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회에서는 지난 12월31일 오후 7시 '여자만'에서 송상욱 선생께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그동안 자비로 30호를 넘긴 계간 "시"지를 발행하여 보급하였고
음유시인 답게 항상 노래로 창예헌 회원들의 화합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되어
회원들의 마음을 새긴 감사패를 전달하게 되었다.
이 날 전달식은 "장에 가자" 추진위원 회의에서 전달하기로 하였으나 김명성 이사장께서
늦게 참석하므로 조문호자문위원이 만찬장에서 대신 전달하였다.
이지녀씨의 축가와 김정남씨의 피리연주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활철이사께서 겨울내의를
송선생께 전해 드려 참석한 분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참석자 : 송상욱, 이청운, 김신용, 배평모, 최효준, 기국서, 이지녀, 김명성, 김정남, 전활철,
전인경, 조문호,

 

 

 

 

 

 

 

 

 

 

 

 

 

 

 

 



 


본 회의 감사로 계신 이성 구로구청장에 대한 문화예술계 및 창예헌의 탄원서를 올립니다.
이성 구로구청장 탄원 서명에 동참하며, 그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분은 위의 이성구청장 탄원 서명용지를 다운받아
아래 이메일 주소의 첨부 파일로 회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메일이 있는 회원분들은 각 이메일로 탄원서 내용과 서명 서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회신용 창예헌 이메일 주소 / jungys1102@hanmail.net


탄원서

사건번호 2010노 3038
피 고 인 이 성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지난 6.2 지방선거에 압도적인 주민 지지로 서울 구로구청장에 당선된 이성 씨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피소되어, 지난 10월 28일 제1심 법원에서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벌금 200만원을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안양시가 아닌 민주당 안양시장 후보자와 열차차량기지 이전을 합의했으나, 피고인의 노력으로 안양시가 차량기지 이전에 합의한 것처럼 선거공보에 게재해 표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그 판결이유를 밝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심 재판 과정에서 이성 구로구청장과 그의 변호인들이 주장한 바처럼 선거공보에 문제의 공약사항이 그리 게재된 것은 선거캠프 홍보담당자의 단순 착오적 실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 이전인 5월 2일, 국회 정론관에서 민주당 이성 구로구청장 후보와 민주당 최대호 안양시장 후보가 ‘구로1동 철도기지창 이전 협약’을 체결했을 때 <뉴시스 > <오마이뉴스> <경인일보> 등 여러 언론에 보도된 바처럼 ‘철도기지창 이전공약은 민주당 안양시장 후보와 민주당 구로구청장 후보자 간의 공약’으로 이미 몇 차례 보도된 바 있고, 또 선거 기간중 구로선관위에 이성 구로구청장 후보가 제출했던 12쪽 분량의 <선거공약서> 전문 내용, 그리고 선거 유세기간 중 이성 후보가 이 공약사항을 선거 쟁점화 하여 “안양시와 차량기지 이전에 합의했다”라는 식으로 일체의 자기주장을 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살펴보더라도 선거공보에 표현된 ‘구로 철도기지창 이전 공약’은 ‘선거사무 관계자의 실수에 의한 오기(誤記)’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또한 우리는 이성 후보의 ‘선거공보’에 실린 문제의 그 공약사항을 살펴보더라도 “구로1동 철도기지창 이전 반드시 실현하겠습니다.”라는 표현으로 그 제목이 적시된 것만 보더라도 ‘안양시와 이전 합의 체결’ 운운하여 이성 후보자가 선거에 이득을 보려 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1999년 늦깎이로 월간『문학세계』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돈바위산의 선물』등 여러 산문집을 펴낸 수필가로도 활동 중인 이성 씨는 서울시 시정개혁단장, 서울시 감사관 등으로 재직 중일 때 청렴과 소신, 도덕을 생명으로 여긴 공직자로도 유명하며, 이후 구로구 부구청장으로 재직할 때에도 <넥타이 마라톤대회> 개최, <서울수목원 건설부지> 확보 등으로 구로지역 주민들로부터 큰 사랑과 관심을 받은 바 있으며, 공무원 재직 시의 공적으로 <녹조근정훈장>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신산고초의 집안 형편 속에서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 지난 30년 동안 서울시민의 편에 서서 일해 온 이성 씨가 지난 6.2지방선거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며, 선거당시 현역 구로구청장으로 8년간 2차례를 재임했던 경력의 상대 후보와 무려 2만 표가 넘는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은 “열차차량기지 이전 공약으로 표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수긍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구로 지역주민들을 위한 문화, 복지공약으로 무엇보다도 투명행정, 청백리행정을 펼치겠다는 각오로 당선되어 현재 지역주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이성 구로구청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인해 구로지역 주민들의 희망과 꿈이 일시에 좌절되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제2심 재판부의 현명한 판결을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이성 구로구청장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여 재판부에 제출하고자 하오니, 그 뜻을 널리 헤아려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성 구로구청장 탄원 서명에 동참하는 문화예술인 일동
탄원 서명 발기자(무순)/ 박형규(목사,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성유보(언론인, 전 한겨례신문사 편집국장) 신경림(시인, 예술원 회원) 임재경(언론인, 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현기영(소설가,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구중서(평론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이계익(음악인, 전 교통부장관) 박기정(시사만화가, 한국만화가협회 초대회장) 임권택(영화감독) 신중현(음악인) 강민(시인, 전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채현국(효암재단 이사장) 황명걸(시인) 민영(시인) 한정식(사진가, 전 사진학회 회장) 서정춘(시인) 정희성(시인, 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무세중(연극인, 대동극회 대표) 김벌래(교수, 음향감독) 송상욱(시인) 주재환(화가) 손장섭(화가) 김용태(화가, 전 민예총 이사장) 장사익(음악인) 최백호(음악인) 박인식(소설가, 농심마니 대표) 조문호(사진가) 김신용(시인) 박재동(교수, 시사만화가) 손연칠(교수, 화가) 한봉림(교수, 도예가) 이경림(시인) 여운(교수, 화가) 이청운(화가) 기국서(연출가) 임진택(음악인) 김명성(시인, 창예헌 이사장) 이승철(시인,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최옥영(교수, 조각가), 최민화(화가), 박상희(조각가) 외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 이태종 판사님 귀하






