, 유선형의 흔적이 어렴풋하게 화면의 어느 면을 채우고 있거나 그것들이 기우뚱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듯한 착시가 인다. 이른바 둥근 달걀을 촬영한 사진임을 사후적으로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 사진이 닭이 알을 낳으면 보이지 않는 깊숙한 둥지의 내부로 손을 밀어 넣어, 손의 감각만으로 더듬거리면서 따스한 알을 꺼내던 어린 시절의 흥미로운 경험, 기억의 소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 유년의 기억이 상당히 강렬하게 작가의 무의식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완벽한 형태를 지닌 둥근 알, 생명체의 따뜻한 온기, 둥근 알을 조심스레 움켜쥐던 촉각적 경험 등이 오래 살아남아 여전히 작가의 어느 기억과 심성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유년의 경험과 기억으로 형성된 존재들이라 여전히 과거에 의해 자리 매김 된 현재를 사는 이들이다. ●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달걀을 둥지에서 꺼내던 추억을 되살려 이를 작업했다. 그러니 이 사진은 사실 무엇인가를 재현하기 무척 곤란한 작업이다. 유년의 기억을 이미지로 사진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때 사진은 그런 흔적으로만 어렴풋하게 문질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달걀을 손에 잡았을 때의 원초적인 감각, 가장 민감하고 깨지기 쉬운 생명의 벽인 달걀 껍질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공포심, 닭으로부터 알/새끼를 훔친다는 죄 의식 등 여러 혼재된 감정이 얼룩진 기억이자 경험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복합적이고 불분명한 것을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명확한 대상으로 고정시키는 일반적인 사진으로는 분명 부족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좀더 자유로운 표현법을 찾는 한편 중첩된 감정과 생각의 타래를 겹쳐놓기에 다중노출 촬영이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론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설미_은폐된 잉태 05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2. 둥근 알의 형태에는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밀도가 있다. 단단하고 둥글고 매끄럽고 무색인 달걀은 물체성을 최대한으로 살린 조각의 기원이 된다. 둥근 구체에 가까울수록 보다 물체성이 강해지며 시각적으로 단순명료한 것 역시 물체성이 그만큼 강하게 인지된다. 불가침입적으로 불투명성을 띠어야 하고 촉각성이 강하고 검거나 희거나 무채색일수록 물체성이 높아지는 편이라고 한다. 달걀이 그렇고 달항아리가 그렇다. 아마도 작가에게는 이 알이 주는 시각적인 밀도 높은 형태미가 원초적인 미감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알이 지닌 이 형태의 완벽함과 밀도는 깨지기도 쉬워서 매우 역설적인 편이다. 양면성을 지닌 알의 순수한 모순이다. 그와 동시에 알은 생명의 기원이다. 이 신비함은 사실 모든 자연현상에 적용되겠지만 작가의 경우 달걀을 손에 쥔 체험으로 인해 그 경이로움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 작업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흔적을 구하기 위해 달걀 대신 오리알을 사용하거나 혹은 플라스틱 모형에 점토를 덧붙이고 채색을 입히는 등의 처리를 통해 둥근 알의 형태를 만든다. 여기에는 회화적이며 조각적인 행위가 구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대략 오전 12시 전후의 시간대의 자연광에서 촬영하면서 빛의 파장을 섬세하게 담아내고자 했다. 배경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차분하게 자아내며 흡수성이 강한 한지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모호한 사진 안에서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러한 흔적은 또한 앞에서 언급한 의도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달걀에 대한 작가의 추억은 생명에 대한 인식으로도 파생되어 나간다. ● "생명의 온기는 응축된 생성의 에너지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또한, 혼돈과 단절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발아되는 삶의 역동이다. 자연의 경험으로 싹틔워진 온기는 즉각성의 밀도를 띤 아름다운 감정을 솟구치게 하며 내가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작가노트) ● 닭이나 오리 혹은 모든 새의 자궁으로부터 나온 알은 깨어져야 하는 것으로 운명지어졌다. 그래야 하나의 생명체가 가능하며 그것이 존재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손에 쥐어진 갓 낳은 달걀의 온기가 자신에게는 신비로운 체험이었으며 이는 생명체가 지닌 존재의 의미가 급속하게 사라지고 생태계의 위협과 인공지능, 유전자조작과 생명 복제 시대로 치닫는 오늘날 인간의 욕망에 대한 반성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여러 생각들이 지금의 작업을 태동시킨 원인이 된 셈이다.

 

박설미_은폐된 잉태 07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3. 작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히 감성으로 느끼는, 형태 없는 그 무엇을 재현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그 매개는 알이다. 그렇다고 알 자체를 보여주는 일은 결코 아니다. 달걀로 인해 전해진 온기와 생명의 신비, 그리고 그로인해 번지는 여러 상념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명확하게 대상화할 수 없는 감성적 대상을 특정한 매체를 통해 재현하는 것이 예술이고 사진일 수 있다. 여기서 사진은 희박한 과거의 기억과 그 기억 속에 또렷이 남은 감각의 상처, 무의식적이고 직감적인 작가의 감성에 의해 포착된 내재적 존재를 문제 삼는다. 사진은 그 미묘한 작가의 감성적 톤을 떠내는 작업이 된다. 사진적 방법을 이용하는 창작행위를 통해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작업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진은 어떤 조짐이나 기미, 흔적을 지닌 징후로서의 사진이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사진은 불안한 경계로 나뉘고 흔들리며 중첩된 흔적들로 자욱하다. 약간의 차이를 지닌 색들이 불길한 어둠을 가르고 출몰한다. 검은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물체가 설핏 등장하거나 시야를 가로막거나 모서리에 걸쳐있거나 진동하는 듯하다. 통상 사진이 대상을 고정시키는 데 반해 이 사진은 유동적이고 암시적인 모종의 기운으로 채워져있다. 작가가 경험한 신비스러운 느낌의 재현을 위한 모호한 실루엣이고 빛이고 색채이자 덩어리이다. 따라서 관객이 볼 때 이 사진은 알 수 없는 난해한 자취이자 수수께끼일 뿐이다. 여기서 사진은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자리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다중노출 기법 역시 하나이자 모두인,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한 이미지를 한 자리에 중첩 시킨 것이자 동시에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이 한 화면에 지층처럼 포개진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작가의 사진은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 부재와 현존, 보이는 영역과 비가시적 영역이 공존하는 표면이 부유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 이른바 생성적인 사진이다. ■ 박영택

 

박설미_은폐된 잉태 10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생명의 온기는 응축된 생성의 에너지이자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또한, 혼돈과 단절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발아되는 삶의 역동이다. 자연의 경험으로 싹틔워진 온기는 즉각성의 밀도를 띤 아름다운 감정을 솟구치게 하며 내가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진 갓낳은 계란의 온기는 신비이며 관조로 상상된 세계의 위대함 앞에서 두 생명체의 존재 물음이 사라진 내밀한 결합으로 무한으로 향한다. 몸에 흐르는 기억은 삶의 지층이며 무의식의 수맥이 되어 세계를 상상 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한다. ● 현재적 기억은 감정과 감각의 동반이다. AI의 변곡점을 넘어서 일상성에 Al와 함께 호흡하는 지금, 전 인류와의 네트워크 사이에서 오히려 고독해졌다. 고독과 소외에 휩싸여 외로운 군상 속에 내던저져 있음을 인식할 때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평온의 가치와 의미를 잃고 편리를 쫒은 세계는 회색화 되어 불안으로 드러낸다.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써 인간실존의 본래성과 고유성을 찾아 삶을 통찰하게 한다.

