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의 요람 태화관
안철수 대선 후보의 선거 캠프로 유명해진 공평빌딩을 지나 인사동길로 접어 들다 보면 빌딩숲에 가려 잊혀져 가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 곳곳에 숨어 있다.
순조 임금의 사위 김현근의 병치료를 위해 무당이 대나무 칼을 들고 춤을 추었다는 죽도궁터(센타마크호텔)와 충정공
민영환선생의 자결터(하나투어), 서울의 중심을 알리는 중심석(하나로빌딩), 율곡선생의 어린시절 놀이터(백상빌딩)...
그리고 조선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터에 자리 잡은 태화관이 눈에 들어 온다.
태화관(태화빌딩)의 초창기 모습
이곳은 원래 중종때 순화공주의 궁터이다.
대한제국때 이완용의 소유였던 이곳을 안순환이 매입하여 요릿집 명월관의 분점으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1921년 미국 남감리회에서 다시 매입하여 한국최초의 사회복지 기관인 "태화여자복지관"이 문을 열었다.
태화란 세조때 능원부원군 구수영이 집안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운후 "태화정"이라 한데서 비롯하였다.
삼일독립선언
그리도교. 천도교. 불교 교단에서 추천을 받아 선정한 민족 지도자들은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거사 준비를 했다.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등이 지방행사와 해외활동등으로 불참한 채 나머지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태화관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은 곧이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민족대표 33인은 3월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학생들과 시민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계속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농촌까지 확산되어 삼천리 강토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쳐났다. 4월말가지 계속된 이 운동은 참가 인원만
200만명 횟수로는 1,500여회에 달했다
3.1운동
일제 감정기 민족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민족운동의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의 소식이 들려오자 민족 지도자들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3대 원칙을 세우고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1919년 3월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7,500여명이 피살 되었고 16,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일본에 유리한 국제정세등의 영향으로 결국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3.1운동은 민족을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집결시켰으며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민족 지도자 33인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형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 련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한용운 백용성
명월관과 태화관 관련 기사및 사진 자료 / 내동리 명물..인사동 태화관
출처 : 웰컴투5060조친모 / 작성인 : 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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