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운 화백이 청운을 꿈을 안고 상경한 지도 어언 반세기가 가깝다.

그가 화단에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은, 71년 구상회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다,

그리고 데뷔한 지 10년 만에 중앙미전에서 특선을 받으며 재 부상한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시련도 따랐다.

 

박통 때인 1970년대 말에는 독제에 항거하는 ‘현실과 발언’에 합세해 혼이 난적도 있다.

정의감을 억누를 수 없어 참여했지만, 그가 표적이 된 것이다.

 

어리숙한 이화백을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그를 납치해 무려 50일이나 감금해 버렸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출감하자 말자 낯설고 먼 프랑스로 떠난 것이다.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가 주로 그렸던 그림 소재는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 바닷가 풍경이었다

애수에 젖은 풍경들은 질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둡지만 서정적인 바다가 바로 이청운의 그림 세계다.

 

그가 아프기 전에 부산 청사포로 화실을 잠깐 옮긴 적이 있었다.

비릿한 바닷가 추억을 떠올리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림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항상 10년이라는 변곡점이 따랐다.

병마와 싸운 지도 이제 10년이 가까워오니, 곧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먼지 덮인 미완의 작품이 빛을 발할 날이 머지않을 것 같다.

 

지난 20일, '청운이형 병문안 가자'는 연락을 김명성씨로부터 받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에다 몸도 편치 않았지만, 누워만 있을 일은 아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며 가지 못했으니, 그를 본 지도 3년이 넘어 버렸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 응암역에 내렸는데,

약속 장소인 서부경찰서 앞에는 김명성씨와 조해인씨가 먼저 와 있었다.

뒤이어 송상욱, 김영복, 전활철씨가 줄줄이 나타났다.

 

화실에는 부인 이상랑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긴 세월동안 간병하느라 고생해서 그런지, 곱던 얼굴에 주름이 졌다.

대조적으로 이청운씨는 동자 같은 미소를 띠며 반갑다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청운 화백이 지병으로 자리에 누운 지도 어언 십 년이 가깝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제 이청운 화백도 변할 때가 된 것 같다.

살신성인,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아내 덕이지만,

미완의 그림을 두고 눈감지 못하는 이화백의 절박함도 더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 어찌 하늘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처음 병문안 갔을 때, ‘5년만 더 그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소연 했는데,

소망을 이루고 싶은 집념에 십 년을 버텨낸 것 같다.

병상에 누워  곳곳에 걸린 미완의 그림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구상과 고민을 했겠는가?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 미완의 그림에 혼을 불어넣을 때다.

 

털고 일어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구상한 것을 에이 아이가 완성케 하면 안될까?

 

어두운 잿빛 화실의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래된 자화상 같다.

이젤은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봇대 같기도 하고,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든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뒤 늦게 뮤지션 김상현씨가 등장했다.

그 역시 중병으로 투병하는 처지지만,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힘들게 찾아온 것이다.

전에는 아코디온을 메고 와 셀브루의 우산을 연주했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펐는지 모른다.

그때가 생각났는지, 청운의 표정은 아쉬운 감이 역력했다.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 온 상현씨 역시, 힘들어 악기를 가져오지 못한 심정이 어떻겠나?

 

물감이 짓이겨져 걸려 있는 팔레트 행렬도 정겹고,

이젤에 기대어 화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등대 또한 얼마나 불을 밝히고 싶겠는가?

모든 게 정지된 풍경이지만, 그 자체가 이청운의 삶이고 색깔이었다.

 

김명성씨는 이청운 미완의 작품 전을 열겠다고 말하지만, 안쪽에 누운 이 화백 들을까 걱정되었다.

긴 세월 눈 감지 못한 이유가 뭔 데, 자존심 상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들 화실에서 나왔지만 그냥 헤어질 수 없어, 서부경찰서 후문 쪽에 자리 잡은 마포나루로 갔다.

푸짐한 갖가지 해산물이 나왔는데, 인사동 낭인들 술자리에 어찌 소리가 없을소냐?

‘부용산’으로 시작한 음유시인 송상욱 선생의 흘러간 노래는 아련한 추억을 불러들였다.

 

'내 이름은 순이' 라는 노래인데, 가사 내용이 대폿집 작부의 신세타령이었다.

"내이름은 순이랍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에레나예요. 그냥 그냥 십팔번으로 통한답니다

술이 좋아 마신 술이 아니 랍니다. 괴로워서 마신 술에 내가 취해서 고향에 부모형제 내동생이 보고파 웁니다.