 

박설미-은폐된 잉태 15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2022

메마른 감성, 굳어가는 심장을 본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시작된 AI 기술은 급속히 진화한다. 인간과 Al가 공생한다는 이상 아래 AI는 인간의 복제물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AI로 인한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넘어 AI에 감각과 감정을 배양하려는 시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실제, 가상, 모의, 인조의 다중세계로 이끈다.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은 물론 아무런 목적없이 무심히 운행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 섭리까지 위협한다. AI에 대한 성과가 거듭될수록 인간은 환호하지만, 은폐에는 칠흑 속의 악몽이 도사리고 있다. ● 인간은 고유의 시각과 세계를 지닌 의식과 무의식의 존재이다. 인간은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도 판단과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유연성이 있다. 삶, 감정의 흔적을 채우는 숭고한 미지의 여백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사유, 고뇌, 깨달음으로 얻은 묵직한 눈물로 붓칠을 하더라도 죽음의 순간까지도 다 채울 수 없는 미완성의 성역이다. 인간은 AI에 의해 감각과 지각의 잠식으로 인간의 존엄과 신성한 영혼을 점령당하는 것은 아닐까? ● 오늘날 인간은 AI를 잉태하고 AI는 인간을 잉태하고 있다. ■ 박설미

 

박설미_은폐된 잉태 25_피그먼트 프린트_172×115cm_2022

Obscure Generative Photography  1. On the dim screen, faint light and sparse colors resemble a thick fog. Like a pile of crushed colors, a photograph vaguely shows certain traces of the subject being erased. It is far from the clear referentiality or reproducibility of usual photographs. Still, if you look closely, you feel an optical illusion as if black masses or traces of some streamlined shape are vaguely filling a corner of the screen, or they are wandering around in an oblique shape. We realize later that this is a photograph of a so-called round egg. Seolmi Park says that this photograph originates from the recall of memories, an interesting experience from childhood of a chicken laying an egg. She pushed her hand into the invisible, deep inside of the nest, and fumbled with her hand to pull out the warm egg. It seems that childhood memory was deeply ingrained in her subconscious. The perfect oval shape of the egg, the warmth of a living thing, and the tactile experience of carefully grasping the egg—all this has persisted and still lingers in traces of the artist's memory and corners of her heart. We are beings formed by our childhood experiences and memories, still living in the present, set by the past. ● Seolmi Park worked on the photo by recalling her childhood memories of going to a friend's house to play and taking eggs out of the nest.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is photograph is actually a reproduction of something. Is it possible to communicate childhood memories with images or photographs? Perhaps the photograph can only dimly embody traces of reality. It must have been a memory and experience with mixed emotions, such as the primordial sense of holding an egg in one's hand, caution and fear for the eggshell, the most sensitive and fragile covering of life, and the guilt of stealing the egg/baby from the mother hen. Hence, may she not have thought that an ordinary photograph is not up to the job of capturing the complex and ambiguous phenomenon as a distinct object in a square frame? In the process of searching for a method of more free expression, the multiple exposure technique has become an effective and easy methodology for overlapping threads of multi-layered emotions and thoughts.

2. The shape of a round egg has visual density above all else. Hard, round, smooth and colorless eggs are the origin of the sculpture that makes the most of objecthood. The closer it is to a round sphere, the stronger the objecthood becomes, and visually simple and clear things also have a strong objecthood. It is said that imperviously opaque, strongly tactile, and black, white, or achromatic colors tend to have higher objecthood. Eggs and moon jars are just like that. Perhaps to Seolmi Park, the morphological beauty and high visual density of this egg is regarded as the original aesthetic sense. However, the perfection and density of the egg's shape are easy to break, which makes them paradoxical. It is a pure contradiction of an egg with two sides. At the same time, eggs are the origin of life. This mystery actually applies to all natural phenomena, but for Seolmi Park, her wonder seems to have endured long after holding an egg. Looking into the work process, the artist first models a round egg shape by using a duck egg instead of a chicken egg to obtain the desired image/traces, or by adding clay to the plastic model and coloring it. A pictorial and sculptural act is involved here. And she shoots it in natural light around noon to capture the wavelength of light delicately. For the background, hanji, Korean traditional handmade paper with good absorbency, is used to create a soft, gentle atmosphere. But it is difficult to distinguish all of these in the overall blurry and ambiguous photograph. Nevertheless, these traces are also an inevitable result of the aforementioned intentions. At the same time, the artist's memories of eggs are also linked to her perception of life. ● "The warmth of life is the condensed energy of becoming and the beginning of all beings. Also, it is the dynamism of life that germinates even in the terrible pain of chaos and separation. The warmth sprouted from the experience of nature spurts out beautiful emotions with the density of immediacy and makes me feel that I am alive in the most human form." (Artist's Notes) ● Eggs from the wombs of chickens, ducks, or any bird are doomed to be broken. Only then is it possible for a living being to exist. The artist reminds us that the warmth of a newly laid egg held in her hand as a child was a mysterious experience, and this provided an opportunity to reflect on human desires and the dignity of life in today's era of threats to the ecosystem, artificial intelligence, genetic manipulation, and cloning, because of which the meaning of the existence of living things is in rapid decline. Such contemplations have become the background for the present work.

3. Seolmi Park has taken as the object of representation something that is formless and unclear yet clearly felt. Of course, the medium is an egg; however, that does not mean she is simply depicting the egg itself. What she intends to express is the warmth transmitted through eggs, the mystery of life, and the various thoughts that arise from it. Art and photography can depict, through specific media, emotional objects that cannot be clearly objectified. Here, photography is concerned with the faint memories of the past, the scars of the senses that remain in those memories, and the inner being captured by the photographer's unconscious and intuitive sensibility. Photography is the work of retrieving the subtle emotional tone of the artist. In other words, the art of photography is practiced through a creative act using the photographic method. As a result, photography becomes a medium for expressing signs with certain forebodings, indications, or traces. As mentioned earlier, photography is divided by unstable boundaries, thick with swaying and overlapped traces. Colors with slight differences cut through the ominous darkness. An object reminiscent of a black mass seems to appear briefly, obstruct the view, sit on the corner, or vibrate. Whereas a photograph usually fixes an object, this photograph is filled with a kind of fluid and suggestive energy. It is an ambiguous silhouette, light, color, and mass for the reproduction of the mysterious feeling that the photographer experienced. Therefore, to the audience, this photograph is only an abstruse trace and an indecipherable mystery. Here, photography is located at the boundary between meaning and meaninglessness. The multiple exposure technique used by the artist is also a superimposition of images in one place, creating images that are simultaneously one and all, one and several images. At the same time, it can be seen as a trace of heterogeneous time and space stacked on one screen like geological strata. Therefore, Seolmi Park's photographs are so-called generative photographs, which show the floating state of the surface where the past and present, memory and imagination, absence and presence, and the visible and invisible coexist. ■ Youngtaik Park

