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랑자도 똑 같은 사람이다.

그들도 눈 오면 나중에 잘 걱정은 둘째 문제고 다들 좋아한다.

 

지난 12일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말하고 싶다’전 설치하는 날이었다.

출품작을 챙겨들고 서둘러 나갔는데, 인사동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출품 사진만 관장께 전해주고 강아지처럼 쪼르륵 내려갔다.

눈 치울 일이나 미끄러운 것은 나중 문제고, 왜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날씨가 포근해 내리는 쪽쪽 녹아 내렸으나,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갑자기 노숙자들이 생각나 서울역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눈이 녹아 질퍽한 자리에 종이 깔고 술 마시는 패거리도 있고,

어슬렁거리는 등 평소의 풍경과 별 다를 바 없으나

다들 쌍판데기에 웃음이 만연했다.

 

당장 술 마실 자리조차 불편하고, 얼어붙어 잘 걱정이랑 나중 문제였다.

서울역에 온지 10년차라는 김계열은 온갖 똥 폼 다 잡고 광장을 활보하고 다녔다.

오늘 인터뷰 대상을 계열이로 낙점했다.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하자며 꼬셨는데,

눈 내리는 질퍽한 자리에 앉아 마시기가 거시기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물주 나타난 것을 눈치 챘는지 곽학봉이가 따라 붙었고,

지난 번 인터뷰 사례금 받았던 최완구도 왔지만,

눈 오는 날 술 한잔하려는 걸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치킨뱅이'라는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계열이가 들어오지 않았다.

입구에서 노숙자라며 들어가는 것을 제지한 것이다.

주인공이 빠져서도 안 되지만, 사람 차별하는 데 부아가 치밀었다.

주문 하라지만 다시는 안 온다며 나와 버렸다.

싸가지 없는 집에서 마시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요즘 노숙자들이 구호물품으로 방한복을 얻어 걸친 데다

마스크까지 써 누가 노숙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계열이는 눈 오는 날 폼 잡는다고

가방 속에 숨겨 둔 허럼한 롱코트로 갈아입은 모양이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에선 코트를 벗어 들고 갔으나, 계열이만 못 들어가게 막았다.

얻어먹으려면 옷이라도 잘 입어야 한다는 옛말이 딱 맞았다.

 

차라리 평소대로 가게에서 소주 사와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길거리 서서 소주 마시니, 다리가 아팠다.

우리 동네 아는 식당에서 한 잔 더 하려고 지하도를 건너 왔는데,

계열이와 완구는 어디로 새버리고 학봉이만 따라왔다.

 

중국집에 들어가 잡채하나 시켜놓고 소주 두병 깠는데,

생각치도 못한 학봉이가 인터뷰 상대로 바뀌어, 나는 그를 묻고

그는 나를 묻는 쌍방 인터뷰가 되어 이야기가 길어졌다.

 

환갑을 한해 남긴 학봉이는 마누라와 이혼하고 떠돈 지가 오 년째란다.

지금은 주거급여를 받아 동자동 여인숙에서 지낸다기에,

왜 쪽방에 안 살고 오만원이나 더 들어가는 여인숙에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쪽방은 아침에 화장실 가려고 줄서는 게 지겨워서란다.

 

한양대를 중퇴하여 미8군에서 통역을 하며 가정을 꾸려갔는데,

아내가 바람 피웠다며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판사가 이혼하려는 이유를 물었더니, 신뢰할 수 없어서란다.

아내는 이혼하고 외국으로 이민 가 버렸는데,

이젠 그 미움이 그리움으로 변한 것 같았다.

 

중국집 창 너머는 백설이 휘날렸다.

밖에 나가 학봉이 기념사진도 찍고, 미끄럽지만 동자동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다시 중국집으로 돌아오니 학봉이가 훌쩍이고 있었다.

눈 내리는 걸 보니 옛날 생각난다는 것이다.

 

전화 좀 빌려 달라더니, 어딘가 전화를 걸어 눈물이 바가지다.

 

하나 남은 친구인 것 같은데, 운다고 떠난 임이 올소냐?

요즘 유행어처럼 “있을 때 잘해”란 말을 사내들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정신을 가다듬었는지, 이젠 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심문의 답은 동자동 쪽방에 들어 온지도 그와 같이 5년째다.

쪽방에 들어 온 후부터 돈 걱정 없이 내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고 했다.

