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출판기념전은 많은 분의 성원에 힘 입어 잘 마쳤습니다.

 

장항선 장터 길에 함께해 주신 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정영신은 반평생을 장돌뱅이로 떠돌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코로나로 사람 접촉을 꺼리던 2년 전부터 혼자 열차를 타고

장항선 주변에 있는 충청도장을 떠돌았다.

 

무거운 카메라에 짓눌려 힘들게 장바닥을 휘젓고 다닌

그녀의 장터 순례길은 고향의 어머니 찾아가듯 즐거운 일이었다.

무슨 사명감 인양, 아무리 쪼들려도 장터 떠나는 늦추지 않았는데,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장바닥을 떠돌며 사람 만나 정 나누는 것은 좋으나,

무거운 물건까지 사 들고 올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파김치가 되어 오던 그 지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결국 그 일을 마무리하여 책까지 펴낸 것이다.

돈 한 푼 없어도, 저지르고 부딪히니 되긴 되더라.

 

사라져가는 오일장과 삭막해지는 인심을 안타까워 하지만,

이 세상 어느 하나 사라지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에겐 고향 같고 어머니 품속 같은 장터와 장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다.

장터보다 장터 사람에 대한 애착이 더 깊다.

 

어쩌면 어머니의 마음 같은 따뜻한 인간애를 찾아 장터를 헤맨 것인지 모른다.

그가 펴낸 ‘어머니의 땅’에 실린 사진과 초창기 장터 사진의 연대나 접근 방식이 같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래에 옮긴 이광수교수의 사진 비평도 궤를 같이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어떤 원형을 그리워하는 그리고 그것을 안타깝게 기록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근대주의의 휴머니즘의 세계에 뿌리내린 사진 세계다. 사라져버린 것을 애써 찾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변화한 모습, 그로 인해 사라져버린, 다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을 기록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려

것도 아니다. 변화에 방점이 있는 것보다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어머니의 심성을 찾는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원형을 찾으려 돌아다니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 보인다.

원형은 있다, 가야 할 곳도 있다, 그곳은 꿈과 신화 속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눈앞에 있다.

우리 마음의 고향, 뿌리 내리는 삶, 그 뿌리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이것이 정영신의 사진 철학이다.”

 

개막식과 전시 이튿날까지 다녀가신 분은 지난 25일 소개한 적이 있으나,

그 뒤부터 끝날 때까지의 사진은 힘들어 그대로 모아 두었다.

전시가 끝나고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기억이 가물거려 미치겠더라.

다행히 사진에 찍힌 정보가 있어 퍼즐 맞추듯 풀어냈다.

 

소식 또한 금방 나온 조간 신문이라 기 보다 늦은 주간지 정도로 알면 된다.

다녀가신 분이야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하겠지만,

아니어도 반가운 분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술 마시며 노는 것도 힘들었다.

평소 부러워했던 술 상무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셔 지쳐 있는 노숙인의 힘든 처지도 알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만 마셔도 쓰러진다.

 

연락부절로 화장실에 쫓겨 다니는데다, 속까지 뒤집혀 죽을 맛이었다.

걸어 다니는 송장에 가깝지만, 사람만 보면 반갑고 즐거웠다.

마치 저승에서 문상객 맞는 심정이라, 더 절절했다.

 

내가 만나지 못한 분만해도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박흥순, 양시영, 유준, 임동은, 박인식, 임홍택, 김홍성, 

김영진, 신길훈, 장종운, 백금옥, 이혜숙, 조시노, 음주애, 이완순, 최리나, 김효순, 이진홍, 한현주, 김애경,

김형배, 장석원, 곽숙경, 신혜선, 한선영, 홍경순, 김유나, 설인선, 이정숙, 김성은, 이용민, 김명점, 김혜영,

이영욱, 양한모, 한용길, 정태섭, 김지연, 김승준, 김혜원, 문 슬, 이기정, 전인경, 신영섭, 장소연, 임정희,

임연웅, 주강현, 이형순, 박범이, 채영임, 유형근, 박상희, 윤장섭, 김정락, 이수헌, 이홍순, 오리진, 김민형,

온세미, 송진욱, 유운선, 진 민, 김미숙, 박찬원, 김병구, 최상기, 송남양, 변성진, 권오창, 박재웅, 김형로,

장순향, 김영곤, 김용순, 고미정, 김백순, 김추윤, 이근정, 이우섭씨 등 헤아릴 수가 없다.

 

다들 뵙지 못해 죄송스럽다.

 

26일 오후에는 전태수씨가 오셨다는 전화를 받고 하던 일을 접어버렸다.

술시가 이르지만, ‘유목민’으로 옮겨 술 잔을 들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사진 했다는 오래된 이야기도 들었다.

 

27일엔 양재문, 남태영, 김녕만, 나종희, 이주영, 곽대원씨를 비롯하여

남기은씨 내외 분께서도 다녀 가셨다.

다음 달에 시집갈 조카 조은겸이는 남편과 시어머니 될 분까지 모셔 왔다.

 

뒤이어 김여옥 시인이 등장하자 인사동 건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승철 시인이 장경호, 양상용, 한상진, 최석태씨 등 화가를 대동하여 ‘시골해장국’으로 갔다.

 

김여옥시인이 인사동에서 ‘시인’이란 술집 차렸을 때는 인기 마담이었다,

숱한 세월이 흘러도 미색은 여전했다.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 준 것 만도 고마운데, 그 날 술값까지 그녀가 쏘았다.

 

그 다음 날은 김발렌티노를 비롯하여 정주영씨와 딸 김소연, 이성표 부부가 다녀갔다.

긴 세월 언론계에 몸 바친 윤상길씨는 ‘미술여행’ 편집위원들과 다녀가셨고,

사진가 이윤기, 임성호, 권양수, 김연지, 신영섭씨도 오셨다.

 

느지막에 손님 오셨다는 연락 받아 나가다, 길에서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다.

만난 지가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그 연세에 아직도 기타를 메고 다녔다.

대폿집에 모셔가 선생의 십팔 번 ‘부용산’이라도 한 곡 듣고 싶었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은 모처럼 손님 만나 술 마실 일이 없었는데,

운현선 기자가 다녀가며 와인 한 병을 선물로 두고 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전어 몇 마리 사서 정동지와 오붓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매일 같이 술 마시다 하루 쯤 쉴 만도 한데, 술을 두고 그냥 잘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술자리보다

마음 통하는 사람과 오붓한 술자리가 더 좋다.

 

술 마시며, 정동지의 다음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장보다 장꾼을 찾아 다니려면, 늦었지만 운전을 배우라고 했다.

내가 죽고 나면 시골 구석구석을 어떻게 찾아다닐 것인가?

 

걱정은 되지만, 억척같은 또순이라 충분히 해낼 것으로 믿는다.

31일은 손님 오셨다는 전화에 늦게 사 전시장에 갔다,

오랜만에 쓸쓸한 미소의 화백, 신학철선생을 만난 것이다.

 

장경호씨와 더불어 ‘부산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종률씨와 이선태씨도 있었다.

뒤따라 최석태씨까지 합류하여 오랜만에 동지애를 불태웠다.

 

헤어져 돌아가는 중에 ‘이모집’으로 오라는 전화가 다시 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는데, 가보니 좀 전에 헤어졌던 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준영, 정희성, 박철, 박불똥, 조경연씨 등 일개 소대가 모여 있었다.

이미 취한 상태라 무슨 주접을 떨었는지, 뒷일은 기억나지 않는 게 낫다.

 

9월1일은 부산의 이광수교주와 아산 ‘봄에실’ 농장 식구들이 온다 기에

일찍부터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가 차 문을 두드렸다.

농장 식구들이 주차하고 나오다 고물차를 알아본 것이다.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농장 식구들이 총출동했는데,

문단속은 잘했는지, 동물들 먹이는 어떻게 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들 전시장으로 갔는데, 모처럼 서울 나들이한 평이가 제일 신났다.

 

좀 있으니, 이광수교수가 나타났고 뒤따라 사진가 김문호씨도 왔다.

다들 술이 인사라 ‘부산식당’에서 낮술부터 마신 것이다.

인사동 점쟁이 신단수씨도 농장 식구를 데리고 그곳으로 식사하러 왔다.

 

그날은 충무로에서 양승우씨 전시가 열리는 날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광수 교수는 ‘갤러리브레송’에 가려고, 옆자리 밥값까지 내 버렸다.

늦을 세라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갤러리 문이 잠겨 있었다.

이교수가 김남진 관장에게 전화를 하니, 뒤풀이 집으로 오란다.

 

어이가 없었다. 나 같은 늙은이라면 모르겠으나, 부산에서 온 손님이 있지 않은가?

김문호씨 와는 다음에 볼 수도 있지만, 가야 할 이교수는 어쩌라고?

 

이건 갤러리를 운영하는 관장으로서 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지키게 해야지...

더구나 오랫동안 무보수로 이교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나?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뒤풀이 장소를 찾아갔는데,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이윤기, 이세연, 서준영, 나인석씨 등 일곱 명이 통닭집에 모여 있었다.

이교수의 호쾌한 구라에 마음을 다독였으나, 영 불편했다.

뒤늦게 ‘봄에실’ 농장 식구들과 함께 정동지도 도착했다.

이교수가 떠날 기차 시간까지 깨소금 안주로 독주를 마셨다.

 

9월3일은 전시장에 갔더니, 김명지, 서정란, 이은정, 전태수씨가 와 계셨다.

이은정, 전태수 내외분을 모시고 일찍부터 ‘유목민’에 술상 차렸다.

 

안주도 나오기 전에 여동생 조진옥과 매제 김종성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전시장에 갔더니, 여동생 외에도 이대훈, 노인자 내외 분을 비롯하여

 최명철, 박종면씨 등 많은 분이 계셨다.

 

삶의 풍경을 그리는 동생에게 장터 풍경은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매제는 동생이 공모전에서 상 받은 걸 자랑하지만, 상은 작업에 독이라며 일축했다.

 

여동생과 매제를 보낸 후, 이대훈씨 내외분을 ‘유목민’으로 모셔왔다.

전태수 내외 분과 합석하게 되었는데, 최명철, 신단수씨 일행은 입구에 자리 잡았다.

 

 술 잔 들기도 전에 또 다시 연극연출가 기국서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인덱스갤러리’를 못 찾아 수도약국 앞에서 헤맨단다.