The warmth of life is the condensed energy of becoming and the beginning of all beings. Also, it is the dynamism of life that germinates even in the terrible pain of chaos and separation. The warmth sprouted from the experience of nature spurts out beautiful emotions with the density of immediacy and makes me feel that I am alive in the most human form. The warmth of a newly laid egg held in a child's hand is a mystery, and in the face of the greatness of the world imagined through contemplation, the question of the existence of the two living beings disappears, leading to infinity in an intimate union. Memories flowing through the body are the stratum of life and become the veins of the unconscious, allowing us to experience the world in our imagination. ● Present memory is accompanied by emotions and sensations. ● Now that we have passed the early stages of AI and breathe with Al in our daily lives, we have become rather lonely in the network that connects mankind around the world. When we recognize that we are thrown into a lonely crowd surrounded by loneliness and alienation, our memories become clearer. The world, which has lost the value and meaning of tranquility to pursue convenience, is desaturated and exposed as anxiety. Anxiety is an unavoidable suffering that leads us to insight into life in search of the intrinsic nature and uniqueness of human existence. ● I see dry emotions and hardening hearts. ● AI technology, which started for human convenience, is rapidly evolving. Under the ideal that humans and Al can coexist, AI is becoming a human clone. Beyond the desire to overcome the limits of the human body by using AI, human desire has led to an attempt to cultivate senses and emotions in AI. These attempts lead the human soul and emotions into multiple real, virtual, simulated, and artificial worlds. This threatens not only human identity and dignity but also the majestic and beautiful providence of nature that runs without aim. The more successful AI-related achievements are, the more humans cheer. But a nightmare in pitch black lurks behind the cover. ● Humans are conscious and unconscious beings with their own perspectives and worlds. ● Humans have the flexibility to make judgments and reasoning in unpredictable situations. There is a sublime unknown blank space that fills the traces of life and emotions. It is an unfinished and sacred realm that cannot be filled even at the moment of death, even if human beings paint it with tears laden with contemplation, agony, and realization. Wouldn't AI, by engulfing our senses and perception, encroach on human dignity and our sacred souls? ● Today, humans conceive AI, and AI conceives humans. ■ Seolmi Park

 

Vol.20221116b | 박설미展 / PARKSEOLMI / 朴雪美 / photography

 

'선과 도형으로 다다른 회화의 자의식'

 

권성원展 / KWONSUNGWON / 權聖元 / painting 

2022_0309 ▶ 2022_0328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0×190cm_2021

 

초대일시 / 2022_0312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선과 도형으로 다다른 회화의 자의식 ● 광활한 곡물 평야 위에 찍힌 동그라미 삼각형 따위의 기본 도형이 중첩된 문양을 창공에서 촬영한 신비한 광경. 세간에서는 이를 미스터리 서클이라 부른다. 이 불가사의한 광경이 권성원의 작업실에서 찍은 작품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떠올랐다. 캔버스 가장자리에서 중앙을 사선으로 바라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이어진 물감의 선들이 흡사 곡물 평야의 질서 잡힌 배열과 닮았고, 그 위에 동그라미 삼각형 원뿔 네모 등 기본 도형들이 중첩된 패턴은 미스터리 서클을 떠올릴 만 했으며 그림의 첫 인상이 주는 미적 효과가 미스터리 서클과도 닮아서 그랬던 것 같다. 1960년대부터 서구의 곡물 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던 미스터리 서클은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도 그랬지만, 눈을 피해서 그토록 정교하게 곡물 밭 위에 기하학적 패턴을 새기는 게 불가능하리라는 판단 때문에, 발견 초기부터 줄곧 외계에서 온 UFO 착륙 흔적설이 가장 널리 믿어져온 가설이었다. 이 외에도 조류설, 회오리 바람설 등, 이 신비한 현상을 풀이하려고 뛰어든 가설은 더 많다. 그럼에도 과학적인 근거나 정황 증거 등을 종합할 때, 눈을 피할 수 있는 야밤에 농지에 잠입한 일군의 사람들이 패턴을 제작하고 잠적했다는 게 현재 가장 유력한 진실이다. 그렇지만 명칭에서 보듯 불가사의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곡물 평야에 새겨진 이 대지예술은 불가사의한 영역인양 보호되는 측면이 있다.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0×190cm_2021_부분

2017년 이래 권성원의 화폭 위로 일관되게 고수되는 공식은 미술의 원형에서 출발해서 원형으로 끝맺으려는 미적 태도 같다. 거의 모든 화면에 출연하는 주인공은 세모 원 네모처럼 말 없는 기본 도형들이고, 형체를 지닌 대상조차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 높은 봉우리 부분만 발췌하거나, 미국 국회의사당처럼 돔형식의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 상단부를 따오는 식으로, 동서고금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도상이 선택되거나 다이아몬드, 와인 잔, 세단, 소파처럼 중산층 이상의 삶을 표상하는 사물들을 안정감 있는 좌우대칭에 맞춰 수평수직을 일치시킨 도상들이다. 「Flatland」(2021)에 초고층 아파트를 짓는 타워크레인과 장난감 경비행기 같은 오브제가 작은 크기로 그림의 좌우 말단에 출현하긴 하지만 그것이 화면의 전체 균형을 흔들지는 않는다. 기본 도형들이 만드는 안정된 구도는 채색에도 반복된다. 색 배합은 3원색을 기본으로 색을 섞지 않고 망막에서 착시를 일으키는 병치 혼합을 택했다. 그 결과 혼합된 색이 만드는 탁한 느낌이 사라지고, 원색과 착시 현상으로 지각된 절제된 혼색이 오롯이 공존하는 화면이 만들어진다.

 

권성원_Flatland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5×70cm_2021
권성원_Flatland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2×162cm_2021
권성원_Flatland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2×162cm_2021

미스터리 서클을 지구인이 인위적으로 제작했으리라 사람들이 감히 염두에 둘 수 없었던 데에는 광활한 곡물 평지에 새긴 기계처럼 찍은 정교한 문양의 스케일 때문이었다. 권성원의 그림을 도판으로 확인하면 얼핏 캔버스 천이나 종이 위에 색실로 꿰맨 직물 공예로 오해하기 쉽다. 실물을 가까이서 확인하면 비로소 컨베이어 벨트 위에 그림을 얹고 기계로 형형색색을 순차적으로 찍어낸 듯 한 절제미가 그림에서 느껴지는데, 정작 이 작업은 작가가 콤프레샤와 튜브로 제작한 수공품이다. 콤프레샤와 연결된 에어건을 쥔 왼손과 물감 튜브를 쥔 오른손이 호흡을 맞춰 동기화된 결과물이란 얘기다. 캔버스 위에 일직선으로 균일하게 그어진 물감의 줄은 가까이서 보면 물감 튜브를 쥔 오른손의 미세한 힘 조절로 균일하게 꿈틀꿈틀 이어지면서 물감의 재질감을 살리고 있다. 균일한 물감 굵기와 길이를 한 줄 한 줄 쌓아 완성에 이르는 이 노동집약적인 제작법에서 흡사 중세시대 모자이크 제작 공법을 떠올리게도 된다.

