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s for the Heart

김명숙展 / KIMMYUNGSOOK / 金明淑 / painting

2023_0525 ▶ 2023_0627 / 월요일 휴관

김명숙_HT20_종이에 혼합재료_170×130cm_2019

김명숙 홈페이지_www.myungsookkim.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_SEOUL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indipress.modoo.at

@indipress_gallery

www.facebook.com/INDIPRESS

 

2007년 무렵부터 2018년경까지 이어진 이 심장연작은 가슴의 상흔들에 관한 공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업들은 나의 심우도였을지도 모를 미노타오르스 연작과 Works for Workers 연작, 그리고 자신의 심연에로의 하강에 관한 Katabasis 연작들과 동시에 진행되어 아마도 그 연작들에 내재되어 있을 상흔들이 Heart라는 도상을 빌어 재현된 것이리라. 연작들 중에는 극심한 신경증에 시달리던 환자가 고통에 못 이겨 자기도 모르게 쥐어뜯어 삼킨 머리카락들이 어지러이 뭉쳐있는 흉부 X레이 사진을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머리카락들과 담뱃재를 자리공이라는 식물의 즙에 섞어 그린 심장이 있다. 민간에서 자리공은 살충제나 지혈제로 쓰인 약재이며 신선들에게는 불로장생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심장을 인체화한 삼면화는 정신의 구심력과 원심력,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형상화한 작업이었다. 이 삼면화에서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그 피를 지혈해주는 제의적 의미로 자리공의 즙이 사용되었는데, 몇 년이 지나니 탈색이 되어 마른 피 자국처럼 되어버렸다.

 

김명숙_HT16_종이에 혼합재료_170×130cm_2016

 

작업을 하면서 읽었던 '심장의 역사'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에서는 심장이 뇌로 간주되었으며 그들은 심장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한편 수피즘에서 심장은 내부의 황제로서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고, 신성으로 통하는 문으로 인식되었으며, 인도인들에게 심장은 브라만이 거처하는 마음의 지성소였다. 니체의 심연의 아이들은 '빛나는 어둠'의 세계인 가장 깊은 정신의 심연으로 내려가 마침내 심장의 박동 소리에 맞춰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대지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난다.

 

김명숙_영정07_종이에 먹물_95×75cm_2013

 

심장 연작이 마무리될 무렵, 작업실의 심장 그림들은 더이상 물감으로 재현(represent)되기를 거부하며 오브제로 제시(present)되기를 요구하였다. 폐차에서 떼어낸 찌그러지고 녹슬고 삭은 부품들로, 숯으로, 재로, 얼음으로, 깨진 거울들로, 누더기로, 피 묻은 거즈로, 오래된 문짝으로, 진주를 품은 조개로, 연꽃으로… 하지만 제한된 작업실 공간에서 거대한 심장 오브제들을 작업하기는 아무래도 여의치 않아 마음 속 무한의 공간에 하나씩 만들어 두기로 하였다. 비록 그날 심장들의 요구에 응하지는 못했지만, 작업실에 오래도록 놓여있던 의학 사전과 응급처치법에 관한 소책자로 Heart of Master를 재현해 보았다. 낡은 의학 사전은 도교에서 말하는 일곱 개의 구멍이 난 깨달은 자의 심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자신이 살면서 앓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스스로 진단하고 치료하면서 마침내 깨달은 자가 된 자의 심장에 나있다는 일곱 개의 구멍의 의미는 몇 년 뒤 우연히 어린 손녀에 의해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 무렵 처음으로 엄마 없이 두 주일을 보내게 된 손녀가 내게 이런 문자들을 보내왔다. "가슴에 구멍이 세 개쯤 뚫린 것 같아요." "오늘은 가슴에 구멍이 열 개도 더 뚫린 것 같아요." 살면서 가슴에 수없이 많은 구멍이 뚫릴 만큼의 고통을 겪어낸 자만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First Aid라고 적혀있는 낡은 소책자에는 내 자신에게 응급처치가 되어 줄 만한 문장들을 발췌하여 군데군데 적어놓았다. 돌 심장 오브제들은 아파트 화단에서 우연히 하트모양의 돌을 주운 것을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오가며 눈에 띄어 하나씩 모아진 것으로 심장연작의 완결작으로 미루어 왔던 Bulletproof Heart, 즉 마침내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게 된 방탄심장을 대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작은 돌 심장은 손녀가 작업실 구석의 방탄심장들을 보고는 며칠 뒤 길에서 손톱만한 돌맹이를 주워 "이건 상처가 다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는 심장이야."라며 내 손바닥에 올려 준 것이다.

 

김명숙_새_종이에 혼합재료_220×320cm_2004

 

1990년대 초반에 그려진 화산 연작은 휴화산 상태의 나의 심장이 표현되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아직 그려내지 못한 채 오래도록 마음에만 품고 있는 심장들이 있다. 전사의 심장, 제단에 바쳐진 심장, 인간의 영혼에 깃든 신성이 육화된 심장, 그리고 벙어리 냉가슴… ■ 김명숙

김명숙_Harassed land_종이에 혼합재료_245×245cm_1990

 

이 심장들에는 관객을 향해 마주한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분해되어 타들어가는 마음/정신을 환유하는 심장/뇌에는 고뇌하는 인물이 내재되어 있다. 베로니카의 손수건처럼 바탕에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체액이 베어든듯한 장기는 추락/비상이라는 작가의 주제와 연결하면 날개처럼도 보인다, 그것들은 날 수 없는 묵직한 날개, 다치고 피흘려서 비상할 수 없는 날개들이다. ■ 이선영

Vol.20230525d | 김명숙展 / KIMMYUNGSOOK / 金明淑 / painting

씨앗페

씨드머니 조성을 위한 아티스트 페스티벌展

Seed money for Artist Festival 

2023_0321 ▶ 2023_0402

  초대일시 / 2023_0324_금요일_05:00pm

 

퍼포먼스 / 권바라_윤장현_이익태

음악공연 / 가수 손병휘

 

참여작가

김계환_김수길_김억_김영미_김영진_김우성

김이하_김재홍_김정헌_김준권_김진하

김현철_라인석_류연복_박생광_박성남

박성완_박야일_박은태_박항률_박향미

박흥순_배동신_백경중_백승기_서공임

서성환_손은영_신학철_연규혜_윤여걸

이수철_이익태_이인철_이채린_이태호

이택희_이홍원_이흥렬_장경호_정영신

조문호_조이락_주재환_최병수_최애경

최윤정_최은경_칡뫼김구_허진_홍선웅

 

▶ 씨앗페 출품작 감상하기

 

뉴스아트

예술인의 권익 보호 및 향상, 당사자인 예술인의 목소리를 대변, 문화예술정책에 영향력

www.news-art.co.kr

 

주최 / 노회찬재단_유정주(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북서울신용협동조합_사단법인 풀빵_

서울민예총- 서울시협동조합협의회_(주)오디오가이

인디프레스 갤러리_예술의숲 사회적협동조합

전태일재단_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_한국스마트협동조합

주관 / 한국스마트협동조합 www.kosmart.org  

후원 / 김태완(인천사랑병원 이사장)

 

 

