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3·1 운동의 시발점, 태화관 미스터리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모습을 그린 기록화.

지난 1일은 제104년 삼일절이었습니다. 굳이 이 인물까지 이 코너에서 언급해야 할지 의문이 들긴 했습니다만, 학원강사 출신의 한 방송인이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그 좌장인 손병희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었던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다.” “태화관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가 사귀었고, 나중에 결혼을 한다. 그 마담이 할인을 해준다고, 안주를 더 준다고 오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발언은 역사 인식의 총체적인 혼란을 보여 줍니다. 우선 주옥경은 1915년 손병희와 결혼하기 위해 명월관을 나왔으니 1919년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 마담이었을 수는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여성운동에 헌신했던 주옥경을 ‘마담’으로 칭한 것은 명백한 비하입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급 요리점이었던 태화관을 ‘최초의 룸살롱’이라 보는 것 역시 부적절한 해석입니다. ‘민족대표들이 낮술을 마시기 위해 태화관에 모인 것’처럼 얘기한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이자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3·1 운동의 발발 과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의문점을, 위의 발언이 무척 희화되고 왜곡된 형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왜 민족대표 33인은 다른 곳도 아닌 ‘기생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일까? 둘째, 이들은 일경에게 전화해서 자신들이 거기 있다고 알렸다는데, 그러면 자수한 것이 아닐까?

이러다 보니 1997년 초판이 나온 한국사 개설서들에서는 이런 악의적인 서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막상 3월 1일이 닥쳐오자 뒷걸음쳤다. 그들은 처음 예정대로 사람들이 만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지 않고, 태화관이란 음식점에 모인 후, 일본경찰에 연락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독립선언서 서명자 일동이 명월관 지점에 연행, 구속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스스로 투항해 버렸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논란의 여지 같은 것 없이 분명하게 결론이 난 사안입니다.(박찬승 한양대 교수의 2019년 논문 ‘1919년 태화관의 독립선언식과 민족대표’) 두 가지 문제를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31운동 독립 선언식이 열렸던 서울 종로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 건물 정문 앞에 표지석이 있다. /이태경 기자

◇(1)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가?

먼저 33인 중 한 명인 권동진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2월) 20일 오전 10시 경에 최린, 오세창, 이승훈이 내 집에 와서 모든 일은 정하기로 하였다. …독립의 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하여 발표하기로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당초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고 했던 장소는 파고다공원, 현 탑골공원이었습니다. 최린은 “파고다공원은 (서울의) 중앙에 있고, (고종의) 국장 때문에 지방 사람도 다수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적당하고 좋을 것이라 하여 그 장소를 선택한 것”이라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사전 모임에서 이갑성이 “그 일을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어서 약 200명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희도와 권동진이 “그런 경우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대항해 충돌할 것이 염려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31절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제104주년 31절 기념식 및 탑골공원 성역화 범국민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에서 학생들이 플래시몹 공연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러자 손병희가 “장소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양한묵은 경찰신문조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일 아침 (손병희) 선생을 방문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선언의 장소는 파고다공원으로 말했었지만, 그 장소는 다수의 인민이 모이는 곳이다. 이미 학생들이 다수 집합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발표 때에는 반드시 경관의 취체를 받고, 우리들 전부는 동행하여 안치될 것임에 틀임없다. 그 때에 큰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를 수 있어, 도리어 수행 상 불온한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명월관 지점으로 변경하였다고…” 명월관 지점이란 바로 태화관입니다.

사실 이것은 3·1 독립선언서 발표의 주체 중 기독교 측이 학생들과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을 손병희·최린·권동진 등 천도교 측에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결과라고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분석합니다.

