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와 전문 사진가 비교」

1. 친구에게 사진 자랑하면 전문가, 카메라 자랑하면 아마추어다.
2. '카메라의 렌즈 뚜껑을 덮고 다니면 아마추어 사진가, 렌즈 뚜껑도 없이 어깨에 덜렁덜렁 
    메고 다니면 전문 사진가이다. (사건현장이 필요한 신문사진 기자에게 필요함)
3. '길을 가다 사진거리를 만나면 아마추어는 그 자리에서 한 장을 찍고, 전문가는 앞으로
    뒤로 옆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러 장을 찍는다.
4. 아마추어는 찍은 사진을 모두 작은 사이즈로 뽑는 반면, 전문가는 밀착 인화하거나 필름 
    현상을 한 후 그중에서 선별한 것만 확대하여 사진을 만든다.
5. 아마추어는 화면에 이것저것 많이 담으려 하고, 전문가는 필요 없는 것을 덜어내려고 애
    쓴다.
6. 아마추어는 비 오는 날처럼 날씨가 나쁘면 촬영을 포기하지만, 전문 사진가는 날씨가 안 
   좋을수록 새로운 빛을 찾아 나선다.
7. 아마추어는 피사체인 사람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하고, 전문가는 피사체가 두려워할 만
   큼 다가간다.'
8. '아마추어 사진가는 친구가 오면 카메라를 자랑하고, 전문 사진가는 사진을 자랑한다.
9. 아마추어는 출사를 가면 회비 문제부터 걱정한다. 아마추어는 촬영을 나가면 항상 배가 
    고프다.
10. '아마추어는 다른 사람의 좋은 사진을 보면 흉내 내려고 한다. 전문가는 다른 사람이 
     좋은 사진을 찍으면, 한발 늦었다며 절망한다.
11. 아마추어는 전문 사진가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전문 사진가는 아마추어 시절의 떨림과 
     열정을 그리워한다.'
12. 촬영할 때 삼각대를 쓰지 않는 사람은 아마추어라고 단정하듯 말했다.
13. 찍고 싶지 않은 것도 찍어야 하는 사람은 전문가다. 전문가는 전문성과 일관성이 있다.


   
   1985. 1. 20 영천역 / 조문호사진
  
    

‘포토 저널리즘의 전설’ 로버트 카파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1944년 8월, ‘전쟁을 혐오한 전쟁 사진가’ 로버트 카파(1913~1954·사진)는 샤르트르 성당으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 남서쪽 도시인 샤르트르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독일군이 점령했던 지역을 연합군이 다시 차지한 직후다. 느닷없이 카파의 귀에 성난 군중들의 외침이 들렸다.

 “창녀, 창녀다. 독일군과 놀아난 부역자를 처단하라.”

한 여인이 공포에 잔뜩 질린 얼굴로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머리를 삭발 당한 그 여인은 어린 아기를 품에 안았다.

독일군 점령 당시 독일 군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군중들이 모두 “죽여라”를 외쳤다.

그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한 여성이 소리쳤다. “이건 잔인하고 불필요한 짓이다. 저 여인은 그저 군인들의 여자, 내일이면 미군과 잠을 잘 여자일 뿐이다.”

그러나 군중들은 여인을 따라가며 분노를 드러냈다.





카파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겁에 질린 여성을 카메라에 담았다. 유명한 사진 ‘전쟁과 여인’이다.

이 한 컷의 사진은 전쟁이 인간성을 얼마나 어떻게 파괴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사 이래 끊이지 않은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카파는 ‘전쟁과 여인’을 통해 전쟁의 잔인함, 참혹함, 허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본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포토 저널리즘의 전설’ ‘영원한 종군기자’라 불리는 카파의 사진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동시에 전쟁에 대한 짙은 혐오가 서려있다.

이는 그를 단순한 저널리즘 사진가를 넘어 포토 저널리즘의 신화, 전설로 만들었다.

카파의 대표작 중 하나인 ‘공화파 병사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공화파 병사의 죽음’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코르도바 전선에서 돌격하려던 그의 친구 병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찰나를 촬영한 것이다.

피격의 충격으로 순교자처럼 두 팔을 벌린 병사는 두 무릎이 꺾이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총을 놓치며 땅바닥으로 풀썩 무너져 내린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애인인 한 젊은이가 이 세상과 막 작별하는 순간을 렌즈에 담은 것이다. 그의 사진은 이처럼 비장하다.


‘전쟁과 여인’(1944년, 프랑스)

올해는 ‘카파이즘’이란 용어까지 탄생시킨 로버트 카파의 탄생 100주년이다.

전설적인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들이 마침내 한국을 찾아 관객들과 만난다.

경향신문이 주최하고 사진전시기업 디투씨(DtoC)가 주관하는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00주년 사진전’이

8월2일부터 10월28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카파 탄생 100주년과 6·25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한 이번 전시회에는 카파 기념재단인

미국 뉴욕의 국제사진센터가 소장한 160여점의 오리지널 프린트가 선보인다.

또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 다양한 소품도 함께 전시돼 카파의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다.

로버트 카파(본명 앙드레 프리드먼)는 1913년 10월22일 헝가리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정치적 박해와 반유대주의를 피해 독일 베를린으로 피신한 그는 사진 에이전시 데포트의 암실 조수로 일하면서 사진과 만났다.

