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서술한 인간 속성에 관한 문학 “따마스”(인간은 악이다)가 ‘눈빛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총 열두 챕터로 나누어진 첫 장의 제목은 '태초의 바다'이고 마지막 장의 제목은 '따마스‘ 인간은 악이다.

그 사이에 열 개의 장이 있는데, 각 장의 제목을 통하지 않고는 각각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넓은 의미로는 다큐멘터리 사진집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미지로 읽는 역사고 문학이다.

 

일단 그 책에 실린 사진들을 살펴보면 사진의 형상보다 색감이 갖는 운동성에서 강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 운동성을 지닌 이미지의 힘이 보는이로 하여금 사유의 늪으로 끌어들이게 만든다.

각자 나름의 세계를 해석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 스토리텔링은 각 사진 한 장 한 장이 단편적으로 갖는 지시성과 그 위의 의식이 차지하는 바도 중요하지만,

옆 사진 혹은 다른 사진과 어우러져 메시지가 연결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전시형식으로 열린 특강에서 저자가 실제로 사진을 옮겨가며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중요한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특정 인간이 특정 사회에서 행한 행위를 산문으로 기록한 것이 역사라면 고대 인도에는 역사가 없다.

그들은 인간의 행위를 기록하지 않고 신의 행적을 시로 노래했으니,

그건 역사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일 뿐이다.

그들은 시로 역사를 서술하고,신의 이야기로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했으니,사진에서 말하는 이미지 전유다.

 

사진집을 접한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보고 또 보고,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며 무작위로 이미지 끼리 연결하며 관찰하다 보니

어렴풋이 나만의 이야기가 정리되었으나, 객관성은 있는지 모르겠다.

 

책에서 이미지를 여러 차례 살펴 보았지만, 신전처럼 사진을 늘어놓은 전시장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오래전 성행한바 있는 여러 장으로 엮는 연작사진이 단편이라면, '따마스'는 장편인 셈이다. 

 

어제는 책 리뷰를 쓰려고 '따마스'사진집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칙칙한 붉은 색의 이미지들이 주는 느낌에서 욕망으로 들 끓는 인간의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정말 인간의 욕망이란 무서웠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자가 '따마스'처럼, 이미지로 스스로의 사유를 엮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작품집 제목 '따마스'처럼, 진짜 인간은 악이다.

 

사진으로 말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신선한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사진인은 물론 사진에 관심 있는 모든 분이 보아야 할 사진문학이다.

 

'따마스(tamas)'는 산스끄리뜨 어휘다. 힌두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한 분파 철학인 상키야 (Sankhya)학파에서 말하는 인간의 세 가지 본질 속성 중 하나다. 그 고대의 현자라 불린 그 사람들은 인간은 따마스 즉 어둡고, 무기력하며, 무관심한 속성을 갖는데, 도를 닦고, 열심히 노력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이후 또 노력하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 궁극의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전형적인 이원론의 세계 안에서 사회 안정에 이바지한 도덕 목적 담론이다. ,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 일부 동의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속성은 따마스다. 그들이 보았듯, 나도 그렇게 본다. 그렇지만, 그 따마스, 악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과실이 열린 듯 보이지만, 뿌리는 여전히 따마스다. 인간이기에 그렇다. 밝음도 결국 어둠으로 가고, 삶도 결국 죽음으로 간다. 열정도 무기력으로 가고, 사랑은 미움으로 간다. 해탈이란 없다. 해탈로 보이지만, 마야()일 뿐, 본질이 아닌 이미지일 뿐이다. 해탈은 욕망이고, 욕망은 배신이며, 배신은 보복이고, 보복은 저주이다. 모든 것이 하나인 일원론의 세계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왜 이미지로 말하려 하는지, 그 열린 해석의 세계가 어떻게 따마스로, 그 따마스가 어떻게 '인간은 악이다'로 규정되는지, 사진의 세계에서 말하려 한다. -이광수(서문에서 발췌)-

 

사진,  / 조문호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취재, 기록했던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사진전이 지난13일부터 오는18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열렸고, 19일부터는 “부산식당” 옆에 새롭게 개관한 ‘갤러리 안터’에서 열린다.

 

전시된 사진들은 구와바라 시세이 선생이 일본의 화보 잡지인 태양특파원으로 한국에 왔을 당시인 60년대 사진이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을 찍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천 사진을 비롯하여 민주화 운동의 시위현장과 미군기지촌 여성 등 한국 사진가들이 방치한 우리 사회의 이면사를 깊숙이 기록하여, 사십 여년에 걸쳐 십 만장이 넘는 방대한 사진을 남겼다.

 

제일 눈길을 끄는 사진은 한쪽 전시벽면을 가득 메운 기지촌 주변에서 살아가는 속칭 양공주로 불리는 미군 위안부 사진이었다. 이 사진들은 본 지 오래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가슴이 미어지는 치욕의 역사다.

위안부 문제는 고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로, 당시 중국 채홍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녀를 수천 명씩 데려갔다고 한다. 기력이 쇠진해져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고 해서 환향녀라 불렀다는데, 그 말이 욕설로 쓰이는 화냥년으로 바뀐 것이다.

 

그 이후 2차 대전에 동원된 일본군위안부와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미군위안부에 이르기 까지 전쟁마다 따라다닌 위안부 문제는 여성 최대의 잔혹사였다. 미군위안부를 양공주 또는 양갈보라 불렀던 소싯적에는 허영에 들떠 바람난 여자들로 알았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하고 껌을 짝짝 씹는 화류계 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된 건, 청년 시절 본 신상옥감독의 지옥화라는 양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전시된 미군기지촌 여성들을 살펴보니, 그 자책에 따른 부끄러움에 고개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 뛰어 들었거나 어쩔 수 없이 팔려 온 순박한 우리들의 누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위안부에 대한 자료도 찾아보게 되었고, 그 가슴 아픈 실상에 치를 떨었다.