그런데 왜 태화관이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죠. 이미 많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 발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경찰 역시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1일 새벽 일본 경찰들은 시내 곳곳에서 독립선언서 전단을 발견하고 수사에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의 다른 강당이나 집회장으로 장소를 옮긴다? 위험이 컸습니다. 그래서 파고다공원과 가까운 인사동의 요릿집으로 발표 장소를 옮긴 것이 됩니다. 33인은 ‘요릿집 손님’으로 위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할 경우 몰려든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 충돌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있으면서 많은 인원이 입장할 수 있고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수 있는 장소’로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을 택한 것입니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요릿집에는 기생이 있었고 고급 요릿집인 태화관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기생의 유무(有無)’나 ‘낮술을 마실 수 있는 조건’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선언서 발표 장소로서 ①파고다공원에서 급히 변경해야 했던 ②보안이 유지되는 ③서울 중심부의 한 지점이라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의 요릿집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기미독립선언서’. /문화재청

 

◇(2)일본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는가?

3월 1일 태화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한때 정설처럼 유행했던 ‘민족대표들이 일본 경찰에 전화를 해 자신들을 잡아가라고 투항했다’는 얘기는 사실일까요?

오후 2시 조금 못 미쳐 참석자들이 거의 모였을 때 학생들이 들어와 장소 변경에 대한 항의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2시 정각, 독립선언문이 배포됐습니다. 선언문 낭독은 생략하고 참석자들은 눈으로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한용운이 일어나 “우리들은 이미 독립선언을 했으므로 목적을 달성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일동은 기립해 ‘독립만세’를 삼창했습니다.

 

만해 한용운

 

이 무렵 최린 등은 인력거꾼을 시켜 종로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냈습니다. 민족대표들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경찰은 인력거꾼에게 물어 그 선언문이 태화관으로부터 배송됐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갑성과 이규갑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실제로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곳으로 전화를 했고, 이 전화를 받은 태화관 주인(또는 종업원)이 민족대표들에게 와서 “거기 다들 모여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이에 민족대표들은 “당신이 본 대로 대답하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먼저 전화를 걸어 ‘우리는 지금 태화관에 있으니 잡아기시오’라고 한 적은 없었던 것이죠. 이후 민족대표들은 경찰이 가져온 자동차를 타고 차례로 경무총감부로 연행됐습니다. 이것을 과연 자수라고 봐야 할까요.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달아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박찬승 교수는 말합니다. “당시 민족대표 측은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에의 독립청원서의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사히 마치자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연행돼 갔던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은 3·1 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으니, 이제 전국의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만세운동의 불길이 타오를 것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뤄졌습니다.

 

조선일보 / 유석재기자



뒤늦은 소식이다.

지난 12월 23일 서울시가 인사동 태화관 터에 ‘3․1 독립선언광장’을 조성하여 기념하는 조명 점등식’을 가졌다.

'3·1독립선언광장'에는 백두산과 한라산, 하얼빈과 카자흐스탄 등 국내외 곳곳에서 운반해온

자연석과 소리 음향에 반응해 여러 가지 패턴을 연출하는 330개의 조명으로 조성됐다.





소리에 반응하는 조명은 ‘꽃망울이 터지고 풀이 자라는 봄’, ‘빗방울이 광장에 떨어져 퍼지는 여름’,

‘바람이 불고 낙엽이 쓸려 날아가는 가을’,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겨울’이 조명을 통해 표현되었다.

이번 점등식 행사에는 퍼포먼스 그룹 오'의 뮤지컬 '영웅' 공연 퍼포먼스와 비올리스트 김남중 엔클래식 앙상블 연주도 있었다.




태화관은 본래 중종이 순화공주에게 지어 준 순화궁 자리인데, 일제강점기의 매국노 이완용의 별장으로 사용했다,

이완용이 살다 팔아넘긴 자리에 태화관이라는 여관건물이 들어섰고, 1917년에는 유명한 요정 명월관의 별관이 되었다.

왕실 사당건물인 순화궁이 매국노 별장에서 요정으로 전락했던 것도 별나지만,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것도 특별하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를 제외한 29명이 태화관에 집결하여

오후 2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는 모임을 가졌는데,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영향으로

태화관이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요정 태화관은 다음해인 1920년 기독교 남감리회에 매각되어, 1937년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태화여자관’을 신축했다.