그후 스페인 내전부터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인도차이나 전쟁 등 20세기 현대사의 가장 치열한 전쟁터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자기 희생, 죽음을 무릅쓴 기자 정신을 상징하는 ‘카파이즘’은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대변한다.

카파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의 권익을 위해 평생지기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모어 등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취지 아래 다큐멘터리 사진가 그룹 매그넘을 설립, 잠시 경영을 맡기도 했다.

그는 치열했던 삶만큼이나 유명인들과 교류도 활발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윈 쇼, 존 스타인벡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다. 피카소와 마티스 등 화가들과도 깊은 예술적 교감을 나눴다.

카파의 사랑 이야기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준수한 외모와 예술가의 풍모 등으로 당대 세계적 여배우인 잉그리드 버그만, 비비안 리와 한때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 당시 탱크에 치여 숨진 첫 사랑 게르다 타로를 평생 잊지 못한 그는 결국 여배우들의 청혼을 뿌리쳤다.

인도차이나 전쟁터에서 사진 촬영 중 타계한 카파는 죽는 순간에도 지갑 속에 게르다 타로의 사진을 간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파의 치열하고 극적인 삶과 작품세계는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의 초반부에 나오는 전투 장면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찍은 카파의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최근에는 로버트 카파와 게르다 타로의 애잔한 사랑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영화 <토르>로 잘 알려진 배우 톰 히들스턴이 카파 역으로, 여배우 헤일리 엣웰이 게르다 역으로 출연하는 <카파>(가제)가 그것이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 마이클 만 역시 로버트 카파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웨이팅 포 로버트 카파>를 준비하고 있다.

 카파는 마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지만 그의 사진에 대한 철학, 치열한 삶의 자세는 후세에 여전히 생생한 영감을 주는 것이다.

카파는 생전에 자신의 사진 정신, 삶의 태도를 한 마디로 압축했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아서다.”

그가 남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명구는 사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얼마전 '무다헌'의 술자리에서 만난 정희성시인께서 곧 시집을 출판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준비한 프로필사진이 너무 강하다는 말씀을 하셔서 제가 한번 찍어 보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장돌뱅이 주제에 술자리 뚜쟁이 노릇까지 하느라 연락할 겨를이 없었는데, 늘 마음의 짐이 되어왔다.

두 차례나 정희성선생의 연락처를 받은 기억은 있으나 평소 잘 챙기지 못하는데다, 핸드폰도 없고 전화번호 수첩까지 

없으니 연락처를 몰랐던게다.
마침 정희성선생과 가깝게 지내는 조준영교수를 지난 6월29일 '노마드'에서 만나 아예 날자와 장소를 정해 버렸다.

7월1일 오전11시경, 약속장소인 '귀천' 골목으로 들어서니, 먼저 나온 정선생께서 찻집 문이 잠겼다며 나오셨다.
문 잠긴 인사동의 찻집들을 배회하다 경인미술관을 거쳐'귀천'에 다시 가보니 그제사 청소를 하고 있어,

정희성선생의 초상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장소를 바꾸어가며 여러 장 찍긴 했으나, 초상사진은 본인의 의향이 중요하기해 모두 카페에 올려본다.

물론 내가 만족하는 사진도 있으나, 당사자를 위시한 많은 사람들의 취향을 종합해 객관성을 구하고자 하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진 한 장씩을 골라 댓글에 번호를 올려주시면 고맙겠다. 

 

 

(1번)

 

(2번)

 

(3번)

 

(4번)

 

(5번)

 

(6번)

 

(7번)

 

(8번)

 

(9번)

 

(10번)

 

(11번)

 

(12번)

 

(13번)

 

(14번)

 

(15번)

 

(16번)

 

(17번)

 

(18번)

 

(19번)

 

(20번)

 

(21번)

 

(22번)

 

(23번)

 

(24번)

-서양화가 이혁발-

 

사람들이 목욕탕에서는 스스럼 없어도, 누드 이야기만 나오면 색안경을 끼고 본다.
이십여 년 동안 남성의 신체를 찍어오며 부딪치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상대방의 알몸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일이었다.
어눌한 논리지만 집요하게 설득해보지만 그 편견의 철옹성을 깨는데 십중팔구는 실패했다.
그래서 20여 년동안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겨우 20여명 촬영하는데 그쳤다.

그 것도 그 방면에서는 좀 깨어있다는 예술가들이 대부분이다.
어차피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 갈 뿐이다.

그 편안한 자연 속에서 거추장스런 껍데기 한 번 벗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그 프로젝트에 동참한 후배 한 명이 얼마 전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형! 그 전에 찍은 누드사진 발표하지 마세요. 지금은 지방화단에서의 위치도 있고 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그 전시에 함께 할 자격상실이다.

몇 일전 ‘가족찍기’ 프레젝트의 일환으로 아내와 내가 서로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50장씩을 내 놓았다.
그 중 아내가 찍은 나의 알몸 사진 한 장이 공개되었는데, 그 사진들을 본 지인들의 전화 내용도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이는 “죽이는 포즈지만 쪽 팔리지 않느냐?”는 친구도 있고, 어떤 이는 사진적 리얼리티에 찬사를 보내는

양반도 있었지만 누가 뭐라던 내 생각은 아무도 바꿀 수 없다. 
아내와의 알몸사진에 대한 의견충돌을 이야기를 하려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아내 정영신씨와는 십년 넘게 함께 사진을 찍어 왔으나 단 한 차례의 의견충돌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내가 찍은 아내의 알몸사진 발표에 따른 의견충돌만 삼 년을 끌어 오고 있다.