 

사진 찍어 뭐 할 것이냐기에 우리 살아 온 책 만들 것이라 했다.

출판사에 원고 넘겨 몇 개월 후에 책 나올 것이라며 떠 벌렸다.

언제까지 동자동에 살 것이냐고 묻기에 다들 떠날 때 까지라 했다.

 

책 나오면 술 한 잔하기에, 서울역광장에서 잔치 벌일 작정도 했다.

광장에서 현수막 전시 했으면 아주 좋겠으나 허락해 줄리 없고,

‘서울역 역사관’에 기획안 넣어 당사자들이 볼 수 있는 전시를 열고 싶다.

 

이젠 술이 올라 쪽방에 올라가야 했다. 4층까지 올라가려면 힘들어서다.

학봉이는 한 잔 더 하고 가겠다기에 주머니 털어주고 먼저 일어섰다.

미끄러운 눈길이라 발에 신경을 많이 써 그런지, 발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자리에 누워 곰곰이 생각하니 남의 일이 아니었다.

부랑자는 타고 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나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사진, 글 / 조문호

 

간밤은 얼마나 추웠는지 방안에 한기가 돌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려 잤더니, 아침에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몇 년 전에도 그런 증상이 생겨 치료받은 적이 있는데, 또 도진 것 같았다.

방바닥에 오래 앉아 생긴 병이라 겁이 덜컥 났다.

그 당시 고맙게도 안애경씨가 쪽 침대를 책상 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준적도 있었다.

방이 코 구멍 만해 책상 앞에 앉으면 요지부동이지만, 그래도 한결 나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방문 앞에 없던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

안 그래도 배가고파 라면 끓여 먹으려고 일어났는데,

고맙게도 누가 소리도 없이 이렇게 살짝 갖다 놓았을까?

아마 산타 할아버지가 코로나 격리에 걸려 늦게 오신 것 같았다.

밥에 온기가 남은 걸 보니, 가신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허리는 펴지 못하지만, 산타 덕분에 거룩한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나 허리 아프다고 누워 있을 수만 없었다.

움직여야 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4층에서 완전 똥 싼 폼으로 내려왔는데,

공원에는 날씨가 추워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 공터에 노숙하던 병학이는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서울역광장의 선별검사소에 코로나 검사 받으러 갔다.

며칠 전에 가보니, 확진자가 생겼는지 검사 받은 사람도

시일이 지나면 다시 받아야 다시서기 쉼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나 자신도 불안했다. 며칠 전 노숙자들과 인터뷰한다고

마스크 내린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씻고 벗고 하나 뿐인 손녀 오겠다는 전화도 받지 않겠는가?

 

서울역광장 선별검사소에는 날씨가 추워 그런지 검사받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에는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간단히 해결했다.

면봉으로 코구멍을 쑤셔대면 기분은 더럽지만, 어쩌겠나?

나도 살아야하지만, 민폐 끼쳐서야 되겠는가?

 

다시서기 쉼터에 들어 가보니 노숙자보다 도우미가 더 많았다.

한 쪽 구석에는 네 사람이 누워 자고, 의자에는 한 사람이 축 쳐져 자고 있었다.

그래도 먹고 살라고 컵라면 몇 개 담긴 봉지를 발로 감싸고 자더라.

간밤의 매서운 추위에 어찌 잠들 수 있었겠는가?

 

요즘은 티브이도 안 틀어주고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온기만 준다.

모이게 할 수 없으니, 오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서기 건물 벽에 누군가 웅크려 자고 있었다.

온몸을 똘똘 말아 사람인지 짐인지 헷갈렸는데, 햇살도 그를 비켜가고 있었다.

단잠의 포근함도 결코 오래 주지 않았다.

 

한쪽 벽에 웅크려 선 노숙자에게 말 걸었다.

담뱃값으로 신사임당 한 장 줄테니, 당신 살아온 이바구 좀 해줄라요?”

얼씨구나 달라붙었다. 

이 동네서 인터뷰라는 말을 하면 손 내 젖는 사람이 많다.

말 못할 사연에 숨어 다니거나 아니면 내가 기레기나 사기꾼으로 보이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노숙하는 김씨는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자랐단다.

꿈이나 희망은 물론 좆도 씹도 모르고, 짐승도 그렇게 비참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강원도 골짜기 고아원인지 수용소인지 헷갈리는 곳에서

아무것도 배우지도 못하고 매만 맞고 자랐단다.

