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근의 삶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2020_1104 ▶ 2020_1125

 

박은태_철골-H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162cm(125×162cm×2)_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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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Tel. 070.7686.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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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적-노동 속 숨은 그림 찾기: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변증법적 반전을 위하여1.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사람들 사이의 교류는 물론 세계경제 전반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그동안 기존의 관습과 저항에 부딪쳐 완만하게 진행되던 비대면-경제, 비대면-교육, 비대면-의료, 비대면-문화활동 등이 급부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이 산업과 생활 전반에 전면적으로 결합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코로나19 팬데믹의 파도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이럴 경우 이미 3차 산업혁명(정보혁명)에 의해 난도질 당해온 '노동의 사회적 위상'도 함께 약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자동화 기술이 제조업(스마트팩토리)과 서비스업(스마트서비스)은 물론 농업(스마트팜)과 일상생활(스마트홈)로 확산될 경우 '인간 노동'의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당장 자영업과 관광/여행 등 서비스업에 큰 타격을 가했다면,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은 20여 년 전 제레미 리프킨이 예상했던 '노동의 종말'을 현실화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2010년대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이런 추세에 따라 '노동' 관련 담론은 물론 이를 주제로 한 연구도 급격히 줄어온 게 현실이다. ●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자동기술화의 증가=노동시간 감소」라는 등식이 공장 내에 적용된다고 해서 사회의 전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초국적으로 연결된 불균등 발전의 가치 사슬로 얽혀 있는 첨단기술과 낙후된 기술의 병존을 통해 독점이윤을 수취해온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가 기술발전을 사회 전체의 노동일 감소로 이어지게 할 통로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장 내에서도 이 등식은 개별 노동자의 노동력 지출을 오히려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생산성의 발전에 의한 노동의 절약은 결코 노동일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1개의 상품에 이전의 10분의 1의 노동시간을 지출하게 된다는 사실은, 결코 그로 하여금 종전과 같이 하루에 12 시간 노동하고 또 그 12 시간 동안 120개가 아니라, 1200개를 생산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노동일은 단축되기는커녕 연장되기조차 하여 14시간 동안 1400개를 만들도록 강요되는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테두리 내에서는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해야 할 부분[필자: 필요노동]을 단축하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일 중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수 있는 나머지 부분[필자: 잉여노동]을 연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 409~410쪽). 맑스가 150년 전에 분석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런 역설적인 특징은 오늘날 스마트 배달경제의 현장에서 과로로 사망하는 배달노동자의 참혹한 현실에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기술 발전과 노동시간의 관계(및 그에 따른 노동의 종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 발전과 생산관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박은태_철골-비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176cm(125×176cm×2)_2020

 

코로나19 펜데믹/비대면 경제/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같은 오늘의 거시적이고 현기증 나는 시대 변화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이라는 오래된 주제에 함축된 이런 역설적인 의미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화가 박은태의 이번 개인전의 주제가 바로 '건설현장의 노동'이기도 하지만, 이 문제가 인수공통감염병의 펜데믹 시대이자 본격적인 인공지능자본주의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2020년대에 대다수 노동자/민중의 삶 전체를 압박하는 공통의 화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에 의한 단위 시간당 노동생산성 증가의 성과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는 오직 소수 자본가에게만 귀속될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에 대한 기술적 지배력의 증대로 인해 노동자/민중 전체는 노동일의 조정은 물론, 노동의 양과 강도, 노동의 질 등 다양한 측면에서 통제력을 상실하고 더욱 불안정하고 예속적이고 취약한 상태로 전락할 위험이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노동의 종말」이라기보다는 「노동의 만성적 위험의 심화」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공지능/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이런 위험의 증대는 지난 40여 년 동안 전개된 3차 산업혁명/신자유주의 시대가 초래했던 노동의 수직적 분할/위계화, 자산/소득의 양극화가 가져왔던 참혹했던 결과에 비추어 보면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와 이전과는 달리 묵시록적인 재난영화/좀비영화의 생산과 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온 것이나 각종의 힐링 담론이 만연했던 것도 이런 현실적 추세가 촉발하는 소외감/불안감/공포심 대한 일종의 집단신경증적 반응(을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그러나 현실 문제에 대한 신경증적인 증상을 통한 심리적 반응/위로와 현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처방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자에 머물 경우 현실이 악화되면 신경증적 반응 역시 강화되고 자아는 더 무력해지는(정말 좀비처럼 되어 생산관계 변화의 행위자-주체가 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기술과 노동을 대체 관계로 보는 기술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노동의 위기를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내적 모순과 생산관계 내에서 노동자/민중의 위치를 직시하면서, 그와 동시에 대안적 생산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노동자/민중 자신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잠재력을 회복할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건설현장의 노동과정을 촬영하고 몇 개의 장면들을 선택하고 변형하면서 다양한 기계 장치들과 노동력의 결합 과정을 대형 화면으로 구성하고 있는 박은태 화가의 이번 전시가 노동자의 소외나 분노/투쟁을 주제로 삼았던 1980~1990년대 노동미술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종류의 의미(와 긴장감 있는 재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다.

