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김명성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최울가를 유목민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같이 만나자고 한다.

속상한 일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최울가 때문에 안 갈 수 없었다.

 

최울가는 부산 시절부터 알던 동생 같은 후배인데, 만난 지가 삼 년 가까이 되었다.

자리 잡힐 만하면 익숙해 진 공간에서 

다시 낮선 곳으로 떠나가는 유목민 같은 작가라 자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시아권은 물론 파리에서 북미 지역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데,
서울에 오면 파주에 있으나 파주 작업실은 물론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 떠도는 유동성이 최울가 만의 방식이 되어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작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화이트, 블랙, 레드+’전도 보러 갔으나 작가는 만나지 못했다.

 

상형문자 같이 원시성을 띤 그림들은 자유로웠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는데,

무겁거나 난해하지 않고 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기존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미지를 입체화한 세라믹조각과 스티커를 활용한 입체 그림도 있었다.

 

최울가만의 독창성과 기발함을 세상이 모를 리 없다.

요즘은 스타 반열에 오른 몇 안 되는 작가라 작품값도 천정부지다.

 

지하철에서 옛날 생각에 빠지다 보니, 금방 안국역에 도착했다.

유목민’에 가니 사진가 이정환씨와 성유나씨도 있었다.

 

안 쪽에는 최울가, 김명성씨를 비롯하여

인디프레스를 운영하는 김정대씨 내외도 와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최울가는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 요즘 좋은 곳에서 산다면서라는 아리송한 말을 꺼냈다.

전시 때 못 준 '인사동이야기'사진집을 전해 주었는데,

쓰리쿠숀으로 돌려 준 돈봉투에 삼십만원이나 들었네.

"고맙다. 그 돈으로 햇님이 지방선거 현수막 값이라도 좀 보태 애비 체면 좀 세울께.."

 

김명성씨는 얼마 전 울산서 전시한 박상진과 동지들이야기를 했다.

박상진 투사의 활동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매국노 이완용 글씨까지 걸었다가

여론에 밀려 철수한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단다.

 

그런데, 김정대씨가 4년 전에 결혼했다는데,

이렇게 젊고 예쁜 부인을 두었는지 미처 몰랐다.

소장수 같은 인상에 마누라 복은 있네요.

 

술 마시다 정선집 불난 이야기가 나오니,

30년 전에 최울가가 선물한 그림 생각이 났다.

 

화마에 휩쓸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 오는 날 개울가에 아이가 우산을 받쳐들고 쪼그려 앉은 그림이었다.

비 맞는 개구리를 걱정하는 여린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인데,

그림을 그린 작가도 보고 싶어 했으나, 다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에 빠져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금새 취해 버렸다.

술집 실내에서 담배까지 피웠으니 취해도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최울가와 헤어져 지하철을 탔는데, 불광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는 잠들어 버렸네.

 

돌고 돌아 녹번동을 찾아갔더니, ‘스마트협동조합이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취했고 서인형씨는 기다리다 취했으니, 용건이 뭔지도 모르겠.

 

반가운 사람 만나 술 마시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언제나 술이 술을 마셔, 오바하는 것이 문제다.

속은 쓰린데다 엊저녁 실수한 일이 생각나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사진, / 조문호

 

 

 

화가 최울가가 서울서 전시를 한다기에, 정 동지를 앞 세워 평창동 ‘가나아트’로 갔다.

 

월요일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전시장엔 아무도 없었는데,

1, 2, 3관으로 이어지는 넓은 전시장에 회화는 물론 조각과 드로잉까지

60여점이 제 자리를 지키 듯 경쾌한 놀이마당을 펼치고 있었다.

 

제목으로 내건 ‘화이트, 블랙, 레드+’ 시리즈는 물론 최근에 시작했다는 스티커 입체화도 있었다.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다.

세삼 그의 천진무구한 즉흥적 자유로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여느 작품처럼 무거워 보이거나 난해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의 말처럼,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재미와 즐거움이었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꽃이나 어항, 물고기나 새, 그리고 상형문자 같은

기이하고도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나열이 산만하지 않고 절제돼 보이는 까닭이 뭘까?

그건 바로 인간이 언어로 소통하기 전부터 남긴 벽화 이미지, 즉 원초적 미의식의 발로라 여겨진다.

 

왜 최울가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화단에서 한국의 대표작가 중 한사람으로서 주목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5년 전, 최울가 작업실에서...

 

난, 최울가를 40여 년 지켜보았다.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며 작업하는 터라 자주 볼 수는 없지만, 만나면 술도 받아주고 용돈까지 챙겨주는 아우 같은 벗이다.