 

열아홉 살에 도망쳐 나와 30여년을 떠돈 삶은 이빨 빠진 들개의 삶이었다.

배도 탄 덕에 주소지는 부산으로 되어 있어나

가는 곳이 그의 집이고 주소고 빌어먹는 자리였다.

세상에서 더럽다고 피하는 일들만 골라 한 것 같았다.

한 때는 목포 염전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적도 있단다.

 

요즘은 어려운 기 뭐요?’ 라고 물었더니, 자기 입은 옷을 가르켰다.

얼마 전 자선단체에서 노숙인들에게 두툼한 외투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포장을 멋지게 해 놓아 거지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멀쩡한 놈에게 누가 적선하고 싶겠는가?

옷 속에 감추어 둔 암행어사 패말 같은 걸 보여주는데, 잘 아는 팻말이었다.

마스크에 가려 몰랐는데, 그 고아가 감투가 된 팻말에 알아보았다.

강명자표 인터뷰 사례비인 신사임당 한 장을 주었더니, 몸 깊이 감추기 바빴다.

 

그런데, 돌아오다 귀가 막힌 걸 보았다.

서울역 광장 돌아가는 코너에다 앉아 쉬라고 돌 턱을 만들어 놓았는데,

앉지 말라고 그 위에 강력본드 같은 것으로  돌맹이를 짖 이겨 놓았다.

그곳에 노숙인들이 앉아 있으면 그 옆 가게들이 장사 되겠는가?

저렇게 악착같이 돈 벌려고 못된 짓도 마다않는 세상에

그렇게 막 살고도 살아남은 게 용타싶다.

 

지하도를 내려가다 컵라면 하나만 사달라는 이씨를 만났다.

밥 사먹을 돈을 주겠다며 근황부터 물어 보았다.

바닥에 깔고 잘라니까 누가 박스를 가져가 막막하단다.

거리를 떠돈 지는 삼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셋방 살 때도 별 다를 바 없었단다.

불장난에 잘 못 꼬여 인생 망친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그가 인생 막장을 걷게 된 천형의 죄는 바로 게으름이었다.

환갑이 가깝도록 여자 한번 품어보지 못했다는 말도

결국 게을러서 용쓰기 싫었던 것 같았다.

 

인생 막장의 김용환, 이정희 두 전사의 이름을 여기 새긴다.

 

사진, / 조문호

 

 

[스크랩 / 오마이뉴스] 글, 사진 / 이희훈

 

갈 곳 잃은 중년들의 피난처 대학동 고시촌

 

월세 10만원, 값싼 고시원이 즐비한 대학동 고시촌에 최근 독거중년들이 몰리고 있다. 변변한 벌이도 없이 홀로 사는 독거중년에게 대학동 고시촌은 몇 안 되는 선택지다. 이곳에 머무는 중년들의 삶을 따라가보면, 주거 정책의 커다란 숙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편집자말]

 

대학동이라는 낯선 이름


대학동 골목마다 빈방을 알리는 전단이 빛바래 바람에 흔들린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좁은 골목을 따라 오를수록 높아지는 경사만큼 전단의 방값은 내려간다.

고시촌이라 하면 문뜩 떠오르는 이곳은 서울대가 있는 관악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되었고 코로나19 탓에 유학생도 줄면서 방값은 더 내려가고 방이 비면 차지 않는다.

 


 그 빈방을 중년들이 채우고 있다.


젊음을 던져 넣은 고시에 낙방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버린 고시 낭인, 더 싼 값에 조금 더 나은 환경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버티기 위해 필요한 영양을 채우려고 식단관리를 하지만 주머니 사정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노릇이다.

 

 

거리의 조용한 은둔자


대학동 골목의 건물은 유독 창문이 많고 에어컨 실외기 수십 대가 오와 열을 맞춰 정렬되어 있다. 뜨거운 볕이 내리는 오후 실외기가 빼곡한 고시원 옆을 지나도 골목은 고요했다. 팬이 돌아가는 지독한 소음과 뜨거운 열기는 없었다. 두피를 찌르는 태양열에 달궈진 아스팔트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사뿐사뿐 눈치를 훔치던 고양이 뒤로 낯익은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봉지를 든 채 어깨를 움츠린 중년의 아저씨는 반바지와 슬리퍼의 차림이었다. 신발의 마찰음도 없이 걷던 그의 시선은 미간만 살짝 들어 올려 문을 확인하고 굳은 자세로 입구를 지났다.
 