그 날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캬바레에서 보았다는 뜬소문도 거짓이예요"

 

오랜만에 듣는 송상욱선생 노래도 흥겹지만, 술상 두드리는 젓가락 반주가 더 죽였다.

 

사진, / 조문호

 

 

 

지난 17일 오후5시 무렵, 인사동 사람들의 정기모임이 인사동 유목민에서 열렸다.

 

두 달 만에 열린 이번 모임에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이명희, 정복수, 조해인, 유근오, 장경호, 정영신,

임태종, 공윤희, 안원규, 임헌갑, 최유진, 임경일, 김발렌티노 등 15명이 참석했다.

 

모처럼 만난 반가운 자리였으나 좌석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분도 있었는데, 마침 최유진씨로 부터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위령 종루를 보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는 27일 오후4시부터 인사동 서원빌딩 14‘615남측위원회회의실에서 종루 보수 모금 확산을 위한 이규수교수의 '관동대진재와 조선인 학살, 그 망각과 기억의 소환'이란 특강이 열리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

 

이 일은 오래 전, 김의경, 심우성선생께서 성금을 모아 일본 관음사 경내에 종과 종루를 세웠으나, 지금은 훼손이 심해 보수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심우성선생을 대신하여 연극연출가 최유진씨가 모금위원장을 맡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2023년은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이지만, 그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고 원혼들을 진혼하기 위한 시설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9년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그 학살 현장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단다.

 

1985년 그곳의 위령 팻말을 본 한국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대한민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기림 시설인 보화종루를 일본 관음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9년에는 일본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령비를 종루 옆에 세우고, 한일 양국 시민들의 추모문화제도 계속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적 가치를 지닌 보화종루가 오랜 세월과 잦은 지진으로 훼손과 파손이 심해져 붕괴 위험에 처한 것이다.

 

이에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을 맞아 과거 이 종루를 건립하고 보수해왔던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후배와 자녀 세대 문화예술인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양국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개보수하여 시설을 보존하려 한다.

 

학살피해 100주년이 되는 오는 9 10일은 추도문화제도 함께 개최하여 상생의 뜻깊은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오니, 뜻있는 분들의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사진, / 조문호

 

 

  

 

자유로운 삶을 사신 철학자 신성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았다.

뇌출혈을 일으켜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인사동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윤명철씨가 발견하여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늦었다고 한다.

독일 사는 조카에게 연락이 닿아 그나마 혈연이 빈소를 지킬 수 있었다.

 

지난 5일 오후6시 무렵, 빈소를 차린 유목민에 갔더니,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와 조카 신대식씨를 비롯하여

윤명철, 노광래, 전활철, 최유진, 강찬모, 김명성, 조해인, 이명희씨가 있었다.

 

일찍은 박상희씨가 다녀갔고, 늦게는 방기식씨와 김상현씨도 조문을 왔는데,

김상현씨는 암과 투병중인 환자가 아니던가?

 

빈소에 걸린 영정사진이 젊은 모습이라 낯설기도 하지만,

고인의 영전에 술 한 잔 올려 편안한 안식을 기원했다.

 

먼길 떠나는 노잣돈이라며 돈봉투를 내놓았더니, 노광래씨가 필요없다며 돌려 주었다.

술 값은 독일에서 온 외조카 유수선씨가 부담한다며...

 

고인은 독신으로 사셨으니, 걸릴 것 없이 편하게 떠나신 것이다.

장례식장보다 유목민에 빈소를 마련한 것도 잘 한 것 같았다.

 

5일은 인사동 유목민에서 조문객을 맞고,

6일은 노광래씨가 운영하는 시네갤러리에서 맞을 것이라 한다.

 

생전에 두 곳을 가끔 들리기도 했지만, 유목민처럼 사시며 술을 즐겼으니

고인의 뜻도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인의 삶처럼 자유롭게 이승을 떠돌며  삶을 하직한 것이다.

최유진씨는 장례문화도 이처럼 다양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조카가 사는 독일로 옮겨 갈 것이라는데,

절차가 까다로워 보름정도의 시일이 걸린다고 한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사진, / 조문호

 

 

 

 

명절이 되면 빌린 돈도 갚아야 하지만, 차례상 차림에서 선물에 이르기까지

돈 들어 갈 곳이 너무 많아 명절 다가오는 것이 무서운 때도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무소유의 삶을 살아 그렇게 마음 편할 수가 없다.

