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하루 앞둔 31일 정오 무렵,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가 집을 방문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인사차 들렸는데, 대접할 음식이 마땅찮았다.

설날 세찬과 함께 마신다는 도소주는 없으나 대마불사주로 목을 달랬다.

 

이년 넘게 어렵사리 가게를 끌어가는 그로서는 빨리 코로나 역병이 끝나고

정상적으로 영업 하도록 해주는 것이 새해의 바람일 것이다.

만사형통을 기원했지만, 다들 나이가 들어 건강이 문제다.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연식이라 술을 줄이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활철씨는 당뇨가 심해 술을 멀리해야하지만, 술장사가 어찌 술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술만 마시면 숨이 가빠 정신을 못 차리지만, 거절할 줄 모른다.

그러나 혼자서는 마시지 않고 주량도 점차 줄여나가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설날 정오 무렵, 유목민에서 가까운 분들과 술 한 잔하기로 했다기에 나도 가겠다고 했다.

활철씨가 시장 보러 가야한다며 일어나기에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했는데,

자고나니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으슬으슬 추웠다.

감기 같았지만, 불길한 생각도 들어 온 종일 누워 뒤척였다.

 

유목민에 가겠다고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오후에야 몸을 추서려 인사동에 나갔다.

좀 이른 시간이라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설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한복 입은 사람은 커녕, 거리에 나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곳저곳 전시장만 기웃거리다 유목민으로 발길을 옮겼다.

 

벽치기 골목을 들어서니 담배 피우러 나온 정영철씨가 멀리서 반가워했다.

오후 여섯시 밖에 되지 않았으나, ‘유목민엔 손님이 제법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정영철씨와 필립, 두 사람 뿐이었다.

여지 것 약속 없이 술 마시러 나온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입구에 자리 잡아 전활철씨와 술 마시며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어제는 몸이 아파 오늘 왔다니까,

자기도 어제는 몸이 좋지 않아 안원규씨 에게 맡겨두고 잤다는 것이다.

이인섭선생과 장경호씨 등 몇 사람 나오지도 않았다며

어제 먹다 남은 갈비 살이 있다며 한 접시 구워냈다.

 

얼마 전 김홍성씨가 페북에서 궁금해 한, 적음의 산문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오래 전 김홍성씨 서문까지 받아두었으나,

시집 저녁에가을밤의 춤만 내고 산문집은 출판하지 못했다"고 한다.

적음의 정리되지 않은 많은 원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손을 대지 못했다는데,

유목민에 메달리다 보니 출판에 관한 일은 손댈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 그 일을 맡아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

 

마침 가을밤의 춤표지에 사용된 신준식의 담뱃불 그림 속에

적음 육필로 쓴 파적이란 시가 적힌 작품이 벽에 붙어 있었다.

김홍성씨 말처럼, 적음의 음모정렬체가 또렷했다.

 

"너와 나의 중간에

한 조각 흰 구름 무심히 떠 있어

오늘 하루도

그냥 스쳐 지나간다."

 

- '파적' 부분-

 

두 사람 다 술 때문에 요절한 친구가 아니던가?

적음은 암자에서 술 취해 자다 기도가 막혀 죽었고,

신준식은 술이 취해 길 건너다 차에 받혀 죽었다.

아무리 운명의 장난이라지만, 어찌 이리 기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인사동 이야기사진전 이후의 불편한 심정도 털어 놓았다.

 

홀짝 홀짝 마시다 보니 한라산을 두 병이나 깠는데, 손님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여덟시 반 밖에 되지 않았으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며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니 끝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이년 넘게 끌었던 코로나가 주당들의 음주문화까지 바꾸어 버렸다.

처음 보는 나야 황당했지만, 활철씨는 익숙한 듯 자리를 치웠다.

 

나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여지 것 이른 시간에 술 취해 돌아간 적이 있었던가?

하릴없이 인사동 밤거리를 방황했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흥타령이 잠잠한 인사동을 들썩였다

 

그런데,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실수를 저질렀다.

술이 취하면 숨이 가빠 마스크를 쓸 수가 없는데,

대중교통에서 어떻게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겠는가?

경노석 구석자리에 앉아, 몰래 숨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쓰는 일을 반복한 것이다.

