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이너인 김의권씨의 작품입니다.
세가지 시안을 보내 왔는데 회원님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본 회의 제2차이사회가 지난 12월 19일 정오12시 경운동 "낭만"에서 개최되었다.
이사회에는 김명성이사장을 비롯하여 김언경, 전활철, 조준영, 정명수, 고중록, 노광래, 공윤희, 정영신씨 등 10명이 참석하였다.
회의 시작무렵 조준영이사의 단체 정체성 확립이 우선이라는 안건을 두고 협의한 결과
우리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는 기존의 목적이 너무 광범위 한데다 기존 단체와의 변별성을 갖기 어렵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김명성이사장이 제안한 "우리문화 지킴이'로서의 역활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잘못된 문화정책이나 사회적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자체 행사도 우리문화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행사로 치루기로 합의하였다.
회의 의제로 내놓은 단체명 변경만 통과되고, 축제사업, 창작지원사업, 출판사업, 홍보사업 등의 사업계획 및 예산안과 후원회 운영방안,
년회비 부과 및 임원출연금 문제. 전문팀 구성 등 모든 사안들이 차기 이사회로 보류되었다.
새롭게 단체의 정체성이 제시됨에 따라 내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안도 문화지킴이로서의 역활로 다시 편성하여,
오는 1월23일개최할 이사회에서 합의하고, 2월 하순에 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새로히 정해진 단체명 : “인사동 솔”

(제안 설명)
우리 모임의 이름은 절대 인사동을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인사동은 단순한 동네 이름에서 벗어나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는 한국문화예술의 핵심입니다.
한국문화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있는 뜻깊은 이름으로 생각합니다.

sol은 우리말로는 솔, 즉 소나무입니다. 솔은 하늘이라는 뜻도 있고 영어 발음으로는 소울, 즉 영혼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리고 불어로 sol은 땅이고 라틴어로는 태양이다. 그러니까 sol은 하늘 태양이며 땅인 동시에 하늘과 땅을 잇는 신단수로서의 소나무이기도하다.
외국인들에게는 "인사동 솔"이 "인사동 서울"로 통하기도 한다. 많은 뜻을 지닌 “인사동솔‘은 가장 현대적인 이름이기도 합니다.

단체명이 변경됨에 따라 홈페이지 주소도 www.wooricyh.com 에서 www.insadongsol.com으로 변경됩니다.
회원들의 편의를 위하여 한글 도메인으로는 www.인사동.org 입니다. 함께 사용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 회의 손연칠운영자문위원께서 Daum에 “인사동사람들‘이란 카페를 개설하여 본 회에 넘겨주었습니다.
현재 광안리 모임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들어있습니다. 많이들 방문하여 좋은 이야기 많이 남겨주세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성주 가야단에서 열린 “신종플루 악귀 물리치는 무세중의 굿퍼포먼스”가
창예헌 회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렸습니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펼쳐진 개단제와 무세중 굿퍼포먼스는 참가자들의 마음에 큰 여운을 남겼습니다.

동락골의 이시우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대동전위극회의 무세중선생님을 비롯한 단원들과 가야풍물패 단원들도 수고하셨습니다.
멀리서 참석해 주신 황명걸선생님, 송상욱, 감정남, 김명성, 박인식, 최제왕, 김혜련, 성익환, 반민규, 김주봉, 공윤희씨 등
참여한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창예헌이 영구적인 모임으로, 더 많은 일을 하기위해 다음과 같이 후원회를 발족시켰습니다.

가입비10,000원으로 단체를 운영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회비를 한 달은 5.000원씩, 1년은 50,000원씩 징수하자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좀더 의견을 수렴한 뒤 이사회에 안건을 상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뜻있는 분들의 후원을 기다립니다.
후원금은 1계좌에 100,000원입니다.
(계좌번호 : 우리은행 1002-344-128184 김명성)

후원회 위원장 : 오세필 (울산지회장)
후원회 위원 :김상현. 조성제. 강성수. 정기범. 곽성훈. 강선화. 문일석. 임태종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 박기정선생의 도록에 올린 김명성의 인사말을 옮깁니다.