 

권성원_Formation_brushwork_See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2×162cm_2022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00cm_2021
권성원_Formation_Top view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00cm_2021

권성원의 2017년 이후의 작품 연보를 통틀어 칭하면 '이미지 뭉치/덩어리' 쯤 될 것 같다. 스토리가 사라지고 기본 도형과 고전 도상이 뒤엉킨 하나의 뭉치/덩어리를 무작위인 듯 계획적으로 화면에 던진 모양새라고나 할까. 작가는 기본 도형들로 구성한 연작 회화 「형성 Formation」의 밑그림을 위해, 무작위로 쌓아놓은 실제 입체 도형들을 위에서 촬영한 사진을 참고자료로 썼다고 한다. 여기에 사용된 도형 가운데 원구 원추 원뿔이, 화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단위로 세잔이 예시했던 회화론의 영향 탓도 크겠지만, 권성원의 「형성 Formation」은 회화에 대한 자의식과 맞닿아 있다. 양손을 동시에 사용해서 회화를 제작하는 독창적이고 기계적인 화법이나, 그림에서 스토리를 밀어내고 표면의 실험에 집중한 점이나, 시각적인 재현보다 물감의 촉각적인 질감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킨 점 등, 2010년대 전후 미술판에서 대세로 떠오른 새로운 회화 또는 메타 회화의 한 유형으로 묶일 만하다.

 

권성원_Unstable balance 21- ca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0×60.5cm_2021
권성원_균형쌓기 Building Balance 21-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cm_2021
권성원_균형쌓기 Building Balance 21-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cm_2021

미술품은 실물로 보는 것과 찍은 도판으로 보는 것 사이에 설명되기 힘든 질감의 격차가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도판만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익숙한 심사 문화로 자리 잡았고, 대형 입체 설치물보다 평면 회화작업 그 중에서도 그림 표면의 세부에 비중을 둔 회화는 심사 무대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림이 담은 이야기의 밀도보다 그림 표면의 감각적인 실험에 집중하는 회화는 그림을 보는 관습도 바꿔놓았다. 그림은 정면에서 바라보고 평가하게 마련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근접 거리에서 발견되기 힘든 그림 표면의 차별성을 밀접 거리로 다가가 발견해야 하는 작업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밀접 거리에서 더 나아가 권성원의 그림으로부터 불가사의한 미스터리 서클의 신비감을 연상하려면, 정면 바라보기, 근접 바라보기, 혹은 밀접 바라보기처럼 그림의 표면을 살펴보는 것만으론 충족되지 않는다. 캔버스의 측면에서 사선 구도로 바라볼 때 미스터리 서클이 돌연 떠오른다. 정면 관람 + 근접 관람 + 밀접 관람에 더해 측면/사선 각도의 총합으로 회화의 면모가 구성되는 회화 작업. 회화는 지금 변하고 있다. ■ 반이정

 

Vol.20220309a | 권성원展 / KWONSUNGWON / 權聖元 / painting

관계의 경계

김은진展 / KIMEUNJIN/ 金恩瞋 / painting 

 

2021_0616 ▶ 2021_0622

 

김은진_가려진 숲_한지에 채색_80.3×130.3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김은진의 회화-오묘하고 미묘한 숲  "자연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본다. 인간과 인간 간 관계의 오묘하고 미묘한 경계 지점은 어디일까.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부딪히며 어울려 사는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이처럼 구체적이지 않은 관계의 경계 지점에 대한 고민을 자연 이미지를 통해 표현해본다." (김은진) ● 숲에서 보면 하늘과 맞닿아있는 능선을 경계로 하나의 풍경이 둘로 나뉜다. 하늘을 배경으로 밝게 빛나는 부분과 능선 아래쪽의 어둑한 부분으로. 배경으로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부분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나뭇잎에 난반사되는 빛의 희롱이 보일 만큼 섬세하다면, 능선 아래쪽에서 나뭇잎은 어둠의 일부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 속에 하늘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최소한의 밝은 기운을 품고 있는 어둑한 숲을 배경으로 시커먼 나무들만 보인다(가려진 숲). 그리고 무채색으로 그려져 관념적으로 보이는 곧추선, 어쩌면 앙상한 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그들의 관계). 그리고 눈꽃으로 하얗게 빛나는 나무가(눈꽃), 하늘에 난반사된 빛 조각으로 수런거리는 숲이(시선), 마치 칠흑 같은 밤이 밀어 올린 듯 자기 본연의 빛으로 발광하는, 스스로 발광하는 숲이(어울림) 보인다.

 

 

김은진_그들의 관계_한지에 채색_145.5×97cm_2021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숲은 가려져 보인다. 숲은 뭘 가리는가. 그러므로 뭘 숨기는가. 아니면 뭘 자기 속에 품는가. 나뭇잎의 섬세한 떨림을 가리고, 바람을 숨기고, 빛의 희미한 기미를 품는다.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숲을 일구는 것이지만, 그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숲을 볼 때(시선), 숲도 나를 본다(응시). 그렇게 나를 볼 때, 숲은 사물 인격체가 된다. 어쩌면 나에게서 건너간, 내가 부여해준, 그러므로 내가 투사된, 다시 그러므로 전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를 보는 숲은 타자가 된다. 타자가 된 숲? 타자로서의 숲? 그렇게 숲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처럼도 보이고,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도 보인다. 친근하게도 보이고, 낯설게도 보인다. 과연 나는 그 관계를, 그 경계를, 그 이유를, 그 차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보통 자연은 치유와 위로의 대상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게 전부인가. 그것은 어쩌면 인간 중심의 일방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을 다만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했다. 인간을 비하하는 얘기가 아니라, 인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인간과 상관이 없는 자연? 그것은 어쩌면 자연의 본성을 인정하는 일이며, 자연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자연은 치유와 위로의 대상인 만큼이나, 낯선 타자이기도 한 것이다. 좀 과장해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이제 자연은 다만 풍문으로나 떠돌 뿐이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은 사실은 자연의 본성 그러므로 타자성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상실된 자연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복구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인식의 문제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이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자체 망실된 자연의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김은진_나무 달 사이_한지에 채색_162.2×112.1cm_2019

 

그렇게 작가는 시종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렸다. 꽤 오랫동안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렸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다. 비유로 치자면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오히려 숲의 실체에서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 숲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숲의 실체? 아마도 바람과 대기, 햇빛과 대기가 머금은 습윤한 기운, 헐벗었거나 물이 오른 나무와 나뭇잎, 낙엽이 썩어서 만들어진 흙과 하늘, 순간의 기분과 감정, 바이오리듬 그러므로 생체리듬과 특정의 관점이 그리고 여기에 시종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운동성과 실제 혹은 내면에서 공명하는 소리가 어우러진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유기적인 화합물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작가는 숲을 그리면서 아마도 숲의 모든 것, 숲 자체, 그러므로 어쩌면 숲에서 결정적이랄 수 있는 그 상호작용을 붙잡는 데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대개 한가지 소재에 집중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것에 관한 한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강조할 것인지 정하고 가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에게는 그 과정이 없다. 익숙해진다는 것, 길들여진다는 것, 생략한다는 것, 강조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실재와는 다른 무엇, 다만 실재와 상당하게 비슷해 보이는 무엇,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이미 숲이 아닌 무엇을 그려놓고야 만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김은진_눈 꽃_삼베에 채색_100×100cm_2021