지난 후원의 밤에는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세필후원회장께서 창예헌의 활성화를 위한 모금에 회원분들의 참여를
호소한 결과 많은 분들이 동참하였고, 작가들은 작품들을 기증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년말까지 후원금을 접수하여 사업계획을 확정할 예정입니다,
내년도 부터 의미있는 사업들을 펼칠 수 있도록
많은 회원님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현금으로 후원 약속하신 분)

오세필 (후원회장) 5,000,000원
김철기 (이사) 1,000,000원
이세희 (비 회원) 100,000원
안다혜 (회원) 100,000원
정기범 (자문위원) 5,000,000원
민 영 (고문) 100,000원
고문규 (회원) 500,000원
최백호 (자문위원) 1,000,000원
이용철 (회원) 100,000원
김명성 (이사장) 5,000,000원
최효준 (자문위원) 100,000원
공윤희 (이사) 100,000원


(작품으로 후원 약속하신 분)

서양화가 강찬모 (자문위원) : 서양화 1점
서양화가 장경호 (회원) : 서양화 1점
사진가 조문호 (자문위원) :사진1점(60x92cm 만지산5)
서양화가 전인경 (회원) : 서양화 1점
서양화가 이청운 (자문위원) : 서양화1점
서양화가 전강호 (회원) : 서양화 1점
서양화가 주재환 (고문) : 서양화 1점
시인 황명걸 (고문) : 시화 1점
서양화가 김용태 (자문위원) : 서양화 1점
문학평론 구중서 (고문) : 서화 1점
서양화가 손장섭 (회원) : 서양화 1점
서양화가 정기호 (비 회원) : 서양화 1점
동양화가 손연칠 (자문위원) : 초상화 1점(10호)
사진가 정영신 (사무처장) : 사진1점(40x60cm 눈 내린 풍경)
도예가 박영현 (회원) : 찻사발 1점
도예가 신동여 (이사) : 도예작품 1점
사진가 이수영 (회원) : 사진작품 1점
서양화가 김언경 (이사) : 서양화 1점
도예가 한봉림 (자문위원) : 도예작품 1점
도예가 정명수 (이사) : 진사 도예작품 1점