 

박은태_철골-상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1×158cm_2020

 

2. 박은태 화가의 이번 작품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기울인 세밀한 수작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극사실주의 회화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진과 같은 정확하고 세련된 기술적 재현이 아니라 시간을 요하는 건설 현장의 복잡한 공정을 최대한 상세히 따라가면서 철골을 구부리고 용접해서 철골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과정, 여러 층의 비계를 설치하는 과정, 전선을 연결하는 과정, 목재와 시설들을 쌓아두고 여기저기 옮기는 과정, 레미콘에서 시멘트를 붓는 과정 등을 일일이 붓으로 수를 놓듯 화폭에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도구와 설비를 연결하는 건설 노동자들의 다양한 작업 동작과 안전모와 햇볕 가리개 수건과 땀에 절은 작업복의 주름 등도 특정한 단면의 사진적 재현이 아니라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직접 대면해서 꼼꼼히 실사하듯이 공들여 그려내고 있다. ● 이는 멀리서 풍경을 조감하는 원근법적인 관찰보다는 현장에서 작업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노동과정의 호흡을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인류학자의 참여관찰 기록과도 같아 보인다. 사진으로만 보면 삭막해 보이는 현장에서의 지루하고 기계적인 작업을 긴 호흡으로 생생하게 따라갈 수 있는 이런 참여관찰의 자세는 아마도 젊은 시절 7년 동안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화가 자신의 직접 경험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손과 도구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대상을 변형시키는 노동과정의 복잡한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한 인지생태학적 경험, 즉 사진으로 찍거나 말로 전달하는 형식적 지식과는 다른 특수한 감각과 근육과 주의가 결합된 복합적인 암묵적 지식과 기술적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 만일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특정한 형태의 기술적 활동에 내재한 힘든 노고와 맞물린 암묵적인 즐거움이 없다면 땡볕을 반사하는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서, 또는 바람 부는 허공에서 비계를 딛고 서서 장시간 주의를 집중하는 작업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토목 공사를 통해 텅 빈 땅에 기초 골조를 세우고 한층 한층 쌓아 올려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어 나가는 긴 건설 공사의 과정을 자본의 관점에서 보자면 투자한 자본을 회수하기 위해 생산수단과 노동력 상품을 구매해서 결합하는 회계적 과정에 대한 산술적인 계산이나 재산 증식의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유사한 보람찬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비록 그 시작과 끝이 제한된 기간에 한정된 것이고, 그 생산물이 자신의 소유나 점유와는 무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박은태_철골-여보세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205cm_2019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은태의 이번 그림은 그 자체가 건설 현장의 노동과정을 '대상화'해서 '재현(representation)'하기보다는 복잡한 노동과정 자체를 '재상연(re-presentation)'하는 일종의 '유사-기술적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물 크기에 근접하는 규모로 캔버스를 제작해서 붓으로 전선을 연결하고, 철골을 나르고, 목재를 재단하는 일종의 「회화적-노동」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흰 바탕의 캔버스에서 일련의 질서(색조와 형상의 배치가 만드는 일련의 리듬)를 조성해 나가면서 화가가 암묵적으로 느끼게 되는 수작업의 즐거움이 보는 이에게는 대형화면에 배치된 추상적인 패턴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형상이 만드는 '정중동'의 리드미컬한 '제스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전달된다. 이런 느낌은 정확히 현장을 재현하는 작은 크기의 흑백 사진에서는 포착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업들은 현장 사진을 일종의 '트리트먼트'로 삼아 무대를 만들어 직접 공연을 올리는 연출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 '회화적-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연극에서처럼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니라 각각의 현장 상황 속에서 각각의 노동자들이 취하고 있는 다양한 동작의 전과 후를 응축해낸 특별한 운동 중의 포즈들이다. 작품 「철골-3」에서 시멘트 벽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있는 노동자의 왼쪽 몸과 다리는 다소 앞으로 기울어 드릴에 힘을 가하고 있고 등과 오른 다리가 기울기를 조절해 주고 있어 작업자의 숙련된 운동감을 그려내고 있다. 「몬드리안 비계」에서는 머리 위의 비계에 합판을 올리는 노동자의 자세에서 무거운 물건을 가벼운 손짓을 지렛대로 삼아 들어 올리는 힘의 효과적인 조절 동작을 읽어낼 수 있다. 「철골-4」에서는 목재를 재단하는 노동자의 앉은 자세들에서, 「철골-5」에서는 여러 갈래의 전선을 연결하는 자세들에서 재료와 도구와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숙련된 장인의 포즈가 느껴진다. 이런 자세들이 바로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대상과 도구를 결합하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체득했던 일련의 기술적 활동 속에서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연결되는 일련의 '제스처'들이다. 벤야민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제스처가 갖는 의미에 대해 기술했듯이 제스처들은 여러 요소들이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에피소드, 그로부터 행위의 사회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는 일련의 내용을 갖고 있다. ● "제스처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벌이는 일들과 달리 확고한 시작과 확고한 끝이 있다. 하나의 태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생동적인 흐름 속에 있는데, 이 태도의 각 요소가 이처럼 엄격하게 틀을 갖고 완결되어 있다는 점은 제스처의 변증법적인 기본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다...중단하면서 [줄거리를] 지체하는 성격과 틀로 감싸 일화를 만들어내는 성격이 바로 제스처적인 연극을 서사극으로 만든다." (벤야민: 119쪽)

 

박은태_철골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50×388cm(120×194cm×4)_2019

 

