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영적에너지를 받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강찬모 화백의 작품들이

'아웃도어 West Wood'사의 도봉산 갤러리 개관전으로 초대되어 산악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도봉산 입구에 위치한 갤러리에서 "무엇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가"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는데,

온 전시장은 신비로운 히말라야의 정기가 감돌고 있었다,

선 굵은 산맥 위를 시퍼렇게 물들이는 하늘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성령 같았다.






강찬모의 설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히말라야산의 겉모습이 아니라 자연의 근원에 빠져들게 하는 야릇한 묘미가 있다.
그의 작업은 명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도자적 행위라, 사랑의 빛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이다.






화가 강찬모씨는 중앙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나, 81년부터 7년간 일본미술대에서 채색화를 공부했고,

1994년부터 대구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연구했다.


2004년도 무렵, 5,000미터 히할라야 설산에서 큰 깨달음을 가지며, 그의 작품세계는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히말라야 설산의 기를 받아 승승장구한 작가다.





매년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프랑스 루브르 국립살롱전 같은 해외 전시회에도 참가했다.
해외 아트페어(Art Fair. 미술시장)에서는 전 작품을 ‘완판’했으며,

2013년에는 프랑스 보가드성 박물관 살롱전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 부산벡스코에서 열린 ‘아트부산 2018’에서는 대작 3점이 판매되어 많은 작가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한 마디로 요즘 뜨는 작가에 속한다.





이번 도봉산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작품 역시 전통 채색의 한지에 그린 대작들로,.

숭고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도봉산에 오르는 등산객이 아니라도, 꼭 한 번 찾아가 그 신비의 경지를 체험하기 바란다.





지난 25일 오후, West Wood 도봉산 갤러리를 찾았는데,

강찬모화백을 비롯하여 김명성, 고중록, 김영국, 전인미, 정영신씨 등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갤러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봉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히말라야 작품들은 일반 갤러리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뒤늦게 온 박인식씨를 비롯하여 황예숙, 김시인, 김상현씨를 만나 막걸리로 목을 축이기도 했는데,

허영미씨가 합세하여 이차로 옮긴 ‘도봉산 양고기’의 양갈비 맛에 또 한번 맛이 갔다.

양고기의 누린 냄새가 역해 여지 것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나, 이 집 양고기는 달랐다.

어린 양이라 누린내가 전혀 없는데다, 소고기나 돼지고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이었다.

도봉산에서 눈 호강, 입호강한 하루였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8일 오후3시 무렵, 이청운씨 작업실에 인사동 꼴통들이 쳐들어갔다.

그가 인사동을 떠나 병석에 누운 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렸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도 인사동을 사랑했고,

인사동은 그가 순수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인사동을 사랑하는 예술가모임의 간사장 역을 떠 맡은 조준영시인의 주선으로,

해 바뀌기 전에 이청운화백을 찾아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서야 작업실이 있는 응암역에 내렸는데, 다들 먼저 와 있었다.

조준영시인을 비롯하여 무용평론가 이만주, 인사동 지킴이로 불리는 공윤희씨가 3번 출구에서 기다렸다.

지척에 있는 이마트로 옮기니, 유목민’의 전활철씨와 사진가 정영신씨도 있었다.

좁은 환자방에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걱정스럽더라.


 

3층에 있는 이청운 작업실 문을 살그머니 밀쳐보니,

어두침침한 작업실 풍경 자체가 이청운의 오랜 자화상이었다

이젤 다리는 어두운 뒷골목에 버틴 전붓대 같기도 하고,

그 아래 삽살개가 다리를 치켜들고 오줌을 갈기는 정겨움도 연상되었다.



안 쪽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와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천진난만한 모습의 이청운씨와 부인 이상랑여사가 함께 있었다.

마치 이청운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청운씨를 모른다면,  화가라면 간첩이고, 아니면 사는 게 바빠 예술을 등진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확한 나이조차 모른다.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희생양으로, 추측컨대 나보다 한두 살 적은 일흔 쯤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신부님이 이청운의 그림에 대한 재질을 발견하여,

동아대학에서 미술을 공부 시킨 것이 그가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였다.