-후원금 보내는 은행 계좌번호-
우리은행 1002-344-128184 창예헌 (김명성)

-작품 보내는 주소-
110-280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1번지, 502호
창예헌 (02-725-8926)

#접수된 작품은 후원회 전시회에서 판매할 계획입니다.

-후원의 밤에 참석한 분 명단-
(회원)
민 영, 황명걸, 구중서, 강 민, 주재환, 무세중, 정기호, 최백호, 김명성, 오세필,
전활철, 노광래, 김철기, 김상현, 공윤희, 신동여, 김신용, 이청운, 조문호, 최영해,
김언경, 김용태, 최석태, 무나미, 박구경, 최효준, 손연칠, 강찬모, 이용철, 변형주,
주승자, 김정남, 전강호, 편근희, 김혜련, 한진희, 최일순, 안다혜, 이수영. 조경석,
장경호, 배성일, 변순우, 이명희 .조춘래. 양민호. 허윤정, 최석규, 고문규, 김민경,
이귀선, 최혁배, 정동용, 김효성, 이지녀, 민지영, 김명선, 김명지, 김연갑, 정영신
(비회원)
손장섭, 신준식, 함태근, 이세희, 나재문, 강미정, 송성아, 이남희, 김종군외











오십 여섯줄 편지를 쓰며 

                                          - 한봉림 형님에게 -



고마웠습니다 - 貳 주일 전 떠나오면서도 예술
만 이라고 눈물 휑했던, 낮달 같았던 형의 눈빛
말없이 긴 의자 떨리면서 마주 잡았던 큰 손의 의미
당일에서야 알게 되었던 구순 맞이 어머님을 다순히
그 가을 뜰 앞에서 뫼시고, 울산 세필형에게 조촐한
홍삼 하나 마련하며 그나마 몇 사람 고이 절할 제 -
어느 때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던 인사동 삼십년
조문호형의 사랑도 지치는가, 겨울 문턱이 차갑습니다.

어제는 이십수년 알은 척 생면부지 괴롭히면서 안하무약
사무실로 찾아들며 서툴지라도 예술이라는 자기우선
부끄러운 것도 생존이었다며 생떼 쓰고, 당신이니까 당신이라서
여전히 보태고 또 보태여야만 한다며, 꽥꽥대며 발악하는
반복되는 인사동 夜車 급류인생
침 뱉고 싶고 불끈 때려주고 싶은 여기까지를, 그래도
꿈이었을까 실소처럼 참아보며,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 칠백년의 해후를 보았습니다

대자대비 아미타삼존불 좌하단 서 있는 구렛나루 가섭을 보면
일천구백 팔십년, 추적추적 비 맞고 서있던 겨울 인사동
삼십년만 속절없이 되돌아오고
잊지 못할 십년 전 전남 완도 김신용형 치자나무 향기
신지도에 부서지던 명사십리 모래, 詩처럼 처용처럼 놀다가 간 종남산장
가을이 와도 부서지지 않던 그 형형했던 눈빛 당신은
그날 - 평생 모아왔던 宋 백자 그 모든 도공의 간직을 고스란히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문 없이 기증하고

허허 - 그 雪白 같았던 따뜻한 마음 이후 미욱한 아우는
한시라도 코끝 찡했던 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라서
봉두난발 다시 살아난 저 가섭의 깨어있는 염화미소를
차마 계면쩍어 답장조차 십년이 흐른 것입니다


오십 여섯이 되어 오십 여섯 명쯤
인사동 別별을 만났을까요
흩어져버린 백 팔명 - 천살·지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제야 도리천 씻겨가는 파란 江이 서럽습니다