 

미군위안부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성을 말하지만, 일종의 정신대나 다름없었다. 더 귀가 막힌 사실은 1951년 정부에서 한국군 위안소를 직접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이 한국군 위안소는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하는 사창가였는데, 특수위안대, 5종 보급품으로 불렀다 한다. 그 당시 드럼통에 위안부를 한명씩 넣고 트럭에 실어 최전선까지 투입했다는 기록에는 할 말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들을 달러벌이, 애국자, 민간외교관으로 치켜세워, 62년 한 해 동안 2만 명 이상의 미군위안부가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했다. 65년과 80년 사이는 동두천에만 평균 2,900명의 미군위안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군 천 명당 성병 발병자가 7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병이 창궐하자 성 접촉자를 추적해 속칭 밍키하우스라 불리는 낙검자수용소에 완쾌될 때 까지 감금했는데, 약물을 과다 투여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한 환자가 속출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군에게 성폭행 살해된 사건을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해 용의자인 병사를 출국시켜 수사를 미궁에 빠트리기도 하고, 인신매매로 들어 온 소녀가 탈출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도 경찰이 다시 그 곳으로 데려 주는 등,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도 득실거렸다.

 

그러한 문제점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것은 바로 돈 때문이었다. 1960년대의 기지촌 성매매 수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청와대 관리가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함을 격려 했으며, 1973년에는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만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는 것이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모아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만든 것은 주한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함이란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몸 파는 걸 수출까지 할 수 있는 나쁜 놈들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위정자들 아래 살아왔다는 게 슬프다. 지금도 기지촌 주변에서 할당된 쥬스를 팔기 위해 몸을 파는 위안부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역할을 필리핀 등지의 외국인들이 대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속아서 한국에 들어오고, 미군과 동거해 자식까지 낳아도 본국으로 도망쳐 버리는 미군이 많다고 한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떠한 방법이든 성매매가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의 본능과 자본주의 속성이 만들어 낸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인권이 유린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구와바라 시세이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 그와 같은 비유는 무의미하다. 지나간 버린 하나의 사실과 현장은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지난 15일 보았지만, 충무로에서 따마스전시를 끝낸 이광수교수를 모시고 다시 보러갔다. 마침 전시장에는 구와바라 시세이선생 내외분과 눈빛이규상 대표, 곽명우씨 등 반가운 분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눈빛출판사에서 갤러리인덱스에 이어 개관한 갤러리안터도 구경할 겸, 꼭 구와바라세세이 선생의 다시 돌아본 한국을 감상하시라.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눈빛출판사에서 발간한 구와바라 시세이의 내가 바라본 격동의 한국사진집을 구해 보셔도 된다.

 

사진, / 조문호

새로 개관한 '갤러리 안터'

 

 

 

이광수의 "인간은 악이다"(따마스)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퍼포먼스와 특강이

지난 15일 오후4시부터 충무로 ‘갤러리브레송’에서 열렸다.

 

시간이 임박해 정동지와 전시장을 들렸더니 이광수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이 먼저 와 있었는데,

전시장 분위기가 마치 신전에 온 느낌이었다. 여러 신도가 교주의 가르침을 기다리듯...

 

신전의 깃발처럼 어지럽게 늘린 이미지를 스쳐가며 벽에 붙은 사진들을 돌아보았는데,

이미 사진집에서 보았지만 묵직한 톤의 이미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해진 순서가 없으니, 앞서 본 이미지와 연관되어 그 사진을 다시 돌아보기도 했다.

 

야릇한 사진이 옆 사진과 충돌하여 역류하듯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인간은 악이다’는 인간의 속성이 딱 들어맞았다.

 

첫 장은 '태초의 바다'로 시작되어, 총 12장으로 나누어진 사진집에는

각각 12 컷씩 총 144장의 이미지가 들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힌두교 세계관의 중요한 상징 숫자인 12로 구성했다는데,

각 장의 텍스트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었다.

 

이미지로 쓴 문학이라는 사진의 또 다른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전시에 참가한 분 중에 이광수씨의 부인 유재희씨도 오셨다.

남편의 전시를 보기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교수 말이 걸작이다.

쪽 팔리게 왜 왔냐며, 질의 시간에 손 들어 질문하는 것 까지 탓하는 촌티를 낸다.

 

전시 작가인 이광수교수의 사진에 대한 특강에 이어 참가자들 질의 응답이 끝난 후

충무로 ‘김삼보‘집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이교수를 비롯하여 김남진관장, '눈빛' 이규상대표, 사진가 김문호, 김영호, 성남훈, 정영신,

이윤기, 이세연, 최석태, 김태진씨 등 이십 여명이 모여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은 마시지 못할 처지지만, 이광수교수의 이런 저런 이야기 듣는 것 만으로 흡족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두 번째 강의는 16일(토요일)오후 3시부터 시작된다.

사진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니,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이광수 “따마스“사진집 (눈빛출판사 : 240면, 양장 : 가격 4만원)

 

시간이 되지 않는 분은 '눈빛'에서 출간된 “따마스”사진집을 구해 보셔도 된다.

 

전시가 끝나는 일요일까지 작가가 전시장을 지키니 많은 관람 바란다.

 

사진, 글 / 조문호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설치전은 지난 3일로 끝났지만,

사진은 그대로 걸려 있어, 간간히 관람객들이 찾아온다.

 

그런데, 내가 방에 있으면 자유롭게 사진들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며 쉬었다 가지만,

마당에 나가 있으면 길거리 주변 사진만 돌아보고 가 버린다.

 

낯선 늙은이와 대면하는 것이 편할 리야 없겠지만, 그렇다면 내가 전시장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약속이 생기면 다시 내려오더라도 당분간 동자동에 머물며 그동안 못 다한 일에 매달려야겠다.

 

이번 주말에는 이광수교수의 따마스사진집 출판을 기념하는 특강이 갤러리브래송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그동안 시간 내지 못했던 윤석렬 탄핵 집회에도 한 번 가봐야겠다.