 

세상에! 숨 못 쉬면 죽는 것 아닌가?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산소호흡기 달린 마스크는 나오지 않는가?

정초부터 저승 문턱에 갔다 온 것 같다.

 

사진, / 조문호

 

 

울산에서 오세필씨가 올라와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연락을 했다.

서둘러 나갔는데, 인사동이 난리 쳐들어 온 것처럼 시끄러웠다.

조계사에서부터 안국역까지 버스가 줄지어 섰고,

확성기 소리가 쩌렁쩌렁 인사동을 울렸다.

 

‘조계사'에서 정청래의원 ’봉이 김선달‘ 발언에 반발하는

승려대회가 열리는데, 오천명여 명이나 몰렸다고 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방역규칙을 어겨가며,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광화문광장에서 규탄대회하다 교도소까지 전전한 전광훈 목사 패거리와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돈과 권력을 위해 정치에 까지 개입하려는 못된 짓거리다.

‘공수래 공수거’라며 무소유를 설법한 부처의 말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행여 아는 중 만날까 두려워, 얼른 약속장소로 옮겼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그 때까지 문이 잠겨있었다.

‘유담‘에서 기다리는 오세필씨를 불러내어 밥집부터 갔다.

어디가 좋겠냐고 물어왔지만, 당신이 정하라며 한 발 물러났다.

나야 끼니를 때우는 식이지만, 그는 맛을 즐기는 미식가가 아니던가?

 

속으로는 ‘툇마루’ 된장비빔밥이나 ‘부산식당’의 생태탕,

아니면 ‘나주곰탕’이나 ‘여자만‘ 정식 등 여러가지를 떠 올렸지만,

생각지도 못한 북인사마당 코너에 있는 ’조금‘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한정식선생 따라 한 번 간적이 있는데, 일식 풍의 분위기도 별로지만,

돌솥 밥 하나에 만 칠천 원이라 다른 밥집에 비해 비샀다.

 

그리고 실내조명도 조도를 낮추어 어두침침했다.

밥을 비볐으나, 무슨 맛인지 아무 맛도 모르겠더라.

입맛이 간 것인지 음식 맛이 없는 건지, 분간 못한 채 먹어 치웠는데,

다 먹고 보니 양념장도 넣지 않고 비벼 먹은 것이다.

이제 치매환자나 다름없어 실수를 밥 먹듯 한다.

 

식당에서 나와 커피 마시러 ‘유담’에 다시 들렸다.

그때사 주인 마담이 타주는 달달한 커피 맛을 즐겼는데,

오세필씨가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형도 잘 나갈 때가 있었다는데, 그 때가 어디 있을 때요?“

아마 돈 벌 때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돈이 많으면 잘 나가는 걸까?

40여 년 전 ‘한마당’ 시절을 떠 올리며 케케묵은 추억을 들먹였는데,

아마 그 운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나 역시 돈벌레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때 마침 장보러 갔던 전활철씨가 등짐을 지고 ‘유목민’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이런 저런 안부만 전하고 헤어져야 했다.

나도 하는 일 없이 바쁘지만, 전활철씨는 장사 준비를 해야 하고

오세필씨는 또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인사동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건물 벽을 임대한 노점상은 늘어났고, 아직 빈 점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건물주와 임대자가 분쟁 중에 있는 인사동 문화공간 ‘코트’ 건물 전면에는

함민복의 시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전시를 방해하는 자동차 두 대가 버티고 있었는데.

천으로 덮어 놓았다. 돈 밖에 모르는 이런 악덕 지주를 정말 단죄할 수 없을까?

​문화예술을 짓밟는 '코트' 폭력사건만은 절대 승복하선 안 된다.

예술과 돈의 한 판 싸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며칠 전 조준영 시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인사동에서 초촐한 망년회라도 한번 해야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방콕에서 해방된 날은 28일이었다.

날 잡은 김에 다 만날 작정으로 녹번동부터 갔다.

 

정동지 일로 충무로 가려는데, 조해인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암동 콩나물국밥'에서 김수길씨와 한 잔 한다는데, 어찌 모른척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늦게 끝나 바쁘게 찿아 갔더니, 이미 술자리는 파장이었다.

