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신문 이름이 예술문화신문으로 바뀌고, 격 주간에서 주간으로 바뀐다.

그리고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는 윤범모 미술평론가가 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소식이다.



 


지난 19,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시상식에서 이은영 발행인께서 전격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시상식이 끝난 후, 프레스센터 지하에서 열린 뒤풀이에는 이은영씨를 비롯하여 문화대상 선정위원이신 안숙선, 이애주선생,

수상자 김병기화백, 유수정 명창, 문병남, 최광일씨, 그리고 윤범모교수, 화가 손연칠씨 등 여러 명이 함께했다.


  

  



그 날은 특별대상을 수상한 김병기 화백 옆에서 소곡주를 마실 수 있는 횡재도 했다.

처음엔 상 준다고 투덜댔지만, 상이 아니었다면 어디 감히 이런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는가?

102세이신 우리나라 최고령의 현역작가 김병기선생 말씀 들으며, 선생의 따뜻한 손을 잡아 기까지 충전시켰다.

2-3분 정도 잡았는데도, 2-3년은 더 버틸 것 같은 감이 들었다.

그동안 윤범모교수의 인터뷰 기사로 한겨레신문에 일 년 동안 연재한 한 세기를 그리다를 통해

100년간의 한국 문화사를 증언한 김 화백께서 특별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맞은 편에는 평소 좋아하는 안숙선명창께서 앉았는데, 예년에 비해 매우 수척해 보였다.

어디 몸이 불편한지 걱정스러웠으나, 얼쑤~라고 추임세 넣는걸 보니 아직 기가 펄펄 살아있었다.



 


춤꾼 이애주선생은 87년도 민주항쟁 때부터 여러 차례 사진도 찍었고 각종 행사장에서도 자주 만났으나,

그날은 모처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콧수염 김영수씨와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사진 찍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사진집 제작에 사진모델이 된 이애주선생께서 삼천만원을 냈다는 뜻밖의 이야기도 들었다.

새삼 김영수씨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살아생전 성질머리도 지랄 같았지만, 마무리까지 잘 못한 것이다.

평생 작업을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안겨 사장되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이은영씨를 비롯하여 윤범모교수 등 몇 분이 이차를 가자지만, 지레 겁먹고 삼십육계 줄행랑쳤다.

끝장을 보는 두 분의 주량에 두 손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에 대한 의견들을 많이 나누어, 한국예술문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정론지로 거듭나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우리나라 유일의 문화예술전문지 ‘서울문화투데이’가 창간 된지도 벌써 7주년을 맞았다.
창간 7주년을 기념하는 일곱 번째 문화대상 시상식이 지난 15일 오후3시 서울시민청에서 열렸다.

시상식장인 바스락 홀은 올해 수상자 선정을 담당한, 이종상화백, 춤꾼 이애주씨, ‘서울문화투데이’ 발행인

이은영씨를 비롯해 수상자인 김남조, 정명숙, 정우범, 김후란, 장수동, 김혁수, 장준철, 이유라, 류영수씨와

재능기부에 나서 준 김용우, 유승현, 정옥희, 김은미, 석승권씨와 황병기씨 등 각계 알만한 문화예술인들로 가득메웠다.

그 자리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창간7주년을 축하하는 영상메시지를 띄우기도 했고, 축사와 인사말,

축시 낭송과 오페라 공연 등으로 시상식무대를 화려하게 펼쳐 나갔다.

‘서울문화투데이’를 발행해 온 이은영씨는 신문하나 끌고 가는 것만도 어려울 텐데,

문화예술인들을 격려하며 힘을 실어주는 이런 자리를 오랫동안 만들어 왔다. 

 얼마 전 술좌석에서 “직원들 월급 줄 때, 직원들이 부럽더라”는 그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재벌 신문사들도 손들 판국에, 돈 안 되는 문화예술에 한정된 신문사를 운영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사방팔방 쫓아다니며 문화예술인들 인터뷰하랴, 광고까지 구걸해야 하는 그의 바쁜 일상이 눈에 빤히 보인다.