만일 이런 제스처들이 온전히 그려지지 않았다면 이 그림들은 건설 현장의 철골 구조나 비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일련의 추상적 패턴을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그려낸 장식적인 그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몬드리안 비계」는 바로 이런 추상적 패턴들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다양한 제스처들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적으로 구조화된 사회적인 추상노동과 개별적인 구체노동 간의 변증법적 긴장을 '상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세기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현장의 구체노동을 생략하고 추상노동(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개별적인 구체노동을 기계화하는 강제력)의 결과인 멋진 구조물만을 그려냄으로써 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획일적 지배를 시각적으로 일반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20세기에 시작된 추상화의 패턴과 추상노동의 이런 짝패구조는 오늘날 화려한 초고층 건물들과 신도시의 외관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 인지생태학적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적인 구체노동이 생산하는 「사용가치」는 단지 자본주의적으로 편성된 사회적인 추상노동의 양, 즉 사회적으로 지출되는 평균 노동시간의 양인 「가치」로 환원되고, 가치는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임금) 혹은 이를 제외한 잉여가치의 크기에 의해서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에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의 의미는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거의 망각되기에(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주목하면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개별적인 구체노동의 의미는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창조성의 원천이다(이것 없이는 새로운 상품을 판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풍부한 잠재력을 결합해서 합목적적으로 변형시키는 노동과정 속에서 발휘되는 이 창조성의 원천은 「생산수단과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라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모두 규명하고 비판할 수 없는 특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맑스가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지적한 것도 이 점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인간노동[또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모든 노동은 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마르크스: 58쪽) ●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는 잉여노동의 비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압력이 추상노동의 형태로 강화되면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의 합목적적인 성격이 지속적으로 희석화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데 있다. 점증하는 자동기술화는 구체노동의 의미를 더욱 폄하하게 만들고 일부 노동자들에게서는 노동의 의미는 사용가치의 생산보다는 단지 임금의 크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 일면화되기에 이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원자력 발전소의 노동자들이 일자리 상실을 우려해 기후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데 앞장서는 아이러니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인간의 구체노동이 이제 그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며,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연물의 취득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떠한 형태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마르크스: 233쪽) ● 문제는 그 사용가치의 특성이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촉진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균열을 내는가에 있는 것이지 사용가치 생산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맑스가 정확히 규명했듯이, 노동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필자: 에너지와 물질의 동화작용과 이화작용)를 합목적적으로 매개하는 존재론적인 조건이며, 이 조건 속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될 수 없게 얽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 자체도 자연력에 속한다. ●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과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적 소재를 자기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의 신체에 속하는 자연력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천성)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기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 (마르크스: 225~226쪽)

 

박은태_철골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60cm(194×130cm×2)_2019

 