참고 견디는 것도 한계에 달했는데, 그냥 두면 나라 망할 것 같다.

 

전시장을 떠나기 전에 그동안 한 번도 들려 보지 못한, 맞은편에 자리 잡은 과수원 길을 걸어 보았다.

 

가끔 승용차가 들락거려 과수원길 안쪽에 근사한 저택이 있을 것으로 지레 겁먹었는데,

가보니 초라한 스레트집과 조그만 닭장이 있었다.

 

사람이 살아 주변이 어지럽기는 하지만 그나마 자연이 보존되어 있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는 정취도 좋지만, 곳곳에 섞은 나무둥치들이 늘렸는데,

땔감으로 주워오고 싶지만 가져올 수 없었다.

 

어제는 나무가 없어 현충사 산길로 올라가 나무를 주워온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어느 페친이 올린 불법이라는 댓글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어린 시절 산에서 자유롭게 나무했던 생각에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는데, 세상이 많이 바뀐 것이다.

 

내 딴에는 산책길에 넘어져 걸리적거리는 나무를 정리해 준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정리를 해도 산림청에서 하지 개인이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법이란 게 흉통성도 없지만, 법을 다루는 놈들이 깽판 쳐 놓아,

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이광수의 “따마스“사진집 (눈빛출판사 : 240면, 양장 : 가격 4만원)

 

부산 이광수씨가 마련한 자리가 지난 28일 오후 갤러리 브레송에서 있었다.

 

마침 그날이 아산 전시가 쉬는 날이라 전날 밤 올라와 동자동에서 점심때가 되도록 퍼져 잤다.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은 후, 모처럼 컴퓨터를 끼고 노닥거릴 수 있었다.

 

팔 년 넘도록 쪽방 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쪽방 환경에 길들어 버렸다.

왠지 밀폐된 좁은 공간이 마음 편한 것이다.

 

네 시 무렵에야 녹번동에 들려 정영신 동지를 태워 충무로로 갔더니,

약속 장소인 갤러리 브레송에는 이광수 교수를 비롯하여 김남진 관장, 김문호, 김영호,

고정남, 이세연씨 등 여섯 분이 있었고, 전시장에는 김미경씨의 타자의 숲이 전시되고 있었다.

 

다들 충무로 김삼보 집으로 옮겨 갔으나, 술을 마실 수 없어 입맛만 다셔야 했다

 

그날 모임은 이광수씨가 새로 나온 따마스사진집을 선물하며 전시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였다.

본인은 책으로 보여주면 되지 굳이 전시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한다면 기존 전시 방법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사진을 바닥에 깔거나 빨래 줄에 거는 식으로 펼치는 방법에서,

악의 소굴처럼 어두침침한 터널식으로 전개해 관람자의 시선을 유도하는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그 문제는 김남진 관장이 효과적으로 설치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날 나누어 준 인간은 악이라는 따마스사진집은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는 인문학자가

사진으로 서술한 인간 속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열두 편으로 나눈 사진집은 사진으로 만든 문학이나 마찬가지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어 몇 번이나 다시 보게 만들었다.

 

보는 이마다 해석하는 바가 다르겠으나,

어둡고 붉은색이 강한 다양한 이미지에서 인간의 본성인 이글거리는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인은 물론 타 분야 예술가를 비롯한 사진에 관심 있는 모든 분 들이 보아야 할 사진집이었다.

 

사진으로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사진적 지식 보다 찍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진집이기 때문이다.

 

사진, 글 / 조문호

 

고정남촬영

 

 


사람 사는 이야기사진 설치전이 지난 24일 막을 올렸다.

전시를 여러 차례 해 보았지만, 이번 처럼 힘든 전시는 처음이다.

 

경비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지원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몸이 송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전시는 열어놓고 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주눅들어,

어떻게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전시장 찾은 손님 받는 게, 상가 문상객 받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대마불사주라도 마음껏 대접할 수 있고,

손님도 두 번 걸음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여러 사람 고생만 시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불편한 이곳까지 오라는 말도 부담스럽지만, 오셔도 손님 맞을 일이 걱정되었다.

 

음식이야 김선우가 준비했지만, 술을 끊었으니 술 고문을 어떻게 당하느냐도 관건이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 오는 교통편과 숙박이었다.

 

승용차로 오면 술을 마실 수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일만 없다면 역까지 마중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가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일을 벌였으니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하기는 했으나, 식구들이 고생 많이 했다.

전 날밤은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온 식구가 동원되었는데,

힘들게 길 낸 가마솥에다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이다.

 

전시 날자는 기다려주지 않고 어김없이 찾아왔는데,

문 열자마자 세종시에 산다는 오세인씨가 오셨다.

 

이광수씨 페북을 보고 알았다는, 첫 손님의 진지한 관람에 기분이 좋았다.

커피 한 잔 드렸더니, ‘두메산골사람들사진집도 한 권 사주었다.

 

이어 홍유선, 김현아씨가 다녀가고 나니, 소설가 임헌갑씨가 심영태씨와 같이 오셨는데,

지리산 막걸리를 두 박스나 가져오셨다.

 

때맞추어 온 완주의 사진가 김종신씨는 오다 보니 안내 현수막이 없더라며

현수막 두 개를 주문해 주었다.

 

임헌갑씨 일행은 온천장에 숙소를 잡았으나,

김종신씨는 캠핑 카에서 지내기로 하고 술자리를 만들었는데,

모처럼 옛이야기를 안주 삼아 늦은 시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임헌갑씨는 지난번에 주지 못한 책이라며, 인도로 가는 동안이라는 연작 소설을 한 권 주었다.

 

초대일인 26일에는 마산의 변형주씨가 마산 중리 막걸리를 가져왔다.