 

오래전 부산 남포동에 국악을 들려주는 ‘한마당’이란 술집을 차린 적이 있었는데,

우리 집 단골손님으로 드나들며 그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물론 그 때는 가난한 무명화가였다.

 

그 무렵 자주 드나들던 화가 중 지금은 고인이 된 이존수와 박광호도 있었는데,

세 사람 모두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점도 우연치고는 남다르다.

 

다들 나름의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지만,

한 사람은 대학로 빨래집게 전시로 유명세를 타 돈은 벌었지만 돈이 사람을 망쳤고,

고집스러운 한 사람은 돈이 없어 고생하다 안타깝게 이승을 떴다.

그러나 최울가는 돈에 집착하지 않아 살아남았는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세 작가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번 정선 집 화재로 모두 태워버렸다.

 

오래 전 박광호도 자신의 그림을 모두 태운 적이 있지만,

최울가도 10여 년 전 뉴욕 그라피티의 자유분방함과 현대예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실험적인 설치미술에 충격 받아 이전에 그려놓은 작품 200점을 미련 없이 불태워버리고 재충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애착가진 그림들은 왜 불과 연관이 있을까?

 

30년 전 최울가가 선물했던 불 탄 작품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 오는 날 개울가에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그 아래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비 맞는 개구리를 걱정하는 여린 동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당시 최울가 작품은 대부분 시적인 천진난만함이 깔려 있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작품마저 소실되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돈이 없어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카메라를 전당포에 잡혀도

그림들은 팔지 않았는데, 그마저 나에겐 욕심이었단 말이던가?

 

이제 최울가의 사는 방법과 작품세계를 한 번 들여다보자.

 

‘Black & White’ 시리즈로 뉴욕 화단에서 주목 받은 최울가는 국내는 물론 파리, 베를린, 부다페스트 등 세계무대를 누벼왔다.

‘Black & White’ 시리즈에는 일상적 삶과 관련된 요소들로 채워졌다.

관계성 없는 사물들의 무질서한 공존은 작가가 가진 무의식의 세계였다.

 

특징짓는 검은색과 흰색은 그가 생각하는 우주와 빛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색이다.

이  두 가지 색을 사용해 그는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다.

 

최울가는 30년 넘게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았다.

뒤늦게 파리국립장식예술학교와 베르사유미술학교를 나와 2000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는 아시아권으로 파리에서는 유럽권, 그리고 뉴욕에서는 북미 지역을 넘나들었다.

 

자리가 잡힐 만하면 익숙해 진 삶의 공간을 떠나 다시 낮선 곳으로 떠나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자 앞에는 유목민이란 말이 항상 따라 다닌다.

아마 그의 몸에 새로운 땅을 찾는 유목민의 피가 흐르나보다.

 

유목민처럼 떠돈 것은 그 낮 선 이질적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여 다시 동질적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현실적 공간이 작가의 몸을 통해서 회화적 공간으로 다시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 데도,

낮 선 세계, 즉 새로운 장소에 거주하는 경험 자체가 작품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리고 삶터의 이동이라는 유목성이 최울가 예술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중복되는 이미지와 중첩적인 텍스트 사이의 유동성이 최울가 예술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본질적으로는 움직임 자체가 아니던가?

그 유동성이 특정한 감각적 방식으로 고정되어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가진 이미지로 재현된 것이다.

 

그는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초월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왔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해 꿈을 꾸 듯 동화 속 한 장면을 대하는 것 같다.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은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이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그의 아나키적 화법도 한 몫 했다.

마치 아이들의 낙서와도 같은 그의 작업은 눈에 익숙한 잘 그린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대상의 재현이 목표가 아니라 원초적 미의식에 바탕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말하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도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의 끝없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끌어 낸 것이다.

 

최근 그는 기존의 캔버스에서 벗어나 더욱 다양한 매체와 형태의 작업을 시도한다.

이미지를 입체화한 세라믹조각과 스티커를 활용한 입체그림이 그중 하나다.

그의 신작 ‘Beetle Series’는 입체평면 스티커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이전에도 종종 스티커를 배경에 부착해 화면에 변화를 주곤 했으나,

이번 연작들은 아이들이 스티커를 벽면에 붙이고 노는 것을 연상시킨다.

시계, 꽃병, 사람 머리 같은 시리즈를 구성하는 이미지를 에폭시 스티커로 채워놓았다.

재료든, 형식이든 테두리 안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그림에 표기된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에 다름 아니다.

기호로 채워진 그 촘촘한 세계야말로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는 공간일 것이며,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그만의 놀이 법인 셈이다.