 

예전에 인사동을 들락거린 분이라면 옛 ‘수희제‘ 3층이라면 금방 찾을 텐데,

’수희제‘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달려가야 했다.

 

기국서씨를 만나 전시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생각지도 못한 박진호씨가 나타났다.

 

야! 이게 얼마 만인가?

정동지 더러 이혼 설득할 때, 들러리 서 준지가 7년이 넘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동안 그대로였다.

 

약속이 있어 가야 한다는 박진호씨를 보내고, 기국서씨를 ’유목민‘으로 안내했다.

9월5일부터 9일까지 ’강북문화예술회관‘ 진달래 홀에서 열릴 ’관객모독‘ 공연 준비로 바쁘 단다.

바쁜 와중에도 들려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손님이 나뉘어 있으니,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찾아 주신 분께는 송구스럽지만,

운전하려면 차에서 눈 좀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전시 마지막 날은 ’유목민‘ 전활철씨가 술자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날이 생일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장어를 구워 몇 사람 초대했단다.

 생일이 페북에 뜨지 않도록 어렵사리 만들었고,

’봄에실‘농장에서 평이가 그토록 기다린다는 생일상도 한사코 거절했는데...

 

난, 내가 태어난 생일 자체가 싫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세상에 태어난 게 싫다.

지독히도 생일을 챙겼던 정동지마저 이젠 한풀 꺾였는데...

 

어쩔 수 없이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씨 외에도 방기식, 유 준씨 등 여러 명 와 있었다.

그날이 ’유목민‘ 휴일이라 오붓한 술자리가 되었는데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관장과 한지공예를 한다는 처음 보는 미녀도 있었다.

아무튼 불편한 생일상이지만, 배려해 주어 고맙다.

그 이튿날은 전시를 철수하기 위해 정오 무렵 나갔다.

철수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노인자씨도 와 계셨다.

서둘러 액자를 포장하여 차로 옮겼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부쩍 자동차 방전이 잦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벌어진다.

긴급출동은 왜 그리 오지 않는지, 가게 주인의 성화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어렵사리 시동을 걸어 인사동을 빠져나왔으나, 차가 밀려 꼼짝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광교사거리에서 벌인 노조법 개정 촉구 결의대회에 발목 잡힌 것이다.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데,

에어컨이 꺼지고 램프가 깜박이더니,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렸다.

 

아무래도 발전기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견인차를 불렀다.

그렇지만 차가 밀려 꼼짝 하지 않는 판에 견인차는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종로 한복판에 고장 난 차를 세워 두었으니, 운전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뜨거운 길바닥으로 내몰린 정동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하철 타고 먼저 가라며 보내긴 했으나, 꼬리 문 차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는 일을

한 시간은 족히 하고서야 견인차가 나타났다.

 

견인차에 끌려 역촌역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발전기가 수명을 다해 교체해야 한다는데, 발전기 교체 비용이 50만원이란다.

 

190만원짜리 고물차 수리비가 50만원이라면 폐차가 답이다.

그러나 잔뜩 실은 짐은 어떻게 할 것이며, 차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내 처지가 난감했다.

 

폐차할 고물차에 신품 발전기가 말이 되냐며 중고를 구해 달라고 하니,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이라 정품만 써야 한 단다.

그렇다면 견인차를 불러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중고를 알아본 후 교체해 주었다.

 

28만원으로 내려간 중고발전기를 구해 어렵사리 고쳤는데,

마침 중고 발전기 값 만큼의 현금이 주머니에 있었다.

엊저녁 활철씨가 생일축하금으로 준 20만원과

그날 노인자씨가 점심 식사 하라며 준 10만원이었다.

 

같이 식사하러 왔다가 차가 말썽을 부려 밥도 못 먹고 헤어졌지만,

어쩌면 수리비 액수까지 딱 맞추어 주고 가셨다. 언제나 절실한 것 만큼만 주는 돈과의 인연이다.

돈이란 빨리 돌아야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잠시도 머물 틈을 주지 않는다.

 

두 분 덕분에 자동차를 고쳐 사진액자를 안전하게 옮겼는데,

정동지는 오후 다섯 시까지 ‘금보성아트센터’로 가야 한 단다.

 

이번 전시에 금보성씨가 책을 40권 사 주었고, 창원의 조성제씨도 20권을 사 주었다.

덕분에 배당 받은 200권 목표량을 초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책을 그날 전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답례로 정영신의 ‘한국의장터’와 나의 ‘청량리588’ 사진집 두 권을 드렸는데,

오래전 588번 버스 타고 그곳을 지나다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국의 장터’ 사진집은 여러 가지 도울 수 있는 프로젝트가 많겠 단다.

그 자리에서 여기저기 전화 걸어 타진 해 주기도 했다.

금보성씨는 자신의 작업량도 엄청나지만,

힘들게 작업하는 주변 작가를 돕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는다.

 

마침 자기가 돕는 다른 작가들과 미팅이 있다며,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금보성씨 내외 분 따라 연희동 ‘고미정’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에 개인 그림전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과 사진가 이명호씨가 있었다.

 

‘고미정’ 음식들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었다.

덕분에 금보성씨로 부터 예술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듣는 좋은 시간이었다.

 

전시와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후련하다.

그동안 죽는 것도 전시 끝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며 버텼으나,

많은 분에게 신세만 져 어깨가 무겁다.

그 신세 갚는 길은 열심히 사는 것 밖에 없다.

 

정영신의 장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개막식 날 사진과 그 이튿날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93794923

 

 

 

굴뚝에 관한 보고서 2-산업유산 풍경

김인재/ KIMINJAE / 金仁在 / photography

2023_0801 2023_0815

김인재_문경 쌍용양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공휴일_11:00am~06:00pm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퇴계로 163

(충무로252-6번지) 고려빌딩 B1

Tel. +82.(0)2.2269.2613

gallerybresson.com

cafe.daum.net/gallerybresson

 

김인재, 굴뚝에 관한 보고서》 ● 어떤 것을 기록한다는 것은 때로는 사회과학의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학의 일이기도 하다. 기록이라는 것은 사실을 그대로 남기는 의미도 있지만, 기록자의 시선을 배제할 수 없고, 그 시선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적으로 소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남겨진 기록을 읽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고, 그 해석 작업의 가장 우선적인 일은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의 시선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기록하였을까? 기록을 남긴 당시의 사회적 위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성장 과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이 의문을 풀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글이 아닌 사진 이미지로 남겨졌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 의문은 사진의 생성 원리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김인재_문경 쌍용양회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사진 이미지를 만들 때 사진가는 그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결과물인 사진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사진은 과학의 산물인데도 동영상과는 달리 그 맥락이 단절 혹은 소거되어 있고, 그래서, 그 사이 사이를 독자의 해석으로 메꿔야 한다. 결국, 사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사진을 찍고, 독해하고, 감상하고, 전시하는 등의 여러 관련 행위의 중심에 인문학이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자의 시선이 아닌, 기록 자체가 뭘 말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라는 하나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어떤 것을 말하려 하는가? 그의 언어는 다변인가, 눌변인가, 웅변인가? 그는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는가 아니면 스스로 그 여지를 차단했는가? 사진은 모사에서 출발하지만, 재현함으로써 완성된다. 물리적 실재와 인간의 창의성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그림이나 글과 같이 창작의 가치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느끼거나 읽거나 이해하는 방식이 미술의 미학으로부터 철저히 독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현재의 위치다. 그래서 사진은 여전히 미술에 대한 강박증을 앓는다. 그래서 그림이 갖는 미학적 기준에 따라 한 장의 '' 찍은 사진 담론에 혹하는 것이고, 천편일률적으로 '빛이 좋은 시각''좋은 포인트'에 매달리는 것이다. 결국, 그러다 보니 사진은 소재가 다를 뿐이지, 그 재현된 것은 다분히 천편일률적이고, 독창성이라 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는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었을까? 그 작업 중에서 김인재는 시각의 연속과 단절 사이에서 일어난 변증법적 사건을 염두에 둔다.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보는 일이고, 보는 일은 바라봄과 해석함이 연속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를 사진가 김인재는 작가 노트를 통해 상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그가 지난 2년간 바라보는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산업문화유산'이다. 그는 '굴뚝'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유산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으로 해석하여, 어떤 현실을 창조하려 한다. 굴뚝으로 상징된 그 흘러간 시간의 오브제를 바라보는 일이란, 누구나 보는 어떤 분명한 객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나 학문의 언어는 그것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일반화시키지만, 사진가는 그런 획일의 언어로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산업유산(industrial heritage)'이라는 용어로 치환하여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 언어가 담는 품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관이나 학문의 언어가 담지 못하는 어떤 상상의 세계를 사진가가 끄집어내고 독자가 그것을 자신 개인만의 기억과 이야기로 창조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김인재_연천 신중앙요업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김인재 작업의 소재인 '근대산업문화유산'은 다른 말로 하면, '문명'이다. 그런데 그 문명이란 이분법의 소산이다. 어떤 것이 문명이면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게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 문명의 이면에는 야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명과 야만을 경계 짓는 게 보는 이의 시각이다. 김인재는 부지불식간에 이분법 혹은 그에 기초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과학적 혹은 진보적 시각에 관심을 둠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그 진보 담론에 비판적인지 우호적인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 문명과 문화유산의 변주에 관심이 많음을 알 뿐이다. 그 이분법에 따른 존재론적인 의미가 사진술과 닮았다. 정해진 프레임에 들어가 있으면 이미지로 생성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존재 여부는 철저히 사진가의 시각에 따라 달려 있다.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결국 배제되어 버림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버린다. 결국 문명과 사진이란 결국 시각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 이분법의 시각마저 벗어 던져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학문으로는 불가하다. 오로지 감성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감성이니 사진가들이 각자 보는 문명의 존재들을 한 곳에 묶어 놓고 보면 문명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분법적이지도 않고, 우와 열도 없는, 생성과 소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어떤 운동과 같은 것이다.