 

한 평 남짓 고시원에 고립된 중년


실패 경험을 가지고 고시촌으로 들어온 중년은 대부분 자신을 외부와 단절한다. 삶에서 경험한 실패로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오랜 시간 관계 맺기가 쉽지 않다.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쉽게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 필요했다. 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긴 시간 자신의 무용담과 곧 다시 성공한다는 희망을 반복해 쏟아 냈다.
 

 

하나의 건물 수십 개의 방

고시촌의 겉은 단독주택이나 빌라 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서면 안은 같은 모습이다. 사람 키보다 큰 신발장에 켜켜이 정리된 수십 켤레의 신발이 내뿜는 '향기'(?)를 지나면 하나같이 어두컴컴한 복도 양옆으로 방 쪼개기를 한 밀실(?)들이 정렬해 있다.

그 방 한 곳마다 그들만의 세계가 숨어 있다.

 


 한 남자는 자신의 동굴을 다시 택했다

두 팔을 뻗으면 마주한 벽이 양손에 닫고 물건을 피해 발을 뻗으면 발아래 다른 물건이 채인다.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단절해 혼자만의 싸움을 벌여온 고시촌의 중년은 다시 일어 설 용기를 잃었다.

 

 

글, 사진 / 오마이뉴스(시민기자) 이희훈

집 없는 노숙인을 돕고 싶다며 백만원을 보내 준 강명자씨의 뜻에 따라

인터뷰 사례비로 5만원씩 드릴려고, 어제 밤에 이어 서울역광장으로 나갔다.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포근한 날씨 덕에 금세 녹아버렸다.

오 갈 곳 없는 부랑자로서는 아름다운 눈도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서울역 선별검사소 주변에는 코로나 검사 받으러 온 사람들이 길게 줄지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터줏대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노숙인 쉼터인 ‘다시서기’에 들어가려니, 입구에서 출입을 통제했다.

코로나 검사를 받아 음성으로 통보받은 자에 한해 출입이 가능하단다,

지난 22일자로 통보받은 음성 확인 메시지를 보여주었더니,

검사 받은 지가 며칠 지나 다시 검사 받아야 한단다.

 

그 사이 감염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나

그런 엄격한 통제라면 차라리 문 닫는 것이 편하다.

아니나 다를까 쉼터 안을 들여다보니 노숙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항이라면 노숙인 합숙소나 밥 나눔도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다.

일 년 넘게 끌어 온 코로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잔혹했다.

밥 먹을 곳도, 추위 피할 곳도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지하도로 내려가니, 노숙인 한 사람이 난간에 떨어질 듯 누워 있었다.

단잠을 깨워 인터뷰를 청했더니, 흔쾌히 받아들였다.

최승호씨는 30세 무렵 집을 나와 이제 환갑이 지났으니, 살아 온 절반을 거리에서 보냈다고 했다.

아무 간섭 받기 싫어하는 자신의 업보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단다.

 

이어 집 나온 지가 3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김상순씨를 비롯하여

정정화, 김도식, 인태권씨를 차례대로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왔는지 노숙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마 돈 받은 노숙인으로 부터 정보가 새 나간 것 같았다.

인터뷰 인원수도 많지 않지만, 줄 세워 줄 일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전염병으로 5인 이상 모이는 것을 금하지 않았던가?

 

서둘러 끝내고 자리를 떴으나, 여러 명의 노숙인이 따라붙었다.

돈이 무섭긴 무서운 존재였다.

하기야! 돈 준다는데 그냥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바꾸어 생각하니 내가 그들에게 갑 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갑 질도 아무나 할 짓은 아니더라.

 

서부역 방향으로 자리를 옮겨 안효덕, 김기웅, 최완구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집에서 쫓겨 나온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주민등록증이 없는 분도 절반이 넘었는데,

신분확인이 안되니 관청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돈 나누어 준다는 소문이 퍼져 서울역 부근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왔는데, 동자동 입구에 세 사람의 노숙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아는 노숙자 이용삼씨 따라 김용철, 박동렬씨가 찾아 온 것이다.

김용철씨는 온 종일 굶어 배가 고파 죽겠다며,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아는 노숙자는 제외하기로 했으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에게 간단하게 물어보고 사례비를 주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했다.

 

다들 몰래 만나야 했으나, 한 낯이라 노출될 수밖에 없었는데,

받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속 상할까?