사이클이 맞지 않아 부어 주는 쪽쪽 마시다보니 금방 취해버렸다.

김수길씨는 "'케이비에스'에서 동자동을 소개한 방송을 보았냐?"고 물었다.

쪽방은 물론 정동지 집에도 티브이가 없으니, 세상돌아 가는 걸 잘 모른다.

인사동 약속시간을 30분 남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인사동은 연말분위기가 실종된지 오래다 

옷 가게들이 점령해 가는 거리 풍경은 낮 설기만 하다.

 

인사동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장면에 그 장면이지만, 출근부 도장 찍듯 찍는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김용태씨 미망인 박영애여사가 운영하는 ‘낭만’이었다.

어디쯤 왔느냐의 전화를 받고서야 인사동 순찰을 마쳤는데,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공윤희, 임태종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두기 지침에 맞추어 네 사람만 모인 것이다.

 

박영애여사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뜩 차려주었다.

돔 찜에다 돼지수육과 홍어, 그리고 과메기까지 등장했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지, 술 마시며 안주를 그렇게 많이 먹어본 적이 없다.

 

나온 사람 몇 명 없는 조촐한 '인사동 사람들' 망년회지만, 음식이 너무 푸짐했다.

공윤희씨가 먼곳에서 공수해 온 꼬냑까지 꺼냈다.

난, 일편단심 민들레만 마셨다. 양년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레 겁 먹은 것이다. 

 

최석태씨가 ‘유목민’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에 자리를 옮겼다.

장경호, 김이하, 안완규씨도 있었으나, 술이 취해 더 마실 수가 없었다.

 

새해에는 신나는 일만 주렁 주렁 열리길 바란다.

코로나 끝나는 봄 날, 때거리로 한번 젖어보자.

 

사진, 글 / 조문호

 

은행잎이 인사동을 금칠 한다

또 한 해의 끝자락이 몰려온다.

 

세월따라 가겠지만 모두 바뀐다.

인사동 거리도 변하고 생각도 변한다.

 

복면의 시대라 사람도 잘 몰라본다,

사람이 사람 만나기를 겁낸다.

 

더 큰 건물 지으려고 ‘지리산’을 철거한다.

인사동의 기억을 지운다.

 

풍류객 잔당들의 마지막 저지선 '벽치기골목' 

 

‘유목민’에 모여 앉아 음모 꾸민다.

이름하여 ‘풍류 쿠테타’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0일은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인사동이야기사진전을 준비하는 날이다.

 

승용차에 가득 싣고 간 사진액자를 4층까지 올리기가 만만찮았다.

5분이 초과하면 주차위반으로 카메라에 찍힌다기에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들어 올렸다.

 

너무 많이 준비한 액자 때문에 걸 일이 걱정되었으나

차를 주차장에 옮겨놓고 돌아오니 김진하관장이 적절히 자리를 잡아놓았다.

 

일사불란하게 설치하는 김관장의 디피 솜씨는 장인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 많은 액자를 짜임새 있게 걸어주어 우려를 덜었다.

조명 조정까지 잘 마무리했다.

 

김진하, 장경호, 전활철씨와 어울려 유목민에서 저녁식사를 겸해 술 한 잔했다.

전시는 30일까지니, 시간 나시면 관람하시길 바란다.

 

사진, / 조문호

 

 

보름 동안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과 노숙인 현수막전 치르느라 곤죽이 되었다.

매일 반가운 분들 만나 졸라 퍼 마시고도 살아남은 것이 용 타 싶다.

전시가 끝나자마자 신학철 선생 전시까지 이어졌는데, 이러다 알콜 중독자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전시를 하면 힘들고 돈만 까먹는 일이라 피해 왔으나

사진집이 나오면 전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리지 않는 책을 어렵사리 만들어 주었는데,

전시라도 해서 책이라도 좀 팔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번 정영신씨는 책만 아니라 작품도 제법 팔렸다.

큰 작품이 세 점이나 팔렸고, 소품은 30여 점이나 팔았다.

십만 원 하는 소품은 제작비와 갤러리 마진 제하면 몇 푼 남지 않지만,

보리 흉년에 이게 어딘가?