관람시간 / 01:00pm~09:00pm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_SEOUL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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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이사나 질병, 관혼상제 등의 상황에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하면 보통 거절을 당합니다. 정기적인 소득이 없다는 이유로 실업자 취급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동료 예술가들이 카드론, 현금서비스 등 연 20%에 육박하는 고금리 대출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용등급이 없는 예술가들은 고금리 대출기관들과 사채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 약 410명의 아티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스마트협동조합에서 그동안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채무구조조정 상담을 실제로 시행해본 결과 이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서울신협과 협의를 시작하여 약 1년여의 노력끝에 「예술인상호부조대출」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이 일정한 기금을 조성하면 그 기금의 약 7배까지 북서울신협이 예술인들에게 저금리로 대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문제해결을 위한 토대는 마련을 하였고 이제 기금을 충분히 마련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 👫👫 우리 예술가들 스스로를 위한 축제를 열고자 합니다 👫👫 ● 『씨앗페 - 씨드머니 조성을 위한 아티스트 페스티벌』라는 공연과 전시가 어우러지는 예술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축제를 통해서 예술가들이 당하고 있는 고리대금의 문제를 알리고, 우리 예술가에게 저금리로 대출을 시행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모으고자 합니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내어서 예술가들이 겪고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이 필요합니다. 신용등급이 없는 예술가들을 위한 저금리 대출이 필요하고, 예술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자금과 입법 활동이 필요합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주세요. ■ 황경하

 

 공연 프로그램-

3월 22일 (수): with앙상블(해설이 있는 음악회) 

3월 23일 (목) 

삐에로, 남성듀오 라떼, 봄비, 노블, 

꿀밤나무, 함지, 이산, 라포마, 밴드Hub

3월 24일 (금): 전시 오프닝

오프닝 퍼포먼스: 이익태 작가, 윤장현 무용가, 권바라 무용가

3월 25일 (토)  여유와 설빈, 파르베, 길가는밴드 장현호, 

곽푸른하늘, 박준, 쾅프로그램, 소리꾼 박가빈, 

천용성, 단편선, 초륜, 신정하, 허클베리핀

3월 26일 (일) 

호와호, 단아모와 친구들, 고효경, 강호중, 윤선애, 

자이, 싱어송라이터 맑은, 권나무, Jinu Konda, 서수진 Trio, 

출장작곡가 김동산, 바디뮤직 코리아 피날레 퍼포먼스

3월 27일 (월) 

유동혁, 이서영, 사토유키에, 성상식

3월 28일 (화) 

주로키, 손현숙, 김가영, 박첼너

 

 

Vol.20230321d | 씨앗페-씨드머니 조성을 위한 아티스트 페스티벌展

배경 背景 the Backgrounds

민재영展 / MINJAEYOUNG / 閔才暎 / painting 

2022_1111 ▶ 2022_1130

민재영_범람 이후 Ⅰ After the Flood Ⅰ_한지에 수묵채색_86×135cm_2022

 

초대일시 / 2022_11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이 전시는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의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_SEOUL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indipress.modoo.at@indipress_gallerywww.facebook.com/INDIPRESS

 

배경 아닌 배경 ● 언젠가 핵전쟁 이후 세상의 모습을 CG로 시뮬레이션 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보여준 가상의 장면은 모든 것이 파괴된 후 남은 석조 잔해들 위로 무성하게 자라나는 식물들로 온 도시가 뒤덮이는 풍경이었다. 같이 보던 모두들 수긍했다. 식물은 정말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로든 퍼질 수 있고, 생명력이 강인하니까. 근방의 탄천변을 걷다가 일정량의 태양광과 수분만 충족되면 하루가 다르게 번성하는 풀들을 보면서 이렇게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삶의 근간을 지탱하는 식물에로 전보다 관심을 갖게 된지는 오래이다.

 

민재영_범람 이후 Ⅱ After the Flood Ⅱ_한지에 수묵채색_86×135cm_2022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산지가 전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악지형이고 구릉성 야산이 많은 탓에 대도시의 주거/생활공간도 대부분 산과 함께 흐르는 하천변, 숲에 인접한 특징을 갖고 있다. 초중고등학교, 대학의 캠퍼스는 대부분 산자락에 위치하고 교가의 가사에는 반드시 그 학교의 배경인 강이나 산이 등장한다. 유학을 다녀온 어느 작가로부터 다른 나라의 풍광에서 학교 건물 뒤로 산이 보이지 않는 시야에 초현실적인 낯설음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익숙하고 가까운 자연과 (단기 고속성장의 표본이 될 정도로) 밀집한 산업사회의 구조물/건물들이 섞여 공존하는 생활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민재영_비 온 뒤에 After the Rain_한지에 수묵채색_50×200cm_2022

첫 개인전 이후 이제까지의 작업의 큰 기조는 "체험해 온 범주 안에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지점", 그리고 "일회성의 특이하거나 진기한 장면이 아니라 이어붙여보면 그 누구의 이야기도 될 번한 한국-대도시 거주생활의 전형성, 그 단면을 드러낸 장면들에서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기대"한 것이어서, 작업의 무대는 주로 도시의 생활공간과 거리였다. 이러한 그 동안의 작업들은 행동 반경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동선(動線)에 조응하는 내재적인 동시대 체험풍경으로서의 이미지를 채집하고 그것을 재현하려는 시도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오랜 시간 사용해 온 전통재료를 가지고 필법의 기본단위인 중봉선과 필획으로 화면에서의 구축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색이었다. 그림 속에서의 자연이나 식물은 언제나 도시에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의 배경으로, 찰나적인 연두나 초록으로 등장하는 정도였다.

 

민재영_작업실의 추석 the Studio on a Full moon night in Autumn_한지에 수묵채색_100×80cm_2022

2021년 가을에 지난 작업과정을 돌아보는 전시를 열었고, 연계 행사로 작가대담이 있었을 때, 주로 도시(라는 삶의 터전)에서 생활하고 관계 맺어온 시간들, 그리고 도시의 군상과 생활상을 그려온 까닭에 대해 나누면서, 체험의 교집합적(공통)요소를 창작자가 미지의 관객과 공유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한 편으로 과거 전통미술에서 보편적이었던 산수화라는 장르는 예술 향유자에게 어떤 의미와 기능을 했을지, 지금은 생활 속의 자연에 대한 작가들의 표현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일부러 찾아나서지 않아도 우리는 어느 동네를 가도, 고층빌딩 사이로도 산이나 숲을 볼 수 있는 환경에 있다.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생활속 시야에 들어와 있는 자연. 행동 반경을 그려온 삶의 동선에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나 당연하게 지나쳐 온 나무와 풀들은 나에게 무엇일까. 작가 대담에 참석한 어느 관객에게서 전시작 중 드물게 작은 숲의 나무를 그린 그림 (2017년작 「은신隱身 A Shelter 한지에 수묵채색 100x80cm 2017」)에 대한 피드백을 받게 된 일을 계기로 생활의 장과 체험, 동선에서 비껴갔던 소재로서의 자연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그림은 오래전 어느 창작 레지던시에 머물던 시기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쉬어가곤 하던, 실재했던 특정 장소를 그린 것이었는데, 도시의 군상이나 생활상을 주로 그리던 필치로 그려본 경험 속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관객이나 지인의 반응을 통하여 이것을 한 점의 그림으로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경험의 범주 안에 있어 온 생활 속 자연을 그려보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민재영_작업하는 H_H's Studio Window_한지에 수묵채색_61×82.5cm_2022