그도 하잘 것 없는 누드사진이라면 신경 쓸 필요도 없지만, 3년 전 장대비가 쏟아지는 만지산에서 찍은

아내의 그 사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가 찍은  내 몸은 공개해도 되고, 내가 찍은 아내의 알몸사진은 공개해서 안 된다는

이런 불평등도 속이 터진다. 그 대목에서는 자기가 찍은 알몸사진도 내려주겠다고 대응하지만,

내리고 올리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진가로서의 자세를 탓하고 싶은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며 매번 물러나지만, 그 생각만 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래전에는 사진가 최광호씨가 자기의 어머니 알몸을 찍기 위해 숱한 설득을 해도 통하지 않자

“엄마 알 몸을 찍으면 내가 유명해진다”는 말에 옷을 벗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아내한테 유명해진다는 거짓말이라도 한 번 해볼까? 여러 가지 고민이 많다.

 

 

2013. 6.24

조문호

 


 

 

 

조문호를 찍은 정영신사진 50

 

늘 함께 하는 가족 기록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가족찍기' 프로젝트'이다.

사진 기록의 소중함은 먼데서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기 가족보다 서로의 심리나 습관을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내 놓는 사진들은 다큐사진가 조문호, 정영신 내외가 서로의 일상을 기록한 사진50장을 골랐다.

사진적 완성도나 작품성은 그 다음의 문제다.

계속 보완해 나가겠지만, 두번째 작업은 좀 더 내밀한 가정에서의 친근한 모습들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완성도나 작품성이 충족되면 사진 속의 이야기와 함께 한 권의 앨범으로 묶을 계획이다

 

                                                     2013.6.19 / 서울, 인사동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

 

조준영씨를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정선에서 오느라 힘이들어 누워 버렸다.

정신없이 자고나니 전화벨이 울렸다.

“바람 맞히면 어쩝니까? 저녁이나 드시러 나오라”는 조준영씨의 전화를 받고서야 인사동에 나갔다.

 '노마드'입구에는 최혁배 변호사와 이명선씨가 자리하고 있었고, 안쪽 자리에는 아내와 조준영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콩국수로 허기를 메우고 나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김상현, 장경호씨가 나타났다.

오랫만의 반가운 만남이라 부어라 마시어라 퍼 마셨다.

그런데 김상현씨의 음악을 감상하며 기분좋게 술이나 마시면 그만이지, 돼지 목따는 소리로 발광을 했는지?

왜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이 되는지 모르겠다.  

 

2013.4.16 / 마산, 창동

 

'인연'

 

첫 만남에서 부터 형님으로 반긴 김종호씨를 만난 지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처음엔 좀 얼떨떨했으나, 점차 그의 진심을 알게 되어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의형제로 결연을 맺어 졸지에 듬직한 아우를 두게 되었는데, 지지리도 못난 인간이 인복 하나는 타고났다.

사람의 인연이란 우연으로 보이지만 난 필연으로 생각한다. 

가끔 악연으로 변할 때도 있지만, 점지한 인연도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렸다.

 

위의 사진은 세 번째 마산을 찾았을 때, 반가워 포옹하는 장면이다.

2008.12.30 / 서울, 녹번동

 

2013,4.16 / 서울, 팔판동

 

사진판의 소식통, 곽명우를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진인 들이 폼 잡는 걸 좋아한다.

무슨 대단한 예술들을 한다고 카메라는 고이 모셔둔 채, 주변의 사소한 기록들을 우습게 여긴다.

사진가 곽명우씨는 남들이 싫어하는 주변의 기록들을 오랜 세월 혼자 도맡아 해냈다.

중요한 사진전 오프닝에 가면 언제나 그를 만날 수 있다.

심지어는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시간을 늦추어 기다리기 까지 한다.

몇 년 전부터 블로그 '사진바다'에 모든 소식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올려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사진을 위해서다.

 

                                                                            2011.9.25 / 서울, 원서동

 

                                                                                '다큐 사진의 전설 구와바라 시세이를 만나다'

 

70년 대 부터 한국의 사회상을 기록하여 왔던 사진가 구와바라 시새이(76세) 선생이 인사동에 왔다.

사진가 한정식, 정영신, 이규상씨와 함께 원서동의 중국집 '용정'에서 고랑주 한 잔 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그는 전주 여인을 아내로 둔 탓인지 한국에 애정을 가진 지한파 사진가이다.

그를 생각하면 비 오는날 서울대생들이 침묵시위를 하는 사진, 월남 파병을 앞둔 장병들과 가족들의 모습,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 빈민들의 생활상 등 여러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어눌한 한국말과 일본말을 섞어가며 그 때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모습에서 노장의 여유를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사라지겠지만 나의 사진들은 영원 할 것이라고.."

 

2013.6.18 / 정선, 윗만지골 

 

2012. 9. 13/ 서울, 인사동

 

'조문호의 금연식'

 

인사동 '푸른별이야기'에서 담배와 헤어지기 위한 금연 퍼포먼서를 가졌다.

김언경, 전활철, 최일순, 정영신, 김지호, 이주원씨를 증인으로, 마지막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까지 촬영하였으나  

결국 한 달을 버티지 못한 채 말짱 도로묵이 되어 버렸다.