더 이상 소문 번지면 나다니기조차 힘들 것 같아,

이용삼씨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쪽방에 올라와 돈 준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열세 명에게 주어졌고,

돈 봉투는 일곱 개가 남아 있었다.

 

돈을 그냥 받지 말고 수고비로 당당히 받으라고 인터뷰를 시작했으나,

서두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사실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부랑자의 삶을 취재해 알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남은 일곱 분의 인터뷰 사례비 전달은 서둘지 않기로 했다.

더 어려운 노숙인을 찾아 한 분 한 분 진솔한 속내를 들어보려 한다.

당사자의 고통스러운 삶과 더불어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전하고 싶은 것이다.

 

새해에는 밑바닥 인생 일곱 분의 이야기를 만나는 대로 소개하련다.

 

사진, 글 / 조문호

 

몇일 전 페친 강명자씨로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며 100만원을 보내왔다.

고맙게 받았으나 어떻게 나누어 주어야 할지 걱정되었다.

물론, 노숙인 쉼터나 밥 나누어 주는 단체에 보내주면 간단한 일이지만,

보낸 사람이 그걸 몰라서 나에게 보냈겠는가?

노숙하는 어려운 분들에게 바로 전달해 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들에겐 현금이 제일 필요한데, 만 원 정도는 가볍게 여긴다.

비상금으로 간직하려면 신사임당 한 장이 딱 좋은데, 20명을 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누어 줄 수도 없고, 누군 주고 누군 안 줄 수도 없다.

이왕이면 아는 노숙인 주고 싶지만, 자칫하면 갑 질하기 십상이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인터뷰를 하고 사례비로 지급하기로 했다.

말이 인터뷰 사례비지 이름과 나이, 어려운 점 정도만 이야기 해 주면 된다.

거지 적선이 아니고, 당당히 말하고 수고비로 받으라는 것이다.

일단 인터뷰에 응해주는 사람에 한하되, 잘 아는 노숙자나 알콜 중독자는 제외하기로 했다.

 

내일부터 마땅한 사람들을 찾아 나설 계획인데,

서울역광장에 코로나 선별검사소가 생겨 다들 쫓겨났다.

요즘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자정이 가까웠으나 서울역으로 나가 보았다.

 

몇몇 사람은 라면박스를 모아 관처럼 만들어놓았더라.

자는 사람도 있고, 잘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의 제안에 의외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사례비를 준다 해도 인터뷰란 말에 두 사람이나 손사래 쳤다.

돈도 싫어하는 걸 보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사기꾼으로 보였던지...

 

강 훈씨 (69세)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올해 69세인 강훈씨와 60세인 이미자씨 인데,

강훈씨는 이혼하고 거리에 나선지가 십 오년이 되었다고 한다.

노가다 판에 나가 벌기도 했으나, 이젠 힘들어 못한단다.

이미자씨는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더라.

연신 깡통에 침을 뱉으며 횡설수설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 사례비로 오 만원씩 드리고 돌아왔다.

 

이미자씨(60세)  

 

내일은 아침식사 배급할 때 나가봐야겠다.

아무쪼록 자선한 분의 따뜻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어

노숙하는 분들에게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 조문호

 

서울역광장 주변에 모여 있는 노숙자는 마스크를 쓰지 않거나

함께 어울려 놀아도 아무도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없다.

행인들이 노숙자들을 지렁이 보듯 피해 다니니, 코로나에 감염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밥 주는 사람이나 복지사들 뿐이다.

슬픈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전염병 유입을 막을 수 있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22일의 동자동 풍경은 몇몇 사람만 거리를 오갈 뿐 한산했다.

만물상 차량과 식료품 파는 차량이 골목골목 대기하고 있었지만, 찾는 손님은 없었다.

 

큰 길가에는 두 내외가 끌고 다니는 폐지 수집하는 삼륜차가 서 있었지만.

동자동 안쪽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쪽방촌에는 폐지 수거하는 분들이 많아 그들의 밥벌이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배려리라.

 

흔한 일이기는 하나, 누군가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도 나 붙었다.

‘식도락’ 문에 고)옥남일씨 부고가 붙었는데, 한창 나이에 무슨 병으로 죽었을까?

장례 날자가 정해지지 않은 걸 보니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동자동 주변에는 대형 건물들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젊은 회사원들로 붐빈다.

주차장 옆 공터에는 항시 흡연족들로 넘쳐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어울려 담배를 피워도 누구도 제재하지 않는다.