그래서 내가 자주 보아 왔거나 가까운 생활반경 안에서 공존하며 눈에 들어온 식물과 자연의 편린을 그림에 담는다. 그 모습은 우리 눈에 익숙한 '배경背景(the Backgrounds)'으로 들어올 수도 있지만, 살아가는 근간 즉 현실의 기반이기도 하다. 사전적 의미에서 배경은 '경치'이기도 하지만 사건이나 환경, 인물을 둘러싼 주위의 정경이자 '뒤(背)'에서 돌보아 주는 힘이고 시대적, 사회적 환경이나 장소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대 뒤의 장치라는 의미도 있다. (2022.11) ■ 민재영

 

Vol.20221111d | 민재영展 / MINJAEYOUNG / 閔才暎 / painting

21세기의 회화 Painting of 21st Century

곽남신_김희연_배주은_이현우_최수인_최은경展 

 

2022_0901 ▶ 2022_0918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양정무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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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온도 - 21세기 회화론 ● 눈이 바쁜 세상이다. 볼 것이 넘쳐나고, 우리는 그것을 언제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다. 스마트폰을 쥔 신인류에게 데이터화된 이미지와 텍스트는 두뇌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이처럼 폭주하는 데이터 속에서 지금 우리의 화가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이번 전시의 작가들의 대답을 들어보자.

 

곽남신_욕심쟁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5cm_2021

곽남신(Kwak Namsin, b. 1953)은 폭주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그림자와 실루엣을 통해 이미지의 원시적 기원을 고찰한다. 짧은 노끈과 철선이 형상으로 변이하는 순간은 이미지의 마법 같은 기원을 재현한다. "미래의 회화는 새로운 미디어의 감수성을 닮아갈 것이다. 그러나 소수는 그것에 저항할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곽남신의 회화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각세계 속에서 이미지의 원초적 생명력을 되뇌게 해준다.

 

김희연_노란 빛_리넨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20

김희연(Kim Heeyon, b. 1985)이 포착하는 세계는 스펙터클한 도시도, 빼어난 풍경의 대자연도 아니다. 그는 일상의 사소한 공간을 신선한 시선으로 낯설게 그려낸다. 일상 공간이 지닌 소박한 내러티브를 미묘한 분위기와 색감을 더해 생생히 되살리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방식을 통해 일상을 재발견하고 그 느낌, 그 존재를 화면 속에 봉인한다. 그에게 "장소들은 하나의 작은 역사이며, 그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흔적이며 자취다."

 

배주은_0의 조각_종이에 연필_120×120cm_2021

배주은(Bae Jueun, b. 1985)은 가벼운 연필로 가볍지 않은 삶의 근원을 잡아내려 한다. 종이 위에 드로잉처럼 연필의 필선을 쌓고 긁어내기를 반복하면서 큰 덩어리를 빚어나가는데 그는 이것을 '종이조각'이라고 부른다. 그는 "끝없고 반복적인 행위는 나에게 있어서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기록한다. 연필로 깎아내고 붙이듯 만든 흑연의 둥근 형상은 그에게 보름달처럼 따뜻한 마음의 풍경이 된다.

 

이현우_surface_캔버스에 유채_160×130cm_2022

이현우(Li Hyunwoo, b. 1990)는 찰나 같은 일상의 온도와 질감을 기억하고 그것을 붓질 속에 담아내려 한다. 그것이 캔버스 위로 전이되는 순간, 그 짜릿함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체들과 매순간 변하는 빛이 만나 불씨를 만든다. 그 찰나의 스파크를 캔버스로 옮긴다. ... 그림 위로 불씨가 번진다." 그에게 회화란 일상을 하루하루 새로운 리듬으로 재현해내는 불꽃같이 타오르는 신비의 세계이다.

 

최수인_Friends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22

최수인(Choi Suin, b. 1987)의 그림은 바다와 바위, 나무 등 일반적으로 풍경화를 구성하는 자연물을 채택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마치 감정과 개성을 가진 개체로서 화면 위에 존재한다. 각각의 그림 속에서 바위와 나무는 서로 의지하고 반목한다. 작가의 개인적 삶 속에서 발생하는 타인과의 관계는 자연물에 투사됨으로써 보는 사람 모두가 공감 가능한 보편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과잉 감정의 가짜 상황을 한 번 더 과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은경_진도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7

최은경(Choi Eunkyung, b. 1970)의 시선에서는 아스라이 번지는 대기가 느껴진다. 화면 속에 장막처럼 드리워진 대기는 마치 어떤 사건이 발생 할 것만 같은, 혹은 숨겨진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의 제목에서 드러나는 지명은 그 풍경의 역사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머지않아 모호한 대기 속으로 침잠한다. 그는 이것이 "'어제'에서 비롯된 오늘 같은 앞날의 풍경을 '그리움'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라고 기록한다. ● 이 전시의 작가들은 한결 같이 미술을 개인의 풍부한 감성의 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과 일상의 삶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넘쳐나는 현대의 시각문명의 홍수를 유유히 헤엄쳐 넘어가려는 듯 보인다. 작은 서사의 위대함을 진지하게 그려나가려는 이들의 태도는 이미지의 본원적 힘을 되살리기 위한 전위적 움직임으로, 이 움직임이 21세기 시각문화의 흐름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 양정무

 

Vol.20220902h | 21세기의 회화 Painting of 21st Century展

시간의 鍊金

 

김광문展 / KIMKWANGMOON / 金廣門 / painting 

2022_0624 ▶ 2022_0717 / 월요일 휴관

 

김광문_사군자_캔버스에 혼합재료_80×80cm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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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양식을 규정하는 거대한 범주로서의 시간이라는 명제를 생각해보며, 인간 삶을 포함한 모든 현상에 녹아있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지각 가능한 형태로 표현해보려는 김광문 작가의 오랜 의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전시를 준비해 봅니다. 80년대 들어서며 본격적인 화력을 시작한 작가의 작품들에 일관되게 내재된 바는 '형상의 질료화'를 진행하여 새로운 형상의 탄생을 시도하고 있다는 바입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작되어진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인간 삶 혹은 작가의 인생과 함께해온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과 교감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거나 기록이라는 인상을 가져보게 됩니다. 작가의 작업실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작품 제작에 필요한 단촐한 화구들과 손때 묻은 사물들이 서책과 함께 책장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주된 이미지들이기도 합니다. 지척의 사물들 일지라도 인생의 흐름 속에서 인연처럼 손에 들어온 내력있는 물상일 것이며 그의 화면에서 배열되고 확장되어 새로운 존재감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모든 행위들이 향하는 지점은 사물들에게서 추출해낸 시간이라는 추상을 통찰하여 예술작품으로 구현해 보려는 기나긴 탐색의 여정이 아닐까 합니다.