유목민전활철씨가 준 '느린마을' 막걸리와 '송명섭' 막걸리 두 박스에다

우리가 준비한 소주와 맥주를 비롯한 대마불사주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명주가 다 준비되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 전시가 아니라 사람 사는 주막 같은데, 아무래도 술은 남아돌 것 같았다.

 

이튿날은 화가 신상덕씨와 정복수씨, ‘사진바다곽명우씨,

사진비평가 이광수씨가 연이어 오셔서 전시장 분위기가 한결 무르익었다.

 

정복수씨는 나무화랑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인 초상화를 전복하는 초상화 작품집을 선물했다.

역시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는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광수교수로 부터 받은 따끈따끈한 선물 '따마스' 사진집이었다.

 

무겁게 마음을 휘어잡는 사진에서 '악의 꽃'이 연상되었다.

스토리의 연관성보다, 인간은 악이지만 꽃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기존의 전시형식에서 벗어난 좋은 사진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늦게는 뮤아트김상현씨와 기타리스트 김병수씨가 나타났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시작된 두 분의 협연은 가을밤의 정취를 무르익게 했다.

김상현씨의 아코디온 연주에 덧붙인 김병수의 기타 음율은 애간장을 녹였다.

 

그런데, 수술 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다는 김상현씨가 처음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예전보다 음색이 훨씬 깊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말이 딱 맞았다.

특히 하얀 목련은 듣는이의 심금을 울려 준 절창이라, 우리 식구만 듣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모닥불 앞에서 듣는 협연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새벽닭이 울어 시간을 보니, 새벽 네시가 훌쩍 넘었더라.

편치 않은 몸으로 먼 길까지 달려와 준 것만도 고마운데, 너무 고생하셨다.

 

그들의 뜨거운 음악 사랑과 깊은 인정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깐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떠나는 뒷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그다음 일요일에는 일찍부터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술안주를 잔뜩 짊어지고 왔는데,

좀 있으니 사진가 고영준씨는 친구들을 데려 왔고,

우기곤씨 역시 사우 여러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뒤이어 전통무예가 하태웅씨가 지리산에서 오셨고,

시인 이은정, 전태수, 홍대춘, 서정란씨 등의 문인들과 사진가 마동욱, 김영숙 내외,

화가 칡뫼 김구, 함상규, 고선애, 최보현, 박효링, 권현석, 노인자, 송춘애,

박귀옥, 엄근배, 성혜선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가셨다.

 

오는 1113일부터 26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황무지, 우상의 벌판개인전을 여는

화가 칡뫼 김구는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며 어렵사리 오셨는데, 가제본 된 책을 가져왔다.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도 없었지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손님 접대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떠나고 나니 죄송스러운 마음만 남았다.

 

오죽하면 전시 시작한 지 며칠 동안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는 커녕 들여다볼 틈도 없었다.

 

그 뒤 이틀 동안 오신 분 사진 역시, 정리할 시간이 없어 주말까지 찍은 사진만 올리는 것이다.

끝나는 날까지 마무리하려면 두 번은 더 소개해야 할 것 같았다.

 

빚진 생각에 마음은 무겁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쩌겠는가?

시간이 맞지 않은 분을 위해 주말인 113일까지 연장하기로 했으니,

가을 가기 전에 나들이 한 번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들 성원해 주셔서 고맙고 고맙습니다.

아무쪼록 깊어가는 현충사의 가을을 오래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 조문호

 

사진가 최민식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최민식 선생 서거10주기를 맞은 심포지움이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제목으로

지난 20일 오후4시부터 부산 F1963도서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부산광역시부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SOOYOIL이 주관한 이날 심포지움에는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란 발제로 열렸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심포지엄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섰고,

20여명의 사진인들이 참석했다. 참가한 사진가 중에는 박태진, 배정선씨 등 아는 분도 여럿 눈에 띄었다.

 

  고 최민식선생은 50여년에 걸쳐 민중의 삶을 기록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전통적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15만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 평생 작업해 온 휴머니즘이 대중에게 큰 감동을 일으키며,

한 시대를 증언한 훌륭한 사진가로 자리매김했으나, 최민식선생의 사진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자리가 없었다.

 

  서거 10주기를 맞아 최민식 선생의 작품세계와

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토론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열쇠구멍으로 본 도둑사진이라거나 소재주의라는 몇몇 사진가들의 잘못된

비판에 따른 해명은 물론 평소 선생의 삶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왔다,

루카치가 말한 전형을 통한 예술의 가치를 이룩하며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예술은 인간의 삶을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부분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선생의 사진만큼 노동운동이나 여러 가지 사회적 쟁점에 사용된 분도 없었다.

박정희정권 초기에는 빈민사진으로 외국원조를 얻는데도 일조하는 사회적 기여도 했다.  

대신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악용되기도 했지만...

한참 후에는 선생을 주축으로 김문호씨가 리얼포토’(사진집단 사실)를 창립하여

사회적 참여에 적극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평론가말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으로 수준이 낮다지만,

페널로 나선 강제욱씨는 예술이 인문학 위에 있지 않다며,

한 평생 인간애를 다룬 최민식선생의 사진 자체가 사회사적 의미고 작품성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공감하는 말로, 객관성을 요하는 사진의 재현보다 작가의 주관이 우선되는 표현이라면

사진보다 미술에 해당된다는 생각이다. 카메라나 붓은 대상을 표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찍히는 사람에게 허락 받지 않고 찍은 열쇠구멍으로 본 사진이라 비하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생각해야 한다. 유학에서 돌아 온 이들에 의한

새로운 사진조류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진가들은 거리의 스냅 촬영이 일상적이었다.

순간 포착으로 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동작을 잡아야하는데,

본인에게 물어 본다는 자체가 셔터찬스를 놓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원로사진가인 고 임응식선생은 초대전 작가와의 만남에서

대표작 구직을 연출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작가의 주관을 높게 평가하는 시류가 빚은 촌극이었다.