 

이청운씨가 본격적으로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71년 구상회 공모전에 금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의 한 작품에는 집 한 모퉁이의 그림자가 다른 집 지붕에 드리워져 있고, 그 배후는 하늘조차 어둡다.

하늘이 이 정도로 어둡다면 전경을 이루는 집의 모퉁이나 집의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30대 초기의 청년작가로서 이토록 확신에 찬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빛과 어둠을 대조시키는 작업은 그의 그림세계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성격이다.


 

구상전에서 금상을 받은 10년 후에 또 다시 재 부상한다.

세 번째로 열린 중앙미전 공모에서 특선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여러 공모전에서 상도 받게 된다.

그 당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그의 작품이 감히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폭압적인 박정권 말기인 1970년대 말은 억눌림에 견디지 못하던 시기였다.

미술평론가와 작가들이 모여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합세한 것이다.

잘 나가면 편하게 작업이나 하면 좋으련만, 그 몸속에 베인 정의감은 그냥 두지 않았다.




현실과 발언의 다른 맴버들은 명문 출신으로 백그라운드가 있었던 데 비해 이청운은 그런 배경도 없었다.

그를 만만하게 본 정보당국은 이청운을 납치하여 무려 50일이나 감금한 일이 있었다.

뒤늦게 풀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겁준게 두려워 지금껏 숨길 정도였으니,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미술계에서 각광받는 분위기였지만, 낯설고 먼 길인 프랑스로 떠난 이유는 이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선택한 외유에서 의외의 성과도 얻었다. 바로 살롱도톤느 전에서의 1등상 수상이었다.


 

이청운씨의 80년대 초반기의 그림들은 그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부산의 항구 풍경을 줄 창 보여준다.

항구하면 대개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게 일상적인 풍토였지만,

그로테스크하며 질퍽한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진취적이다.

어둡지만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항구가 이청운 만의 그림세계다.


 

그의 이력이 너무나 기구 화려해, 쓸을 풀다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런데, 자리에 누운 이청운씨가 인사동 떨거지들이 반가워 바시시 빠개는 쌍다구가 정말 죽이더라.

마치 만화 양산박에 등장하는 무대의 모습이 연상되는 그런 표정이었다.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으며, 그동안 깨우친 삶의 진실을 암시하듯 눈을 빤짝이며 바라보았다.

옆에서 밤낮으로 병수발을 드는 아내 이상랑여사가 통역까지 해 주는데, 말년에 호강하는 것 같았다.

여지 것 아내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부대끼며 정 나누어 본 적이 있었던가?


 

뒤 늦게 김명성시인과 뮤지션 김상현씨가 큼직한 아코디온을 들고 나타났다.

위문공연을 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재기의 축하공연으로 돌리고 싶다.

아코디온으로 셀브루의 우산을 켜는데, 얼마나 애잔하고 슬픈지, 눈물 날라 하더라.

이청운씨의 눈시울을 바라보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듯 슬퍼보였다.

그러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음률에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뒤이어 김상현씨의 변주곡인 동백아가씨를 연주할 즈음에는 작업실을 살펴 보았다.

힘들었던 지난한 과정들이 한 눈에 읽혀졌다.

자리에 누운 3년 동안,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성 작품들이 즐비했다.

나란히 메달린, 물감에 짓 이겨진 팔레트 행렬이 정겹고,

마무리 못한 채 이젤에 기대선 그림도 정겹더라.

비록 모든 게 정지되어 있었지만바로 이청운의 색깔이고 분위기였다.



느닷없이 이청운씨가 아내더러 뭘 가져오라 재촉하니, 여러 점의 판화를 가져왔다.

아픈 몸으로 판화에 서명까지 한 액자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선물로 주겠다며 한 점씩 가져가라는 뜻밖의 배려에 잠깐 어리둥절했다.