 

김광문_꽃_혼합재료_91×65.2cm_2022
김광문_민화에서-꽃_혼합재료_91×72.7cm_2022
김광문_Memory2_혼합재료_72.2×60cm_2017
김광문_新 책가도_혼합재료_116.7×91cm_2021

한국의 문화사 속에도 실사구시의 학자들과 예인들은 전통과 새로운 문명을 함께 접목하여 변혁기를 현명하게 대면하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심사를 잘 대변해주었던 일명 '책가도'를 후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인문과 시대정신을 만나 더 이상 절대적 위상을 위한 장식이나 배후가 아닌 독자적인 궤적으로 등장하는 귀한 징후였던 그 전형에 대하여 작가는 어느 때부터인가 심취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형식과 내용을 탐구하고 음미하고 변주해 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야말로 대상을 질료화하는 원동력임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김광문_책가도 풍경 1_혼합재료_116.8×91cm_2019
김광문_책가도 풍경 2_혼합재료_116.8×91cm_2020
김광문_책가도 풍경 3_혼합재료_118.8×72.2cm_2020
김광문_책가도_혼합재료_116.7×80.3cm_2022
김광문_풍경_혼합재료_80×80cm_2020

 

누군가는 본질은 질료에 있다고도 합니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는 긴 세월을 살아남아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형태이겠지만 해체되고 가공되면 집이 되고 종이가 되고 선지자의 형태도 되겠지요. 때로는 타버려 온기가 되고 연기로 화하여 흩어져버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질료의 잠재력과 현실태로서의 형상의 존재라는 두 개념의 관계에는 너무나도 무의식적인 시간과 어떤 역동이라는 정신적 태세가 팽팽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술 범위에서 그 역동을 '심미'라고 할 수 있다면 작가의 심미적 요체는 상황과 사물을 평면화하거나 기호화하여 실제로부터 해체하고 다시 구축의 재료로서 사용하는 방식을 무한 반복하는 과정에 있다고 봅니다. '맘에 안 들어 부숴버렸어'라는 구어를 자주 드러내고 작업실이라는 반경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지독한 은둔의 결과물로서 제작되어진 작품의 양이 너무 적다는 점 등을 정리해보면 작가가 얼마나 과정에 집착하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작가의 태도에서 예술의 고귀함에 대한 진심있는 존중과 사물의 고유한 형태와 그에 깃든 의미들에 대한 순정한 매료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도한 인간정신의 탐색 영역으로 첨예하게 진화하고 있는 예술이라는 화두 앞에서 작가의 존중과 매료가 발휘하는 위력을 유심하게 관전해본다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더욱 그러하리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 김정대

 

Vol.20220624c | 김광문展 / KIMKWANGMOON / 金廣門 / painting

 

야간비행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2022_0304 ▶ 2022_0327 / 월요일 휴관

 

손기환_잠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Tel. 070.7686.1125
@indipress_gallerywww.facebook.com/INDIPRESS

 

이번 전시의 주요 테마와 주제는 역사적 이미지와 현실 풍경에 대한 작가의 시각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 작업은 근, 현대사에서 등장하는 아주 주목할 만한 사건의 기록과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바라보는 현재 풍경 그리고 조형적 구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작업에 등장하는 사진 이미지들은 보도나 르포 사진으로 대부분 역사적 사건 사진이나 당시의 사진을 참고로 제작된 삽화들을 활용한다. 시각적 이미지 기록의 오랜 역사에서 창작자의 감성과 해석이 대부분 배제된 사진은 정확한 현실과 사실로 인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거 역사를 기록한 사진이미지가 갖는 정확함 또는 확실한 존재와 과거로서 여기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현재 시점이 더해지며 이를 해석하는 사고와 시각적(그림)의 요소가 한 화면에서 결합되어 역사와 현실 또는 현재를 미술로 해석하려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손기환_보색대비-DMZ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94cm_2021
손기환_보색대비-DMZ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94cm_2021
손기환_잠실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91cm_2020
손기환_만화사랑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94cm_2020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면, 작가와 현 역사에서 중요한 기점이나 원인이 되었던 사건들-근대 개화와 수구 세력에서 시작된 분단의 씨앗과 이어진 한국전쟁 그리고, 고착된 남북분단, 60-70년대의 「분단의 히스테리」로 불리는 남북 갈등 시대, 이후, 80년 봄, 광주민주화 운동 등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나 늘 잠재되어 있던 심리적 불안감에 DMZ현장에서 근무하며 보고 경험했던 특별했던 추억, 그리고, 작가로서 80년대를 온 몸으로 느꼈던 역사적 체험이 현재 이 순간 어떤 의미로 되살아나고 기억과 트라우마로 작품에서 보여 질 수 있으며, 더 해서 주변의 풍경-광화문, 잠실, 작업실 주변 등-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과 해석이 작품을 만들어 내는 내용과 뼈대가 될 수 있다. 이 내용과 뼈대에 조형이라는 살을 붙여 나가며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전체적인 형식을 구축해 낸다고 볼 수 있다.

 

손기환_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_2020
손기환_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20
손기환_연평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200cm_2020
손기환_연평도정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72.7cm_2019

 

결론적으로, 역사의 중요한 사건과 상황이 기록된 사진과 현재 작가가 경험하는 현재 시점의 실, 내외 풍경,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 평가와 문제의식에 대한 작가만의 생각이 그려지며, 이러한 두 개의 이미지를 한 작품 내에서 묶어 주는 역할은 색의 조화와 선, 형의 구성 등 조형적 요소로 언어적 발언으로서가 아니라 시각 구조로 대중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해석은 물리적 이미지 창작이라는 미술이 갖는 사회적 역할과 창작 태도에서 기인하며 일반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창작의 재미를 추구해 본다. (2022. 2) ■ 손기환

 

Vol.20220304g | 손기환展 / SONKIHWAN / 孫基煥 / painting

 

천근의 삶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2020_1104 ▶ 2020_1125

 

박은태_철골-H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162cm(125×162cm×2)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411j | 박은태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www.facebook.com/INDIPRESS

 

 

회화적-노동 속 숨은 그림 찾기: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변증법적 반전을 위하여1.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사람들 사이의 교류는 물론 세계경제 전반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그동안 기존의 관습과 저항에 부딪쳐 완만하게 진행되던 비대면-경제, 비대면-교육, 비대면-의료, 비대면-문화활동 등이 급부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이 산업과 생활 전반에 전면적으로 결합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코로나19 팬데믹의 파도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이럴 경우 이미 3차 산업혁명(정보혁명)에 의해 난도질 당해온 '노동의 사회적 위상'도 함께 약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자동화 기술이 제조업(스마트팩토리)과 서비스업(스마트서비스)은 물론 농업(스마트팜)과 일상생활(스마트홈)로 확산될 경우 '인간 노동'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당장 자영업과 관광/여행 등 서비스업에 큰 타격을 가했다면,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은 20여 년 전 제레미 리프킨이 예상했던 '노동의 종말'을 현실화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2010년대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이런 추세에 따라 '노동' 관련 담론은 물론 이를 주제로 한 연구도 급격히 줄어온 게 현실이다. ●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자동기술화의 증가=노동시간 감소」라는 등식이 공장 내에 적용된다고 해서 사회의 전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초국적으로 연결된 불균등 발전의 가치 사슬로 얽혀 있는 첨단기술과 낙후된 기술의 병존을 통해 독점이윤을 수취해온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가 기술발전을 사회 전체의 노동일 감소로 이어지게 할 통로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장 내에서도 이 등식은 개별 노동자의 노동력 지출을 오히려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의한 노동의 절약은 결코 노동일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1개의 상품에 이전의 10분의 1의 노동시간을 지출하게 된다는 사실은, 결코 그로 하여금 종전과 같이 하루에 12 시간 노동하고 또 그 12 시간 동안 120개가 아니라, 1200개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노동일은 단축되기는커녕 연장되기조차 하여 14시간 동안 1400개를 만들도록 강요되는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테두리 내에서는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해야 할 부분[필자: 필요노동]을 단축하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수 있는 나머지 부분[필자: 잉여노동]을 연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 409~410쪽). 맑스가 150년 전에 분석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런 역설적인 특징은 오늘날 스마트 배달경제의 현장에서 과로로 사망하는 배달노동자의 참혹한 현실에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기술 발전과 노동시간의 관계(및 그에 따른 노동의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 발전과 생산관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박은태_철골-비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176cm(125×176cm×2)_2020