더러 불편한 점도 있으나 돈으로 생기는 폐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행스럽게 기초생활수급자라 최소한의 수입이 보장되어 사는데 불편함은 없다.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생기 듯,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모든 사건이 돈에서 비롯된다.

정치인들이나 재벌이나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무섭다.

공직에서 옷을 벗거나 감옥에 가는 것까지 감수하며 돈에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돈은 ‘돈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돈 놓고 돈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돈은 밑천이 있어야 벌 수 있다.

그 돈을 굴려 버는 과정에서 온갖 몰염치와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하고,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춘다.’는 말은 사람의 능력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다.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는 말에서는

돈의 위력을 강조하느라 불가능한 일 까지 끌어들여, 돈 때문에 세상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돈이 없을 때도 돈에 대한 말을 많이 한다. ‘돈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 있으면 금수강산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돈 벌기가 힘들어 ‘돈 한 푼 쥐면 손에서 땀난다.’고도 한다.

 

그래서 ‘돈에 침 뱉을 놈 없다’지만, 돈 많은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특히, 돈을 벌어 모으기만 하고 쓰지 않는 구두쇠는 비난과 풍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 해서,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고도 한다.

 

그처럼 돈은 버는 것 보다 쓰길 잘 쓰야 한다.

돈 때문에 친구는 물론, 등 붙이고 사는 가족까지 헤어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기도 하고...

 

 돈이란 똥과 같아서 돈이 모이면 구린내가 진동을 하나 골고루 나누면 좋은 거름이 된다.

나 역시 돈이 있을 때는 걱정을 달고 살았으나, 돈이 없으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종종 인용하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는 속담도 돈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경구다.

돈에 대한 속담까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돈이 요물은 요물인 모양이다.  

 

정초부터 재수 없는 돈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은,

돈이 없어 빌려가며 가난한 예술가를 돕는 사람이 있어서다,

 

주말에 녹번동 가면 찾아오는 지인이 더러 있다.

지난 토요일에는 정동지 동생 정주영씨가 다녀갔고, 일요일엔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왔다.

활철씨는 용돈 하라며 돈 봉투를 내놓아 정동지 팁이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지난 20일은 김명성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해 바뀌기 전에 술이나 한잔 하자며 불광동 '대조시장'에서 만나자는데,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추웠다.

동자동에서 시간 맞춰 갔으나, 조해인씨와 먼저 도착해 길에서 떨고 있었다.

 

'대조시장'에 온 것은 며칠 전 홍어무침을 샀는데, 맛이 있어 다시 사러 왔다는 것이다.

홍어무침을 배낭에 집어넣고 추위를 피해 인근 ‘남도술상’이란 주막에 들어갔다.

맛있는 집만 찾아다니는 그였지만, 추위에는 도리가 없었다.

 

연포탕을 안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김명성씨가 두 사람에게 용돈을 내놓았다.

병석에 누워있는 이청운화백을 비롯한 몇 몇 분에게도 보냈다는 것이다.

 

인사동에서 ‘아라아트’를 운영할 때는 종종 가난한 예술가들을 도왔으나,

지금은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 빚더미에 앉은 처지가 아니던가?

가져 온 돈도 외국기업에서 지사장으로 근무하는 딸에게 빌린 돈이라고 한다.

제 코가 석자인데, 남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겠나?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받으면서도 "씰데없는 짓 그만하라"는 염장 지르는 소리를 했다.

 

다들 갈 길이 바빠 소주 두병만 까고 일어섰는데, 마침 돈 쓸 곳이 생겼다.

밥만 올리려던 차례상을 차리려고 '대조시장'에서 장을 본 것이다.

술김에 이것저것 안 살 것까지 사며 돈을 다 써 버렸다.

돈이 생기면 그냥 두지 못하는 버릇을 탓하지만,

차례음식도 귀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을 것 아닌가?

 

아무튼, 김명성씨 덕분에 푸짐한 명절상을 차렸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 아무리 없어도 밥 굶는 사람은 없는데,

그득한 제사상 또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부스러기 일 뿐이다.

 

새해에는 더 이상 민폐 끼치지 않기로 다짐했다.

돈이 인간성을 갉아 먹는다.

 

사진, 글 / 조문호

 

 

김수길의 다섯 번째 시간지우기 편린사진전이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와 함께 조해인이 쓰고 김수길이 찍은 에세이 신화가 된 청소부출판기념회도 유목민에서 열렸다.