 

김인재_예산 충남방직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어떤 장소와 거기에 있는 오브제가 산업유산이라고 규정하고 전하고자 하는 일은 기록 차원의 일이다. 그 기록을 영상(image)로 남기려면 아무래도 동영상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면 당신은 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가? 굳이 맥락이 소거되고, 상황이 은닉되고, 어떤 부분을 배제하면서 네모난 박스 안에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규격화하는 사진 행위를 한다면, 당신은 이미 기록을 넘어 해석의 세계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이 대목에서 사진가 김인재는 매우 적극적인 해석의 지평 안으로 들어간다. 대상을 과학과 객관으로 범주화하여 그 안에서 어떤 분류와 분석이라는 과학의 일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분류를 넘어 섞임의 세계를, 보이는 외형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석을 넘어 해석을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굴뚝과 공장이 있지만, 그것들과 함께 낡고 손때 묻은 기계, 막힌 벽, 깨진 유리창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를 옭아맨 '태극기' 액자가 있다. 사람은 세월의 무게 바깥으로 다 사라져, 카메라로는 담아내지 못하였지만, 그가 담은 그 부재 안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김인재의 '굴뚝에 관한 보고서'는 기록을 넘어, 소재주의를 넘어, 기억으로 쓰는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김인재, 춘천 육림연탄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카메라라는 기계로 대상을 재현하는 일이 기록을 넘어, 해석으로 가는 것은 그 대상이라는 것 자체가 입체적이고 맥락적인데, 그것을 한 평면의 이미지로 고착화해 버리는 무모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시공간에서 행위 하는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품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데, 그래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막상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굴뚝'으로 대표한 지표가 주를 이루고, 간간이 그 시기의 공간이 재현된다.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지만 '굴뚝'이라는 이미지로 대변할 수 있으니, 하나의 표상으로서 '굴뚝'은 탁월하다. 그런데, '굴뚝'으로 단순화한 지표는 당시 그것을 둘러싸고 벌인 사람들의 여러 행위와 그 여러 행위 속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끌어내지는 못하게 한다. '굴뚝'이라는 지표가 너무 문화유산이라는 문명적 이미지가 강하고 그 굴뚝 주변의 여러 표상된 지표도 거의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인재, 조치원 한림제지_피그먼트 프린트_60×80cm_2021

사진가 김인재는 '굴뚝'이 담지 못하는 그 잡다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그래서 그것을 상상 속으로 연결하고, 그것을 뭔가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하고자 한다. 이는 사진가가 벗어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다. 메타(meta)로서의 커뮤니케이션 말이다. 뭔가 분화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고, 정돈할 수 없는 원초적 세계다. 광주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공장, 목포 조선내화 벽돌공장, 문경 쌍용양회 공장, 서천 장항 제련소의 사택, 수원 영신연와 벽돌공장, 연천 신중앙요업 전곡공장, 예산 충남방직 공장, 오산 계성제지 공장, 의성 성광 성냥공장, 전주 쏘렉스 스폐공장, 조치원 한림제지 폐공장, 춘천 육림연탄 공장 ... 이미지에 달린 텍스트, 그 여러 고유명사가 이미지들 사이에서 단절된 역사의 기억을 메꿔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진들에는 텍스트가 들어가야 한다. 이 공장들이 지내온 영욕의 시간의 숫자도 기재해야 한다. 짧고 굵게. 그 숫자들 속에서 우리는 그 '문명화'를 둘러싼 기억을 되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명사와 숫자로 된 캡션은 단지 역사적 기록성을 담보하는 것이라서 아니고, 그것이 얽힌 우리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김인재, 의성 성광성냥 공장_피그먼트 프린트_40×50cm_2021

기억이란, 대상이란 그 본질이 무엇이든지, 대상을 대하는 사람 앞에 나타날 때는 그 대상이 눔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 대상이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는 시간의 축적물이면, 기억의 서사와 흘러가 버린 시간의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자신이 믿는 어떤 신격체의 상()이라면 존귀와 숭례(崇禮)의 현현(顯現)으로 다가서게 할 것이고, 그래서 초월의 소통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 대상이 자신과 별다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라면, 그저 그렇게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는 저 '굴뚝'으로 표지되는 저 시공 속의 여러 공장 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겨진 피사체들은 무슨 의미로 기억되는가? 우선, 사진가에 의해 마치 어떤 행위자인 것처럼 위치하게 되고,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는 그 사진가에 의해 관중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카메라라는 기계로 우리 각자의 흘러간 기억을 어떤 형태로 박제하여 각 개인 앞에 내놓는 사진가는 기억의 슬픔을 끄집어내는 영매(靈媒)가 된다. 사진가는 무의미하듯 가만히 존재하는 피사체에게 어떤 의미의 옷을 입혀 그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사진가 김인재가 재현하여 제시하는 저 '굴뚝'들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이제 당신이 사진가의 '보고서'에 화답할 일이다. 당신의 화답은 그의 사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찾는 시간과 우주에 관한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사진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일이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사진가에게만 달린 게 아니고, 독자에게도 달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사진의 세계다. 이광수

 

 
 

 

 

53

The Socitey of Modern Photography & V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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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사진가 조문호의 도시 빈민 다큐멘터리 작업의 의미 :

니체 예술론 위버멘쉬 개념을 중심으로

 

이광수

 

 

Meaning of the Photography of Moonho Cho in terms of

Nietzcche’s Ubermensch with the special reference to

Urban Poors of Dongjadong and Seoul Station Vicinity

Kwangsu Lee

 

 

 

목 차

 

Ⅰ. 머리말

                                                      Ⅱ. 니체의 예술론과 조문호 다큐멘터리 작업

                                                        Ⅲ. 《동자동 사람들 작업의 》 위버멘쉬적 성격

Ⅳ. 맺음말

        참고문헌

 

 

이 논문은 2023년도 부산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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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tey of Modern Photography & Video

 

 

 

 

[ 요 약 ]

   사진을 전시를 위한 예술 작품으로서 보다는 기록 중심의 성격이 더 강한 작업을 하는 사진가의 작품은 근대 미학 밖에 있는 예술론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한 예술론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미학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니체의 예술론을 둘 수 있다. 니체의 예술론은 결과가 아닌 과정, 특히 삶의 태도를 예술성의 생명으로 여긴다. 조문호의 동자동 쪽방 주민과 서울역 노숙인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기저에는 니체 예술론의 의미가 분명하게 들어 있다. 고통받는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육 당하지 않아야 하는 인간 실존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으며, 그들 속으로 들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들의 삶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대면하고 부닥쳤으며, 그들의 삶을 사진으로 재현할 때 조형미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과 최대한 가깝게 있는 그대로 재현하였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따라서 그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성을 평가하고자 하면,  단순히 근대 미학의 결과물 중심에서 형식주의의 창의성으로만 해서는 온당치 못하다. 이미지와 살아 있는 세계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대상 사진가 독자의 총체적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존재와 상황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고,  개체를 전체 속 존재로 위치시키는 것이다. 결국 조문호의 작업은 서사 안에서 각각의 이미지는 독립적인 예술작품이 아니고, 전체가 하나로서 통합하여 인간 실존의 의미를 지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진가가 사진의 대상 내부로 들어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작업을 하였다는 의미가 강하다.

 

[Abstract]

    The work of photographers whose documentation-oriented practice contradicts photography's identity as an artwork for display should be evaluated by artistic theories outside of modern aesthetics. One such artistic theory is Nietzsche's, which is based on ancient Greek aesthetics. Nietzsche's aesthetics considers the process, especially the attitude of life, as the life of artistry, not the result. Nietzsche's aesthetic clearly underlies Cho Moonho's documentary work on the lives of the residents of Dongjadong and the homeless at Seoul Station. This is because he affirms the fate of suffering human beings, has a strong sense of human existence that should not be exploited, enters into their lives as a member of the community, confronts and encounters their lives without trying to avoid them, and reproduces their lives as closely as possible to the facts without being biased toward artifice in the resulting photographs. Therefore, if we want to give meaning to his work and evaluate its artistry, we cannot simply focus on the output of modern aesthetics and formalist creativit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image and the living world must be understood dialectically, in the total relationship of subject-photographer-reader. Cho Moonho's work exists as a Dionysian art in which each image in the narrative is not an independent work of art, but the whole is unified as one, oriented toward 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

 

 

색인어 : 조문호 다큐멘터리 , 사진 니체 , 위버멘쉬 디오니소스 , 예술 도시 , 빈민

Keyword : Cho Moonho, documentary photography, Nietzsche‘s Ubermensch, Dionysian art, urban p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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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I. 머리말

사진은 처음 출발할 때부터 기록성과 심미성의 두 성격을 동시에 가졌다. 이질적인 두 성격이 공존하기 때문에, 어떤 사진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진학자 박상우는 사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미지 표면의 세계에만 머물지 말고, 이미지를 탄생시킨 이미지 이전의 세계 즉, ‘생산한 것과 생산된 것’, 혹은 '사진 생산’ 과 사진 수용을 분리하지 않고, 독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박상우, 2016. 61-2)  이는 존 태그(John Tagg)가 말한 바 사진은 정체성이 없고, 기술로서 지위는 그것에 부여되는 권력관계에 따라 변하면서 실제 행위로서의 성격은 그것을 작업하게 만드는 대행자와 기관에 의존하는 것이라서, 그 결과물은 그것들이 특정하게 통용되는 체계 안에서 독해하고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한다는 (John Tagg, 1993. 118) 규정의 연장선 위에 있다. 사진은 스스로 말을 하지 않는 언어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불완전하고, 그 메시지는 필연적으로 맥락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적어도 기록의 의미를 우선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라면, 사진은 생산되고 소비되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독해 되어야 하고, 리얼리티의 객관적인 기록이나 미적인 창조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적 산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 이기중, 2011, 130) 그렇지만 다큐멘터리 작품일지라도, 그 작품을 평가하는 일은 근대 미학이나 예술론 위에서 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추세를 이끌어가는 데는 뉴욕현대미술관 같은 전시 권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단언하듯, 사진은 미학의 담론에서 기능하는데, 그것은 전시 공간을 중심으로 자신을 구축 해왔기 때문에, 그 공간이 공공 미술관이든, 공식 살롱이든, 세계박람회장이든, 또 사적인 전시회 든 간에 사진은 전시장이라는 연속된 벽의 표면 위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전시 공간을 재현하면서 예술작품을 구축해가는 것이라는 ( 크라우스, 2002. 332-3)  담론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한 평가의 주요 기준을 제시한 사람이 존 사코우스키(John Szarkowski) 전 뉴욕현대미술관장이다. 사코우스키는 《사진가의 눈》 (The Photographer’s Eye) 서문을 통해 사진의 표현력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 미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이후 사진에 있어서 형식성은 사진 평가의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뉴욕현대미술관의 관장인 그가 규정한 바가 기준이 되면서, 설사 기록성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라 할지라도 그가 말하는 표현력의 형식성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진은 아무리 ‘사실 (fact)을 기록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일지라도 사실을 그대로 재현 할 수는 없다. 특히 피사체가 사람일 경우, 사진가와 피사체 간의 어떤 관계가 형성되고, 피사체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카메라가 자신 앞에 놓여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든 반응할 수밖에 없으니, 사실을 과학적으로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본질적인 사실 재현의 성격 안에서 사회적 행위로서의 어떤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재현은 가능하다. 사진 재현이 갖는 그러한 본질적 의미 때문에 사진가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둘 수밖에 없고, 사진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긴장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작품일지라도 ‘결정적 순간 이나 프레이밍의 시각적 긴장을 통해, 감성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품이 후하게 평가받는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사진일지라도 종군 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가 말하듯 ‘당신 사진이 좋지 않다면, 당신은 대상에 충분하게 가깝게 다가서지 못한 것이다 라는 말이 보여주는 사실성보다는 사실성을 미적으로 만드는, 그래서 그 위에서 스토리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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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속성을 강조하는 관점이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도 주류의 위치에 선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 미학에 기초한 형식미를 거부하는 작품은 작품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주의의 예술성을 따르지 않고, 사실의 기록과 사진 행위의 도구적 가치에 따라 작업을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여전히 있다. 그러한 작품을 평가할 때, 전시를 위한 표현력의 형식성만이 어떤 예술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이것이 이 글이 제기하는 문제의 출발점이다.