그런 와중에 매년 역량 있는 예술가들을 발굴해 상을 준다는 것은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을 꽃 피우려는 사명감 하나로, 그 일에 미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만약 힘없는 남자가 그런 일 벌였다간 벌써 마누라한테 쫓겨났을 것이다.

사서 고생하는 이 일이, 과연 누굴 위해 종을 울리는 일일까?
이게 척박한 문화텃밭을 꽃 피우기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이 아니고 뭐겠는가?

어쩌면 국가와 국민은 물론, 우리나라 문화예술인 모두가 그에게 빚진 거나 마찬가지다.

구독층인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이 가난하다보니, 독자층도 얕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몇 년동안 신문을 받았으나 우편료 한 번 보태지 못하여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못 쓰는 글이나마 신문에 기고할 기회를 주어, 마음의 빚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 날 시상식장에 모인 많은 예술가들도 그런 마음으로 재능기부를 해주었고, 격려의 힘을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문화예술계의 마당발로 활약해 온 그는 돈은 잃었지만, 사람은 얻은 것 같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문화예술이 국가 이미지를 높이고 나라의 격을 높이는 바로미터다.’는 등

모두들 문화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들은 뻔지레하게 하지만,

대개의 정치인이나 국민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예술인복지재단과 각처의 문화재단 등 문화예술인을 위한 지원도 뒤늦게 이뤄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문화예술인들껜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그래도 여걸 이은영씨 같은 사람이 있기에, 자부심으로 묵묵히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빠듯한 살림살이지만, 문화예술인들이 신문이라도 한 부 씩 보아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문화투데이'가 문화예술계의 정론지로 우뚝 서는 날을 기대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 사진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장 모습이다.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⑨

 

1999년부터 12년에 걸쳐 전국을 돌며 ‘우리땅 터벌림’ 춤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한 우리춤꾼 이애주 교수(오른쪽)와

사진작가 김영수(왼쪽)씨가 2011년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에서 마지막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작가 곽명우 제공

 

 

 

■ ‘무당 아닌 무당’ 오윤이 맺어준 인연

 

‘입관하던 마지막 순간/ 그렇게 아름다운 장엄은 본 적이 없다./ 한 떨기 연꽃 송이로 피어났다./ 아주 신선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커다란 슬픔도 아름다운 고요로 돌려놓았다./ 아, 몸의 무상함이여/ 산 자와 죽은 자가 그냥 하나라는 것/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빛을 발하고 있는 만인의 용태 형.’

 

‘용태 형’과의 첫 인연은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시대인 1980년대 초반 그의 절친이자 판화가인 ‘윤이 형’(오윤·작고)이 나의 춤 작업실에 드나들 때였다. 나는 춤패 ‘신’과 함께 <도라지꽃>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제 만행인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를 주제로 한 조선여성수난사를 다룬 춤굿이었다. 성가실 정도로 드나들며 쫓아내면 낼수록 더 신명나게 판을 잡던 윤이 형. 신들린 눈빛, 귀신 형용으로 사물을 파고드는 무당 아닌 무당인 그가 입만 열면 나오는 이름이 ‘용태, 용태’였다. 그러다 마침내 용태 형을 만나게 되었는데 첫인상은 어수룩해 보일 정도로 정감있으면서 구수하지만 그 안에 보이는 깡심있는 눈빛은 척 봐도 윤이 형이랑 통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도라지꽃’ 작업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용태 형의 활약은 점점 빛이 났다. 잠실 석촌호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 그 원형 야외마당을 대형 걸개그림으로 장식한 것이다. 현발의 내로라하는 민중·민족화가들이 한 점씩 맡아 그려냈다. 낮부터 북춤, 탈춤, 강강술래 등 가족과 함께하는 춤, 대동춤으로 흥을 돋운 뒤 어스름 해질녘부터는 횃불을 밝히고 ‘도라지꽃’ 막을 열었다. 병풍처럼 원으로 둘러쳐진 걸개그림은 땅과 하늘과 맞닿아 횃불에 일렁거리며 살아 움직였고 중심으로 모아지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의 타오르는 기운은 일제의 만행을 싹 쓸어버릴 만했다. 우리 민족예술사에서 언제 그러한 장관이 펼쳐졌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다시 한번이라도 전개될 수 있을까. 바로 용태 형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다음 작업은 86년 6월 판화가 오윤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칼노래>였다. 용태 형이 “윤이 판화전 여는 날 뭘 좀 해야 되는데” 하여 즉각적으로 맘을 맞추고 준비했다. 그날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등 원조 사물놀이패와 호흡을 맞춰 상기된 마음으로 판을 열었다. 서로 처음 해보는 열림굿춤판이었다. 청수를 소반에 받쳐 들고 그림판을 돌아 예를 갖춘 뒤 기운 닿는 그림들과 집중적으로 교감하며 춤추었다. 신명이 내리면서 벽에 걸린 그림의 군상들이 걸어 나오기도 하고 내가 들어가기도 하며 하나가 되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르면서 관객 모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 흠뻑 땀으로 젖은 채 끝이 났다.