"제자리 걸음에 대한 추억"

몇 주 전이다. 이른 폭염이 시작된 오대산 월정사 어귀 계곡 분지를 가득히 메운 청중들 사이를- 장사익, 최백호 형이 보이고
언제 들어도 찡하게 파고드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얘야,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의 문을 열게 되었고....'
'굳은비 내리는 밤 그야말로 옛날 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그런 가사의 속절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노 시인의 눈시울마저 끝내 붉게 하는데 "뭘 생각하시는데요?" ,
"기쁨 반, 슬픔 반 뭐..." , "에이- 황선생님, 옛여인이 떠오르겠죠?" , "으응-그렇지,"

박기정선생님의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 수상을 축하해 달라는 난데없는 SICAF의 요청을 받고, 팬클럽 오동추(오직 동심으로 추억하기) 의 과분한 회장직을 맡고 있는 염치없는 저로서는 아무래도 꽤나 긴 넋두리가 될 성 싶었지만, 가슴 찡했던 그때 그 사춘기적 얘기를 "제자리걸음에 대한 추억"이라 표제하고 싶었습니다.

느릿느릿 경적을 울리던 인천 뱃 다리 기찻길 사거리 초입,
비가오면 더욱 선명해지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주 오래된 초등학교 밑으로 즐비하게 늘어섰던 헌책가게들.
방과 후면 쏜살같이 달려가 아무데고 쪼그리고 앉아 저녁 늦도록 눈 떼지 못했던, 그제야 뿌듯했던 그 설레던 미래들,
경기도 배 소년체조대회 최고 선수로 뽑히던 날. 삼단 뜀틀 위를 멋지게 두번 돌다가 언뜻 보앗던 쌕쌕이 비행기. 폭음이었나 - 터지는 박수소리-
송글송글 잔잔했던 그 유년의 꿈들. 그러나 어느 날 깨어진 슬픈 기억 둘,
유복자였던 외삼촌, 어릴 적부터 신동이였던 형과 체조선수가 꿈인 나는 두어 살 터울이었다.
배운 것은 없었지만 인천에서 거부로 당당했던 아버진, 초등학교 1학년이 중학교 3학년 숙제를 해주는 형을 늘 대견스러워 했다.
1964년 제헌절 아침, 억수처럼 퍼붓던 장마빗속을 뛰어가던 문화극장 앞 신작로-
내 손을 쥐고 뛰던 형, 술 취한 미군 지프차. 폭우 속에 내 팽개쳐진 형의 신발 한 짝. 처음 보았던 아버지의 눈물....
새옷 입고 새신 신고 낯선 서울 하왕십리 판자촌으로 이사 오던 날, 이른 새벽부터 내 이름을 불러대며 문을 두드리는 친구들을 끝내 외면한 것은 헤어진다는 슬픔이 아니었지,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실패로 몰락해버린 살림, 집안 곳곳에 붙은 빨간 딱지를 보여주기 싫었던 부끄러운 자존심, 그래서 소년은 더욱 말이 없어지고..

서정춘선생님의; "꽃신"이라는 시에는 중학생때 처음 써 봤던 처녀시 두편 -장마. 미투리-와 비슷한 구절이 있었다.
어느 길 잃은 여자아이가-중략- /꽃 신발 한 짝만을 걸쳐서 들고 / 걸어서 맨발로 울고는 가고 / 나는 그 아이 뒤 곁에서 / 제자리 걸음을 걸었습니다. -중략-

