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0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노름마치' 진옥섭씨의 글)

상주는 오동나무나 대나무 지팡이를 짚어야 한다. 생전의 망자가 소갈머리 없는 상주를 키우느라 속이 썩어 텅 비었기에 속이 빈 나무를 짚는 거다.
인사동 찻집 ‘귀천’의 주인 목순옥 여사의 빈소. 자손이 없어 친정 조카들과 ‘귀천’의 단골 지인이 상주였다.
발인을 앞둔 8월 28일 밤. 모인 사람 모두 상장(喪杖)을 짚는 셈으로 오동나무로 만든 장구 반주에 대나무로 만든 대금 소리를 내며 판을 시작했다.

시인이자 기인(奇人)이었던 천상병의 배우자 겸 보호자였던 목순옥 여사. 그 텅 빈 삶을 기리는 듯 대나무 대롱을 빠져 나온 공명이 빈속에 삼킨 술처럼 번졌다.
이윽고 아쟁 선율이 가세하자 춤꾼 김운선이 살풀이 수건을 들었다. 서천서역의 꽃밭으로 가는 흰 길을 내듯 긴 수건으로 허공중천을 헤쳤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가수 장사익이 일어나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데, 한 음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판소리처럼 삭여내다 목젖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고음을 터트리자 숙연하던 장내에 추임새가 퍼졌다.

전남 진도의 ‘다시래기’ 같았다. ‘여럿이 즐긴다’는 뜻으로 ‘다시락(多侍樂)’이라고도 하는데, 상가에 풍악을 울려 웃음꽃을 피워 내는 풍습이다.
“그냥 보내드리기는 죄송해서”라는 말을 빌미로 종합병원 영안실에서 놀이판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화의 유목민’인데, 유서 깊은 풍류의 결사였다.

6·25 전쟁 후 명동과 충무로를 중심으로 모였던 문화예술인의 경계 없는 모임이 전신이다. 이후 그곳이 상업지구로 바뀌자 1960년대 중반 종로 관철동 쪽을 거쳐 80년대 초반에 길 하나 건너 인사동에 정착했다.
85년 문을 연 목 여사의 ‘귀천’은 노독(路毒)에 찬 유목민의 오아시스였다. 놀이판을 주선한 김명성씨는 “80년대 인사동엔 현찰이 없었다”고 했다. 대신 밥집과 술집엔 외상장부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한다.
‘문화의 유목민’은 정신이 자유로웠지만 경제는 자유롭지 못했던 거다. 그러면 형편이 되는 누군가가 알아서 갚아 주었다. 그 역시 ‘아라재콜렉션’을 운영하며 30년간 인사동의 밥값·술값을 댄 숨은 손이었다.
지난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창예헌(創藝軒)’으로 개칭했는데, 떠밀려 대표가 되었다.

그의 청사진인즉, 명동에서 인사동까지 풍류의 이주를 주도한 민병산·박이엽·천상병 3인의 동상을 인사동 네거리에 세우고,
야간 전시와 심야 공연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해 다시 풍류의 텃밭을 일구겠다는 거였다. 주말이면 내외국인 10만 명이 오가는 곳에 이렇다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 인사동에 나갔다. 한 달에 서너 번은 들르는데 갑자기 놀랐다. 대형 화장품 가게와 편의점이 곳곳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날 김명성씨가 중국인들이 인사동을 차이나타운으로 만들려 한다 해서 턱없이 웃었는데, 거리의 좌판은 중국 골동으로 가득했다. 가게 안의 우리 물건도 90%는 중국산이라 하니 이미 차이나타운이었다. 부지불식간 세계인이 걷고 싶은 특별한 거리가 별다를 바 없는 거리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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