그 날 금연 퍼포먼서를 하며 뱉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 이제 담배 피우면 개새끼다" 

그래서 나는 개가 되었다.  멍멍멍~

 

2010.12.2 / 서울, 인사동

 

2013.6.10 / 서울, 인사동

 

2010 .5. 1 / 서울, 인사동

 

2012.9.9 / 서울, 인사동

 

2013.5.14 / 서울, 인사동

 

2010.5.1 / 서울, 인사동

 

2012. 10.16 / 정선, 윗만지골

 

2010.4.8 / 서울, 안국동

 

2013. 11, 2  정선, 윗만지골

 
고삐 풀린 망아지, 드디어 발목 잡히다.

 

앞만 보고 달리던 작업에 드디어 제동이 걸렸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병실에 갇힌 지금에서야 모든 상황을 되 돌아보게 되었고, 이번 사고의 원인과 입원하기까지의 과오를 뉘우치며 반성문을 쓰게 된 것이다. 자연을 해쳤고, 비록 자신의 몸이지만 인간의 신체를 학대한 것에 대하여...

지난 달 정선 만지산 ‘사진굿당’의 벌목 작업을 시작했다.
만지산에 들어 온지 15년이 넘었지만, 자연스러운 환경을 좋아한 탓에 가능하면 주변의 자연환경에 손대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산골에서 살아가는 이웃의 생각은 달랐다. 나무를 잘라 집 주위를 트이게 하라는데, 어느 날 최종대씨가 찾아와 말했다.
“작가님! 저 상수리나무 베어야 합니다. 강풍에 넘어지면 큰 일 납니다.”
사실 나도 그 상수리나무가 눈에 걸렸다. 예전에는 그림 같이 잘 생긴 소나무 사이로 떠 오르는 일출을 방안에서도 내다볼 수 있었는데, 20m 높이로 자란 상수리나무가 그 기막힌 풍경을 막아버렸다. 이젠 주변 잡목들까지 더해 입구를 음습하게 만든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수리나무부터 잘랐다. 워낙 덩치가 커 나무에 톱날이 끼이기도 했고, 톱날이 망가져 정선 읍내를 오가느라 나무 한 그루 베는데 온 종일 걸려야했다. 그리고 경사진 위치의 불편한 자세에서 기계톱을 들고 뒤로 넘어지는 실수도 했다. 머리 위를 스친 톱날이 모자를 갈기갈기 찢었는데, 정말 식은땀 흐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후 11월 2일, 정선아리랑시장 촬영으로 아내와 동행하여 나머지 잡목들을 잘랐다. 아내가 도와주려 나섰으나 사양했다. 나는 남들이 도와주는 것을 싫어한다. 도움에 따른 심적 부담도 따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마무리를 감안할 때, 좀 늦어도 혼자 하는 것이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을 아는 아내인지라 잘라놓은 나무들만 낑낑대며 마당으로 옮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날 몸살을 앓아 하루 종일 일손을 놓아야 했다.

지난 11월 14일 다시 정선을 찾았다. 정선아리랑시장에서 관광객들이 줄어드는 비수기를 맞아, 향토음식 뷔페시범운영을 마무리하며 시장을 위해 고생한 분들에게 식사 접대하는 자리를 만든다기에 찾아 간 것이다.

전날 아침 일찍 귤암리에 도착해 남은 나무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밭에서 콩대를 실어 옮기던 최종대씨가 다가와 담배나 한 대 피우고 하란다. 담배를 부쳐 물며 "주변에 상수리나무는 많은데, 왜 도토리가 하나도 없냐?"고 물었더니 올 해는 농작물이 풍년이라 도토리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토리는 흉년에만 열려 농민들의 보릿고개를 메워준다는 말인데, 아마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없는 악천후를 도토리가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최씨는 “혼자 벌목하다 나무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던지고는 다시 경운기 시동을 걸었다. 그 말을 남기고 출발한 지 얼마지 않아 갑자기 비슷한 사고가 일어 난 것이다.

 

기계톱으로 큰 잡목의 밑 둥지를 잘랐는데, 앞쪽으로 넘어져야 할 나무가 칡넝쿨에 걸려  왼쪽 발등에 떨어진 것이다. 발이 어스러지는 통증에 비명이 튀어나왔으나, 더 난감한 것은 나무둥지에 눌린 발목이 빠져 나오지를 않는 것이다. 발을 빼내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만 더 커져갔다.
“창수 아버지~”라며 목이 터져라 불렀으나 “탱~탱~탱~탱~“하는 경운기 소리만 멀어져 갔다.

꼼짝 못한 채 나무에 붙들려 있어야 했는데, 그 충격적인 고통도 시간이 갈수록 마비된 것처럼 감각이 무뎌졌다. 이런 저런 걱정을 하다 ”그래 발가락 쯤 없어도 사진 찍는 데야 지장 없겠지, 차라리 장애자등급이나 받아 자동차 운행에나 덕 좀 봤으면...“하는 방정을 떨기도 했다. 힘이 빠져 땅바닥에 퍼져 앉아 나무둥지에 끼인 발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꼬챙이로 신발 밑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발에 약간의 틈이 생겨 신발과 양말을 둔 채, 발목만 간신히 뽑아 낼 수 있었다. 마치 피지처럼 납작해 진 발가락과 시퍼렇게 변한 발등에 놀라 병원을 가려 했으나 잡목들이 길을 막아 차를 빼 낼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아픈 발을 질질 끌며 나무를 다 치우고 나니 서서히 어둠이 밀려왔다.