그 뒤 곁에서 걷는 제자리걸음은 이제 와 생각해보니 때로는 박용래 선생님의 홍래( 鴻來)누이인듯도 하고 그래서 살얼음 기러기떼라며 눈 덮인 두만강 왼 종일 부르면서 그렇게 선생은 눈이오면 마셨겠구나!(지금도 비만오면 퍼마시는 내 모습처럼)
서울로 간 첫날 겨울인데도 비가 쏟아지던 날, 외삼촌이 데려간 청계천8가 바다극장,
동시상영 된 "황야의 은화일불", 이브 몽땅 주연의 "생사의 고백"을 구경하고 맛있는 호떡을 사들고 데리고 간 곳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않고 전교수석을 한 나를 축하해준 것만이 아니라 나중에서야 그날이 훈이 같았던 외삼촌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청계천8가 허름한 만화대본소에서 나는 박기정선생님의 "불발탄"을 보았다.
가난했던 미술학도 훈이가 장래가 보장된 미미와의 파리행을 거부하며, 역시 가난했지만 버릴 수 없는 수경이에게로 돌아오는 꿋꿋했던 그 모습, 그리고 그가 전람회 출품작으로 그린 "입체파식 고양이" 채색도 없이 보라, 회색으로 표시한 그 만화책 한 쪽 그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 일기장에 붙여 두었다.
사춘기 무렵의 그 일기장에는 세르게이 에세닌의 "문밖에서"라는 시와 함께 멕시코 작가 타마이오의 "Torsos"가 함께 생각나지만, 한편으로 저는 아버지와의 기대를 벗어난 외도를 하고 있었다.
장래희망란에 出家라고 써 넣는다던지, 방학동안 즐거웠던 일을 그려오라는 과제는 온통 회색빛 도시에 쇠사슬에 묶여 웅크린 사내를 그려 미술선생님의 빈축을 받기도했다.(그로 인해 곧잘 하던 미술을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슬픔과 기쁨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서툰 제자리걸음을 해 왔던 것입니다.

민병산선생님의 <고서이삭줍기>란 글중에 '슬픔과 기쁨'을 얘기한 대목입니다.
"슬픔은 책을 사고 싶은데 돈이 모자라 그대로 두고 나오는 일이지만 정말 큰 슬픔은 어느 선비의 혈육과도 같은 책이 도저히 임자의 손에서 떠날 리가 없는 그 책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어느 고서점에 팽개쳐져있는 슬픔이요, 기쁨은 오래 찾던 책을 만나고 무슨 책을 특별히 싸게 구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큰 기쁨은 그 고귀한 생명을 지닌 책이 자칫 휴지로 파해지는, 지금 막 저울에 달려는 그 찰나에 내가 손을 뻗어 구출하는 기쁨" 이라고 합니다.

오동추란 모임은 몇년전,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엊그제에도 충남 서산 산골과수원 어디라던가? 사과봉지로 싸매져 자칫 휴지로 사라질 뻔한 28쪽 만화를 발견, 힘들게 구출했노라고 하는 오경수, 만화 100년사에 또 다른 모습으로 새겨질 열정의 만화애호가,
박기정, 이문구 선생님에 의하면, 청산리 벽계수처럼 시원시원하게 속도감 있는 문장과 푸더분한 산골냄새와 유장하고 걸쭉한 입담으로 홍 벽초가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하고 먼저 날 잡아 기별해 올 법하다는 토종 문화제 <농심마니>대표 박인식 형의 헌신적인 주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 다른 회원 최백호 형은 20대부터 자기 노래의 주옥같은 가사와 호소력 짙은 음악세계, 그리고 얼마후면 발표될 그의 미술전시회에 그려진 모든 그림들이, 오로지 박기정 선생님의 <도전자>로 부터 나왔다고 열변하는데 누가 진정 훈이 인지?
- 나는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지만, 그로부터 40여년 지난 지금은 꽤 알려진 고미술 컬렉션이 되어 그림 모으기를 계속 했습니다.-

이제 제자리걸음에 대한 장활한 얘기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들의 감성어린 아름다운 젊은날,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던 그 모든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연애, 인생은 오로지 박기정선생님의 만화를 통해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의 서툰 '제리리걸음' 에 대해 육조 혜능이신 박기정 선생님은 오늘 이렇게 설법하십니다.

"깃발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 아니요
바람 때문에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그 제자리걸음은 앞으로도 언제나 그대들 가슴속 제자리걸음 아니겠는가?"

선생님 사랑합니다.

                                                                                                        2009년 장맛비 쏟아지는 아라재에서 김 명성


"월간미술" art lovers에 소개된 김명성이사장의 인터뷰 기사 전문을 옮김니다.