 

훗날 평론가 이태호 교수는 이런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한국미술사 마지막 강의 때 열림굿춤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양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고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좋은 선례이기 때문입니다. 오윤 선생님의 작품과 함께 말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 문화가 어떤 시대 양식으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나 자신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음속으로 이 교수에게 무척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업이 바로 87년 ‘바람맞이’의 토대를 깔아준 셈이다.

 

그런데 전시 끝나고 외국 공연 며칠 다녀오니 윤이 형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용태 형이 “윤이 그림 한 점 챙겨줄게” 하며 춤그림 하나를 내게 건넸다. 그림을 받아들고 이 상황이 무엇인지, 휑한 마음으로 그냥 서 있었다.

 

■ 춤작업실이기도 했던 그림마당 민

 

그즈음 나는 ‘그림마당 민’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림마당 민은 서울 인사동 수도약국 골목 맞은편 지하에 있었는데 나는 대충 그림 쪽 판에 일이 많았고 또 그때 모든 활동의 주무대가 그곳이기도 했다. 저녁때 그림전이 끝나면 그때부터 내 작업실인 양 춤작업에 들어갔다.

 

역시 용태 형이 주도해 85년 결성된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 창립일에는 <부적살풀이>로 의례를 올렸다. 이 작업도 민미협 화가들이 대형 부적을 함께 그리면서 춤의 윤곽이 잡혔다. 촛불을 밝히며 부적을 펼쳐 들고 등장해 땅에 중심을 잡아 놓고 부적을 풀어내는 살풀이 형식이었다. 그처럼 큰 부적도 처음이었지만 춤 구성도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살풀이로 부적을 풀어내면서 신명으로 치달았고 춤패들이 진달래 가지를 너울거리며 부적을 돌아 진달래꽃춤 군무로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도 가끔 그 부적살풀이가 생각나고 부적 그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다. 그냥 춤이 아니라 그날의 행사 전체를 의례춤굿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86년 8월15일에는 민미협이 그림마당 민에서 <통일전>을 열었는데, 나는 윤이 형의 <통일도> 앞에서 ‘통일무’를 추었다. 이 춤 또한 통일의식을 치르는 대동판으로 이끌었다. 그 중심에 항상 용태 형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 당시 작업은 거의 민미협과 연결되었고 대부분 처음 시도해보는 것들이어서 나로서도 창조의 본성에 불을 지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화가들도 그림 소재로 나의 춤을 즐겨 그렸다. 나도 특별한 경험을 하며 서로 상생작용이 일어났고 생각지도 못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그즈음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이하 민문협)도 결성됐다. 앞에 임진택 명창의 글에서 자세히 나왔지만 황석영, 김종철 등 각 분야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선후배 동지들이 모였고 물론 용태 형도 함께했다. 한번 모이면 진지한 토론이 오가며 현시점 점검과 앞으로 문화운동의 방향과 내용 등이 정리됐고 후반부로 가면서 술판이 섞여 새벽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민문협의 창립 행사 자체가 비합법 문화의례였다. 나는 정말 온몸으로 준비를 했고 그날 민중문화의 상징적 춤을 추었다.