인간이 자신의 자연에 내재한 잠재력(육체적〮정신적 역량)을 개발해 외부의 자연을 변형함으로써 자신의 자연도 함께 변화시키는 활동적 과정, 즉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이라는 자연의 두 부분들 간의 결합에 의한 「자연의 자기-생산(오토포이에시스) 과정」이 곧 구체적인 노동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노동이란 불완전하지만 「능산적 자연」의 속성을 지닌 「인간의 자연」과 나머지 「비인간의 자연」이 함께 결합해 각자의 「소산적 자연」을 변화시키는, 자연 자신의 자기 조직화(자기 생산) 과정의 일부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인 노동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의 발현이자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의 존재론적 조건이기에 제아무리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해도 표기할 수 없는 것이다(퇴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무력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자연의 자기 생산을 통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발전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 문제는 이와 같은 노동의 능동적이고 자기-조직적인 의미가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 하에서는 자동기술화의 추세에 떠밀려 지속적으로 폄하되고 사회적 인식의 무대 뒤편으로 떠밀려 왔다는 데 있다. 그와 더불어 인간노동력과 함께 부의 생산의 원천인 자연력의 의미 역시 언제든 파괴하고 탕진해 버려도 되는 무상의 원료로 폄하되어 왔다. 그 결과 이제 인류는 과학자들이 「인류세/자본세의 위기」라고 부르는 전지구적인 지질학적 균열의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노동을 매개로 한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과정이 오직 자본축적만을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심각하게 일그러지면서 비인간의 자연과 인간의 자연의 풍부한 자기 조직화의 역량이 훼손되어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은 물론 코로나19팬데믹과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의 확산, 신경증적 불안과 우울증, 혐오 감정과 공포감의 확산 같은 인지생태학적 위기가 대규모로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게 전면화되자 일각에서는 트랜스휴먼/포스트휴먼 담론들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문제를 야기한 원인이 인간/자연의 불완전성과 인간중심주의에 있으므로 GNR 기술과 탈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이런 담론들은 불완전한 인간노동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해 생산성을 높이자는 4차 산업혁명의 정책/담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담론/정책들은 정작 문제의 근본 원인이 인간노동력과 자연력을 무차별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해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음을, 오직 잉여가치 증식을 목적으로 삼는 추상노동의 메커니즘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노동을 지배해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애써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발병의 근본 원인을 방치한 채 다양한 마취제나 환각제를 사용할 경우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할 뿐 병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따라서 정말 인류와 지구생태계가 종말에 이르기 전에 발병의 근본원인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공진화를 가능하게 할 대안적인 생산관계를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인간노동력이 만들어낸 노동도구와 자연력을 결합하는 노동과정과 생산과정 전체를,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관계 자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박은태_철골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8×142cm_2018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관계는 대안적인 생산관계 속에는 추상노동의 일방적인 지배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양자 간의 선순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다. ●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써 일하며 또 자기들의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결합체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로빈슨 크루소의 모든 생산물은 다만 그의 개인적 생산물이었고 그 자신을 위한 사용대상이었다. 자유인들의 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다시 생산수단으로 역할하며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분은 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분배 방식은 사회적 생산조직 자체의 성격 여하에 따라, 또 생산자들의 역사적 발전 수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배분은 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의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또한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서 기능하며, 따라서 공동생산물 중에서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몫의 척도로 된다....사회적 생활과정 즉 물질적 생산과정은, 그것이 자유롭게 결합된 인간들에 의한 생산으로 되고 그들의 의식적 계획적 통제 밑에 놓여지게 될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어버린다." (마르크스: 99~100쪽).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사회적인 공동소유로 생산관계를 전환시키는 일은 신비로운 기적이나 위대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합목적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결합체의 형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럴 경우 개별적인 구체노동들의 결합물인 사회적 추상노동 역시 그 신비의 베일(M-C-M'라는 자본의 자기 증식적 과정의 추상적인 베일)을 벗어버리고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에 놓임으로써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의 선순환의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자본가의 지휘 아래에 결합된 추상노동이 '천근'의 무게로 짓눌러 폄하되고 저평가되고 소외되어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추상노동과 구체노동의 선순환의 길을 여는 관건, 또는 지렛대는 사용가치를 생산해온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역량과 경험의 네트워크의 형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거대한 구조적 압력과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에 응축되어 있는 다양한 제스처들 사이에서 변증법적 긴장관계(와 역전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은태_철골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9×152cm_2018