 

숲에 어떻게 익숙해지는가. 숲 그리기에 어떻게 길들여질 수가 있는가. 실재는 결코 붙잡을 수도 가닿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파고들 수 있을 뿐. 그러므로 숲은, 실재는 꼭 그렇게 파고든 만큼만 자기를 내어줄 뿐이다. 그러니 더 많이 파고들 수밖에. 더 깊게 천착할 수밖에. 그러므로 어쩌면 더 자주 헤맬 수밖에. 매번 새롭고 순간순간 다른 실재를 그리는(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현마저 넘어선), 그리고 그 실재에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파고드는 것, 파고들면서 자발적으로 헤매는 것, 그것도 매번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런 연후에라야 관성적인 그리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그리기를 넘어설 수 있다. 매번 변하고 순간순간 다른 것을 비로소 그릴 수 있는 일이다. ● 꽤 오랫동안 나무와 숲 그리기에 집중해온 그동안 작가의 그리기를 보면 적어도 이러한 헤매면서 그리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 같고, 이로부터 점차 작가만의 그러므로 어쩌면 숲 고유의 아우라가 점차 그 속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래에는 내가 숲이 되고 숲이 내가 되는, 나와 숲 사이에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자신과 숲을 주와 객으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비로소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김은진_시선_삼베에 채색_50×50cm_2021

 

상징주의도 그렇지만, 낭만주의에서 풍경은 상징이었다. 폐허의 상징이고, 시간의 상징이고, 향수의 상징이고, 내세의 상징이고, 죽음의 상징이었다. 죽음으로 삶을 넘어서는 상징이 아니라면, 풍경 자체로는 의미가 없었다. 그 상징의 종류에 차이가 있지만,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무릉도원과 무위자연, 물아일체와 소요유가 그렇다. 모든 그림은 일종의 자기표현의 한 형식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화상이 변주되고 변형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 그렇다면 작가에게 숲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러므로 작가의 어떤 인격을 대리하는가. 작가에게 숲은 가려져 있다. 파고들면 들수록 더 깊이 가려져서 마침내 자기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그렇게 숲을 일구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과 자연과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 간 관계를 본다. 그래서 주제도 관계의 경계다. 관계가 성립하려면 나와 네가 있어야 하고, 주와 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처럼 나와 너의 관계는 전제고 존재론적 조건인 만큼 피할 수가 없지만 도무지 그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숲이 양가적인 만큼이나 인간 간 관계도 그럴 것이다. 숲이 자기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것처럼 인간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숲이 자기 속살을 내어주어 품듯 인간관계도 속내를 보여줄 것이다. ● 어쩌면 작가가 보기에 인간관계만큼이나 어려운 일도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숲이 자기를 내어주지 않는 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관성적인 관계에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관계에 타협하지 않는 일이다. 작가 스스로 인간관계가 오묘하고 미묘하다고 했다. 숲이 꼭 그럴 것이다. ■ 고충환

 

 

Vol.20210616f | 김은진展 / KIMEUNJIN/ 金恩瞋 / painting

기묘한 그러나 아름다운 Strange, but beautiful

 

김기태展 / KIMKEETAE / 金岐泰 / painting 

2021_0602 ▶ 2021_0615

 

김기태_Unknown Artist- April 22nd 20_캔버스에 유채_145×145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1205e | 김기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1_0602_수요일_05:00pm

갤러리 그림손 기획 초대展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갤러리 그림손은 6월 2일부터 6월 15일까지 기획초대전 전시 김기태 개인전을 개최한다. ● 21회 개인전을 갖는 김기태 작가는 존재와 비존재 간극의 경계 사이를 그리고 있다. 존재하는 공간과 존재하지 않는 공간, 그 어딘가의 사이를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홍익대학교 서양화 학사, 석사를 마치고 뉴욕에서 사진과 회화를 전공하면서, 사진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초기 작품들은 원하는 풍경사진을 찍은 필름 위에 작가가 상상하는 새로운 풍경을 만들면서, 그 이미지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풍경으로 완성하는 작업을 주로 하였다. 이번 갤러리그림손 전시에서는 사진을 빼고, 오로지 회화만으로 이러한 풍경을 구현해 내고 있다.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개념은 현실 속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이 또 다른 환상의 세계로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과 꿈을 꾸기 때문에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김기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중요한 것은 빛이다. 작품 속 빛은 우리가 볼 수도, 볼 수 없는 빛일 수도 있다. 빛은 자연 속에서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면서, 곧 자연 그대로일 수 도 있는 현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치 그 빛으로 인하여 자연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것처럼 작가는 환상적인 빛의 표현으로 인하여 작품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 이번 전시의 제목은 『기묘한 그러나 아름다운』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의 풍경은 현실과 초현실의 중간 어디쯤에,,,,로 보여진다. 또한 작품 안의 시간도 여러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빛에 의해 다르게 보여지는 새벽과 어스름한 늦은 저녁은 한 작품 안에서 경계를 알 수 없는 공간과 공간이 마주하여 새로운 시공간으로 보여진다. ● 작가는 항상 어린 소년이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하며, 마주하는 새로운 세계를 함께 걸어가는 마음으로 작업을 한다. ■ 갤러리 그림손

 

 

김기태_Unknown Artist- June 5th 1989_캔버스에 유채_130.5×194cm_2021
김기태_Unknown Artist- August 16th 1987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21

기묘한 그러나 아름다운  장면1.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럽던 어느 날, 작은 언덕을 지나 보일듯 말듯한 작은 개울이 무성한 풀숲 사이로 지나가는 그 길가에는 그리 크지 않은 나무 한 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이 뜸한 이곳은 나름 소풍 나오기에 좋아 보이는 그런 풀밭과 그늘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 어쩌면 오래 전 어느 사랑하는 연인이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였으며, 또는 먼 길 가던 여행자들은 이 그늘에서 잠시 땀을 식히곤 했을 지도 모른다. 또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저 너머 들판에서 벌어진 어느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고 도망친 한 병사는 이 그늘에서 떠나온 집을 그리워하며 가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그들의 달콤했던 속삭임, 지친 땀 냄새와 한숨, 그리고 희미해져가는 눈으로 허공에 마지막 손짓을 남겨 놓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들이 남긴 그 흔적들은 마치 그들의 아름다웠던 나날들을 보여주기나 하려는 듯 부드럽게 일렁이며 빛나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저 멀리 그날의 하늘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김기태_Unknown Artist- Mar 9th 17_캔버스에 유채_72.7×91cm_2020
김기태_Unknown Artist- July 8th 2003_캔버스에 유채_83×116.5cm_2021

장면 2. 또 한동안의 시간이 흘러 모두가 떠나간 후,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이곳을 찾지 않는다. 그렇게 그 모든 흔적들은 덮여지고 다시 무너졌다가 흩어져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느 여름 큰비로 산사태가 나기도 했고 그 후, 내리 큰 눈이 쏟아지는 혹독한 겨울들이 이어졌다. 또 언젠가는 갑작스런 큰 바람에 몇몇 나무들이 뿌리째 넘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그 모든 풍경을 천천히 바꾸어 놓았다.