코로나가 담배연기를 싫어할까? 아니면 흡연족은 사람도 아닐까?

 

나 역시 담배를 피우지만, 흡연자의 공중도덕은 심각한 지경이다.

무심코 던진 담배공초가 바닥을 잔뜩 어지럽히고 있었는데,

그 쓰레기를 쪽방 촌 노인들이 치운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요즘은 서울역광장에 중구 코로나 선별검사소가 생겨

그 곳에 모여 있던 노숙자들이 모두 쫓겨났다.

 

지하도나 서울역 인근 구석구석에 틀어박혀 숨죽이고 있다.

가난할수록 전염병에 의한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만,

그중에서도 노숙자는 코로나의 최대 피해자다.

 

밥 주는 집이 문 닫는 곳이 많아 끼니 해결도 어렵지만,

적선하는 손길조차 그들은 피해 다닌다.

 

어저께는 페친인 강명자씨로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노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선이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나누어주려니 누구를 선정할 것이며, 주는 방법도 걱정이다.

그들에겐 돈이 제일 필요하지만,

알콜중독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온 몸이 쏙 들어가는 침낭이 제일 필요하지만,

새 침낭을 주면 남대문시장에 가져가 싼값에 팔아버리니 그게 문제다.

 

일단 만나 그들의 의중부터 살펴보아야겠는데.

사람 만나는 일이 잦은 내가 전염병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전지역에 있는 그들에게 전염병을 감염시켜 줄 초상 치루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서울역광장의 선별검사소에 가서 코로나 검진부터 받았다.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으나, 대부분 젊은이 뿐이었다.

 

노숙자나 쪽방 촌 주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노숙자들은 그렇다 치고, 대면을 기피하는 쪽방촌 주민보다

상대적으로 외부접촉이 잦은 젊은이들의 검사가 더 필요할 것 같다.

 

검사결과가 언제 통보될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 기다려보자.

 

사진, 글 / 조문호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서울역광장에서 홈리스와 무연고 사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매년 밤이 가장 길어 홈리스에게 더 혹독한 동짓날,

외로히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자리도 올해로 20년째를 맞았다.

 

지난 21일 열린 추모제는 빈곤사회연대, 홈리스행동, 동자동사랑방 등 42개 단체가 모인

'홈리스 추모제 공동기획단'에서 준비한 행사다.

 

쪽방, 여관, 거리, 시설 등에서 세상을 등진 이들을 추모하고,

열악한 노숙인 인권실태 고발 및 지원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예년에 비해 대폭 축소되었다.

작년에는 노숙인과 일반인이 참여한 노숙탈출 윷놀이, 삼행시 짓기,

액운 날리기, 동지팥죽 나누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으나,

이번에는 ‘동료를 위한 동료의 추모’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중계되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1월까지 한 해 동안 거리에서, 여관에서, 쪽방에서

비명에 죽어 간 무연고자는 모두 295명이라고 한다.

작년에 사망한 166명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숫자지만, 급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매년 몇 명의 홈리스가 사망했는지 공식 통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숫자는 시민단체에서 나름으로 파악한 비공식 집계로

실제 한 해 몇 명의 홈리스가 어디서, 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국민이 아니고 유령인가? 왜 정부에서 손을 놓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울역광장에는 노숙인들의 의료, 혐오, 노동, 주거, 밥, 추모 등에서 겪는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2020 홈리스 10대 뉴스’와

‘코로나19 홈리스 생존&공존 전시가 열렸다.

 

‘재난지원금 신청서를 쓰고 싶었지만 통장도, 카드도, 핸드폰도 신분증까지 없어 포기했다’는 등

코로나19 때문에 홈리스들이 겪는 혐오나 어려움에 대한 호소가 적혀있었다.

 

오후2시에는 홈리스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이 열렸다.

서울역광장 ‘홈리스 기억의 계단에는 무연고사망자의 이름이 적힌

책과 장미 295송이가 빼곡히 놓여있었다.

 

무슨 팔자가 그리도 기구하여 죽어 지내는 추모제조차 제대로 못할 때 떠났나?

부디 극락왕생하여 이 세상에서 받은 설움과 고통을 보상받으소서!

 

2016년 홈리스 추모제에서 발언한 당사자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

 

 

“우리에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 질문은 네가잘못 살아서거리잠을자게된거아니냐고비난하는것입니다.

그질문에는개인의불행에대한사회의책임이빠져있습니다.