승천하기 어려운 예술가의 땅이라지요
큰 사랑을 만날 수 없었기에 피곤함만 호적처럼 침묵하고
돌아 갈 곳이 내내 먼 길처럼 공허하여도
우리 모두 버려지는 것도 아닌데

다시 기억하자면,
이청운형의 기역자집의 연가와
가난했던 고아원 뒷산 역경의 염소 떼를 몰고 -
부산 초량 김신용형의 힘찬 짐꾼 출발과
끝내 양보해 버린 양동 울린 지게 하나
세상이 차마 격해, 화가 박광호의 생선 눈빛 좋아하던
김종구형의 빛바랜 데모사진 한 장쯤
우리가 갖고 싶었던 희망 같은 것이었지만

스물 여섯 제 가슴 속에 품었던 젊은 황명걸님의 한국의 아이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평양같은 여행길 걷지 못했고
식자공 ‘나의 길’ 민영님의 부러진 다리는
한탄강 엉겅퀴 꽃을 끝내 부르지 못했지만
다만, 무세중님의 돈암동 겨울산비탈 기어가며 오열했던 이무기의 슬픔은
옆자리 버스 동반한 사모곡 소리인생 김벌래님 눈시울을
소리 내어 붉히자 - 우리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삶입니까?

구름 저편 천상병님의 문등이 가시나 목순옥은
꿈마저 외상 빚을 갚고 싶었던 것이기에
우리는 도착하여 늦도록 설렁탕집 만수옥에서
소주를 붓으며 씁쓸히 감격했다는 것입니다

봉림형 - 이제 남겨진 몇 줄 편지 속에 그 날 못 다한 십년 쯤 텅 비울까합니다
도무지 창예헌의 샛강으로 말입니다 기국서의 불후의 명작 ‘관객모독’과 신진 여류
영화감독의 데뷔작 ‘엠블란스’를 밤사이 지켜내느라 얼굴 긁힌 형의 서리맞은 봉두 백발
질려 쏘아보던 형수님의 면전을 다시는 부끄러운 불초의 아우였지만
초겨울에도 따뜻했던 봄 완산 종남산 꽃마당을 왠종일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애절하게 끊어지지 않는 인사동의 노래 ‘봄날은 간다’를 누군가 소리 없이 선창할 때
우리는 1982년 완행열차 타고 야간상경 했던 조문호형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다 같이 합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천십년 십일월
1955년생 김명성 올림


행사가 끝난 후 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박았습니다.
일찍 떠난 최효준, 김혜련, 기국서, 정명수, 변순우, 임태종, 김상현,
하양수와 함께한 사람들이 모두 열 다섯명이나 빠져 좀 아쉽네요.
산삼 심으러 간 박인식씨는 어쩔수 없지만, 뒷줄의 키 작은 신성준선생이 보이질 않아요..

 




 

 

 

 

창예헌 예술기행 초대작가

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
김벌래의 확 까발린 소리인생
박인식의 24년째 산삼심기

세 번째 예정
구중서의 “문학은 길고, 정권은 짧다”
김신용의 “밥보다 시가 더 달았다”


일시 : 2010.10.30~31 장소: 종남산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주최 : 창예헌. 주관: 창예헌 전북지회. 후원: 농심마니.아라재.완주군.소양면



행사 일정

10월 30일 오후2시-4시
무세중의 '통막살' 굿 공연

10월 30일 오후 6시
송광사 산사음악회 참여

10월 30일 오후9시-10
무세중과 김벌래선생의 특별좌담회

10월30일 오후10시
박인식 출판기념회 및 농심마니와 함께한 캠프파이어

10월31일 오전8시 산삼심기(희망자에 한함)

10월31일 오전10시-11시
김벌레의 소리와 그의 소리철학을 듣다.




"꽃 길"

- 목순옥 여사 입관식에서 -

                           김명성


그대가 스러지는 노을
답장 없는 편지라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여비 하나
남기고 간 아내랍니다.