 

코로나19 펜데믹/비대면 경제/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같은 오늘의 거시적이고 현기증 나는 시대 변화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이라는 오래된 주제에 함축된 이런 역설적인 의미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화가 박은태의 이번 개인전의 주제가 바로 '건설현장의 노동'이기도 하지만, 이 문제가 인수공통감염병의 펜데믹 시대이자 본격적인 인공지능자본주의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2020년대에 대다수 노동자/민중의 삶 전체를 압박하는 공통의 화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에 의한 단위 시간당 노동생산성 증가의 성과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는 오직 소수 자본가에게만 귀속될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 대한 기술적 지배력의 증대로 인해 노동자/민중 전체는 노동일의 조정은 물론, 노동의 양과 강도, 노동의 질 등 다양한 측면에서 통제력을 상실하고 더욱 불안정하고 예속적이고 취약한 상태로 전락할 위험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노동의 종말」이라기보다는 「노동의 만성적 위험의 심화」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이런 위험의 증대는 지난 40여 년 동안 전개된 3차 산업혁명/신자유주의 시대가 초래했던 노동의 수직적 분할/위계화, 자산/소득의 양극화가 가져왔던 참혹했던 결과에 비추어 보면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와 이전과는 달리 묵시록적인 재난영화/좀비영화의 생산과 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온 것이나 각종의 힐링 담론이 만연했던 것도 이런 현실적 추세가 촉발하는 소외감/불안감/공포심 대한 일종의 집단신경증적 반응(을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그러나 현실 문제에 대한 신경증적인 증상을 통한 심리적 반응/위로와 현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처방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자에 머물 경우 현실이 악화되면 신경증적 반응 역시 강화되고 자아는 더 무력해지는(정말 좀비처럼 되어 생산관계 변화의 행위자-주체가 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기술과 노동을 대체 관계로 보는 기술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노동의 위기를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내적 모순과 생산관계 내에서 노동자/민중의 위치를 직시하면서, 그와 동시에 대안적 생산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노동자/민중 자신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회복할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건설현장의 노동과정을 촬영하고 몇 개의 장면들을 선택하고 변형하면서 다양한 기계 장치들과 노동력의 결합 과정을 대형 화면으로 구성하고 있는 박은태 화가의 이번 전시가 노동자의 소외나 분노/투쟁을 주제로 삼았던 1980~1990년대 노동미술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종류의 의미(와 긴장감 있는 재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다.

 

박은태_철골-상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1×158cm_2020

 

2. 박은태 화가의 이번 작품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기울인 세밀한 수작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극사실주의 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진과 같은 정확하고 세련된 기술적 재현이 아니라 시간을 요하는 건설 현장의 복잡한 공정을 최대한 상세히 따라가면서 철골을 구부리고 용접해서 철골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과정, 여러 층의 비계를 설치하는 과정, 전선을 연결하는 과정, 목재와 시설들을 쌓아두고 여기저기 옮기는 과정, 레미콘에서 시멘트를 붓는 과정 등을 일일이 붓으로 수를 놓듯 화폭에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도구와 설비를 연결하는 건설 노동자들의 다양한 작업 동작과 안전모와 햇볕 가리개 수건과 땀에 절은 작업복의 주름 등도 특정한 단면의 사진적 재현이 아니라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직접 대면해서 꼼꼼히 실사하듯이 공들여 그려내고 있다. ● 이는 멀리서 풍경을 조감하는 원근법적인 관찰보다는 현장에서 작업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노동과정의 호흡을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인류학자의 참여관찰 기록과도 같아 보인다. 사진으로만 보면 삭막해 보이는 현장에서의 지루하고 기계적인 작업을 긴 호흡으로 생생하게 따라갈 수 있는 이런 참여관찰의 자세는 아마도 젊은 시절 7년 동안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화가 자신의 직접 경험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손과 도구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대상을 변형시키는 노동과정의 복잡한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한 인지생태학적 경험, 즉 사진으로 찍거나 말로 전달하는 형식적 지식과는 다른 특수한 감각과 근육과 주의가 결합된 복합적인 암묵적 지식과 기술적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 만일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특정한 형태의 기술적 활동에 내재한 힘든 노고와 맞물린 암묵적인 즐거움이 없다면 땡볕을 반사하는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서, 또는 바람 부는 허공에서 비계를 딛고 서서 장시간 주의를 집중하는 작업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토목 공사를 통해 텅 빈 땅에 기초 골조를 세우고 한층 한층 쌓아 올려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 나가는 긴 건설 공사의 과정을 자본의 관점에서 보자면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기 위해 생산수단과 노동력 상품을 구매해서 결합하는 회계적 과정에 대한 산술적인 계산이나 재산 증식의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유사한 보람찬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비록 그 시작과 끝이 제한된 기간에 한정된 것이고, 그 생산물이 자신의 소유나 점유와는 무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박은태_철골-여보세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205cm_2019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은태의 이번 그림은 그 자체가 건설 현장의 노동과정을 '대상화'해서 '재현(representation)'하기보다는 복잡한 노동과정 자체를 '재상연(re-presentation)'하는 일종의 '유사-기술적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물 크기에 근접하는 규모로 캔버스를 제작해서 붓으로 전선을 연결하고, 철골을 나르고, 목재를 재단하는 일종의 「회화적-노동」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흰 바탕의 캔버스에서 일련의 질서(색조와 형상의 배치가 만드는 일련의 리듬)를 조성해 나가면서 화가가 암묵적으로 느끼게 되는 수작업의 즐거움이 보는 이에게는 대형화면에 배치된 추상적인 패턴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형상이 만드는 '정중동'의 리드미컬한 '제스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전달된다. 이런 느낌은 정확히 현장을 재현하는 작은 크기의 흑백 사진에서는 포착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업들은 현장 사진을 일종의 '트리트먼트'로 삼아 무대를 만들어 직접 공연을 올리는 연출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 '회화적-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연극에서처럼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니라 각각의 현장 상황 속에서 각각의 노동자들이 취하고 있는 다양한 동작의 전과 후를 응축해낸 특별한 운동 중의 포즈들이다. 작품 「철골-3」에서 시멘트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있는 노동자의 왼쪽 몸과 다리는 다소 앞으로 기울어 드릴에 힘을 가하고 있고 등과 오른 다리가 기울기를 조절해 주고 있어 작업자의 숙련된 운동감을 그려내고 있다. 「몬드리안 비계」에서는 머리 위의 비계에 합판을 올리는 노동자의 자세에서 무거운 물건을 가벼운 손짓을 지렛대로 삼아 들어 올리는 힘의 효과적인 조절 동작을 읽어낼 수 있다. 「철골-4」에서는 목재를 재단하는 노동자의 앉은 자세들에서, 「철골-5」에서는 여러 갈래의 전선을 연결하는 자세들에서 재료와 도구와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숙련된 장인의 포즈가 느껴진다. 이런 자세들이 바로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대상과 도구를 결합하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체득했던 일련의 기술적 활동 속에서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연결되는 일련의 '제스처'들이다. 벤야민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제스처가 갖는 의미에 대해 기술했듯이 제스처들은 여러 요소들이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에피소드, 그로부터 행위의 사회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는 일련의 내용을 갖고 있다. ● "제스처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벌이는 일들과 달리 확고한 시작과 확고한 끝이 있다. 하나의 태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생동적인 흐름 속에 있는데, 이 태도의 각 요소가 이처럼 엄격하게 틀을 갖고 완결되어 있다는 점은 제스처의 변증법적인 기본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다...중단하면서 [줄거리를] 지체하는 성격과 틀로 감싸 일화를 만들어내는 성격이 바로 제스처적인 연극을 서사극으로 만든다." (벤야민: 119쪽)

