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지는 우리의 아련한 추억이다.
쌈지란 싼다, 즉 물건을 단단하게 옭아 묶는 형식으로 쌈지라 한다.
주머니는 허리에 차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끈만 잡아당겨 물건을 꺼내거나 넣고 했다.
그러나 쌈지는 한 번 더 천으로 감아서 단단하게 끈으로 묶은 다음에 허리춤에 달고
다녔다. 보통 쌈지는 정말 조그마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쌈지에는 포장지가 벗겨진 사탕,
2~3개의 동전닢, 심지어 누런 조이에 싼 엿 조각 호두 등 온갖 물건이 담겼었다.
할머니 고쟁이에서 꺼내는 꼬깃꼬깃 몇 번 접은 천 원짜리 쌈지 돈은 할머니의 정이
넘쳐났다. 할머니의 쌈지는 참으로 많은 것을 담을 만큼 컸다.
어린 우리에겐 할머니 쌈지는 '보물단지'였다. 그 쌈지는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커다란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것이기도 했다.
쌈지는 우리의 추억이었다.

http://cafe.daum.net/welcome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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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의 그 쌈지가 전통문화거리 인사동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2004년 말 문을 열어 인사동의 새로운 명물이 된 쌈지길이다.
인사동에서 얼마 남지 않은 개량한옥들 틈에서도 그나마 온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던
영빈가든이 2001년 화재로 소실된다. 이 자리에 있었던 12개의 작은 가게들이
존폐위기에 놓이자 걷고 싶은 도시 만들기 시민연대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쌈지(사장 천호균)는 이를 사들인다. 덕성여대 디자인과 학생들이 쌈지길 12가게를
디자인한다. 쌈지길에 들어서는 각 화랑들의 공간을 덕성여대 실내디자인과 학생들에게
스터디를 맡겼다. 주인이 처음 제안한 쌈지공예골목이라는 건물명도 건축가가
제안한 쌈지 길로 개명한다. 쌈지길은 건축 당시, 기존 터에 남아 있던 주춧돌과
오래된 한옥 구조에서 나온 나무들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새로운 자재와 함께 사용했다.
기존에 있던 가게들과 새로운 가게들이 만나고,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곳이
바로 쌈지길이다. 쌈지길에는 전통공예공방과 현대공예공방이 공존하고 있다.
이름은 길이지만 골목길을 수직적으로 올려지은 4층짜리 건물이다.
건물 안 ‘ㅁ’자형 마당에서 이어지는 나선형 통로 옆에 갤러리, 전통 공예점,
전통 식당과 찻집 등이 오밀조밀하게 죽 늘어서 있다.







 






 
쌈지길은 이 경사길을 ‘오름길’이라 부른다. 제주도의 ‘오름’이 생각나는 정겨운 이름이다.
쌈지길이라는 이름 자체도 정겹지만 한 오름, 두 오름, 세 오름, 네 오름 하는 이름도
정겹다. 네 오름을 오르다 보면 여기 저기 작은 공간들이 다가온다.
서로 어깨가 맞부딪칠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대는 우리 재래시장과 깔끔한 백화점을
합해 놓은 게 오늘의 쌈지길이다. 백화점에 물건이 있다면
쌈지길에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재래시장의 따뜻한 모습과 골목길의 추억이
담긴 곳이 바로 쌈지길이다. 이리로 빠지면 작은 정원이고 저리로 빠지면 계단길이고,
조금 더 오르면 바닥이 나무길로 바뀌다가 또 흙길로 바뀐다.