 

지난 주말 정동지와 김수길씨 사진전 보러 인사동에 갔더니,

전시작가와 조준영시인이 안국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수길의 편린사진전이 열리는 무우수갤러리로 가는 길에 봉화에서 올라 온 신동여 화백을 만나기도 했다.

 

올 일월에 개관한 무우수갤러리는 처음 갔는데,

인사동길 19-2에 신축한 와담빌딩 3-4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수길의 편린전은 여러 장 필름이 겹쳐진 이미지로, 마치 세월의 흔적처럼 희미한 기억을 불러냈다.

 

10년이 넘도록 한가지 작업에 몰입해 온 김수길의 '시간 지우기'전은

사실적 기록성보다 내면적이고 미학적 관점에 주안점을 두었다.

 

김수길은 사진 이전에 음악,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작가였다.

미학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같은 장소를 시기별로 찾아다니며, 변해가는 공간의 잔상을 기록해 왔다.

 

그의 작업은 변해가는 도시의 단면이 켜켜이 쌓여, 암울한 시대적 잔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사진 형식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접근으로 사진 표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번 전시에는 천에다 출력하여 깃발처럼 걸거나, 손수건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기존 천에 새겨진 무늬가, 프린트된 이미지와 어울리는 또 다른 시도를 감행했다.

장식성이나 실용성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시간을 지운다는 김수길의 편린전은 113일부터 14일까지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장에서 나와 신화가 된 청소부술판기념회가 열리는 유목민으로 자리를 옮겼다.

술집은 이른 시간부터 지인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준영 시인이 사 온 축하 떡에 촛불을 밝히기도 하고

연극배우 이명희씨의 에세이 낭독이 이어지는 등 출판기념회 면모도 갖추었다.

 

행복 에세이란 부제를 단 신화가 된 청소부장애를 안고 태어난 소녀 이야기였다.

청소라는 일상적이고도 사소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신화를 일구어내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사소한 일을 할 때도, 자신이 가진 100%를 아낌없이 밀어 넣으면,

그 하잖은 일은, 스스로 축복하는 에너지로 변환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의 내면 한가운데로

시냇물을 졸졸거리며 흘러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버리커뮤니케이션에서 출판한 이 책은 136면에 1.5000원이다.

 

이날 술판기념회에 참석한 분으로는 주인공인 조해인 시인과 김수길 사진가를 비롯하여

조준영, 신동여, 이명희, 전강호, 김명성, 장경호, 송일봉, 정복수, 최석태, 김신용, 최유진

이만주, 김발렌티노, 노현덕, 안원규, 송상욱, 노광래, 이인섭씨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 김신용시인은 일 년만의 외출이었다.

두문불출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요즘은 사진찍어 시를 쓰는 디카 시에 집중한다고 했다.

사진 제판에 의한 제작비 부담으로 출판사에서 반기지 않는다는 고충도 털어놓았다.

비염이 있다며,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외곽으로 떠도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작품과 명예나 돈도 좋지만, 건강이 최고다.

모든 것이 죽고 나면 아무런 쓸모없는 게 아니던가?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즐겁게 살까?를 고민할 나이다.

작업도 일처럼 하지 말고 놀이로 즐기자.

다들 건강이나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사진, / 조문호

 

 

 

최근 들어 아름다운 삶을 살던 분들이 여럿 세상을 떠나셨다.

연세가 많은 황명걸 시인이나 박기정 화백은 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안애경 감독은 마음 정리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 더 안타깝다.

 

떠난 분은 말이 없으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일 뿐이다.

, 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더 빨리 데려간다고 믿으니,

고난의 삶을 끝내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는 동안 나쁜 일만 아니라면 꼴리는 대로 즐겁게 사는 것을 최고로 친다.

 

가끔 정동지가 언제 무슨 일이 있다고 약속을 해오면 하는 답은 똑 같다.

그 때가지 내가 살지 모르겠다.”

.오늘 죽을 것처럼 사니, 두려울 것도 꿀릴 것도 없는 것이다.

 

지난 19일 박기정화백의 부음을 받았다.

정영신, 김명성, 조해인씨를 녹번역에서 만나 서울아산병원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장레식장 입구에는 조화가 줄을 이었고, 많은 조문객이 모여 들었다.

좀 있으니 박인식 시인에 이어 박재동 화백도 나타났다.