 

김기태_Unknown Artist- March 19th 1974_캔버스에 유채_181×281cm_2021

이렇게 좋은 날씨는 참으로 오랜만이라 온몸으로 쏟아지는 햇살의 짜릿한 진동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아까부터 떠돌던 작은 새소리도 어느덧 자취를 감춘 지 한참인 오후, 이제는 딱히 어디라 말하기 힘든 외딴 어느 자그마한 언덕 사이를 한줌 작은 바람이 지나간다. 아무도 다닐 것 같지 않은 이렇게 외진 곳에도 누군가가 다니는 길의 흔적이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간혹 발견되는 작은 병 하나, 무슨 손잡이 같아 보이는 썩은 나무토막 등 이 길은 그렇게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인적 없는 오솔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세상과 멀어져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그야말로 물아일체가 된다. 바람이 되어 저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나무가 되어 잠시 쉬어본다. 그러다 소리가 되기도 하며 또 햇살이 되어 이 들판에 지긋이 내려앉아본다. 그러다보면 평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외딴 오솔길이 내는 소리, 향기 그리고 주변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한데 모여 작은 오로라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저 너머 풀밭에서 홀연히 솟아 오른 한줄기 빛은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뻗어나갔다가 이내 사라졌다.

 

김기태_Unknown Artist- Sep 22nd 19_캔버스에 유채_80.3×100.2cm_2019

장면 3. 나의 작품 속 사건들은 현실과 초현실의 중간 어디쯤에서 일어난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낮과 밤의 경계인 그런 시간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않아 보이고 그렇다고 딱히 초현실적이라고 하기에도 그런 정도이다. 마치 어느 한 여름날 느닷없이 찾아온 일식 현상을 마주한 그날의 그 이상한 느낌과도 비슷한······. 내가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보고 느낀 것들을 시각화할 뿐이다. ● 그날 쏟아지던 빗속에서 본 그 잠깐의 햇살은 과연 햇빛이었을까? 또 어느 날 차안에서 저 멀리 보이던 불빛은 과연 어느 시골집의 등불이었을까? 거기에 집이 있기는 했었을까? 그날 새벽 산중턱에서 내가 들은 그 속삭임은 구름이 나를 스쳐가며 내는 소리였을까? ● 숭고, 우리의 삶은 저 광활한 시공간의 한 구석에서 벌어지는 아주 작은 하나의 섬광과도 같은 것이다. 게다가 아주 짧디 짧아서 아! 하는 외마디 탄식조차 채 끝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마는 아주 우연한 사건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을 이처럼 가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우연한 찰나적 일회성이다. 이 찰나적 일회성의 처절한 왜소함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시공간에 대하여 숭고라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이 숭고한 섬광은 거칠게 불타오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가만히 사라지기도 하며 또 어떤 것은 꽤 오래가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다 우연일 따름이다. ■ 김기태

 

김기태_Unknown Artist- May 22nd 1999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21

Strange, but beautiful.  Scene 1. On a bright day, under the deep blue sky, sunlights warmly and breezes gust softly. As you go along a little hill, there was a small tree, making its cool shade by a little meadow. The meadow had a brook that can hardly be seen as it winds it's way through the overgrown grasses. An unfrequented place, a little while away from the village is a good meadow and shade for a picnic. Probably many people have already done this from a long time ago. Perhaps a lovely couple had whispered here long ago, or travelers going a long way, took a break to mop their brow. Then again, after another decade, maybe a severely wounded solider ran away from a battle that was ensuing over the hill. He took hard his last breath, missing the home that he had left. They have left here, their sweet whispers, smells of exhausted sweat and breath. The last gesture fades, with eyes getting darker. A long time has passed since then, the traces that they have left, begin to shine, swaying and smooth as if it wants to show their beautiful days. With a gentle breeze, some of them are climbing far, far away into the sky of those days.

Scene 2. Again other days have passed away, after everyone has left, no one comes to this places anymore. Like that, all of the traces have been covered, crumbled down, scattered and slowly erased. In one summer, there was a landslide caused by a big rainfall, after that, severe winters came, yielding heavy snowfall day after day. On some other day, a couple of trees were uprooted by a sudden gust of wind. In this way, time has slowly changed all of these scenes.

It has been a long time since we have had such a beautiful day, it is so happy a feeling, that sun light's wave comes to my whole body. In this afternoon, a small birds' chirp has whirled around me, and has already gone without our knowing. A slight breeze goes through the small, solitary hills, now one is hardly able to say where it is. It is a wonderful thing, a path is found in the middle of nowhere that seems untraveled. This road tells a story about someone, by things like a little bottle which was found occasionally or a rotten twig which looks like some kind of handle. While I walk down this unknown trail, I am getting apart from the world, becoming part of nature and turning into oneness. Transforming into the wind, I look down from above and then becoming a tree, I take a rest for a while. Turning into a sound, then I land softly on this field, being a body of sunlight. Now, a very extraordinary scene from the usual is presented. The sounds, and scents made by this isolated path and the humid air that comes from around, gather, make a small aura and a streak of a light which was suddenly beamed out over the field seems to stay a bit, moves to somewhere else and is gone. ■ KIMKEETAE

 

 

Vol.20210603f | 김기태展 / KIMKEETAE / 金岐泰 / painting

BLUE

 

블루 창립展

2020_1118 ▶ 2020_1124

 

초대일시 / 2020_1118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유림_권기철_김희진_노신경_모용수_문기전

박윤순_신주호_이경훈_이해기_임종두_정보연

 

후원 / BLUE 후원회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쪽빛 하늘, 청명함, 드넓은 바다, 인류가 합성한 최초의 색. BLUE! 블루는 원대하고 광활한 기상을 가지고 도전하는 젊은 작가정신이며 창조의 빛깔입니다. 작가는 창조적일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낍니다. ●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지구적인 재난 상황인 역경의 시기입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큰 변화로 자유로운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코로나블루를 겪으며, BLUE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고 향기롭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 향수라고 하는데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인 자정에서 2시 사이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역경을 이겨낸 장미만이 최고의 향기를 품어 내듯이 BLUE회의 창립 여건이 이와 견줄만한 것 같습니다. 누구나 삶이 예술처럼 감동이길 바랄 것이지만 실천의 문제가 따릅니다. ● BLUE 후원회는 실천을 통해서 인생을 예술작품처럼 감동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 내어주시고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후원회원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작가는 혼자의 공간에서 창조를 위한 반성과 판단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으로 발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는 작가들의 세계에 격려와 소통의 장이 필요합니다. 작가의 환경에 공감하고 배려해 주신 소통의 장은 창작의 열정으로 작용 될 것입니다. 문화의 향유자이자 다양한 분야의 후원회원님들과 가깝게 소통하며, 험난한 예술의 길에서 좋은 작가로 성장할 것입니다. 미술이 그 시대를 보는 방식이라면 강력한 후원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심양면으로 애써 보내주신 선한 에너지는 창의적이고 따뜻한 메시지로 바꿔 세상과 만나겠습니다.