아마 그의 그림이 비싸게 팔려나가 친구들에게 그림 한 점 선물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누가 먼저 세상을 하직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의 벽에 걸려 이청운을 오래도록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년 봄에는 비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지라도 인사동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인사동 유목민으로 돌아와야 했다.

녹번동의 '서부감자탕'에서 소주 한 잔할 생각이었으나,

'유목민'의 전활철씨가 별도의 음식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덕분에 푸짐한 안주로 호사하며, 또 다시 한해를 보내는 송년을 밤을 인사동에서 즐겼다.

곧 닥쳐 올 십 팔년에는 인사동과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도 따뜻한 봄바람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램 하나가 있다면, 이청운씨의 작품을 한 곳에 관리하며 보살펴 줄 미술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림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부산시에서 이청운미술관을 건립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여지 것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로서 이만한 역량과 개성을 보여준 작가가 있었던가?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만, 빠른 추진을 부탁하고 싶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 조문호

    























































 

 


단짝 Buddy-buddy


박형진展 / PARKHYUNGJIN / 朴炯珍 / painting
2017_0621 ▶ 2017_0705 / 일요일,공휴일 휴관



박형진_너에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8×227.5cm_201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1016i | 박형진展으로 갑니다.


박형진 카페_http://cafe.naver.com/munijini.caf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공휴일 휴관



노화랑GALLERY RHO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관훈동 103번지)

Tel. +82.(0)2.732.3558

www.rhogallery.com



반려동물과 보낸 정원에서의 일상 ● 박형진의 그림은 재현회화지만 그 형상화 하는 어법이 좀 특이하다. 상큼하고 감각적이며 앙징맞도록 간추려 도상화 한 형태는 실제성에서 벗어나있고 그것들의 크기는 다분히 왜곡되고 역전된다. 입가에 웃음을 거느리게 하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키우며 더없이 맑고 예쁜 이미지들이 귀엽게 출현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소녀나 개의 형상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잎사귀와 새싹, 딸기나 사과 등이 중심부를 가득 채웠다. 그러면 그와 함께 등장하는 다른 것들은 지나치게 작게 위치해있다. 모든 게 단순, 간략하게 추려지고 자의적으로 변형되었으며 만화나 삽화이미지에 근접해있다. 다분히 '팬시'하고 감각적인 면도 모성애적으로 감싸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반려견과 애완동물, 주위의 식물들을 사랑스럽게 보살피고 그것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는 과정 그 자체를 자신만이 형상 언어로, 이미지로 수집하고 기록하듯이 그린다. 이 행위는 단지 특정한 회화적 행위, 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반려견과 애완동물의 보살핌, 사랑과 희생 혹은 나 이외의 다른 존재, 생명체에 대한 이타적 배려란 자아 중심이나 인간 본위의 세계관과는 사뭇 다른 관점이 따스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런 작가의 시선과 마음이 사뭇 유달라 보이는 것이다.


박형진_너와 함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1.7×91.2cm_2017


박형진_너와 함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1.7×91.2cm_2017


몇 가지 원색만이 시원하고 대담하게 칠해져있어 평면성이 강화되어 있는 화면에는 부드럽고 약간 눅눅해 보이는 중간 톤의 윤곽선에 의해 형태들이 그려져 있다. 배경은 하늘과 흰 구름, 붉은 땅, 녹색의 풀밭이 거의 전부다. 심플하다. 그 사이로 사람(소녀)과 개만이 한 쌍을 이루면서 흡사 인간과의 관계인 것처럼 다양한 사이를 풍경처럼 연출한다. 자신의 작은 정원 혹은 작업실에서 반려견과 함께 보내는 비근한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이 문득 그림으로, 마치 싱그러운 아침의 새싹들처럼 '쑤욱' 올라온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은근히 마음이 좋아진다. 의도적인 연출이나 장식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그린다면 나오기 힘든 '씬'이다. 그러니까 삶과 마음이 진실 되게 기울어져야 가능한 그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박형진_심쿵멍멍+아이신나+심쿵멍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3cm×3_2017