 

그리고 '삼총사’, ‘가정교사등을 펴낸 박기정화백의 친동생 박기준화백도 만났다.

박기준화백은 평소 형님께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셨는데,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박기정화백은 최근 폐암진단을 받아 투병하시다 고통스럽게 돌아가셔서 더 안 서럽다.

평생 소신이 '백절불굴(百折不屈, 백 번 꺾이더라도 휘어지지 않는다)'이던

선생께서는 시대를 보는 눈도 매섭지만, 재치 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1956별의 노래로 데뷔하여 은하수’ ‘들장미’ ‘도전자’ ‘황금의 팔

레슬러’ ‘폭탄아’ ‘치마부대등 다양한 극화 만화를 남겼다.

특히 도전자훈이폭탄아탄이는 선생의 대표적 캐릭터였다.

 

내가 고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60년대 발표한 가고파

주인공 훈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순정만화였다.

탄탄한 스토리와 사실적인 캐릭터가 돋보였는데, 지금도 보고 싶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흰 구름 검은 구름’에서는 오동추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친구들 보는데, 교실창문으로 도시락을 넣어주는 할머니에게 난색을 표하는 장면은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일이라 더욱 잊혀 지지 않았다.

 

박기정화백을 실제 뵙게 된 것은 창예헌고문으로 모신 10여 년 전이었다.

가끔 박인식씨가 운영하는 로마네꽁티에서 뵙기도 했는데,

가수 최백호와 박인식, 김명성씨 등 몇몇이 

오동추란 박기정 펜클럽을 만들 정도로 박기정화백을 좋아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지난 18일 운명하시어, 20일 남양주 영락동산에 안치됐다.

많은 분들의 추모 속에 분주히 길을 떠났지만, 쪽방 사람들은 죽어서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한다.

없는 연고자를 기다리며 한 달 동안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약자는 죽어서도 차별받는 세상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상주-

배우자 : 정기창

 : 박영훈, 박영술,  : 박영지

사위 : 이동엽, 자부 : 정재연, 정진희

 

사진 / 조문호

 

 

 

 

 

 

 

오늘은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한 잔 하는 날이다.

평일인데도 거리에 사람이 많은걸 보니, 코로나 퇴조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가로수 사이에 걸린 ‘아리랑 미술제’ 현수막이 그나마 문화의 거리임을 말하지만,

화랑이나 표구점 등 인사동의 대표적 상점들은 파리만 날렸다.

 

거리에는 버스킹 나선 젊은 음악가의 바이올린 곡이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으나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윤희, 임태종, 조준영, 김재홍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만났다.

 

인사동의 멋과 분위기를 맛보려면 구불구불 미로처럼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가야한다.

숨 가쁜 세월 속에서도 기와를 걷어내지 않은 천장 낮은 한옥 주막이 군데군데 둥지 틀고 있다.

 

흙 뭍은 토기나 무명화가의 그림까지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거친 흙벽과 창호 문살 사이로 번지는 불빛조차 포근하다.

 

아직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술집이나 찻집들이 남아있어, 인사동 고유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막에는 지난 시절의 낭만과 향수를 한 자락씩 깔고 앉은 예술가들이 모여 인생과 예술을 노래한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동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안국역 6번 출구의 개구멍 같은 샛길, 벽치기 골목은 언제나 취객들로 북적댄다.

담배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다보니, 골목자체가 술집이 된것이다.

 

이날 모이기로 한 장소도 담배 연기 자욱한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이었다.

 모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전강호, 공윤희, 조해인, 김명성, 

임태종, 이명희, 김수길, 정복수씨 등이 모여앉아 술잔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준영시인이 부지런히 연락했으나, 여러 사람이 부도냈다고 한다.

그 날 새벽녘 까지 술을 마셨다는 장경호, 김구, 임경일씨 등 몇몇은 아예 집에 드러누웠단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창예헌’ 조직도 이제 한 물 갔다.

‘창예헌’의 뿌리는 2000년 가을, 정선 만지산에서 개최한 ‘동강주민들을 위한 굿마당’이 발단이었다.

 

김명성씨가 서울에서 버스 두 대에 인사동 예술가 70여명을 태워 왔는데,

행사장인 귤암분교에는 동강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붐볐다.

귤암리 가는 길은 차가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사진굿당’이란 조직을 만들어

가을이 되면 ‘만지산 서낭당 축제’를 열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반 경비문제도 있었지만, 거리가 먼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 한 동안 흐지부지하다 2013년 가을 무렵에야 새로운 조직인

‘창예헌’ 발기총회를 인사동 ‘아리랑’에서 개최한 것이다.