 

오윤이 입만 열만 “용태, 용태”
85년 ‘도라지꽃’ 때 처음 작업한
일제 만행 쓸어버릴 걸개그림 무대
민족예술사에 그런 장관이 있었던가

 

오윤 판화전에선 열림굿춤판
그림과 교감하며 관객 무아지경
민미협 창립행사도 의례춤굿으로
이한열 장례식 때 바람맞이 춤은
처절한 부활의식이었다
형식미학·사상미학 깨는 ‘해방’ 맛봐

 

민예총 반대로 형과 10년간 데면데면
작년 김영수 사진전서 다시 뭉친
‘우리땅 터벌림’이 마지막 작업으로

 

■ 이한열 부활의식 ‘바람맞이’ 춤판

 

마침내 87년 6월, 나는 그즈음 연우무대 개관 공연으로 <바람맞이>를 올렸다. 민주화대행진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6월26일 학생들의 요청으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또 다른 바람맞이를 추었다. 각 단과대와 대학원별로 깃발을 펼쳐들고 휘날리며 모여든 광장의 열기는 대단했다. 춤판이 끝난 오후 2시 예정대로 전국민 민주화대행진이 전국 각 도시에서 거센 불길로 일어났다. 그렇게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하나가 되었다.

 

 

87년 8월 김용태 선생이 결성한 민중문화운동연합 주최로 열린

‘이애주 한판춤-바람맞이’의 공연 포스터. 사진 이애주 교수제공

 

 

민미협 식구들은 7월9일 이한열 장례식을 며칠 앞두고 밤을 새우며 그리고 또 그렸다. 나 역시 장례식 전날 각지에서 모여든 대학생 연합풍물패, 노동자 문화패 등 수백명을 이끌며 밤새워 장단을 맞췄고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오자 마지막 점검을 하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난생처음 수백만이 운집한 장례식장 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춤이라기보다는 처절한 부활 의식이었고 함께 일어나 나아가는 집단군무였다. 연세대 정문 앞으로 나오며 베 한 필을 가르면서 마지막 ‘한열’이가 쓰러진 곳에서 나도 쓰러졌다. 정신줄 놓고 한열이와 하나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푸근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중에 보니 허름한 옷을 걸친 신촌시장의 할머니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할머니가 어떻게 겹겹이 싸인 인파를 뚫고 그 현장에 계셨는지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하다. 그렇다. 모든 국민이 하나 된 자리였다. 민미협과 민문협이 하나 되고, 모든 민주화 단체들이 뭉쳐서 혁명 전야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도 용태 형의 활약은 비범했다. 나는 그 경험을 훗날 이렇게 정리한 적이 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나는 인간 본성으로의 춤, 자연과 사회의 춤, 그 시대 민중의 첨예한 쟁점으로의 춤, 정치와 예술의 연장으로의 춤, 그리고 순수와 비순수, 형식미학과 사상미학 등 그동안 관념적으로 맴돌며 해결 안 되던 부분을 몸으로 부딪히며 문리(文理)를 트는 해방의 경험을 맛보면서 새 단계로, 무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민예총 결성 반대와 용태형의 침묵

 

87년 대선은 우리에게 닥친 또 하나 큰 산이었다. 나는 느닷없이 민중후보 추대위원장을 맡게 됐고 그 뒤 명예본부장이 되었다. 용태 형은 민중후보 비서실장을 맡으며 우리 모두 11월, 12월을 찬 거리에서 서로 의지하며 부대끼면서 지냈다. 그 결과의 당락과 관계없이 민중후보를 통해 민중의 역량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88년이 되자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한동안 뜸했던 용태 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민문협이 ‘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으로 조직이 바뀌며 커지는데 발기인에 이름을 올린다고 했다. 나는 ‘그건 아닌데’ 하고 ‘큰일 났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조직운동, 문화운동의 큰 허점으로 개개인의 기본 역량, 특히 최소한 갖춰야 할 기량 등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던 터였다.