정선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엄지발가락의 뼈는 완전히 어스러졌고, 주변 인대 손상도 많았단다. 젊은 의사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엄지발가락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 받아야 한다며 소란 떨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일 정오에 시장에서 한 시간 쯤 일 하고 가야하니 응급조치와 깁스만 해 달랬으나 "무슨 일이 자기 몸보다 더 중요하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틀 날 정선아리랑시장으로 촬영하러 나갔다. 정선시장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에 앞서 시장사람들이 어울려 서로 격려하며 정을 나누는 모습들을 기록하려는 사진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사장의 상황은 예상을 빗나갔다. 사람들이 몰리는 장날을 피한 탓인지 노점상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았고, 관광객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지나친 집착과 고집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목발에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촬영은 했으나 내가 찾는 정경은 만날 수 없었다. 갑자기 목표에 대한 긴장감이 풀려 허탈해지니 발등은 더 아파왔다.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정신없이 차를 몰아 왔는데, 내부순환도로에 접어들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변속하느라 다친 발로 크라치를 반복해서 밟았더니 진통이 몰려와 입술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도착한 즉시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 이틀 날 뼈를 고정시키는 핀 두 개를 박았다. 하반신 마취가 덜 풀려 좀 몽롱한 상태였지만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고에 대한 미안함보다 병원비 청구서가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실 침대에 노트북을 올려 아내에게 올리는 반성문을 쓰게된 것이다.
“미련하고 고집불통인 이 늙은 중생을 굽어 살펴 달라”고...

 

 

2012,8.8 / 양산, 답곡리

 

2013.4.25 / 서울, 신촌

 

                                                                            2012.10.14 / 서울, 인사동

 

                                                   

                                                                             '스스로 술상을 차린다.'

 

살아 땡초로 불렸던 시인 최영해씨가 저승으로 떠난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 당시 갑작스런 부음을 받고 봉화 '一笑庵'에 갔을 때, 오랫동안 시신을 방치하여 방바닥에 얼룩진

그의 형상을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사는 시골동네에서 옆집 사람이 죽어 썪어가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이런 일이 있는지?

죽어서도 장례식장에도 못가고, 얼마 전 적음선사를 따라 간 이종문씨의 술집에서 그리고

여관방에서 지인들이 향을 피우고 술을 따랐을까?

이 일은 이웃사람을 원망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비롯하여 사회 모두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현대 물질문명이 낳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가 생전에 남긴 외로움 절절이 사무치는 시편들을 읽으며 조그만 시비라도 세워

오랫동안 추억하고 싶었으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않고 세월만 흘러가 버렸다.

늘 마음의 짐이되어 부담되었으나 다행히도 일주기를 맞아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추모제를 올리므로,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며 추억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밤,

적음이 차린 술상 앞에 벗들이 모여 앉아 생전의 기행들을 씹으며,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2008.7.8 / 정선, 윗만지골 

 

2012.5.6 / 정선, 윗만지골

 

'달밤의 추억'

 

달밤에 모닥불 피워놓고, 만지산 자락에서 노래를 불렀다.

김상현씨는 "잘 있거라 나는 간다"를 목이 터져라 열창했지만

구름 속에 가린 달을 보니 갑자기 죽은 울 엄마의 십팔번이 떠올랐다.

 

"구름 속에 달빛만 엉큼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당신의 마음도 검구려

한 되 술 이백 원에 취하면 그만이지 때 묻은 치마자락 왜 붙드시나요.

막걸리 사랑이란 싸고도 비싸다~

나도 순정은 있어요. 사람 괄세 마세요."

 

2012.9.10  / 서울, 인사동

                                                   

                                                                    '개망초 시인 최정자선생을 만났다'

 

몇 일전 뉴욕에 계신 원로시인 최정자선생님께서 귀국해 모처럼 인사동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경주에서 열리게 될 국제펜클럽에 참가하기 위해 오셨다지만,'북소리'시집 출판이 더 큰 목적이셨다.

미국에서 책을 내면 비용이 많이 들어 한국 출판사에 맡겼다는데, 출판사가 애를 많이 먹이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가난한 시인의 소박한 꿈에 상처를 주는 일이 벌어진다는 게 너무 슬프다. 

이민 가서 서울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서울로 서울로"란 시집까지 내셨는데, 이젠 그 곳에 정이 좀 붙었을까?

가는 세월은 아무도 붙잡을 수 없겠지만, 부디 건강하고 재미있게 지내세요. 

 

2012.6.29 / 정선, 윗만지골

 

'앵두 맛의 재발견'

 

몇 해 전 정선'사진굿당' 물가에 앵두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심은 지 2년이 되던 2010년 봄, 가지마다 흰 꽃들이 팝콘처럼 달라붙더니 앵두가 주렁주렁 열렸다.

앵두가 맛없는 과일이란 걸 어린 시절부터 알았지만, 탐스러운 앵두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작년에는 너무 아까워 앵두 술까지 담았는데, 빨간 빛깔에 비해 술 맛은 별로였다.

지난 6월 초순경, 빨간 앵두들이 나를 유혹했으나 새들이 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번에 가보니 아래 가지는 누가 따 먹었는지 없었고, 위에만 조금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변이 생긴 것이다.

앵두가 탐스러워 심심풀이로 한 알 따 먹었는데, 시큼 달콤한 예상 밖의 앵두 맛에 깜짝 놀랐다.