 

3. 박은태의 이번 작품들 중에서 이런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예시를 '하이 앵글'로 그린 「철골-5」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건축물의 평면은 거시적으로는 도시 전체의 풍경을, 미시적으로는 컴퓨터의 배전판, 반도체의 회로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오늘의 대도시는 거시적-중간적-미시적 수준 모두에서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복잡한 회로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철골-5」의 이미지는 오늘의 초연결 사회의 도시적 삶의 풍경화로서 제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 그런데 이 그림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지점은 노란색/붉은색/파란색/흰색의 화려한 색조의 전선들과 사각형의 시멘트 블록과 크고 작은 배관들이 연결된 네트워크의 추상적인 패턴이 만들어내는 현대적인 미감만이 아니라, 전선들을 연결하고 있는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동작이다. 현재 '스마트팩토리', '스마트팜', '스마트시티', '초연결사회'에 관한 모든 담론과 정책들은 마치 센서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와 크고 작은 로봇 등의 기술적 수단들에 의해 자동으로 복잡한 네트워크 형성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기술적 네트워크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철골-5」가 잘 환기시키고 있듯이 이 복잡한 회로들의 링크가 실제로 연결되어 작동하게 되려면 반드시 개별 노동자의 구체노동이라는 결절점(노드)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노드의 관점에서 보자면 따라서 전체 링크들의 숫자와 복잡함보다는 각 노드의 성격과 방향, 노드와 노드가 결합하는 방식이 더 중요해진다. ● 노드를 이루는 개별 노동자들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자신의 구체노동의 실존적이고 생태학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것들이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노동력으로 새롭게 연결되도록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체를 구성하게 된다면, 컴퓨터 배전판의 작동 방식은 물론, 건축물 내부에서 사물들의 연결 회로와 사람들의 동선, 건물과 도로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연결하는 방식을 의식적/계획적으로 바꿀 수 있다. 모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증식을 위해 노동력 착취와 온난화와 환경오염과 자연파괴를 서슴지 않는 「자본의 수직적 네트워크」가 아니라 공동소유에 기반해 개인적 소유를 재건하면서 「인간의 자연과 비인간의 자연의 공진화」를 촉진할 「노동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방향이 그것이다. ●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철골-5」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예시했던 「오리-토끼 그림」을 볼 때와 비슷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멀리서 얼핏 보면 이 그림 역시 추상적인 격자를 촘촘하게 중첩시킨 모더니즘적인 추상화와도 같아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추상적 패턴 속에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동작에 초점을 맞추면,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노드들의 새로운 연결망이 마치 캄캄한 밤하늘에 고립된 것으로 보이던 별들이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여러 가지 성좌를 이루게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기계들과 사물들만의 연결망이 아닌 노동하는 사람들의 연결망,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새로운 사회 구성체의 성좌가 그것이다.