 

그의 그림들은 원초적 자유와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성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본연으로 돌아가라고 노래한다.

도식화된 삶을 살아가는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깨우침을 준다.

 

최울가 최근모습, 인터넷에서 스크랩

 

최울가의 ‘화이트, 블랙, 레드+’전은 오는 30일까지라 며칠 남지 않았다.

(평창동 가나아트 / 02-720-1020)

 

사진, 글 / 조문호

 

전시를 보고나서 담배 생각이 나 옥상으로 올라가다 깜짝 놀랐다.

누구 작품인지 모르지만, 소녀가 거꾸로 서서 쩍 벌린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미투 강박관념에 나도 모르게 줄행랑쳤다

아이구!  숨차...

 



지난 토요일은 여의도 촛불집회장에서 인사동으로 호출되었다.
인사동에서 김명성씨와 화가 최울가씨를 만나기로 했다.

최울가는 유목민처럼 떠도는 작가라 쉽게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같이 간 동지는 어디로 갔는지 연락이 끊겨, 나 혼자 지하철 타고 ‘이모집’으로 갔다.




‘이모집’은 위치만 바뀐 게 아니라 주인까지 바뀐 건지,
예약한 게 없다며 불친절 했다.
뒤 따라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여자만’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울가는 70년대 후반, 내가 서울 올라 올 무렵 상경했다.
부산에서 비슷한 시기에 올라 온 화가로는 박광호, 이존수씨도 있다.
이존수씨는 대학로에서 빨래집게 전시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대관절 그 놈의 돈이 무엇인지, 돈이 생기니 사람이 변하더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뒤늦게 죽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생선 뼈만 줄창 그리던 박광호도 지난 달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했다.

그렇게 낙엽처럼 떨어졌다. 이제 세 사람 중 최울가만 남은 것이다.




최울가는 20여 년 넘게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니며 작업해 왔다.
파주 헤이리 작업실에서는 아시아권, 파리에서는 유럽권,
그리고 뉴욕에서는 북미 지역을 넘나들었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순수하고 자유롭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다.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는데, 곧 강남에서 전시를 한단다.




최울가는 요즘 잘 나가는 몇몇처럼 스타 반열에 오른 작가다.
오랜 만에 쌍팔 년도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백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 놓았다.




날 더러 쓰라기에 두 눈이 번쩍 뜨이기는 하나
분에 넘치는 돈이라, 돈이 돈 같아 보이지 않더라.
그의 말로는 “40여년 전 부산에서 ‘한마당’할 때 준 삼 천원을 갚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그 말을 하며 작품을 준적도 있지만, 난 오래되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 때는 라면도 마음대로 끓여 먹을 돈이 없었다고 했다.
모처럼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물끄러미 쳐다보는 개가 눈에 밟혔다는 것이다.
그 어려울 때 쌀을 살 수 있는 삼천 원이 너무 고마웠던 것 같았다.
아픈 시절이지만, 그 시절이 그리운 듯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단다.
처음 서울 올라 와 그림 둘 곳이 없어 박광호씨 셋방에다 맡겨두었는데.
‘집에 불이나 작품이 다 타버렸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그래서 초기의 그림이 하나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도 스폰서 나타나기만 기다린 일이 하나 있었다.
몇 달 전 안경을 잃어버려, 눈에 맞지 않는 안경을 빌려 쓰고 다니니,
세상 모든 게 흐리게 보였다.
더구나 밤에 운전하다 위험한 고비를 많이 넘겨, 염체 없지만 챙겨 넣었다. 


 

김명성씨가 이차를 가자며 데려 간 곳은 박인식씨가 운영하는 ‘로마네꽁티’였다.
모처럼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박성식씨도 만났다.
와인에 젖는 기분 좋은 늦가을의 밤이었다.




울가 덕에 다음날 다초점 렌즈를 장착한 30만 원짜리 안경을 맞추었더니 세상이 거울처럼 밝아졌다.
밀린 과태료도 내고 어려운 동지도 도와주며 고맙게 잘 썼다.



언젠가 갚아야 할텐데,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인천부두에 라이타돌 실은 배 들어오는 날 말이다
그 배만 오면 백배로 갚아 줄 텐데, 기별이 없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8일 밤,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40여년 전, 부산 남포동에서부터 인연이 깊은 유목민 화가 최울가였다.
어디냐고 묻기에 동자동 이랬더니,
“형! 택시타고 퍼떡 나오소.”라며 반겼다.