여지껏 빨갛게 물만 들면 익은 것으로 착각했으나 다 익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앵두가 맛이 드는 시기는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몰랑몰랑 할 무렵 잠깐 맛이 드는데,

늘상 서울에 메 달려 있으니 잘 익은 앵두 맛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2012.8.27 / 서울, 인사동

 

2012. 2, 13 / 서울, 인사동

 

 

2010.7.12 / 정선, 윗만지골

 

'개망초도 꽃이다'

 

도라지 밭이 개망초 밭으로 변했다.

서울에 있는 날이 많다보니 잡초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제초제로 단숨에 박살낼 수도 있으나 누렇게 말라 죽어가는 꼴은 차마 보지 못하겠고,

자칫하면 좋아하는 봉선화, 채송화, 코스모스도 함께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삼년 전 도라지를 심을 때부터 식용보다 관상용에 더 비중을 두었기에,

메밀꽃처럼 하얗게 무리 진 개망초 꽃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좀 더 기다리다 꽃이 질 무렵에나 뽑을 작정이었으나 ‘빈집이나 게으른 집의 상징’이라는 아내 충고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진종일 개망초를 뽑으며 아쉬움이 남아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개망초 사이사이에 숨어있던 도라지꽃들이 수줍은 듯 얼굴을 내밀지만 풀숲을 이룬 개망초 꽃에 비할 바 아니었다.

오래전 처마 밑 전봇대 주위로 흙을 돋우어 조그만 동산을 만들었다.

그곳에 옮겨 심었던 야생화도 결코 잡초에 다름 아니다.

모두들 나름의 꽃을 피우지만 꽃의 생김에 따라 야생화와 잡초로 분류, 차별하는 것이다.

꽃은 꽃이지만 못생긴 죄로 죽임을 당하는 잡초 신세나, 푸대접 받는 사람 신세나 다를게 뭐 있는가?

개망초 꽃을 뽑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잡초처럼 누군가를 차별하지는 않았는지? 차별 받고 살지는 않았는지?..

 

2010.9.4 / 정선, 윗만지골

 

'산신령도 놀란 생일잔치'

 

생일을 소문낸 아내의 극성으로 벗들이 만지산으로 몰려들었다.

한 풀 꺾인 마지막 여름밤은 깊어만 가는데, 모두들 잠자리에 들 생각을 않고 놀았다.

주위에 숨어있는 산짐승이나 풀벌레들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하늘에다 연기를 잔뜩 피워 올리며 난리를 피웠으니..

그 이틀 날 운해가 산 구비 구비에서 노닐다 소낙비가 쏟아져 내렸다.

 

2011.12.22 / 서울, 충무로

 

"진우회 맴버들, 오랫만의 회우"

 

진우회는 인사동에 있었던 흑백현상소"꽃나라"에 드나들던 사진인 들의 모임이다.

82년경 결성하였으나 회원들이 술을 너무 좋아해 진로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90년 무렵 '한국환경사진가회'를 만들어 합류했으나 일보다 명예를 따르는 사진계의 거간꾼들 농간으로

2009년 무렵 단체를 아마추어 사진인 들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 이후 꽃나라를 운영하던 신희순씨는 세상을 떠났고, 고영준씨도 태국으로 이주 하는 등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오래 만에 망년회 핑게 삼아 몇 명이 만나 소주잔을 기울였다.

좌로부터 정동석, 선우인영, 조문호, 김종신, 이혜순, 하상일, 정철균, 유성준,김흥모, 앞줄 좌로부터  배창완, 윤봉수,

 

 

2008.7.8 / 정선, 윗만지골

 

2013. 1. 4 / 서울, 인사동

 

2011. 5. 20 / 고양, 정발산

 

2013.6.26 / 제주, 모슬포

 

2010. 4.29 / 서울, 인사동

 

2011.11.2 / 서울, 인사동

 

2011.12.13 / 서울, 인사동

 

2011.12.13 / 서울, 인사동

 

2009.8.8 / 정선, 윗만지골

 

'놀자 학교'를 아십니까?'

정선 "사진굿당"에서 가진 놀자학교의 첫 번째 모임에서 찍은 사진이다. 

 

요즘 사람들은 노는 방법을 잊었는지 컴퓨터와 핸드폰만 끼고 산다.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노는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취지로 놀자학교를 만들었지만

학생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 노는데 이력 난 교수님들만 모였다.

 

2011.11.5 / 서울, 신사동

 

2010. 8.29 / 의정부, 공원묘지

 

목순옥여사 떠나는 날

 

귀천의 목여사께서 천상병선생 따라가는 날은 아침부터 장대비가 내렸다.

아니 비가 아니라 인사동 사람들의 눈물이었다.

 천상병 이름 석 자를 빛내려 만든 천상병문학상 덧에 걸린 것이다.

결국은 빚에 쪼들리다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인사동 '귀천'앞의 노제에는 우중에도 많은 지인들이 모여 영면을 빌었다.

의정부 공원묘지에서 천선생님 시신에 합장할 즈음에는 모두들 눈물을 삼켰다.