 

그 뒤로는 서로 만날 일도 없었고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금강산에서 남북 공동 문화행사를 할 때는 서로 다른 조직으로 가서 같은 행사를 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말을 텄지만 결코 조직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10여년을 데면데면 지냈다.

 

 

2014년 3월26일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김용태와 함께 가는 길’ 출판기념전시회 뒤풀이에서 함께한

‘용태 형’(오른쪽 셋째)과 이애주 교수(왼쪽 둘째).사진 장영신 제공

 

 ■ 김영수 사진집 ‘우리땅 터벌림’

 

나는 김영수 민족사진가협회 이사장과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12년에 걸쳐 우리 땅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우리땅 터벌림> 작업을 했다. 99년 백령도로 첫 여정을 떠날 때 몇 명이 동행했는데 김정헌·민정기 화백 등과 함께 용태 형도 있었다. 민예총 시절부터 용태 형과 김 작가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갈 때부터 배 안에서 벌였던 술판은 사진 찍는 시간만 빼고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이어지더니 돌아올 때는 마치 개선장군들처럼 의기탱천했다.

 

2011년 5월 김영수 선배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땅 터벌림>은 이듬해 5월 1주기 추모 사진집으로 나왔다. 용태 형, 민정기 화백, 정인숙 사진작가 등 몇몇 지인들과 고인의 묘소를 찾아가 책을 올렸는데,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용태 형과 나는 사진전을 열어야 한다고 의기투합했다. 고인이 생전에 이애주 춤을 통해서 민중문화운동 반세기를 정리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듯이 그냥 있기에는 사진 하나하나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었다. 사지가 꿈틀대고 펄렁대기도 한 그 몸짓을 순간 포착으로 잡아낸 또 다른 상징적인 정지의 미학이었다.

 

그 무렵 이미 투병중이던 용태 형은 지친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더니 2013년 3월 끝내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전시관에서 초청 전시를 하도록 성사시켰다. 애초 일주일 하기로 했는데 다시 일주일 연장 전시까지 했다. 전시 중간 토요일에는 유홍준 ‘춤과 미술’ 특강이 열리고 내가 ‘터벌림춤’ 시연을 했고 임진택 명창은 신경림 시인이 ‘우리땅 터벌림’을 위해 지은 시 ‘이 땅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를 창으로 불렀고, 사회는 김석만 교수가 보았다. 70년대부터 동고동락했던 선후배들이 다시 뭉친 것이다. 많은 관람객들이 왔고 그동안 못 보았던 옛 동료들이 한자리에 모이며 모두 8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고 감격했다. 거기에 자연요리 연구가인 임지호 선생의 뚝딱 자연상차림까지 곁들여져 수백명이 즐기며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모두가 용태 형이 자기 일처럼 나선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은 결국 김영수 선배의 뜻대로 문화운동사에 또 하나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또한 용태 형과도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1986년 작가 오윤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 때 전시된 판화 작품으로,

오윤 장례식 뒤 김용태 선생이 이애주 교수에게 전해준 유작.