그 후 1980년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옛 건물이 다시 철거되고, 12층짜리 태화빌딩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날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3대 종교계가 뜻을 모아

100년 전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으며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도 가졌다.

기념비에는 '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도다'라는 문구가 적혔다.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총감독은 3.1운동은 우리 역사의 빛입니다.

근대 도시는 빛으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도시는 캔버스입니다.

오늘은 3․1독립선언광장을 캔버스로 만들어 시민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조문호













독립선언문 낭독한 태화관 부터 승동교회, 탑골공원 등 역사적 발자취 많아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1일 전국 곳곳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독립운동’이 퍼져 나갔다. 학생과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줄기찬 외침은 민족 독립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97년이 흘렀다. 서울 도심 거리에는 이미 태극기가 펄럭이고, 3.1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 준비도 한창이다.

특히 서울 종로구는 3.1운동의 시작 지점으로 근현대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달 26일, 필자는 3.1운동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안국역 6번 출구를 거쳐 서울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에 다녀왔다



인사동 전통 문화의 거리 상점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 태화관


인사동에 들어서자 골동품 상점, 화랑, 전통공예품 상점 등이 있는 전통문화의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전통문화의 거리를 지나 필자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인사동 5길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태화관’.

태화관은 3.1 독립운동 당시 요리점 명월관의 별관으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한 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다.   



태화빌딩 입구의 모습.


현재 태화관 자리에는 12층 높이의 태화빌딩이 위치해있다. 빌딩 앞에 세워진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3.1운동 독립선언식 거행 장소임을 나타낸다. 건물 1층 로비로 들어서면 작은 카페가 있는데, 한쪽 벽면에는 ‘민족대표 삼일 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이곳은 현재 시민들이 커피를 마시는 휴식 공간으로 애용되고 있다.


태화 빌딩 안의 카페에 민족대표 삼일 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학생 대표들이 3.1운동 지침과 계획을 모의한 곳, 승동교회


태화관에서 다시 탑골공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승동교회’가 위치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30호로 지정된 승동교회는 학생대표들이 모여 3.1운동 지침과 계획을 모의한 곳이며, 교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학생시위운동이 일어났던 장소다. 이곳은 탑골공원과 근거리에 있어 3.1운동의 본거지로 적합했다. 


승동교회 모습.


1904년 인사동 한옥을 사들여 이사를 한 후, 예배당을 새로 짓기 시작해 1912년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승동교회 골목길 입구에는 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사진과 글들이 보였고, 건물 앞에는 3.1 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3.1운동 최초 발상지, 탑골공원

승동교회를 둘러보고, ‘탑골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사동 거리 끝에 자리 잡은 ‘남인사 안내소’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면 ‘탑골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탑골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 당시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상징적인 장소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으로, 1992년 5월에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했다.   


탑골공원 내의 3.1운동 기념 동상.


탑골공원 내에는 3.1운동 기념탑, 3.1운동을 기록한 부조,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한용운 시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해시계인 앙부일구 받침돌 등의 문화재도 남아있다. 이날은 탑골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현재 탑골공원은 시민들에게 좋은 휴식처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보성사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조계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는 보성사 터였다. 보성사는 1910년 세워진 인쇄소다. 보성사의 가장 큰 업적은 2만 장 가까이 되는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것이다.  


조계사 후문에 조성되어 있는 독립운동 기념비.


보성사는 3.1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재 조계사 후문 맞은편에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독립운동을 알리는 기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큰 역할을 했던 천도교 중앙대교당

필자는 마지막으로 안국역 5번 출구 인근에 있는 천도교 중앙대교당까지 둘러보며 탐방을 마쳤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 독립운동을 이끄는 거점이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주도 아래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설이 시작됐는데, 이곳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모습.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완공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혔다. 직접 바라본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날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는 평일임에도 국내외 관광객들로 붐비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3.1운동 유적지들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조금 썰렁하기도 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3.1절이다.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인사동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과거와 오늘을 느껴보는 것 어떨까.    