이렇게 작가는 인간과 자연, 생명체 간의 교감을 여러 정황적인 풍경으로 보여준다. 자신과 자신의 반려견, 그 둘이 관계를 맺으며 사는 다양한 양상들을 달콤한 꿈처럼 그려내고 천진한 상상력으로 서술한다.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의 무식적인 분출이거나 낮 시간 동안 겪어낸 수많은 경험들을 추려나가는 과정에서 빚어져 나온 것일 텐데 박형진이 보여주는 '꿈같은 장면'은 자신의 반려견 그리고 식물성의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더 나아가 그것들을 진정으로 자신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밀려나온 행복에 대한 희망/꿈일 것이다. 작가는 인간이 아닌, 인간의 몸과 언어를 지니지 못한 것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에서의 소소한 경험, 꿈, 기억을 인상적으로 가꾸어낸다. 삶의 공간을 정원으로 여기고 그 안에 자신과 함께 하는 것들을 배치하고 작물을 심어 가꾸듯이 그려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의 작업 주제는 '정원'이었다. 아버지의 옥상정원에서부터 시작해 사과농사를 짓는 시골의 과수원(정원), 개와 고양이를 돌보는 양평의 작업실 공간(정원) 풍경으로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정원은 파라다이스에서 연유한다. 사막으로부터 나무와 풀과 물이 있는 인위적인 공간을 조성하고 그 안에서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낙원, 파라다이스를 가설한 것이 정원이었다. 그것은 외부와 둘러친 의도적인 벽이다. 불모의 환경에 저항하는 공간이자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화한 흔적이다.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 속에 있는 정원이란 단어의 어원(ghorto, 라틴어로는 hortus)을 보면, 정원은 우선적으로 닫힌 장소를 지시한다. 정원은 주위의 고장에서 분리되고 끊기면서 내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이는 본질적으로 경계를 필요로 하니, 이 경계로 인해 그 안의 자연은 보호를 받고, 그리하여 자체적으로 완성되면서 다듬어져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정원은 스스로를 억제하면서 격리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박형진의 정원이란 자신의 사랑스러운 반려견들과 행복을 도모하는 적극적인 공간이자 뭇생명체와 교감하고 관계를 설정하고 서로 배우고 참고 견디며 조금씩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키우는 장소성으로서의 의미가 짙다. 우리는 누구나 참혹한 외부와 격리된 자신만의 정원에서 사랑스런 대상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이해하고 싶고 나아가 행복해지기를 꿈꾼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동물, 식물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박형진_좌쥐우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3cm_2017


박형진_설탕 뿌린 딸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1x45.7cm_2016
박형진_설탕 안 뿌린 딸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1x45.7cm_2016