 

박은태_철골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388cm(120×194cm×4)_2019

 

만일 이런 제스처들이 온전히 그려지지 않았다면 이 그림들은 건설 현장의 철골 구조나 비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일련의 추상적 패턴을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그려낸 장식적인 그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몬드리안 비계」는 바로 이런 추상적 패턴들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다양한 제스처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적으로 구조화된 사회적인 추상노동과 개별적인 구체노동 간의 변증법적 긴장을 '상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세기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현장의 구체노동을 생략하고 추상노동(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개별적인 구체노동을 기계화하는 강제력)의 결과인 멋진 구조물만을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획일적 지배를 시각적으로 일반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20세기에 시작된 추상화의 패턴과 추상노동의 이런 짝패구조는 오늘날 화려한 초고층 건물들과 신도시의 외관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 인지생태학적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적인 구체노동이 생산하는 「사용가치」는 단지 자본주의적으로 편성된 사회적인 추상노동의 양, 즉 사회적으로 지출되는 평균 노동시간의 양인 「가치」로 환원되고, 가치는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임금) 혹은 이를 제외한 잉여가치의 크기에 의해서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의 의미는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거의 망각되기에(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주목하면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개별적인 구체노동의 의미는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창조성의 원천이다(이것 없이는 새로운 상품을 판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풍부한 잠재력을 결합해서 합목적적으로 변형시키는 노동과정 속에서 발휘되는 이 창조성의 원천은 「생산수단과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모두 규명하고 비판할 수 없는 특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맑스가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지적한 것도 이 점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인간노동[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모든 노동은 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마르크스: 58쪽) ●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는 잉여노동의 비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압력이 추상노동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의 합목적적인 성격이 지속적으로 희석화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데 있다. 점증하는 자동기술화는 구체노동의 의미를 더욱 폄하하게 만들고 일부 노동자들에게서는 노동의 의미는 사용가치의 생산보다는 단지 임금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일면화되기에 이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원자력 발전소의 노동자들이 일자리 상실을 우려해 기후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데 앞장서는 아이러니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인간의 구체노동이 이제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연물의 취득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떠한 형태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마르크스: 233쪽) ● 문제는 그 사용가치의 특성이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촉진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균열을 내는가에 있는 것이지 사용가치 생산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맑스가 정확히 규명했듯이, 노동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필자: 에너지와 물질의 동화작용과 이화작용)를 합목적적으로 매개하는 존재론적인 조건이며, 이 조건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 자체도 자연력에 속한다. ●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적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마르크스: 225~226쪽)

 

박은태_철골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60cm(194×130cm×2)_2019

 

인간이 자신의 자연에 내재한 잠재력(육체적〮정신적 역량)을 개발해 외부의 자연을 변형함으로써 자신의 자연도 함께 변화시키는 활동적 과정, 즉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이라는 자연의 두 부분들 간의 결합에 의한 「자연의 자기-생산(오토포이에시스) 과정」이 곧 구체적인 노동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노동이란 불완전하지만 「능산적 자연」의 속성을 지닌 「인간의 자연」과 나머지 「비인간의 자연」이 함께 결합해 각자의 「소산적 자연」을 변화시키는, 자연 자신의 자기 조직화(자기 생산) 과정의 일부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인 노동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의 발현이자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의 존재론적 조건이기에 제아무리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해도 표기할 수 없는 것이다(퇴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무력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자연의 자기 생산을 통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발전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 문제는 이와 같은 노동의 능동적이고 자기-조직적인 의미가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 하에서는 자동기술화의 추세에 떠밀려 지속적으로 폄하되고 사회적 인식의 무대 뒤편으로 떠밀려 왔다는 데 있다. 그와 더불어 인간노동력과 함께 부의 생산의 원천인 자연력의 의미 역시 언제든 파괴하고 탕진해 버려도 되는 무상의 원료로 폄하되어 왔다. 그 결과 이제 인류는 과학자들이 「인류세/자본세의 위기」라고 부르는 전지구적인 지질학적 균열의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노동을 매개로 한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과정이 오직 자본축적만을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심각하게 일그러지면서 비인간의 자연과 인간의 자연의 풍부한 자기 조직화의 역량이 훼손되어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은 물론 코로나19팬데믹과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의 확산, 신경증적 불안과 우울증, 혐오 감정과 공포감의 확산 같은 인지생태학적 위기가 대규모로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게 전면화되자 일각에서는 트랜스휴먼/포스트휴먼 담론들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문제를 야기한 원인이 인간/자연의 불완전성과 인간중심주의에 있으므로 GNR 기술과 탈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이런 담론들은 불완전한 인간노동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해 생산성을 높이자는 4차 산업혁명의 정책/담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담론/정책들은 정작 문제의 근본 원인이 인간노동력과 자연력을 무차별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해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음을, 오직 잉여가치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 추상노동의 메커니즘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을 지배해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애써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발병의 근본 원인을 방치한 채 다양한 마취제나 환각제를 사용할 경우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할 뿐 병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따라서 정말 인류와 지구생태계가 종말에 이르기 전에 발병의 근본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를 가능하게 할 대안적인 생산관계를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노동력이 만들어낸 노동도구와 자연력을 결합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 전체를,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관계 자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박은태_철골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8×142cm_2018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관계는 대안적인 생산관계 속에는 추상노동의 일방적인 지배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양자 간의 선순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다. ●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써 일하며 또 자기들의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결합체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다만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그 자신을 위한 사용대상이었다. 자유인들의 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다시 생산수단으로 역할하며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분은 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 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 여하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 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배분은 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의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또한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서 기능하며, 따라서 공동생산물 중에서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몫의 척도로 된다....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은, 그것이 자유롭게 결합된 인간들에 의한 생산으로 되고 그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여지게 될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어버린다." (마르크스: 99~100쪽).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사회적인 공동소유로 생산관계를 전환시키는 일은 신비로운 기적이나 위대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합목적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결합체의 형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럴 경우 개별적인 구체노동들의 결합물인 사회적 추상노동 역시 그 신비의 베일(M-C-M'라는 자본의 자기 증식적 과정의 추상적인 베일)을 벗어버리고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에 놓임으로써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의 선순환의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자본가의 지휘 아래에 결합된 추상노동이 '천근'의 무게로 짓눌러 폄하되고 저평가되고 소외되어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선순환의 길을 여는 관건, 또는 지렛대는 사용가치를 생산해온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역량과 경험의 네트워크의 형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거대한 구조적 압력과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에 응축되어 있는 다양한 제스처들 사이에서 변증법적 긴장관계(와 역전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은태_철골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9×152cm_2018

 