 

사랑하는 두 내외가 천상에서 상봉하는 날, 울긴 왜 울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2013.5.25 / 춘천, 어린이회관

 

2013.3.25 / 서울, 인사동

 

2013.4.16 / 서울, 팔판동

 

2013.6.7 /논산, 양촌장

 

2012.11.14 / 서울, 인사동

 

2008.9.8 / 정선, 윗만지골

 

                                                                           '울엄마 무덤에 하소연하다'

 

계속해서 비가 추적 추적 내리드니 추석 전 날 비가 그쳐 부랴 부랴 만지산 산소에 벌초하러 갔다.

무더운 날씨에 풀 베느라 땀께나 흘렸는데, 무덤 속의 어머니께 이런 저런 하소연했던 이야기와 그 대답을 추정해 본다.

 

조통수 : 엄마 벌초하러 왔슴니더. 비가 마이와 자리가 꿉꿉하겠네요.

엄마 : 걱정도 팔자다. 근데 니 색시 안색이 와 그렇노?

통수 : 말도 마이소. 장모님이 너머져 고관절이 불라졌는데, 그 병수발로 똥줄 빠집니더.

엄마 : 아이고 우짤꼬? 나도 당해봐서 아는데, 아 낳는기 아푸다지만 그거는 호리뺑뺑이다. 올메나 아픈지 말도 몬한다.. 안사돈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차라리 돌아가시는 기 훨씬 편하데이.

통수 : 헛말이라도 그런 소리 마이소. 애편내한테 제사 밥도 한 그릇 몬 얻어 물라 카나. 올메나 장모님을 지극히 모시는지 효녀 심청이가 문안드릴 정도요. 엄마도 아플 때, 돌아가시는 것이 편하겠다는 내말에 삐껴가지고 말도 안 해노코...

엄마 : 모두 이승의 미련 때문에 나부댔지만 저승 문으로 들어오마 다 부질없다. 그거는 그렇고 추석 음식은 만들었나?

통수 : 밤 세가며 맨들어 왔지요. 그라고 이번 추석은 과일이 비싸서 개수를 좀 주랐으니 이해하이소.

엄마 : 제사음식을 너거가 묵지 내가 묵나? 넘보기 넘사스러워 그렇지...

 "야 이 썩을 넘아! 처삼촌 매떵 벌초하드시 하지말고 좀 단디해라."

통수 : 땅이 질어 잔디가 뽀피사서 살살하는기요.

엄마 : 다른 사람들은 매미채같은 톱을 가지고 잘만 돌리삿든데, 니는 이빨빠진 낫으로 설치냐?

통수 : 엄마 귀 짤릴까봐 제초기를 몬 사지요.

엄마 : 땅 밑에 누웠다고 날 흑사리 껍디기로 아는 모양인데... 기계 살 돈은 있고? 

하기사 기계 소리가 시끄럽고 겁도 나더라.

통수 : 엄마! 색 나른 이 조화는 뽀바버립시더. 주변에 코스모스, 백일홍이 좌악 핏는데 촌시럽게 조화가 므슨 필요있소?

엄마 : 그런 소리마라. 요 우에 사는 용삼이 할매는 이 조화를 올매나 탐내는데.. 만나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조화 사온 니 칭찬을 해사며 부러버한다.

통수 : 아- 알았어요. 내년 봄에 아예 양귀비 조화로 갈아 드릴테니 찐득 찐득한 애편이나 좀 빼주소. 확 묵고 죽어버리게...

엄마 : 니 애편 하나? 올들어 니 꼬라지도 행편없고, 아가 영 매가리가 없어 빈다. 므슨 걱정 있나?

통수 : 말도 마이소. 이십년 넘게 마음 준 넘한테 뒤통수 맞으니 뒤끝이 오래 가네요.

엄마 : 내가 뭐라 카더노? 친구를 가려 사귀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안 했나. 식구는 뒷전이고 맨 날 어불려 싸다니더니 꼴 조오타. 아직도 김해 남구는 만나나?

통수 : 제발 잔소리 좀 하지 하소. 남규 만한 넘도 없소, 씰데없는 소리 말고, 해 넘기기 전에 햇님이 장개나 좀 보내주소. 다른 친구들은 손자 넘들 재롱에 자빠진다는데...

엄마 : 걸어 다니는 니넘이 못하는 일을 땅속에 누운 내보고 우짜란 말고...

통수 : 매떵에서 뜨끈 뜨끈한 거시기 바람을 햇님이한테 한 방 미길 수는 없는기요?

엄마 : 미친 넘!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2013.1.23 / 서울, 인사동

 

2012.3.17 / 서울, 인사동

 

2011.12.13 / 서울, 인사동

 

2010. 9.4 / 정선, 윗만지골

 

2007.9.5 / 경주, 보문단지

 

'조문호의 프로포즈'

 

우리 부부가 십년 넘게 살았지만 아직까지 결혼식은 커녕 신혼여행도 못 갔다.

6년 전 경주에서 '두메산골 사람들'초대전을 가졌는데, 마침 주최 측에서 근사한 호텔방을 잡아 주었다. 

뻔뻔스럽게도 아내에게 말 했다. "경주에 신혼여행 온 기고, 여기가 신방이대이!

내일 새벽에는 토함산 석굴암에 가서 자식들을 열 명만 낳아 달라고 빌어보자"

 너스레를 떨어가며 스탠드에 올라가 온갖 아양을 떨며 프로포즈하는 장면이 검열에 딱 걸렸다.

결국 그 날 밤 너무 무리해, 눈을 떠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잘 모르는 석굴암 부처보다, 더 친한 만지산 미륵한테 빌자며 또 어물쩍 넘어갔다.