조금 더 오르면 ‘하늘정원’에 닿는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정원이지만, 인사동의 하늘을 안는다.
건물을 휘감고 도는 경사로가 4층까지 연결돼 길을 따라서 걷다 보면
옥상에 있는 하늘정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인사동 거리를 한눈에 구경할 수 있고 건물 곳곳에 휴식공간과 화장실이
넉넉해 인사동을 돌아다니다가 잠깐 쉬기에도 좋다.
쌈지길은 인사동과 많이 닮았다. 쌈지길이 ‘길로 만든 건축’이라면
인사동은 ‘길로 만든 동네’다. ‘인사동길’이라 불리는 큰 길보다
‘쌈지길'이 이름처럼 건물이기보다는 길의 의미, 즉 사람들이 걸으며 만나고
이야기하며 느끼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설계를 했다고 건축가 최문규는 말한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동네이름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자만 따서
인사동(仁寺洞)이 된다. 댓절골(대사동)에 고려 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가 있었다.
조선 태조 때 이를 중수하여 조계종(曹溪宗) 본사로 지정하기도 했다.
태종은 억불정책을 내세워 폐사시켰다.
세조 10년(1464) 5월 절의 중건에 착수하여 원각사로 개명하였다.
이때의 중건공사를 위하여 부근 가옥 200여호를 철거하였다.
세조 10년 전국에서 모은 동 5만근으로 주조하여 완성한 원각사종과 13년(1467)
4월 8일에 완성하여 그 안에 분신사리와 새로이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안치하였다고 하는 10층석탑(국보2호)이 자리하고 있다.
연산군 10년(1504) 승려들을 몰아내고 다음해 기생과 악사들을 관장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로 옮겼다. 원각사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 1895년에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 파고다 공원이 댓절골에 들어서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로
역사적 흔적을 남긴다. 이 큰절 앞길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유통거리
운종가(雲從街)로 번창해 오늘의 종로로 전통을 이어온다.
조선 중기 이후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김좌근, 김병학 등이 인사동에 살았다.
1910년 나라가 망하면서 일본사람들이 인사동 접수한다.
그들은 지금의 인사동 길을 흐르던 개천을 복개한다.
이제 대궐 같은 양반가옥들은 잘게 찢겨 이른바 개량한옥이 된다.
가세가 기운 양반들이 하나둘씩 공예품을 내다 팔면서 공예품거리가 시작된다.
1945년 일본사람들이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대량으로 공예품 내다 팔아 본격적으로
인사동 거리 뜬다. 1980년대 후반 강남 뜨면서 40%정도의 중요 갤러리들이
강남으로 빠져나가면서 위기에 처한다.
1997년 주말에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자 다시 인사동 뜬다.
난리가 났다. 전체 800개 공예품 점포는 하나둘씩 음식점으로 변해간다.
1999년 종로구청은 인사동거리 살리기 현상설계 공모한다.
건축가 김진애씨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다. 2000년 36억 들여 바닥에 전돌 깔고
장대석, 사고석 세우는 문화거리 조성공사가 시행된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조성한 인사동길이 오히려 주민들을
하나둘 다른 곳으로 떠나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사동길은 길 자체뿐 아니라 길에 면한 갖가지 점포들이 문화와 전통을 상품화하여
길과 더불어 공동체를 형성해온 곳이었다.



 

우리 전통을 배경으로 한 동네의 문화적 성격을, 길을 새로 조성하면서 디자인으로
이를 과도하게 적용시켜 우리네 전통마을 길도 아니고,
서구의 옛 골목길도 아닌 이른바 국적불명의 가로 디자인을 만들고야 말았다는 비판도 있다.
서울 인사동은 북촌의 남단에 있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예술의 상징인 동시에
서울 문화의 심장이다. 지구촌 사람들이 밤낮없이 왕래하며 접촉하고 왕성하게
교류하고 있는 세계문화의 교차로이다. 오늘의 인사동은 없는 것이 없었던
어릴 적 할머니의 쌈지같이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의 전통과 현재가 공존하며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지구촌 문화 공간'이요, 세계인의 미래와 꿈도 화려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곳이
오늘의 인사동이다. 거기에는 별궁이 있고 종교가 부흥했으며 언론의 발상지도 인사동이다.
3.1운동의 진원지요 민족 혼의 원천도 이곳 인사동이며 전통-현대문화예술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곳도 인사동이다.동서양의 예술이 만나 세기-세대를 초월한
새로운 인사동문화를 창출한다.
이제 인사동은 요술주머니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의 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쉴 새도 없이 인사동 이야기를 품어내는 우리 문화예술의 거대한 쌈지이다.


 
지금 인사동은 축제중 ...




출처 : 웰컴투5060조친모 / 작성인 : 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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