 

 "인사동 문예부흥을 꿈꾸는 열정의 컬렉터"

여기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이 있다. 중2때 멕시코 작가 타마이오의 그림과 러시아 농민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를

일기장에 스크랩했던 이 조숙한 소년은 가정 형편상 다른 길을 걷게되었다.
최근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9번째 명가명품시리즈"아라재컬렉션 조선서화보묵전'의 아라재가

바로 그 소년 김명성이다.
그는 단순한  고미술 컬렉터가 아니다.
근 30여년을 인사동에서 문화예술가들과 더불어 밤새 예술을 논하고 그들의 후원자로서 인사동을 예술의 중심지로 일구었다.
시인이 아닌 사업가가 되었지만 결코 단념할 수 없었던 예술에 대한 열망이 그를 자꾸 되돌려 새운 까닭이다.

그가 컬렉터가 된 데도 사실은 이런 배경이 있다.
예술가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게 되었던 것. 강찬모, 이청운, 최옥영, 조문호,이존수, 안창홍,

전항섭, 김영수 등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은 그들을 후원하기 위한 것이지 컬렉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이 이러하니 지금도 소위 블루칩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없다.
함께 예술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을 뿐이다.

1980년대초 '시인통신'이라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미술, 문학, 음악, 연극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과 인문학을 오가는 폭넓은 크로스오버를 시도한 것이 1980, 1990년대 인사동을 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했다.

그가 컬렉터로서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80년대 중반, 겸재 정선의 <단발령>을 구입하면서부터다.
그후 고암 이응노의 그림을 만났고 청관재 조재진 사장과 함께 고암의 최대 컬렉터가 되었다.
이뿐 아니다. 지금까지 20여년동안 민화, 조선의 서화, 도자기, 각종 공예품, 해외 작품 등 여러분야를 두루 섭렵했으며
특히 조선시대 전기부터 말기까지 작품을 고루 갖춘 그의 컬렉션은 이번 서예박물관의 소장품전을 통해 빛났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구축한 비결은 무엇일까?
"보통의 컬렉터가 수중의 돈 천원에서 백원을 할애해 작품을 구입한다면 나는 가지고 있는 돈 백원에 30원을 더 빌려 130원을 작품에 '올인' 했다. 이것이 내가 남도다 빨리 좋은 작품을 수집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준 있는 컬렉션을 이루기 어렵다.
"컬렉터가 되려면 첫째 재력, 둘째 안목, 셋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력과 안목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열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컬렉터에게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밖에 또 하나의 비결이 있다. 평소 아무 조건 없이 어려운 예술가들을 도운것.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다양한 경로로 매달 수천만 원씩 예술가들을 후원해왔다.
그래서 설령 그가 가짜를 사도 상인들이 나서서 해결해 줄 정도다.

"나는 특별히 재력이 있어서 컬렉터가 된게 아니다.
3개를 사고 그중 2개를 팔아 하나를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려면 좋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 좋은 컬렉션을 갖추기 위해 컬렉터는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작품 수집에 이토록 열심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그는 선문답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문화다"라고 말한다.
그는 컬렉터로서 저평가된 작품의 진가를 알리고 제대로 자리매김할 임무를 느끼는데,
이런 자각이 열정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가 진력하는 것은 바로 '서예'다. 서예가 대표적으로 저평가된 분야라고 생각하는 그는
서예작품을 모으고 해외에 반출된 우리 전통미술품을 되찾아 오는데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고미술 컬렉터가 해야할 일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 뜻에서 아쉬운 대로 이번에 소장품전을 열기로 했던 것이다.

때마침 숭례문이 불에탄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고 또 화재 이후 그에 대한 논의가 벌써 사그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으며, 이에 대중들에게 고미술과 거기에 어려있는 우리의 얼을 일깨우고자 하는 이유였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에겐 젊은 시절부터 마음속 우상이 있다. 바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청년실업가 김동근 선생이다.
그는 전쟁 후 1955년 사재를 털어 폐허가 된 명동에 예술가들을 위한 복합문화시설 '동방문화회관'을 건립했다.
지금 그를 기억이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 당시 그는 폐허 속에 다시 문화의 씨를 뿌리는, 그누구도 하지못한 일을했다.