 

  요즘이야 초상권문제가 크게 작용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초상권 운운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 노인들마저 초상권을 말하는 오늘의 현실도 문제다.

사진이 악용되어질 때 초상권을 거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심도가 얕은 준망원 렌즈를 표준렌즈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을 찍어 부각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렌즈가 105미리에서 130미리 정도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오히려 유행처럼 광각렌즈로 대상을 왜곡하는 게 더 문제다.

어떤 렌즈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찍던 그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접근방법일 뿐이지,

정해진 원칙이 어디 있는가? 작가마다 접근방법이 다르듯이,

작가의 개성에 따른 개성적인 사진이 많이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을 찍는 사람에게 소재주의라는 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다.

나 역시 소재주의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러면 그런 사진은 누가 기록할 것인가?

 

최민식 사진상 부정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불려 나온 당시 운영위원장과 심사위원

문제는 열쇠 구멍 사진이라며 최민식선생을 비방한 자들이 최민식 사진상을 운영하는 자리를 차고앉아,

선생이 주창했던 휴머니즘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터리 사진에다 상을 주며 끼리끼리 단물을 빨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확대되어 최민식 사진상 자체가 없어지게 상황까지 갔는데, 최민식 사진상

부정 심사 의혹을 밝히는 자리에 나와 상의 권위를 위해 가난한 친구에게 주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학 사진 교수나 힘 있는 자리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최민식선생은 열 네 권의 개인사진집을 낼 정도로 열심히 기록한 사진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사진집을 낸 분이다.

사진평론가 였던 고 이명동 선생께서도 최민식선생 사진을 극찬했다.

뛰어난 직감력으로 대상과 거리의 개념을 없애는 독자적 시각이라며,

인간의 내면적 리얼리티 핵심에 접근한다고 말했다.

 

  1967년도 영국사진연감에서 스타작가로 지명하며, 선생의 사진으로 특집을 만들 정도였다.

국내외로 유명도가 높아, 그때부터 동료나 선배 사진가들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훌륭한 성과를 무시하는 후배들의 비방에 기가 막힐 뿐이다.

 

  발제자와 패널의 많은 의견과 해명도 있었으나, 귀가 어두워 자세히 알아 듯 지 못해 죄송스럽다.

나 역시 발언할 시간을 주었으나 관중공포증으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이 면을 빌어 말한다.

 

  나는 최민식선생 때문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선생의 모든 사진관에 동조하지만

선생과 같은 어프로치는 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 스냅도 하지만, 모르는 분의 사진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찍힌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이름 없는 사진은 유령사진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대상 속으로 들어가 작업한다.

 

  최민식 선생을 알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인데, 평소 음악을 좋아 하셔서 선생은 우리 집 단골손님이셨다.

어느 날 휴먼사진집 한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받아보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더 강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때로는 후회스러웠다.

한곳에 빠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사진을 하며 장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는데, 매일같이 가게를 종업원에게 맡기고 다녔으니,

잘 되던 가게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선생께서 별일 없는 날엔 주 촬영 무대인 자갈치시장에 나오셨다.

한 번은 촬영하는 중에 선생과도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것이다.

같이 장례식장 부터 가자는 말에 한마디로 거절했다.

죽고 나서 가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며, 그 시간에 사진이나 열심히 찍으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문상오지 말라며,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라 했다.

선생은 카톨릭 신자였으나,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현실적인 분이셨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을 거쳐 우리 집에 들리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술을 많이 드시진 않았지만, 젊은 손님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사진 하는 분보다 화가나 음악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날 최민식선생께서 부산에 사진학원을 차리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귀가 번쩍 띄었다.

사진학원을 차리기 위해 급매물로 나온 확대기 세대와 기자재부터 구입해 놓고 서울로 시장조사를 간 것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민태영씨가 운영하던 한국사진학원3개월 수강 신청을 하고 세밀하게 알아 본 것이다.

가르치는 커리큘럼도 신통 찮았지만, 사진학원 운영이 어려웠다.

그 사진학원은 그나마 군대 사진병으로 갈 수 있는 특전이라도 있어

현상유지라도 한다는 말에 의욕이 꺾이고 말았다.

 

  결국 사진학원은 포기하고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는데,

월간사진황성옥대표의 요청으로 월간사진클럽 부산지부를 창립하게 된 것이다.

지도교수로 최민식선생과 김복만선생을 번갈아 모셨으나, 작업에는 도움 되지 않았다.

찍어 온 사진들을 살펴보며 트리밍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서울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같은 회원이었던 김석중씨와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 선생을 나무라며 밟고 넘어서야 한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도 초창기에는 정신병동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이후에는 김아타로 이름까지 바꾸며 표현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가게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처음으로 나간 곳이 월간사진이었다.

최민식선생은 서울 오실 때마다 만났으나, 수시로 원고청탁을 하는 등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번은 서울 올라와 인쇄소 맡겨야 한다며 사진 프린트 잘 하는 곳을 물었다.

당시 인사동에 작업실이 두었던 김영수씨를 연결해 주었는데, 비용이 만만찮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선생의 사진 프린트는 콘트라스트가 너무 강했다.

콘트라스트가 강하면 사진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사진 계조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습성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사진집 찍을 때마다 애로가 많았단다.

 

  삼년 후 월간사진을 그만두고, ‘한국사협회지편집장으로 갔을 때는선생의 예술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원고지 40매에 가까운 원고를 매달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선생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에 촬영하러 갔다가 카메라 가방 채 몽땅 도둑맞은 적도 있었다.

너무 난감하여 카메라바디와 렌즈 번호를 적어 분실공고를 회지에 게재했는데,

최민식 선생께서 며칠 뒤 서울 오실 때, 안 쓰는 카메라가 있었다며

니콘FM 바디와 105미리 랜즈 하나를 갖다 준 것이다.

사진 찍는 사람이 잠시라도 카메라가 없으면 안 된다는 선생의 말씀에 코끝이 찡했다.