 

정책기자 이상국(프리랜서) leesang3002@gmail.com



[북촌기행] 북촌 계동길(하)―역사의 보물단지 중앙학교 언저리

북촌은 3·1운동 물밑작업이 시작되고 끝이 난 곳이다. 이중에 계동길은 3·1운동 기운이 싹트고 사전 준비 작업이 긴박하게 이루어진 곳이어서 3·1운동을 빼놓고 이곳을 얘기할 수 없다. 3·1운동 유적은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고 그 터만 존재한다. 그래도 3·1운동 경로를 따라가는 여정은 흥미로운 여행거리다.

 

▲ 계동길 정경 중앙학교 숙직실, 김성수 집, 한용운 집이 이 길 위에 있다. 1919년 1월과 2월, 한용운, 이승훈, 송계백, 송진우, 현상윤, 김성수, 최린, 최남선이 긴박하게 오갔던 이 길을 이제는 우리가 나릿하게 걷고 있다.

 

 


계동1번지, 중앙학교. 여정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콩밭이었던 계산(桂山) 언덕에 중앙학교가 들어선 것은 1917년이다. 원래 중앙학교는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맨 얼굴을 드러낼 무렵, 소격동에서 기호학교(畿湖學校)로 출발했다.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기호흥학회가 설립했다. 그 후 재정난을 겪고 있던 차에 김성수가 인수하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

3·1운동이 싹 튼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숙직실

1919년 1월말, 일본유학생이던 송계백이 중앙학교 숙직실 문을 두드렸다. 김성수가 교사로 채용한 현상윤과 당시 교장이었던 송진우를 찾아온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학생들의 거사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넸다.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다.

 

▲ 중앙학교 숙직실 1919년 1월 말, 송계백은 숙직실로 선배 현상윤을 찾아 3.1운동의 불을 지폈다. 원래 있던 숙직실은 헐리고 중앙학교 동쪽 언덕에 복원해 놓았다.

 

 


송계백이 누구인가? 2·8독립선언의 계획을 국내에 알려 지지를 이끌어 내는 한편 국내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파견된 밀사였다. 그는 보성중학교 시절(1911년) 1년 선배가 현상윤이고 은사(교장)가 3·1운동에서 기획조정 역할을 한 최린이었다.

김성수와 송진우는 청소년기부터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였고 최남선을 포함한 김성수, 송진우, 송계백, 현상윤은 모두 와세다 대학 출신들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계동을 중심으로 가까이 모여 살아 연결망이 튼튼했다. 송계백이 현상윤을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장 송진우는 중앙학교 숙직실에 거처했고(원서동 집은 1921년부터 거주) 김성수는 계동 130번지, 현 김성수 고택 자리에, 한용운은 계동 43번지에 살았다. 천도교계를 이끈 손병희 집은 가회동 현 북촌박물관, 최린 집은 현 헌법재판소 주차장입구(재동 68번지)자리였다. 북촌, 특히 계동길이 3·1운동의 핵심 장소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손병희 집터 1919년2월28일, 세 종교 대표가 만났던 곳이다. 천도교를 이끌며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손병희, 그의 집은 사라지고 가회동 북촌박물관 앞에 표지석만 전한다. 남쪽, 헌법재판소 안 주차장 입구에 최린이 살고 있었다.

 

 


현상윤 인맥 또한 만만치 않다. 나이는 3살 연하지만 최남선과 친구로 지냈고 손병희의 최측근인 최린이 그의 은사였다. 정노식, 김도태와 친분이 있어 기독교계 독립운동을 이끈 이승훈과도 연결됐다. 아무튼 현상윤과 최린의 네트워크가 작동되면서 3·1운동의 계획이 손병희에게 쉽게 전달됐다. 손병희는 3·1운동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천도교계의 대외업무를 최린에게 맡겼다.