근대에 들어와 개는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 인간의 파트너로서 사랑을 받는 애완동물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사적인 영역에서 개를 기르는 사람들은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의 부작용을 보완하는 수단으로써 개를 다룬다. 인간이 현대 사회의 소외 조건들로 인하여 갈수록 고립되어 외로운 처지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개는 애완동물이자 자녀의 대용물로 격상되고 있으며, 그 붙임성 덕분에 인간의 일상생활에 활기를 넣어주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갈수록 계산된 목적성을 띠면서 냉랭한 소외감을 드러내는 시대에 처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율적이고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상호간에 그와 같은 접촉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조건 없이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애완동물을 점점 더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굴곡심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질 때 개는 그 빈틈으로 파고 들어와 대체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와의 피로감 높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대신해 그 자리를 반려동물로 대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무한경쟁사회로 초래된 인간간의 피로감, 굴곡 심한 감정의 교류와 왜곡되고 피곤한 소통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인간에 대해 여러 환멸을 지닌 사람들이 인간 대신 차라리 언어적, 문자적 소통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려동물을 사랑과 애정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정황의 방증이다. 인간과의 매우 까다롭고 성가시며 공을 들여야 하는 감정적, 언어적, 욕체적 관계에 절망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상처받지 않는 반려견과의 관계를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인간에서 벗어나거나 스스로가 타자화 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반려동물과의 소통은 인간간의 제도적 소통(언어, 문자 등)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반려동물들은 인간이 안기는 여러 잔인한 상처와 배신, 치욕 대신 즐거움과 위안을 준다. 물론 그만큼 배려와 돌봄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저마다 행복하게 살고 싶고 외롭지 않기 위해 반려동물에 집착하고 있는 이 현상은 결국 그만큼 현대인들이 인간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러니 박형진의 그림은 반려견을 키우고 사랑하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출발해 사뭇 보편적인 사회현상 또한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귀여운 강아지가 가족의 일원이 되어 고독과 외로움, 상처를 치유해주면서 삶에 커다란 낙이 되고 자신의 삶에, 감수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나아가서는 희생과 사랑, 배려와 관계 등에 대한 성찰 까지 동반해주는 여러 정황 등을 효과적으로 '시각화' 하고 싶은 것이다. 다채로운 표현기법에 대한 고민의 흔적, 그러니까 비교적 단순한 화면에 회화적인 터치와 붓놀림을 슬쩍 강조하거나 표면의 감각적 효과에 대한 고려 등이 그런 시각화의 흔적으로 다가온다. 단순하고 명료하면서도 표면의 회화적 질이 상당한 감각을 발생시키는 그림이 그것이다. ■ 박영택



Vol.20170621b | 박형진展 / PARKHYUNGJIN / 朴炯珍 / painting



류충렬 (화가)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병수 (환경미술가)  (0) 2017.01.16
김문호 (사진가)  (0) 2017.01.07
신승복 (한국화가)  (0) 2016.07.27
이희용 (화가)  (0) 2016.07.27
안성환 (조각가)  (0) 2016.07.27

순수한 쾌락과 자기애愛
이귀란展 / LEEKWIRAN / 李歸蘭 / painting
2016_0914 ▶ 2016_0919


이귀란_순수한 쾌락I_캔버스에 콘돔,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1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0113a | 이귀란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협찬 / 유니더스(UNIDUS)


관람시간 / 10:00am~07:00pm

* 9월 15일, 추석당일은 12:00부터 오픈합니다



가나아트 스페이스G

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6(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구강기의 아기들은 쾌락과 만족을 위해 관심 있는 사물이나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넣는 행동을 주로 한다. 그런 아기들의 행동을 보며 입을 통해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고 그것이 인간의 첫 발단 단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기가 느끼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것을 '순수한 쾌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귀란_환상과 욕망I_단열 매트에 혼합재료_178×100cm_2016


이귀란_환상과 욕망V_단열 매트에 혼합재료_187×101cm_2016


이귀란_환상과 욕망IV_단열 매트에 혼합재료_196.5×107.5cm_2016


모든 사람들은 구강기의 아이와 같은 쾌락을 가지고 있으나 성인이 되면서 순수한 쾌락과 욕망은 다른 것들에 밀리거나 숨겨야 할 욕망이라 판단되어 드러나지 않는다.


이귀란_순수한 쾌락II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뽁뽁이, 콘돔_193.9×130.3cm_2016


이귀란_순수한 욕망I_캔버스에 콘돔, 아크릴채색_130.3×193.9cm_2016



이귀란_성에 대한 욕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3.9cm_2016

하지만 나는 성인이 되어 아이와 같은 순수한 욕망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아기들의 '순수한 쾌락'이야 말로 내가 표현하고 싶고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와 같다고 판단되어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림 속에 나오는 커튼은 성에 대한 나의 환상과 그런 욕망을 외부로부터 지키고 감추는 장치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 커튼 속에서 남근을 가지고 입과 손을 이용하여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끼는 아기들의 순수한 모습은 '순수한 쾌락'이 만들어내는 애착적 놀이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귀란_사랑l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91cm_2016