사진 이애주 교수, 정영신 작가 제공

 

 

 ■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

그런데 용태 형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지난 5월 병상에서 의식이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는 남북 통일문화 행사를 꾸미고 있었다. 바로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고 거대한 민족예술의 역사를 일구고 있었다. 곁가지 하나 덧붙이자면, 늘 옆에서 분신같이 돌보던 ‘절친’ 태서 형에게 알 듯 모를 듯 한 말로 “정신 나갔어? 애주는 빼라고. 정헌이는 넣어도 돼” 하면서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이생 저생을 넘나들면서도 끝까지 나를 보호하려 애썼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가끔씩 고통으로 입술을 악물면서도 빙긋이 웃으며 함께 간 후배들과 내게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용태 형과 함께한 시간은 바로 문화운동의 역사, 민중민족문화의 역사였다. 현발, 민문협, 민미협, 그림마당 민, 백선본 등이 상부상조하는 중심에는 항상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용태 형이 있었다. 이판사판, 사통팔달, 종횡무진 내달으며 행동 실천으로 나서며 말이다. 우리 시대 문화의 역사를 온몸으로 써 나간 것이다.

 

‘용태 형, 잘 계시죠./ 팽목항 굽이돌아 한 서린 진도 바다를 거쳐/ 이섭대천세계로 대천세계로/ 고통과 절망을 껴안고/ 침몰되어가는 나라와 함께/ 남북 천지 통일세상 열면서 함께 나아가요./ 만인의 용태 형이여!’

 

[한겨레신문] 이애주 우리춤꾼·서울대 명예교수

 

 


견우직녀가 까마귀를 타고 만난다는 칠월칠석날을 맞아 세월호참사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씻김굿 ‘넋전 아리랑’이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다.

민속학자이며 일인극 배우인 심우성선생과 승무예능보유자인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 본 ‘넋전 아리랑’을 무대에 올린 '극단 서낭당' 대표이며 연극배우인 최일순씨가 함께 섰다.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전통의례 의식인 “넋전 아리랑’은  산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해원의 장이며, 무수히 희생된 무고한 영혼들께 헌정하는 진혼과 씻김의 장“이라는 연출자 최강지씨의 말이다.
“좌초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한스러운 세태에 분노합니다. 그 가여운 영혼들이 못 다한 노래를 칠월칠석날을 맞아 만남의 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넋전 아리랑’을 마련했지요”

불편한 몸으로 무대에 올라 제단에서 넋들을 진혼하는 심우성선생의 모습이나 온몸을 떨며 절규하는 연극배우 최일순씨의 연기, 그리고 살풀이춤을 넋전에 결합한 이애주씨의 농익은 몸짓에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마 이보다 더 처절한 몸짓은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월호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오늘의 상황에 맞물려서인지 그 몸짓들이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의 춤은 단순한 표현 양식이 아니라 몸에서 저절로 배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버들가지에 몰 오르듯, 흐르는 물이 맞부딪히듯, 몸의 내면으로 솟구치는 것”이라고 이애주씨가 말한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 심우성이 오는 2일 ‘넋전 아리랑’ 무대에 올릴 넋전 춤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극단 서낭당 제공


팔순 민속학자·1인극 배우 심우성
“넋 위안하고 넋전춤도 되살리려”
이애주는 넋전·살풀이 결합한 춤
새달 2~4일 서울 조계사 공연장


팔순의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 심우성은 ‘애기들’의 죽음 때문에 가슴이 아려온다. 신문에 실린 세월호 희생자들의 모습과 사연도 꼬박꼬박 스크랩한다. 그는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 ‘애기들’의 넋을 달래는 ‘넋전 춤’을 준비중이다.