지금우리가이자리에서요구하는것은최소한의잠자리와일자리와치료받을권리입니다.

그것은모든국민에게동등하게주어져야하는당연한권리입니다.”

 

사진, 글 / 조문호

 

노숙하던 30대 아들, 복지사가 발견

어머니 죽음 언급에 바로 자택 향해

아들 발달장애 추정… 경찰, 입건 고민

뒤늦게 장애인 등록· 긴급 지원 잇따라

 

경찰과 복지사가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최모씨 집에 방문했을 당시 어머니 시신 인근에 놓여져 있던 공책 모습.

'우리 엄마는 몸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도와주세요'라는 문구가 써 있다. 복지사 제공

 

“우리 엄마가요. 휴대폰으로 글자 읽고 있다가요. ‘내 팔이 안 움직여’ 이러고 쓰러졌어요.” 발달장애가 있는 최모(36)씨가 옆으로 쓰러지는 시늉을 하며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요, 파리가 날아들고요, 애벌레가 생기고요, 제 방까지 애벌레가 들어왔어요.”

 

‘진짜일 수도 있겠다.’ 12월 3일, 서울 동작구의 한 식당에서 최씨와 마주앉아 있던 사회복지사 A(53)씨의 머릿속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경찰과 함께 달려간 최씨 집에는 정말로 최씨 어머니 김모(60)씨가 숨져 있었다. 동작구 이수역 근처에서 노숙하던 최씨에게 복지사가 손을 내민 지 한 달만이었다.

 

재건축을 앞둔 서초구 방배동의 다세대 주택에서 김씨가 지난 3일 숨진 채 발견됐다. 서래마을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동네다. 시신은 군데군데 뼈가 드러났을 정도로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다. 숨진 김씨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10년 넘게 이 집에서 아들 최씨와 거주해왔다. 경찰은 김씨가 사망한 지 최소 5개월은 흐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3일 한국일보 취재결과, 서울의 대표적 부촌인 서초구에서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망 사건, 2019년 관악구 탈북 모자 사건과 유사한 취약계층 사망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모자의 비극 이면에는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사회적 약자의 안타까운 죽음이 반복될 때마다 정부와 지자체는 예방과 지원대책을 쏟아냈지만, 그 때뿐이었다. 이번에도 고독사한 어머니와 노숙자가 된 아들을 사회복지사가 우연히 발견할 때까지, 모자의 비극은 아무도 몰랐다.

 

엄마가 죽자 30대 발달장애 아들은 노숙자가 됐다

 

서울 동작구 이수역 앞에서 노숙하던 최씨가 발견됐던 11월 6일의 모습.

최씨 앞에 '우리 엄마는 5월 3일에 돌아가셨어요'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놓여있다. 찬바람에 최씨의 손등은 부르터 있었다. 복지사 제공

 

 

숨진 김씨의 시신은 발견 당시 얇고 해진 누비 이불로 덮여있었다. 청테이프로 이불 끝자락을 비닐 장판에 돌려 붙여 빈틈 없이 막아 놓은 상태였다.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엄마가 옆으로 누워 숨을 이상하게 쉬었어요. 추울까 봐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줬어요”라며 사고가 있던 날을 기억해 냈다. “파리가 못 들어가게 엄마 머리까지 이불을 덮어줬어요”라고도 말했다.

 

발달장애가 있는 최씨는 김씨가 숨져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최씨는 경찰과 복지사에게 “울면서 엄마를 낫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했는데,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엄마가 숨을 안 쉬었어요”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지병으로 인한 변사’로 보고 있다. 타살된 흔적이 없고 김씨가 2005년 뇌출혈 수술을 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다. 아들 최씨도 경찰에서 김씨가 쓰러지던 날 6, 7번 구토를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8년 11월부터 건강보험료를 못 낸 장기체납자로 병원을 쉽게 찾을 형편이 안 됐다.

 

최씨는 한동안 어머니 주검 곁을 지켰다. 빈집에 앉아 공책에 “우리 엄마는 몸 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도와주세요”라고 적었지만, 읽어 줄 이가 없었다. 먹을 게 떨어지고, 전기마저 끊겨 TV도 안 나와서 더는 집에서 할 게 없었다.