이귀란_사랑ll_종이에 혼합재료_144×41.5cm_2016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을 다니며 보았던 연꽃은 나의 순수한 어린 시절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아기들의 순수한 욕망을 담아내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연꽃 속에서 노는 아기들의 모습은 순수한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는 나 자신의 모습의 반영이며 나의 '자기愛'의 상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귀란_즐거운감각_액자에 콘돔, 레진_65×75×5cm_2016

이런 시각적 표현과 함께 현대인들의 성에 대한 욕망과 쾌락을 직접적으로 담아내고자 콘돔을 사용하여 성에 대한 순수하면서도 직설적인 내용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시멘트, 라텍스, 우레탄 등과 같은 질감이 살아 있는 독특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촉각적으로 느끼는 감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았다. ● 이런 재료들이 서로 결합되는 과정에서 우연성으로 만들어진 결과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이 우연히 입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을 즐기는 '순수한 쾌락'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 이귀란



Vol.20160914a | 이귀란展 / LEEKWIRAN / 李歸蘭 / painting



길종갑 (화가)

'인사동 정보 > 인사동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희용 (화가)  (0) 2016.07.27
안성환 (조각가)  (0) 2016.07.27
황세준 (화가)  (0) 2016.07.21
이지하 (사업가)  (0) 2016.07.04
류정호 (목공예가)  (0) 2016.06.25

대전아트센터 쿠, 오는 9월 2일까지


▲정복수 作


‘골프존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정복수의 80년대 특별전‘ 개막식이 지난 7일 오후7시 대전 ‘아트센터 쿠’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작가 내외를 비롯하여 김영찬 골프존문화재단이사장, 화가 박건 씨 등 1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작가의 아들 정상이 군이 이끄는 4인조밴드 ‘안녕의 온도’가 나와 멋진 축하 연주도 해 주었다.





▲정복수 作


이 전시는 작가 정복수의 1980년대 작품들을 보여주는 전시다. ‘몸의 지도’라는 부제 아래 억눌린 인간의 본성 표출이나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탐욕의 인간사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1979년 전시부터 여지껏 인간의 절단된 몸만 다루어 오고 있다.



▲정복수 作


언젠가 안성의 어느 산 아래 자리 잡은 그의 외딴 작업실에 들린 적이 있는데, 마치 음습한 정형외과를 연상시켰다. 홀로 외롭게 틀어 박혀, 세상 사람들을 주시하며 인간상을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실 곳곳에 가죽이 벗기고 사지가 잘린 육신들이 프레임 속에서 너덜거리고 있었는데,  탐욕에 가득 찬 인간들의 위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판은 그의 평생 화두였다.



▲정복수 作


그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생 시절의 스케치북에도 사람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인간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 이후 홍익대에 진학하며 잠재적 문제의식이 고개들었는데,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중반의 사회문화적 허위의식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되었다.



▲정복수 作


충격적인 그로테스크로 화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3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해 온 결과, 한국현대형상 회화에 큰 획을 긋게 된 것이다.

정복수는 신체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내면에 잠재된 본능을 끄집어낸다. 신체 절단의 부정성이나 원초적인 동물성보다 오히려 유기체로 이해되는 신체 너머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기도 한다.



▲정복수 作


그리고 분절된 팔이나 목에서 내뿜어지는 힘찬 줄기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절단과 훼손에 따른 핏줄기가 아니라 해방의 내파가 진행 중임을 알리는 에너지 줄기라는 것이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잘린 신체의 목들이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양면성으로 위장된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욕망만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영혼들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림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림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공간을 넘는 것으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정복수 作


그리고 80년대 이후부터 화면이 보다 구체적이고 폭이 넓혀져 관찰자로서의 치밀함과 부드러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캔버스 오브제 입체 색연필 드로잉을 이용한 대형 설치작품 등 기법과 형식에서도 다양성을 띤다. 외형상 절단되고 왜곡되고 기형화되어 있어도 매우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의 육체는 ‘보여주는 육체가 아니라 말하는 육체'라고도 말했다.