“50여년 전까지는 무당집이나 절집에서 종이로 죽은 이의 넋을 만들어 ‘넋전’(종이인형)이라고 했어요. 대나무 가지에 그것을 두세 개 걸어 두 손에 들고 ‘넋전 춤’을 췄지요. 지금은 절집에선 아예 사라지고 무당집에서도 몇 군데만 남아 있습니다.” 심우성(80·우리문화연구소장)은 “우리 연극유산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분야입니다. 이번에 ‘애기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넋을 위안하고 사라져가는 넋전을 되살려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심우성은 직접 오려 만든 넋전을 들고 춤을 추다가 이애주(67) 앞에서 넘어질 생각이다. “이애주 선생, 이 넋을 받으십시오”라는 뜻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이애주는 “인형이 넘어진다는 건 세월호 아이들을 비롯해 모든 참사의 넋들을 되살린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25일 심우성과 이애주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칠월칠석인 8월2일부터 4일까지 서울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펼쳐질 ‘넋전 아리랑’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심우성은 <한겨레>에 연재중인 ‘잊지 않겠습니다’를 오려 둔 스크랩북을 보여줬다. 이 연재는 박재동 화백이 세월호 희생자의 생전 모습을 그리고, 가족들이 그들을 기리는 내용이다. 심우성은 기사들을 틈틈이 꺼내볼 때마다, 피지도 못하고 스러진 어린 넋들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번 무대에서는 남과 북이 만나는 ‘통일 아리랑’도 함께 그려낼 요량이다. “죽은 애기들과 산 자들이 만나는 것도 통일, 갈라진 민족이 만나는 것도 통일입니다. 우리 넋전 아리랑도 통일을 향해 나아갔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잡귀·잡신 같은 외세’를 말끔히 없애야 한다고 했다.


‘넋전 아리랑’을 연출하면서 직접 무대에도 오르는 최일순(48) 극단 서낭당 대표는 ‘넋전 아리랑’의 얼개를 설명했다. “이번 넋전 아리랑 공연은 네 마당으로 나뉩니다. 먼저 심 선생님이 쓴 내용대로 한반도 상황을 70년 전 둘로 갈라진 분단에서부터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사건까지 정리합니다. 그리고 제단을 차리고 망자들을 수습하고 염습한 뒤 넋들을 진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심우성은 틀에 짜맞춘 ‘넋전 춤’을 경계했다. “그게 생각한 대로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압니다. 다만, 지금 난리가 난 상황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한바탕 판으로 열어보자는 거지요.”


이애주는 살풀이춤을 넋전과 결합할 생각이다. “살풀이는 춤도 되지만 음악도 되고, 우리의 민족성인 거죠. 일어났다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게 살풀이거든요.”


심우성과 이애주의 인연은 깊고 길다. 1960년대 초 심우성은 이애주의 스승인 승무 인간문화재 한영숙(1920~1989)과 함께 국악예술학교 교단에 섰다. 1960대 말 한영숙이 애제자 이애주를 심우성에게 소개했다. 그 뒤 심우성과 이애주는 1970년대에 춤사위 조사작업을 함께했다. 그리고 ‘넋전 춤’을 이애주가 이어받게 됐다. 스승 한영숙이 일찌감치 ‘이애주가 심우성의 제자가 되는 인연’을 심어준 듯하다. “넋전 아리랑을 함께한다는 것은 심 선생님이 일생 일구신 것을 이어받는 의미다.” ‘제자’ 이애주가 말했다. “넋전 춤에서 ‘마음’을 가지고 이어받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애주씨가 그런 마음을 가진 듯하니 기분이 좋아요.” ‘스승’ 심우성이 답했다.


흥미로운 것은 국내에서 사라져가는 넋전이 일본에서 많이 보급됐다는 점이다. 심우성은 “내가 일본에서 넋전 춤을 많이 췄거든요. 도쿄, 고베, 오사카 등이었는데 총련 사람들이 많이 배워갔어요. 요즘도 많이 한답니다”라고 했다. 010-3204-3095.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떠난 '용태형' 운구행열은 서소문 배제학당을 한바퀴 돌아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문화운동의 본거지였던 '그림마당 민' 앞에서, 그 시절을 회억하는 유홍준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며 고인의 넋을 기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망자의 가게였던 '낭만'으로 자리를 옮겨 노제를 올렸다.

 

 

 

 

 

 

 

 

 


 

 

 

 

 

 

 

 

 

 

 

 

 

 

 

 

 

 

 

 

 

 

 

 

 

 

 

 

 

 

 

 

 

 

 

 

 

 

 

 


지난 6일 오후3시의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2호실은 한가했다.