 

   1940년 뉴욕현대미술관이 사진부(department of photography)를 두면서 인화가 작품평가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고, 결과물이 아닌 사진가의 작업 의도와 과정은 평가에서 대부분 제외되었다. 사진은 전시 예술의 대상으로 지위가 변하면서, 고품질 인화와 영구 보존 및 소장을 위한 예술작품으로 평가하는 일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시를 위한 사진, 예술작품을 위한 사진으로의 성격에 동의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50년에 이미 현대 사진이란 무엇인가 라는 뉴욕현대미술관의 심포지움에서 어빙 펜(Irving Penn)을 비롯한 몇몇 사진가가 현대 사진의 최종 작품 단계는 인화된 프린트가 아니라, 인쇄된 책의 페이지이며, 현대 사진가들은 사진을 예술로 생각지 않고, 사진이 예술적 대상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필립스, 2002,.54) 사진의 전시 예술품으로 서의 정체성에 반하는 기록 중심의 작업을 하는 사진가들은 여전히 전시 담론 밖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품은 무엇을 토대로 어떻게 그 예술성을 평가해야 하는가?

 

   그러한 근대 미학 밖에 있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미학을 들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미학에서는 작품의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행동을 가치 판단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이 연장선 위에서 니체의 예술론도 결과가 아닌 과정 특히 삶의 태도를 예술성의 생명으로 여긴다. 니체의 예술은 그리스 미학을 구성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결합체로서 역동적인 것이 되는데, 그 안에서 형식보다는 의미가 주요 요소로 작동한다. 이글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조문호의 작업을 니체 예술론으로 평가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Ⅱ. 니체의 예술론과 조문호 다큐멘터리 작업

  니체의 미학은 전체성, 형식성, 보편성이라는 근대 미학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평가한다.( 강영계, 1998.115)  미학의 전통에서 볼 때, 니체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어져 온 형식 중심을 넘어 작품이 존재하기까지의 행동의 의미를 중심으로 삼는 미학 전통에 속한다. 따라서 니체의 미학 안에서는 절대적 미(美) 그  자체 혹은 이해 관계없는 관조 혹은 순수 예술이나 예술을 위한 예술 같은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예술을 구성하는 두 가지 원리인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1) 그 가운데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 자체인 세계에서, 그 고통을 직시하면서 존재하는 것이고, 아폴론적인 것은 쉴 수 있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잠시일 뿐이고 결국 가상일 뿐이어서 그를 통해 고통의 무의미성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형식성이나 표현성을 벗어나는 것이라서 균형과 비례 혹은 조화 혹은 객관성에 

 

1) 니체의 예술론에 따르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에, 아폴론적인 것은 이미지에 근거한다. 거기에서 시각예술인 회화 조각과 건축 즉 미술은 아폴론적 예술, 청각예술로서 일체 형상을 초월하는 음악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에 속한다. 아폴론적 본성은 형식과 틀을 중요시하고, 디오니소스적 본성은 형식과 틀의 경계를 파괴한다. 사진은 조형적 성격이 더 근본적이라서 굳이 구별한다면 아폴론적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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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서 벗어나는 것이고, 정신과 도덕의 당위성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며, 광기나 도취를 통해 고통과 만나는 것이다. 그. 안에서 관객은 그 예술을 통해 삶의 문제와 고통을 대신 체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예술론에는 행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그 위에서 니체는 그동안의 미학이 미(美)를 정리할 때, 예술가는 빠지고, 예술을 감상하는 자를 중심으로 해왔다고 비판한다.(홍일희, 2014. 298)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서의 예술을 상정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치유하는 것과 같은 형식미에 치우친 예술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 예술론 위에서 조문호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어떤 성격을 띠는 것일까?

   

    조문호는 2016년에 서울의 대표적인 도시 빈민 주거지인 서울역 앞 동자동 쪽방촌에 들어갔다. 그 스스로가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의 도시 빈민이라 그곳에 거주할 수 있어서 들어 간 것이고, 단지 사진 작업만을 위해 외부인으로 그곳에 들어간 건 아니다. 그는 그때부터 2021년까지의 5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동자동 쪽방촌과 서울역 앞의 도시 빈민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노숙인, 길에서 살다 -쪽방촌에서 보낸 5년의 기록- 을 냈고, 블로그《인사동 사람들》의 ‘동자동 쪽방 사람들’ 에 기록하였으며, 이 후 현재 블로그 '서울역전 사람들’에 서울역 앞 빈민들의 영정 사진 작업을 게재하고 있다. 사진가 조문호는 50mm 단일 렌즈가 달린 컴팩트 카메라 NIKON Coolpix P310으로 사진 작업을 한다. 노출, 셔터 스피드 등을 통한 다양한 표현을 빌리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감각적인 프레이밍을 하거나, 앵글이나 화각을 다양하게 하여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 후보정 작업을 거의 하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일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표현에 치중하여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감성적으로 제시되고, 독자가 더 큰 자극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태도를 못 마땅해 한다. 따라서 그의 사진들은 형식미에 치우친 작품을 선호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판매하는 용도의 작품으로 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가 사진을 찍는 것은 그들 도시 빈민의 삶을 개선하는 일에 사진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우선적인 건 그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살아가고,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그 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진이 소용이 있었으면 하여 기록하는 것이고, 특별한 표현력을 발휘하여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사실 그대로만 찍으면 그것 자체가 충격이기 때문이다. 결과물 로서의 사진에 대한 그의 태도도 마찬가지로 실체 중심적이다. 그는 동자동 주민들을 사진으로 찍어 인화한 후, 동네 놀이터에 빨랫줄을 걸고, 거기에 널어놓고 피사체가 되는 주인공에게 인화물을 돌려주는 행위를 한 것은 자신의 사진이 전시를 위한 이미지가 아니고, 그들의 주체적 자존감 회복에 도움이 되게 하는 걸 바라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영정 사진을 작업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니, 단지 초상사진이 사진의 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고, 그들에게 자존감을 북돋워 패배 주의적 생각을 버리게 하고 싶어서다. 이는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형식미를 중시하는 다큐멘터리가 지닌 미적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진 존재 가치는 피사체가 사진을 통해 자기 삶을 존중하면서 인간으로서 대접받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작업 태도는 니체가 세상으로부터 인간은 자기에게 온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자기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위버멘쉬(Ubermensch) 2)로 가는 것이라는 사실과 통한다. 니체는 생명 있는 존재는 자신의 힘을 방출하고자 하는 의욕

 

2) ‘초인’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초인 이 갖는 슈퍼맨, 초월자 등으로 오해할 수 있어서, 원어로 그냥 쓰는 게, ‘ 낫다’, 는 니체 연구 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라 '위버멘쉬'라 쓰기로 한다. 위버멘쉬는 도덕, 전통, 종교 등을 깨고 나와 인간 정신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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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위버멘쉬가 되어야 하는데, 바로 그 위버멘쉬로 가는 과정에서 의욕의 성장으로부터 창조적 활동이 생기고, 거기에서  활동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 사진가 조문호가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동자동과 서울역 주변의 도시 빈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과 서울역 앞 빈민들은 사회의 보편적 질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니체가 말하는 광기를 보이며 사는 사람들이다. 니체는 자연 본능의 무의식적인 힘에 최대한의 찬사를 보였고, 조문호는 그들 동자동 사람들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재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앵글이나 화각 등에서 자신만의 독특함을 보이지 않고, 가장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장면으로 재현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그 광기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제에 대해 사진가가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 그 위에서 자신만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재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조문호는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해 할 수 있는 한,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다. 조명은 자연 채광만을 이용하고, 프레이밍을 통한 왜곡을 하지 않고, 결정적 순간이나 기하학적 패턴과 같은 형식 혹은 구도를 만들어내려 노력하지 않으며, 대상을 부담스럽게 혹은 낯설게 만듦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더 오래 잡기 위한 표현을 하지 않는다. 조문호는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사진 이미지의 예술성보다, 사진 작업을 통해 피사체인 도시 빈민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가치는 기록성에도 있지만, 사회를 개선하는 도구로서의 성격에도 있다고 보는 사진가다. 그. 이유는 사진은 대중이 현실을 목격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언어 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그는 도시 빈민들이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데, 자신의 사진이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최대한 사실 그대로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조문호, 2013).