선생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진작 알았으나, 인정이 많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선생을 만나며 지켜 본 바에 의하면 나와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인간을 향한 주제의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음악을 좋아하거나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포기하지 하는 것도 똑 같았다.

예술가들의 풍류에서 빠질 수 없는 화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사진클럽 회원 중에 혼자 사는 여성회원 한 분이 있었는데,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혼자 사는 처녀가 아니라 같은 회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성격 급한 그 친구가 최민식선생께 전화를 걸어 사진판에서 매장 시키겠다고 겁을 준 모양이다.

그래서 나에게 말 좀 해달라며 장문의 편지를 적어 보낸 것이다.

별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으로 치면 미투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서를 보낸다는 자체가 얼마나 로맨틱한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시 한 번 선생의 명복을 빈다.

 

사진, / 조문호

 

인사동 ‘갤러리인덱스’에서 열린 정영신의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출판기념전은 많은 분의 성원에 힘 입어 잘 마쳤습니다.

 

장항선 장터 길에 함께해 주신 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정영신은 반평생을 장돌뱅이로 떠돌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코로나로 사람 접촉을 꺼리던 2년 전부터 혼자 열차를 타고

장항선 주변에 있는 충청도장을 떠돌았다.

 

무거운 카메라에 짓눌려 힘들게 장바닥을 휘젓고 다닌

그녀의 장터 순례길은 고향의 어머니 찾아가듯 즐거운 일이었다.

무슨 사명감 인양, 아무리 쪼들려도 장터 떠나는 늦추지 않았는데,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을 누가 말릴 수 있겠나?

 

장바닥을 떠돌며 사람 만나 정 나누는 것은 좋으나,

무거운 물건까지 사 들고 올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파김치가 되어 오던 그 지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결국 그 일을 마무리하여 책까지 펴낸 것이다.

돈 한 푼 없어도, 저지르고 부딪히니 되긴 되더라.

 

사라져가는 오일장과 삭막해지는 인심을 안타까워 하지만,

이 세상 어느 하나 사라지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에겐 고향 같고 어머니 품속 같은 장터와 장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다.

장터보다 장터 사람에 대한 애착이 더 깊다.

 

어쩌면 어머니의 마음 같은 따뜻한 인간애를 찾아 장터를 헤맨 것인지 모른다.

그가 펴낸 ‘어머니의 땅’에 실린 사진과 초창기 장터 사진의 연대나 접근 방식이 같은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래에 옮긴 이광수교수의 사진 비평도 궤를 같이 한다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어떤 원형을 그리워하는 그리고 그것을 안타깝게 기록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근대주의의 휴머니즘의 세계에 뿌리내린 사진 세계다. 사라져버린 것을 애써 찾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변화한 모습, 그로 인해 사라져버린, 다시는 찾기 어려운 모습을 기록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려

것도 아니다. 변화에 방점이 있는 것보다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어머니의 심성을 찾는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원형을 찾으려 돌아다니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 보인다.

원형은 있다, 가야 할 곳도 있다, 그곳은 꿈과 신화 속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눈앞에 있다.

우리 마음의 고향, 뿌리 내리는 삶, 그 뿌리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이것이 정영신의 사진 철학이다.”

 

개막식과 전시 이튿날까지 다녀가신 분은 지난 25일 소개한 적이 있으나,

그 뒤부터 끝날 때까지의 사진은 힘들어 그대로 모아 두었다.

전시가 끝나고 막상 정리하려고 보니, 기억이 가물거려 미치겠더라.

다행히 사진에 찍힌 정보가 있어 퍼즐 맞추듯 풀어냈다.

 

소식 또한 금방 나온 조간 신문이라 기 보다 늦은 주간지 정도로 알면 된다.

다녀가신 분이야 사진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하겠지만,

아니어도 반가운 분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술 마시며 노는 것도 힘들었다.

평소 부러워했던 술 상무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술을 마셔 지쳐 있는 노숙인의 힘든 처지도 알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만 마셔도 쓰러진다.

 

연락부절로 화장실에 쫓겨 다니는데다, 속까지 뒤집혀 죽을 맛이었다.

걸어 다니는 송장에 가깝지만, 사람만 보면 반갑고 즐거웠다.

마치 저승에서 문상객 맞는 심정이라, 더 절절했다.

 

내가 만나지 못한 분만해도 류연복씨를 비롯하여 박흥순, 양시영, 유준, 임동은, 박인식, 임홍택, 김홍성, 

김영진, 신길훈, 장종운, 백금옥, 이혜숙, 조시노, 음주애, 이완순, 최리나, 김효순, 이진홍, 한현주, 김애경,

김형배, 장석원, 곽숙경, 신혜선, 한선영, 홍경순, 김유나, 설인선, 이정숙, 김성은, 이용민, 김명점, 김혜영,

이영욱, 양한모, 한용길, 정태섭, 김지연, 김승준, 김혜원, 문 슬, 이기정, 전인경, 신영섭, 장소연, 임정희,

임연웅, 주강현, 이형순, 박범이, 채영임, 유형근, 박상희, 윤장섭, 김정락, 이수헌, 이홍순, 오리진, 김민형,

온세미, 송진욱, 유운선, 진 민, 김미숙, 박찬원, 김병구, 최상기, 송남양, 변성진, 권오창, 박재웅, 김형로,

장순향, 김영곤, 김용순, 고미정, 김백순, 김추윤, 이근정, 이우섭씨 등 헤아릴 수가 없다.

 

다들 뵙지 못해 죄송스럽다.

 

26일 오후에는 전태수씨가 오셨다는 전화를 받고 하던 일을 접어버렸다.

술시가 이르지만, ‘유목민’으로 옮겨 술 잔을 들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사진 했다는 오래된 이야기도 들었다.

 

27일엔 양재문, 남태영, 김녕만, 나종희, 이주영, 곽대원씨를 비롯하여

남기은씨 내외 분께서도 다녀 가셨다.