먼저 떠난 “용태형”을 조금이라도 오래도록 붙들고자 5일장으로 한데다, 대부분 문상을 다녀 갔거나,

더러는 추모식이 있는 7일이나 발인 날 들리려고 기다리는 듯 했다.

함께 들린 정기범, 김명성, 조준영씨 외에는 장례위원 김태서, 이애주씨를 비롯하여 소설가 조정래, 배평모씨

서양화가 장경호, 민정기씨, 민속학자 심우성, 사진했던 박영수씨등 몇 몇 분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뒤이어 약속했던 무세중, 무나미선생을 비롯하여 이청운, 전강호씨 등 ‘인사동 유목민’팀들이 방문하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김용태씨를 돕기 위한 “산포도 사랑, 용태 형” 출판기념회 및 “함께 가는 길” 전시회 개막식이

지난 26일 오후5시부터 '가나아트센트'에서 열렸다.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은 민중미술의 핵심 인사 45명이 '용태 형'에 대한 경험담을 털어 놓았고,

“함께 가는 길”은 지난 시절 '용태 형'에게 빚 진 민중미술가 43명의 작품을 추렴해 갖는 자선전이다.
‘김용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해 살아있는 이를 위한 회고집을 내고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은

병상에 누운 ‘용태 형’을 돕기 위한 자리였지만, 뿔뿔이 흩어진 옛 전사들의 결집이었다.

투병 중이라 개막식에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용태 형’의 멀쩡한 등장에 깜짝 놀랐다.

모처럼 때 빼고 광냈겠지만, 전혀 간암 말기의 환자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개막식장에는 80년대 민중예술을 이끌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총집결했다.
김정헌, 민정기, 박진화, 성완경, 신경림, 임옥상, 신학철, 박재동, 박불똥, 정동석, 주재환, 강요배, 김준권, 문영태, 신학철,

심정수, 이애주, 임진택, 장경호, 최석태씨 등의 내노라하는 작가들과 백기완, 문재인, 이부영, 이재오씨 등의 정치인,

시인 신경림, 소설가 황석영, 언론인 임재경, 이도윤, 가수 최백호, 환경운동가 최 열, 연극배우 이명희, 사진가 정인숙, 곽명우, 무도인 하태웅, 김태서, 임계재, 편근희, 유재만, 노광래씨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용태 형'의 쾌유를 바라며 전의를 다졌다.

임진택씨의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 첫머리에 최백호씨가 나와 “보고 싶은 얼굴”을 불렀다.

그 노랫말들이 새록 새록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데, 나에게는 보고 싶은 얼굴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이왕이면 “산포도 익어 가는 고향 산길에, 산포도 따다 주던 산포도 처녀”로 시작되는 ‘용태 형’의 십팔번 “산포도 처녀”를 들었

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어 문재인, 황석영, 이부영, 백기완씨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백기완씨는 “술도 마셔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빨리 일어나라”며 꾸짖듯 말해 자리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애주씨의 살풀이 춤으로 행사는 마무리되었으나, 오랜만에 반가운 분들 만나고 사진찍느라 정작 보아야 할

전시작품들을 놓쳤다. 

뒤풀이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나도 막걸리 한 잔 도오!”라며 “용태 형”이 술잔을 들었다.

하기야 전투를 지휘할 사령관이 자기 몸 생각으로 꽁무니 뺄 위인은 아니지만, 좀 걱정되었다.

‘괜찮다’를 연발하는 ‘용태 형’의 밝은 모습에서 다시 살아 난 맹장의 모습을 보는듯 했다.

민중미술로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핀 옛 전사들의 결집 자체가 '용태 형'의 부활을 의미했다.

 

손님들이 너무 많아 뒤풀이 집을 두 군데나 잡았으나 여전히 자리가 부족했다.
신학철, 문영태, 장경호, 이명희씨를 비롯한 몇 명은 인사동 ‘노마드’로 자리를 옮겨,

신학철씨의 작품 '물레방아 도는 내력'을 들었다.

 

사진,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