 

그나저나 다시 사진을 만들어 포장하고 배달하는 일도 만만찮았다.

그동안 전시 때문에 보지 못한 류연복씨 전시 보러 가다가 차가 밀려 진을 빼기도 했고,

미루어 둔 일 하느라 낑낑거리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난 11일은 미처 철수하지 못한 노숙인 현수막 거두러 인사동 나갔다.

판매 작품 중 ‘나무화랑’에 맡길 사진도 있지만, 현수막은 빨리 거둬야 했다.

그냥 두어도 오가는 사람들이 보면 홍보야 되겠지만,

자기 들어간 현수막 사진 받으려고 기다리는 노숙인들 때문이다.

그리고 햇볕을 오래 받으면 탈색할 염려도 되었다.

 

며칠 만에 나간 인사동 거리는 월요일인데도 나들이한 사람들이 많았다.

액자를 갖고 ‘나무화랑’에 올라갔더니, 생각하지도 못한 류연복씨가 반겼다.

어제 안성 전시장에서 만났는데, 또 만난 것이다.

안성은 월요일이 휴관일이라 모처럼 짬 내어 신학철선생 전시 보러 왔단다.

 

사진을 전해주고 다들 유목민 골목으로 옮겼는데,

골목 어귀에 문 닫은 포도나무집을 보니 지난날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강민 선생의 단골집으로 추억이 많은 주막이었다.

폐가처럼 창을 가린 대나무 잎이 강민 선생의 넋 인양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옆에는 거리 아티스트 이태호씨의 김수영시인 판화가 붙어있었다.

낡은 가스 배관 틈에 붙었는데, 그 밑에는 재떨이와 종이컵까지 놓여 있었다.

마치 김수영시인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단 같았다.

큰길에서는 볼 수 없는 인사동 풍류 잔재다.

 

류연복씨 도움으로 현수막 철수는 간단히 끝냈으나, 그냥 헤어질 순 없잖아.

‘유목민’의 별미 감자전을 안주로 막걸리 한잔했다.

어제는 게장 집에서 밥은 얻어먹었지만, 차 때문에 술 한잔 못했다.

 

그런데, ‘유목민’ 전활철씨와는 같은 홍대 미대 출신이지만 서로 몰랐다.

전활철씨가 삼 년 선배라는데, 군 복무하느라 서로 마주치지 못한 것 같았다.

서로 안면도 터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시간 보냈다.

 

류연복씨도 갈 길이 바쁘지만, 나도 동대문시장 가야 했다.

현수막을 사진 별로 재단하여 올이 빠지지 않도록 박아야 했다.

막걸리 세 병으로 끝낸 아쉬운 술자리였지만,

우연히 만나는 이런 맛에 인사동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달은 고생했으니, 사모님께서 보너스라도 좀 주실지 모르겠다.

야무진 꿈이라도 꾸어 보는 희망도 없다면야 무슨 재미겠는가?

 

사진, 글 / 조문호

 

 

2021.10.5

보름 동안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연이은 술 폭탄에도 살아남은 걸 보니 목숨이 질기긴 질기다.

전시를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신 많은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정영신씨 전시에 빌붙어 나팔 분 일이 힘은 들었지만 보람은 있었다.

언제 그분들을 다시 만나 회포를 풀 수 있겠는가?

반가운 분들과 지난날을 돌이켜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몸이 마음 같지 않았다.

술에 절어 뵙지 못한 분도 많았고, 매일 올리던 일기도 쓰지 못했다.

카메라에 남은 이미지를 살피며 며칠간의 기억을 더듬었는데,

어떤 분은 성함이 기억나지 않아 블로그를 뒤지기도 하고

어떤 분은 취중의 실수가 생각나 쩔쩔매기도 했다.

모든 실수를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31일은 좀 늦게 나갔더니,

태국에서 온 고영준씨가 다녀가며 축의금을 맡겨 두었더라.

전화번호를 몰라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무슨 급한 일이 있었을까?

그날은 노인자, 이대훈씨 내외를 비롯하여 추대희, 김지영, 송춘애, 손민광,

송주원, 이동환, 김미란, 이경지, 유근오씨 등 많은 분이 다녀갔지만,

술자리에 퍼져 앉아 사진을 못 남긴 분이 많았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노숙인에 대한 편견이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불량한 사람으로 구제할 수 없다는 편견 말이다.