 

박은태_철골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1×216cm_2018

 

물론 직선의 격자들과 곡선의 추상적 패턴(오리 그림)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전망(토끼 그림)을 끌어내는 이런 시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기는 쉽지 않다. 노드들이 고립되면 「철골-6」에서처럼 미로와 같은 격자 속에서 표류하기 쉽고, 때로는 「철골-구덩이」에서처럼 블랙홀 같은 거대한 구멍 앞에서 망연자실해질 수도 있다. 때로는 「하늘-배선」에서처럼 몸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일시적으로 갇힐 수도 있다(자본주의적인 추상노동의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소외된 노동자들 모습). 하지만 사람은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고립되거나 분리된 상태로 정지해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가 실은 가장 복잡하고 역동적인 다중지능 네트워크적인 존재라는 오늘의 뇌신경과학과 복잡계 생물학의 발견은 이런 고립감이 일반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쉽게 확인해준다. ● 뇌신경과학에 의하면 인간 뇌의 신체지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손과 입술을 관장하는 영역이다. 이는 직립에 따라 손과 입술 사용의 자유도가 크게 증가한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손-도구의 결합」에 의한 생산 역량의 발전과 「입술-언어의 결합」에 의한 커뮤니케이션 역량의 발전은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이룩한 문명 발전의 두 바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이라는 것도 실은 손-도구의 결합과 입술-언어의 결합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개별적인 구체노동과 사회적인 추상노동의 역동적 결합의 누적적 산물이며, 인공지능과 네트워크의 기술의 발전 역시 그러하다. 만일 발생과 과정을 도외시하고 그 최종 결과물에만 주목해서 인간노동과 인간들 간의 의사소통의 역량을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네트워킹 기술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생산관계를 몰고 나아가는 것은 결국 인간 뇌에 장착된 진화적 역량인 손-도구 사용과 입술-언어 사용의 역량을 폐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인류세/자본세의 위기를 초래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이제는 인간에게 고유한 실존적 역량 자체의 존폐를 좌우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셈이다. ●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각자의 몸과 뇌에 잠재된 「다중지능 네트워크」의 풍부하고도 강력한 힘을 깨닫고 활성화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해나간다면 이제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전의 가능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근의 무게"로 짓눌리면서도 유용한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있는 모든 노동하는 개인들이 '자기 자신의 실존적 역량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데에서부터 열릴 수 있다. 이번 박은태의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이 주목하고 있는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작업 동작과 제스처는 바로 오랫동안 폄하되고 망각되어온 이 잠재된 역량을 새롭게 일깨우며, '정중동'의 흐름 속에서 「자본주의적 추상노동→소외된 구체노동」으로의 일방향의 흐름이 중단되면서 「능동적 구체노동→대안적인 추상노동」으로 나아가는 역전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정중동의 제스처」에 함축된 이러한 두 갈래의 상이한 회로에 대한 인식 가능성은 숨은 그림 찾기가 주는 즐거움보다 더 놀랍고도 유쾌한 즐거움을 준다.