 

집을 나온 최씨는 그 때부터 지하철역에서 잤다. 얼마나 노숙을 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가을쯤부터 집에 아예 들어가지 못했어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길을 떠돌던 최씨는 지난달 6일 서울 동작구 이수역 12번 출구 앞에서 구걸하다 복지사 A씨의 눈에 띄었다. A씨는 “씻은 지 오래된 모습에 손은 다 부르튼 상태였다”며 “공사장 인부들이 입는 상의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가정불화 피해 서울로…빈곤과 고독 속에 스러져

 

30대 아들과 함께 살던 60대 노모가 사망한 채 발견된 다세대주택 주변의 재건축지역의 모습. 이한호 기자

 

 

김씨가 갑작스럽게 숨지기 전에도 모자는 빈곤과 소외가 일상이었다. 전북에서 살던 김씨는 남편과 불화를 겪다 이혼 후 1993년쯤 서울로 옮겨왔다. 발달장애가 있는 9세 아들은 두고 올 수가 없어서 데리고 왔다.

 

모자는 일정한 소득 없이 정부의 공공일자리 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10월 중 62일 동안 동네 모기방역 활동을 하는 ‘모기보안관’으로 일해 총 124만원을 벌었던 게 마지막으로 기록된 김씨의 소득이다. 김씨 가구는 주거 급여(중위소득 45% 이하)를 받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2018년 10월부터 매달 25만원 가량을 받았다.

 

경찰이 시신을 발견했을 당시 김씨 집 현관 안쪽 벽에는 빨간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전기 공급을 중단한다는 안내문이었다. 집(36.28㎡·11평)에는 틀이 비뚤어진 침대와 브라운관 TV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가구가 없었다. 집 벽면을 따라서 잘 정돈된 옷가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휴대폰 요금은 4월 이후 미납된 상태였다. 세상사에 어두웠던 아들 최씨는 “월세 왜 내요. 안 내면 왜 쫓겨나요. 전기세는 왜 내요. 전기는 왜 끊겨요”라고 물을 뿐이었다.

 

김씨는 외부 교류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웃 주민 홍모(62)씨는 “(김씨는) 내가 올라가면 나오려고 하다가도 문을 닫고 다시 들어갔다가 한참 후에 나왔다”며 “초여름부터는 아예 인기척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도 “이웃과 일절 말을 안 섞는 사람이고 산에 자주 다니던 사람인데 요즘은 통 못 봤다”고 전했다. 복지사 A씨는 “가정불화로 인한 트라우마 탓”이라고 추정했다.

 

김씨 모자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복지대상으로 관리돼야 할 대상이었지만 지역사회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수개월간 비극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서초구는 7월과 11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에 필요한 마스크를 나눠줬지만, 그마저도 택배로 배송돼 김씨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모자의 소식을 전해 들은 동네 주민 김모(76)씨는 잔뜩 화가 났다. 김씨는 “주민센터나 이런 데는 뭐하냐, 마스크만 보내지 말고 들여다봤어야 했다”며 “집 안에 움직임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것도 있던데 그런 걸 설치할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좀더 신경 썼더라면” 이제야 장애인등록

 

최씨가 살던 서울 서초구 방배동 다세대주택 뒤로 11일 오전 주상복합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이한호 기자

 

 

아들 최씨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어머니 김씨의 주검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방치돼 있었을지 모른다. 김씨의 시신은 9일 화장해 장지를 찾고 있다.

 

최씨는 사체유기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발달장애가 있지만 장애인 등록이 안 돼 있어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전북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다녔던 최씨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숫자도 1부터 10까지 세고, 전화도 걸 수 있었지만 그뿐이다. 복지사 A씨는 “최씨는 ‘신고’나 ‘이웃’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사회생활은 힘들어, 사기 같은 범죄에 무방비하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혐의를 벗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이후가 더 문제다. 전북에 사는 아버지는 최씨를 보살필 경제적 형편이 안 된다. 우선은 복지사 A씨와 사건을 담당한 경찰이 최씨를 돌보고 있다. 경찰은 발달장애센터를 알아보고 있고, 복지사 A씨도 최씨의 장애인 등록과 자립 준비를 돕고 있다. 늦었지만 서초구와 동주민센터는 최씨의 장애 검사비와 장제급여를 지급하고, 최씨를 긴급복지 대상자로 선정해 6개월 동안 매달 생계비 45만여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복지사 A씨는 "최씨 모자에게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이런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뭔가 해줄 수 있었을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일보 스크랩] 2020.12.14 김진웅 기자woong@hankookilbo.com 박지영 기자jy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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