 

강유림_感遇_장지에 채색_91×116.8cm

 

권기철_그리고 은밀한 일상의 서사_한지에 먹_212×155cm×10_2020

 

김희진_Cure_혼합재료_40×130cm_2020

 

노신경_inbetween 3021_한지에 바느질_91×116.7cm_2020

 

모용수_사랑합니다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20

 

문기전_Quantum_판화지에 연필_100×100cm_2019

 

박윤순_Chora_캔버스에 유채_60×110cm

 

신주호_심연 心淵_91×117.5cm_2020

 

이경훈_possible scenery_리넨에 유채_140×140cm_2020

 

이해기_스스로 빛이 되어_비단, 금_90×90cm_2018

 

임종두_同行_장지에 석채_91×116.8cm_2020

 

정보연_도시의 빛_천에 수간안료, 금분_48.2×125cm_2020

 

 

같은 시공간에서 특별한 인연으로 BLUE회가 탄생했습니다. 우주의 시작점처럼 헤아릴 수 없는 에너지로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든든하고 애정 어린 후원회와 열정과 인간미 넘치는 좋은 작가들이 그렇습니다.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항상 푸르름을 유지하면서 가치 있는 길을 함께 멀리 갔으면 좋겠습니다. 후원회와 작가들의 모임인 BLUE회는 서로의 관심과 성원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멋진 삶의 미학으로 보여줄 것입니다. 끝으로 BLUE회 창립전에 한 세계를 정성껏 만들어서 보여주신 작가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BLUE 작가 일동

 

 

 

Vol.20201118b | BLUE-블루 창립展



인사동에 볼 만한 전시가 여럿 열려, 내친 걸음에 모두 돌아보았다.

정영신씨와 인사동 간 지난 5일은 날씨가 추워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었는데,

전시장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리는 이재삼씨의 달빛 녹취록이었다.

목탄으로 드러낸 자연의 형태는 단순한 풍경을 너머, 깊은 어둠속에 잠긴 침식된 풍경을 보여주었다.



홍매화를 비롯한 소나무, 대나무, 물안개, 폭포 등의 대작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빛이란 제목을 붙인 거목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고요한 적막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장엄한 분위기가 처음엔 긴장감을 주었으나, 이내 마음이 편해지며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마치 깊은 산중의 새벽 법당에 홀로 선 것처럼...



수행하는 스님 방에 작품을 걸었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을 꿈틀거리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달빛 소리 같기도 했다.



가슴에서 밀려오는 감흥은 보는 이의 신체 오감을 자극했다.

신종 코로나에 주눅들지말고, 신비로운 달빛에 한 번 취해봄이 어떨까?


아래를 클릭하면 네오록에 소개된  이재삼씨의 글과 작품을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mun6144/5459



 

두 번째는 갤러리 미술세계’ 5층에서 열리는 고 이존수의 재조명전 선험적 이미지, 그 너머를 보러갔다.

전시장에서 화가 정복수씨를 만나 전시장 순방에 함께 했다.


 

이존수씨는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불운의 화가다.

경남 남해 출신으로 학벌도 배경도 없는 변방의 작가였다.

부산에서 활동한 70년대 만난 오랜 지기지만 80년대 초반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그는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많은 벗들을 사겼으나, 특히 중광스님과 친하게 어울렸다.

어떻게 보면 이존수씨가 중광스님의 그림 스승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상경할 때는 그도 개털신세라 사는 게 어려웠다.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빨래집게 전시로 조명받아 유명세를 탔다.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자 유명 화랑의 전속화가가 되었는데, 없는 사람이 돈이 생기면 이렇게 변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유명화랑과의 전속계약을 노예계약이라며 법정투쟁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동기야 어쨌든 간에 작가의 생명줄을 쥔 화랑 측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였다. 


 

한 동안 그를 잊었는데, 어느 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것도 죽은지가 한 참 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사망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기구한 운명에 억장이 무너졌으나 흐르는 세월에 잊고 살았는데,

갑작스런 전시소식에 죽은 사람 살아 온 것처럼 반가웠다.


 

그는 파격적인 작품 성향을 보이기도 했으나, 대개의 작품들은 줄거리 없는 설화성을 띄고 있다.

마치 전설이나 동화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 조각들을 형상화시켜 놓았다.

그건 작가에게 잠재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같았다.

그 형상들은 전설로 떠도는 설화가 아니라 오늘의 신화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작가의 마음이었다


 

 

전시장에는 세로 1,4미터에 가로 26미터에 이르는 대작이 걸려 있었다.

평생도라 이름붙인 작품에는 삼라만상 희노애락과 우주의 신묘를 다 담아 놓았다.

이제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린 이존수의 선험적인 신기어린 세계에 한 번 푹 빠져보시길...


 

 

그 전시장에서 한층 내려와 유혜정씨의 그림읽기 내친걸음전에 들렸다.

이 전시는 평창동 아트스페스 퀼리아에서 끝난 지 사흘 만에 다시 열려 내친걸음이라 했으나,

뜻은 내친(內親) 걸음이다.



마침 작가가 자리에 있어 차 한 잔 얻어 마셨는데,

마치 은밀한 여인의 방에 들어온 듯, 눈 높이을 깔아야 했다.

작품들이 도발적이라, 훔쳐보듯 살펴보았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성에 대한 감정을 꾸밈없이 드러냈는데,  작가의 그림일기 같았.


 

작가는 이 작업을 하게 된 동기가 무의식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연스럽게 그렸는데, 성에 과민 반응하는 세태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을 쉬쉬하며 웃음거리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춘화라고 하대했던 옛날이야 그렇다치고, 지금이 어느 때인가?

세상에 성애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게 어디 있나.


 

이 그림들은 남성의 입장에서는 이성으로 볼 수 있으나,

작가는 여성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를 그렸다.

그 본질은 여자라기보다 그녀가 아우르며 풍기는 밝음이다.



아무튼, 유혜정씨의 그림은 매혹적이다.

때에 따라 변하는 감정의 찌꺼기까지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적나나하게 드러냈으나 작품들이 음란하기보다 맑다.  

그 해맑은 여인의 꿈길을 한 번 걸어보심은 어떨까요?


 

네 번째 들린 곳은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류연복씨의 온 몸은 길이다전이다.


 

이 전시가 열리는 나무아트는 민중미술의 본산이다.

그림마당 민에 이어 93년도에 문을 열었는데,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운영한다.

'나무화랑'처럼 좋은 전시가 자주 열리는 곳이 인사동에 별로 없다.

오층 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전시장이지만, 보석같은 알짜배기다. 


 

정복수, 정영신씨와 전시장으로 올라가니, 전시작가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김진하관장,

화가 이흥덕, 송 창, 김재홍, 장경호, 성기준, 김이하씨 등 많은 분이 와 있었다.