3. 박은태의 이번 작품들 중에서 이런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예시를 '하이 앵글'로 그린 「철골-5」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건축물의 평면은 거시적으로는 도시 전체의 풍경을, 미시적으로는 컴퓨터의 배전판, 반도체의 회로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오늘의 대도시는 거시적-중간적-미시적 수준 모두에서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복잡한 회로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철골-5」의 이미지는 오늘의 초연결 사회의 도시적 삶의 풍경화로서 제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 그런데 이 그림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지점은 노란색/붉은색/파란색/흰색의 화려한 색조의 전선들과 사각형의 시멘트 블록과 크고 작은 배관들이 연결된 네트워크의 추상적인 패턴이 만들어내는 현대적인 미감만이 아니라, 전선들을 연결하고 있는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동작이다. 현재 '스마트팩토리', '스마트팜', '스마트시티', '초연결사회'에 관한 모든 담론과 정책들은 마치 센서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와 크고 작은 로봇 등의 기술적 수단들에 의해 자동으로 복잡한 네트워크 형성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기술적 네트워크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철골-5」가 잘 환기시키고 있듯이 이 복잡한 회로들의 링크가 실제로 연결되어 작동하게 되려면 반드시 개별 노동자의 구체노동이라는 결절점(노드)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노드의 관점에서 보자면 따라서 전체 링크들의 숫자와 복잡함보다는 각 노드의 성격과 방향, 노드와 노드가 결합하는 방식이 더 중요해진다. ● 노드를 이루는 개별 노동자들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자신의 구체노동의 실존적이고 생태학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것들이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노동력으로 새롭게 연결되도록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체를 구성하게 된다면, 컴퓨터 배전판의 작동 방식은 물론, 건축물 내부에서 사물들의 연결 회로와 사람들의 동선, 건물과 도로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연결하는 방식을 의식적/계획적으로 바꿀 수 있다.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증식을 위해 노동력 착취와 온난화와 환경오염과 자연파괴를 서슴지 않는 「자본의 수직적 네트워크」가 아니라 공동소유에 기반해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면서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공진화」를 촉진할 「노동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방향이 그것이다. ●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철골-5」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예시했던 「오리-토끼 그림」을 볼 때와 비슷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멀리서 얼핏 보면 이 그림 역시 추상적인 격자를 촘촘하게 중첩시킨 모더니즘적인 추상화와도 같아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추상적 패턴 속에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동작에 초점을 맞추면,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노드들의 새로운 연결망이 마치 캄캄한 밤하늘에 고립된 것으로 보이던 별들이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여러 가지 성좌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기계들과 사물들만의 연결망이 아닌 노동하는 사람들의 연결망,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회 구성체의 성좌가 그것이다.

 

박은태_철골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1×216cm_2018

 

물론 직선의 격자들과 곡선의 추상적 패턴(오리 그림)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전망(토끼 그림)을 끌어내는 이런 시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기는 쉽지 않다. 노드들이 고립되면 「철골-6」에서처럼 미로와 같은 격자 속에서 표류하기 쉽고, 때로는 「철골-구덩이」에서처럼 블랙홀 같은 거대한 구멍 앞에서 망연자실해질 수도 있다. 때로는 「하늘-배선」에서처럼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일시적으로 갇힐 수도 있다(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소외된 노동자들 모습). 하지만 사람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고립되거나 분리된 상태로 정지해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실은 가장 복잡하고 역동적인 다중지능 네트워크적인 존재라는 오늘의 뇌신경과학과 복잡계 생물학의 발견은 이런 고립감이 일반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쉽게 확인해준다. ● 뇌신경과학에 의하면 인간 뇌의 신체지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손과 입술을 관장하는 영역이다. 이는 직립에 따라 손과 입술 사용의 자유도가 크게 증가한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손-도구의 결합」에 의한 생산 역량의 발전과 「입술-언어의 결합」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역량의 발전은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이룩한 문명 발전의 두 바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이라는 것도 실은 손-도구의 결합과 입술-언어의 결합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개별적인 구체노동과 사회적인 추상노동의 역동적 결합의 누적적 산물이며, 인공지능과 네트워크의 기술의 발전 역시 그러하다. 만일 발생과 과정을 도외시하고 그 최종 결과물에만 주목해서 인간노동과 인간들 간의 의사소통의 역량을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네트워킹 기술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생산관계를 몰고 나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 뇌에 장착된 진화적 역량인 손-도구 사용과 입술-언어 사용의 역량을 폐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인류세/자본세의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이제는 인간에게 고유한 실존적 역량 자체의 존폐를 좌우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셈이다. ●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몸과 뇌에 잠재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풍부하고도 강력한 힘을 깨닫고 활성화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해나간다면 이제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전의 가능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근의 무게"로 짓눌리면서도 유용한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있는 모든 노동하는 개인들이 '자기 자신의 실존적 역량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데에서부터 열릴 수 있다. 이번 박은태의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이 주목하고 있는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작업 동작과 제스처는 바로 오랫동안 폄하되고 망각되어온 이 잠재된 역량을 새롭게 일깨우며, '정중동'의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소외된 구체노동」으로의 일방향의 흐름이 중단되면서 「능동적 구체노동→대안적인 추상노동」으로 나아가는 역전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정중동의 제스처」에 함축된 이러한 두 갈래의 상이한 회로에 대한 인식 가능성은 숨은 그림 찾기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놀랍고도 유쾌한 즐거움을 준다.

 

박은태_철골-구덩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2×218cm_2018

 

(A)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 벌써 승리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또 인간은 온전히 인식되지도, 최종적으로도 인식되지도 않는 존재이며. 쉽게 고갈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많은 가능성을 자체 내에 품고 그것을 숨기고 있는 존재(이로부터 인간의 발전능력이 유래한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유쾌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환경에 의해 변화되고 또 스스로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것, 즉 환경을 다뤄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유쾌함의 감정을 자아냅니다." (벤야민: 135쪽) ● 물론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는 개별 노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링크의 연결 방향을 바꾸어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해갈 수 있다는 얘기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일종의 '그림의 떡'을 제시하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다. ● (B) "하지만 오늘날 특정한 상황 때문에 일어나고 있듯이 인간을 어딘지 기계적인 존재, 남김없이 투입되는 존재,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간주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벤야민: 135쪽)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었던 지난 시기에는 구체노동에 대한 추상노동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관철되었기에 (B)의 관점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면, 미국 헤게모니의 해체 과정에서 세계체계 전체가 요동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추상노동의 체계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A)의 관점에서 구체노동의 능동성이 새롭게 발휘될 수 있다. 카오스 이론이 설명하듯이 체계의 요동이 급격해지면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성의 시간」이 모순의 과잉결정 속에서 미끄러지는 「재생산의 시간」(지배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의 시간)이라면, 「사건의 시간」은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이중운동 속에서 나타나는 「변동의 시간」(전자에 맞서 피지배계급이 능동적으로 전개하는 계급투쟁의 시간)이다. 세계체계의 상대적 안정기에는 전자가 지배적이지만 세계체계의 내적 모순이 응축되어 폭발하는 이행기에는 후자가 활성화된다. 이런 구분은 뇌의 인지생태학적 리듬의 두 가지 유형, 즉 상대적으로 낮은 진폭과 긴 파장을 가진 안정적 리듬(감각적 즐거움과 미적인 만족)과 높은 진폭과 짧은 파장을 지닌 레비비행 같은 폭발성 리듬(고통을 경유한 숭고의 기쁨)의 구분과도 상응한다." (심광현: 85쪽) ● 코로나19 팬데믹의 파도를 타고 인공지능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현재 순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시간과 대안적 생산관계를 향한 변동의 시간이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다. 이것이 문명사적 이행기의 소용돌이에 내재한 분기의 시간이다. 놀랍게도 「철골-7」에는 이 시간적인 분기가 공간적인 분기로 표현되고 있다. 비계를 타고 오르내리며 공사를 하는 작업자들의 배경은 시멘트 벽과 파란 하늘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다.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연결망이 시멘트 건축물을 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파란 하늘을 동시에 '짓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그림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천근의 무게로 짓눌리는 건설현장의 고된 노동과정 속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제스처 속에서 이런 희망의 단서를 찾아 그려내는 것이 바로 박은태의 이번 회화적-노동이 이루어낸 참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늦은 나이에 미술대학에 들어가 화가로 살아온 그가 나름의 방법으로 오랫동안 암중모색해온 「노동과 예술의 수평적 협력의 네트워크」가 이로써 어두운 소외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A로 나아갈지 B에 머물 것인지는 여전히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여기가 바로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자! (2020.10.13) ■ 심광현