지금 나는 그를 롤모델로 하여 인사동에 문화복합시설을 짓고 있다.
주말이면 5만 명씩이나 인파가 쏟아지지만 지금 인사동엔 뭐 하나 볼 것이 없다.
중국산 저질품이 거리를 메우고 원래 그곳에 있던 사람도, 화랑도 떠나고 없다.
문화예술은 사라지고 허깨비를 쫓는 구경꾼들만 몰리는 판이다.
그 인사동에서 다시 한번 문예부흥을 이루는게 나의 꿈이다.

"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미술, 문학, 음악, 연극, 철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을 논했던 인사동 특유의 분위기와 거기에 서식했던 문화예술인들이다.
그래서 그런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다.
아직도 가슴 한 켠에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간직한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그를보며 흉흉한 시대지만 그래도 '사람이 희망' 이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심정원 기자

 

우리문화텃밭 "創.藝.軒"발기대회 및 남산 산삼심기 축제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뜻을 모아
새로운 텃밭을 일구는 행사가 오는 22일 오전10시부터 남산 팔각정에서 개최되었다.
우리문화텃밭 “창예헌” 발기대회와 함께 펼쳐지는
이날 축제에는 많은 예술인과 산악인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하여
민족의 뿌리를 심고 우리문화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 150여명
박인식을 비롯한 농심마니 회원 100여명
엄홍길을 비롯한 산악인 50여명등 300여명이 참여한
이날 행사는 남산에 산삼을 심는 농심마니 들의 산신제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이 아래와 같이 펼쳐졌다.

후원: 서울특별시 중구청

행사개요

진 행 : 제1부 산신제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제2부 산삼심기 산행(오전 11시10분부터 12까지)
            산삼 심는 사람들 : 농심마니 회원 100여명과 인사동 문화예술인 150여명
                                      엄홍길 외 산악인 50여명
          제3부 서울 시민가슴에 봄 신명지피기 공연
            (12시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시 낭송 : 황명걸. 민영, 외
            퍼포먼스 : 무세중. 임경숙. 심철종외
            춤 : 한상근. 김운선 외
            소리 : 정경화외
            대금 : 원장현
            노래 : 장사익. 남궁옥분. 이경오, 송상욱 외
            만화가들의 현장스케치 : 박기정. 박재동외
            사진촬영 : 김상현, 이수만, 정영신, 조문호, 하형우
                         
      * 우리문화텃밭 “창예헌” 발기 대회 및 뒷풀이
            일시 : 3월 22일 오후 4시
            장소 : 인사동, 아리랑
            "인사동 사람들" 지명 수배전 : (사진)조문호




              "우리문화텃밭 “창예헌” 발기 취지문"

오늘 우리는 외래문화의 범람으로 인해 우리 고유문화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위기적 상황을 보며
그 책임이 우리 창작 예술인들에게 있음을 절감한다.
이 시대의 물질문명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정신문화는 오리혀 퇴조하고 서구문화의 모방과 답습으로
우리문화의 정체성을 잃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소극적이고 관조적인 태도로 현실을 도외시 해왔거나,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개인적이고 미온적인 상태에 있었음을 깊이 반성한다
우리 고유문화의 독창성을 지닌 작품들이 오히려 해외에서 평가를 받고 관심을 끌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마땅히 시대적 요구에 공감하여 우리 문화 예술을 더욱 더 발전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려고 한다.
우리는 예술장르의 창작 뿌리를 우리 문화에 두고. 각자의 예술적인 에너지를 독창적인 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또한 우리는 물론 자손들이 우리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고 생활 속에서 창작예술을 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하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우리문화의 텃밭이 될 수 있는 "창.예.헌"을 설립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자 한다.

                                                                                          우리문화텃밭 "創.藝.軒" 설립을 준비하며 ....