 

 

 

 

정영신을 찍은 조문호사진 50

 

늘 함께 하는 가족 기록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가족찍기' 프로젝트'이다.

사진 기록의 소중함은 먼데서보다 가까운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기 가족보다 서로의 심리나 습관을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내 놓는 사진들은 다큐사진가 조문호, 정영신 내외가 서로의 일상을 기록한 사진50장을 골랐다.

사진적 완성도나 작품성은 그 다음의 문제다.

계속 보완해 나가겠지만, 두번째 작업은 좀 더 내밀한 가정에서의 친근한 모습들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완성도나 작품성이 충족되면 사진 속의 이야기와 함께 한 권의 앨범처럼 묶을 계획이다.

 

2013.4.13 / 서울, 인사동

 

2011.1.12 / 예산장터

 

2013.4.13 / 서울, 관훈동

 

 

2013.4.13 / 서울, 인사동

 

2013.3.26 / 인천, 배다리

 

2011.5.2 / 서울, 여의도

 

2013.3.17 / 정선장터

 

2012.3.15 / 논산 연무장

 

2013.1.17 / 서울, 인사동

 

2011.1.19 / 포천, 송우장

 

2013.2.3 / 서울, 인사동

 

2013.4.5 / 정선, 귤암리

 

2012.11.11 / 서울, 평창동

 

2012.11.11 / 서울, 평창동

 

2012.9.9 / 서울, 견지동

 

2012.3.14 / 서울, 인사동

 

2012.11.9 / 서울, 신사동

 

2012.9.18 / 서울, 견지동

 

2013.4.30 / 서울, 인사동

 

2012.8.12 / 서울, 인사동

 

2013.7.6 / 정선, 윗만지골

 

2011.8.14 / 정선, 윗만지골

 

2012.8.8 / 서울, 인사동

 

2012.10.14 / 서울, 인사동

 

2012.8.17 / 서울, 인사동

 

2013.6.25 / 제주, 세화장

 

2013.6.27 / 제주 민속박물관

 

2012.11.14 / 서울, 견지동

 

2012.11.8 / 서울, 평창동

 

2010.12.23 / 서울, 반포

 

2013,2.17 / 부산, 태종대

 

2010. 8.29 / 의정부 공원묘지

 

 

2013. 4.16 / 서울, 평창동

 

2012.2.15 / 청원, 내수장터

 

 

2012.8.23 / 서울, 여의도

 

2012.1.8 / 예산, 역전장

 

2009, 6..26 / 평창 식물원

 

2012.8.10 / 서울, 인사동 

 

2013.4.30 / 서울, 인사동

 

2013.4.16 / 남원, 운봉

 

2013.1.17 / 서울, 인사동

 

2011.12.17 / 제주, 돌박물관

 

2012.9.26 / 괴산, 증평장

 

2013.9  서울 견지동

 

 

2013 12 서울, 인사동

 

2014.1 강원도 거진항

 

2014.1 공주 유구장

 

2014.1 김제 원평장

 

2014.1 인제 신남장

 

2014.1 포천 운천장

 

 

 

 

 

 

 

 

 

 

정영신의 필름 파일을 뒤적이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못한 오래된 필름을 찾았다.
긴 장죽을 물고 있는 어르신을 비롯하여, 똥장군을 지고가는 농부, 안방에서나 사용했던 요강,
장꾼들의 등짐북 등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대적 풍물들이 고스란히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사진들을 보고 또 보다 사이트에 올리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사진들이 숙성되기도 했지만, 사진 기록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좌로부터 김종신, 김흥모, 유성준, 이혜순, 정용선, 하상일, 조문호)

 

서울대학병원에서 심장수술로 입원 가료중인 고영준씨 병문안을 가기로 사우들과 약속했었다.
태국에서 사업벌여 자리잡은 고영준씨는 서울 다니러 왔다가 건강검진에 걸려 심장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7일 당진 신평장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차가 밀려 약속시간을 두 시간이나 늦었는데,

다행히 수술경과는 좋았다고 한다.

이젠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고 목숨 끊는 일만 남았다며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안도 할 수 있었다.

 

고영준씨 병문안 약속으로 옛 사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금란여중에서 정년퇴임하고 산사진에 전념하는 하상일씨, 강남에 패션사진 스튜디오 차려 성공한 정용선씨,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시집 못간 이혜순씨, 중국을 오가며 사업하는 김종신씨,

그리고 여전히 살기가 고달픈 정철균씨, 만리동의 건물 임대료 받아 돈 걱정 없이 사진하는 유성준씨 등

옛 진우회(일명 진로회)와 환경사진가회의 오랜 맴버들이다.

젓가락은 못 두드렸지만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즐거운 자리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유성준씨에게 한마디 했다.

“유성준씨 이젠 당신 필름 보따리 푸소!” 랬더니 묵묵부답이다.

왜냐하면 40년 가까이 서울의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지만,

사진집은 커녕 개인전도 한 번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돈 없는 개털들이 빚내어 전시하는 꼴들이 그로서는 한심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사진을 본 것이라고는 삼십 여 년전 공모전에 발표했던 몇몇 사진들과 회원전에 내 놓은 사진이 전부다.

풍경사진을 찍는다면 아예 기대도 않지만 서울의 구석구석 찍고 다녔으니

이젠 그 사진들이 숙성되어 익을 때도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없어서 인지, 겸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의 서울사진들이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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