 

* 참고문헌1. K. 마르크스, 『자본론 1권-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9 개역 11쇄2. 발터 벤야민, 『브레히트와 유물론』, 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203. 심광현, 「문명의 전환과 인간의 미래: 인간학과 정치학의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연결을 위한 밑그림」, 『문화과학 100호 특집: 인간의 미래』, 문화과학사, 2019

 

 

Vol.20201104d |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한국현대사-625 /194X113cm 캔버스에 유화 2019



신학철화백의 <한국현대사 625>전이 지난 12일 오후6시 효자로 인디프레스 서울에서 성황리에 개막되었다.

 



한국현대사-625 망령들/220X130,5cm 캔버스에 유화 2018



신학철화백과 강고은시인 내외를 비롯하여 백기완, 이수호, 주재환, 황효창, 이종승, 박재동, 김정헌, 오길석, 박불똥, 정복수,

성완경, 정희성, 장재순, 김정환, 장경호, 류연복, 강성원, 조준영, 최석태, 천호석, 박흥순, 김재홍, 김태서, 권행연, 장순향,

정영신, 조경연, 박세라, 이지하, 최 범, 정재안, 손병주, 김정대, 서인형, 최병수, 이광군, 손기환, 홍성미, 정세학, 김이하,

두시영, 최명철, 하태웅, 김 구, 정영철, 성기준, 이종률, 김윤기씨 등 역전의 용사들이 다 모였다.



한국현대사-625 /194X113cm 캔버스에 유화 2019



전시장 규모와 참석인원을 감안하여 기동성 있는 카메라를 준비했으나, 사람에 가려 앵글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장소에서 왔다 갔다하여 화천에서 온 화가 길종갑이인철, 미술평론가 이태호, 김명지시인 등 여러 명은 놓쳐 버렸다.

어쩌면 지명 수배자에서 빠져 다행인지도 모른다.

 


한국현대사-625 통곡/220X130,5cm 캔버스에 유화 2018



그런데, 신학철선생의 저력, 아니 깡다구가 놀랍더라.

집안 우환으로 가슴에 피멍이 던 상태에서 언제 그 많은 그림들을 그렸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 치유의 방법으로 그림에 몰입하지 않았나 싶다.

한국현대사-6,25’시리즈 5, 사진 오브제 9, 유화작품 7점이 전시되었는데, 이렇게 신작으로만 전시를 연 것도 처음 보았다


 

   



신학철선생의 얼굴에는 항상 슬픈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선생의 미소조차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다.

세상 아픔을 혼자 끌어안고 사시는데, 이제 그 악업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먼저 사랑하는 아내의 초상화부터 한 장 그리면 어떨까?.

이번에 선보인 뜨겁게 키스하는 유채색 그림 여명처럼, 꿈을 꾸어도 희망을 꾸었으면 좋겠다.



여명 / 90,5X116.5cm 캔버스에 유화 2018




다행스러운 것은 앞으로 악몽으로 이루어진 흑백의 역사화보다 원색조의 소원에 해당하는 그림에 주력할 것이라 했다.

이발소 그림 형식도 적극 끌어들이겠다는 거다.



갑돌이와 갑순이 / 91X53cm 캔버스에 유화 2019



신학철선생의 작품세계를 모르는 분이 없겠지만, 혹시 간첩이라도 있을까봐 몇 마디 보태겠다.

검찰에 압수되어 부스러져 유적이 되어버린 그 유명한 '모내기' 그림의 주인공으로,

여덟 살에 고향 김천시 감문면에서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한 작가다.

그림에 나와 있는 처형당한 아버지의 시신에 울고 있는 소녀가 바로 선생의 동네 친구였다고 한다.

그동안 보여 주었던 갑돌이와 갑순이시리즈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 온 선생과 같은 촌사람 이야기다.


 

한국현대사-625  이태골의 총살형/ 130X162cm 캔버스에 유화 2019


 


통속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여명이나 소원 높이 치솟다같은 작품은 이발소 그림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선생께서는 서민의 역사는 의식적인 역사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역사로 본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역사는, 머리도 없고 눈도 없고 귀도 없이 그저 하나의 본능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는데, 그 욕망의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DNA 90,5X116,5cm 캔버스에 유화  2018



이영준씨는 도록에 이렇게 적었다.

신학철의 한국 근현대사 시리즈는 역사라는 무거운 소재를 정면으로 응시한 역작이자,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미술평론가 심광현은 신학철이 30여 년 전부터 계속해서 한국 근현대사 연작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의 작업 여정을 파생적 트라우마들과 뒤석여 오히려 증식되어 온 한국 근현대사 고유의 어떤 역사적 트라우마의 증상들과의 대결과정이라 말한바 있다. 뿐만 아니라 미술평론가 홍지석은 두려운 낯설음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독특한 리얼리즘이라 칭하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팝의 가볍고 세속적인 정서와 비판적 리얼리스트의 합리적인 성찰, 샤먼의 신성한 제의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콜라주,

혹은 몽타주되어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날 개막식 뒤풀이가 두 곳으로 나누어졌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손에 익지 않은 카메라까지 말썽 부려 사진도 찍지 못한채, 먹어서는 안 될 술만 축내고 있었는데, 입구 탁자에 초대장이 놓여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집어 들었는데, 박불똥씨가 달려 와 아니라며 뺏어가는 것이다. 알고 보니 발불똥씨의 장남 불휘군의 청첩장이었다.

아들을 아는 분만 모신다는데, 개털신세를 염려해 하는 말이지 요즘처럼 끼리끼리 사는 가족사에 자식들 얼굴 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결혼식은 오는 518() 오후420, 송파구 양재대로 932 ‘가락몰타워에 있는 서울웨딩타워 2이니

박불똥씨를 잘 아는 지인들께서는 축하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김정헌씨는 바다는 가라 앉지 않는다는 안전사회를 위한 세월호 참사5주기 추념전 리프렛을 나누어 주었다.

고등어, 김서린, 김성희, 김정헌김지영, 김흥구, 이승배, 노원희 노순택, 박야일, 성남훈씨 등 40여명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인디프레스 서울’(070-7686-1125)바다는 가라 앉지 않는다가 열리는 통의동 보안여관은 가까운 곳이니

함께 관람하는 것도 좋겠다.


바다는 가라앉지 않는다421일 까지고, 신학철선생의 한국현대사 625’66일 까지 열린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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