반가워도 전염병에 주눅들어, 싫어 할까바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전시작들을 돌아보니, 진천 전시 빠진 작품과 신작도 있었다.


 

류연복씨의 목판화는 국토에 대한 애정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베어있다.

때로는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칼을 휘두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서정적이다.

국토를 온 몸으로 껴안은 내면에는 민중의 한이 서려있다.


 

작품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많은 사람들이 류연복씨를 좋아하는 이유다.

비실비실 웃으며 바람처럼 살지만,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다.


 

목판화와 함께 한 세월이 어언 35년인데, 한결 같은 뚝심의 화가다.

우리 현대목판화사에서 족적을 분명하게 남긴 문제 작가다.

그의 목판화는 우리민족의 정신과 국토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아래를 클릭하면 네오록에 올린 미술평론가 김진하씨의 글과 전시작을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mun6144/5475



한 걸음에 장엄함과 선험적이고 매혹적이며, 민족적 한의 정서까지 골고루 느낄 수 있으니,

일타 쌍피가 아니라 일타 사피가 아니겠는가?

주말부터 날씨도 풀린다니, 인사동에 전시보러 가자.



이재삼 달빛 녹취록‘ / 3월 3일까지 / 갤러리 그림손

이존수 ''선험적 이미지, 그 너머' / 2월 13일까지 / 갤러리 미술세계 5층

유혜정, '그림읽기, 내친걸음' / 2월13일까지 / 갤러리 미술세계 4층

류연복 '온몸은 길이다. / 2월 24일까지 / 나무화랑

 

사진, 글 / 조문호













 

 

 

 




이재삼씨의 ‘달빛 녹취록’초대전이 오는 3월3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리고 있다.



목탄으로 드러낸 자연의 형태는 단순한 풍경을 너머, 깊은 어둠속에 잠긴 침식된 풍경을 보여주었다.

홍매화를 비롯한 소나무, 대나무, 물안개, 폭포 등의 대작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빛’이란 제목을 붙인 거목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고요한 적막감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장엄한 분위기가 처음엔 긴장감을 주었으나, 이내 마음이 편해지며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마치 깊은 산중의 새벽 법당에 홀로 선 것처럼...



수행하는 스님 방에 작품을 걸었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을 꿈틀거리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달빛 소리 같기도 했다.



가슴에서 밀려오는 감흥이 신체 오감을 자극했다.

인사동에서 신비로운 달빛에 취하다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재삼의 ‘달빛 녹취록’은 3월3일까지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린다.


사진, 글 / 조문호
















The Fate of a Moment In Space 공간 속 찰나의 운명

이상용展 / LEESANGYONG / 李尙龍 / mixed media
2019_0710 ▶︎ 2019_0730


이상용_No.1 Fate_혼합재료_53×40.5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824e | 이상용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9_071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이상용 작가의 작품 화두는 운명이다. 운명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에서 지배 받는 힘이다. 그 힘을 받아들이거나 부정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의지이며 운명은 필연적인 존재로 종교나 철학적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다. ● 작가에게 운명은 과거, 현재, 미래에 관계된 모든 사람과 자연, 우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존재하는 거대한 우주 속의 인간들, 그 인간들의 시간과 흔적, 삶의 가치를 작가는 다양한 오브제와 조형성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인간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주 안에 미세한 존재이지만, 인간의 삶은 수 많은 대상과 얽히고 섞여 살아가는 공동운명체기 때문이다.


이상용_No.4 Fate_혼합재료_53×40.5cm_2019



이상용_No.5 Fate_혼합재료_80.5×54cm_2019



이상용_No.7 Fate_혼합재료_80.5×54cm_2019



이상용_No.10 Fate_혼합재료_105.5×81cm_2019

이상용 작가는 벼루 작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여러 가지 모양의 벼루에 새로운 공간과 삶을 새겨 넣어 소우주를 생성하였다. 미국에서 작업 할 당시 벼루작업은 동양사상과 철학을 담아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하지만 작가는 벼루 외에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 등의 많은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운명을 표현하고 있다. 주변의 버려진 돌과 나무,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전혀 그 용도가 다른 오브제로 재탄생 시키는 자체가 찰나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작업에 필요한 오브제를 만나러 다닌다. 작가에게 자연의 대상은 모두 작업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이상용_No.18 Fate_혼합재료_105.5×81cm_2019



이상용_No.24 Fate_혼합재료_162×106cm_2019



이상용_No.25 Fate_혼합재료_105.5×243cm_2019


이번 갤러리그림손 전시에 선보이는 작업은 드로잉과 회화를 결합한 작품이다. 예전에 작업한 회화에서 좀 더 확장된 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수많은 일회용 테이프는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물이다. 테이프는 대상과 대상을 연결시키고 수정, 보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겹겹의 테이프를 붙이고 그 위에 음표를 그려 악보를 탄생시킨다. 시각적 악보는 우리에게 익숙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이다. 끊임없이 펼쳐진 「운명」의 악보는 일회용 테이프의 레이어를 통해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군상을 음표라는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 듯 하다. 마치 음표는 인간의 형상처럼 서로 뒤엉켜 화면에 시각화 되었다. 이제 베토벤의 「운명」 악보는 더 이상 악보가 아닌, 인간과 삶의 형상으로 재 탄생된 이미지인 것이다. 무수히 펼쳐진 악보 즉 삶의 형태 위에 보여지는 선, 면, 기하학문양, 수학적 기호는 작가의 무의식 의지로 표현된 우주의 근원으로, 인간은 곧 우주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자연이라는 것을 작가는 제시하고 있다. 근래 우주의 기호와 신호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작가는 우주와 인간, 또 다른 모든 자연들이 서로 뒤엉켜있는 것 자체가 운명 임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음표 위에 새겨진 수많은 형상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작가는 우주 안에 모든 대상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없는 부호와 기호, 선과 면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잘 짜여진 운명일 수도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악보작품은 작가의 노동집약적인 작품의 성향을 최대한 끌어낸 작업이다. 작업을 하면서 자신조차 우주의 하나이며, 자신이 표현한 모든 알 수 없는 형상들도 우주이므로, 이 모든 일은 운명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임을 작가는 작업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이상용_No.27 Fate_혼합재료_125×44×127cm_2016


작가는 악보 작품 외에 설치 작품도 전시한다. 돌과 나무, 쇠조각, 오브제들이 결합하여 보잘 것 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어 새로운 조형을 만들었다. 유머스럽거나 또는 묵직한 의미를 가진 조형물은 운명의 상황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관람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고 있다. ● 이상용 작가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자신은 작아지고 더 작아지는 것을 발견하고 느낀다고 하였다. 상상할 수도 없는 우주에서 자연들은 소리 없이 시간의 공간 속에 흘러간다는 것을 작가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였다. ●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무수히 많은 찰나의 운명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을 비롯한 다른 누군가 에게도 우리 모두의 관계가 운명임을 말하고 있다. ■ 심선영



Vol.20190710b | 이상용展 / LEESANGYONG / 李尙龍 /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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