모처럼의 인사동 걸음이라 단숨에 달려갔다.
파주 헤이리에 작업실은 있지만, 세계를 떠 돌아다녀 잘 만날 수 없는 그다.
‘유목민’에는 정길채, 고미진, 김정대씨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초대전으로 미국 떠나기 전에 한 번 나왔다는 것이다.

모처럼, 쌍 팔년도 이야기로 반가운 해후의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 중에 가슴 뭉클한 사연도 들었다.
어렵게 작품 활동을 하던 70년대의 이야기였다.


작고하신 부산 오영재화백의 직계 제자인 그는 당시 물감 살 돈도 없었다.
다들 어려운 처지라, 자신이 그린 그림을 여러 차례 내 주며, 지우고 그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스승의 그림을 지우는 제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러니, 어찌 섣불리 그림을 그릴 수 있었겠는가?
그런 훌륭한 스승아래 그림을 배웠으니, 오늘의 최울가가 있지 않나 싶다.
갑질로 사제지간의 도리가 무너진 오늘, 다시 한 번 새겨봐야 할 미담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한남동 ‘갤러리 서화’ 5월4일까지


▲최울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책 표지



파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유목민처럼 떠돌며, 암벽화 같은 그림을 그려 온 최울가가 모처럼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미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그의 작업행로를 담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출판하며, 한남동 ‘갤러리 서화’에서 출판기념 특별전을 마련한 것이다. 전시는 지난 4월21일 개막돼 5월4일까지 이어진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하고 자유롭다. 도상에 화려한 색을 입힌 그림들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연상되기도 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그의 아나키적 화법에서 자유로움도 만끽할 수 있었다.




▲최울가, New Storage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한 때 상승세를 타기도 했던 “Black and White” 연작에서는 기하학적인 모형들이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암각화 같은 조형들이 마치 바위 위에 정으로 새긴 듯 빽빽하게 그려져, 보는 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에 다름없었다.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의 비판을 그만이 즐기는 놀이 법으로 풍자한 것이다. 아마 문학적인 그의 그림언어로 현대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최울가,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00x100cm, 2015


이번 ‘갤러리 세화’에 발표된 작품은 또 다른 변화를 보여 주었다. 원시주의에 천착한 골격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들이 굵어졌고 여백의 미도 생겨났다. 일단 보는 이로 하여금 안락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번에 펴낸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읽고 그 원인을 짐작하게 됐다.



▲최울가,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62x130cm, 2015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 그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캔버스 위에 생겨난 여백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마음의 여백으로 여겨진다. 곰곰이 그의 작업행로를 돌이켜 보면, 꾸준히 변해 온 작업여건이나 주변 환경도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최울가,Black Play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이번 전시와 함께 ‘인문아트’에서 발간한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에는 최울가의 예술철학과 삶의 행로가 일기처럼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신작에 이르기까지 130여점이나 실려 있는데다, 문학적 감수성이 배어있는 그의 글들은 최울가의 작품세계에 푹 빠져들게 한다.


문의:한남동 ‘갤러리 서화’(02-546-2103)


[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기자





파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유목민처럼 떠돌며 암벽화 같은 그림을 그려 온 

원시의 영혼 최울가 화백이 모처럼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New Storage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현대미술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성찰과 그의 작업행로를 담은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책을 출판하며

서울에서 특별전을 가진 것이다.

이 전시는 한남동의 갤러리 서화’(02-546-2103)에서 지난 421일 개막되어 54일까지 이어진다.




, 작가를 알게 된 지가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부산에서 알게 되어 서울로 올라오며 헤어졌는데,

몇 년 후 인사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그의 작업실과 전시회를 오가며 작업들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원시성을 띤 그의 그림들은 너무 순수하고 자유로웠다.

도상에 화려한 색을 입힌 그림들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

그 무렵 나에게 선물로 준 작품 한 점이 있다 비 맞을까 걱정되어 개구리에 우산을 받쳐 든

어린이의 형상은, 볼 때마다 배려에 대한 자성의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Acrylic on Korean Paper, 20x25cm 1993

 

다양한 도형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세계는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드로잉 자체가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표현방법 아니던가.

작가의 고향이었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바로 연상되었다.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고, 동물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그려 진 그림들은 원시적인 인간 본연의 삶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무시하는 아나키적 화법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이다.



[Everything About New York] Oil on Canvas, 259x193cm, 2001 국립현대미술관소장


White Play Series, Oil on Canvas, 122x152cm, 2012


 

그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살아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가끔 서울에 초대된 작품을 보며 많은 변화를 읽었다.