다음 달에 시집갈 조카 조은겸이는 남편과 시어머니 될 분까지 모셔 왔다.

 

뒤이어 김여옥 시인이 등장하자 인사동 건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승철 시인이 장경호, 양상용, 한상진, 최석태씨 등 화가를 대동하여 ‘시골해장국’으로 갔다.

 

김여옥시인이 인사동에서 ‘시인’이란 술집 차렸을 때는 인기 마담이었다,

숱한 세월이 흘러도 미색은 여전했다.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 준 것 만도 고마운데, 그 날 술값까지 그녀가 쏘았다.

 

그 다음 날은 김발렌티노를 비롯하여 정주영씨와 딸 김소연, 이성표 부부가 다녀갔다.

긴 세월 언론계에 몸 바친 윤상길씨는 ‘미술여행’ 편집위원들과 다녀가셨고,

사진가 이윤기, 임성호, 권양수, 김연지, 신영섭씨도 오셨다.

 

느지막에 손님 오셨다는 연락 받아 나가다, 길에서 음유시인 송상욱선생을 만났다.

만난 지가 몇 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그 연세에 아직도 기타를 메고 다녔다.

대폿집에 모셔가 선생의 십팔 번 ‘부용산’이라도 한 곡 듣고 싶었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은 모처럼 손님 만나 술 마실 일이 없었는데,

운현선 기자가 다녀가며 와인 한 병을 선물로 두고 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서 전어 몇 마리 사서 정동지와 오붓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매일 같이 술 마시다 하루 쯤 쉴 만도 한데, 술을 두고 그냥 잘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술자리보다

마음 통하는 사람과 오붓한 술자리가 더 좋다.

 

술 마시며, 정동지의 다음 작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장보다 장꾼을 찾아 다니려면, 늦었지만 운전을 배우라고 했다.

내가 죽고 나면 시골 구석구석을 어떻게 찾아다닐 것인가?

 

걱정은 되지만, 억척같은 또순이라 충분히 해낼 것으로 믿는다.

31일은 손님 오셨다는 전화에 늦게 사 전시장에 갔다,

오랜만에 쓸쓸한 미소의 화백, 신학철선생을 만난 것이다.

 

장경호씨와 더불어 ‘부산식당’으로 갔는데,

그곳에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종률씨와 이선태씨도 있었다.

뒤따라 최석태씨까지 합류하여 오랜만에 동지애를 불태웠다.

 

헤어져 돌아가는 중에 ‘이모집’으로 오라는 전화가 다시 왔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는데, 가보니 좀 전에 헤어졌던 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준영, 정희성, 박철, 박불똥, 조경연씨 등 일개 소대가 모여 있었다.

이미 취한 상태라 무슨 주접을 떨었는지, 뒷일은 기억나지 않는 게 낫다.

 

9월1일은 부산의 이광수교주와 아산 ‘봄에실’ 농장 식구들이 온다 기에

일찍부터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누가 차 문을 두드렸다.

농장 식구들이 주차하고 나오다 고물차를 알아본 것이다.

 

김창복, 김선우, 양이현, 김평 등 농장 식구들이 총출동했는데,

문단속은 잘했는지, 동물들 먹이는 어떻게 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들 전시장으로 갔는데, 모처럼 서울 나들이한 평이가 제일 신났다.

 

좀 있으니, 이광수교수가 나타났고 뒤따라 사진가 김문호씨도 왔다.

다들 술이 인사라 ‘부산식당’에서 낮술부터 마신 것이다.

인사동 점쟁이 신단수씨도 농장 식구를 데리고 그곳으로 식사하러 왔다.

 

그날은 충무로에서 양승우씨 전시가 열리는 날이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이광수 교수는 ‘갤러리브레송’에 가려고, 옆자리 밥값까지 내 버렸다.

늦을 세라 택시까지 타고 갔는데, 갤러리 문이 잠겨 있었다.

이교수가 김남진 관장에게 전화를 하니, 뒤풀이 집으로 오란다.

 

어이가 없었다. 나 같은 늙은이라면 모르겠으나, 부산에서 온 손님이 있지 않은가?

김문호씨 와는 다음에 볼 수도 있지만, 가야 할 이교수는 어쩌라고?

 

이건 갤러리를 운영하는 관장으로서 손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었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지키게 해야지...

더구나 오랫동안 무보수로 이교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나?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뒤풀이 장소를 찾아갔는데, 김남진관장을 비롯하여

이윤기, 이세연, 서준영, 나인석씨 등 일곱 명이 통닭집에 모여 있었다.

이교수의 호쾌한 구라에 마음을 다독였으나, 영 불편했다.

뒤늦게 ‘봄에실’ 농장 식구들과 함께 정동지도 도착했다.

이교수가 떠날 기차 시간까지 깨소금 안주로 독주를 마셨다.

 

9월3일은 전시장에 갔더니, 김명지, 서정란, 이은정, 전태수씨가 와 계셨다.

이은정, 전태수 내외분을 모시고 일찍부터 ‘유목민’에 술상 차렸다.

 

안주도 나오기 전에 여동생 조진옥과 매제 김종성이 왔다는 연락이 왔다.

전시장에 갔더니, 여동생 외에도 이대훈, 노인자 내외 분을 비롯하여

 최명철, 박종면씨 등 많은 분이 계셨다.

 

삶의 풍경을 그리는 동생에게 장터 풍경은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매제는 동생이 공모전에서 상 받은 걸 자랑하지만, 상은 작업에 독이라며 일축했다.

 

여동생과 매제를 보낸 후, 이대훈씨 내외분을 ‘유목민’으로 모셔왔다.

전태수 내외 분과 합석하게 되었는데, 최명철, 신단수씨 일행은 입구에 자리 잡았다.

 

 술 잔 들기도 전에 또 다시 연극연출가 기국서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인덱스갤러리’를 못 찾아 수도약국 앞에서 헤맨단다.