고문명단
강  민. 구중서. 목순옥. 무세중. 민  영. 박기정. 반야월. 방동규. 방영웅. 손의성.  신경림. 신성준. 신중현
심우성. 이계익. 이명동. 이재하. 임재경. 정인임. 주재환. 천승세. 최규일. 최정자. 채현국. 한정식. 황명걸

발기인명단
강기숙. 강기회.강선화. 강성수. 강찬모. 고중록. 공윤희. 공창호. 곽성훈. 곽영택 구중관.
기국서. 김경민. 김관수. 김대웅. 김명성 김민경. 김봉미. 김봉진. 김상현. 김상화. 김성애.
김신용. 김언경. 김여옥. 김연갑. 김영복,김용문. 김용태. 김의권. 김재식. 김정혜. 김진두.
김철기. 김형구. 김혜련. 김호곤. 김호근. 김홍성. 노광래. 노상훈. 노승대. 노인자. 명지혜.
무나미. 문순우 문일석. 박경미. 박광호. 박명옥. 박성식. 박영현. 박 욱. 박인식. 박재동.
박한웅. 배성일. 배평모. 배한성. 백순진. 변순우 변형주. 서정춘. 석벽송. 성민석. 성익환.
손연칠. 송상욱. 신동여. 신명덕. 신용철. 신윤택. 신현수. 심정원. 심철종. 안다혜 안영희.
양의숙. 엄인호. 여 운. 오경수. 유근오. 유양옥. 유재만. 이강용. 이경오. 이나미.
이동국. 이만주. 이명선 이명희. 이목일. 이범구. 이상배. 이상영. 이 성. 이수만. 이수영.
이아름. 이아영. 이유나. 이유리. 이윤섭. 이종길. 이지정. 이지하. 이철진. 이청운. 이혁발.
이희민. 임경숙. 임계성. 임계재. 임은순. 임철두. 장경호. 장익화. 전강호. 전인경. 전춘경.
전활철. 정기범. 정남규. 정동용. 정명수. 정영신. 정진택. 조문호. 조상현. 조성제. 조세환.
조  은. 조준영. 조춘래. 조해인. 조햇님 진옥섭. 최미정. 최백호. 최영해. 최울가. 최일순
최정순. 하태웅. 하형우, 한귀남. 한봉림. 홍수표. 홍이화. 황성건.


            사)우리문화텃밭 '創. 藝. 軒'

본부 사무국
110-310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91-1 서원빌딩 4층
            전화:02-743-1643  전송:02-743-1649

추진위원회
위원장 : 민 영
위원 : 강  민. 구중서. 목순옥. 무세중. 목순옥. 민  영. 박기정. 방동규. 방영웅. 신경림. 신성준
        신중현. 심우성. 이계익. 이명동. 이재하. 임재경. 정인임. 천승세. 최정자. 한정식. 황명걸

운영위원회
위원장 : 김명성 (010-5340-0195)
위원 : 곽성훈. 공윤희. 김상현. 김언경. 김용문. 김의권. 노광래. 신동여. 이 성, 전활철. 정명수.  조성제. 조준영

사무처장 : 정영신 (018-355-8926)


강원지부 :
233-801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윗만지산길 56-5  "한국사진굿당"
            대표 : 조문호 (011-268-6144)
            전화 : 033-563-6144  전송 : 033-563-6144

경기지부
447-140 경기도 오산시 궐동 497-1 "빗재가마"
            대표 : 김용문 (018-347-1336)
           

경남지부
676-821 경남 함양군 안의면 883번지 "함양예술마을"
            대표 : 이목일 (010-2938-8938)


경북지부
791-010  경북  봉화군 물야면 수식리 851번지 "도예공방"
            대표 : 신동여  (011-9573-6403 )

충북지부
395-804 충북 단양군 단양읍 도전리 507번지 "석파조형연구소"
            대표 : 김언경  ( 010-3221-1253 )

전북지부
565-841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474
          대표 : 한봉림  ( 010-3673-7687 )

부산지부
619-961 부산직활시 기장군 정관면 달산리 985-1 "곰내재 공원"
            대표 : 신윤택 ( 011-588-0628 )

2009년 3월 29일자 '종로신문"에 게제된 창예헌 발기총회와 남산산삼심기 행사 특집 기사 전문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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