 

   조문호의 이러한 태도는 피사체 세계의 외부자 혹은 산책자로서 그들을 관찰하지 않고, 내부자의 시선으로 작업하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그 스스로 피사체 대상과 동질성을 가진 도시 빈민의 위치에서 사진 작업을 하였다. 그러면서 소위 결정적인 순간을 담은 사진 한 장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고, 사진 여러 장이 이루어 내는 전체적인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50mm 표준렌즈로만 촬영했으니, 그 이유는 표준렌즈가 인간의 시선과 가장 비슷한 렌즈라고 생각해서다. 따라서, 그의 사진이 충격적으로 보이면, 그건 그의 사진이 그의 어떤 표현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가 재현한 피사체의 현실 자체가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림1과 그림2 가 그 좋은 예다. 가상의 이미지보다 더 충격적인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만든 이미지에 글을 보태서, 글과 사진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목적은 소위 말하는 예술성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도시 빈민들에게 인간으로 서의 자존감을 회복하게 제도와 문화를 고치도록 호소하는 것이다. 그1 이 실린 블로그에서 조문호는 ‘죽지 못해 산다.' 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말한다. "다들 가족과 즐겁게 지낸 정초에 무슨 놈의 천형의 죄를 지었는지, 지하도의 돌부처가 되어버렸다. 죽느냐? 사느냐? 아무 생각도 없다. 신 이시여! 이제 자리를 바꾸소서. (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5067). 니체가 말하는 신은 죽었다는 언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림2 와 관련하여 그는 "지하철 통풍구에서 몸 말리는 노숙인들"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문호는 이렇게 말한다. “비가 내리면 다들 음습한 곳으로 숨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오들오들 떤다. 비가 그치고 나서야 노숙인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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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은 지하철 통풍구에 드러누워 젖은 몸을 말렸다. 이들도 한때는 교육, 근로, 납세, 국토방위 등 헌법이 정한 4대 의무를 다하던 국민인데, 왜 정부에서 최소한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까?”( 조문호, 2021. 66~7).

 

그림 1
그림 2

  조문호는 자신의 작업에서 작가 든 독자 든, 그 대상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조문호는 전작 《 청량리 588》에서도 그랬듯이,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 즉 집창촌 여성의 삶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일부러 부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의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의 실존적 가치를 드러낼 뿐이다. 형이상학이나 이념을 앞세워, 삶을 의미 있게 꾸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힘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진 행위는 소외 속에서 실존을 부인하는 현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문호 사진의 대상은 그것이 집창촌의 성(性) 노동자 든 동자동과 서울역 앞 도시 빈민이든, 현대성에서 벗어난 혹은 적응하지 못한 자유 정신을 지닌 사람이다. 조문호는 그들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면서 함께 살았다. 청량리 집창촌을 작업하면서, 그는 마음과 정 뿐 아니라 몸까지 바쳐가면서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 결과 성병에도 걸리고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이념이나 관념이 아닌 몸으로 사는 삶을 살고,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사진가라면, 니체식으로 볼 때, 몸의 예술가 즉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라 할 수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 했다.》에서 몸을 경멸하는 형이상학자를 비판하며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가치 전도를 실행하고, 몸을 사유의 중심으로 설정한다. 조문호가 특히 ‘창녀’ 와 ‘거지’ 와 같은 몸의 삶을 사는 소외계층의 삶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은 니체의 주류에 대한 저항으로 서의 위버멘쉬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니체는 예술과 삶이 본질적으로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춤의 예를 들면, 우리가 아름 답다고 규정한 외적인 기호에 따라 실행되는 춤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관객과의 일체감을 이끌지 못한다면 진정한 춤의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이루는 여러 외적 요소가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몸의 운동과 결합하지 않은 음악은 결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이러한 니체의 예술론을 사진에 대입해보면, 몸과 함께 나온 삶의 사진이라 야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 결과물로서, 외형적 아름다움으로 서 사진이 아니고, 삶 속에서 삶을 작업하는 사진이라 야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일 뿐이라서, 그 자체로서는 니체가 말하는 예술작품이 될 수 없지만, 사진을 작업하는 조문호의 삶 자체로서 의 작업은 몸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내용으로 인해 작품으로서 의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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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하는 것이다. 사진은 그것이 기록적 의미의 성격이 강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든, 해석이나 예술을 지향하는 소위 작품성이 강한 사진이든 모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게 우선인데, 이는 철저한 데카르트식의 이성 중심의 혹은 니체 말 대로 하면 ‘탈감각화’ 의 소산이다. 조문호는 이러한 이성 중심의 상징과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는  찍힌 분들이 좋아하는 사진이 더 우선이라고 분명히 한다. 그들의 “취향을 일일이 알 수가 없어, 모든 사진을 올릴 뿐이다. 또한 내가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방법이기도 하고...빨랫줄 사진도 내가  좋아하는 사진보다 그들이 좋아할 사진이나 영정 사진을 뽑는다. 사진의 작품성 운운하는 웃기는 소리 제발 하지 마라. 내 사진은 예술이나 작품이길 단연 거부한다.”( 조문호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4720). 기존의 근대 미학에서 형식 가치를 중심으로 작품성을 평가하는 이성적 행위에서 벗어나, 니체가 중요시하는 행위와 감각을 중심으로 보면 조문호의 도시 빈민 다큐멘터리 사진은 매우 니체가 평가하는 역동적 예술이라 할 만하다.

 

   니체가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사회 안의 소위 문명인들에게 어떤 초월적이거나 도덕적인 기준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탈 사회적이고 탈규범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를 안일하게 벗어나는 일탈이나 정립된 도덕을 위반하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고, 주체적으로 도덕이나 규범을 어기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조문호가 .처음 사진에서 그러한 의미를 찾은 것은 소위 청량리 588 윤락녀를 통해서 였다. 그들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감각적 욕망이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한 몸의 행위로 몸을 판 사람들이다. 그. 행위는 기존의 사회 도덕과 충돌하였으니, 사회에서는 그들을 윤리를 타락시키는 여자 즉 윤락녀라고 규정했다. 그들 소위 윤락녀와 마찬가지로 조문호가 현재 작업하는 도시 빈민도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의 규범과 충돌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행하는 탈사회적 혹은 반사회적인 행위를 니체의 숭고 혹은 위버멘쉬 개념으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행위를 기록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예술 행위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의 예술은 사회의 어떤 기준이 되는 통념을 위협하고, 그 한계를 폭로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문호는 그들의 몸 행위를 사진으로 기록하였으니, 니체의 디오니소스 예술론 위에서 행한 예술 행위로 의미 를 부여할 수 있다.

 

Ⅲ. ≪ 동자동 사람들 ≫ 작업의 위버멘쉬적 성격

    조문호 사진의 제 성격은 1) 대상을 촬영할 때 자신의 주관적 시선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배제하는 것이다. 근대 미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주관성 혹은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다. 이를 니체 예술론으로 말하자면, 아폴론적 예술성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진은 대상을 주체로 전환하고, 그 대상이 스스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되, 독자가 모호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여, 주체가 자기 존재 의미를 분명 하게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재현한다. 그러한 사실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로 자신이 소망하는 세상 즉 도시 빈민이 인간적으로 존중 받도록 세상을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3) 그렇다면 그의 사진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결과물 이미지의 심미성 하나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그 이미지를 둘러싼 세 주체 즉 대상, 사진가, 독자가 맺는 총체적 관계를 이해하고, 그 위에서 평가해야 한다.

 

3) 실제로 그는 2000년에 빚더미에 눌려 자살하는 동강 주민들의 이야기를 적은 편지와 포토 에세이집 《동강 백성들》을 김대중 대통령께 보내 농민들이 보상받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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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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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총체적 관계는 그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것을 사용하는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조문호 사진의 총체적 관계는 노숙인이라는 도시 빈민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사진은 해석이 무한 허용되는 매체라 사진가가 대중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주도록 대상을 스트레이트로 찍고, 텍스트와 함께 제시하는 방식이 적절하다. 이에 대해 조문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으로 말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적 기록만을 고집해 왔다. 사진 최고의 가치는 허상을 좇는 게 아니라 진실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변함이 없다.”(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6447) 조문호는 사진 이미지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에 가깝게 찍으려 하기에, 대부분 대상을 구도 중앙에 위치한다. 일부만 도려내거나 일부를 강조함으로써 의미를 전유하는 촬영 방식은 취하지 않는다. 대상에게 다가가서 사진을 찍는다는 걸 피사체에게 알려주고 찍거나 ( 그림3)  그 이전에 이미 라뽀가 형성되어 있어서, 특별하게 말로 알릴 필요가 없이 찍고, 그 사실을 알린다. 서로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이라 공감 받고, 승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사진가와 피사체 대상 사이에 신뢰의 관계를 만들고, 그 위에서 그들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나게 촬영하는 것이, 그의 사진이 갖는 관계성이다.

 

그림3

   조문호는 동자동 쪽방촌으로 들어가 도시 빈민을 작업한 6년 동안, 그 스스로 도시 빈민의 일원으로 그들과 함께 살았다. 따라서 그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휴머니즘으로 대상에게 다가가서 찍어야 하니, 촬영 이전에 인간적 관계 형성을 먼저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요할 때는 상대의 양해 아래 연출 없이 촬영해야 하고, 찍히기 싫어 하는 사람은 찍지 않고, 대상 몰래 찍지도 않는 사진가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라뽀를 형성할 수 있었고, 항상 그가 사진의 생명이라 간주하는 눈을 마주 보면서 찍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진의 태도에서 그는 2022년에 새로운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새 작업은 서울역 앞 사람들의 영정 사진을 찍는 것이다. 이 작업은 그들이 원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하는 작업 이다. 사진은 그 대상이 원하는 것이 사진가가 원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정 작업을 시작한 연유는 이렇다. “얼마 전 찍은 사진을 당사자에게 주었더니, 이런 사진 말고 얼굴만 크게 나오도록 찍어 달라는 것이다. 아마 방에 걸어 두었다가 영정 사진으로 활용할 생각인 것 같은데, 그들 생각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개인적 목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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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 기록성보다 당사자의 필요성이 더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6640). 그림4가 바로 그 영정 사진이다.