 

예전에 인사동을 들락거린 분이라면 옛 ‘수희제‘ 3층이라면 금방 찾을 텐데,

’수희제‘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달려가야 했다.

 

기국서씨를 만나 전시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생각지도 못한 박진호씨가 나타났다.

 

야! 이게 얼마 만인가?

정동지 더러 이혼 설득할 때, 들러리 서 준지가 7년이 넘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동안 그대로였다.

 

약속이 있어 가야 한다는 박진호씨를 보내고, 기국서씨를 ’유목민‘으로 안내했다.

9월5일부터 9일까지 ’강북문화예술회관‘ 진달래 홀에서 열릴 ’관객모독‘ 공연 준비로 바쁘 단다.

바쁜 와중에도 들려주어, 고맙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 손님이 나뉘어 있으니, 술을 마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찾아 주신 분께는 송구스럽지만,

운전하려면 차에서 눈 좀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전시 마지막 날은 ’유목민‘ 전활철씨가 술자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날이 생일인 줄 어떻게 알았는지, 장어를 구워 몇 사람 초대했단다.

 생일이 페북에 뜨지 않도록 어렵사리 만들었고,

’봄에실‘농장에서 평이가 그토록 기다린다는 생일상도 한사코 거절했는데...

 

난, 내가 태어난 생일 자체가 싫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세상에 태어난 게 싫다.

지독히도 생일을 챙겼던 정동지마저 이젠 한풀 꺾였는데...

 

어쩔 수 없이 ’유목민‘에 갔더니, 전활철씨 외에도 방기식, 유 준씨 등 여러 명 와 있었다.

그날이 ’유목민‘ 휴일이라 오붓한 술자리가 되었는데

‘인사아트프라자갤러리' 관장과 한지공예를 한다는 처음 보는 미녀도 있었다.

아무튼 불편한 생일상이지만, 배려해 주어 고맙다.

그 이튿날은 전시를 철수하기 위해 정오 무렵 나갔다.

철수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노인자씨도 와 계셨다.

서둘러 액자를 포장하여 차로 옮겼는데,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들어 부쩍 자동차 방전이 잦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벌어진다.

긴급출동은 왜 그리 오지 않는지, 가게 주인의 성화에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어렵사리 시동을 걸어 인사동을 빠져나왔으나, 차가 밀려 꼼짝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이 광교사거리에서 벌인 노조법 개정 촉구 결의대회에 발목 잡힌 것이다.

왕왕거리는 확성기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데,

에어컨이 꺼지고 램프가 깜박이더니, 갑자기 시동이 꺼져버렸다.

 

아무래도 발전기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견인차를 불렀다.

그렇지만 차가 밀려 꼼짝 하지 않는 판에 견인차는 어떻게 들어오겠는가?

 

종로 한복판에 고장 난 차를 세워 두었으니, 운전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뜨거운 길바닥으로 내몰린 정동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지하철 타고 먼저 가라며 보내긴 했으나, 꼬리 문 차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는 일을

한 시간은 족히 하고서야 견인차가 나타났다.

 

견인차에 끌려 역촌역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발전기가 수명을 다해 교체해야 한다는데, 발전기 교체 비용이 50만원이란다.

 

190만원짜리 고물차 수리비가 50만원이라면 폐차가 답이다.

그러나 잔뜩 실은 짐은 어떻게 할 것이며, 차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내 처지가 난감했다.

 

폐차할 고물차에 신품 발전기가 말이 되냐며 중고를 구해 달라고 하니,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이라 정품만 써야 한 단다.

그렇다면 견인차를 불러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중고를 알아본 후 교체해 주었다.

 

28만원으로 내려간 중고발전기를 구해 어렵사리 고쳤는데,

마침 중고 발전기 값 만큼의 현금이 주머니에 있었다.

엊저녁 활철씨가 생일축하금으로 준 20만원과

그날 노인자씨가 점심 식사 하라며 준 10만원이었다.

 

같이 식사하러 왔다가 차가 말썽을 부려 밥도 못 먹고 헤어졌지만,

어쩌면 수리비 액수까지 딱 맞추어 주고 가셨다. 언제나 절실한 것 만큼만 주는 돈과의 인연이다.

돈이란 빨리 돌아야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생기면 잠시도 머물 틈을 주지 않는다.

 

두 분 덕분에 자동차를 고쳐 사진액자를 안전하게 옮겼는데,

정동지는 오후 다섯 시까지 ‘금보성아트센터’로 가야 한 단다.

 

이번 전시에 금보성씨가 책을 40권 사 주었고, 창원의 조성제씨도 20권을 사 주었다.

덕분에 배당 받은 200권 목표량을 초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책을 그날 전해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답례로 정영신의 ‘한국의장터’와 나의 ‘청량리588’ 사진집 두 권을 드렸는데,

오래전 588번 버스 타고 그곳을 지나다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국의 장터’ 사진집은 여러 가지 도울 수 있는 프로젝트가 많겠 단다.

그 자리에서 여기저기 전화 걸어 타진 해 주기도 했다.

금보성씨는 자신의 작업량도 엄청나지만,

힘들게 작업하는 주변 작가를 돕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는다.

 

마침 자기가 돕는 다른 작가들과 미팅이 있다며,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금보성씨 내외 분 따라 연희동 ‘고미정’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자리에 개인 그림전을 준비하는 고등학생과 사진가 이명호씨가 있었다.

 

‘고미정’ 음식들은 소박하지만 정갈하고 맛있었다.

덕분에 금보성씨로 부터 예술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듣는 좋은 시간이었다.

 

전시와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후련하다.

그동안 죽는 것도 전시 끝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며 버텼으나,

많은 분에게 신세만 져 어깨가 무겁다.

그 신세 갚는 길은 열심히 사는 것 밖에 없다.

 

정영신의 장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개막식 날 사진과 그 이튿날 사진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https://blog.naver.com/josun7662/22319379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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