 

박은태_철골-구덩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2×218cm_2018

 

(A)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 벌써 승리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또 인간은 온전히 인식되지도, 최종적으로도 인식되지도 않는 존재이며. 쉽게 고갈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많은 가능성을 자체 내에 품고 그것을 숨기고 있는 존재(이로부터 인간의 발전능력이 유래한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유쾌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환경에 의해 변화되고 또 스스로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것, 즉 환경을 다뤄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유쾌함의 감정을 자아냅니다." (벤야민: 135쪽) ● 물론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는 개별 노동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링크의 연결 방향을 바꾸어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해갈 수 있다는 얘기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일종의 '그림의 떡'을 제시하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다. ● (B) "하지만 오늘날 특정한 상황 때문에 일어나고 있듯이 인간을 어딘지 기계적인 존재, 남김없이 투입되는 존재,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간주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벤야민: 135쪽)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었던 지난 시기에는 구체노동에 대한 추상노동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관철되었기에 (B)의 관점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었다면, 미국 헤게모니의 해체 과정에서 세계체계 전체가 요동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추상노동의 체계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A)의 관점에서 구체노동의 능동성이 새롭게 발휘될 수 있다. 카오스 이론이 설명하듯이 체계의 요동이 급격해지면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성의 시간」이 모순의 과잉결정 속에서 미끄러지는 「재생산의 시간」(지배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투쟁의 시간)이라면, 「사건의 시간」은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의 이중운동 속에서 나타나는 「변동의 시간」(전자에 맞서 피지배계급이 능동적으로 전개하는 계급투쟁의 시간)이다. 세계체계의 상대적 안정기에는 전자가 지배적이지만 세계체계의 내적 모순이 응축되어 폭발하는 이행기에는 후자가 활성화된다. 이런 구분은 뇌의 인지생태학적 리듬의 두 가지 유형, 즉 상대적으로 낮은 진폭과 긴 파장을 가진 안정적 리듬(감각적 즐거움과 미적인 만족)과 높은 진폭과 짧은 파장을 지닌 레비비행 같은 폭발성 리듬(고통을 경유한 숭고의 기쁨)의 구분과도 상응한다." (심광현: 85쪽) ● 코로나19 팬데믹의 파도를 타고 인공지능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현재 순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시간과 대안적 생산관계를 향한 변동의 시간이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다. 이것이 문명사적 이행기의 소용돌이에 내재한 분기의 시간이다. 놀랍게도 「철골-7」에는 이 시간적인 분기가 공간적인 분기로 표현되고 있다. 비계를 타고 오르내리며 공사를 하는 작업자들의 배경은 시멘트 벽과 파란 하늘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다.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연결망이 시멘트 건축물을 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파란 하늘을 동시에 '짓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그림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천근의 무게로 짓눌리는 건설현장의 고된 노동과정 속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구체노동의 제스처 속에서 이런 희망의 단서를 찾아 그려내는 것이 바로 박은태의 이번 회화적-노동이 이루어낸 참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늦은 나이에 미술대학에 들어가 화가로 살아온 그가 나름의 방법으로 오랫동안 암중모색해온 「노동과 예술의 수평적 협력의 네트워크」가 이로써 어두운 소외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A로 나아갈지 B에 머물 것인지는 여전히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여기가 바로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보자! (2020.10.13) ■ 심광현

 

* 참고문헌1. K. 마르크스, 『자본론 1권-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9 개역 11쇄2. 발터 벤야민, 『브레히트와 유물론』, 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203. 심광현, 「문명의 전환과 인간의 미래: 인간학과 정치학의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연결을 위한 밑그림」, 『문화과학 100호 특집: 인간의 미래』, 문화과학사, 2019

 

 

Vol.20201104d |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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