 

구중서, 민 영선생 등 원로작가 열여덟 분을 고문으로 모시고

150여명의 조직을 재정비한 인사동 사람들의 모태가 발족한 것이다.

 

단양 사인암과 전북 완주에서 가을축제를 열기도 했고,

인사동에서 천상병시인을 추억하는 ‘인사동 백년을 걷자’ 축제도 열었다.

 

그러나 이사장을 맡은 김명성씨 사비에 의지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보니, 조직 결집력은 떨어졌다.

결국 김명성씨가 운영하는 ‘아라아트’가 중국자본에 넘어가자 ‘창예헌’ 조직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 정기적인 인사동 모임이 없어, 조준영시인이 발벗고 나선 것이다.

모든 술값을 김명성씨가 부담하던 것에서 벗어나, 참여한 분에게 만원씩 거두기로 한 것이다.

 

그 돈으로 술값 내기란 턱없이 부족하지만,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조준영씨의 고육지책이었다.

긴 세월 김명성씨가 부담해온 탓에 다들 공짜에 길들었을까?

 

이 날도 십여명에게 받은 돈으로 43만원을 계산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조준영씨가 떠 안았다.

술 자리가 파할 즈음에야 이인섭선생도 나타났고, 지방 촬영 갔던 정영신씨도 나타났다.

'인디프레스' 개막식에 가서 술이 그나하게 취한 서인형씨와 최석태씨도 나타났고,

노광래씨 까지 등장했으나 모자라는 술값 정산에는 도움되지 않았다.

 

인사동 모임에 활력이 생기려면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다들 너무 늙어 버렸다.

연락하는 조준영씨도 환갑을 지난지가 한참 지났고,

여자라고는 씻고 벗고 하나 뿐이라는 연극배우 이명희도 벌써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노래 부른 대폿집 주모역은 결국 하지 못할 팔자인 것 같다.

 

대폿집  마담이 아니라 대폿집 할멈이면 어떤가?

인사동 술꾼들 바가지 씌우려면 아무래도 할멈이 제격이지 않겠는가?

나 역시 힘이 딸려 벽치기 골목에서 벽치기도 못 칠것 같다.

어즈버 가는 세월 누가 잡을 수 있겠나?

 

사진, 글 / 조문호

 

간밤에 눈이 내렸다.

며칠 전에는 노숙인이 거리에서 얼어 죽었다.

코로나 감염이 두려워 합숙소를 기피해서다

요즘 들어 노숙인과 쪽방촌 사는 빈민들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다.

없는 자에게 코로나는 더 가혹하다.

 

난, 송년회 술타령하다 정초부터 헤매고 있으나

잘 곳이 없어 생사를 헤매는 노숙인들도 많다.

 

서울역 광장엔 밤새 내린 눈이 서서히 녹고 있었고, 노숙하는 분은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 들어가 몸을 녹이는데, 조해인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제주에서 변순우씨가 올라와 ‘응암동콩나물국밥’에 있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이 꺼져버렸다.

금방 방전되는 고물 핸드폰이라 공짜 폰으로 바꾸라지만, 그냥 쓴다.

밖에 나올 때만 사용하는데, 솔직히 없는 게 편하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집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변순우씨도 모처럼 왔지만, 전화가 끊겨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갔더니, 변순우, 조해인씨 외에 김수길씨도 있었다.

그 사이 소주를 여섯 병이나 깠더라.

 

변두리시인에게 무슨 변수가 있었던 걸까?

만난 지가 한 오 육년은 된 것 같은데, 더 젊어보였다.

30여년을 동생처럼 지냈으나,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어떻게 사는 지도 모른다.

근황을 묻고 싶었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별것 있겠나?

 

팔 년 전에는 정동지의 제주 장터 탐방 길에 들려 신세도 졌다.

항상 윗사람에게 싹싹하고 아래로는 의리를 챙기는 정 많은 친구다.

 

그런데, 모처럼 제주에서 출두하신 변사또 신년 하례연에

수청들 기생이 없다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낯 술에 취해 노래방 가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나 갈 수 없었다.

고질병으로 헉헉거려가며 정초부터 악쓸 수야 없지 않은가?

 

새해 첫 만남이었으나, 방석집 추억을 곱씹으며 물러나야 했다.

다들 새해에도 재미있는 일 많기를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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