 

그림4

    조문호는 도시 빈민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작업한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미국의 저널리스트로서 뉴욕 슬럼가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삶을 작업한 제이콥 리스(Jacob A. Riss)와 비교할 수 있다. 리스와 조문호는 빈민들이 거주하는 주거지를 중심으로 촬영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리스는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가난, 범죄, 매춘, 질병 등 비도덕적이고, 사회의 악이라 치부되는 여러 현상을 고치고, 부자들이 자선을 베푸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자본주의를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기 위해 그들의 삶의 어두운 면을 드러냈으나, 조문호는 당사자로서 대상의 어두운 부분을 부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조문호의 사진은 미적 감각보다는 사실 제시에 초점을 맞춰,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미지로 서의 성격이 우선이라는 점에서 리스의 사진과 다르다. 이는 리스가 사회운동가로서 대상을 사회 문제 해결 차원으로 다루었지만, 조문호는 그들의 휴머니즘을 우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더 궁극적인 차이는 리스는 뉴욕의 슬럼가에 들어가지 않고 외부인 저널리스트로서 봤고, 그 현상을 외부자적 시선으로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리스는 그들의 삶을 외부에 보이는 가난과 비참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조문호는 그들 내부에 들어가 공동체 일원으로 살았기 때문에 외부 모습보다는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조문호는 리스와는 달리 그들을 대상화 하지 않았다.

 

   조문호는 동자동과 서울역 부근의 도시 빈민을 사회운동의 대상이 아닌 휴머니즘으로서의 관계로 출발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선량한 시민으로만 본 건 아니다. 도시 빈민 연구에 의하면, 도시 빈민 쪽방 주민들이 쪽방촌에 길게는 수십 년을 거주하면서 쪽방 생활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데, 쪽방을 사람이 살만한 동네가 아니라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재단하고 쪽방의 한계를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라고 위안함으로써 떠나지 못한다. ( 김효진, 2009. 76).       

   사진가 조문호는 이러한 이중적 관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따뜻한 정이 있는 관점에서 그들 삶의 사실을 기록하지만, 돈 때문에 자기 이익 때문에 여전히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는 모습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조문호 그 자신도 어느 쪽방 주민에게 카메라를 도둑질 당하기도 했다. 그는 그들이 노동하지 않고 구걸 행각을 일삼는다는 비판에, 그들은 여러 원인으로 정신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아 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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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대사진영상학회 논문집 VOL.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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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대변하지만, 그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진 그들의 모습을 애써 감추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서 라도 그들을 비참하게도 착하게도,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보지 않는 관점을 유지한다. 사진가의 .눈에 비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림 5 는 도시 빈민일지라도 여전히 뭔가를 더 갖고 싶어 하는 물질에 종속된 삶을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버리지도 못하고, 더 이상 쌓아 놓을 수 없는 공간인 데도 어디선가 주워 와 방안에 짐이 쓰레기처럼 쌓인 쪽방촌 사람들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가는 도시 빈민이라고 해서 다 필요 없고,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유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다. 장롱도 있고, 책도 있고, 옷도 수시로 바꿔 입고 싶은 마음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5

   조문호는 그곳 주민들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속고 버림받아 사는 실패자임을 냉정하게 보여주지만,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정을 가지고 산다고 말하는데, 더 무게를 둔다. 조문호는 그들의 삶이 대중의 편견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그들의 삶은 겉으로 볼 때는 비참하지만, 실제로는 차라리 더 인간적이다. 그는 주민들이 쪽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더 좋은 생활환경으로 이주했음에도 쪽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쪽방이 물리적 주거 공간으로 서의 의미를 넘어, 지역주민들과 상호교류를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주민들 간의 유대감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공간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그림 6은 정이 그리워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월세방에서 쫓겨난 노숙인의 집들이' 라는 ’글에서 그들의 정을 쌓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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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구성하는 것은 도취 주관성 자기 망각 등 반(反) 이성이다. 따라서 그 예술은 승화되고, 절제되고 정제된 것이 아니고, 도취 상태에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문호의 《노숙인, 길에서 살다.》 첫 페이지에 들어간 사진은 그림 7 이다. 술에 취해 길거리에 널브러진 모습을 하나의 과장이나 자극없이, 할 수 있 는 한 있는 그대로 찍었다. 그리고 그들을 “모든 희망 버리고 떠날 준비가 됐다. 서울역 후미진 곳에서 천국 행 열차를 기다린다." .( 조문호, 2021. 22)고 글로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진가 조문호가 그들을 부랑아, 쓰레기 같은 사람들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천국’ 은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를’ 통한 위버멘쉬의 개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이 사회가 정한 질서에서 일탈해, 사회로부터 고통받고 있다는 개념으로는 연결이 가능하다. 조문호의 작업은 노숙인의 원초적인 힘을 끄집어내기 위해 예술로서 하는 차원의 작업이라 고는 할 수 없고, 그가  하는 사진을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고 전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다만 니체의 예술론이 설파하는 위버멘쉬의 개념과 정신은 조문호가 하는 작업과 그의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림7

    조문호가 사회로부터 핍박 받으면서 고독과 소외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도시 빈민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정해 놓은 질서 안으로 들어와 복종하도록 강제하고, 그들은 그러한 강압에 쓰러진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통의 뿌리는 다름 아닌 고독과 소외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조문호는 요즘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은 없고, 동물조차도 먹이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육체적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소외와 고독이라고 말한다. 사진가는 노숙인 최씨의 목소리를 글로 전한다.  “ 제발 우리를 괴물 보듯 피해 다니지 마라. 우리도 .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느냐고 묻지도 마라. 그. 말은 네가 잘 못 살아 그렇게 됐다는 나무람일 뿐, 개인의 불행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최소한의 잠자리와 일자리, 그리고 치료받을 권리다. 그건 모든 국민이 똑같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다." (조문호 , 2021. 38) 니체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철학자가 보는 당위성의 문제고, 실제 세상에는 쓸모없는 존재는 처절히 버림받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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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진가가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 즉 휴머니즘이 사라진 세상은 니체가 가장 열성적으로 비판한 주제다. 니체가 말하는 그 사람이 사라진 세상은 곧 고독사의 세상이다. 동자동 도시 빈민이 고독사 하는 것이 한 해에 수백 명이 넘는데,  그림 8은 니체의 그 도시 빈민의 고독사를 나타낸 사진이다. 도시 빈민으로 죽은 사람을 위한 추모제를 매년 동짓날 지내는데, 연고를 찾지 못하는 가족과 모든 관계로부터 버림받은, 그래서 영정 사진 하나 가지지 못한 세태를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후 조문호는 지금 쪽방촌 주민 가운데 원하는 사람에게 영정 사진을 찍어주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사진가의 이러한 태도는 예술이란 사랑이나 정신의 고양 차원에서 가 아닌, 몸으로 대할 때 비로소 예술성을 갖는다는 니체의 예술론에 부합하는 태도다. 조문호가 노숙인을 기존의 지배 담론에 대한 저항의 한 모습으로 해석한 것은 이러한 몸, 삶을 살아가는 것을 긍정하는 맥락에서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미쳐야 사람 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그들을 미치지 못해 천국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조문호 .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6347)

 

그림8

  사진가 조문호가 도시 빈민에 대한 각급 정부 당국이나 교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의 자선 행위는 약자 보호를 명분으로 삼지만, 사실은 그들을 울타리에 가두고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조문호는 《노숙인, 길에서 살다》에 수록된 전체 177장의 사진에서 10퍼센트인 17. 9 장을 그림과 같은 줄 세우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사용했다. 전체에서 가장 많은 장면은, 그 빈민들이 술 먹고 쓰러져 있는 장면으로 22장이 사용되었다. 책의 마지막 본문의 사진 또한 줄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사진으로 썼고, 바닥에 나뒹구는 그림 7을 책의 첫 사진으로 사용하였다. 사진가는 노숙인의 삶을 버림받음과 줄 세우기라는 두 코드를 가장 중요한 구성 인자로 생각한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포기의 삶을 사는 그들의 모습은 사진가 조문호 아닌 일반인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줄 세우는 것을 사육 당하는 걸로 해석하여 그에 반대하는 것은 조문호가 니체의 세계관에 서서, 세상이 온정을 베풀면서 그들을 사육 시키려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조문호의 이러 한 관점은 공동체 문명을 건설하기 위해 사람을 평준화를 통해 가축처럼 길들이는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니체의 입장과 같다. 조문호는 이렇게 말한다. “쪽방촌에 살다 보니, 가끔은  '레이더스' 가 부른 '인디언 보호구역' 이 떠오른다. 쪽방촌이 마치 빈민 보호구역 같다는 생각 에서다. '보호한다' 는 긍정적인 뜻 이면에는 '길들인다' 는 측면도 깔려 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사람을 사육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빈민들은 보호보다 자립할 수 있는 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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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어 주는 게 더 급하다. 수입만 생기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잘리니,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막은 것이다. 그러니 다들 . , 일하지 않고, 주는 것만 받아 간신히 연명하는 것이다. 난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죽어도 사육 당하기는 싫다.  ( 조문호블로그 https://mun6144.tistory.com/4151). 인간 삶의 자기 고양을 위해 소외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독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한다는 태도가 니체의 세계관과 같다. 조문호가 인용한 노숙인 천씨가 뱉어 낸 말 "세상을 원망하랴! 마누라를 원망하랴.!’( 조문호 2021, 173)라고 말하는 건 전형적인 니체의 아모르 파티, 즉 삶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겪으면서 앞으로 가야 한다는 니체의 세계관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림 9

Ⅳ. 맺음말

   조문호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최대한 사실적인 사진으로 재현하여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절감할 수 있게 한다. 니체에게 예술은 실용적인 도구이듯, 조문호에게도 사진은 실용적 도구다. 고통의 사실을 극복해가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는 노숙인의 삶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정사진을 찍었다. 그들의 사정을 몸소 체험하면서, 그들의 삶을 사진으로 찍어 사회에 호소하였고, 찍은 사진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고 책으로 제작하였을 뿐, 대상의 조형미를 강조하면서, 각각의 이미지를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작품으로 전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할 뿐, 리얼리티를 더 높이기 위한 표현력을 부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했고, 달리 소비되는 것을 경계했다. 조문호에게 부랑자, 노숙인, 매춘녀 등은 니체 예술론에서의 광기의 존재라 할 수 있다. 그. 광기의 인간을 그들이 사는 내부로 들어가 내부자의 시선을 가지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게 조문호 작업이다.