▲정복수 作


작가는 "내가 그리는 ‘몸’은 잃어버린 생각들을 찾고 몰랐던 것을 알기 위해 떠나는 무전여행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확장할 것이라고도 했다.

 

▲정복수 作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는 정복수 그림을 이렇게 말했다. “정복수의 작품 속에서 정신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정한 실존의 조건이 되어 관객을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는 이내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애달프다. 그렇게라도 살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의 고귀한 신체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들이 서글플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찌르는' 정복수의 그림이 안겨주는 소중한 덕목이 바로 이 것이다.”



▲작품 앞에서 작가 정복수 씨.


이 전시는 9월2일까지 이어진다.


조문호 기자/사진가


‘골프존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정복수의 80년대 특별전‘ 개막식이 지난 7일 오후7시 대전 ‘아트센터 쿠’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작가 내외를 비롯하여 김영찬 골프존문화재단이사장, 화가 박 건 등 100여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작가의 아들 정상이군이 이끄는 4인조밴드 ‘안녕의 온도’가 나와 멋진 축하 연주도 해 주었다.

이 전시는 작가 정복수의 1980년대 작품들을 보여주는 전시다.

‘몸의 지도’라는 부제아래 억눌린 인간의 본성 표출이나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탐욕의 인간사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라는 믿음으로,

1979년 전시부터 여지 것 인간의 절단된 몸만 다루어 오고 있다.

언젠가 안산의 어느 산 아래 자리 잡은 그의 외딴 작업실에 들린 적이 있는데, 마치 음습한 정형외과를 연상시켰다.

홀로 외롭게 틀어 박혀, 세상 사람들을 주시하며 인간상을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실 곳곳에 가죽이 벗기고 사지가 잘린 육신들이 너덜거리고 있었는데,  

탐욕에 가득 찬 인간들의 위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판은 그의 평생 화두였다.

그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생 시절의 스케치북에도 사람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인간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 이후 홍익대에 진학하며 잠재적 문제의식이 고개들었는데,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중반의 사회문화적 허위의식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되었다.

충격적인 그로테스크로 화단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30년이 넘도록 줄기차게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해 온 결과, 한국현대형상 회화에 큰 획을 긋게 된 것이다.

정복수는 신체에 대한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표현을 통해 인간내면에 잠재된 본능을 끄집어낸다.

신체 절단의 부정성이나 원초적인 동물성보다 오히려 유기체로 이해되는 신체 너머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분절된 팔이나 목에서 내뿜어지는 힘찬 줄기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절단과 훼손에 따른 핏줄기가 아니라

해방의 내파가 진행 중임을 알리는 에너지 줄기라는 것이다.

전시장을 돌아보니 잘린 신체의 목들이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양면성으로 위장된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욕망만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영혼들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림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림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공간을 넘는 것으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부터 화면이 보다 구체적이고 폭이 넓혀져 관찰자로서의 치밀함과 부드러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캔버스 오브제 입체 색연필 드로잉을 이용한 대형 설치작품 등 기법과 형식에서도 다양성을 띤다.

외형상 절단되고 왜곡되고 기형화되어 있어도 매우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의 육체는 ‘보여주는 육체가 아니라 말하는 육체'라고도 말했다.

작가는 내가 그리는 ‘몸’은 잃어버린 생각들을 찾고 몰랐던 것을 알기 위해 떠나는 무전여행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확장할 것이라고도 했다,

미술평론가 유근오씨는 정복수 그림을 이렇게 말했다.
“정복수의 작품 속에서 정신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 진정한 실존의 조건이 되어 관객을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는 이내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애달프다. 그렇게라도 살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의 고귀한 신체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들이 서글플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찌르는“ 정복수의 그림이 안겨주는 소중한 덕목이 바로 이 것이다.”

이 전시는 9월2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공연도중 하늘 위의 구름이 붉은 빛깔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비가 내렸다.



























+ Recent posts