물론, 일하는 것보다 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러 나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질고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 지병이 있어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다.

엄밀히 말해 알콜 중독자도 환자에 다름아니다.

병원에 강제수용하더라도 병부터 고쳐주고 일을 하게 하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은 기초생활수급 혜택도 주어야 한다.

 

그들은 돈이 좌우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패배자일 뿐이다.

부도덕한 몇몇 노숙인 때문에 선한 사람들까지 함께 몰 수는 없는 것이다.

악한 것으로 친다면 권력 가진 정치인이나 재벌에 비길 수 있겠나?

 

그다음 날인 10월 2일은 일찍부터 함평 출신의 사진가들이 모였다.

정영신, 이 민, 김기수, 박상문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좀 있으니 관악주민 사진반을 지도하는 양시영씨와 김진옥 반이정, 전영순씨가 오셨다.

몇 가지 사진에 관한 질문에 답 했는데, 흡족한 답을 하지 못한것 같다.

 

‘눈빛출판사’ 이규상씨는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팀장 전영주씨와 오셨더라.

돈의문에서 정영신씨 ‘한국의 장터’ 전시를 제안해 와 다음 달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뒤이어 박흥순씨가 산에서 주웠다는 밤을 삶아 와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정복수, 나떠구, 박영선, 류국헌, 박종규, 최유진, 김혜련씨도 오셨다.

 

오후에는 20여 년 만에 반가운 분을 만났다.

‘삼성카메라클럽’이라는 조직에서 일할 때 함께 했던 신상덕씨였다.

최근 페친으로 연결되어 찾아왔는데, 처음엔 마스크를 쓰고 있어 몰라보았다.

지난 이야기에 모처럼 웃음꽃을 피웠다.

 

밤늦게는 정복수, 박건씨와 술을 마시다 우이동 박건씨 집으로 쳐들어갔다.

 

덕분에 혼자 살아가는 공산품 예술공장도 볼 수 있었고.

사랑한 어머니를 비롯한 살아 온 지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지난 개천절에는 인사동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정신 나간 놈도 있었다.

 

‘나무화랑’에는 정영신씨와 동향인 심재상, 김문수씨를 비롯하여

김준권, 이태호, 김곤선, 양정애, 오현주, 김순남,

김일하, 김밝은씨 등 많은 분이 찾아주셨다.

 

‘유목민’에는 지리산에 들어간 임헌갑씨가 찾아왔다.

 

전시 기획자인 김곤선씨가 첫 술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나, 카메라가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사진을 찍지 못해 안절부절했으나, 차 안에 두고 찾은 것이다.

김곤선씨로 부터 정암사 전시프로젝트에 관한 근황을 들었다.

 

안해룡씨를 비롯하여 유병용, 박찬호, 임동은, 이휘경,

안지현, 김문기씨 등 반가운 손님이 줄줄이 찾아왔다.

 

페북에서만 보아 온 소녀 같은 임동은씨 부인의 실제 모습도 보았다.

보기드문 잉꼬부부였다.

 

어둠이 몰리기 시작하니 장경호, 노광래, 헨리윤, 배성일, 우문명,

최석태, 황경애, 현기영, 이미례, 신상철 씨 등 많은 분이 오셨으나,

너무 취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뒷자리에 누워 차에 실려 갔다.

 

전시를 철수하는 마지막 날은 술이 덜 깨 그런지 온종일 비실거렸다.

전시장은 조명숙, 김태인, 이만주씨가 다녀갔더라.

정영신씨 전시를 취재하러 오신 김문경, 운현선씨와

‘툇마루’에서 마신 해장술 몇 잔에 전날로 되 돌아간 것이다.

 

김문경씨와 마시던 술자리는 ‘유목민‘으로 이어졌는데,

지나가던 김발렌티노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초장부터 술이 취해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닌지라 그 뒤로는 찍은 사진조차 없었다.

아무리 취해도 카메라는 놓지 않는데, 맛이 가도 완전히 간 것 같았다.