 

    니체의 예술론 위에서 사진 이미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조문호의 사진은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사진은 조형 이미지이니 아폴론적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재현적 모방이 관조나 절대적 아름다움이나 사실주의 등 아름다움과 예술을 설명해주던 기존의 기본 장치들을 토대로 할 때는 그 의미를 상실하겠지만( 백승영, 2014. 61), 조문호의 도시 빈민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에 드러나듯, 미적 체험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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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체험을 정신적 차원의 것에서, 인간의 총체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면, 니체의 예술론 특히 위버멘쉬 개념과 부합되면서, 그 안에서 총합적 예술의 의미를 창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문호의 .사진은 비록 재현이지만, 관조나 순수의 개념으로 만드는 아름 다움의 재현이 아니고, 총체적 행위의 의미로서 행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니체의 디오니소스 예술의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문호는 형식주의 미학을 따르지 않는다. 사진 이미지 그 자체보다는 사진을 찍는 행위와 그에 대한 접근 태도, 즉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도구적 성격으로 서의 행위를 중시한다. 이성 중심의 형식주의와 개념화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로부터 탈피를 추구하는 것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시작된 니체의 철학은 예술과 삶의 전통적 분리를 지양하고, 예술이 아름다운 가상으로서 삶 위에 군림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면서, 예술은 인간이 겪었던, 그리고 겪을 수 있는 고통과 같은 문제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진우2014.16). 조문호의 작품은 이러한 니체의 몸 중심의 예술 작업의 산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문호가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동자동 쪽방촌과 서울역 부근에 사는 도시 빈민은 세상의 경쟁에서 낙오되었으나,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 않고, 말년의 니체처럼,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나와 소외와 고독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사진가 조문호 또한 한 가정에 정착하지 않고 자식과도 거리를 둔 채, 사진가로서 삶을 평생 살았다. 니체에게 외적 풍요는 내적 궁핍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원초적 힘을 끄집어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전적으로 예술이 필요하다 했으니, 그에게 예술은 조형화 된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했다. 조문호는 노숙인의 원초적인 힘을 끄집어내기 위해, 예술로서 하는 차원의 작업이라 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그가 하는 사진을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 작품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위버 멘쉬 를 통한 디오니소스 예술로 서의 행위에 따른 작업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사 로슬러(Martha Rosler)가 말하듯 이제 사진은 의미를 미학화, 결과적으로 형식화 하고 배경이 되는 상황과 정치적 차원의 존재를 부정하는 궤적을, 그리고 그 안에서 이미지와 살아 있는 세계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면 (로슬러 , 2002. 367)  조문호의 도시 빈민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은 니체의 예술론을 바탕으로 형식주의와 예술을 위한 예술과 같은 파편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와 상황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이고, 개체를 전체 속 존재로 위치시키는 것이면서 사진을 심미적 결과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조문호의 작업은 서사 안에서 각각의 이미지는 독립적인 예술작품이 아니고 전체가 하나로서 통합하여  인간 실존의 의미를 지향하는 작업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인간을 주체적으로 봐야 한다는 니체의 실존주의가 서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

 

참고문헌

[1] (1998) 강영계 「니체의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인문과학논총』 제 31집 .

[2] (2009) 김효진 『 영등포 쪽방촌 주민들의 삶과 도시 빈민 공간으로 서의 기능』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 논문.

[3] (2004)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민음사

[4] (2016) 니체 『비극의 탄생』 서울: 동서문화사.

[5] (2002) 니체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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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가 니체 대 바그너 』 서울 책세상,

[6]  (2007), 단토 아서 김지원 옮김, 「예술 세계란 무엇인가 」, 『예술과 미학 』 서울 , 종문화사

[7]  (2002) 로슬러 마사 「다큐멘터리 사진론, 그 속에서 그 주변에서 그리고 , 그 후에 」리차드 볼턴 엮음, 김우룡 옮김,

      『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서울: 눈빛

[8]  (2007) 머골리스 조셉 「예술작품의 존재론적 특성」 김지원 옮김, 『예술과 미학』 서울: 종문화사

[9]  (2016) 박상우 「롤랑 바르트의 사진 수용론 재고, 현대미술학논문집' 제20  2호

[10] (2014) 백승영 「니체가 제시한 미적 정의, 예술생리학과 법철학의 융합을 통한 법 미학 가능성 제고' 니체연구제26집 

[11] (2011) 사코우스키 존,『사진가의 눈』 서문, 김우룡 엮음 『사진과 텍스트』 서울: 눈빛

[12] (2011) 이기중 「사진 인류학의 연구 방법론」, 『 비교문화연구 제 17집 』  2호

[13] (2014) 이진우 '니체 몸 그리고 춤추는 사유' 니체연구 제 25집 

[14] 조문호 '역사성으로 본 보도 사진' '월간 이미지' 2003년 4월 1일 ’ .

[15] (2015) 1984-1988 : 조문호 『청량리588』 서울: 눈빛

[16] (2021) , 조문호 『노숙인 길에서 살다』 서울: 이숲

[17] 조문호 블로그 '인사동 사람들' 동자동 쪽방 사람들 https://mun6144.tistory.com/category/%EC%A1%B0%EB%AC%B8%ED%98%B8 %EC%82%AC%EC%A7%84%ED%8C%90/%EB%8F%99%EC%9E%90%EB%8F %99 %20%EC%AA%BD%EB%B0%A9%EC%82%AC%EB%9E%8C%EB%93%A4

[18] (2002) 크라우스 로잘린드 「사진의 담론 공간들」 리차드 볼턴 엮음, 김우룡 역

        『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울: 눈빛

[19] (2002) 필립스 크리스토퍼 「사진을 판결하는 자리 – 뉴욕현대미술관」, 리차드볼턴 엮음, 김우룡 역

        『의미의 경쟁: 20세기 사진비평사』 서울: 눈빛

[20] (2015) FOUND 최인희 『조문호 인터뷰 그래도 사람』 ’, 2015. 4. 15.

[21] (2014) 홍일희 「니체 예술적 보편성과 철학적 독자성」, 『범한철학』제74 집

[22] Tagg, John (1993) The Burden of Representation; Essay on Photographies and Histories; Essay on Photographies           and Historie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지난 6월30일 오후 4시무렵 이광수 교주께서 쪽방촌 성지순례 나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필이면 녹번동 파출부로 나가는 금요일이었다.

 

그날은 월말이라 ‘서울아트가이드’ 얻으러 인사동도 들려야 하고,

맡겨놓은 초상 사진 찾으러 충무로도 가야 해 오후 1시부터 서둘렀다.

안국역에 도착할 무렵 이광수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일이 빨리 끝나, 서울역 11번 출구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큰일 이었다! 시원한 곳에서 잠시 기다리라 했으나 마음은 바빴다.

 지하철을 탔으면 빨랐을 텐데, 마음이 급해 택시를 잡아탔으나 차가 밀려 더 늦었다.

 

간신히 후암동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가 작동되지 않았다.

페이스북아나 내비는 안 되지만 거는 전화는 잘 되는 핸드폰인데,

전화가 걸리지 않아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선 자리에서 담배를 세 대나 피우며 우왕좌왕하는판에 이교주가 나타났다.

시원한 곳에서 기다리지 않고, 그때까지 지하철 입구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 날따라 날씨는 얼마나 더운지 얼굴이 빨갛게 익었더라.

미안해 죽을 지경인데, 시원한 커피집에 안 가고 방으로 가잖다.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계단은 마치 저승가는 계단 같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내린 계단을 4층까지 올라간 것이다.

급히 방문을 열어 선풍기를 돌렸으나, 더운 바람이 감겼다.

 

삼층 사는 박씨 아지매는 계단을 기어 오른다.

수행하는 것 처럼, 덥고 비좁은 방에서 몸으로 느끼며 쪽방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유튜브 강의 촬영하러 상경하는데,

출발하기 전 페북 메시지로 빨리 간다는 연락을 했다지만,

컴퓨터에서만 페이스북을 볼 수 있으니, 알 리가 없었다.

두서없는 쪽방촌 이야기를 했으나, 더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20분쯤 수행하다 내려왔는데, 시간이 어중간했다.

기어이 맛있는 고기를 사 주겠다며 고깃집을 찾았는데, 대개의 식당이 쉬는 시간이라 문을 닫았다.

돌고 돌아 찾아간 집이 ‘서래갈매기’란 고깃집인데, 처음 가 본 식당이었다.

손님 없는 텅 빈 식당에서 고기를 구워, 지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을 마신 것이다.

 

이교주와 여러 차례 술자리를 했지만, 단둘이 앉아 마신 술은 처음이었다.

오래전 최민식 사진상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찍소리 못하는 썩은 사진판에 가슴이 뻥 뚫렸다.

 

시건방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광수씨나 황정수씨,

그리고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안애경씨 같은 분이,

각 분야 열 명만 리드가 되어도 국민의 삶의 질은 물론 가치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오래 전 부터 교수가 아니라 교주로 깍듯이 모셨다.

나처럼 한번 물면 안 놓는 성질도 비슷했다.

 

옛날 사진계 이야기가 안주였으나, 다 부질없는 이야기였다.

기록사진을 아카이빙할 민간단체 설립의 절실함도 말했고,

스승 최민식선생에 대한 기록물을 제작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 관한 논문이 니체와 닮았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딴 약속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선물로 담배까지 사 주었다.

가게에 담배가 몇 갑 없으면 있는 대로 사지, 기어이 다른 가게를 찾아 한 보루를 샀다.

찾아 준 것만도 황송하지만, 까발겨 두들겨 맞을 논문이 걱정이다.

아무튼, "억수로 고맙습니다.”

 

교주가 떠난 후 발동이 걸려 ‘새꿈공원’으로 담배 자랑하러 가다 이병호씨를 만났다.

그 양반은 담배보다 술이 더 절실하지만, 담배 밖에 줄 수 없었다.

알콜중독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준기씨가 날 나무란다.

“형님은 사진값도 안 받으면서, 돈은 왜 쓰냐?”는 것이다.

내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길래, 꺼내 보니 만 원짜리 두 장이 있었다.

“문디 코구멍에 마늘을 빼먹지! 니 돈 묵고 내가 편하겠나?”

소주 한병 콜라 한 병 사고 남은 돈을 돌려주니, 씰데 없는 소리란다.

“날 우째 보고 그라요. 내가 준걸 다시 받것소. 사나 가오가 있지”

그래, 요즘 가오 있는 놈이 드물어 보호종으로 정한다는 소문은 들었다

 

" 보호종 개 목걸이 쟁취를 위해 “투쟁!”