그 무렵 “Black and White” 연작으로 더욱 상승세를 타고 있었는데, 기하학적인 정형이나 모형들이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각화 같은 조형들이 마치 바위 위에 정으로 새긴 듯 빽빽하게 그려져,

보는 이에게 말 걸고 있었다. 그 상형문자 같은 기호들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에 다름없었다.

원시성의 훼손에 대한 물질문명의 비판을 그만이 즐기는 놀이 법으로 풍자한 것이다.

아마 문학적인 그의 그림언어로 현대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Black Play Series, Oil on Canvas, 130x162cm, 2015



White Series, Oil on Canvas, 162x112cm, 2015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이번 갤러리 세화에 발표된 작품들은 또 다른 변화를 보여주었다.

원시주의에 천착한 골격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선들이 굵어졌고 여백의 미도 생겨났다.

일단 보는 이로 하여금 안락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가 펴낸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란 책을 읽고

그 원인을 짐작하게 되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그 자체가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이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캔버스 위에 생겨난 여백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마음의 여백으로 여겨진다. 곰곰이 그의 작업행로를 돌아 보면,

꾸준히 변해 온 작업여건이나 주변 환경도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62x130cm, 2015


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00x100cm, 2015


Infinity Series, Oil on Canvas, 100x100cm, 2015


처음 가본 갤러리 서화 가정집을 개조했는지 분위기가 아늑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모습에 엄청 반가웠으나 작가와 진득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전시 작품에 대해 물어 볼 것이 많았으나, 손님들이 내미는 책에 서명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 온 손님도 미술평론가 유근오씨 외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쉽지만,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성취도에 경의의 박수를 보내며 돌아 왔다.























 

그리고 이번 전시와 함께 인문아트에서 발간한 나는 하이에나처럼 걸었다에는

최울가의 예술철학과 삶의 행로가 일기처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초창기 작품에서부터 신작에 이르기까지 130여점이나 실려 있는데다,

문학적 감수성이 배어있는 그의 글들은 최울가의 작품세계에 푹 빠져들게 한다


출판사 : 인문아트 /  책값 : 14,000

 

사진,/ 조문호

 

 

 

 

 







완주의 왈패 한봉림이가 화두를 보내왔다.

작은 영웅들의 동네 인사동’, 우리 그들을 만난다.”로 글을 쓰란다.

생각해 보니, 인사동을 풍미한 많은 걸물들이 떠오르더라.

 

더러는 저승사자한테 붙들려가기도 했지만,

대개 변두리에 처박혀 구멍 파느라 두문불출하고 지낸다.

인사동만 바람난 줄 알았더니, 그들도 바람났나보다.

 

민병산, 천상병, 박이엽, 중광스님은 그래 그래 놀다 가셨고,

별만 줄 창 그리던 강용대, 체류냄새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던 사진기자 김종구,

어디엔들 이 한 몸 머물 곳 없으랴산문집으로 폼 잡던 땡초 최영해,

민중미술 그림판을 좌지우지한 사단장 김용태, 인사동 밤안개 여 운,

성질 더러운 콧수염 사진쟁이 김영수 등 많이도 잡혀갔다.

 

김명성, 노광래, 전활철, 최일순 등 몇몇은 인사동에 남았지만,

소설이 안 팔려 작가폐업술집 낸 배평모는 풍기 갔고,

인사동만 나오면 인사불성 된다는 사기꾼 한봉림은 완주 있고,

품팔이 노동자 시인 김신용은 골병들어 소래있고,

부산의 파아란 바다를 그리워하던 이청운은 병원에 갇혀 산다.

 

막사발처럼 사는 상투꾼 김용문은 터키에 돈 벌러 갔는데,

대처승인지, 시인인지, 사기꾼인지 헷갈리는 신동여는 영주 살고,

임진각에 바람개비 날린 털보 김언경은 단양 살고,

떠돌이 유목민  최울가는 어디 있는지 정처 없고,

술버릇 지랄 같은 장경호는 남양주서 독수공방 기다린다.

 

날씨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인생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노세노세 늙어 노세, 죽고 나면 못 노나니...” 이 말 참 명언이다.

이 봄 가기 전에 인사동서 경노잔치 한 판 벌이자.

함양 호랑이 이목일이가 인사동서 잔치한다니, 떡 본 김에 제사지낼까?

다음달 27, 인사동의 갤러리M’이란다. (회비20,000원)

 

제목은 거창하게 작은 영웅들의 동네로 시작해 놓고,

글이 삼천포로 빠져 경노잔치 사발통문이 돼 버렸네.

지정곡은 싫어하는데다, 본디 글쟁이가 아니고 사진쟁이니,

너그러이 양해 바란다.

 

사진,/ 조문호




아래 사진들은 23일의 인사동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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