그대가 또다시 새벽녘에
괜찮다 괜찮다 우기신다면

저는 이제서야 가난한
그 첫날밤을 세어 볼래요

간다고 폭우가 쏟아지며
온다고 파랗게 개이는 산

꽃 던지며 쾌청한 하관
먼 산 안개 화사하게 웃는 오늘

참 아름다왔습니다
강물 그토록 역행하였어도

도도히 흘러가는 이 소풍을




(2010년 9월 10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노름마치' 진옥섭씨의 글)

상주는 오동나무나 대나무 지팡이를 짚어야 한다. 생전의 망자가 소갈머리 없는 상주를 키우느라 속이 썩어 텅 비었기에 속이 빈 나무를 짚는 거다.
인사동 찻집 ‘귀천’의 주인 목순옥 여사의 빈소. 자손이 없어 친정 조카들과 ‘귀천’의 단골 지인이 상주였다.
발인을 앞둔 8월 28일 밤. 모인 사람 모두 상장(喪杖)을 짚는 셈으로 오동나무로 만든 장구 반주에 대나무로 만든 대금 소리를 내며 판을 시작했다.

시인이자 기인(奇人)이었던 천상병의 배우자 겸 보호자였던 목순옥 여사. 그 텅 빈 삶을 기리는 듯 대나무 대롱을 빠져 나온 공명이 빈속에 삼킨 술처럼 번졌다.
이윽고 아쟁 선율이 가세하자 춤꾼 김운선이 살풀이 수건을 들었다. 서천서역의 꽃밭으로 가는 흰 길을 내듯 긴 수건으로 허공중천을 헤쳤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가수 장사익이 일어나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데, 한 음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판소리처럼 삭여내다 목젖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고음을 터트리자 숙연하던 장내에 추임새가 퍼졌다.

전남 진도의 ‘다시래기’ 같았다. ‘여럿이 즐긴다’는 뜻으로 ‘다시락(多侍樂)’이라고도 하는데, 상가에 풍악을 울려 웃음꽃을 피워 내는 풍습이다.
“그냥 보내드리기는 죄송해서”라는 말을 빌미로 종합병원 영안실에서 놀이판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화의 유목민’인데, 유서 깊은 풍류의 결사였다.

6·25 전쟁 후 명동과 충무로를 중심으로 모였던 문화예술인의 경계 없는 모임이 전신이다. 이후 그곳이 상업지구로 바뀌자 1960년대 중반 종로 관철동 쪽을 거쳐 80년대 초반에 길 하나 건너 인사동에 정착했다.
85년 문을 연 목 여사의 ‘귀천’은 노독(路毒)에 찬 유목민의 오아시스였다. 놀이판을 주선한 김명성씨는 “80년대 인사동엔 현찰이 없었다”고 했다. 대신 밥집과 술집엔 외상장부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한다.
‘문화의 유목민’은 정신이 자유로웠지만 경제는 자유롭지 못했던 거다. 그러면 형편이 되는 누군가가 알아서 갚아 주었다. 그 역시 ‘아라재콜렉션’을 운영하며 30년간 인사동의 밥값·술값을 댄 숨은 손이었다.
지난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창예헌(創藝軒)’으로 개칭했는데, 떠밀려 대표가 되었다.

그의 청사진인즉, 명동에서 인사동까지 풍류의 이주를 주도한 민병산·박이엽·천상병 3인의 동상을 인사동 네거리에 세우고,
야간 전시와 심야 공연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해 다시 풍류의 텃밭을 일구겠다는 거였다. 주말이면 내외국인 10만 명이 오가는 곳에 이렇다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 인사동에 나갔다. 한 달에 서너 번은 들르는데 갑자기 놀랐다. 대형 화장품 가게와 편의점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날 김명성씨가 중국인들이 인사동을 차이나타운으로 만들려 한다 해서 턱없이 웃었는데, 거리의 좌판은 중국 골동으로 가득했다. 가게 안의 우리 물건도 90%는 중국산이라 하니 이미 차이나타운이었다. 부지불식간 세계인이 걷고 싶은 특별한 거리가 별다를 바 없는 거리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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