 

사진,글 / 조문호

 

 

 

브레송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아홉 번째 작가인 강제욱지난 21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김남진 관장이 기획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해 8월 양승우씨를 그 첫 번째 사진가로 내세우며 시작되었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가 작가론을 쓴 본 기획전에는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 서준영, 최치권, 모지웅, 박찬호, 강제욱씨 등 모두 아홉 명이 선정되었다.

매월 한 차례씩 한 작가의 지난 사진에서 부터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전체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시대의 목격자로서 인간 중심의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며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진가에 초점을 맞췄다.

 

마지막 작가로 참여한 강제욱씨는 ‘The Lost Land’, ’‘민국(民國) 100’, ‘The Wall’, ‘The Planet’, ‘Thinguniverse’

20여 년 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주었다.

 

사진가 김영호씨의 사회로 시작된 강제욱개막식에는 부산에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의 사진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

 

강제욱은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찾는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시간 속에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 버린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사진의 시간 속에서 재현하고 있다.”

명쾌한 이교수의 강의는 귀머거리에 가까운 내 귀에도 속속 들어왔다.

 

강의가 끝날 무렵, 사진가 김문호씨가 이번 기획전에 대한 전체 평가를 물었더니,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을 점검할 좋은 기회였다며,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고 독한 사진이 많았다고 한다.

관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변사가 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고 넘어갔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밋밋한 화면에 변화를 주어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이겠으나,

마치 유행처럼 너도 나도 어둡고 자극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어법에 고민하며, 진정성 있는 접근이 우선돼야 할 것 같다.

 

이어 강제욱 작가가 나와 작업에 대한 과정과 앞으로의 지향점을 들려주었고, 기획전을 마무리하는 김남진 관장의 소회도 들었다.

 

아무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기획전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의 얼개를 살펴볼 수 있는 장이었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두루 돌아보는 좋은 전시였다.

내 눈에는 첫 전시였던 양승우론과 두번째 강재구론, 그리고 마지막 전시인 강제욱론이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는 430일까지 이어진다.

 

김남진 관장의 노고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시종일관 작가론을 써가며 먼 길을 오간 이광수 교수의 노고와 열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진계에 보석 같은 존재다.

 

지난 2016년에는 매달 두 차례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 주요 사진가를 인터뷰하여 작가론을 쓰고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듬해 결과물로 한국현대사진가 열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눈빛출판사에 펴내기도 했다.

 

카메라는 칼이다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로 강정효, 권 철, 신동필, 최영진이 참여했고,

2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는 김문호, 김보섭, 문진우, 이재갑, 이영욱, 조문호가,

3부인 파인아트 에는 고정남, 이수철의 사진을 논했다.

 

그 외에도 인도 사진가 일곱 명과 최민식선생을 비롯한 한영수, 김기찬, 이주용, 이재갑, 노순택, 조문호 등

국내 사진가 일곱 명의 논문을 마무리하여, 곧 두 권의 논문집도 출판한단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진학자들이 잘 알려진 외국 사진가들만 반복해가며 짜깁기하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광수씨는 부산외국어대학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정년을 일 년 가까이 남겨두고 있다.

전공인 인도사는 물론 정치평론에서 사진 비평에 이르기까지 팔방미인인데,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 비평에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그침 없는 바른 말에 주눅 들어, 이단아처럼 기피 하는 기득권 세력도 있다.

끼리끼리 사진판을 좌지우지해 온 그 자들의 짓거리가 더 웃긴다.

 

강제욱론 전시 개막식에 함께한 사진가는 김문호씨를 비롯하여 이윤기, 정영신, 김영호, 정윤배, 나인석,

김동진, 서준영, 모지웅, 최치권, 오철민, 고옥룡씨 등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이광수씨는 인도사 유튜브 강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왔다는데, 일이 끝난 후 나에게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또 뒷북을 쳤다.

페북은 컴퓨터에서만 볼 수 있어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뒤풀이는 충무로 김삼보에서 했는데, 모처럼 반갑고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이교주의 통쾌한 구라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술자리에서 최민식선생 아카이빙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모처럼 최민식 선생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무리한 내 사진 논문은 철학자 니체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했다.

니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거나 신은 죽었다정도밖에 모를 정도로 무식한데, 어떻게 관련 있는지 공부 좀 해야겠다.

무려 2년에 걸쳐 논문을 썼다는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밤 열시 무렵에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몇몇은 맥주집으로 이차를 간단다.

매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먼 길을 달려와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고맙고, 안 서러웠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열어보니, 페북에 이광수씨의 글이 올라왔다.

부산 가면서 취중에 올린 글 걑은데, “진짜 내가 오래살아야 한다.”란 열한 자가 적혀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맞는 말이다. 그가 없으면 한국 사진의 미래는 없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조문호

 

 

[2023.4.22작성]

 

브레송 기획전,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아홉 번째 강제욱이 지난 21갤러리 브레송에서 개막되었다.

 

김남진 관장이 기획한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우리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지난해  8월 양승우씨를 그 첫 번째 사진가로 내세우며 시작되었다.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가 작가론을 쓴 본 기획전에는 양승우씨를 비롯하여 강재구, 김동진, 김은주, 서준영, 최치권, 모지웅, 박찬호, 강제욱씨 등 모두 아홉 명이 선정되었다. 매월 한 차례씩 한 작가의 지난 사진에서 부터 현재 작업에 이르기까지 전체 작품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시대의 목격자로서 인간 중심이라는 기본적인 정신을 계승하며 사회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진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지막 작가로 참여한 강제욱씨는 ‘The Lost Land’, ’‘민국(民國) 100’, ‘The Wall’,  ‘The Planet’, ‘Thinguniverse’ 20여 년 동안의 작업을 주제별로 보여주었다.

 

사진가 김영호씨의 사회로 시작된 강제욱개막식에는 부산에서 올라 온 이광수교수의 시원한 사진비평이 있었다.

 

강제욱은 역사를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찾는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우연과 감성의 시간 속에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 버린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사진의 시간 속에서 재현하고 있다.” 명쾌한 이교수의 강의는 귀머거리에 가까운 내 귀에도 속속 들어왔다.

 

강의가 끝날 무렵, 사진가 김문호씨가 이번 기획전에 대한 전체 평가를 물었더니,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을 점검할 좋은 기회였다며,

사진이 너무 자극적이고 독한 사진이 많았다고 한다. 관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변사가 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한바탕 웃고 넘어갔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밋밋한 화면에 변화를 주어 시선을 끌기 위한 방법이겠으나, 마치 유행처럼 너도 나도 어둡고 자극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만의 어법에 고민하며, 진정성 있는 접근이 우선돼야 할 것 같다.

 

이어 강제욱 작가가 작업에 대한 과정과 앞으로의 지향점을 들려주었고, 기획전을 마무리하는 김남진 관장의 소회도 들었다.

 

아무튼,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기획전은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사진의 얼개를 살펴볼 수 있는 장이었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두루 돌아보는 좋은 전시였다.

내가 보기로는 첫 전시였던 양승우론과 두번째 강재구론, 그리고 마지막 전시인 강제욱론이 인상적이었다. 

이 전시는 4월30일까지 열리니, 시간나면 한 번 가보시라.

 

전시를 추진한 김남진 관장의 노고야 말할 것도 없지만, 시종일관 작가론을 써가며 먼 길을 오간  이광수 교수의 노고와 열의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열정적인 분으로 우리나라 사진계에 보석 같은 존재다.

 

지난 2016년에는 매달 두 차례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국내 주요 사진가를 인터뷰하여 작가론을 쓰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듬해 결과물로 한국현대사진가 열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카메라는 칼이다눈빛출판사에 펴내기도 했다.

 

카메라는 칼이다1부는 시대와 시간을 기록하다로 강정효, 권 철, 신동필, 최영진이 참여했고, 2사람과 역사를 바라보다는 김문호, 김보섭, 문진우, 이재갑, 이영욱, 조문호가, 3부인 파인아트 에는 고정남, 이수철의 사진을 논했다.

 

그 외에도 인도 사진가 일곱 명과 최민식선생을 비롯한 한영수, 김기찬, 이주용, 이재갑, 노순택, 조문호 등 국내 사진가 일곱 명의 논문을 마무리하여, 곧 두 권의 논문집도 출판한단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제대로 된 국내 사진가론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진학자들이 잘 알려진 외국 사진가들만 반복해가며 짜깁기하지만, 정작 국내 사진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밑천이 짧아 그런걸까?

 

이광수씨는 부산외국어대학에서 인도사를 연구하는 교수로 정년을 일 년 가까이 남겨두고 있다. 전공인 인도사는 물론 정치평론에서 사진 비평에 이르기까지 팔방미인인데, 사진으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진 비평에 힘을 쏟고 있다.

그의 그침 없는 바른 말에 주눅 들어, 이단아처럼 기피하는 기득권 세력도 있다. 끼리끼리 사진판을 좌지우지해 온 그 자들의 짓거리가 더 웃긴다.

 

강제욱론 전시 개막식에 함께한 사진가는 김문호씨를 비롯하여 이윤기, 정영신, 김영호, 정윤배, 나인석, 김동진, 서준영, 모지웅, 최치권, 오철민, 고옥룡씨 등 많은 분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이광수씨는 인도사 유튜브 강의 동영상을 찍기 위해 일찍부터 왔다는데, 일이 끝난 후 나에게 페북 메시지를 보내왔으나, 또 뒷북을 쳤다.

페북은 컴퓨터에서만 볼 수 있어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뒤풀이는 충무로 김삼보에서 했는데, 모처럼 반갑고 즐거운 술자리가 되었다.

이교주의 통쾌한 구라에 술이 술술 넘어갔다.

 

술자리에서 최민식선생 아카이빙을 위한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모처럼 최민식 선생의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번에 마무리한 내 사진 논문은 철학자 니체와 관련이 있다는 말도 했다.

니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거나 신은 죽었다정도밖에 모를 정도로 무식한데,

어떻게 관련 있는지 공부 좀 해야겠다.

무려 2년에 걸쳐 논문을 썼다는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밤 열시 무렵에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몇몇은 맥주집으로 이차를 간단다.

매번 아무런 대가도 없이 먼 길을 달려와 애쓰시는 모습이 너무 고맙고, 안 서러웠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와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열어보니, 페북에 글이 올라왔다.

부산 가면서 취중에 올린 글 걑은데, 진짜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다.”란 열한 자가 적혀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맞는 말이다. 그가 없으면 한국 사진의 미래는 없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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