 

아산에서 김선우, 양햇살, 김온 군이 찾아와 전시를 철수했으나,

전시장을 오르내리긴 했으나 사진 찍는 일조차 잊었다.

다들 끝내고 식사하러 갔지만, 차에 들어가 뻗어버렸다.

일이 끝나 긴장감이 풀리니 갑자기 녹초가 된 것 같았다.

 

아무튼 여러분의 격려와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전시도 잘 마쳤다.

찾아주신 모든 분에게 거듭 감사 인사 드린다.

항상 좋은 일 많으시고 편안하시길...

 

사진, 글 / 조문호

 

 

 

 

 

2021.10.1

지난 28일은 많은 화가들이 방문해 주셨다.

원주에서 김진열씨가 올라와 김진하, 이태호, 김정헌씨가 모여 역적모의 하는 ‘이모집’으로 안내했다.

 

그 자리는 김수영시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전을 협의하는 오찬 자리였다.

‘흐린 세상 건너기’로 건너가 차 한잔하고 전시장에 돌아오니, 사진가 최정균씨가 와 계셨다.

 

이 분은 나와 동갑인데 무슨 비결이 있는지, 나보다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올 때마다 봉투를 내 놓으며, 좋은 전시를 어찌 그냥 볼 수 있냐고 하신다.

그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뒤이어 류연복, 박진화, 손기환, 이인철, 정복수, 박문종씨 등 화가들이 전시장을 방문해 주셨다.

 

그날은 학고재에서 개막된 박영균의 ‘보라색 언덕 너머’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비파의 ‘한라에서 백두까지’ 목판화 전시까지 겹쳐

겸사겸사 서울 나들이를 하신 것 같은데, 다들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문 닫은 전시장에서 숨겨 둔 와인으로 마시는 술맛은 더 좋았다.

발동 걸린 술자리가 ‘사랑채’로 이어졌는데,

술안주로 내놓은 나물에 취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진열씨가 어지럽다며 일어나더니, 류연복, 이인철씨까지 다락방에 더러 누웠다.

 

화단의 술 판을 휩쓸던 역전의 용사들이 차례대로 무너진 사건은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그 와중에 정복수씨는 내 초상화까지 그렸는데, 마치 지명수배된 범죄자 형상이었다.

 

그 다음 날인 29일에는 일찍부터 구중서선생을 비롯하여 장봉숙, 서정란 시인이 오셨다.

어려운 걸음을 하신 구중서 선생께서 식사하러 가자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더구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데다 전시장에서 만나기로 한 선약까지 있었다.

대전의 이석필씨에게 연락받은 김문호씨가 먼저 전시장으로 올라왔지만,

잠시 기다리게 하고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식사하는 자리에 끼어 술만 홀짝홀짝 마셔야 했다.

그런데, 밥 값 내려고 따라 나섰는데 구중서 선생께서 계산해 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마음에 걸려 찻집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술을 급하게 마셨더니 일찍부터 취해버렸다.

 

헐떡이며 4층까지 올라갔는데, 다들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마중’에 갔다던 이석필씨와 김문호씨는 간판을 잘못 보았다며 개성만두집에 앉아 있었다.

 

이차로 자리 잡은 ‘유목민’ 골목에서는 조명환, 기국서, 장 춘씨가 합석했고,

김기덕, 유진오, 김발렌티노도 만났다.

 

30일엔 사진가 하재은씨를 비롯하여 김문경, 윤현선, 김석철씨가 찾아오셨다.

운현선씨가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 동영상을 만들어 보여 주는데, 너무 멋지더라.

‘유목민’ 골목에서는 사진가 권양수, 박윤호씨를 만났는데, 외국에 나갔던 안애경씨도 오셨다.

 

뒤늦게는 화가 강지현, 이현숙씨와 어울려 술 한잔했다.

강지현씨는 이현숙씨 초상화를 그려 오셨더라. 다들 페이스북에서 가까워진 사이 같았다.

 

노재학, 임경일씨가 차례대로 오가기도 했고, 김이하 이승철씨는 맞은 편에 자리 잡았다.

 

이틀 만에 올리던 보고서가 삼일만에 올리게 된것은

술로 점차 기력이 쇠진해가는 징표이오니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아무튼 전시장을 찾아 주신 많은 분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