계동은 천도교·기독교·불교계의 만남의 장소

한편, 기독교계 독립운동은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이 맡고 있었다. 최남선은 현상윤에게 부탁하여 평안북도 선천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에게 연락해 상경토록 했다. 1919년 2월 11일, 김성수 집에서 현상윤 주선으로 이승훈과 최린이 첫 만남을 가졌다. 그 후 2월 24일 천도교중앙총부(현 덕성여중 자리)에서 최린과 이승훈은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일원화 작업을 타결했다.

▲ 김성수 집 계동 130번지, 1919년 2월21일 기독교계 이승훈과 천도교계 최린이 만난 곳이다. 1918년 김사용으로부터 인수한 집이다. 문은 항상 닫혀 있어 안을 볼 수 없는데 이 집 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그런대로 집을 구경할 수 있다.

 

 


같은 날, 최린은 계동에 머물고 있던 한용운을 찾아가 불교계의 동참을 약속 받았다. 이로써 세 종교계의 일원화 작업이 마무리됐다. 한용운이 머물고 있던 집은 계동 43번지.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3호까지 발행한 유심사가 있었던 자리로 거처로도 사용했다. 독립선언 하루 전날, 불교학교인 중앙학림의 유심회 학생들을 불러 모아 독립선언서 3000매를 전달한 곳이기도 하다.

 

▲ 한용운 집 계동 43번지, 1919년 2월24일, 천도교계 최린과 불교계 한용운이 만난 곳이다. 유심사를 설립했고 거처했던 집이다. 만해당 이름으로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다. 장기적으로 보존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드디어 2월 27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독립선언서가 인쇄됐다. 장소는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보성사로 천도교가 인수한 보성학교 안에 있었다. 현재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 자리다.

 

▲ 보성사 터 1919년 2월 27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으로 조계사 뒤 수송공원에 있다. 인쇄를 책임진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동상과 보성사 터 표지석, 기념비들이 있다. 보성학교 후문이 지금 조계사 문이고 회화나무와 백송은 예전 그대로다.

 

 


3·1운동 전날, 3대 종교계 대표가 손병희 집에서 만났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거사 장소를 최종적으로 태화관으로 정했다. 이로써 3·1운동 계획은 마무리됐다. 3월 1일 2시가 되어갈 때쯤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4명은 불참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 태화관 터 1919년3월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던 곳이다. 지금은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3·1운동은 종교계 대표인 손병희(1861년생), 이승훈(1864년생), 한용운(1879년생)을 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3·1운동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종교계를 한데 엮는 역할은 최린을 중심으로 일본유학생 출신, 1890년대 생이 주도했다.

송계백, 현상윤, 송진우, 김성수, 최남선, 김도태, 정노식 등 모두 1890년대에 태어나 1910년 전후 일본에 유학한 세대로 20대 중후반 나이였다. 나중에 변절하는 자들이 다수 나오지만 최소한 그 당시는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져 물결을 일으키려는 열정'은 있었다.

계동길을 지키는 터줏대감

이제 3·1운동의 목멘 함성은 뒤안길로 물러나고 몇 채의 집만 남아 그 날을 기억할 뿐이다. 추운 겨울 숙직실 문을 두드린 송계백의 발길이나 중앙학림학생들에게 선언서를 나눠주던 한용운의 걱정스런 눈길도 이제는 시끌벅적한 인파에 묻힌 지 오래다. 그래도 계동길에는 3·1운동 관련 유적 외에 옛일을 추억하려 안간힘 쓰는 오래된 것들이 남아 있어 한낱 즐기는 '관광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일은 없다.

계동길 한 가운데 자리 잡아 계동길 주인 노릇하는 '중앙탕'과 핑크색 담이 잔뜩 겁먹은 어린애를 달래주는 '최소아과', 변해가는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뜬히 터를 지키고 있는 '대구참기름집'은 계동길을 지키는 터줏대감이다.

 

 

▲ 문 닫은 중앙탕 정경 계동길 한가운데에서 터줏대감 노릇하다가 11월 16일에 문을 닫았다. 소소한 하루가 넉넉하지 못했나 보다. 다음 차례는 무엇이 될까?

 

 


아쉽게도 중앙탕은 지난 16일 영업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지난 번 찾아갔을 때 주인 아주머니의 표정이 안 좋았던 이유가 있었다. 문 닫는 날 다시 찾았다. "11월 16일까지만 영업합니다. 바구니 찾아 가세요"라 적힌 문구가 서글피 보였다.

그래도 헐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임대를 해 '안경갤러리'가 들어선다 한다. 중앙고등학교 야구부 샤워장으로 지어졌다가 대중탕으로 문을 연 지 근 50년인데 딱하기만 하다.

 

▲ 최소아과 정경 1940년에 문을 열었다 하니 70년이 넘었다. 마을사람들 일상에 관련된 것 중에 가장 어른이 셈이다.

 

 


9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만해가 살던 집을 찾았다 해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그때 '계동43번지' 주소 하나만 갖고 계동길을 헤맨 적이 있었다. 한 신문은 지금 '황금알식당'이 있는 집을 자료 사진으로 내보내고 유심사터 표지석도 엉뚱한 곳에 설치해 놓아 혼동을 주긴 했어도 마음 한 구석이 이렇게 휑하지는 않았다. 중앙학교 앞에 일본 관광객 몇 명이 서성댈 뿐 지금처럼 마을사람들 일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가게들이 계동길 양쪽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 대구참기름집 1975년에 문을 열었다 들었다. 변해가는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있다.

 

 


마을이라는 게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고 그것에 기대어 삶을 꾸려나가는 생활공간이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중앙탕 다음은 최소아과, 그 다음은 대구참기름집이 될지 모른다. 그 다음은 뭘까? 서태지의 <소격동> 가사처럼 '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그나마 멀리서 '고구마 한 상자에 만 원'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마이뉴스 / 김정봉기자]


 



3.1 운동의 요람    태화관

 

 

 

 

안철수 대선 후보의 선거 캠프로 유명해진 공평빌딩을 지나 인사동길로 접어 들다 보면 빌딩숲에 가려 잊혀져 가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숨어 있다.

순조 임금의 사위 김현근의 병치료를 위해 무당이 대나무 칼을 들고 춤을 추었다는 죽도궁터(센타마크호텔)와 충정공

민영환선생의 자결터(하나투어), 서울의 중심을 알리는 중심석(하나로빌딩), 율곡선생의 어린시절 놀이터(백상빌딩)...

그리고 조선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터에 자리 잡은 태화관이 눈에 들어 온다. 

 

 

 

태화관(태화빌딩)의 초창기 모습

 

이곳은 원래 중종때 순화공주의 궁터이다.

대한제국때 이완용의 소유였던 이곳을 안순환이 매입하여 요릿집 명월관의 분점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1921년 미국 남감리회에서 다시 매입하여 한국최초의 사회복지 기관인 "태화여자복지관"이 문을 열었다.

태화란 세조때 능원부원군 구수영이 집안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운후 "태화정"이라 한데서 비롯하였다. 

 

 

 

 

 

 

 

 

 

 

 

 

 

삼일독립선언

 

그리도교. 천도교. 불교 교단에서 추천을 받아 선정한 민족 지도자들은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거사 준비를 했다.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등이 지방행사와 해외활동등으로 불참한 채 나머지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태화관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은 곧이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민족대표 33인은 3월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학생들과 시민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계속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농촌까지 확산되어 삼천리 강토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났다. 4월말가지 계속된 이 운동은 참가 인원만

200만명 횟수로는 1,500여회에 달했다

 

 

 

 

 

 

3.1운동

 

일제 감정기 민족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민족운동의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의 소식이 들려오자 민족 지도자들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3대 원칙을 세우고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1919년 3월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7,500여명이 피살 되었고 16,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일본에 유리한 국제정세등의 영향으로 결국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3.1운동은 민족을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집결시켰으며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민족 지도자 33인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형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   련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한용운  백용성

 

 

 

명월관과 태화관 관련 기사및 사진 자료  / 내동리 명물..인사동 태화관

 

 

 

출처 : 웰컴투5060조친모 / 작성인 : 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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